준치(鲥鱼Tenualosa reevesii)와 충청도 http://blog.daum.net/han0114/17050005
서쪽변방(西邊)-대마도 조선서쪽변방에 위치 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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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渤海)와 합천(陜川)은? http://blog.daum.net/han0114/17049653
청일전쟁 (First Sino-Japanese War)이 주는 혼란 http://blog.daum.net/han0114/17049833
황해해전(黄海海戦, sino-japanese war 清日戦争) http://blog.daum.net/han0114/17048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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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서(湖西)와 해서(海西)가 숨기고 있는 역사들
참 이상한 것은 대륙조선과 연계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농후한 지명들을 찾다보면 전부가 지금의 대만과 연결된다. 이러한 현상을 의도된 것이라고 판단 할 수 있지만 너무 노골적으로 대륙조선과 관계되는 지명들을 대만에 집중시킨 것에서 실로 안타까움을 토로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대륙조선을 찾는데 상당한 장애가 되는 게 사실이다.
어떨 땐 허탈감 마저 든다.
대만으로 쫓겨 들어간 장개석이가 대륙지명들을 함께 끌고 들어 간 것으로 해석 할 수 있어진다.
그렇다면 장개석은 어떤 의도가 있었을까?
한간에는 장개석이 대륙조선 사람이라는 말도 없지 않다.
호서(湖西)와 해서(海西)
한문 뜻 그대로 해석하면 호서(湖西)는 호수의 서쪽이고 해서(海西)는 바다의 서쪽이다.
모두 서쪽을 말한 것인데 영역범위는 크게 차이가 난다.
즉 호서(湖西)라 하는 것은 호수의 서쪽이라 하여 범위를 호수 근역으로 한정지은데 반해 해서(海西)는 서쪽 바다라고 칭할 수 있는 전역을 지칭한 것이라 영역범위가 호서보다는 넓다고 해야 한다.
원래 호서(湖西)는 엄청난 크기의 호수를 중심으로 호남(湖南)이나 호북(湖北), 호동(湖東)등으로 불리었겠지만 한반도에는 양호(兩湖)가 없는 전라도라 하는 호남(湖南)밖에 없다.
엄청난 크기의 호수(湖水)가 없었던 한반도는 처음부터 호남(湖南)이라고 불릴 수 있는 지형조건이라고 볼 수가 없다.
물론 호서(湖西), 호북(湖北), 호동(湖東)도 없다.
사전을 찾아보니
한어사전에는 양호(兩湖). 대륙후난(湖南)과 후베이(湖北). ‘湖南和湖北’의 줄임말이라 하였다.
그런데 한반도 번역자들은 양호(兩湖)를 호남과 호서라고 우긴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정약용이 관제 개혁과 부국강병을 논한 책 경세유표에 호서(湖西)에 나는 물고기라 했는데 한반도에 호서는 어디를 호서라 했을까?
호남의 서쪽을 호서라 했다?
지금의 충청도를 호서라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반도에는 호서라고 할 기준 즉 호수가 없다.
그리고 한반도 호남은 그렇다 치고 충청도가 호서라고 하는 것은 매우 이상한 지칭이다.
전라도가 호남이면 충청도는 호북(湖北)이라 해야 한다.
아귀가 맞지 않는다.
그렇다면 정약용 경세유표에 무엇을 가지고 호서(湖西)라고 했을까?
한반도가 아니면 그럼 대륙으로 가보자.
대륙에는 '5호4해'라는 단어가 있다.
5호(五湖)는 동정호(洞庭湖),파양호(鄱阳湖),태호(太湖),청해호(青海湖),홍택호(洪泽湖)이고
四海 : 溥,普遍。 四海,即东海,西海[现今的黄海],南海,北海[现今的渤海]
4해(四海)는 보편적으로 동해(东海),서해(西海)[现黄海],남해(南海),북해(北海)[现渤海]이다.
먼저 현재 중공행정구역상 대륙에서 호서(湖西)라고 일컫는 곳은 5호(五湖) 중 태호(太湖)를 중심으로 하는 호주(湖州)가 현 절강성(浙江省)에 있다하여 절강성 서쪽 즉 태호(太湖) 서쪽을 지칭한다.
그러나 이것 역시 지정된 것이 중공정부가 성립 될 때(中华人民共和国成立前夕的)인 1949년8월20일이라 그 이전 지명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이전 호남, 호북, 호서로 불리던 곳은 동정호(洞庭湖)와 파양호(鄱阳湖)를 깃점으로 한 것이라고 판단된다.
왜냐하면 지금도 후난(湖南)과 후베이(湖北)이라 하고 그곳에 바로 동정호와 파양호가 있기 때문이다.
옛 도(道), 성(省) 지명(地名)에 호(湖)자를 붙일 정도가 되려면 적어도 대륙 호수정도가 되어야 궤가 맞다.
그런데 한반도 호남 어디에도 최근에 만들어진 인공적인 호수 말고 존재하는 것이 없다.
때문에 정약용이 경세유표에서 말한 호서는 대륙에서 찾아야 마땅한 것이다.
또 하나 우리가 분명히 알고 넘어가야 하는 사실은 옛 충청도가 호서로 통했다는 사실이다.
붉은 표시가 동정호(洞庭湖)와 파양호(鄱阳湖). 푸른표시는 태호(太湖)와 홍택호(洪泽湖), 청해호(青海湖)
古代朝鲜八道之一忠清道传统又称湖西地方,即为今日韩国境内日之忠清北道、忠清南道。
위는 한어자료에 나오는 문장인데 전통적으로 조선8도에서 충청도를 호서지방이라 했다고 나온다.
분명 충청도가 호서(湖西)란 말이다.
그런데 뒤에 친절하게도 한국 경내의 충청북도와 충청남도를 지정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아무래도 무엇인가에 찔리는지 중공학자들이 대륙과 다르다고 선을 긋고 강한 부정을 하고 있는 느낌이 없지 않다.
어찌하여 대륙에서는 우리의 역사가 지형적으로도 통하는데 한반도에서는 감조차 찾을 수 없는 난맥으로 빠지는가?
이와 같은 형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옳을까?
한반도에 호수가 있거나 말거나 서남쪽에 호남이란 지명이 버젓이 존재함에도 지형적인 방향을 무시한체 지금의 충청도를 호서라고 고집하고 알고 있으니 참으로 기이하고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즉 호서(湖西)는 한반도에는 지형적으로 맞지 않고 이치에도 없는 지칭이라 결론 내릴 수 있다. 그렇다면 경세유표에 호서라 하는 곳은 바로 대륙 호서(湖西)를 말하는 것이며 전통적으로 충청도라고 판단되는 지역이다.
또 해서(海西)에서 보면
黄海道本道传统上又称海西
원래 황해도를 전통적으로 해서(海西)라 지칭했음을 알 수 있다.
四海 : 溥,普遍。 四海,即东海,西海[现今的黄海],南海,北海[现今的渤海]
그런데 위 한어자료에서 사해(四海)를 보편적으로 동해(东海),서해(西海)[现黄海],남해(南海),북해(北海)[现渤海]라 하고 있다.
여기서 해서(海西)를 밝히기 전에 서해(西海)와 해서(海西)가 같은 것인가 하는 물음이다.
적어도 반도역사는 그렇게 두루 뭉수리 황해도로 묶어 해석하였고 글이 뜻하는 본질을 희석시키며 정확성을 잃고 말았다.
분명 황해도(黄海道)를 해서(海西)라고 칭했다하는데 한반도 지형에서는 맞지 않는다.
좀 더 정확하게 문자 뜻풀이를 하자면 서해가 있고 그 바다 서쪽이 바로 해서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한반도 서해를 넘어 대륙산동반도가 바로 황해도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때문에 옛 사서에서 말한 해서(海西)는 지금의 한반도 황해도(黄海道)가 아니다.
또 해서와 함께 서해를 보아야 하는데
한어자료를 보면 대륙 사해(四海) 중 서해(西海[现今的黄海])는 현재 황해(黃海)라 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우리가 알고 있는 황해(黃海)는 한반도와 대륙사이에 있는 황하하구에서 동지나해 우리가 한반도를 기준으로 서해라고 하는 바다를 지칭한다.
동서남북 방향을 정확하게 따진다는 대륙에서 한반도기준으로 한 서해(西海)에 동해(동지나해), 발해(북해)를 겹쳐 집어넣는 무리를 하면서 하나의 바다를 세 바다로 나누어 지칭하지는 않았다면 위 한어자료에서 말하는 황해는 지금의 황해(黄海:대륙동쪽)가 아니고 또 다른 황해(黃海:대륙서쪽)가 존재 했음을 짐작 할 수 있다.
도대체 대륙서쪽에 존재한 서해 즉 황해는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수수께끼다.
이것만 밝혀진다면 임진왜란(1592) 발발지역과 강화도에서 일어난 병인양요(1866), 신미양요(1871), 청일전쟁 시발이라고 하는 황해해전(黄海海戦 1894)이 밝혀지는 것이며 반도사관이 굳어지게 한 이 충돌이 한반도에서 발발되었다는 근원적인 사실이 거짓이었음을 명쾌하게 밝힐 수 있는 단서가 될 수 있다.
대륙서쪽 황해를 찾으면 대륙조선 황해도를 찾을 수 있는 것이고 대륙조선의 서변(西邊)을 찾아 대마도와 압록강도 찾을 수 있다.
지금까지 본 블로그가 모든 자료를 분석함에 있어 어쩌면 발해(渤海)를 서해(西海)라고 하였다는 옛 사서의 기록이 정확하다면 티벳과 청장고원이 광활한 수원지로 손색이 없어 예부터 바다라 칭할 수 있었을 것이며 그 수원지에서 운남, 인도차이나반도사이로 흐르는 황토 물이 그냥 강으로 보지 않았을 것이란 판단도 있고 동시에 황하상류지역에서 생성되는 황토물이 황해의 근원이 될 수 있음도 짐작하게 한다.
위 지도를 보면 서해군이라고 표시한 곳이 바로 청해 서쪽 옆이다.
그렇다면 서해가 어딘지 알 수 있다.
분명 이러한 근원들이 대륙서해(西海)가 될 수 있고 황해라 했을 가능성이 많다.
우리가 심각하게 감안 할 것은 근세기 역사새판짜기에 모사꾼들이 대륙조선을 한반도조선으로 갑자기 둔갑시키려면 무슨 일을 추진해야 할 것인지 곰곰이 생각 할 수 있으면 좋겠다.
눈에 보이는 것은 많으나 아직 애써 찾을 것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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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조보감 제31권
선조25년(임진, 1592)
○ 2월. 대장(大將) 신립(申砬)과 이일(李鎰)을 파견하여 각 도의 병기 시설을 순시하도록 하였다. 이일은 양호(兩湖 호서(湖西)와 호남(湖南))로 가고, 신립은 경기(京畿)와 해서(海西)로 갔다가 한 달 뒤에 돌아왔다
경기와 해서는 같이 붙어 있다고 해야 한다.
세종 때 편찬계획을 세워 1909년(융희 2) 완간되었다. 세종의 명을 받은 권제(權踶)·정인지(鄭麟趾) 등은 태조·태종 보감 편찬에 착수했으나 완성하지 못하였다. 이를 계승한 세조는 1457년(세조 3) 수찬청(修撰廳)을 두고 권람(權擥)·신숙주(申叔舟) 등으로 하여금 태조·태종·세종·문종 4조의 세칭 《사조보감(四朝寶鑑)》을 간행하게 하였으며, 이듬해 완성하였다. 1684년(숙종 10) 이단하(李端夏) 등이 선조 1대의 사적을 정리하여 《선묘보감(宣廟寶鑑)》 10권을 만들었고, 1730년(영조 6)에는 이덕수(李德壽) 등이 숙종 1대의 사적을 편찬하여 《숙묘보감(肅廟寶鑑)》 65권을 완성하였다.
1782년(정조 6) 조경(趙璥) 등이 정종·단종·세조·예종·성종·중종·인종·명종·인조·효종·현종·경종 및 영조의 보감편찬에 착수, 이미 완성된 《사조보감》 《선묘보감》 《숙묘보감》을 합한 《국조보감》 68권(별편 7권이 있음)을 완성하였다. 1847년(헌종 13) 조인영(趙寅永)·정원용(鄭元容) 등이 정조·순조·익종의 보감을 편찬, 이듬해 《삼조보감(三朝寶鑑)》을 완성하여 《국조보감》 82권(이 밖에 별편 10권이 있음)이 편찬되었다.
1908년(융희 2) 이용원(李容元) 등이 규장각에서 헌종·철종의 보감편찬에 착수하여 이듬해 완성함으로써 총 90권 28책이 되었다. 제왕학 연구에 도움이 되나 수식과 과장이 많은 것이 흠이다. [네이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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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기요람(萬機要覽)
재용편 3
이획(移劃)
균역청(均役廳)이 설치된 초에는 여러 도 감영(監營)의 솔권(率眷)을 명(命)으로 못가게 하고, 선혜청(宣惠廳)의 다달이 정한 예에 의하여 국왕에게 토산물을 바치는 것을 감하여 그 영에 수용(需用)되는 쌀 곧 감영의 안식구[內眷]에 수용되는 충청남북도[湖西] 500석, 전라도[湖南] 400석, 경상도[嶺南] 100석 과 다달이 정한 예에 의하여 바치는 공물 값을 대신할 쌀 곧 토산물을 진상하는 물종(物種) 값. 수효(數爻)는 아래에 있다 을 균역청에 부속시키고 또 세출할 삼남의 저치(儲置)한 쌀 호서ㆍ영남 각 3,000석, 호남 4,000석 선혜청의 세작목(稅作木)호서 26동 18필, 호남 2동 2필, 영남 61동 36필, 관동 포(布) 9동 44필 은 급대(給代)의 수용(需用)을 보조하였다. 그 후에 세작목ㆍ저치미와 영수미(營需米)를 옮겨 획급(劃給)하는 규례(規例)가 따라서 정지(停止)되어 시행되지 못하였고, 저치미를 군문(軍門)에 나누어주는 방법에 이르러서는 변경하여 고치기 어려우므로 균역청으로부터 값을 주어 취하여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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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기요람(萬機要覽)
재용편 5
희생(犧牲)희생(犧牲)국가에서 행하는 묘(廟)ㆍ사(社) 등의 제사지낼 때에 바치는 짐승, 소ㆍ양ㆍ돼지를 말함.
희생
○ 원공(元貢)은 황우(黃牛) 3마리 한 마리에 쌀 25석. 흑우(黑牛) 45마리 외공(外貢) 인데, 거제(巨濟) 5마리와 제주(濟州) 40마리를 호서(湖西 : 충청남ㆍ북도) 각읍에서 나누어 사육하여[分養于湖西各邑] 수용에 따라 바치는데 한 마리에 역가(役價)는 쌀 1석 3두. 무명 1필(疋)임. 선혜청(宣惠廳). 양 79마리[口] 한 마리에 삼남(三南 : 호서ㆍ호남ㆍ영남)ㆍ경기 쌀 20석, 양서(兩西) 15석, 북관(北關 : 함경남ㆍ북도) 5승포(升布)ㆍ4승포를 합(合)하여 1동(同) 7필. 염소[羔] 16마리 한 마리에 호서 쌀 7석 7두, 경기 6석 10두. 돼지[猪] 615마리. 한 마리에 쌀 6 석(石)
만기요람(萬機要覽)1808년(순조 8)에 편찬되었으며, 사본에 따라 권수는 일정하지 않다. 가장 정확한 것으로 뽑히는 규장각도서의 집옥재본(集玉齋本)은 <재용편(財用篇)>이 6권에 6편 62절목, <군정편(軍政篇)>이 5권에 5편 23절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러 필사본으로 전해지던 중 조선총독부 중추원에서 1938년에 활자본을 간행하였고 민족문화추진회에서 1971년에 번역본을 냈다. [네이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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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시문집 제14권
발(跋)
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에 발함
위의 황산대첩비 한 첩(帖)은, 곧 우리 강헌대왕(康獻大王 이 태조(李太祖)의 시호)이 잠저(潛邸)시절에 왜구(倭寇)를 정벌하러 나가 남원(南原)의 황산(荒山)골짜기에서 왜장(倭將) 아기발도(阿只拔都)를 죽이고, 드디어 큰 승첩을 거두었으므로, 비(碑)를 세워 그 공적을 기록한 글이다.
옛날 내가 황산을 지나다가 이 비문(碑文)을 읽어 보고 또 아기발도와 치열하게 싸웠다는 곳을 보았는데, 대체로 깊고 큰 골짜기로서 숲이 우거진 험악한 지역이었다. 왜인(倭人)은 본디 보전(步戰)에 익숙하였고 우리는 보전에 약하였는데, 더구나 그런 산골짜기에서는 말을 달릴 수가 없는데도 승첩을 거두었으니, 그 승첩을 거둔 것은 신통한 무용(武勇)에서 온 것이지 단순한 인력(人力)으로 된 것은 아니다. 세상에서 ‘왜인들이 계곡에 피를 많이 흘려서 계곡의 돌빛이 지금까지도 빨갛게 물들었다.’고 전해오고 있으나, 자세히 살펴보니 이는 본래부터 붉은 돌이지 피로 물들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일찍이,
“남도(南道)의 관방(關防)은 운봉(雲峯)이 으뜸이고 추풍령(秋風嶺)이 다음이다. 운봉을 잃으면 적(賊)이 호남(湖南)을 차지할 것이고, 추풍령을 잃으면 적이 호서(湖西)를 차지할 것이며, 호남과 호서를 다 잃으면 경기(京畿)가 쭈그러들 것이니, 이는 반드시 굳게 지켜야 할 관문(關門)인 것이다.”
고 논한 적이 있다. 그 당시 아기발도가 운봉을 넘어오지 않았더라면 성조(聖祖 이 태조)께서 어찌 그와 같은 노고를 하였겠는가. 조령(鳥嶺)은 천연적인 요새지이니, 그대로 두는 것이 더욱 견고할 터인데, 무엇 때문에 성(城)을 만들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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