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적이 남반(南班)으로 들어간다는 말에 숨기게 하다 http://blog.daum.net/han0114/17049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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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아시아 대륙전역을 넓게 통치한 나라였다면 양반이란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우리는 일제가 심어놓은 식민사관이나 한반도사관으로 인하여 잘못된 상식을 많이들 가지고 있고 그러한 것들이 마치 지식처럼 인식되고 있는 현실을 안타까워하지 않을 수 없다.
식민사관이나 한반도사관이 아니라 대륙사관이나 아시아사관이라면 다르게 인식 될 것임에도 이렇듯 아류속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탄식하지 않을 수 없다.
조금만 신경을 쓰고 밝혀 보면 금방 알 수 있는 것도 기존 주장에 이끌려 알려고 하지 않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김으로써 바르게 알고 바로 고쳐나가고자 하는 마음이 결여되어 역사에 또 다른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우리가 양반이라고 하면 고려·조선시대 지배신분층 정도로만 알고 있다.
우리가 역사에서 늘 접하는 것은 왜곡 축소로 인한 폐해이다.
양반이란 개념도 성리학에 의한 양반제도 신분 생성이라는 엉뚱한 논리가 존재한다.
고려와 조선을 이어 내려오면서 어찌 성리학만 중요시 여겼겠는가?
성리학만 학문으로 비춰지는 것은 식민사관과 한반도사관이란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아류가 아닐 수 없다.
정말 거짓 없이 조선이란 실체가 한반도조선이라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은 한반도 뿐 만 아니라 아시아 전역을 아우르는 대국이고 상국이다.
조선시대를 마치 우물 안에 개구리처럼 성리학이라고 하는 儒學만을 학문으로 취급하고 숭상하였다는 착각에 빠지게 하는 주장은 온당치 않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통치자에게 중요한 것은 광활한 영토를 어떻게 하면 무리 없이 온전하게 통치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다문화적인 형태가 낳을 갈등과 반목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통치자가 영토를 세분함에 있어 많은 유능한 인재를 공평하게 등용하고 나라를 보존시키기 위해 다문화적인 모든 것을 차별 없이 수용 포용하는 것이 바로 통치자의 능력이다.
그러한 환경에서 성리학만 치중하고 정책적으로 유교만을 숭상한다면 타 문화권에서 반발하지 않고 가만히 수긍하면서 순순히 복종하였겠는지 따져 보지 않을 수 없다.
성리학 유교 뿐 만아니라 모든 종교 학문을 두루 중요시하고 숭상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성리학과 양반을 연결시키는 것은 역사를 극단적으로 몰아가고 싶어 하는 어리석음 일뿐이다.
그러한 어리석음이 또 다른 왜곡을 낳고 일제가 남긴 반도사관과 식민사관의 틀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하는 옹색함이 아닌가 한다.
양반은 문무를 나누어 호칭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광활한 영토를 지배하고자 한다면 그것만으로 부족하다.
때문에 양반을 협의의 의미 와 광의의 의미에서 볼 수 있어야 한다.
협의에 의미는 대체적으로 기존 역사 기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회 신분제도 틀이란 한계가 있고 양반이란 진의를 고의적으로 왜곡 축소 한 것이다.
광의에 의미는 조선을 아시아와 대륙전역을 아우르는 영토를 가진 나라라는 전제 아래 나라의 중심 임금이 있는 중앙을 기본으로 동서남북 지역을 나누고 그 각 지역에서 양산되는 뛰어난 인재 출신별로 구분한 관료 사대부 개념적 호칭이었다고 보여 지는 의미이다.
광대한 영역에서 관료와 사대부가 골고루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고 편향된 것을 가능하면 피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고 보여 진다.
그러한 인재들을 신속 정확하고 공평정당하게 과시 과정을 거쳐 등용문을 열고 각 출신지역별로 구분하여 붙인 것일 뿐 그것이 곧 신분제도라는 것은 현 사회적인 개념에서 잘못 파생된 의미이고 일제가 남긴 난센스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제도역시 따지고 보면 광활한 영토를 통치하기 위한 적합한 수단이고 고려시대 때부터 내려오는 독창적 정치형태였음을 이해해야 한다.
양반이 아니라 동반이고 서반이고 남반.. 북반이다.
양반의 기본 개념은 양반만을 한정한 것도 아니다.
현재 개념적 사고를 버린다면 신분제도였다는 사실도 믿을 것이 못된다.
대륙조선 통치자가 영토관리 차원에서 공정, 공평한 기본이념하에 창달된 정치형태이고 제도이며 각 지역별로 자연스럽게 불리웠던 호칭이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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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兩班)
양반(兩班)은 조선 시대 최상급의 사회계급으로 사(士)·농(農)·공(工)·상(商) 중 사족(士族)에 해당한다. 이는 또한 조선에서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관료와 관료가 될 수 있는 잠재적 자격을 가진 가문, 그리고 사림(士林)이라 불렸던 학자 계층까지 포함하는 조선 왕조 특유의 사회계급이다. 본디, 문관과 무관을 지칭하는 관료적 의미였으나, 반상제가 확립되어가면서 신분상의 의미로 변화하였다.
고려·조선시대 지배신분층.
처음에는 관제상의 문반과 무반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고려 말 조선 초기부터는 관제상의 문·무반 뿐 아니라 점차 지배 신분층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아지게 되었다.
국왕이 조회(朝會)를 받을 때, 남향한 국왕에 대하여 동쪽에 서는 반열(班列)을 동반(東班 : 문반), 서쪽에 서는 반열을 서반(西班 : 무반)이라 하고, 이 두 반열을 통칭하여 양반이라 하였다. 이러한 관제상의 문·무반이라는 의미의 양반 개념은 이미 양반관료체제가 처음으로 실시된 고려 초기부터 사용되었다.
고려는 혈통만을 중시하던 신라의 골품제를 타파하고 보다 광범한 재지 호족군(在地豪族群)을 국가 관료로 등용하는 집권적 양반관료제를 확립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건국 초창기부터 완벽한 양반관료제를 수립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므로 관제의 기초가 되는 관계(官階)도 고려 초기에는 신라의 관계와 태봉(泰封)의 관계를 참작하여 만든 관계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문반과 무반을 처음으로 구별한 것은 976년(경종 1)에 실시된 전시과(田柴科)서부터였다. 경종 전시과에서는 고려 초기의 관계를 기준으로 모든 직산관(職散官)을 공복(公服)의 빛깔에 따라 자삼(紫衫)·단삼(丹衫)·비삼(緋衫)·녹삼(綠衫)의 4단계로 나누었다. 그리고 자삼층을 제외한 단삼·비삼·녹삼층을 문반·무반·잡업(雜業)으로 구분하여 각 품(5∼10품)에 따라 전시(田柴)를 지급하였다.
이 때 문반·무반·잡업의 구분이 단삼층 이하에만 있고 자삼층에는 없었던 까닭은 아마도 자삼층이 고려 건국 초기의 호족들의 혈족·동족 집단을 기반으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문반·무반·잡업의 직능별 구분은 광종 이후 새로운 관료제가 수립되면서부터 새로 구성되는 단삼층 이하에 비로소 생겼다. 따라서 경종 전시과는 신라 말 고려 초의 호족 세력이 고려 관료제에 재편성되어가는 과도적 시기에 나타난 토지반급제(土地班給制)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경종 전시과의 문반·무반·잡업의 구분은 전시 지급을 위한 다분히 편의적인 구분이었다. 하지만 문반과 무반의 문자 상의 기원이 여기서부터 비롯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광종대에 4색 공복을 정하고 이때에 이르러 모든 관리들을 문반·무반·잡업의 세 부류로 나누게 된 것이다.
이것은 문·무에 구별이 없던 신라와 고려 초기의 관계에 비하여 일보 전진한 것이었다. 그러나 경종 전시과에 있어서도 문·무반의 구분은 정식으로 관계상의 문·무산계의 구분에 근거를 둔 것은 아니었다. 고려 초기의 관계에는 문·무산계의 구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명실상부한 문·무반체제를 갖추기 위해서는 문·무계가 구별되는 새로운 관계를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하여 995년(성종 14)에 고려는 당의 문·무산계를 채용하게 되었다. 이때에 제정된 문·무관계 29계는 무산관(武散官) 중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당나라 정관(貞觀) 11년(637)에 제정된 문·무계와 같은 것이었다.
995년부터 문·무산계가 실시됨에 따라 관제상의 문·무양반체제가 갖추어졌고, 제도적으로는 문반과 무반이 동등한 대우를 받는 것으로 되었다. 즉, 문반은 정치, 무반은 군사를 나누어 담당할 뿐 문반과 무반의 차별 대우는 없었다. 이것은 양반관료제를 균형 있게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조건이기도 하였다.
한편, 중국식 문·무산계가 실시됨에 따라 고려 초기의 관계는 향직(鄕職)으로 밀려났다. 향직은 중국식 문·무산계에 대칭되는 토착 관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13세기경까지 남아 있다가 소멸되고 말았다. 그러나 995년에 제정된 문·무산계는 당의 문·무산계를 그대로 채용했기 때문에 고려의 실정에 잘 맞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문·무산계가 불균형하게 활용되고 있었다. 문반의 지위가 무반보다 높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문·무산계는 실제적으로는 고려의 실정에 맞도록 활용되고 있었다. 즉 고려의 양반체제는 지나치게 문반 위주로 치우쳐 있었다. 이와같이 불균형한 고려의 문·무양반체제는 조선 초기에 이르러 어느 정도 균형을 찾게 되었다.
즉, 1390년(공양왕 2)에 무과가 설치되고, 1392년(태조 1) 7월에 문·무산계가 제정, 실시되어 명실상부한 문·무 양반체제가 갖추어졌다. 그러나 이 때 제정된 무산계에는 정·종9품계(正從九品階)가 없었다. 이 무산계 정·종9품계는 1436년(세종 18)에 이르러 보완되어, 조선시대의 문·무산계가 일단 갖추어지게 되었다. 이제 무신들은 고려시대와는 달리 무과를 거쳐 무관이 될 수 있었다. 그들은 문산계와는 별도로 무산계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1392년 7월의 문·무산계는 약간의 수정을 거쳐 ≪경국대전≫에 성문화되었다. 이로써 조선조 양반체제의 제도적 기반이 되는 문·무산계는 확정되었고, 관제상의 문·무반이라는 의미의 양반 개념도 확고한 제도적 근거를 가지게 되었다.
개념의 변화
고려시대에는 동반과 서반 이외에 남반(南班)이라는 반열이 있었다. 동반과 서반이 북좌남향(北坐南向)한 국왕에 대하여 동쪽과 서쪽에 서는 반열인 데 비하여, 남반은 남쪽에 서는 반열이었다.
남반직은 ≪고려사≫의 기록을 통해서 보면 적어도 1033년(덕종 2) 이전부터 있어온 듯하다. 남반직은 액정국(掖庭局)·통례문(通禮門) 등에 두어졌던 내료직(內僚職)으로서, 왕명출납·국왕호위·궁중당직 및 조회·의식의 의장(儀仗)을 담당하였다. 남반직이 이와 같이 국왕 측근의 내료직이었기 때문에 국왕의 입장에서 중요시하여 남반이라는 하나의 독립된 반열을 둔 것이었다.
그러나 양반관료체제가 정비되면서 남반은 동·서양반에 눌려 점차 7품 이하의 천직(賤職)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따라서 남반직은 잡류(雜類)·환관이나 승려의 자손, 혈통에 흠이 있는 양민(良民) 등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 맡게 되었다. 그리하여 고려·조선시대의 지배층은 동·서·남 3반이 아닌 동·서 양반으로 정립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양반이라 하면 본래는 문·무반직을 가진 사람만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양반관료체제가 점차 정비되면서 문·무반직을 가진 사람뿐 아니라 그 가족, 가문까지도 양반으로 불리게 되었다. 가부장적(家父長的)인 가족 구성과 공동체적인 친족 관계 때문에 양반 관료의 가족과 친족도 양반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음직(蔭職)과 과거를 통한 관직의 세전(世傳)과 그 들 간의 폐쇄적 혼인 관계로 더욱 심해졌다.
그리하여 관제상의 문·무반을 뜻하는 본래의 양반 개념은 고려·조선시대의 지배 신분층을 뜻하는 양반 개념으로 바뀌게 되었다. 고려시대의 양반이라 하면 대체로 관제상의 문·무반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고려 말 조선 초기부터는 양반이라 하면 관제상의 문·무반뿐 아니라, 점차 지배 신분층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아지게 되었다.
관련 용어
양반은 사대부(士大夫)·사족(士族)·사류(士類)·사림(士林)이라고도 불리웠다. 사대부란 본래 문반 4품 이상을 대부(大夫), 문관 5품 이하를 사(士)·낭관(郎官)이라고 한 데서 나온 명칭이었다. 따라서 사대부는 문관 관료만이 아니라 무반까지를 포괄하는 관제상의 문·무 양반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다시 말하면 사대부는 양반 관료 전체를 의미하기도 하였다.
문관 관료만을 지칭하는 사대부가 문·무 양반 관료의 뜻으로 쓰인 것은 조선이 문관 관료에 의하여 주도되는 국가였기 때문이다. 사대부는 특히 주자학을 신봉하는 고려 말의 문관 관료, 나아가서는 독서인층(讀書人層)을 의미한다. 사대부라는 용어가 고려 말 이후에만 나타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사대부 중에 사(士)는 다시 상사(上士)·중사(中士)·하사(下士)로 구분되고, 대부는 다시 공(公)과 경(卿)으로 구분되기도 하였다. 사대부가 될 수 있는 족속을 한편 사족(士族)이라고도 하였다. 사족은 ‘사대부지족(士大夫之族)’의 준말이다. 조선 초기에는 양반이라는 용어 못지않게 사족이라는 용어가 많이 쓰였다.
양반이라는 용어는 문·무반으로서의 양반, 지배 신분층으로서의 양반이라는 두가지 뜻을 가지고 있어서 혼동되기 쉬웠다. 반면, 사족은 양반 신분층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용어로 쓸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족과 비슷한 용어로 사류(士類)와 사림(士林)이 있었다. 사류는 사족과 마찬가지 뜻으로 쓰였다. 사림은 ‘사대부지림(士大夫之林)’의 준말로서 사대부군(士大夫群)을 뜻하였다. 따라서 사대부보다 사림이, 사림보다 사류가, 사류보다 사족이 더 넓은 범위의 양반층을 포함한다고 할 수 있다.
사림은 뒤에 유림(儒林)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관료가 되는 것이 양반이 되는 기본 조건이었다. 그러나 16세기 이후부터 양반층이 확대되어 모든 양반층이 4조(祖) 내에 관료인 조상을 가질 수 없는 경우도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양반이 되는 덕목이 유교 교양·관직 이외에 도덕이 포함되었다.
박지원(朴趾源)의 〈양반전〉에 “글을 읽는 사람을 사(士)라 하고, 벼슬하는 사람을 대부(大夫)라 하며, 덕이 있는 사람을 군자(君子)라 한다.”라고 한 내용이 그것이다. 조광조(趙光祖)의 도덕 정치도 이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며, 조선 후기에 유림이라는 말이 쓰인 것도 이에서 연유한다.
유림은 실제 정무에는 관계하지 않았지만 강력한 여론을 형성하여 정치에 막중한 영향을 미쳤다. 재야에 있는 산림(山林)이 여론을 움직이는 핵심이 되었다. 산림은 고려의 국사(國師)와 같은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이른바 유림들의 여론 정치가 실시된 셈이다. 이들은 대외 정치나 이데올로기 확립, 권력의 추이에 따라 집단으로 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 등이 그 예이다.
용어의 남발
양반 개념은 한말·일제시대에 이르러 크게 변화하였다. 조선 후기의 양반의 수는 공명첩(空名帖)·관직매매·족보위조 등을 통하여 극도로 늘어나게 되었다. 양반 중에는 문벌 가문이 있는가 하면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양반임을 모칭(冒稱)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그리하여 같은 양반 중에는 대가(大家)·세가(世家)·향반(鄕班)·잔반(殘班)의 구분이 생기게 되었다.
이에 따라 벌열(閥閱)이 아닌 미천한 양반은 양반으로서의 대우를 제대로 받을 수 없었다. 이러한 현상은 한말에 이르러 전통적인 신분 체제가 붕괴되면서 더욱 심해져서, 양반이라는 칭호마저 ‘이양반’, ‘저양반’ 하는 대인칭(對人稱)으로 격하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러한 대인칭으로서의 양반 칭호는 양반의 본래의 개념이 아니었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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