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

서요 (西遼 Kara Kitai)

한부울 2009. 5. 24. 15:38

 

고려연방(Unite Corea)국가였다. http://blog.daum.net/han0114/17046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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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에 따르면 카라키타이는 스스로 역사 기록을 전혀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은 모두 분명치 않는 대륙(중공)사료와 이슬람사료에 의하는 것들이다. 한문사료나 아라비아어·페르시아어에서의 사료는 카라키타이史를 전문적으로 인용한 사서가 아니다. 때문에 동시대와 멸망 후에 역사를 정확하게 진단하고자 하고 재구축 코저 한다면 현재 연대조차 각각 다르게 단편적으로 기술되고 있는 모든 정보를 종합하여 연구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상태라고 하고 있다.

 

고려연방(Unite Corea) 서요 (西遼 Kara Kitai)

 

서료, 흑-거란 제국은 중앙아시아

[우리역사의 비밀:이태수]2008-04-10 08:31:27,

 

서구 역사에서는 중앙아시아에 있는 ‘흑거란(Kara-Khitan)’이라 하고, 서료라는 말도 쓰지 않고, 기원지를 만주라고 주장하지 않는데 반하여, 중국역사가는 만주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만주’라는 지명은 근세조선 초기 여진 추장 이만주에서 유래된 것으로 1600년대 후반부터 만주라고 불렀습니다. 그전 사료에는 만주라는 이름이 없는데, 거란왕국에 만주라는 지명이 나올리가 없습니다.

 

근세조선 초에 신강성 카자흐스탄 동북에 ‘건주위’를 설치하여 몽고, 여진 등을 관할했습니다. 이 건주위가 만주가 되는 것입니다. 서양에서 10세기경에 중국을 Khitan(Khita)이라고 불렀습니다. Khitai는 스키타이와 같은 글자로서, 거란족의 뿌리는 스키타이(Scythia 사카)족으로 돌궐족과는 구별이 됩니다. 그리고 박트리아(대하)의 월지족과 뿌리가 같습니다.

 

이리티쉬강은 Kara-Irtysh(Black Irtysh)라고 하며, 이리티쉬강에 黑자가 붙으므로 흑룡강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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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키탄한국 즉 흑거란한국은 1124년부터 1218년사이에 아래의 지도와 같이 분명히 중앙아시아의 키르기즈스탄과 아무다르여 강 주변이 그 강역이었다.

 

아래에 최두환님이 인용한 자료와 설명을 보겠습니다.

 

고려사 세가22 고종1을 보자.

 

(2) 1219년(기묘6) 가을 7월에 북계 흥화도(興化道)의 모든 백성들을 검열했다. …이 때에 간첩의 입에서 '몽고 사람들이 가을철에 다시 온다.'는 말이 나왔기 때문이다.

 

8월 임진일에 동북면 병마사가 보고하기를, '몽고와 동진국(東眞國)이 군사를 보내어 진명성(鎭溟城) 밖에 주둔시키면서 공납을 독촉한다.'고 하였다.

9월 신축일에 몽고 사절 1명과 동진국 사람 9명이 우리나라에 왔다.

 

이『고려사』의 내용으로 보면 같은 해 1219년인데, 일단 몽고 군사와 동진국(함경도 지역) 사람들이 고려에 왔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것이 몽고 징기스칸의 전투와 무슨 상관일까?

이때는 몽고의 징기스칸과 그 일당들이 서역지방 정벌에 나섰던 시기(1218∼1224)이다.

그 모든 군사를 동원하여 중앙아시아 지역에 전쟁으로 나섰는데, 나머지 몇몇 몽고 군사들이 고려에 와서 공물을 요구했을까? 군사적 위협은 없었을까?

그 간첩의 말이 이미 위협을 받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변방의 수비를 강화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몽고군들의 군사적 이동이 고려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3) 1218년(무인5) 8월 계미일에 글안(키타이)군이 양주(楊州)를 침략하고, 기사일에 서해도 방수군(防戍軍)이 곡주(谷州)에서 글안군과 교전하여 적 300명 남짓의 머리를 베었다.

 

12월 1일(기해)에 몽고 원수들이 합진(哈眞)과 찰라(札剌)가 군사 1만명을 거느리고, 동진(東眞) 포선만노(蒲鮮萬奴)가 보낸 왕안자면의 군사 2만 명과 합세하여 글안 적을 치겠다고 선언하고, 화주(和州) 맹주(猛州) 순주(順州) 덕주(德州) 네 성을 쳐서 깨뜨린 다음 곧장 강동성(江東城)으로 향하였다.

 

1220년(경신7) 3월 병오일에 글안군이 평로진(平虜鎭)에 침입하였다.

 

이 자료는 징기스칸이 서역을 공격한 1219년의 1년전과 1년후의『고려사』고종 때의 기록이다. 그런데 바로 그 1년전에 글안군이 쳐들어와서 전투를 했고, 1년 후에도 글안군이 쳐들어 왔다.

 

----인용 끝.

 

서요의 걸안이 망하는 시점인 1218년 8월 거란은 고려의 양주(楊州)를 침략하고, 같은 해 12월 몽고는 거란을 치겠다고 화주 맹주 순주 덕주를 치고 강동성으로 향합니다. 이로 볼 때 고려의 양주는 서료가 있던 아무다르여 강(우즈베키스탄) 주변에서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이 당시(1218∼1224)에 징기스칸은 서역 정벌을 나서고 인더스 강을 침략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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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ra-Khitan Khanate 흑-거란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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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p of Asia and Europe circa 1200 C.E. 서기 1200년경 유럽과 아시아 지도 [이 지도 역시 날조사관의 지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흑-거란한국(1124-1218년) 또는 서료(西遼) 또는 카라 키타드(몽고어)는 중앙아시아의 거란제국이다. 왕국은 야율달실이 창건하였으며, 여진족(쥬르천, 영어)이 만주에 있는 그들의 고향을 정복하자 요 왕조의 잔존세력과 함께 중앙아시아로 왔다. 이 왕국은 1211년 쿠츨루그(징기스칸에게 멸망당함)의 지도아래 나이만(몽고족)족에 의해 전복되었다; 중국, 페르시아 아랍의 사료에서 보면 이 전복으로 왕국은 멸망한 것이다. 이 왕국은 1218년 몽고제국에 의해 파괴되었다.

 

[나이만족: 나이만 돌궐족 또는 나이만 몽골족. 1177년까지 흑-거란에 종속되었다. 거란족과 마찬가지로, 많은 수는 네스토리우스 기독교인이었다. 현재 40만의 카자크인이 나이만족이다. 기원지는 동부 카자흐스탄이다.]

 

1. Names 이름

 

Liao funerary mask, an ancestor of the Kara-Khitans, 10-12th century CE.요 왕조의 장례용 가면, 흑-거란의 조상, 10-12세기.

 

카라-키탄(할라 키단)은 거란족이 자신을 가리키는 이름이었다. 이 어구는 종종 흑-거란으로 번역되었으나 원래의 의미는 오늘날 불분명하다. 왜냐하면 이 왕국의 직접적인 사료가 오늘날 없기 때문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사료는 밖에서 온 것이다. 왕국은 중국을 점령했기 때문에 중국 역사가는 일반적으로 이 왕국을 서료왕조라고 하는데, 만주의 요 왕조에서 지속된 것이라고 강조한다. 여진족은 이 왕국을 달실達實) 또는 달실린야라고 불렀는데, 그 이유는 이 왕국이 요 왕조의 옛 영토를 주장할까봐 서였다. 무슬림 역사가들이 처음으로 이 나라를 단순히 키타이라고 서술했다. 이 나라가 무슬림 세계에 카라-키타이로 언급되기 시작한 것은 몽고 정복 후였다. 

 

2. Administration 통치

 

거란왕국은 키르기즈스탄의 발라사군에 수도를 두고 통치했다. 제국의 중심지역을 직접통치했다. 제국의 나머지는 자치권이 높은 속국으로, 주로 콰레즘(화레즘) 왕국, 카룩 왕국, 고창(高昌) 위그르 왕국, 강리와 카리-카니드 왕국의 서부 동부 페르가나 등으로 구성되었다. 나중에 도착한 나이만족은 쿠츨룩에 의한 제국전복 전에는 역시 복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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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라사군: 한자로 팔랄사곤(八剌沙衮), 키르기즈스탄의 고대 소그드왕조의 도시, 추이(Chui)강 계곡으로 비쉬켁(Bishikek)과 이식쿨호 사이에 있다. Tokmak 남서쪽에 있다. 10세기부터 1218년 몽고의 정벌까지 흑-거란왕국의 수도였다. 몽고는 고발릭(예쁜 도시)라고 불렀다.

 

 

                           The Burana Tower, at the site of what was once Balasagun

Kara-Khanids 왕국: 카라-한니드는 카리한니드가 창건한 돌궐왕국이다. 흑한(黑汗), 도화석(桃花石)이라 한다. 즉 검은 왕이라는 뜻. 영역은 트란스옥시아나, 기간은 999년-1211년. 수도는 카쉬가르, 발라사군, Uzgen 그리고 다시 카쉬가르. 여기서 카쉬가르는 신강성 객십(喀什).

 

갈라록은 검은 이리티쉬 강 지역과 알타이산맥의 타바가타이산 서부에 사는 주로 돌궐유목민이었다. 갈라록은 차가타이 언어이다.

 

이리티쉬강: 이리티쉬강과 Ob강 유역은 분지를 형성하고 있으며, 16세기 전까지 칼믹족(오이라트,와랄)과 중국인 몽고인이 살던 곳이며, 그후 러시아인들이 도착하고,  19세가 되어서야 러시아에 완전 병합되었다. 이리티쉬강에 黑자가 붙으므로 흑룡강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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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통치자는 요왕조로 부터 많은 통치수단을 채택했으며, 유교식 통치와 황제 예복의 사용이 포함된다.

 

왕국은 또한 구르한(가한) 칭호를 채택했다. 거란족은 중국 달력을 사용했고, 중국의 황실과 관료의 칭호를 유지했으며, 황제에게 왕대명(王代名)을 부여했으며, 중국 양식의 주화를 발행했고, 황제의 봉서(封書)를 속국에 보냈다. 관료명칭이 대부분 중국에서 왔지만, 황제는 또한 타이양유(tayangyu ,돌궐어)와 위제르(vizier, 페르시아어, 제후의 왕 또는 술탄)와 같은 현지의 관료 칭호를 채택했다

 

거란은 중앙아시아에서도 옛 관습을 유지했다. 그들은 유목민으로 남아있었으며, 전통복장을 고수하고 요왕조의 거란족들이 행한 종교적 수행을 유지했다. 통치 상류층은 야율 왕가와 씨야오 배우자 씨족과의 전통적인 결혼을 유지하려 했으며 그들의 공주들이 외부인과 결혼하는 것을 매우 꺼렸다. 흑-거란 제국의 거란족들은 불교와 전통적인 거란 종교가 혼합된 것을 믿었으며, 그 종교는 불을 숭배하는 것과 회색 황소와 흰 말을 제물로 바치는 전통적인 부족의 관습이 포함된다. 흑-거란 제국의 독특한 제도는 군인에게 봉급을 지급하는 것이다.

 

제국은 통치자와는 매우 다른 다양한 백성을 통치했다. 인구의 대다수는 정착하였는데, 그러나 나이만족의 유입으로 제국의 말기에 갑자기 더 많은 수가 유목민이 되었다. 비록 중요한 자리의 소수가 불교도와 네스토리우스 기독교도였지만, 백성의 대다수는 무슬림이었다. 비록 관청의 주 언어는 중국어와 거란어였지만, 제국은 또한 페르시아어와 위그르어로 다스려졌다.

 

[위그르어: 사용지역은 중국 신강성, 카자흐스탄, 파키스탄, 키르기즈스탄, 타지크스탄이다. 돌궐의 구두어이다.]

 

3. History

 

흑-거란제국은 야율달실이 창건했고, 만주로부터 몽고를 거쳐서 중앙아시아로 거란족을 이끌고 왔다. 야율은 1134년 카라(흑)-카니드 한국의 발라사군을 정복했으며, 그 도시는 중앙아시아에서 제국이 시작된 곳이다. 거란의 군대는 곧 카라-카니드 한국의 백성이었던 1만명의 거란족이 참여하게 되었다. 그 다음 거란왕국은 카쉬가르(신강성 객십), 코탄(호탄,우전), 베쉬발리크를 정복했다. 거란은 1137년 쿠잔드에서 카라-카니드 한국의 서부를 점령했으며, 결국 통치권이 페르가나 계곡까지 이르렀다. 거란은 1141년 9월9일 서부 카라-카니드왕국과 캇완에서의 전쟁에 이겼으며, 이로 인하여 거란왕국은 트란스옥시아나 영역을 통치하고 콰레즘왕국을 그들의 속국으로 만들었다.

 

[Khujand(쿠잔드,후잔드): 타지크스탄의 두번째 도시로, 시르다르여 강 페르가나(대완) 계곡의 입구에 있다.]

 

야율은 1143년 곧 사망했고, 그의 아내 씨야오 탑불연이 아들을 대신하여 섭정이 되었다. 그들의 아들 야율 이렬는 1163년 사망했고, 그의 여동생 야율 보속완이 계승하였다. 그녀는 남편 씨야오 두올루부를 여러 군사 진영에 보냈다. 그녀는 곧 그의 남동생 씨야오 푸구지와 사랑에 빠졌다. 그들은 1177년 그녀의 시아버지 씨야오 월릴라에 의해 처형되었으며, 그는 1178년 야율 직로고를 왕위에 앉혔다. 제국은 특히 역사의 후반에 속국들 사이에서의 반란과 내전으로 쇠약해졌다. 1208년 나이만족은 고향을 떠나 흑-거란 제국으로 받아들여졌다. 1211년 나이만 왕자 쿠츨룩은 야율 직로고가 사냥하는 동안 그를 생포하였으며, 그래서 흑-거란 제국에서 거란의 통치는 끝나게 된 것이다. 몽고는 1218년 쿠츨룩을 붙잡아 처형했다. 몽고는 1220년 흑-거란 제국의 옛 영역을 완전히 정복했다.

 

역대군주

 

1.덕종 야율대석(德宗 耶律大石, 천우제(天祐帝), 재위 1132년-1143년)-요 태조 야율아보기의 8세손.

2.감천소태후 소탑불연(感天蕭太后 蕭塔不煙, 재위 1143년-1150년)-야율대석의 후처.

3.인종 야율이열(仁宗 耶律夷列, 소흥제(紹興帝), 재위 1150년-1163년)-야율대석의 막내아들.

4.승천태후 보속완(承天太后 普速完, 재위 1163년-1177년)-야율이열의 누나.

5.말제 야율직노고(末帝 耶律直魯古, 재위 1177년-1211년)-야율이열의 차남.

6.결제 크출르크(缺帝, 재위 1211년 - 1218년)- 야율직노고의 사위.

 

연호

 

연경(延慶) 1132년 - 1134년

강국(康國) 1134년 - 1143년

함청(咸清)

소흥(紹興)

숭복(崇福)

천희(天禧) 

 

姓名

在位起止

使用年号

备注

諡號或 庙号

耶律大石

(1124年-1143年)

延庆(1132年-1134年)
康国(1134年-1143年)

创立者

德宗

萧塔不烟

(1144年-1150年)

咸清

大石妻

感天皇后

耶律夷列

(1150年-1163年)

绍兴

大石子

仁宗

耶律普速完

(1164年-1178年)

崇福

夷列妹,政變身亡,蕭斡里拉監國

承天皇后

耶律直鲁古

(1178年-1211年)

天禧

夷列子,

乃蛮王子篡位

末主

屈出律

(1212年-1218年)

天禧(未改元)

乃蛮王子,

直魯古婿,灭于蒙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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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요(西遼:Kara Kitay)의 위치  

[율곤학회]노성매

 

 

서요의 위치에 관해서는 견해가 양분됨을 볼 수 있다.

 

요(遼)가 여진(女眞)에게 멸망하기 직전에 요의 황족이었던 야율대석(耶律大石, Yeh-lü Ta-shih, 재위 1124-1143)은 몇몇 동료들과 함께 초원 지역으로 도망하여 오늘날 추구착(Chuguchak) 근처의 타르바가타이(Tarvagatai)에 있는 이밀(Imil)에 근거를 두고, 돌궐계 국가인 카라한조(Karakhanid dynasty)의 도읍인 발라사군(Balasagun)을 탈취하여 카라 기타이(Kara Kitay, 西遼)라 불리는 새로운 제국을 수립하고, 구르칸(Gur Khan -'사해(四海)의 군주'라는 의미이다)이라는 왕명을 사용하였다.(출처/네이버 블로그)

 

다음은 미국의 역사학자인 룩 콴텐의《유목민족제국사》에서 발췌한다.

 

(142쪽~) 상당수의 거란인이 야율대석(耶律大石)의 지휘하에 사막과 스텦을 통과하는 긴 이동을 단행하여 트란속시아나(Transoxiana)에 정착하였다. 그들은 그곳에서 새로운 거란제국, 즉 카라키타이(Qaraqitai)를 건설했으니, 그것이 곧 중국사에서 <西遼>로 불리는 나라이다.

 

서요의 중심지가 발하시호 일대와, 트란속시아나 지방이라는 설로 양분되고 있다. 서요(西遼)에 대해서 [위키백과에서는] 수도가 키르기스스탄 토크모크의 부근이었다고 하고 [두산백과에서는] 서요는1141년 사마르칸트 부근에서 셀주크 제후(諸侯)의 대군과 싸워 승리를 거둠으로써 동서 투르키스탄의 전역이 서요의 영토에 편입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1141년에는 Qara khan 왕조에 원군을 낸 셀주크왕조(The Great Seljuq Empire)의 산쟈르Sanjar(1096~1157)에 대승했다. (셀주크왕조에 대한 전승이 유럽에 잘못 전해져 사제왕 요한 (Prester John)의 전설을 낳게 되었다고 말해진다). 이것에 의해 서Qara khan 왕조의 영토와 셀주크왕조의 맹하에 있던 호라즘·샤 왕조(Khwarezm-Shah dynasty)의 종주권을 수중에 넣어, 당시의 파미르 以東의 투루키스탄(서기151년)과 서방의 트란스옥시아나, 즉 현재의 동서 투르키스탄(Turkestan) 에 걸치는 지역의 지배를 확립했다. 1143년, 耶律大石는 遼의 고지의 탈환을 원하여 7만의 親征軍을 金에 대해서 출발시키지만, 행군중에 58세에 병사하여 東征은 중지가 되었다.

 

 

                                               사제왕 요한 (Prester John)

 

 

Depiction of the Kerait ruler Wang Khan as "Prester John" in "Le Livre des Merveilles," 15th century -토그릴 완 칸

 

 

                                   A map of Prester John's kingdom as Ethiop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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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지도는 <유목민족제국사>에 언급된 아무다리야강과 사르다르야강 사이의 트란속시아나 지방에 정착했던 西遼의 중심위치이다. 기록에는 나와 있지 않으나, 이때 西遼의 수도는 사마르칸드일 가능성이 크다.

 

 

 

어디에도 사마르칸드가 西遼의 수도였다고 기술되어 있는 곳은 없다. 그러나 서요가 트란속시아나 지방을 장악하고 있을 무렵, 살쥭제국은 그 일대로부터 패배하여 서남쪽으로 물러난 상태였으며, 살쥭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콰레즘(샤왕조) 역시 카스피해와 아랄해 사이에서 몸을 도사리고 있었다. 당시 콰레즘의 오랜 수도는 우르겐츠(우르겐치)였다.

 

(두산백과) 사마르칸드는 중앙아시아 지역의 가장 최중단 요새였으며, 수도로도 가장 적합한 곳이었고, 또한 물자와 자원이 풍부하여 중앙아시아 나라들의 수도로 자리잡혀온 곳이다. 11세기에 걸쳐 이슬람의 샤왕조가 사마르칸드를 탈취해서 이슬람의 성지로 만들었고 수도로 사용했었지만, 12세기 후반에 몽고군대에게 다시 점령당하면서, 이슬람의 샤왕조는 멸망하게 된다.

 

위의 기록은 애매모호하기 그지없다.

 

샤왕조가 11세기부터 몽고군에게 점령당하기까지 사마르칸드를 수도로 사용한 듯이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로 서요의 몰락기에 이를 때까지 샤왕조의 수도는 우르겐츠였다. 당시의 중앙아시아 판도를 <유목민족제국사>에서 발췌해본다.

 

(116쪽∼) 1137년경 카라키타이는 이미 코잔드(Khojand:시르다르야江 유역, 사마르칸드가 위치한 지방, 현 소련의 우즈벡공화국) 지방에 이르는 시르다르야 강 유역을 거의 전부 지배하였고, 사마르칸드에 내분이 발생한 것을 이용하여, 트란속시아나의 잔여 지방에도 침입하였다….

 

(살쥭제국의) 산자르는 카라키타이가 사마르칸드로 진군함을 전쟁개시의 이유로 삼아, 출동하여  1141년 사마르칸드의 동쪽 카트빈(Qatvin) 초원의 유슈르사나(Ushrsana) 근처에서 살쥭군사와 카라키타이 군사들은 대회전(大會戰)을 하였다. 이 전투에서 살쥭군은 치욕적으로 완전패배하였다. 그 결과 옥쿠스강(아무다리야강) 건너편의 전체 영토는 살쥭통치로부터 영원히 떨어져나갔다. 그보다도 더욱 중대한 결과는, 살쥭제국의 세력이 종말에 이르렀다는 현실을 그 지역에 존재하던 다른 부족들, 특히 콰레즘의 부족들에게 보여준 것이었다…….

 

(117쪽∼) 이슬람 사료에 <구르·칸 gur-khan>으로 불려진 카라키타이 지배자들은 이미 점령한 지역 이상으로 영토를 확장할 의사가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12세기의 마지막 4분기 중에 그들은 콰레즘과 충돌하게 되었다.

 

콰레즘이 카라키타이의 문제에 간섭이 용이할 수 있었던 것은 카라키타이 내부에 몇 가지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카라키타이의 정치, 특히 재정행정은 점차로 억압적으로 되어, 그에 반발하는 소규모 반란들이 자주 발생하였고, 더욱이 <구르·칸>의 위치를 둘러싼 왕실내의 치열한 분쟁 때문에, 각각 상당 기간 동안 실시되었던 수차에 걸친 여성에 의한 섭정으로, 제국의 핵심을 형성하였던 세력자체가 약화되었다.

 

13세기 초에 카라키타이의 동부국경에 칭기즈칸에 패퇴하여 밀려오는 나이만 Naiman이 등장하였다. 구르·칸은 나이만족을 퇴치하려고 노력하였으나 당시 카라키타이 국내에 무슬림(Muslim 이슬람교도) 반란이 발생하여 실패하였다.

 

나이만의 추장 쿠츨룩은 카라키타이군을 패퇴시켰을 뿐만 아니라, 결국은 그 왕조까지 멸망시켰다. 그러한 상황으로 인하여 콰레즘·샤(Qwarezm-shah)도 카라키타이 영토의 큰 부분을 점유하여 통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의 점령성공은 1212년 사마르칸드의 大血戰으로 획득된 것이었다.

 

콰레즘은 쿠라싼의 북쪽, 옥쿠스강 하류의 비옥한 지역에 있었다. 그 중심지는 10세기부터 발전된 구르간즈(Gurganj)市이었으며, 그 지역은 처음에는 카트의 아후리기드(the Afrigids of Kath), 995년 이후에는 마무니드(Ma'munid:995∼1017년) 왕조 등  토착 이란인이 오랫동안 통치 지배하여온 곳이었다.

 

그 시대부터 그 지역의 지배자를 콰레즘샤(Qwarezmshah)라고 불렀다.

 

그 당시 그 지역에는 고도로 문화가 발전되었던 것이 확실하지만, 튀르크(突厥)와 蒙古의 연이은 침략으로 파괴되어 오늘날 남아있는 유물은 거의 없다. 1017년에 그 전체지역은 가즈나비드의 통치하에 들어가, 1041년 오구즈(Oghuzz)가 그곳을 정복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 후 살쥭이 오구즈를 물리치고 그 지역을 12세기 초까지, 즉 살쥭세력이 쇠퇴할 때까지 지배하였다. 콰레즘 지역을 통치한 살쥭의 행정은 살쥭의 속국이었던 突厥系 아누쉬·테긴(Anush-tegin) 왕조가 담당하고 있었다. 콰레즘 통치관들은 알라 알·딘 앝씨즈('Ala al-Din Atsiz:1127∼1156년) 행정부 시대로부터 독립을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실제로 알씨즈는 大콰레즘 帝國의 창건자가 되었다.

 

그는 행정력을 최대한 동원하여 변경지방을 안정시키며, 아랄해와 카스피해 중간의 스텝지대에 거주하는 非이슬람 突厥部族들의 침범행위를 방비하였기 때문에 <가지ghazi>, 즉 <믿음의 수호자>라는 칭호를 얻었다.

 

 

 

살쥭朝 연대:1038∼1194년

콰레즘샤朝 연대:1077∼1231년

 

또한 마퀴쉴락 Maqishlaq 반도의 지배권을 확인하고, 킾착Qipcaq 스텝에 콰레즘의 세력을 확장시켰다. 앝씨즈는 산자르에 반기를 들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당시까지 살쥭 제국의 세력은 그가 전복시키기에 너무 강대하였다. 결국 앝씨즈는 살쥭의 신하로서 생애를 끝마쳤지만, 콰레즘국의 독립의 기초는 그에 의해 놓여졌던 것이다.

 

앝씨즈가 사망한 후 그의 계승자 일·아르슬란 Il-Arslan(1156-1172년)의 재위기간 동안에 콰레즘은 카라키타이의 속국이 되었다. 일·아르슬란은 구르·칸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려다가 카라키타이와의 한 전투에서 사망하였다. 그 전쟁은 콰레즘이 쇠약해진 카라키타이朝에 조공을 바치는 일을 기피하였기 때문에 발발된 것이었다.

 

그의 아들이며 계승자인 알라 알·딘 테키쉬 'Ala al-Din Tekish(1172-1200년)대에 콰레즘은 결국 독립하였다. 테키쉬는 구리드를 몰아내고 쿠라싼 전체에 대한 콰레즘의 지배권을 확립하였을 뿐만아니라 서부 이란 지역의 통치권에 대한 협상에도 성공하였다. 테키쉬가 군주의 位에 오르기까지 그의 적들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카라키타이의 조력에 의존한 바 적지 않았으나, 그는 聖戰(jihad)의 깃발을 카라키타이에 대하여 들었다.

 

13세기로 전환할 즈음에는 비록 원한을 사고는 있었으나, 콰레즘의 세력은 전체 트란속시아나에 확고히 구축되어 있었다. 테키쉬는 그의 아들 쿠틉 알·딘 무함마드 Qutb al-Din Muhammad(1200-1220년)에 의하여 계승되었으며, 그 시기가 콰레즘 제국 번영의 절정기였다. 그러나 쿠틉이 位에 오른 후 곧, 당시 급속도로 성장하는 蒙古 세력과 대치하게 되었다. …… 그의 부주의한 정책 때문에 칭기즈칸이 대대적인 복수의 전쟁을 일으키도록 자극했으며, 그 결과 1220년 콰레즘 제국은 완전히 붕괴되었던 것이다.

 

콰레즘의 멸망으로 蒙古族들에게는 당시 정치적으로 분열되었던 이란세계로 통하는 길이 열렸던 것이다.

 

13세기로 접어들 무렵의 중앙아시아 판도

 

 

                             위의 지도는 인터넷에 올려진 서요와 콰레즘의 강역이다.

 

수도를 토크모크 남서쪽에 있는 발라사군으로 하여, 발하시호 일대를 서요(西遼)의 강역으로 잡은 것이다. 그러나 룩 콴텐의 기록을 바탕으로 당시의 제국 판도[콰레즘·살쥭제국·西遼] 정리해보면

 

13세기로 접어들 무렵인 西遼 몰락기의 강역인 듯하다.

 

콰레즘이 우랄호 남쪽의 트란속시아나 지방을 지배하기 시작한 것은, 13세기로 접어들 무렵이었다. 콰레즘의 무함마드는 쿠츨루크와 손을 잡고 서요의 야율직노고를 몰아내게 된다. 유목민족제국사를 살펴보면, 콰레즘과 쿠츨루크가 연합하여 야율 직노고를 몰아내고 난 뒤, 두 나라 사이에 영토 전쟁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콰레즘은 트란속시아나와 사마르칸드 일대의 땅을 획득했던 것으로 보인다.

 

(117쪽) 나이만의 추장 쿠츨룩은 카라키타이군을 패퇴시켰을 뿐만 아니라, 결국은 그 왕조까지 멸망시켰다. 그러한 상황으로 인하여 콰레즘샤도 카라키타이 영토의 큰 부분을 점유하여 통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의 점령성공은 1212년 사마르칸드의 대혈전(大血戰)으로 획득된 것이었다….

 

야율직노고가 쿠츨루크에게 패한 것은 1211년, 콰레즘과 쿠츨루크 사이의 영토전쟁은 1212년, 쿠츨루크의 서요(西遼)의 몰락은 1218년 된다. 콰레즘과의 영토전쟁에서 패배한 쿠츨루크는 사마르칸드로부터 철수하여 발라시군으로 수도를 옮긴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서요(西遼)의 고려 침입에 대한 고려사절요의 첫 기록은 고종 3년(1216) 윤7월이다. 서요의 잔당을 토벌하기 위한 구실로 고려에 몽고군이 들어온 것은 1218년.

콰레즘국이 몽고사신을 죽인 시점은 1218년 이전으로 기록되어 있는데[사건 발생의 정확한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다고 함], 이때 칭기즈칸은 콰레즘국 정벌을 구상하고 있을 때였고, 서요는 그 길목에 처해 있었다.

 

1216년에 고려로 들어온 금산ㆍ금시왕자를 주축으로 한 서요의 잔당은 쿠츨루크에게 몰락당한 야율직노고 계통이거나, 콰레즘과의 전쟁패배 후 쿠츨루크를 따라 발하시호 쪽으로 함께 이동할 수도 없었던 잔당들로 보인다. 그들은 금산·금시 왕자를 주축으로 부녀자와 어린아이까지 데리고 대거 망명길에 올랐다.

 

고려에 침입한 서요의 무리를 보면, 가축과 부녀자에 어린이까지 거느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들의 西南으로는 콰레즘이 버티고 있었고, 北東으로는 쿠츨루크와 칭기즈칸이 있었다.

 

 

 

칭기즈칸과 쿠츨루크의 공격을 피하고자, 페르가나를 지나 시르다르야강 상류, 그리고 나만강 줄기를 따라 천산산맥의 협곡을 지나 타클라마칸 사막을 건너 초원지대를 찾아 東으로 東으로 이동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2008년 12월 23일 13시 48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