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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신료(spice:香辛料)
음식에 풍미를 주어 식욕을 촉진시키는 식물성 물질.
영어로 스파이스(spice)라 하며, 스파이스라는 말의 어원은 후기 라틴어로 ‘약품’이라는 뜻인데, 한국어의 ‘양념’에 해당된다.
향신료는 세계적으로 보았을 때 상상 이상의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다. C.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 바스쿠 다 가마가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을 돌아 인도까지의 항로를 개발한 일, 마젤란의 세계일주 등의 목적의 하나는 스파이스, 즉 향신료를 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을 계기로 유럽인들의 세계 식민지화가 시작된 것이다.
유럽인들이 향신료를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로마가 이집트를 정복한 후부터이며, 그 당시 귀중하게 생각되었던 향신료는 인도산(産)의 후추와 계피였다. 무역풍을 타고 인도양을 건너 홍해를 북상하여 이집트에 달하는 항로가 개발되었기 때문이다. 1세기의 박물학자인 G.S.플리니우스는 “후추같이 영양도 아무것도 없는 것 때문에 매해 5000만 세스루티우스의 돈을 유출하고 있다”라고 개탄하였다. 그러나 로마는 자력으로 운반해 왔기 때문에 싸게 사용할 수 있었다.
중세에 들어와서 중동의 이슬람교도가 강력하게 팽창한 후부터는 유럽이 원하는 향신료는 모두 아랍 상인의 손을 경유하지 않으면 구할 수 없게 되었다.
그 때부터 정향(丁香:clove)과 너트메그(nutmeg)의 2종류가 중요한 스파이스로서 등장하게 되고, 이 2종류가 모두 몰루카 제도의 특산물이었기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멀리서부터 운반해 오지 않으면 안되었다. 따라서 가격이 오르고, 아랍 상인의 수중에 있었으므로 칼리프(calif)나 술탄(sultan)도 이것에 과대한 관세를 부가하여 더 비싸게 되었다. 알렉산드리아항(港)에서는 베네치아의 상인이 지중해를 경유하여 베네치아로 운반하고 그로부터 한자동맹 도시를 통하여 유럽 각지에 판매되었다. 그 양쪽 다 비싼 이윤을 요구했기 때문에 최종 소비자의 손에 들어갈 때는 비싼 가격이 되어 있었다. 후추는 은과 같은 가격으로서 화폐로서 통용된 때도 있었다고 한다.
왜 비싼 향신료를 무리해서까지 구입했는지를 살펴보면, 첫째로 그 당시 유럽의 음식이 맛이 없기 때문이었다. 교통이 불편하고 냉장시설이 없었던 시대였기 때문에 소금에 절인 저장육이 주식이었고, 그 외에는 북해에서 잡은 생선을 절여 건조시킨 것 정도였기 때문에 향신료라도 사용하여 맛을 돋우지 않으면 먹기 어려웠다.
둘째로는 약품으로서 사용되었다. 그 당시는 서양의학에서는 모든 병이 악풍(惡風)에 의하여 발생한다고 믿고 있었다. 악풍이란 악취, 즉 썩은 냄새로서, 이 냄새를 없애려면 향신료를 사용해야 한다고 믿었다. 일례를 들면 런던에 콜레라가 유행했을 때 환자가 발생한 집에 후추를 태워서 소독했다고 전해진다. 사실 향신료류에는 어느 정도 약효도 있고 소독효과도 있으므로 현재 한방약으로 사용되는 것도 있다. 그러나 그 당시는 몹시 과대평가되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 외에 악마 또는 귀신을 쫓는 약으로도 많이 사용되었다.
셋째로 향신료가 미약(媚藥)으로도 사용되었다. 향신료의 성분과 호르몬과의 상관관계는 아직 분명하지 않으나 약효가 있다고 믿으면 큰 효력을 발휘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이익이 많은 향신료 무역을 이슬람으로부터 탈취하려고 한 것이 15세기 말~16세기 초에 걸친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에 의한 원양항로의 개발이고, 그 선구적 역할을 한 것이 M.폴로의 《동방견문록》이었다. 이 책에는 상당히 불확실한 부분도 있으나, 그는 베네치아의 상인답게 향신료의 산지에 대한 기록은 정확하였다.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향신료 획득전쟁은 결국 동방으로 향한 포르투갈이 서방으로 향한 에스파냐를 이기고 그 무역권을 독점하게 하였다.
그 후 포르투갈도 몰락하고, 17세기 초부터는 네덜란드가 장악하게 되었다. 그러나 모두가 독점의 이윤을 많이 붙였기 때문에 유럽에서의 향신료의 가격은 싸지지 않았다. 그러나 향신료의 매매는 1650년을 경계로 하여 차차 경쟁이 완만해졌다. 그것은 미국 신대륙에서 고추 ·바닐라 ·올스파이스 같은 새로운 향신료가 발견되고, 특히 고추는 매운 맛이 후추에 비할 수 없이 맵고, 동시에 온대지방에서도 쉽게 재배되며, 올스파이스는 계피 ·정향 ·너트메그의 3가지 맛을 겸비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게다가 엽차 ·커피 ·코코아 같은 기호품도 이 때부터 먹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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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료무역 (spice trade : 香料貿易 )
고대 ·중세에 걸쳐 인도를 중심으로 동양과 서양을 이어주는 구실을 하던 향신료(香辛料) 무역.
동양과 서양을 연결하는 실크 로드에 비견되는 또 하나의 무역로로서 인도를 중심으로 동서를 연결하는 남방해상무역로가 있었다. 열대 아시아에서 생산되는 향료가 17세기 이전에는 아주 중요한 상품이었기 때문에, 이 해상무역로는 특히 스파이스 루트(spice route)라고 하여 서양인들에게 소중한 것으로 취급되고 있었다.
이 같은 향료(향신료)를 주축으로 하던 동서무역은 동 ·서 아시아를 기축으로 하여 서쪽으로는 유럽, 동쪽으로는 중국까지 연결되어 있었으며, 향료 중 주요 상품은 인도 ·수마트라 ·자바의 후추(pepper), 인도 ·스리랑카 ·중국 남부의 육계(肉桂:cinnamon/cassia), 몰루카 제도(諸島)의 정향(丁香:clove), 반다(Banda)의 육두구(nutmeg/mace) 등이었다.
스파이스 루트는 BC 1세기까지 홍해 및 페르시아만과 인더스강 방면을 연결하는 항해로였는데, 이 항로를 통해 로마 ·그리스인들은 인도양의 계절풍(monsoon)을 이용하여 연간 120 척에 달하는 대형선으로 후추를 가져갔다. 4, 5세기경에는 중국인이 남해에 진출하여 베트남과 말레이시아의 침향목(沈香木)을 가져갔다. 인도의 후추가 로마인의 수요를 크게 촉진시킨 이유는 그것이 당시의 치료약품이었고, 또 소화를 돕고 식욕을 증진시키는 강정제(强精劑)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로마의 대인도(對印度)무역의 1/2∼1/3 정도를 후추가 점유하고 있었다.
7세기에 이르러 이슬람이 융성하자 서남 아시아가 향료, 특히 후추의 대(大) 소비권으로 등장하였다. 이슬람 교도들은 인도의 말라바르 해안을 후추해안 또는 후추의 나라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유럽 사람들의 향료에 대한 기호의 증대에는 11세기 말에서 13세기 말에 걸친 십자군활동과 크게 관련되어 있다. 유럽 제국은 전후 8회에 걸친 십자군 원정으로 대형선박의 건조, 항해술 ·전술(戰術) 등 동방의 영향을 받았을 뿐 아니라, 쌀 ·후추 ·설탕 ·정향 ·육두구 등 신종상품을 접할 수 있었다.
이 같은 아시아 물산의 중계지로 콘스탄티노플이 등장하여 이탈리아 상인, 특히 제노바 ·베네치아 상인들이 활약하였다. 이러한 생활의 변화는 북해어업의 진보 및 축산발전에 더욱 힘입어, 염건어(鹽乾魚) 등의 보존 ·악취제거 ·소화촉진제 등으로 향료 수요에 급격한 증가를 초래하였다.
14∼15세기 향료는 중국의 견직물 ·도자기 ·구리, 인도의 면포(綿布) ·쌀, 유럽의 모직물 ·은(銀), 동아프리카의 금 ·상아 ·노예 등과의 직접적 ·간접적 무역대상 품목이 되어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인도 ·유럽 및 아프리카를 연결하는 데 공헌하였다.
[두산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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