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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불제-슈리비자야 제국 (三佛齐 : srivijaya empire)와 일본

한부울 2009. 11. 1.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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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바(Java)의 서쪽에 있는 나라 삼불제는

문견별록 서문에 일본 동해도(東海道) 안방주(安房州)는 삼불제녀국(三佛齊女國)과 서로 가깝다 했다.

또한 삼불제(三佛齊)는 Java의 서쪽에 있는 나라로, 남조 시대에는 간타리(干陀利)라 칭하였고, 당나라 때에는 실리불서(室利佛逝)라 칭하였고, 송나라 때에 비로소 삼불제라 칭하였다고 하였으며 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 물리소지(物理小識)와 직방외기(膱方外紀)에 대한 변증설을 보면 송(宋)나라 강여지(康譽之)의 《작몽록(昨夢錄)》에 이르기를 “고려의 동쪽에 맹화유(猛火油)가 나는데 한여름의 태양열(太陽熱)에 돌이 뜨겁게 달면 액(液)이 나오며 그 액이 다른 물체에 닿으면 불이 붙으므로 유리그릇에만 담을 수 있다 했으며 주(周)나라 현덕(顯德) 연간에 월상(越裳)이 바친 맹화유(猛火油)와 삼불제(三佛齊)가 바친 화유(火油)는 모두 같은 종류이다.” 하였다.

이것은 석유 원유로서 수마트라 인도네시아를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또 정화(鄭和)가 삼불제왕(三佛齊王)과 석란왕(錫蘭王)을 포로로 하였고, 수마트라의 난을 평정하기도 하였다.[한국번역원]

그렇다면 삼불제는 분명 자바, 수마트라 섬을 말하는 것인데 산불제가 일본 동해도 안방주로 서로 가깝다고 하였으니 일본 역시 자바 서쪽 수마트라 가까이에 존재한 나라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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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견별록 서문

신(臣)이 먼 섬나라로 봉명(奉命)하고 갔을 때에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면서 그 지방의 사적(事蹟)들을 주워 모아서 예람(睿覽)에 우러러 대비하는 것이 신의 직책입니다.

그러하오나 말이 통하지 아니하고 징빙(徵憑)할 만한 문헌도 없기에 여기저기서 보고 듣고 한 것들을 겨우 모아서 날마다 기록한 외에, 10가지 사건을 적은 1책을 따로 만들어서 올리어 처분을 바랍니다.

1. 왜황 대서(倭皇代序)

1. 관백 차서(關白次序)

1. 대마도주 세계(對馬島主世系)

1. 관제(官制)

1. 주계(州界)

1. 도리(道里)

1. 산천(山川)

1. 풍속(風俗) 10조(條)

1. 병량(兵糧)

1. 인물(人物)


위 1. 주계(州界)를 보면

기내도(畿內道) 

동해도(東海道) 

지마주(志摩州)는 남해 속에 있는데, 동쪽으로는 대신국(大身國)과 근접하고 서쪽으로는 발초국(勃楚國)과 이웃하고 남쪽으로는 발해국(渤海國)이다. 이두주(伊豆州)는 팔도(八島)ㆍ팔장도(八丈島)ㆍ지국(支國)과 서로 가까우며 화정(火井)이 있다. 안방주(安房州)는 삼불제녀국(三佛齊女國)과 서로 가깝다


이세주(伊勢州) : 동쪽으로는 미장(尾張), 서쪽으로는 기이, 남쪽으로는 바다, 북쪽으로는 이하(伊賀)에 이름. 소속된 군은 13군이고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신묘(神廟)가 있으며, 수은(水銀)이 생산됨. 수전이 1만 9천 24정.

이하주(伊賀州) : 동쪽으로는 미농(美濃), 서쪽으로는 대화, 남쪽으로는 이세, 북쪽으로는 근강(近江)에 이르며, 소속된 군은 4군임. 수전이 1천 5백 정.

지마주(志摩州) : 남쪽 바다 가운데 있어 동쪽으로는 대신국(大身國), 서쪽으로는 발초국(渤楚國), 남쪽으로는 발해국(渤海國)에 가까우며 소속된 군은 21군임. 수전이 97정.

미장주(尾張州) : 동쪽으로는 삼하(三河), 서쪽으로는 이세, 남쪽으로는 바다, 북쪽으로는 미농에 이르며, 소속된 군은 8군임. 수전이 1만 1천 9백 40정.

삼하주(三河州) : 동쪽으로는 원강(遠江), 서쪽으로는 미장, 남쪽으로는 바다, 북쪽으로는 신농(信濃)에 이르며, 소속된 군은 8군임. 수전이 8천 8백 20정.

원강주(遠江州) : 동쪽으로는 준하(駿河), 서쪽으로는 삼하, 남쪽으로는 바다, 북쪽으로는 신농에 이르며, 소속된 군은 13군임. 수전이 1만 2천 9백 67정.

준하주(駿河州) : 동쪽으로는 이두(伊豆), 서쪽으로는 원강, 남쪽으로는 바다, 북쪽으로는 부사산(富士山)이 막혀 있으며, 소속된 군은 7군임. 수전이 9천 7백 17정.

이두주(伊豆州) : 동쪽으로는 상모(相模), 서쪽으로는 준하, 남쪽으로는 바다에 닿아 팔도(八島)와 팔장도지국(八丈島支國)에 가깝고 북쪽으로는 갑비(甲斐)에 이름. 소속된 군은 13군이고 온정(溫井)이 2개소, 화정(火井)이 1개소 있고 유황(硫黃)이 생산됨. 수전이 2천 8백 14정.

갑비주(甲斐州) : 동쪽으로는 상모, 서쪽으로는 준하, 남쪽으로는 이두, 북쪽으로는 월후(越後)에 이르며, 소속된 군은 4군이고 좋은 말이 생산됨. 수전이 1만 4천 3정.

상모주(相模州) : 동쪽으로는 무장(武藏), 서쪽으로는 상근령(箱根嶺), 남쪽으로는 바다에 닿고 북쪽으로는 상야(上野)에 이르며, 소속된 군은 8군이고 목재(木材)가 생산됨. 수전이 1만 2천 2백 36정 1단(段).

무장주(武藏州) : 동쪽으로는 상륙(常陸), 서쪽으로는 상모, 남쪽으로는 상총(上總), 북쪽으로는 하야(下野)에 이르며, 소속된 군은 24군이고 강호(江戶)에 소속됨. 수전이 3만 5천 74정 7단.

안방주(安房州) : 동쪽으로는 상총(上總)에 이르고 서남쪽으로는 바다에 닿아 삼불제녀국(三佛齊女國)에 가깝고 북쪽으로는 무장(武藏)에 이르며, 소속된 군은 4군임. 수전이 4천 3백 45정 8단.

상총주(上總州) : 동남쪽으로는 바다에 닿아 영주(瀛州)에 가깝고 서쪽으로는 안방, 북쪽으로는 하총(下總)에 이르며, 소속된 군은 12군임. 수전이 2만 2천 8백 76정 6단.

하총주(下總州) : 동남쪽으로는 바다에 닿아 송도(松島)ㆍ나찰(羅刹)에 가깝고 서쪽으로는 무장, 북쪽으로는 상륙에 이르며, 소속된 군은 11군임. 수전이 3만 3천 1정.

상륙주(常陸州) : 동쪽으로는 바다, 서쪽으로는 무장, 남쪽으로는 하총, 북쪽으로는 육오(陸奧)에 이르며, 소속된 군은 14군임. 수전이 4만 9천 9정 6단.


동산도(東山道) 

북륙도(北陸道) 

산음도(山陰道) 

산양도(山陽道) 

남해도(南海道) 

서해도(西海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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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 4 - 경사잡류 2  

기타 전적(其他典籍) - 중국 전적

물리소지(物理小識)와 직방외기(膱方外紀)에 대한 변증설(고전간행회본 권 28)

송(宋)나라 강여지(康譽之)의 《작몽록(昨夢錄)》에 이르기를 “고려의 동쪽에 맹화유(猛火油)가 나는데 한여름의 태양열(太陽熱)에 돌이 뜨겁게 달면 액(液)이 나오며 그 액이 다른 물체에 닿으면 불이 붙으므로 유리그릇에만 담을 수 있다. 서북 방성고(防城庫)에 못[池]을 파서 맹화유를 저축했는데 한 달이 되지 못해서 그 못의 흙이 모두 적황색(赤黃色)으로 변하였으므로 또다시 못을 파서 옮겼다.” 하였다. 잠초(潛草)는 말하기를 “남번(南番)의 이유(泥油)에 불이 붙으면 물로는 끌 수 없고 마른 흙이나 구회(龜灰)로만이 끌 수 있으며, 사천(四川)의 정유(井油)도 불이 붙었을 때 물을 뿌리면 불꽃이 더욱 성해진다. 주(周)나라 현덕(顯德) 연간에 월상(越裳)이 바친 맹화유(猛火油)와 삼불제(三佛齊)가 바친 화유(火油)는 모두 같은 종류이다.” 하였다. 방이지(方以知)는 말하기를 “기름에 불이 붙는 것은 기름도 수성(水性)인 액체(液體)이기 때문에 물로서는 끌 수 없고 오직 고운 흙으로만이 끌 수 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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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鄭和) : 명나라 때 운남(雲南) 사람으로 소자(小字)를 삼보(三保)라고 한다. 벼슬은 연왕(燕王)의 태감(太監)이었고, 성조(成祖)의 명을 받아 사졸(士卒) 2만여 명을 인솔, 많은 금폐(金幣)를 가지고 서양에 일곱 차례나 사자로 갔었다. 이 동안 30여 국을 거쳐 많은 보물을 획득하였으며, 삼불제왕(三佛齊王)과 석란왕(錫蘭王)을 포로로 하였고, 수마트라의 난을 평정하기도 하였다.[한국번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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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불제(三佛齊) : Java의 서쪽에 있는 나라로, 남조 시대에는 간타리(干陀利)라 칭하였고, 당나라 때에는 실리불서(室利佛逝)라 칭하였고, 송나라 때에 비로소 삼불제라 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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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불제-슈리비자야 제국 (三佛齐 : srivijaya empire)

 

                                                  12~13세기경 슈리비자야 판도

 

Early kingdoms

Gangga Negara (2nd–11th)

Langkasuka (2nd–14th)

Pan Pan (3rd–5th)

Srivijaya (7th–13th)

Kedah Kingdom (630-1136)

The rise of Muslim states

Kedah Sultanate (1136–present)

Malacca Sultanate (1402–1511)

Sulu Sultanate (1450–1899)

Johor Sultanate (1528–present)

European colonialism

Portuguese Malacca (1511-1641)

Dutch Malacca (1641-1824)

Straits Settlements (1826–1946)

British Malaya (1874–1946)

Federated Malay States (1895–1946)

Unfederated Malay States (1909–1946)

Kingdom of Sarawak (1841–1946)

North Borneo (1882–1963)


三佛齐(阿拉伯语:Zabadj,爪哇语:Samboja,?-1397年),中国唐代古籍又称室利佛逝(梵文Sri Vijaya)、佛逝、旧港,是公元7世纪中叶在苏门答腊岛代替干陀利国的古国,鼎盛时期,其势力范围包括马来半岛和巽他群岛的大部分地区。904年开始,中国文献改称“室利佛逝”为“三佛齐”,反映当时阿拉伯回教的影响已取代印度影响。

 

Candi Gumpung, a Buddhist temple at Muaro Jambi of Malayu Kingdom, later integrated as one of Srivijaya's important urban center

 

                           Ruins of the Wat Kaew in Chaiya, dating from Srivijayan times


7 ~13세기 말레이 군도에서 해상무역과 상업으로 번창했던 왕국.

수마트라의 팔렘방에서 창건된 이 왕국은 단기간에 세력을 확장하여 말라카 해협의 지배권을 손에 넣었다. 왕국의 세력은 국제 해상무역의 장악이 그 밑받침이 되었다. 이 나라는 말레이 군도 내의 나라들뿐 아니라 중국·인도와도 무역관계를 맺었다.


슈리비자야는 말레이 지역에서 종교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이곳은 대승불교를 신봉했고, 인도로 가는 중국 구도승의 중간 기항지가 되었다. 슈리비자야의 왕들은 인도의 네가파탐에 사원을 건립하기도 했다. 왕국은 계속 성장하여 1000년에는 자바의 대부분을 지배했으나 얼마 가지 않아서 인도의 해상왕국인 촐라에게 자바를 빼앗겼다. 슈리비자야는 동아시아와 남아시아를 잇는 촐라 왕국의 해상교역에 장애물이었다. 1025년 촐라는 팔렘방을 점령하고 왕을 사로잡아 많은 보물을 약탈하고 왕국의 다른 지역까지 공격했다. 12세기말 슈리비자야는 소국으로 전락했고 수마트라의 지배권자바의 봉신말라유(잠비가 중심지였음)에게 넘어갔다. 이후 자바인이 세운 마자파히트 왕국이 인도네시아의 정치무대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인도네시아에는 일찍부터 인도 힌두교가 들어와 그 영향을 받은 몇몇 작은 나라가 2세기경부터 점점 성장해갔다. 7세기가 끝날 무렵에는 그들이 연합하여 슈리비자야라는 커다란 나라로 통일되어 지금의수마트라 섬 팔렘방을 수도로 삼았다. 이곳에서 출토되는 비문이나 중국인 의정(義淨)의 여행기 『남해기귀내법전(南海寄歸內法典)』으로도 슈리비자야가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여러나라, 그리고 인도와 활발한 교역활동을 통해 경제적으로 번영했음을 알 수 있다.


인도와 중국을 잇는 항로의 가운데 위치하고, 믈라카 해협과 순다 해협의 중앙이라는 유리한 지리적 조건이었기 때문에 8세기에 접어들어 해상무역국가로 빠르게 발전했다. 때마침 서방의 사라센 제국에서 상선(商船)이 자주 동쪽으로 나온 시기이고, 당대(唐代)의 중국도 이곳의 풍부한 시장성을 노려 중국인도 나라밖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에 슈리비자야는 중계무역지 구실을 하였다.


7세기 후반 인도에 유학했던 당나라 중 의정(義淨)이 도중에 슈리비자야에 들러 산스크리트어 연구와 불경번역 등에 힘썼던 것으로 보아 당시 이 나라 불교의 융성함을 알 수 있다. 8세기 중엽에는 말레이 반도의 일부도 지배했던 것으로 보이며 영토도 넓어져 동남아시아에서 거의 유일한 대국이 되었다. 10세기를 최전성기로 하여 그 뒤 쇠퇴해져 14세기에 몰락했다.


物产有梅花片脑、丁香、檀香、豆蔻。来自大食的有珍珠、猫儿睛、琥珀、槟榔、木棉布。 外来商贩通行物物交换,多用金、银、瓷器、锦缎、糖、酒等。

 

                                       Pagoda in Srivijaya style in Chaiya, Thailand

 

The graceful golden statue of Avalokiteçvara in Malayu-Srivijayan style, discovered at Rataukapastuo, Muarabulian, Jambi, Indonesia.

 

                                     Srivijaya's Empire and its neighbors in 900 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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촐라왕조(朱罗王朝 Chola Empire Colla dynasty Colla는 Cholla)


남인도의 타밀 왕조.

 

注輦早期的銀幣 An early silver coin of Uttama Chola found in Sri Lanka showing the Tiger emblem of the Cholas.In Grantha Tamil.

 

                       Chola's empire and influence at the height of its power (c. 1050)


注輦国(又名朱罗,是1世紀至13世紀时印度半岛古国,其地在今泰米爾納德邦。注輦国最早起源于高韦里河(Kaveri)流域,以欧赖宇尔(Urayur)为国都。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최소한 창캄 시대 초기의 시문집(200경)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존재했다. 풍요한 코베리 강 유역에 기원을 둔 이 왕조는 우라이유르(지금의 티루치치라팔리)에 최초의 수도를 세웠다.


촐라 또는 초다라고 하는 데칸과 안드라의 소(小) 가문들은 우라이유르 가문과 연관이 있음을 주장하면서 전설상의 왕 카리칼란을 공통의 조상으로 내세웠다. 촐라국(코로만델)은 남쪽의 바이가이 강에서 톤다이만달람 남부에 걸쳐 있었으며 수도는 북쪽에 위치한 칸치(칸치푸람)였다.

 

                Detail of the statue of Rajaraja Chola at Brihadisvara Temple at Thanjavur.


타밀어 고전문학과 위대한 타밀 건축물들은 대부분 창캄 시대에 만들어졌으며 이 시기에는 또한 시바 신앙(시바 신에 대한 숭배)이 부활하고 남부의 비슈누 신앙(비슈누 신에 대한 숭배)이 발전했다. 촐라 왕조하에서 조세행정과 마을 자치조직, 관개시설 등이 고도로 발전했다. 촐라 왕조의 지배자들은 왕이나 황제라는 칭호 대신에 라자케샤리바르만과 파라케샤리바르만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이 왕조의 연대기는 매우 복잡하다. 비자얄라야(850경~870 재위)는 팔라바인들의 영토를 점령하기 시작했으며, 이 영토는 아디티아 1세(870경~907 재위)의 통치하에서 더욱 확장되었다. 마두라이(팡디아 왕조의 수도)의 파괴자로 알려진 파란타카 1세(907~953경 재위)는 실론(지금의 스리랑카) 침입자들을 패주시키고 926~942년에 촐라 왕조와 팡디아 왕조의 영토를 합병했다. 라슈트라쿠타 왕조와 타협하게 된 그는 940년경 이들에게서 넬로르를 빼앗았지만 라슈트라쿠타 왕인 크리슈나 3세는 톤다이만달람을 점령했다.


강력한 통치자였던 라자라자 1세(985~1014 재위)는 벵기(고다바리 지역들)를 방어하고 강가바디 영토(카르나타카 국)를 점령했으며 서쪽의 강가 왕조를 멸망시켰다. 또한 그는 996년경에 케랄라(체라국)를 점령했으며 북부 실론을 손에 넣었다. 그는 이렇게 해서 얻은 전리품으로 탄조르(탄자부르)에 대(大)브리아디슈바라 사원을 건립했다. 1014년경 라자라자는 래카다이브와 몰디브 제도를 획득했다. 그의 아들 라젠드라촐라 데바 1세(1014~44 재위)는 라자라자의 업적을 능가했다. 그는 아들 1명을 마두라이 왕위에 앉혔고 실론 정복을 완료했으며 데칸을 공략하고(1021경), 원정대를 북쪽 갠지스 강으로 침투시켜(1023) 갠지스 강물을 새 수도 강가이콘다촐라푸람으로 끌어들였다. 그는 말레이 반도와 말레이 군도 일부를 점령했다. 라자디라자(1044~54 재위)는 팡디아 왕조 및 체라 왕조와 싸웠으며 1046년에는 서(西)찰루키아의 지배자 소메슈바라 1세와 싸워 이겼지만 1054년 찰루키아인들과 싸운 코팜 전투에서 죽고 말았다. 촐라의 지배자 비라라젠드라(1063~69 재위)는 데칸에 위치한 찰루키아 제국을 아무 손실 없이 굴복시키려고 시도했지만 그가 죽었기 때문에 비크라마디키아 찰루키아가 촐라 왕가의 분쟁에 개입할 수 있었다.


상속권을 통해 촐라 왕조와 동(東)찰루키아의 왕위를 함께 계승한 쿨로툰가 1세(1070~1122)는 현명하게도 데칸 지역을 포기하고 동부 해안지역을 통일하는데 주력했다. 팡디아의 왕위계승권과 관련된 음모로 1166년경부터 촐라와 팡디아·실론(이당시에는 독립을 회복했음)이 소란을 겪었다. 1216년부터 호이살라 왕조가 촐라국의 영토를 장악하자 촐라의 이전 가신들은 촐라 왕조와의 연합을 파기했으며 북방지역의 강대국들이 개입했다. 그리고 이 같은 격변은 1257년에 팡디아에 의한 촐라국의 점령을 수월하게 했다. 촐라 왕조는 1279년에 멸망했다.

 

                                    Chola territories during Kulothunga Chola I c. 1120

 

Hindu temple complex at Prambanan in Java clearly showing Dravidian architectural influences

 

                            Detail of the main vimanam (tower) of the Thanjavur Temple

 

With heavily ornamented pillars accurate in detail and richly sculpted walls, the Airavateswara temple at Darasuram is a classic example of Chola art and architecture

 

         Bronze Chola Statue of Nataraja at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City


촐라 왕조 (타밀어: சோழர் குலம், IPA: ['ʧoːɻə])는 타밀 왕조로 남부 인도에서 13세기까지 지배하였다. 왕조는 카베리의 비옥한 계곡에서 시작되었다. 카리칼라 촐라는 초기의 촐라 왕 중에 가장 유명하며 라자라자 촐라, 라젠드라 촐라 1세 와 쿨로퉁가 촐라 1세는 중세 촐라의 기록될 만한 황제였다.


촐라 왕조는 9세기 후반에서 13세기 초까지 지속적으로 그들의 권력이 유지되었다. 라자라자 촐라 1세와 그의 아들 라젠드라 촐라의 시대에 왕조는 아시아의 군사적, 경제적, 문화적 강대국이되었다. 서기 1010년에서 1200년까지 촐라의 영토는 남쪽으로 몰디브 섬까지 북쪽으로는 안드라프라데시 주의 고다바라 강의 제방까지 팽창하였다.


라자라자 촐라는 남인도의 반도를 정복하였고 스리랑카의 일부를 병합하였다. 그리고 몰디브 섬을 점유하였다. 라젠드라 촐라는 북인도로 승리의 원정을 보냈는데 강가 강까지 닿았다. 그리고 파탈리푸트라, 마히팔라의 팔라 지배자를 격파하였다. 그는 역시 말레이 아르키펠라고의 왕국을 공략하였다.


촐라의 권력은 12세기 판드야의 부상으로 쇠퇴하였다. 호이살라는 결국 13세기 말경에 끝났다. 그들의 타밀 문학과 사원 건설은 약간의 위대한 작품을 낳았다. 촐라 왕들은 사원을 건설하였는데 그곳은 숭배의 장소일 뿐만 아니라 경제활동의 중심이 되었다. 그들은 정부의 중앙집권을 개척하였고 사제 관료를 세웠다 [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