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沙江과 黃山大捷碑 http://blog.daum.net/han0114/17050006
팥배나무(甘棠 Sorbus alnifolia)로 본 조선 http://blog.daum.net/han0114/17050184
만다린(mandarin) 중국관리 http://blog.daum.net/han0114/17048829
한반도 건축물은 왜 독창적 일 수밖에 없었는가?-려강(丽江), 향연(香橼)
http://blog.daum.net/han0114/17049665
심천(深圳)은 부산이고 임진왜란이 발발된 곳인가? http://blog.daum.net/han0114/17049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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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壬辰倭亂)이 말하는 장강(長江)과 주강(珠江)?
장강(長江)은 공격하던 왜적 진로를 차단하고 막은 곳이고
주강(珠江)은 패퇴하여 달아나던 왜적들을 최후 공격하던 곳이다.
임진왜란이라고 하는 만력의 역(萬曆之役1592~1598)
대륙심천을 상륙한 왜구(포르투갈) 주력은 큰 강을 이용 북진 동정호쪽으로 들어가 장강을 점령하고 한성을 공격하였을 것이고
좌로는 서강을 이용 산악지대로 곤명쪽으로 들어 갔을 것이며
우로는 동강을 이용 대륙동부쪽으로 빠져 남경, 항주를 겨냥했을 가능성이 많다.
또 마카오(妈祖阁, 澳門)는 한자 뜻은 해안이 깊어 배를 정박시키기에 적합하다고 여겨지는 장소란 뜻이고 영어로는 만입구 문이라는 "Inlet Gates"이다. 당시에는 지금 홍콩보다 대륙으로 들어 갈 수 있는 입구로 여겼음을 알 수 있고 일찍이 서양인들이 배를 여기에 정박하였다는 말이다.
이 마카오에 포르투갈인들이 어떻게 거주하게 되었을까?
명나라 가정(嘉靖)35년(1557년)에 광동지방정부가 거주권을 허가하였다고 하는데 사실이 그렇다면 왜구가 임진왜란을 일으키기전 사전 정탐 목적을 가지고 거주 허가를 득했다는 것이며 진두지휘를 할 수 있는 본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 하나는 위 년도와는 달리 만력의 역(임진왜란)당시 왜구를 용병으로 하여 뒤에서 조종하던 포르투갈이 패색이 짙을 무렵 중앙정부에 왜구를 빼는 조건을 내세워 이 오문에만 거류하도록 기득권을 유지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러한 국제 정황속에서 결정적으로 임진왜란이 발발되게 된 이유로서 포르투갈이 이때 마카오에 정착하면서부터 무역과 예수회선교 기지로 활용하면서 많은 중국 소년들들 사로잡아 마카오를 통하여 포르투갈에 데리고가 리스본에서 노예로 팔았으며 나머지는 브라질 (포르투갈의 식민지)에 팔았다. 1595년 마침내 이러한 행위를 보다 못한 대륙정부는 법률로 이를 금지하여 노예매매를 막았다.
이 노예매매 금지조치는 포르투갈 이익을 침해하는 것이어서 상당한 자본을 축적한 포르투갈은 대륙정부에게 반발을 하면서 발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심천(深圳, 옛이름 新安)의 대붕소성(大鹏所城) 한어자료에 "大鵬城在明朝洪武二十七年(1394年)建成。在明代(명나라시절때)反抗倭寇(왜구)和葡萄牙(포르투갈)入侵, 清代抗击英殖民侵略者。"이란 문구가 분명히 있다.
대붕성은 명조 홍무27년(1394)에 건립되었으며 명조시대 때 왜구(倭寇)와 포르투갈(葡萄牙)이 반항 또는 저항하여 침입해들어 온 곳이고 청조대에 영국식민침략자들에게 항거(抗击) 즉 저항하여 반격한 곳이기도 하다.
얼마나 더 확실한 자료가 나와야 믿을 수 있는 것인가?
이 자료는 새삼스러운 것이 못된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명확한 자료가 분명히 있음에도 거짓 반도사에만 메달려 있는지 알 수 없다.
반도사학자들은 장강이라고 이렇게 기록한 것임에도 대륙이라고 직접적으로 지칭하지 않았다 하여 대륙이라고 볼 수 없다고 할 것이 뻔하다.
그렇게 일제로부터 치밀하고 철저하게 교육을 받고 훈련을 받은 결과이다.
정말 어처구니가 아닐 수 없다.
정말 먹여줘도 못 먹는 바보 천지들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가 무엇이 복잡고 어려운가?
반도사만 벗어나면 이렇게 간단하게 다 볼 수 있다.
거짓 역사 지식을 좁은 머릿속에 채우려는 것이 어렵고 복잡을 뿐이다.
학봉집 부록 제1권 연보(年譜)에
1.皆垂涕曰。不圖今日。復見漢官威儀。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이르기를, “오늘날에 다시 한관(漢官)의 위의(威儀)를 보게 될 줄은 몰랐다.” 하였다.
이 학봉집은 조선중기의 문신 김성일(金誠一:1538~93)의 시문집을 가르키는 것인데 야후사전에 1649년(인조27) 후손 김시온(金是)과 이홍조(李弘祚) 등의 유림(儒林)들이 가장수록본(家藏手錄本)을 바탕으로 영남 각 읍의 협력을 받아 완성했다 했으며 속집은 임진왜란중에 소실된 유문(遺文)을 수집하여 후손 김주국(金柱國)·김숭묵(金崇默) 등이 이상정(李象靖)과 함께 교열하여 1782년(정조 6)에 간행했다 하였다.
다시 한 번 보았다.
혹 중조(中朝)나 중화(中華)라고 쓰여있지나 않는가? 하고 조심스럽게 보았다.
위 문장에서 분명 중조나 중화따위에 글자가 부첨되지는 않았다.
옛 문헌《後漢書·光武帝紀上》을 보면『不圖今日復見漢官威儀。』이란 문장이 있다.
"한관(漢官)의 위엄이 있고 엄숙한 태도나 차림새를 다시 보는 듯하다" 란 내용이다.
분명 학봉(鶴峯) 김성일(金成日) 지은시집에서 나오는 문장이다.
옛 문헌을 그대로 배껴 쓸 일은 없고 옛 후한서.광무제기(後漢書·光武帝紀)에 기록된 한관(漢官)도 삼한(三韓)사람이며 여기 학봉집에서도 분명 조선(朝鮮)의 관리를 말하는 것이라고 판단된다.
이 한관(漢官)이 바로 근세기에 서양사람들이 중국관리라고 하는 만다린 (mandarin)을 이르는 칭호라고 볼 수 있다.
2.학봉집 부록 제1권 연보(年譜)에
一杯笑指長江水 한 잔 술에 웃으면서 장강 물을 가리키네
長江之水流滔滔 장강 물은 밤낮으로 쉬지 않고 흘러가니
한잔 술에 웃으면서 장강(長江)물을 가리킨다?
한반도에 없는 장강(長江)물을 한잔 술에 웃으면서 어떻게 가르킬까?
또 長江之水流滔滔 장강(長江)물은 쉼 없이 도도(滔滔)하게 출렁거리다 란 문장인데 장강으로 흐르는 물줄기가 눈에 보이는 듯하다.
한관(漢官) 학봉(鶴峯)이 임진왜란 위급한 상황에서 할 일없어 대륙에 있는 강을 한반도 장강인 것처럼 기록하였을까?
분명 장강(長江)물을 직접 바라보고 읊은 것이다.
3.다산시문집 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에 발함에 보면
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金沙江과 黃山大捷碑 http://blog.daum.net/han0114/17050006
황산이라 함은 적어도 위 풍경처럼 지형이 그래야 한다.
황산을 황(荒)으로 볼 것인가 황(黃) 또는 금(金)으로 볼 것인가가 문제이다.
원문에는 분명 황산(荒山)이라 한 것을 보면 황(荒)자가 주는 뜻인 거칠고 황폐한 산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후 중공에서 지명을 바꾸기 위해 누런 황(黃)이나 금(金)을 따 붙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황산은 누런 황폐한 산일 가능성이 많다.
분명 뜻이 내포하는 것은 한반도 지형이라기 보단 대륙지형에 가깝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지리산은 전라도 운봉현(雲峯縣)의 남쪽 60리에 있고 황산(荒山)은 운봉현(雲峯縣)의 동쪽 16리에 있다 하였다.
즉 지리산과 황산은 현(縣) 남(24.4㎞)과 동쪽(6.5㎞)에 나누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황산은 지리산 동북쪽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한반도에 있는 황산은 어디에 있는지 분간 조차 안되는 산이고 위 신증에서 기록한 거리와도 전혀 맞지 않는다.
한반도에 거칠고 황폐한 산이 존재한다니 이상하다.
거칠고 황폐한 이유가 벌거숭이 산만 생각 할 수 있을까?
그러한 산세는 대체적으로 기후가 건조하여 생성되는 자연적인 지형 산세이다.
그리고 운봉현이라고 하면 구름이 끼여있는 산봉오리 란 뜻이고 현(縣)이라고 하면 지금의 시(市)와 맞먹는 행정구역이다.
그런데 한바도에 운봉이 읍이라니...
그럼 남원시가 운봉현인가?
어찌 되었던 한반도 지명은 찾아보면 볼 수록 이상하기만 하다.
위 신증동국여지승람 기록과는 다르게 한반도 지리산은 행정구역 상으로 3도, 1시 4군, 15 면 (전라북도 남원시, 경상남도 함양군과 산청군과 하동군, 전라남도 구례군)에 걸쳐 있다.
또 현 지리산은 남원과 남동쪽 32㎞ 거리에 있고, 산청에서 지리산 주봉까지 15㎞, 함양에서는 20㎞이다.
오히려 남원에 운봉읍이 있을 것이 아니라 방향상으로는 경남 함양에 위치는 것이 맞고 황산은 함양에서 동쪽으로 16리(6.5㎞)에 있어야 맞다.
아래 점필재집 황산이란 제목의 시(詩)를 보면
조선 초기의 문신 김종직(金宗直:1431~92)의 시문집
저자가 죽은 다음해 저자의 문도이며 외생(外甥)인 강중진(康仲珍)이 원고를 수집하고 저자의 처남인 조위(曺偉)가 편집하여 간행준비를 했으나 무오사화로 훼손되었다. 1520년에 강중진이 다시 남은 원고를 정리해 선산(善山)에서 간행했다. 이후 여러 차례 증보·중간되었다.
鴨江紫氣南來銳
압록강의 자기가 신속하게 남으로 오매
압록강의 붉은 기운이 남쪽으로 날카롭게 오다.
薰風自南來 예를 들어 ’훈풍이 남쪽에서 오다’란 뜻과 다르게 자(自)자가 붙지 않으면 ‘남으로’라고 읽을 수 있다. 그렇다면 압록강은 황산(荒山)보다 북쪽에 있어야 하고 황산으로 부터 그다디 멀지 않는 곳에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황산(荒山)은 조선 남쪽에 있었다고 하고 있다.
팥배나무가 자라는 장강(長江) 이남지역을 말하는 것이다.
鯨海斑衣一擧空
큰 바다 오랑캐들이 일거에 섬멸되었네
大;巨大。如:鲸川(大江、大河), 鲸浪(巨浪), 鲸浦(大海;鲸海), 鲸寇(大盗), 鲸钟(古大钟), 鲸溪(大海), 鲸猾(大猾徒), 鲸舟(大船), 鲸音(洪亮之声)
오랑케(왜구)가 나는 큰 바다가 대한해협과 한반도 동쪽 동해를 말하는 것일까?
대륙남해(南海) 고래를 말한 것이다
In China, Yu-kiang(郁江:광서성), a whale with the hands and feet of a man was said to rule the ocean.
고래(鯨)가 나는 바다에 오랑케가 섬멸 되었다고 하였다.
고래(鯨)가 나는 바다에 왜구들이 출몰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그 곳 가까이에 황산(荒山)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점필재집 시집
황산(荒山)
白羽彤弨每櫛風 붉은활과 백우전으로 매양 분주했는데
至今父老說神丰 지금도 부로들이 훌륭한 풍채를 말하누나
鴨江紫氣南來銳 압록강의 자기가 신속하게 남으로 오매
鯨海斑衣一擧空 큰 바다 오랑캐들이 일거에 섬멸되었네
樹木尙銜遺鏃老 수목들은 아직도 남긴 활촉 머금어 늙었고
溪流猶借晩霞紅 시냇물 또한 저녁 놀빛 빌려 불그레하구나
當時祖烈眞無競 당시 태조의 공업은 참으로 겨룰 자 없었는데
何物螟蛉敢自雄 버러지 같은 것들이 감히 잘난 체했단 말인가
아래 한어자료를 보면 금사강(金沙江) 여강시(丽江市) 칠하향(七河乡)인데 그곳에 위치한 황산(荒山)이 있다 한다.
황산곶(荒山串)이라고 풀이 할 수 있는 황산진(黄山镇)도 바로 여강시에 있다.
然要去包一座荒山。这座山位于丽江市七河乡
七河乡位于丽江市古城区正南方向,地处东经100°16′16〃北伟26°45′06〃。乡政府驻地为共和村委会中心自然村, 海拔2232米,离城区17公里,东临金沙江与永胜县大安乡隔江相望,与古城区金江乡接壤,南与鹤庆县辛屯乡毗邻,西与玉龙县太安乡、黄山镇相接,北与金山白族乡、金安乡相连。是一块盆地,俗称七可坝
黄山镇位于丽江古城西南2公里处,东与古城区接壤,南坻五台山,西靠马鞍山、文笔山,北邻白沙乡。黄山镇除南溪村委会外,其余均处丽江坝区,人口密集,劳动力资源充裕。镇政府所在地海拔1960米,气候温和,自然条件优越,交通便利,是玉龙纳西族自治县的政治、经济和文化中心。全镇幅员面积116.5平方公里,耕地面积12543亩。下辖七个村(居)委会(长水、白华、文华、五台、南溪、白马、漾江),47个村(居)民小组。2008年,总人口11062人(其中农业人口7016人),粮食总产量4923吨,农民人均有粮693公斤,农村经济总收入4529.9万元,农民人均纯收入3506元,比上年增长12%。[黄山镇人民政府]
4.상촌선생집 칠언율시(七言律詩)에
溪邊繫馬杜棠枝 시냇가 팥배나무 가지에다 말을 매고
杖策上讀荒山碑 단장 짚고 올라가 황산비를 읽으니
從此湖西霑陜化 이로부터 호서에는 산골까지 교화 미쳐
甘棠隨處入村謳 팥배나무 곳곳마다(도처 어디서나) 시골 노래 불려지리
호서(湖西, 충청도)에 팥배나무가 곳곳에 난다 하는 시귓이다.
南國之人 惜伐甘棠 남쪽 나라의 사람들은 팥배나무 자르기를 아까와 하였다는 문장이 있는데 대륙 남쪽사람들은 팥배나무를 자르지 않고 무조건 기른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팥배나무가 나는 곳인 대륙 남쪽 황산(荒山:黃山)에 단장 짚고 올라가 황산비(荒山碑)를 읽었다는 이야기이니 분명 한반도가 아닌 대륙에 황산비가 있었다는 말이다.
5.다산시문집 시(詩) 황산대첩비를 읽고 나서[讀荒山大捷碑]에
越海萬里專旌麾 만리바다 넘어 대장기를 휘둘렀네
10,000里÷2.45=4,081㎞
장강(長江)전장길이가 6,300㎞이다.
월해만리(越海萬里)
만리(萬里)의 강(江)이 한반도 황산(荒山)옆으로 흐른다?
한반도에서 제일 길다는 강 압록강이 803km이고, 한강514㎞이며 낙동강이 513.5㎞이다.
4,000㎞되는 강이 어디에 있는가?
이 문구는 아무래도 대륙 장강(長江)을 말하는 것이고 그 곳에서 태조이성계가 아기발도를 죽였으며 위화도 회군역시 그곳에 있었다고 보여진다.
6.阿只拔都
또 하나는 태조 이성계가 15살짜리 왜구 병장 아기발도(阿只拔都)를 황산에서 붉은활로 쏘아 죽였다는데 아기발도 이름이 이상하다.
다시 말해 일본식 이름이 분명 아니다.
阿只 아기, 아지
拔都 바투 Batu
아기바투 아지바투란 이름으로 나타난다.
바투(batu:拔都)는 킵차크한국(金帳汗國)의 시조(1207~1256)의 이름이다.
단 조선초기의 황산과 임진왜란 때 황산은 위치가 현격하게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일체 상황을 보아야 한다는 문제가 있다.
조선초기에는 분명 중앙아시아에 압록강과 황산, 지리산을 찾아야 하고
조선중기 임진왜란 때는 지금 대륙에서 압록강과 황산 지리산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본다.
우리의 광대한 역사를 고무줄처럼 이렇게 저렇게 당기고 줄여놓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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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봉집 부록 제1권
연보(年譜)
만력 20년(1592, 선조 25) 임진. 선생 55세
조선(朝鮮) 중기(中期)의 학자(學者)인 학봉(鶴峯) 김성일(金成日, 1538~1593)의 글을 모아 엮은 시문집(詩文集). 16권 10책. 임진왜란(壬辰倭亂)을 겪으면서 남긴 기록(記錄)들이 담겨 있어, 임진왜란(壬辰倭亂)을 이해(理解)하는 데 중요(重要)한 자료(資料)
自咸陽歷山陰, 丹城。進次晉州。
○ 함양(咸陽)에서 산음(山陰), 단성(丹城)을 거쳐 진주(晉州)로 나아가 머물렀다.
山陰宰金洛進盛饌。先生召洛諭之曰。此非今日臣子所宜食。雖食。且不下咽。因愀然含淚。洛慚謝。至丹城。郭再祐以赴戰冠服來謁。先生與語。大奇之。同行至晉。以前牧使吳澐爲召募官。得兵數千。以助再祐。所至士人爭來迎謁。先生爲之披露肝肺。陳說義理。莫不感泣思效。先生又以晉乃湖南保障。爲賊所必爭。令判官金時敏收兵得數千人。修城壕繕器械。計垜分隊。爲死守計。屢入賊藪。未嘗變服。麾下諸人。皆紅衣羽笠。鼓吹而行。前此監兵使守令。皆廢衣冠混常流。至是觀者。皆垂涕曰。不圖今日。復見漢官威儀。(1)
위의(威儀):위엄이 있고 엄숙한 태도나 차림새
비도(不图):추구하지 않다. 바라지 않다.
- 산음의 수령 김낙(金洛)이 음식을 성대하게 차려 내오자, 선생은 김낙을 불러 깨우치기를, “이것은 오늘날 신하 된 자가 먹을 것이 아니다. 비록 먹더라도 목구멍에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하고는, 얼굴빛이 변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러자 김낙이 부끄러워하면서 사과하였다. 단성에 이르렀을 때 곽재우가 싸우러 나가다가 관복(冠服) 차림으로 와서 뵈었다. 선생은 그와 말을 나눠 보고는 크게 기이하게 여겨 함께 가서 진주에 이르렀다. 전 목사 오운(吳澐)을 소모관으로 삼고, 군사 수천 명을 얻어 곽재우를 돕게 하였다. 이르는 곳마다 사인(士人)들이 모여들어 뵈었는데, 선생은 이 사람들을 위하여 마음에서 우러나는 정성으로 의리에 대해 말하였더니, 모두들 흐느껴 울면서 나랏일에 진력할 것을 생각하였다. 선생은 또 진주는 호남의 보장(保障)이 되는 곳이라서 왜적들이 반드시 칠 것이라고 여겨 판관(判官) 김시민(金時敏)으로 하여금 군사를 모집하게 해 수천 명을 얻었다. 그리고는 성과 못을 수축하고 군기(軍器)를 수선하고, 성첩을 헤아려서 군대를 나누어 사수할 계획을 세웠다. 선생은 여러 차례 적들이 있는 곳에 들어가면서 일찍이 변복(變服)한 일이 없었으며, 휘하 사람들도 다 붉은 옷에 우립(羽笠) 차림을 하고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면서 갔다. 이전에는 감사나 병사, 수령들이 모두 떨어진 옷을 입고 백성들 사이에 섞여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서 보는 자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이르기를, “오늘날에 다시 한관(漢官)의 위의(威儀)를 보게 될 줄은 몰랐다.” 하였다.
漢官威儀,
原指漢朝的禮儀制度,后泛指漢族的禮儀典章。
由於漢朝的巨大影響力,當光武帝恢復漢朝時「及見司隸僚屬,皆歡喜不自勝。老吏或垂涕曰:『不圖今日復見漢官威儀。」《後漢書·光武帝紀上》
○先生初到晉陽。牧使李璥竄伏山谷。空城無人影。惟見江流沄沄。先生與趙宗道, 李魯。擧目山河。不堪悲慟。宗道欲握手同入江。先生笑曰。一死非難。徒死何爲。相與揮涕。作詩云。
○ 선생이 처음 진주에 이르렀을 때 목사 이경(李璥)은 산골짜기로 들어가 숨어 있었으며, 성은 텅 비어 사람의 그림자도 없었고, 오직 강물만 출렁이며 흐르고 있었다. 선생은 조종도, 이노와 함께 눈을 들어 산하(山河)를 바라보다가 분통함을 참지 못하였다. 조종도가 손을 잡고 함께 강으로 뛰어들려고 하자, 선생이 웃으면서 이르기를, “한번 죽기가 어려운 것은 아니지만, 그대로 죽기만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고, 서로 눈물을 닦았다.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矗石樓中三壯士。
一杯笑指長江水。(2)
長江之水流滔滔。
波不竭兮魂不死。見詩集。
矗石樓中三壯士 촉석루 누각 위에 올라 있는 세 장사
一杯笑指長江水 한 잔 술에 웃으면서 장강 물을 가리키네
長江之水流滔滔 장강 물은 밤낮으로 쉬지 않고 흘러가니
波不竭兮魂不死 물 마르지 않는 한 우리 넋도 안 죽으리
하였다. 시집에 나와 있다.
○(補)時李舜臣以舟師(수군)據西海。金誠一守晉州。賊由金山路入湖界。屢見挫傷。還從來路退歸。湖西亦免淪陷。國家賴此二道。以濟軍興。一時將士防守之功居多矣。見國朝寶鑑。
[보(補)]이때 이순신(李舜臣)은 수군(水軍)을 거느리고 서해(西海)를 막고 있었으며, 김성일은 진주를 지켰으므로, 왜적들은 금산(金山)을 지나 전라도로 들어가려 하다가 여러 번 막히어 오던 길을 따라 물러갔다. 이에 호서(湖西)도 함락되는 것을 면하였고, 국가도 이 두 도에 힘입어 군량(軍糧)을 댈 수가 있었으니, 당시의 장사들이 막고 지킨 공이 많다고 하겠다. 이 말은 《국조보감(國朝寶鑑)》에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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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시문집 제14권
발(跋)
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3)에 발함
황산 위의 황산대첩비 한 첩(帖)은, 곧 우리 강헌 대왕(康獻大王 이 태조(李太祖)의 시호)이 잠저(潛邸)시절에 왜구(倭寇)를 정벌하러 나가 남원(南原)의 황산(荒山)골짜기에서 왜장(倭將) 아기발도(阿只拔都)를 죽이고, 드디어 큰 승첩을 거두었으므로, 비(碑)를 세워 그 공적을 기록한 글이다.
옛날 내가 황산을 지나다가 이 비문(碑文)을 읽어 보고 또 아기발도와 치열하게 싸웠다는 곳을 보았는데, 대체로 깊고 큰 골짜기로서 숲이 우거진 험악한 지역이었다. 왜인(倭人)은 본디 보전(步戰)에 익숙하였고 우리는 보전에 약하였는데, 더구나 그런 산골짜기에서는 말을 달릴 수가 없는데도 승첩을 거두었으니, 그 승첩을 거둔 것은 신통한 무용(武勇)에서 온 것이지 단순한 인력(人力)으로 된 것은 아니다. 세상에서 ‘왜인들이 계곡에 피를 많이 흘려서 계곡의 돌 빛이 지금까지도 빨갛게 물들었다.’고 전해오고 있으나, 자세히 살펴보니 이는 본래부터 붉은 돌이지 피로 물들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일찍이,
“남도(南道)의 관방(關防)은 운봉(雲峯)이 으뜸이고 추풍령(秋風嶺)이 다음이다. 운봉을 잃으면 적(賊)이 호남(湖南)을 차지할 것이고, 추풍령을 잃으면 적이 호서(湖西)를 차지할 것이며, 호남과 호서를 다 잃으면 경기(京畿)가 쭈그러들 것이니, 이는 반드시 굳게 지켜야 할 관문(關門)인 것이다.”
고 논한 적이 있다. 그 당시 아기발도가 운봉을 넘어오지 않았더라면 성조(聖祖 이 태조)께서 어찌 그와 같은 노고를 하였겠는가. 조령(鳥嶺)은 천연적인 요새지이니, 그대로 두는 것이 더욱 견고할 터인데, 무엇 때문에 성(城)을 만들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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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시문집 제2권
시(詩)
황산대첩비를 읽고 나서[讀荒山大捷碑]
溪邊繫馬杜棠枝 시냇가 팥배나무 가지에다 말을 매고(4)
杖策上讀荒山碑 단장 짚고 올라가 황산비를 읽으니
鐵畫巉巖伏虎豹 삼엄하고 강한 필치 호랑이가 숨죽이고
璘霦煜霅遁魈魑 번쩍번쩍 현란한 빛 도깨비가 도망가네
赫赫神威凜如昨 빛나는 위력 무섭기 어제와도 같은데
何況當年身値之 그 당시에 몸소 만난 자들이야 어쨌겠나
螳螂可敬蛙可式 사마귀도 존경할 만 개구리도 대견하다
阿只拔都奇男兒 아기발도 그 또한 기특한 남아로세
人年十五眇小耳 사람 나이 열다섯은 어리기 짝이 없어
蔥笛堪吹竹堪騎 파피리 불어대고 죽마 탈 시절인데
敢與虯髥作頡利 감히 규염 자부하고 길리가 되어서는
越海萬里專旌麾 만리바다 넘어 대장기를 휘둘렀네(5)
정휘(旌麾) : 옛날, 지휘관이 쓰던 깃발.
彤弓百步落甖苴 붉은활로 백보에서 항아리 끈 떨구었고
동궁점실(彤弓卢矢) : 붉은활과 검은 화살
負樹發箭爭安危 나무 등지고 활 쏘아 안위를 다투었네
妖星旣隕衆彗倒 요망한 별 떨어지자 뭇 혜성이 넘어져
澗石千年殷血滋 시냇돌에 천년토록 검붉은 피 배어 있네
鄭公無謀和尙媟 정공은 무모하고 화상은 버릇없으니
天意人心當屬誰 천심 인심 마땅히 뉘에게로 돌아갈꼬
此擧夜壑舟已徙 이 한 일로 밤중 골짝 배 이미 자리 옮겨
不待威化回軍時 위화도 회군할 때 기다릴 것 없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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