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

금(金)- Jin Dynasty (1115–1234)

한부울 2009. 5. 23.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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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연방(Unite Corea)국가였다. http://blog.daum.net/han0114/17046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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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연방(Unite Corea) 금(金) Jin Dynasty (1115–1234)

 

The Jīn Dynasty (Jurchen: Anchu, Aisin Gurun; Chinese: 金朝; pinyin: Jīn Cháo; Wade-Giles: Chin Dynasty; Mongolian: Altan Ulus; 1115–1234) 

 

高麗後裔


금(金, 1125년~1234년)은 북방 유목 민족 중 하나인 여진족 아구다가 세운 왕조로 1115년 아구다가 국호를 대금(大金), 연호를 수국(收國)이라고 하고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면서 정식으로 금나라가 역사 무대에 등장하게 된다. 수도는 북송 시대에는 상경 회령부 남송 시대에는 중도(中都)였으며, 몽골의 침략 이후로 수도를 카이펑으로 천도했다.


1125년에 여진의 금(金)왕조는 거란족의 요를 합병(거란족 중 왕족의 한명인 야율대석은 거란족을 포섭해서 서요를 세우나 징기즈칸에 의해 망한다.)하고 1153년에 수도를 요(遼)의 남경으로 이동하여 이곳을 중앙수도인 중도(中都)라고 불렀다. 1215년에 몽골이 중도를 불태우고 1237년에 금(金) 수도의 북쪽으로 다시 재건하였다.


금나라 건국 이전에 여진족들은 지금의 만주 헤이룽장 성에 거주하던 민족이었다. 여진족이라는 표현은 10세기 여진족 언어의 "여진"이라는 단어에서 나왔다. 이 단어의 기원은 현재 학계에서 합의되지 않은 상태이다. 고구려와 발해의 지배를 받다가 요나라의 지배를 받았다. 하지만 요나라의 지배가 약화되면서 여진족들은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결국 여진족들은 거란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시작했고, 1115년 아골타라는 뛰어난 지도자가 등장해 부족을 통합하고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며 금나라를 건국했다. 여진족은 자신의 왕조를 고향에 있는 강의 이름을 따라 금(金)이라고 지었다.


2대 태종 때인 1125년에는 송나라와 동맹을 맺고 요를 협격하여 만주지역으로부터 요를 멸망시켰다. 1126년에 송나라의 수도 카이펑을 점령하자 이들은 권력을 잡게 되었다. 여진 군대는 장강까지 남하하였으나 회하 부근에서 저지되고 남송은 일단 국경을 방어하게 되었다.


그러나 금나라는 송나라와의 사이에 불화가 발생하자 송나라 수도였던 허난 성의 카이펑을 공격하여 1127년에 송나라의 상황 휘종과 황제 흠종 등을 사로잡고 송나라를 강남으로 밀어냈다.


여진 부족들은 전쟁에 뛰어났으나 정착하여 수십년을 지내게 되자 점차 스스로 유목 정체성을 잃게 되었다. 결국 이들은 중국 한족과 혼인하기 시작하였으며 남송과의 평화를 공고히 하였다. 금나라의 지배자들은 유교 이념을 따르게 되었다.


1189년에 금나라는 몽골과 남송을 상대로 두개의 전선에서 싸우게 되었다.


제8대 선종(재위 1213년 ~ 1223년)은 1214년에 몽골군의 공격을 받고 이를 피하여 도성을 베이징에서 카이펑으로 옮겼다.


1234년 제9대 애종은 몽골, 남송 연합군의 추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살함으로써 금은 건국 120년 만에 멸망하였다.


대수

묘호

시호

성명

재위기간

-

금 시조
(金始祖)

의헌경원황제
(懿憲景元皇帝)

완안함보
(完顔函普)

941~960

-

-

연목현덕황제
(淵穆玄德皇帝)

완안오노
(完顔烏魯)

960~962

-

-

화정경안황제
(和靖慶安皇帝)

완안발해
(完顔跋海)

962~983

-

금 헌조
(金獻祖)

순렬정소황제
(純烈定昭皇帝)

완안수가
(完顔綏可)

983~1005

-

금 소조
(金昭祖)

무혜성양황제
(武惠成襄皇帝)

완안석노
(完顔石魯)

1005~1021

-

금 경조
(金景祖)

영렬혜환황제
(英烈惠桓皇帝)

완안오고내
(完顔烏古迺)

1021~1074

-

금 세조
(金世祖)

신무성숙황제
(神武聖肅皇帝)

완안핵리발
(完顔劾里鉢)

1074~1092

-

금 숙종
(金肅宗)

명예목헌황제
(明睿穆憲皇帝)

완안파자숙
(完顔頗刺淑)

1092~1094

-

금 목종
(金穆宗)

장순효평황제
(章順孝平皇帝)

완안영가
(完顔盈歌)

1094~1103

-

금 강종
(金康宗)

헌민공간황제
(獻敏恭簡皇帝)

완안오아속
(完顔烏雅束)

1103~1113

제1대

금 태조
(金太祖)

응건흥운소덕정공인명
장효대성무원황제
(應乾興運昭德定功仁明
莊孝大聖武元皇帝)

완안아골타
(完顔阿骨打)

1113~1115

 

대수

묘호

시호

성명

연호

재위기간

제1대

금 태조
(金太祖)

應乾興運昭德定功仁明
莊孝大聖武元皇帝

완안아골타
(完顔阿骨打)

수국(收國)1115~1116
천보(天輔)1117~1123

1115~1123

제2대

금 태종
(金太宗)

體元應運世德昭功
哲惠仁聖文烈皇帝

완안성

(完顔晟)

천회(天會)1123~1135

1123~1135

-

금 휘종
(金徽宗)

景宣皇帝

완안종준

(完顔宗峻)

-

-

제3대

금 희종
(金熙宗)

弘基纘武莊靖孝成皇帝
(무령황제<武靈皇帝>)

완안단

(完顔亶)

천회(天會)1035~1037
천권(天眷)1038~1040
황통(皇統)1041~1049

1035~1049

-

금 덕종
(金德宗)

憲古弘道文昭武烈
章孝睿明皇帝
(명숙황제<明肅皇帝>)

완안종간

(完顔宗幹)

-

-

제4대

-

廢皇帝
(해릉양왕<海陵煬王>)

완안량

(完顔亮)

천덕(天德)1149~1153
정원(貞元)1153~1156
정륭(正隆)1156~1161

1149~1161

-

금 예종
(金睿宗)

立德顯仁啓聖廣運
文武簡肅皇帝

완안종요

(完顔宗堯)

-

-

제5대

금 세종
(金世宗)

光天興運文德武功
聖明仁孝皇帝

완안옹

(完顔雍)

대정(大定)1161~1189

1161~1189

-

금 현종
(金顯宗)

體道弘仁英文睿德

光孝皇帝

완안윤공

(完顔允恭)

-

-

제6대

금 장종
(金章宗)

憲天光運仁文義武
神聖英孝皇帝

완안경

(完顔璟)

명창(明昌)1190~1196
승안(承安)1196~1201
태화(泰和)1201~1208

1189~1208

제7대

-

武平皇帝

완안윤제

(完顔允濟)

대안(大安)1209~1211
숭경(崇慶)1212~1213
지녕(至寧)1213

1208~1213

제8대

금 선종
(金宣宗)

繼天興統述道勤仁
英武聖孝皇帝

완안순

(完顔珣)

정우(貞祐)1213~1217
흥정(興定)1217~1222
원광(元光)1222~1223

1213~1223

제9대

금 애종
(金哀宗)

順靖皇帝

완안수서

(完顔守緒)

정대(正大)1224~1232
개흥(開興) 1232
천흥(天興)1232~1234

1223~1234

제10대

-

末皇帝

완안승린

(完顔承麟)

성창(盛昌)1234

1234


1.태조(완안旻) 세조·劾里鉢의 둘째 아들

2.태종(오걸매呉乞買) 劾里鉢의 4자. 태조의 막내아우. 

3.희종(합랄合剌, 완안亶) 태조의 적자승과(嫡子繩果)(경선제/완안종諾)의 장자. 

4.해능양왕(海陵煬王, 적고내迪古乃, 완안량(亮))태조의 庶長子 알본(斡本)(완안종간)의 둘째 아들

5.세종(오녹烏禄, 완안옹(雍)) 태조의 서자와리타(訛里朶)(예종/완안宗堯)의 적자. 

6.장종(麻達葛, 완안경(璟)) 세종의 둘째아들 호토와(胡土瓦)(현종/선태자·완안允恭)의 둘째 아들

7.위소왕(衛紹王)(흥승興勝=신살, 과줄果縄=하히, 완안영제完顔永済·允済=윤지) 세종의 七子. 장종의 숙부. 

8.선종宣宗(오도보吾睹補, 완안珣) 호토와(胡土瓦:완안윤공完顔允恭)의 서장자. 장종의 이모형. 

9.애종(哀宗)(녕갑속寧甲速, 완안수서(完顔守緒수왕·수례遂王・守礼) 선종의 3자. 별칭:의종. 

10.말제末帝 (호돈呼敦=호 톤, 완안승린完顔承麟), 강종康宗·오아속烏雅束=우야스의 후예


국성은 완안씨. 遼·북송을 멸해, 서하를 복속시켜, 중국남반의 남송과 대치했지만, 몽고제국(원)에 멸해졌다. 都는처음 회령(会寧 상경회령부, 현재의 흑룡강성), 후연경(燕京,中都大興府 현재의 북경)

 

정강(靖康:宋欽宗年號)의 변(變)


金건국전의 여진은, 현재의 중국 東北 지구(만주) 흑룡강성의 안출호수(按出虎水:아르츄후강) 유역에 있어, 遼에 대해서 복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遼의 지배자들은 사치가 심해, 여진족에 과혹하게 착취가 심하였다. 마침내 여진족의 완안부에서 있던 아구다(阿骨打)가 遼에 반란을 일으켜, 1115년 안출호수(按出虎水:아르츄후강)의 강변에서 즉위하고 건국하면서 金(여진어로 아르츄후)을 국호로 했다. 이 국호는 여진족이 안출호수로부터 산출하는 사금(砂金)의 교역 때문에 붙여졌다고 여겨진다.


金은 1120년에 북송과 海上의 盟이라고 칭해지는 맹약을 맺어, 遼를 협공하여 분할하고, 송측에는 연운16주(燕雲十六州)를 인도할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송은 공략에 애먹었기 때문에 金이 연경(燕京)을 떨어뜨려, 송에 할양 했다. 아구다는 1123년에 사망하지만, 남동생의 오걸매(태종)가 후를 이어 遼와의 싸움을 계속해 1125년에 피하고 있던 遼의 마지막 황제천조제(天祚帝)를 잡아 遼를 완전하게 멸해 내몽고를 지배했다.


연운십육주(燕雲十六州)는 중국 오대의 후진 건국자 석경당이 후당을 멸망시킬 때 원조를 받은 거란(契丹:遼)에 대해 그 보수로 할양해 준(937) 지방을 말한다. 현재의 베이징(北京)·다퉁(大同)을 중심으로한 유(幽)·계(薊)·탁(涿)·단(檀)·순(順)·영(瀛)·막(莫)·신(新)·규(媯)·유

(儒)·무(武)·울(蔚)(以上 河北省), 운(雲)·환(寰)·응(應)·삭(朔)(以上 山西省)의 16주로, 요는 유주를 남경, 운주를 서경이라 하고 이 지방을 통치했다. 중국의 후주 및 송에서 여러 번 이 지방을 탈환하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12세기에 송은 만주족의 금(金)과 연합하여 겨우 일부를 회복했지만 오히려 금에게 멸망당해, 그 지방은 금의 지배하에 들어갔다(1127). 이 지방에 있던 교양 있는 한인(漢人)은 요·금을 섬겼다.


한편, 연경을 손에 넣은 宋軍은, 遼의 잔존 세력과 손을 잡아 金을 견제하는 등, 맹약에 따라 연경을 할양 한 金에 대한 배신행위를 반복했으므로, 이것에 화난 태종은 1126년 송에 침공하여 화북(華北)을 석권하고 송의 수도 개봉(開封)을 포위했다. 송에서는 흠종이 새롭게 즉위하여 金의 포위를 풀고자 요구하여 金도 일단 화해 약속하고 北로 철수했다. 그러나 金군이 사라지자 또다시 송은 배신하여 화약을 깨려고 했으므로, 1127년에 金군은 다시 남하하여 개봉을 함락시켜 흠종을 북방으로 데리고 가 북송을 멸하였고 중국의 북반을 정복했다(정강의 변).


중국의 남북분열


이렇게 하여 金은 북송을 멸했지만, 중국에의 급속한 확대는 金의 군사적인 한계점을 명확하게 했다. 태종은 과도의 부담을 피하기 위해여, 화북에 한인에 의한 괴뢰국가(傀儡国家)를 수립하여 송의 잔존 세력과의 사이의 완충지대로 삼으려고 했다. 태종은 송의 대신인 장방창(張邦昌)을 황제에 앉혀 국호를 楚와 하였다. 그러나 장방창은 金軍이 황제로 삼자마자 퇴위를 선언하고 흠종(欽宗)의 남동생 조구(趙構:高宗)를 황제에 올리는 운동을 했다.


그 후, 조구등은 남쪽으로 피해 남방의 북송 잔존 세력을 규합해 남송(南宋)을 세웠다. 金은 이것에 대한 징벌을 명목으로서 재차의 남정을 개시하여, 회하(淮河)의 선까지 남하하고 악비(岳飛)등이 인솔하는 의용군과 싸웠다.


1130년, 金은 남송의 힘을 약하게 만들기 위하여 송의 지방지사에서 만난 류예를 황제에 세워 이번에는 안정된 괴뢰국가(傀儡国家)를 만드는 것에 성공했다. 동년, 송의 관료 秦檜가 포로가 되고 있던 金으로부터 남송에 귀국하여, 金과의 평화추진을 주창하여 실권을 잡았다. 金과 남송 쌍방에서 평화파와 전쟁파의 세력다툼 끝에 1142년 양국사이에 최초 화약이 체결되었다(紹興의 和議). 이 화약은 송은 金에 대해서 신하의 예로 삼고 세폐를 매년 지불하는 것 등, 金에 있어 압도적으로 유리한 내용이었다.


漢化


1149년에 선대의 희종을 죽여 제위에 오른 4대 해능왕(海陵王)은 宗族과 유력자를 대량으로 죽여 독재권을 확립하여, 都를 회령에서 연경으로 천도하여 중앙집권 국가수립을 목표로 하는 개혁을 진행시키고 있었다. 1161년, 해능왕은 중국의 재통일을 기도하고, 남송을 멸하기 위해서 남정의 군을 일으켰다. 金軍은 60만의 대군이었지만, 익숙하지 않는 水戦에 고전했다. 그 사이에 각지에서 契丹族의 반란이 발발했다. 해능왕은 그러한 통지를 받고서도 강경하게 송정복을 계속했지만, 해능왕의 공포정치를 싫어한 유직자들이 東京(遼陽)에 있던 황족의 오녹(烏禄)을 옹립하여, 金의 사람들은 전폭적으로 오녹을 지지했다. 해능왕은 군중에 살해되어 오녹이 즉위하고 세종이 되었다.


폐위된 고려 의종(1146~1170) 무신정변이란 느낌이 있다.


세종은 해능왕의 사후에 북진하여 온 남송군을 격파하여 화약을 맺었다(乾道和約). 그리고 契丹族의 반란을 신속하게 진압하고 국내를 안정시켰다. 한층 더 세종은 해능왕의 원정으로 대량소비된 재정재건을 목표로 하여, 증세나 관리들의 녹봉을 삭감했다.


동시기에 남송에서도 남송 제일의 명군으로 여겨지는 효종(孝宗)이 있어, 이후 40년동안 양국의 사이에 평화가 유지되었으므로 金은 번영과 안정을 구가하였고(大定다스림) 세종은 소요순이라고 칭하게 되었다. 하지만, 重税나 사회적인 긴축에 의하여 민중생활이 압박받아 金末 쇠망에 원인이 된 반란이 빈발하게 되었다고 하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평화가 오래지속되면서 여진인의 기풍이 쇠락하여, 여진족과 비여진족(契丹族을 포함)과의 비율이 1:6(정도)만큼이나 벌어져 여진의 군사력이 약체화되는 문제가 있었다. 세종은 한화(漢化)의 경향에 브레이크를 걸기 위해서 여진어를 보급, 사서오경등의 한문헌의 여진문자로 번역·여진어에 의한 과거의 실시등 여러가지 정책을 밝혔지만, 여진의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으면서 여진의 약체화가 점점 더 심해졌다.


쇠퇴멸망


세종의 뒤이어 1189년에 즉위 한 장종은 한문화에의 심취하고, 스스로 제2의 북송의 휘종을 자인하여, 회화(絵画)・書(책)의 작품을 남겼다. 또 이 시기는 국내가 안정된 시기라 明昌정치라고도 칭해지고 있다. 그러나 북방 몽고 高原에서는 부족 세력의 움직임이 활발하여 타타르(Tatar)나 契丹의 반란이 격렬해져, 金은 진압에 즈음하여 Kerait나 몽고의 도움을 빌렸기 때문에 Kerait나 몽고의 세력이 증대하면서, 1206년에 몽고의 징기스칸에 의한 高原의 통일을 간접적으로 도왔다. 한편, 북방의 動乱 영향으로 金이 피폐했다고 생각한 남송의 재상 韓侂胄는 이것을 호기라고 보고 1205년에 金에 쳐들어갔지만, 金에 격퇴되어 남송은  韓侂胄의 목과 교환하여 화약을 맺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그러한 안으로 7대 衛紹王이 즉위 하면서, 징기스칸은 조공을 거부하고 金과 단교하여, 1211년에 스스로 몽고군을 지휘 金領에 침공했다. 내몽고에 있던 契丹人을 복속시킨 몽고군은 금군을 물리쳐 장성을 돌파하여, 2여년에 걸쳐서 金의 국토를 유린약탈했다. 1212년에는 契丹人의 야률유가(耶律留哥)가 반란을 일으켜 분리하였고, 현재의 吉林省으로부터 遼寧省으로 걸쳐퍼져, 몽고 세력하에 들어갔다(東遼). 패배를 거듭한 金으로는 1213년에 쿠데타가 일어나 장군 호사호(胡沙虎)에 의해 衛紹王이 살해당하고 호사호(胡沙虎)마저 살해당했다. 잇따르는 패배에 의해 저항의 힘을 잃은 상태로 즉위한 황제선종은 동년에 몽고에 화해를 단행하여, 몽고에 대한 군신의 관계를 인정하고 歳貢를 거둘 것을 약속하면서, 황족의 딸(廃帝・衛紹王皇女)를 징기스칸에 시집갈 수밖에 없는 굴욕적인 내용의 강화를 하고 말았다.


강화에 의해 징기스칸은 철병 하지만, 金은 1214년에 몽고를 피하기 위하여 河南開封에 천도했다. 이 때 金의 南遷에 동요한 契丹의 일부가 中都(燕京)에서 반란을 일으켜 몽고에 원군을 요청하여 징기스칸도 金의 남천을 화약위반이라고 꾸짖어 金에 대한 재침공을 개시했다. 1215년 여름, 반년 이상 몽고군의 포위에 노출된 끝에 中都는 함락하여, 金은 故地東北를 포함한 황하이북의 대부분을 잃었다. 동년, 야률유가의 반란 진압을 담당하고 있던 포선만노(蒲鮮万奴)가 분리하여 大真国(東真国・東夏国)를 세워 요동반도에서 연해주남부까지를 지배했다.


金은 개봉을 수도로 河南地方에서 가까스로 명맥을 유지하지만, 그 후 몽고의 남진을 막을 수 있는 두, 1232년 三峰山의 싸움으로 대패하여 軍主力이 소멸되었다. 그 후 저항도 뜻대로 되지 않은채 1234년에 마침내 개봉(開封)이 포위, 점령되었다. 마지막 황제 애종(哀宗)은 개봉으로부터 탈출하여 채주(蔡州)에 피하다가 몽고와 남송의 연합군에 협공을 받고 자살하여, 金은 멸망 했다.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