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SINA-신중국

백제(百濟)와 천축(天竺)印度

한부울 2010. 8. 29. 19:22

고구마는 Dios-corea 신이 내린 조선(고려)단감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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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축모란(天竺牡丹), 다알리아(Dahlia) 대고려 http://blog.daum.net/han0114/17050069

선과(仙果) 반도(蟠桃)가 난 덕원도호부는? http://blog.daum.net/han0114/17049930

쌍성총관부에 얽힌 티무르와 이성계 http://blog.daum.net/han0114/17050390

해바라기(向日葵 Sunflower, Helianthus annuus)과 대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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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을 보면 천축(天竺)은 인도의 옛 이름이라고 나온다.

天竺是中國古代對印度的稱謂之一。

在中國歷史上,對印度的最早記載在《史記·大宛傳》,當時稱為身毒(印度河梵文Sindhu對音)。《山海經》記載:「西方有天毒國」。《漢書》記載:「從東南身毒國,可數千里,得蜀賈人市。」。 《後漢書·西域傳》記載「天竺國一名身毒」。唐初統稱為天竺。天竺的「天」古音讀如xien;天竺、賢豆都是波斯語「Hindu」的音譯,波斯人讀Sindhu為Hindu,希臘人讀Hindu為Indu。

唐高僧玄奘往西域取經,首創根據Indu讀音正名為「印度」,「夫天竺之稱,異議糾紛,舊云身毒,或曰天竺,今從正音,宜云印度」。

Sindhu ->Hindu->身毒、天竺。Hindu->Indu->印度。總而言之,身毒、天竺、印度都來自Sindhu。[위키사전]

“东西南北中五大天竺国”

본래 천축국은 동서남북중앙을 합쳐 다섯 천축국이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아시아 전역을 나누어 그렇게 불리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오히려 인도는 아시아서쪽 서천축을 근원으로 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본다.

그러다가 지명이 점차 동쪽으로 이동했을 가능성이 있다.

즉 인도 즉 천축은 오히려 서아시아 아라비아반도 이란 페르시아지역이라고 판단된다.

그곳에 종교 뿌리가 있기 때문이다.

 

해동역사(海東繹史) 제26권  
물산지(物産志) 1
총론(總論)
○ 백제는 토지가 낮고 습하며, 기후는 따뜻하다. 오곡(五穀)과 각종 과일, 채소 및 술, 음식, 반찬, 약재 등은 대략 중국과 같으나, 오직 낙타, 당나귀, 노새, 양, 거위, 오리 등은 없다. 《후주서》
백제 땅은 낙타가 없는 곳이다.
○ 백제에는 오곡이 있고, 소, 돼지, 닭이 있으며, 사람들은 대개 화식(火食)을 하지 않는다. 《수서》
○ 백제의 풍토와 산물은 대부분 고구려와 같다. 《구당서》

 

백제는 토지가 낮고 기후는 습했다고 하는데 대륙남부가 그렇다.

백제는 지금의 대륙남부, 인도, 동남아시아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해상제국이라고 풀이 할 수 있어진다.

지금 한반도에 백제가 있었다고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에 억지로 꿰 맞추려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어 우리 스스로가 더 혼란스러울 뿐이다.

얼토당토하지 않는 것을 꿰 맞추려 하니 풀이하는데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다.

고의적으로 한꺼번에 없애 버린 것이다.

이와같이 삼한의 역사가 대륙과 아시아를 총막라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실제역사서에서는 그러한 자취를 찾을 수 조차 없다는 것은 지금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는 근세기에 엄청난 장난질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엇때문에 이런 엄청난 장난을 벌린 것일까?

그것은 서세동점시기 근세기에 해적질로 이권을 차지하며 갑자기 강력한 실력자로 등장한 왜구무사정치집단세력들이 일천하던 그들의 역사를 고쳐 번듯한 역사로 만들기 위하여 삼한의 역사를 없앨 수밖에 없었던 그들과 당시 서세들이 여세를 몰아 동양문화 위에 서양문화를 세우려 한 이해관계가 적당히 맞아 떨어진 거대한 역사 판 바꾸기 음모에 의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삼한의 역사를 없애 버렸다는 것은

백제를 없애고 그자리에 인도, 인디즈을 넣고

신라를 없애고 페르시안과 유라시아제국을 넣었으며

고려를 없애고 몽고제국 징기스칸으로 바꿔치기 하였으며

조선을 없애고 중국(Chinese)이란 역사를 만들었던 것이다.

대신 백제가 어디에 있었는가 위치를 정확하게 알 수 있다면 자연스럽게 일본 전신인 왜구 무사정치집단들이 집거한 곳도 자연스럽게 밝혀지게 된다. 백제를 일본 왜구들이 자신의 신처럼 추종하고 섬기기 때문에 가까이 근접하여 기생하였을 것이란 추축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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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우리역사의 비밀-이문규 선생의 글에서 보면 “2년, 승려 겸익이 구도에 뜻을 두고 해로로 인도로 가서 5년 동안 체류하여 범어를 익히고 불경을 구해 인도 승려와 함께 들어왔다"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백제가 인도와 그리 멀지 않는 곳에 있었다는 기록이다.

해로이다.

이 해로는 강 길 이라고 해야 맞다.

해로가 한반도에서 인도대륙으로 들어가는 해로라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고 그 당시 항로가 얼마나 험한지에 대한 문제성을 간과한 어리석음에 생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백제가 부남(캄보디아)의 재물과 노비 2구를 왜에 주었다" - 『일본서기』흠명 4년 조

이 일본서기란 책도 사실상 신뢰성이 떨어지는 사서이다.

지들이 작사 작곡 편집 편곡 다 한 사서인데 이것을 사서라고 믿으라고 하면 심한 이야기다.

그렇더라도 위 내용을 억지라고 풀어 볼라 치면 이것은 백제와 일본을 어쨌던 연결코자 한 자작이라고 보여지는데 교역을 전제로 한 상호관계를 부각하려고 한 것이며 당시 백제는 어떤식으로 든지 부남을 지배한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백제가 곤륜(지금의 남베트남, 캄보디아, 타미, 미얀마, 남부 말레이 반도 등을 일괄한 동남아시아 지역)의 사신을 바다에 던졌다는 기록은 백제가 동남아시아의 한 나라가 왜국과 단독으로 교역하려는 것을 막은 것으로, 백제가 동남아시아 항로를 움켜쥐고 활발한 해상활동 벌였음을 반증하는 기록으로 보인다고 우리역사의 비밀-이문규 선생은 지적했다.

그러나 한반도 백제가 활발하게 교역만 했다고 결론 내리는 것은 부족하다 싶고 동남아전체를 백제가 지배한 것이라고 보아야 마땅한 일이다.

 

(1)554년 백제가 일본에 보낸 물품 중 탑등(tapen,tapeten)이 있는데, 이것은 양모를 주재료로 하는 페르시아 직물로 북인도지방에서 산출되는 물품이다.

(2)일본 나라시에 있는 백제계 후지노키 고분의 부장품 가운데는 남방 동물인 코끼리가 투조된 마안구(馬鞍具)가 있는데, 이 마안구는 중국 대륙과 한반도, 일본열도 및 동남아시아지역과 연결되는 6세기 백제 문화의 국제성을 압축해주는 물증으로 평가받고 있다.

위 두 문장에서 보면 일본이 백제와 얼마나 절실하게 지들과 연결하고저 노력했는가를 짐작케 하는 기록이다.

솔직히 짝사랑도 이정도가 되면 병이다.

백제가 실제 일본사신에게 이러한 물건을 주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일이다.

일제가 근세기에 역사고치기를 할 때 삼국사기를 기초로 전부 다듬었다고 볼 수 있으며 물리력을 통한 유물, 유적을 빼앗아 마치 백제로 부터 받을 것처럼 몰고 간 것인지 알 수 없는 내용이다.

물론 일본 내에 있다는 남방 동물인 코끼리가 투조된 마안구(馬鞍具) 역시 그러한 식으로 봄이 옳다고 본다.

그렇지만 일제가 근세기에 남의 나라를 침탈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을 어찌 그런 식으로 치부하겠는가 하지만 분명히 침탈한 역사가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에 군사력을 통한 물리력을 그들이 행사하였기에 이러한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백제가 남긴 최고의 유물, 금동대향로에는 코끼리와 악어가 조각되어 있다. 코끼리와 악어는 동남아시아 또는 인도에 서식하는 동물로, 한반도에는 보이지 않는다.

중국 역사서인 『수서』에는 "(백제에는)신라, 고구려, 왜인들이 나라 안에 섞여 있으며 중국사람도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대륙백제가 많은 다수의 인종이 다른 국가들을 점령한 정복국가 이었기 때문에 다문화를 형성한 결과라고 보아야 마땅하다.

 

백제의 해상활동은 중국 문헌상에 백제가 요서를 점거했다고 소개하고 있다.

"백제국은 본래 고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 천여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 후 고려가 요동을 침략하여 차지하게 되었고 백제는 요서를 공략하여 소유하게 되었다. 백제가 다스리는 곳은 진평군, 진평현이라 하였다" 『송서』「백제전」

"이 해(490)에 위(북위)의 오랑캐가 또 다시 기병 수십만을 동원하여 백제를 공격하여 그 경계에 들어갔다. [이에 백제의] 모대(동성왕)가 장군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목간나를 보내어 오랑캐군을 기습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남제서』「백제전」

"위나라가 군사를 보내 우리(백제)를 공격하다가 우리 군사에게 패배하였다"(삼국사기)

위 기록에 대한 설명인데 위 남제서 기록은 북위의 군사가 바다를 건넌 수군이 아니라 수십 만에 달하는 기병이라 밝히고 있다 한 것에서 백번 지당한 말씀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수군이 백제를 50만명 몰고 갔는데 패배했다.?

한마디로 웃기는 이야기다.

백제는 한반도 서쪽 귀퉁에 조그마한 백제가 아니란 말이다.

북위는 유목민인 선비족이 세운 국가로 바다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으며 해군력도 미약하였다. 실제로 북위가 북중국만 통일하고 전 중국을 통일하지 못한 이유는 수전에 익숙하지 못해 양쯔강을 건너지 못했기 때문이다. 양자강도 건너지 못한 북위의 기병이 저 넓은 서해바다를 건너 백제를 쳤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우리역사의 비밀]의 이문규 선생은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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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거대한 국가였다.


흔히 백제를 해상왕국, 해상강국이라는 말을 한다. 하지만 왜 백제가 해상왕국인지에 대해 아는 사람은 몇 이나 될까? 혹자는 백제가 수나라에 사신을 보낼 때 고구려가 길을 막아 조공을 바치지 못했다는 기록을 들어 백제는 해상왕국이 아니라고 주장을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우리가 지나치는 단편적인 기록들을 세밀히 살펴보면 백제가 활발한 해상활동을 한 해상강국이었음을 증명할 수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성왕 조 기사를 보면


"2년, 승려 겸익이 구도에 뜻을 두고 해로로 인도로 가서 5년 동안 체류하여 범어를 익히고 불경을 구해 인도 승려와 함께 들어왔다"라고 되어 있다.


나침반이 없던 시절, 한반도에서 인도에 이르는 항로는 위험한 항로였다. 특히 고대에는 안전을 위해 대중국 교통에 있어 직선항로인 사단항로 대신 안전을 위한 연안항로를 이용한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런데 위의 성왕 기사는 백제 승이 인도까지 해로로 갔다고 쓴 것인데, 만약 백제와 인도 간 교류가 없었다면, 승려 겸익이 해로를 이용하여 인도로 불경을 구하러 갔을까? 위의 기록은 적어도 백제가 인도로 가는 항로를 알고 있었음과 백제가 인도를 알고 있었고, 인도와 교류가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일본 역사서인 일본서기는 아래와 같은 흥미로운 기록을 남겼다

"백제가 부남(캄보디아)의 재물과 노비 2구를 왜에 주었다" - 『일본서기』흠명 4년 조 -


"백제 사인(使人)들이(백제를 거치지 않고 왜와 독자적인 무역을 시도한) 곤륜의 사신을 바다에 던져버렸다" - 『일본서기』 황극 원년 2년 조 -


먼저 첫번째 기사를 분석해보자. 백제가 일본에게 부남의 재물과 노비를 주었다는 문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는 백제가 지금의 캄보디아인 부남과 교류가 이루어졌음을 뜻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부남의 재물과 노비를 일본에게 줄 수 있었을까?


두 번째 기사는 해상강국으로서 백제의 위용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백제가 곤륜(지금의 남베트남, 캄보디아, 타미, 미얀마, 남부 말레이 반도 등을 일괄한 동남아시아 지역)의 사신을 바다에 던졌다는 기록은 백제가 동남아시아의 한 나라가 왜국과 단독으로 교역하려는 것을 막은 것으로, 백제가 동남아시아 항로를 움켜쥐고 활발한 해상활동 벌였음을 반증하는 기록으로 보인다.


554년 백제가 일본에 보낸 물품 중  탑등(tapen,tapeten)이 있는데, 이것은 양모를 주재료로 하는 페르시아 직물로 북인도지방에서 산출되는 물품이다. 북인도지방의 물품을 백제가 일본에 주었다는 것은 백제가 동남아를 넘어 인도에 연결되는 항로로 활발한 교류를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일본 나라시에 있는 백제계 후지노키 고분의 부장품 가운데는 남방 동물인 코끼리가 투조된 마안구(馬鞍具)가 있는데, 이 마안구는 중국 대륙과 한반도, 일본열도 및 동남아시아지역과 연결되는 6세기 백제 문화의 국제성을 압축해주는 물증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모두가 당시 백제의 광범위한 국제해상활동을 알려주는 단편들이다.


백제사 전공인 이도학 교수는 "백제의 동남아시아 항로는 금강에서부터 서해안을 돌아 제주도와 오키나와를 중간 기항지로 하면서 대만해협을 통과, 중국 남부 연안의 복주와 인도차이나 반도를 거쳐 인도에 이르는 해상실크로드" 였다고 주장한다.


이외에도 백제가 남긴 최고의 유물, 금동대향로에는 코끼리와 악어가 조각되어 있다. 코끼리와 악어는 동남아시아 또는 인도에 서식하는 동물로, 한반도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런 동물들이 백제의 유물에 조각되었다는 것은 백제와 동남아시아 간의 교류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활발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백제는 사방과 교류하는 열린 국가였다. 조선처럼 폐쇄적인 나라가 아닌 여러 민족들에게 열려있는 개방적인 나라였다. 중국 역사서인 『수서』에는 "(백제에는)신라, 고구려, 왜인들이 나라 안에 섞여 있으며 중국사람도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백제 안에 외국인들이 섞여 살았다는 이 기록은 백제의 활발한 대외교류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이러한 백제의 해상활동은 중국 문헌 상에 백제가 요서를 점거했다고 소개하고 있다. 학계에서는 백제의 요서진출설을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위의 활발한 백제의 대외활동으로 보건대 백제의 중국대륙 진출은 충분히 가능성 있어 보인다.


더욱이 백제의 대륙진출설을 부정할 수 없는 결정적인 근거는 바로 이러한 내용이 중국측 자료에 제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만약 삼국사기같은 우리 측 자료에 나오고 다른 자료에 나오지 않았다면 일본의 임나일본부설 처럼 그 사료 가치를 의심받았을 것이다. 중국 측 자료에 이러한 내용이 나온다는 것은 백제의 대륙진출설을 사실로 받아들이게 하는 중요한 근거로 사용된다.


그렇다면 백제의 대륙진출설을 기록한 중국 측 사료들의 내용을 보자.


"백제국은 본래 고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 천여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 후 고려가 요동을 침략하여 차지하게 되었고 백제는 요서를 공략하여 소유하게 되었다. 백제가 다스리는 곳은 진평군, 진평현이라 하였다" 『송서』「백제전」


중국 정사 중 하나인 송서는 백제가 요서지역에 진출해 진평군, 진평현을 설치하였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송나라의 뒤를 이은 남제의 역사서인 남제서는 백제가 중국에서 활동했음을 간접적으로 전해주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 해(490)에 위(북위)의 오랑캐가 또 다시 기병 수십 만을 동원하여 백제를 공격하여 그 경계에 들어갔다. [이에 백제의] 모대(동성왕)가 장군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목간나를 보내어 오랑캐군을 기습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남제서』「백제전」


백제와 북위의 전쟁에 관한 기록은 우리 측 사료인 삼국사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위나라가 군사를 보내 우리(백제)를 공격하다가 우리 군사에게 패배하였다"


이 기사들을 두고 북위가 바다를 건너 백제를 공격했다고 하는 학자들도 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하다. 위 남제서 기록은 북위의 군사가 바다를 건넌 수군이 아니라 수십 만에 달하는 기병이라 밝히고 있다. 즉 백제와 북위는 평원에서 맞붙은 것이다.


게다가 북위는 유목민인 선비족이 세운 국가로 바다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으며 해군력도 미약하였다. 실제로 북위가 북중국만 통일하고 전 중국을 통일하지 못한 이유는 수전에 익숙하지 못해 양쯔강을 건너지 못했기 때문이다. 양자강도 건너지 못한 북위의 기병이 저 넓은 서해바다를 건너 백제를 쳤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북위가 고구려의 길을 빌려 백제를 칠 수도 없는 일이다. 당시 고구려는 동방의 강대국으로 그 국력은 북위를 능가하고 있었다. 게다가 북위는 동으로는 고구려, 서로는 토욕혼, 남으로는 남제, 북으로는 유연으로 둘러쌓여 있는 상황이라 바다 건너 백제를 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백제와 북위의 전쟁은 한반도가 아닌 중국대륙에서 일어난 전쟁인 것이다.


"그 나라(백제)는 본래 구려(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에 있었다. 진나라 때 구려가 이미 요동을 침략하여 차지하였고, 백제 또한 요서, 진평 두 군의 땅에 웅거하면서 차지하고 백제의 군을 설치하였다" 『양서』「백제전」


"북위가 병력을 보내어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백제에게 패하였다. 백제는 진(晉)대부터 요서와 진평 2군을 차지하고 있었다. 『자치통감』

"백제국이 진대로부터 시작하여 송, 제, 양대에 양자강 좌우를 차지하고  있었다." 『북사』 「백제전」

"백제국이 양자강 어구의 좌안을 진대로부터 시작하여 송, 제, 양 대에 이르기까지 점령하고 있었고, 후위 때는 중원을 차지했다. 『주서』「백제전」

"금주, 의주, 애훈(중국 동해안 지역) 등지가 다 백제이다." 『만주원류고』

"원래 백가제해라는 데서 백제라 부르게 되었다. 진나라 때 고구려가 요동을 취하자 백제도 요서와 진평두 군을 영유하여 근거지로 삼았으니 지금의 유성과 북평 사이이다." 『통전』「백제전」

"(백제의 영토는) 서로는 월주(양쯔강 연안)에 이르고 북으로는 바다(발해)를 건너 고구려에 이르고,  남으로는 바다를 건너 왜에 이른다.『구당서』「백제전」

북제의 역사서인 북제서 후주기에도 백제가 중국에 진출하였음을 간접적으로 말해 주는 기록이 있다.

봄 정월…백제의 왕 여창을 사지절 도독 동청주자사로 삼았다.『북제서』「후주기」


삼국사기 백제본기 위덕왕 17년조에도 역시 같은 기록이 실려있다. 사지절은 황제의 신임표시인 부절을 소유했다는 뜻이고, 도독은 군사최고책임자, 자사는 행정 최고책임자다. 위 내용은 북제가 백제 위덕왕에게 동청주의 군사와 행정의 대권을 맡겼다는 것이다. 동청주는 지금의 산동성 동남부로 현재의 청도시 지역이다. 이곳은 모든 물산이 모여드는 요충지로, 이러한 중요한 지역의 문무대권을 백제 왕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는 백제가 해상활동을 활발하게 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고, 그 이전부터 중국지역에 진출해 있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북제는 그러한 현실 상황을 받아들여 백제의 동청주 지역 지배를 인정한 것이다.


이렇듯 백제의 중국대륙 지배는 여러 중국사서가 전하고 있다. 그 중 구당서, 자치통감, 통전, 북사, 북제서, 만주원류고 등의 사서는 북중국 계열의 왕조 또는 그 후예가 남긴 사서이다. 그러니 백제의 중국지배가 남중국 사서에만 보인다는 견해는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가지 더, 백제가 설치한 진평군의 위치에 대해 놀라운 사실을 소개하고자 한다.


중국 역사서 『송서』「지리지」 광주군조를 보면 올림군에 진평군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곳은 지금의 광서장족자치구 옹녕현으로서 옹녕현에는 백제향이라는 지명이 있다. 백제와 관련된 지명이 광서장족자치구에 발견된다는 점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백제와의 연관이 없고서야 그런 지명이 생겨났을 수 있을까?


중국 복단대학 역사지리연구소에서 간행한 『중국역사지명사전』을 보면 진평군은 468년에 지금의 복건성 복주시에 설치되었으나, 471년에 진안군으로 이름을 고친 것으로 나타나 있다.한편 이와는 달리 유균인(劉鈞仁)의 『중국역사지명대사전』에 의하면 진평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진평은 현 이름인데, 진(晉)나라가 설치하여 광주(廣州) 울림군에 소속시켰고, 남송(유송을 가리킴)과 남제도 그대로 하였다. 지금은 없어졌으나 광서(廣西) 경계에 있었다


이어서 백제군에 대해서는 "백제는 지명인데, 광동 흠현 서북쪽 1백80리에 소재하였고, 터가 있는데 오문과 계림 2성의 경계가 교차하는 곳"이라고 하였다. 이 역시 광서 장족자치구내에 해당한다.


흥미로운 점은 진평군이 설치된 지역은 북중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팥 문화권」에 속한다는 것이다. 이 팥 문화는 한반도와 백제가 진출한 일본 열도에서도 확인된다는 점에서 문화의 공유를 발견하게 된다. 게다가 이 지역과 인접한 운남성에서 김병호박사가 이끈 <중앙일보>탐사팀이 운남성의 첩첩산골인 호도현을 지나면서 중국의 소수민족인 나시족 처녀들이 지게에 나무를 져 나르는 모습을 발견했는데 놀랍게도 한국식과 모양 하나 다르지 않은 지게를 바로 나시족 여자들이 사용하고 있었다고 한다.(참고로 지게는 한국민족의 독창적 발명품으로 세계 어느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운반도구라는 견해가 있다.)


백제는 우리 고대사의 수수께끼다. 백제에 대해 전하는 사료가 거의 없으니 말이다. 우리는 백제의 진면목을 모르고 있을 지 모른다. 우리가 생각하는 백제는 한반도에서 고구려, 가야, 신라와 각축을 벌이다가 신라에 의해 망한 국가였다는 이미지가 대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백제하면 떠오르는게 의자왕과 삼천궁녀라는데 이것이 대부분의 사람이 갖는 백제에 대한 인식이다. 우리는 정말 백제의 역사를 제대로 아는 것일까? 우리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백제는 거대했을지도 모른다. 바다를 누빈 해상왕국 백제......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말이 있다. 옛날 영국은 일찍이 해양의 중요성에 눈을 떴고, 그것은 훗날 팍스 브리타니아를 이룰 수 있었다. 백제 역시 해상활동에 전념하여 동남아 항로를 장악하였듯이, 반도국가인 우리가 뻗어나갈 곳은 바다 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해양을 활용한 백제는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지 않을까 싶다.[우리역사의 비밀-이문규 씀]

 

참고서적

윤내현, 『한국열국사연구』, 지식산업사, 1998

이도학, 『살아있는 백제사』,휴머니스트,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