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

탕구트족 (Tangut)

한부울 2009. 5. 21. 20:32
 

고려연방(Unite Corea) 탕구트족 (Tangut)


6세기 무렵부터 14세기경까지 중국 북서부를 중심으로 활약한 민족이다. 티베트계 강족(羌族)의 일족으로,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7세기 초부터 토번(吐蕃:티베트)과 칭하이[靑海] 지방의 강국 토욕혼(吐谷渾) 사이에 있는 지역에 거주하였다. 탁발부(拓跋部)의 수령 탁발적사(拓跋赤辭)가 토욕혼의 왕가와 통혼하면서 최강의 부족으로 군림하여 탕구트족의 지도권을 장악하였다. 당(唐)나라 태종의 회유책에 따라 탕구트족은 당에 복종하고 탁발적사(赤辭)는 이씨성(李氏姓)을 받았다.

 

그 후 토번이 흥성하여 토욕혼을 파하고 칭하이 지방을 영유하자 탕구트족도 토번에 흡수되어 그 지배하에 들어갔으나 일부 탕구트족은 8세기 후반부터 칭하이의 땅을 떠나서 북북동으로 향하여 간쑤[甘肅]의 동쪽 끝인 징저우[慶州]로 이동하였다. 그 부족을 동산부(東山部)라고 하고 9세기 중엽부터 링저우[靈州] ·옌저우[鹽州]의 남방산지로 옮겨간 부족을 남산부라고 칭하였다. 탁발부도 징저우로 들어갔으나 8세기 중엽부터 다시 오르도스 남부의 허저우[夏州]로 이동하였다. 이것을 평하부(平夏部)라고 한다. 따라서 당나라 말기 탕구트족은 동산 ·남산 ·평하의 3부족으로 대별된다.


9세기 후반 평하부의 수령 탁발사공(拓跋思恭)이 황소(黃巢)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당나라 조정으로부터 절도사에 임명되고 이씨성을 받았으며 그 자손은 대대로 허저우 정난군(定難軍)절도사를 세습하였다. 사공으로부터 9대(代)에 그 승습(承襲)을 놓고, 송(宋)나라에 복종한 형 계봉(繼捧)과 송에 반항하고 거란(契丹)에 신속(臣屬)의 예를 취한 아우 계천(繼遷)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다. 그 후 계천의 아들 덕명(德明)이 뒤를 잇고 송나라와 화해하였으며 덕명의 아들 원호(元昊) 때 독립왕국인 서하국(西夏國)이 탄생하였다.'하'라는 국호는 고대 중국의 하(夏)나라를 계승한 새로운 왕조라는 의미로, 이원호는 중국 전체를 점령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1044년 송이 서하에게 매년 조공을 바치기로 약속하자 이 계획을 중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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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ample of Xi-Xia (西夏文) script as used by Tangut people.

 

탕구트(Tangut)는 7 세기~13 세기경에 중국 서북의 四川省北部· 海성등으로 활동한 티벳계 민족. 11 세기 처음에 서하를 세웠다. 중국어 표기에서는 項. 일본어에서는 탕카트라고 한다. 같은 탕구트족. 탕구트족의 전신은 강(羌)이다. 項의 이름은 正史중에서 제일 오래된 隋書에 전하고 있어, 三苗(먀오족의 전신이라고 말해진다)의 후예라고 말한다.


당시는 선비계의 티벳의 유목민족 나라가 海에 세력을 가지고있었지만, 隋唐의 원정군에 대패해 쇠퇴하였고 대신 티벳계의 티벳제국이 세력을 늘려 탕구트족는 밀려 동쪽의 섬서·감숙으로 옮기고(遷) 목축·수렵·농경에 종사하였다.


탕구트는 東山部, 平夏部, 南山部, 横山部등에 나눠 그 안의 平夏部가 가장 강하고, 중국에 대해서 적대적이기도 했다. 平夏部의 왕족은 탁발(拓跋)을 자칭하고 있었지만, 탁발부가 유파를 이어받는 것은 아니고, 일찌기 크게 융성한 탁발부를 닮아 붙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당말, 황소(黃巢)의 란이 일어났을 때에 오랜 탁발사공(拓跋思恭)은 당(唐)을 원조하여 이 공적에 의해 姓의 이를 받아, 정난절도사에게 임명되어 夏, 綏(수), 銀, 宥, 의 5주를 지배했다.


중국에서 북송이 건국된 후, 사공(思恭)의 손자·이계봉(李繼捧)때에 내부에서 계승분쟁이 일어나 983년에 계봉(捧)은 송에 대해서 정주(静州) 이외를 스스로 헌상 해 복속(服)허용되어 개봉(開封)으로 이주했다. 그러나 남동생의 계천(繼遷:夏太祖,名李繼遷 963年~1004年.平夏部人)은 이것을 순종하지 못하고 송에 등졌으며, 東契丹에 복속하여 契丹보다 夏王에 봉(封)해진다. 후에 송에 복속(服)되어, 조보길(趙保吉)의 이름을 받지만, 곧바로 송을 배척하고 형이 헌상 한 4주(四州)를 만회하고 세력을 넓혔다.


1004년의 계천(李繼遷)의 사후, 아들 덕명(李德明:西夏太宗.夏太祖李繼遷長子981年~1031年)이 후를 잇는다. 전연에 契丹이 송과 화해하고 있어(澶淵의 盟), 단독으로는 송과 대적할 수 없기 때문에 다음 해에 화해하고 송에1만량, 견1만필, 동전2만관, 차2백근의 세폐했다.


전연의 맹(澶淵之盟)은 중국의 송(宋)에 침입한 요(遼)의 성종(聖宗)과 이를 막기위해 북상(北上)하였던 송의 진종(眞宗)이 전주(澶州)에 대진(對陣)하고 체결한 강화조약이다.

 

그 조건은 다음의 3개조이다.

 

송(宋)은 군비(軍備)로서 요(遼)에 매년 비단 20만 필, 은(銀) 10만 냥을 보낸다.

진종은 성종의 모친을 숙모(叔母)로 삼고 양국은 형제의 교분을 갖는다.

양국의 국경은 현상대로 한다. 양국의 포로 및 월경자(越境者)는 서로 송환한다.

 

이 조약 체결 후 요와 송 사이에는 오래 평화가 유지되었으며, 그 결과 요는 문화가 발달하고 경제상으로도 발전을 이루어 동아시아 제1의 강국이 되었다. 전연(澶淵)이란 전주(澶州)의 아명(雅名)이다.


송과는 화목 했지만, 위구르등과는 항쟁을 계속해 더욱 세력을 확대하여 덕명의 아들  黨項族人 원호(李元昊:西夏景宗(1003年~1048年)西夏倂國皇帝(1038年~1048年在位)의 시대에 송에서 독립하여 대하(大夏)를 자칭했다. 중국에서는 서하(西夏)라 한다.


위구르 제국(한자: 回紇/ 回鹘)은 위구르족이 세운 제국이다.

위구르족은 동돌궐의 지배를 받으며 셀렝가 강 유역에서 거주해 오다, 744년 동돌궐을 멸망시키고 위구르 제국을 건설하였다. 위구르 제국의 건설자는 쿠틀루그 빌게 카간(Kutlug Bilge Kagan, 骨力裵羅)으로 알려져 있다.


실질적으로 중앙아시아의 중심 지역에서 동서의 교역을 통제하는 제국이었으며, 840년 키르기즈족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거의 1세기 동안 중앙아시아 중남부의 스텝지대를 지배하였다. 수도는 카라발가순이었으며, 사회구조는 유목사회와 영농 정착사회의 특징을 혼합한 형태였다.


유목 민족의 배경을 가진 국가로서는 이례적으로, 중국과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 위구르 제국과 중국은 대체로 평등한 관계에 있었으며, 757년, 당조가 안록산의 난으로 인하여 위기를 맞게 되었을 때 위구르군이 수도 장안까지 진군하여 당조를 구원하기도 하였다.


반면 티베트와는 전쟁을 벌이는 등 대립하였다. 위구르는 감수 협곡을 침입하여 중국과의 교역을 단절시키려는 티베트 제국에 대해 군사 행동을 취해 822년 이후에는 이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후 원주민과 소수 인도-유럽계 부족들을 압도하고 돌궐계 부족들이 비단길의 요충지에 침투 정착함으로써 돌궐계 언어와 문화가 그 지역에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스텝의 서부 사마르칸트와 부하라 지역에는 4세기 때부터 페르시아계의 소그드인들이 살면서 비단길의 중계무역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중국과 통하는 비단길을 장악하고 있는 위구르와 교역상의 이유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은 점차로 위구르에 흡수되어 투르크족화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소그드인들은 위구르인들에게 마니교를 전해주었다.

                                        天寶七年(748年)大唐주변국가지도

 

서하(西夏:Xi Xia)는 1032년에서 1227년까지 중국 북서부의 간쑤 성(甘肅省), 산시 성(陝西省)에 위치했던 티베트계 탕구트족의 왕조이다. 전성기에는 북으로는 고비 사막, 남으로는 난주, 동으로는 황허, 서로는 옥문에 이르는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서하는 탕구트 유목민들이 간쑤 성, 알라샨, 오르도스에 세운 나라이다. 탕구트인들은 티베트 종족에 속했으며 국교는 불교였고 중국의 영향으로 문화가 상당한 수준으로 발달되어 있었으며 한자에서 파생된 문자 서하 문자를 가지고 있었다.

 

서하(西夏)는 1227년에 징기스칸에 의해 멸해져 탕구트는 색목인(色目人)중에 흡수되었고 그 후 민족으로서의 큰 움직임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