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SINA-신중국

철종의 작헌례 한 明陵은 明十三陵이 아닌가?

한부울 2009. 8. 21. 23:13

철종과 함풍제는 동일인물인가?(2) http://blog.daum.net/han0114/17049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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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의 작헌례 한 明陵은 明十三陵이 아닌가?


철종 13권, 12년(1861 신유 / 청 함풍(咸豊) 11년) 5월 13일(경자)

명릉의 작헌례를 섭행하게 하다

○庚子/明陵酌獻禮, 遣大臣攝行, 以仁顯王后舟梁舊甲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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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릉(明陵)의 작헌례(酌獻禮)에 대신(大臣)을 보내어 섭행(攝行)하게 하니,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주량(舟梁) 한 구갑(舊甲)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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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은 명릉을 작헌례 하였다는데 철종입장에서 하였다면 仁陵(순조나 순원왕후)에 할 수 있는 일이다.

명릉이라고 하는 것은 제19대 숙종과 제1계비 인현왕후, 제2계비 인원왕후 릉 이다.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없을 뿐더러 선왕으로서의 위치(舊甲) 말고는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

제왕이 舟梁舊甲 예를 하는 것에서 선왕릉 모두를 작헌례하는 것이 맞지 않겠는가 한다.

 

철종이 순조와 순원왕후에 얼마나 효성이 지극한 것인가는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 이돈영(李敦榮)이 지은 철종대왕 애책문(哀冊文)에 나타나는데 그 일부가 이렇다.

 

爲天植, 粤自沖齡居千乘尊, 篤行閔曾。 長樂萬歲, 觥稱玉鏤, 寵秩恩第, 以及耆舊。 春暉不淹, 恃舛卒鞠。 菓慕堯羹, 饍慼滕粥。 誠信勿悔, 躬詣佳城, 在古懿辟, 所未嘗行。 祖功純考文謨武烈世獻憲宗殷廟漢室。


효성은 하늘에서 타고 났으므로 어린 나이 때부터 천승(千乘)의 지존(至尊)에 있으면서도 민자건(閔子騫)과 증자(曾子)의 효성을 독실하게 행하였습니다. 장락궁(長樂宮:大王大妃거처)은 만세(萬歲)까지 장수하도록 옥(玉)으로 새긴 술잔을 올렸으며, 총애의 직질(職秩)과 은혜로운 급제(及第)는 기구신(耆舊臣)에까지 미치셨습니다. 그런데 춘휘(春暉:純元王后)가 오래 머물지 않아 끝까지 잘 보살펴 기르는 자정(慈情)이 어긋났습니다. 그리하여 과일을 보면 순(舜)이 국에서 요(堯)를 보는 것 같이 사모하는 마음이 일고 음식을 먹을 때도 등문공(滕文公)이 음식을 철폐하고 죽만 먹으면서 거상(居喪)하듯 슬퍼하였습니다. 성신(誠信)은 후회함이 없이 몸소 가성(佳城)능묘(陵墓)에 나아갔으니, 이는 옛날의 훌륭한 임금도 일찍이 행한 적이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순고(純考)순조(純祖)의 공을 높여 문왕(文王)의 모유(謨猷)와 무왕(武王)의 공렬(功烈)을 이루었으며, 헌종(憲宗)을 세헌(世獻)하여 은(殷)나라의 종묘(宗廟)와 한(漢)나라의 묘실(廟室)처럼 하였습니다.

 

철종 개인이 선왕의 사모하는 마음이라면 순조와 순원왕후 릉을 찾아 작헌례하였을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제왕된 입장에서 순조나 순원왕후를 기리겠다고하여 그분들의 仁陵만 찾을 수 없을 터 명릉이라고 하면 조선제왕들의 릉이기에 명릉 즉 지금의 명칭인 명십삼릉에 작헌하였다고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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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 12권, 11년(1860 경신 / 청 함풍(咸豊) 10년) 9월 26일(병진)

경희궁으로 이어하다

○移御于慶熙宮。

--------경희궁(慶熙宮)으로 이어(移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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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 13권, 12년(1861 신유 / 청 함풍(咸豊) 11년) 4월 21일(기묘)

창덕궁으로 환어하다

○己卯/還御昌德宮。

------- 창덕궁(昌德宮)으로 환어(還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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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 13권, 12년(1861 신유 / 청 함풍(咸豊) 11년) 4월 22일(경진)

시·원임 대신과 각신 등을 소견하다

○庚辰/召見時原任大臣, 閣臣還御後承候也。

--------시임(時任)·원임(原任) 대신과 각신(閣臣)을 소견(召見)하였으니, 환어(還御)한 뒤에 문안을 드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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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기록을 보면 첫째 경희궁과 창덕궁은 상당한 거리가 있는 곳이 아닌가 여겨진다.

서울 한성에 경희궁과 창덕궁이라면 정치적인 공백이 있을 수가 없다.

하지만 경희궁으로 이어 하고 창덕궁으로 환어하는 사이에 실록을 보면 철종 임금의 정치적인 행보가 단순하게 처리되었고 구체적인 것이 전혀보여지질 않는다.

태백성(金星)이 나타나다.

소대(召對)하다. 만 계속 반복되고 있다.

경희궁으로 이어 한 시기가 1860년 9월26,  다시 창덕궁으로 환어한 일자가 1년 못된 1861년 4월22일이다.

임금이 비로소 창덕궁으로 환어가 이루진 1861년 4월 22일 다음날 처음으로 신하들은 임금에게 문안을 드릴 수 있었다.

작헌례는 그 이후 있었는데 명릉이 있는 곳에 환어(창덕궁)한 22일 후인 5월13일 임금이 작헌례 앞서 대신에게 섭행 할 것을 명 한 것이다.

 

그렇다면 창덕궁이 있는 곳이 바로 명릉이 있는 곳이다.

 

이라고 하여  나라 라고 인식하는 것은 이젠 그만두어야 한다.

이상에서 도저히 한반도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 서오릉(西五陵)에 있는 명릉을 찾아 작헌례 하였다고 볼 수 없는 일이다. 明十三陵이란 후세 史家들이 13이란 숫자를 명릉사이에 끼운 것일 뿐 원래 明陵(明十三陵)은 조선제왕들의 무덤이다.

 

명나라 제왕들의 릉을 조선과 청 제왕들처럼 기록으로 뚜렷하게 들어내놓지 못하고 있는 사실도 있다.

청릉은 인조이후 조선 후기 왕릉 일 가능성이 많다.

 

끝으로 철종 자손들의 원인모를 몰살상황과 연계하고 비록 철종임금이 함풍제보다 2년 더 살았다고 하지만 함풍제가 죽은 시점이 철종도 죽었다고 보여 결국 철종과 함풍제가 뒤 섞여 있음을 알 수 있다.

함풍제의 이력이 자세하지 않는 것도 의심스러운 것이며 이후 철종 자손들이 원인 모를 몰살의 근원을 알게 되면 조선과 청이 보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후 청나라 계보는 조선의 계보를 그대로 이어 받았을 것이고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조선 후기 역사 통째로 이관시켰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게 한다.

 

청나라 역사는 곧 조선 후기 역사이다.

조선 후기 란 함은 광해폐위와 인조반정(1623) 이후 역사이다.

대륙사에서는 25,000,000 명이나 희생이 된 명청전쟁(1616~1662)이 있었고

조선에는 양대호란이라고 하지만 북인과 남인세력의 반란이라고 여겨지는데 짧고 미약한 충돌인지라 쉽게 이해 되지 않는 전개에서 의혹이 존재함은 물론이고 또한 후일 일제가 한반도 식민지정책 당위성의 근거로 연결시킨 정묘호란(丁卯胡亂1627년1월~3월)과 병자호란(丙子胡亂1636년 12~1637년1월)이 있었다.

 

이시기에 광해군 기록을 보면

1614년 광해군은 이복 동생인 영창대군을 강화도에 유배하였다가 얼마 후 방 안에 가두고 장작불을 지펴 죽였고

1615년 훗날 인조가 되는 능양군의 동생인 능창군까지 폐서인하여 교동에 안치하고, 결국 목을 매어 자결하게 하는 등 왕권을 위협하는 모든 세력을 제거함으로써 지나치게 많은 사람을 희생시키고, 이는 그동안 기가 죽어 있던 서인 세력에게 반정의 명분을 제공하는 원인이 되었다고 하는 점이며

1618년 계모인 인목대비를 폐위하여 5년간 서궁에 유폐시키고, 후궁으로 격하하였던 사건으로 말미암아 민심이 흉흉해지고 정국은 들끓어 인조반정으로 이어졌다 라고 나온다.

 

명청 전쟁이라고 함은 조선의 주류와 비주류에 쟁탈전이다.

그 영역은 남경 양자강 이남지역일 가능성이 많다.

 

 

주원장은 홍건적 출신이다.

주원장이 나라를 세운 곳은 양자강이남 남경이었음을 상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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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계보

王位

廟號

諡號

韓語

名諱

統治時間

王陵

追封

穆祖

仁文聖穆大王

목조 

이안사

李安社

追封

德陵

追封

翼祖

康惠聖翼大王

익조 

이행리

李行里

追封

智陵

追封

度祖

恭毅聖度大王

도조 

이춘

李椿

追封

義陵

追封

桓祖

淵武聖桓大王

환조 

이자춘

李子春

追封

定陵

1

太祖

康獻至仁啟運應天肇統廣勛永命聖文神武正義光德大王
高皇帝

태조 

고황제 

이성계

李成桂

1392年-1398年

健元陵

2

定宗

恭靖懿文莊武溫仁順孝大王

정종 

이방과

李芳果

1398年-1400年

厚陵

3

太宗

恭定聖德神功建天體極大正啟佑文武睿哲成烈光孝大王

태종 

이방원

李芳遠

1400年-1418年

獻陵

4

世宗

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

세종 

이도

李祹

1418年-1450年

英陵

5

文宗

恭順欽明仁肅光文聖孝大王

문종 

이향

李珦

1450年-1452年

顯陵

6

端宗

恭懿溫文純定安莊景順敦孝大王

단종 

이홍위

李弘暐

1452年-1455年

莊陵

7

世祖

惠莊承天體道烈文英武至德隆功聖神明睿欽肅仁孝大王

세조 

이유

李瑈

1455年-1468年

光陵

8

睿宗

襄悼欽文聖武懿仁昭孝大王

예종 

이황

李晄

1468年-1469年

昌陵

追封

德宗

懷簡宣肅恭顯溫文懿敬大王

덕종 

이장

李暲

追封

敬陵

9

成宗

康靖仁文憲武欽聖恭孝大王

성종 

이혈

李娎

1469年-1494年

宣陵

10

燕山君

廢王)

憲天弘道經文

緯武大王

연산군 

이융

李隆

1494年-1506年

海等村

11

中宗

恭僖徽文昭武欽仁誠孝大王

중종 

이역

李懌

1506年-1544年

靖陵

12

仁宗

榮靖獻文懿武章肅欽孝大王

인종 

이호

李峼

1544年-1545年

孝陵

13

明宗

恭憲獻毅昭文光肅敬孝大王

명종 

이환

李峘

1545年-1567年

康陵

14

宣宗
宣祖

昭敬正倫立極盛德洪烈至誠大義格天熙運景命神歷弘功隆業顯文毅武聖睿

達孝大王

선조 

이연

李昖

1567年-1608年

穆陵

15

光海君

廢王)

體天興運俊德弘功神聖英肅欽文仁武敍倫立紀明誠光烈隆奉顯保懋定重熙睿哲壯毅章憲順靖建義守正彰道

崇業大王

광해군 

이혼

李琿

1608年-1623年

烈陵

擅立

-

興安君

흥안군 

이제

李瑅

1624年

(非正統)

果川

追封

元宗

恭良敬德仁憲靖穆章孝大王

원종 

이부

李琈

追封

章陵

16

仁祖

憲文烈武明肅

純孝大王

인조 

이종

李倧

1623年-1649年

長陵

17

孝宗

宣文章武神聖顯仁明義

正德大王

효종 

이호

李淏

1649年-1659年

寧陵

18

顯宗

昭休衍慶敦德綏成純文肅武敬仁

彰孝大王

현종 

이연

李棩

1659年-1674年

崇陵

19

肅宗

顯義光倫睿聖英烈裕謨永運洪仁峻德配天合道啟休篤慶正中協極神毅

大勳章文憲武敬明元孝大王

숙종 

이순

李焞

1674年-1720年

明陵

20

景宗

德文翼武純仁

宣孝大王

경종 

이균

李昀

1720年-1724年

懿陵

21

英宗
英祖

至行純德英謨毅烈章義弘倫光仁敦禧體天建極聖功神化大成廣運開泰基永堯明舜哲乾健坤寧配命垂統景歷洪休中和隆道肅莊彰勛正文宣武熙敬

顯孝大王

영조 

이금

李昑

1724年-1776年

元陵

追封

眞宗

溫良睿明哲文

孝章大王

昭皇帝

진종 

소황제 

이행

李緈

追封

永陵

追封

莊宗
莊祖

思悼綏德敦慶弘仁景祉章倫隆范基命彰休贊元憲誠啟祥顯熙莊獻廣孝大王

懿皇帝

장조 

의황제 

이선

李愃

追封

隆陵

22

正宗
正祖

文成武烈聖仁

莊孝大王

宣皇帝

정조 

선황제 

이산

李祘

1776年-1800年

健陵

23

純宗
純祖

淵德顯道景仁純禧體聖凝命欽光錫慶繼天配極隆元敦休懿行昭倫熙化峻烈大中至正洪勛哲謨乾始泰亨昌運弘基高明博厚剛健粹精啟統垂歷建功裕范文安武靖英敬

成孝大王

肅皇帝

순조 

숙황제 

이공

李玜

1800年-1834年

仁陵

追封

翼宗
文祖

體元贊化錫極定命聖憲英哲睿誠淵敬隆德純功篤休弘慶洪運盛烈宣光浚祥堯欽舜恭禹勤湯正啟天建統神勛肅謨乾大坤厚廣業永祚莊義彰倫行健配寧基泰垂裕熙范昌禧立經亨道成獻昭章致中達和繼歷協紀剛粹景穆峻惠衍祉敦文顯武仁懿

孝明大王

翼皇帝

익종 

익황제 

이영

李旲

追封

綏陵

24

憲宗

體健繼極中正光大至聖廣德弘運章化經文緯武明仁

哲孝大王

成皇帝

헌종 

성황제 

이환

李奐

1834年-1849年

景陵

25

哲宗

熙倫正極粹德純聖欽命光道敦元彰化文顯武成獻仁

英孝大王

章皇帝

철종 

장황제 

이원범

李昪

1849年-1863年

睿陵

26

高宗

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堯峻舜徽禹謨湯敬應命立紀至化神烈巍勛洪業啟基宣歷乾行乾定英毅弘休壽康文憲武章

仁翼貞孝

太皇帝

고종 

태황제 

이재황

李熙

1863年-1907年

洪陵

27

純宗

文溫武寧敦仁誠敬孝皇帝

순종 

효황제 

이척

李坧

1907年-1910年

裕陵

 

北京市

 

明十三陵 明13人皇帝陵墓群 (2003年登録)


명조 16제가 묻혀 있다. 다만, 베이징의 명13릉은 13개의 능묘만 있다. 몇 개의 능묘이 존재하지 않은 이유는 각기 다르다. 명조 개국 황제 주원장은 도읍을 난징에 건설했는데, 그의 사후에 난징의 종산에 있는 명효릉에 장사를 치렀다. 주원장의 장손자인 건문제 주윤문은 연왕 주체에게 정난지변을 통해 왕위를 찬탈당했기 때문에 능묘가 없다.

 

위 두 릉 또한 조선 릉과 같다.

태조 릉 健元陵과 2대 정종 厚陵 또한 어디에 있는지 분명치 않다.

 

대종 경태제 주기옥도 황제였으나 폐위되어 정식 황제로 인정되지 않고 경태릉(景泰陵)으로 불렸으며 현재 베이징 근처에 묻혀 있다.

 

년대가 50년 정도 차이가 나지만 뉘앙스가 꼭 연산군을 상기케 한다.

숫자상 49가 94로 변한 것 같고 폐위된 년도 또한 50년 차이(?)를 두었다.


永楽帝成祖長陵: 40°18′5.16″N, 116°14′35.45″E

洪熙帝仁宗献陵: 40°18′18.12″N, 116°14′15.61″E

宣徳帝宣宗景陵: 40°17′54.14″N, 116°15′08.52″E

正統帝(天順帝)英宗 裕陵: 40°18′49.33″N, 116°13′55.56″E 景泰帝代宗 陵墓없다

成化帝憲宗茂陵: 40°18′51.60″N, 116°13′36.17″E

弘治帝孝宗泰陵: 40°19′23.33″N, 116°12′59.90″E

正徳帝武宗康陵: 40°19′10.03″N, 116°12′13.40″E

嘉靖帝世宗永陵: 40°17′18.09″N, 116°15′06.05″E

隆慶帝穆宗昭陵: 40°17′28.76″N, 116°12′38.55″E

万暦帝神宗定陵: 40°17′42.43″N, 116°12′58.53″E

泰昌帝光宗慶陵: 40°18′29.43″N, 116°14′01.32″E

天啓帝熹宗徳陵: 40°17′15.01″N, 116°15′35.91″E

崇禎帝毅宗思陵: 40°16′08.69″N, 116°11′32.64″E

 

湖北省

明顕陵 明嘉靖帝父陵墓 (2000年登録)


河北省


清東陵 清 5人皇帝陵墓群 (2000年登録)

世祖順治帝 孝陵、

聖祖康熙帝 景陵、

高宗乾隆帝 裕陵、

文宗咸豐帝 定陵、

穆宗同治帝 惠陵

太宗혼타이지・皇后孝荘文皇后(昭西陵)

咸豊帝・貴妃 同治帝生母西太后 定東陵


清西陵 清 4人皇帝陵墓群 (2000年登録)

世宗雍正帝(泰陵)

仁宗嘉慶帝(昌陵)

宣宗道光帝(慕陵)

徳宗光緒帝(崇陵)

宣統帝溥儀(1995年 근처 移設)


江蘇省

明孝陵 明洪武帝陵墓 (2003年登録)


遼寧省

永陵 後金 누르하치의 선조 4대의 능묘 (2004年登録)

東陵(福陵)後金의 누르하치 황제의 능묘 (2004年登録)

北陵(昭陵)後金 혼타이지 황제의 능묘 (2004年登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