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하는 말이지만 중국인이라는 표현에는 우리역사가 존재하였고 주체가 되었음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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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전해지는 불교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이 이제까지 우리는 간다라와 마투라의 불상 조각을 중심으로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印度)에서 어떻게 불상이 출현하여 양식이 진전했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았다. 겨우 기념주(紀念柱)나 세우던 초기 불교미술 단계로부터 불상의 표현을 금기로 여기던 무불상시대(無佛像時代)를 거쳐 불상이 출현하여 양식변천을 거듭하는 과정을 시대적으로 또는 지역적으로 추적하면서 고찰해온 것이다.
가능한 한 한 시대 한 지역의 대표적인 양식을 놓치지 않으려 애써왔지만, 워낙 장구한 세월 동안 광대한 지역에서 종교적인 신념을 가지고 전개되었던 미술활동이라서 그 대강의 줄거리조차 잡혔는지 의심스럽다.
이제 법수동류(法水東流;법의 물길이 동쪽으로 흐름)의 인연에 따라 동쪽으로 눈을 돌려 인도대륙에서 싹튼 불상 조각이 중국대륙에서 어떻게 꽃피고 열매맺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아야 하겠다.
중국에 불교가 전해지는 것은 대체로 후한(後漢) 명제(明帝, 58~75년)시대라고 한다. 옛날부터 주석가(註釋家;경전이나 역사책의 알기 어려운 구절을 쉽게 풀어놓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나 불교학자 중에는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가 6국(國)을 통일한 다음 병장기를 모아들여 이를 녹여서 만들었다는 12금인 (金人;쇠로 만든 사람)이 중국 불상의 시초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또 어떤 이들은 한(漢) 무제 (武帝) 때의 장군 곽거병(藿去病)이 흉노를 정벌하고 나서 깨뜨려버렸다는 흉노의 금인(金人)이 불상일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했다. 흉노의 금인은 흉노의 휴도왕(休屠王)이 하늘에 제사지내기 위해 천신을 형상화한 것이었다 한다.
그러나 진시황이 12금인을 만든 것은 진시황 26년, 즉 서기전 221년의 일이고 곽거병이 휴도왕의 제천금인을 파괴한 것은 한무제 원수(元狩) 2년, 즉 서기전 121년의 일이니 인도에서도 아직 불상이 출현하기 이전의 일이라 이제껏 우리가 살펴본 인도 불교 조각사의 지식으로 보면, 이런 주장들은 성립할 수 없다.
불교측의 기록에서는 명제 영평연간(永平年間)에 불교가 공식적으로 들어온 것처럼 서술하고 있으나, 최근 수야청일(水野淸一) 등 일본학자들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이런 기록은 대체로 삼국시대인 3세기 중반부터 그 골격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여 육조(六朝)시대 초기인 5세기경에 완성되는 설화라고 한다. 그러나 이런 설화가 후대에 사실(史實)로 인정되어 ‘위서(魏書)’ 권114 석로지(釋老志)에 그대로 수록되면서 정사(正史)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이야기의 내용은 이렇다.
후한 명제 영평연간에 황제가 꿈을 꾸니, 키가 장륙(丈六)이나 되는 금빛 나는 신인(神人)이 목 뒤에서 태양과 같은 빛을 내며 하늘을 날아 전각(殿閣) 앞에 내려앉았다. 다음날 명제는 이 사실을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고 무슨 조짐이냐고 물으니 통인(通人) 부의(傅毅)가 나서서 이렇게 아뢰었다.
“서역(西域)에 불타(佛陀)라는 호신(胡神;오랑캐 신)이 있고 그 몸에서 금빛이 난다 하니 아마 그 금빛 나는 신인은 불타일 것이며 전각 앞에 날아 내린 것은 그 법이 전해올 조짐인가 봅니다.”
이에 명제는 낭중(郎中) 채음(蔡?)과 박사제자(博士弟子) 진경(秦景), 왕준(王遵) 등을 사신으로 보내어 불법을 받아오게 하는데, 이들이 대월지(大月氏)국의 국경에 이르니 가섭마등(迦葉摩騰)과 축법란(竺法蘭)이라는 두 전도승(傳道僧)이 부처님 당시에 우전왕(優塡王)이 네 번째로 만들었다는 석가모니 불입상 (佛立像)과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을 모시고 중국으로 오는 중이었다.
그래서 이들과 함께 돌아와 가섭마등과 축법란이 모시고 온 석가입상을 명제에게 보이자 명제는 바로 꿈에 보았던 것이라고 크게 기뻐하면서 화공(畵工)으로 하여금 이를 그리게 하여 청량대(淸凉臺)와 자신의 수릉(壽陵;중국 문화권에서는 제왕이 자신의 무덤을 미리 마련해 놓고 부장품을 생시에 계속 비치해 두는데 이를 수릉이라 한다)인 현절릉(顯節陵)에 안치하게 한다. 그리고 가섭마등과 축법란은 낙양성 서문 밖에 절을 지어 살게 하는데 백마(白馬)가 경전과 불상을 실어왔다 하여 절 이름을 백마사(白馬寺)라 했다는 것이다.
이 내용은 종교적인 색채가 농후하여 설화 이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우나 당시 불교가 분명히 전해져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후한서(後漢書)’ 권42 광무시왕열전(光武十王列傳) 초왕(楚王) 영(英)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초왕 영이 불교를 믿었으며 이포새(伊蒲塞, 優婆塞, up~asaka의 음역)에게 반공(飯供; 음식을 공양함)했다는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기록이 아니더라도 당시에 서역도호(西域都護) 반초(班超, 42~102년)가 서역경영(西域經營)에 열을 올리고 있어 쿠샨왕조의 웨마카드피세스 군대와 맞부딪칠 정도였으니 불교 전래는 당연히 이루어지고 있었을 것이다.
초기 기록들은 모두 영평연간이라고만 하던 것을 수대(隋代)에 와서 비장방(費長房)이 ‘역대삼보기 (歷代三寶記)’ 권4에서 영평(永平) 7년이라 했고, 당(唐) 도선(道宣)은 다시 ‘집고금불도론형(集古今佛道論衡)’ 권 갑(甲) 및 ‘광홍명집(光弘明集)’ 권1에서 영평 3년이라 했으며, 원(元) 염상(念常)은 ‘불조역대통재(佛祖歷代通載)’ 권4에서 영평 4년이라 하여 일정치 않은데, 요즘 통용되는 영평 8년설은 아마 ‘후한서(後漢書)’ 권42 광무시왕열전 초왕 영(英)조의 영평 8년 불교관계 기사에서 빌려온 내용일 것이다.
이 시기는 인도에서도 불상이 이제 막 출현하는 시기이므로 불상이 들어왔다면 초기 사실적인 표현을 한 간다라 불상이었으리라고 생각되는데 그것이 어떤 것이었는지 아직 발견된 예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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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길을 따라온 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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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1902년 일본인 대곡광서(大谷光瑞)가 이끄는 대곡탐험대가 타클라마칸 사막의 서역 남도에 위치한 코탄(Khotan, 和? 또는 于?)의 절터에서 발견한 <금동불두(金銅佛頭)>(도판 1) 하나가 초기 간다라 불상양식을 보여주는 것이어서 간다라 불상양식이 이 서역 남도를 거쳐 중국으로 전래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떻게 대곡탐험대가 이런 일을 해낼 수 있었는지 그 경위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9세기 후반기 이래 러시아의 팽창정책이 노골화되자 중앙아시아의 중요성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러시아 뿐 아니라 러시아의 팽창을 저지하려는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서구 열강들은 학술조사라는 명목 아래 중앙아시아의 오지(奧地)에 탐험대를 계속 파견하여 그 정황을 탐지하게 된다.
이에 명치유신(明治維新, 1868년)으로 뒤늦게 세계 열강 대열에 끼게 된 일본도 대륙 진출의 꿈을 안고 이들과 함께 이 일에 참여하게 된다. 그런데 서구 열강이 기독교 선교사를 앞세워 식민(植民)의 발판을 마련하는 방법을 지켜보고 있던 일본은 불교의 원류(源流)를 탐사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불교 교단으로 하여금 독자적인 탐사를 시도하게 한다. 이 역할을 담당한 것이 본파본원사(本派本願寺) 22대 종주 (宗主)로 본원사 관장직(管長職)을 겸하고 백작(伯爵) 작위를 이어받고 있던 약관 25세의 패기만만한 소장 귀족 승려 대곡광서(大谷光瑞)였다.
대곡 일행은 1902년에 영국의 도움을 받아 런던에서 탐험에 필요한 장비를 구입하고 8월에 런던을 떠나 러시아의 카스피해 서안 바쿠(Baku)에 도착한다. 바쿠에서 카스피해를 건너 사마르칸트(Samarkand)를 거쳐 천산(天山)산맥 테레크령을 넘어서 중국 신강성(新彊省) 카슈가르(Kashgar, 疏勒)에 도착한다. 즉 파미르고원(蔥嶺) 동쪽의 동(東)파키스탄에 이른 것이다.
여기서 이들은 야르칸트(Yarkand, 莎車)를 거쳐 타슈쿠르간(Tashkurgan, 盤陀)의 탐험에 들어간다. 타슈쿠르간에서 이들은 대(隊)를 나누는데 대곡은 본다혜륭(本多惠隆)과 정상홍원(井上弘圓)을 거느리고 힌두쿠시 산맥의 민다카령(嶺)을 넘어 카슈미르(Kahsmir)로 가서 인도 탐사에 들어가고 도변철신 (渡邊哲信)과 굴현웅(堀賢雄) 두 사람이 주축이 된 일대(一隊)는 천산남로(天山南路)의 서역(西域) 남도(南道)에 위치한 코탄을 거쳐 타클라마칸 사막을 가로질러 서역북도에 위치한 아크수(Aksu)와 쿠챠(Kucha, 龜玆), 그리고 천산북로(天山北路)의 투르판(Turfan, 高昌), 합밀(哈密, Hami), 오이목제(烏爾木齊, Urmuchi)로 해서 난주(蘭州) 서안(西安)에 도달하는 여정을 잡는다. 이때 도변-굴 탐험대가 코탄의 절터에서 찾아낸 것이 이 금동제 불두이다.
우리는 이 불두가 간다라 초기 불상 양식을 구비하고 있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높고 크게 틀고 있는 북상투(團쬇)의 사실적인 표현에서 상투끈을 맺어주는 계주(쬇珠)의 표현이 분명하다든지 코밑 수염이 뚜렷하고 눈이 전개정시(全開正視;완전히 뜨고 똑바로 쳐다봄)로 크게 표현되었으며 귓불이 크게 늘어지지 않는 등 양식화나 신비화가 조금도 진행되지 않은 초기 간다라 불상의 사실적인 표현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간다라 지역에서도 단독 입체상으로 이와 같이 초기 양식이 분명한 단독 불상은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다. 다만 불전부조(佛傳浮彫)에서 이런 특징들을 구비한 예들이 상당히 남아 있을 뿐이다.
이 불두 양식이 초기 불전부조의 불상 양식과 약간 다른 것은 상투끈이 2중으로 되어 있고, 계주의 표현에서 구슬 모양의 대구(帶鉤;혁대고리) 형태가 아닌 매듭(鉤紐)형인 듯한 점이다. 백호(白毫)의 표현이 미간(眉間)이 아닌 이마 위(天庭部位)에 있는데 중앙의 백호 둘레에 일곱 개의 백호를 돌려 장식한 복잡한 모형태여서 한 개의 구슬로 표현되던 간다라 초기 불전부조의 불상양식과는 크게 다른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이 불두가 이 코탄 지역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 지역 풍속 습관을 반영한 것으로 파악해야 할 특징 같다.
어떻든 이와 같이 간다라 초기 불상양식을 그대로 간직한 불상이 만들어지려면 간다라 불상 편년상으로는 2세기 전반을 내려올 수 없다. 그런데 이 불두의 얼굴 모습으로 보아서는 페르시아계의 용모임에 틀림없다. 이런 용모의 특징이 이후 코탄의 불상이나 불화에 계속 이어지므로 이 불두 자체는 코탄에서 만들어졌다고 보아야 하겠다.
그렇다면 간다라 지역에서 파미르고원의 험난한 준령을 넘어, 열사(熱沙)의 땅 타클라마칸사막을 지나서 찾아와야 할 이 오아시스의 나라 코탄에서 어떻게 이런 초기 양식의 불상이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 그 이유는 당시 코탄이 차지하고 있던 경제적인 중요성과 그에 따른 동서세력의 각축쟁탈을 염두에 둔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원래 코탄 지역에는 곤륜산(崑崙山)으로부터 흘러오는 카라카슈다리아(Karakashdaria, 黑玉河)와 유룽카슈다리아(Yurungkashdaria, 白玉河)라는 두 강이 흐르는데 이 강물은 건기(乾期)가 되면 하상(河床)이 드러나고 거기에서 곤륜산으로부터 실려온 옥(玉)을 채취할 수 있었다. 이 옥은 중국과 페르시아에서 보석(寶石)으로 높이 평가하는 것으로 특히 중국에서는 가장 값진 보배로 여기는 전통이 이미 은·주 (殷·周)시대로부터 확고하게 자리잡아왔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옛날부터 이 옥을 감숙성(甘肅省) 근처에 살던 페르시아계의 대월지족으로부터 사들였으며(소위 힚氏玉) 대월지족은 이 옥의 중개무역으로 상당히 많은 이윤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대월지족이 흉노에 밀려 파미르고원을 넘어서 간다라 지역에 정착하게 되고 거기서 쿠샨왕조를 열게 되는 변화가 일어난다. 여기서 간다라 지역을 중심으로 대제국을 건설했던 웨마카드비세스 대왕은 대월지족이 버릴 수 없었던 옥에 대한 미련 때문에 험난한 파미르고원을 넘어 자신들이 쫓겨 지나온 사막을 되건너서 코탄을 정복, 판도 안에 넣으려 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후한 명제 영평 3년(60년)에 서역도호 반초는 웨마카드비세스의 군대를 격퇴하고 코탄을 한의 영토로 편입시킨다. 이 과정에 불교가 코탄을 거쳐 후한에 전래되었던 모양인데 그 사실을 이 <금동불두>에서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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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출현한 초기 간다라 양식의 불보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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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문화 중심부에서 출토된 간다라 초기 양식의 불상으로는 하북성(河北省) 석가장(石家莊) 부근에서 출토되었다는 <견염선정불좌상(肩焰禪定佛坐像;어깨 위에서 불꽃을 일으키며 선정에 든 불타의 좌상)>(도판 2)이 있을 뿐이다. 이 불상은 하북성(河北省) 석가장에서 미국인 윈드로프(Winthrop)씨가 인수하여 하버드대 포그(Fogg)미술관에 기증한 것인데 간다라 불상조각의 초창기인 2세기 전반기의 양식적 특색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다만 아직 페샤와르를 중심으로 한 쿠샨왕조 수도권 지역에서는 발견되지 않은 견염(肩焰;어깨에서 솟아나는 불꽃) 형태의 배광(背光;등뒤에서 일어나는 빛)이 뿔처럼 양어깨에 돋아나 있어 마치 카피시 불상의 견염과 연결되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이 다를 뿐이다.
눈을 크게 뜨고 코밑수염이 분명한 간다라 풍모의 사실적인 얼굴 표현이 간다라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초기 간다라식 불상임을 분명히 드러낸다. 다만 상투부분에서 간다라식 북상투가 가지는 사실성을 상실하고 중국식 상투관과 같은 형태로 표현되어, 이것이 중국식 이해의 한계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 점이 바로 이 불상을 중국제품으로 인정할 수 있는 확실한 증거가 되기도 한다. 그렇게 본다면 솟아오른 눈두덩도 중국인의 눈모양에 가까워진 까닭이라고 보아야겠다.
대좌(臺座) 좌우에는 포효(咆哮)하는 사자를 두 마리 배치하여 사자좌(獅子座)를 상징하고 정면에는 꽃항아리에 연꽃과 연잎을 꽂아놓음으로써 또한 연화좌(蓮華座)를 상징했다. 대좌의 양측면에는 각기 등(燈)과 연화를 든 공양비구상(供養比丘像)이 고부조(高浮彫)로 장식되고 있다.
옷주름은 오히려 간다라 불상이 가지는 기계적인 획일성에서 탈피하여 자연스럽고 사실적인 표현을 보이는 바, 어깨 부분에 주름을 넣지 않은 것이나 오른쪽 겨드랑이 부분에서 옷주름을 소멸시킨 것이나 옷자락이 꽃잎 모양으로 들쭉날쭉 늘어진 것은 탁월한 조형감각이라 하겠다.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는 것이 후한 명제시대라는 것은 이미 앞에서 밝힌 사실이다. 그러나 명제감몽구법(明帝感夢求法;명제가 꿈에서 보고 감동하여 법을 구하여 옴)의 내용은 종교적인 신비성이 매우 강하여 이를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기를 주저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이 시기에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어 올 수 있는 개연성은 충분하니 신비적 요소만 제거한다면 이 사실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도 무리는 없을 듯하다.
다만 이 시기에는 전후한 400여년을 주도하는 유교 이념이 아직 건재해 그 주도력을 최고로 발휘하고 있었으므로 새로 유입된 외래이념인 불교에 중국사회가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았을 뿐이었다. 이 당시 유교이념이 얼마만큼 철저하게 중국 사회를 이끌어 나갔는가 하는 사실은 명제가 즉위하여 스스로 태학(太學;유생을 가르치는 국립 최고학교)에 나가 제생(諸生;태학에 재학하는 여러 학생)을 상대로 강경(講經;유교경전을 강의함)하였다거나 호위 무사까지도 ‘효경(孝經)’ 장구(章句)에 능통했으며 흉노의 왕공귀족 자제들까지 태학에 입학시켰다는 사실로 대강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사회분위기이니 불교는 비록 쿠샨왕조의 전도승들에 의해 비단길을 따라 들어왔다 하더라도 그 전도가 전혀 이루어질 수 없었다. 더구나 중국문화는 지구상에서 가장 적합한 농업환경에서 일구어낸 당시 최고 수준의 농업문화였다.
중국문화가 일어난 황하 유역은 직경 0.5mm 이하의 황토먼지가 수수만년 동안 서쪽 사막지대로부터 불어오는 편서풍에 실려와 북중국 대륙에 떨어져 쌓여 높이 10m에서 100m에 이르는 황토지대가 무려 132만4000㎢의 넓이로 펼쳐진 대평원이다. 이런 일망무제(一望無際;한 번 바라봄에 끝이 없음)한 황토 평원을 황하가 동서로 관통하여 흐르니 기후만 적합하다면 농사짓는 데는 특별한 농기구도 필요없을 만큼 적당한 곳이었다.
그런데 기후 또한 더할 나위 없이 농사에 적합하다. 1년이 4계절로 분명히 나누어지는데 봄철은 기후가 따뜻하면서 가랑비가 보슬보슬 내려 씨앗이 싹트기 좋고, 여름은 무더운 장마철이 되어 고온다습해지니 곡식의 성장에 더없이 알맞으며, 가을은 한랭한 기운이 감돌아 낮은 햇살이 따가우나 밤기운은 차가워 일교차가 커지면서 건기로 접어들어 강수량이 적어지니 곡식의 결실에 더없이 적당하다.
만물이 얼어 붙는 겨울철은 농사지은 곡식으로 편안히 들어앉아 배불리 먹어가며 여가를 즐기면서 다음 농사에 대비하게 되니, 자연환경은 곧 인류가 농경문화를 일으키며 살아가는 데 적합한 요건을 모두 다 갖춘 완벽한 존재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중국문화권에서는 자연에 순응해 사는 현세의 삶을 삶 이상으로 생각하는 현실긍정적인 사고가 자연히 購?현실적인 인간관계를 규정짓는 윤리철학이 발달할 뿐 우주나 내세를 얘기하는 우주철학이나 종교가 발달하지 않았다.
그런 윤리철학 중에서 으뜸이라 할 수 있는 유교가 주도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고 있을 때 내세를 말하고 우주를 논하는 불교가 들어왔으니 중국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불교는 공허하기 짝이 없고 이해도 되지 않는 이념이었을 것이다. 이에 유교이념이 주도력을 계속 행사해 나가는 이후 100여년 동안에는 불교는 거의 활동을 정지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역사기록에서도 불상조성에 관한 기록은 물론 불교관계기사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유교이념이 전한 200년과 후한 200년을 주도하고 나서는 극도의 노쇠화 현상을 보여 후한말에 가서는 더이상 사회를 주도할 능력을 상실하고 만다. 이에 유교를 대체할 만한 이념을 찾지 못한 중국 사회는 이념 공백기를 맞아 극도의 혼란에 빠지게 되는데 이 틈에 주변의 이민족들이 침입해 주도권 쟁탈을 벌이게 되니 이른바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시대라는 중국 최초의 식민지 시대가 전개되어 나간다.
다섯 오랑캐가 16국을 건설한 시대라는 이름만으로도 그 시대의 혼란상을 짐작할 수 있으니 이제껏 자기들이 사는 세계가 바로 극락세계이며 그 세계의 주인이 자신들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온 한(漢)족들은 이제 최초로 지옥고를 겪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에 그 동안 치지도외(置之度外;내버려두고 문제삼지 않음)하고 쳐다보지도 않던 불교의 존재를 재인식하고 그 내세관에 의지하려는 새로운 경향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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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융의 불상 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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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불교를 믿고 불상을 조성하려는 움직임이 상류 지식층을 중심으로 일어 나는 듯하니 불상에 관한 확실하고 구체적인 기록이 진수(陳壽, ?~279)의 ‘삼국지(三國志)’ 권49 유요전(劉繇傳)에 처음 나타난다. 유요전에 붙여 쓴 착융(?融)이라는 인물의 전기(傳記)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착융이란 사람은 단양인(丹陽人)인데 처음 무리 수백 명을 모아 서주목(徐州牧) 도겸(陶謙)에게 가 의탁하니 겸(謙)이 광릉(廣陵)과 팽성(彭城)의 조운(漕運)을 감독하게 했다. 드디어 사람을 함부로 죽이고 3군(郡)을 마음대로 하며 보내라고 맡긴 것들을 제가 가져버렸다. 그리고 크게 부도사(浮圖祠)를 일으키고 동(銅)으로 사람을 만들어 황금을 몸에 바르고 비단으로 옷을 해 입혔다.”
이로 보면 부도사란 불사(佛寺), 즉 절이란 의미이니 절을 크게 짓고 동으로 불상을 주조한 다음 도금(鍍金)하여 비단으로 가사(袈裟)까지 지어 입힌 사실이 분명하다. 정사(正史)의 기록이니 가장 믿을 만하다 하겠는데, 사실 이 시기는 불교가 중국 사회에 맹렬히 침투해 들어오는 시기이므로 이 기사에 조금의 무리도 있을 수 없다고 생각된다.
일본학자 대곡승진(大谷勝眞)의 연구에 의하면 착융의 이런 활동이 후한 명제 중평(中平) 6년(189년)으로부터 헌제(獻帝) 초평(初平) 4년(193년)에 걸친 시기일 것이라 하니 이 시기는 황건란(黃巾亂)을 계기로 천하가 대란(大亂) 상태에 들어 군웅(群雄)이 할거하고 민생이 도탄에 빠져 어떤 구원이 절실히 요구되던 때였다.
이런 시기에 외래종교(外來宗敎)의 교세 확장이 얼마나 용이한가 하는 것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기독교 세력이 기적에 가깝도록 확산된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어떻든 이 기록에 의해서 2세기 후기부터 중국에서 불상이 만들어지고 있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만들어진 불상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아직 확실히 알 수 없다. 다만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초기양식의 불상이 석가장 출토의 <견염선정불좌상>(도판 2)이니, 이때 만들어진 불상도 그와 같은 양식의 불상이었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이와 비슷한 시기의 제작기법을 보이는 예가 또 하나 있으니 여기 들고 있는 <미륵보살입상(彌勒菩薩立像)>(도판 3)이다.
일본학자 족립희육(足立喜六)의 ‘장안사적(長安史蹟)의 연구(硏究)’에 의하면 섬서성(陜西省) 삼원현(三原縣)에서 출토되었다고 한다. 연과(蓮果;연밥) 위에 서 있는 유행상(遊行像;돌아다니는 형상)으로 오른손은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짓고 왼손은 물병을 들고 있어 간다라나 마투라에서 보던 미륵보살상의 특징을 그대로 나타낸다. 언뜻 보면 간다라의 미륵보살상인 듯 그 용모나 의복표현이 방불하여 이 <미륵보살입상>도 간다라 양식을 조형(祖型;기본틀)으로 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정수리의 머리칼을 위로 걷어 모으고 나머지 머리칼은 뒤로 넘겨 늘어뜨리는 머리카락 모양이라든지, 코밑수염이 나 있고, 굵은 목걸이나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다투는 형상의 네모진 가슴걸이로 장식한 것, 시무외인을 지은 오른손 손가락 사이에 물갈퀴의 표현이 분명한 것, 두꺼운 천의 의복 표현, 엄지발가락 사이에 끈을 꿰어 신게 되어 있는 샌들(革履) 등등 어느 한 가지도 간다라 미륵보살상이 가지는 양식적 특징을 나타내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나 얼굴은 면적이 넓어지고, 눈은 크게 표현하려 했지만 눈꺼풀이 두꺼운 황인종의 행인형(杏仁形; 살구씨 모습)을 면치 못했으며, 표정도 황인종 특유의 근엄성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머리칼도 곱슬머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앞부분만 땋은 것 같은 표현으로 이를 모방하면서, 끝내 직발형(直髮形;곧은 머리칼 형태)의 평행선으로 처리하는데 그나마 상투 부분은 머리칼 표현이라기 보다 칠량관(七樑冠)을 쓴 것 같은 모습이다. 신체의 비례도 머리 부분이 커져서 지체가 늘씬한 간다라 조각의 균제미 (均齊美)와는 거리가 있고, 장신구들도 무겁게 느껴진다.
특히 의복에 대한 이해는 매우 부족했던 듯 양쪽 어깨로 넘어가고 오면서 치마와 연결되는 표현이 종잡을 수가 없다.
이로 보면 이 <미륵보살입상>은 불상에 대한 이해가 아직 철저하지 않은 시기에 중국인의 손으로 모방 제작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니 그 제작 시기가 2세기 후반을 더 내려오지 않을 듯하다. 배면(背面)은 뒤로 산발(散髮)한 머리칼이 어깨까지 내려와 있는데 약간 곱슬기가 있는 직발이며 일자(一字)로 가지런히 다듬어져 있다. 옷주름은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어깨를 반쯤 감싸고 겨드랑이를 돌아 나가면서 전신(全身)을 감싸 나간 대의(大衣)의 전면에 새겨 넣었는데, 비스듬히 내려가며 파낸 포물선을 가득 채워놓는 양식화(樣式化) 현상을 보였다.
머리 뒤에 네모난 꼬챙이(鏃)가 나와 있어 두원광(頭圓光)이 있었던 흔적을 남겼다. 정면에서 보아도 두부(頭部)가 큰 편이지만 측면에서는 하체의 빈약한 처리로 더욱 불안정한 비례를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이 초기부터 미륵보살이 제작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 시기 중국 불교계의 동향을 살피는 데 매우 중요한 의미로 파악될 수 있다. 격의불교(格義佛敎;불교의 空개념이 이해되지 않아 道家의 無개념을 빌려 이해하던 중국 초기의 불교)를 청산하고 불교의 중국화를 이룩해 낸 석도안(釋道安, 314~385년)이 “제자(弟子) 법우(法遇) 등과 더불어 미륵 앞에서 도솔천(兜率天)에 상생(上生)하고자 하는 서원(誓願)을 세웠다”는 ‘고승전(高僧傳)’ 권5 의해(義解)2 석도안조(釋道安條)의 기사 내용과 연결되는 점이 있기 때문이다.
지옥과 같은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지 않고 미륵보살이 계신다는 도솔천으로 올라가 태어나서 현세와 같은 고통의 질곡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난세인(亂世人)들이 갖는 소박한 열망이 바로 미륵신앙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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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화의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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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장 출토 <견염선정불좌상>과 같이 간다라 불상 양식을 그대로 본뜬 불상이 만들어지고 난 후 중국 불교도들 사이에서는 이를 다시 본뜨고 또 본뜨는 일이 끊임없이 이어져 나갔을 것이다. 예배상 (禮拜像;예배 드리는 대상으로의 불상)으로 또는 호신불(護身佛;몸을 보호하기 위해 몸에 지니고 다니는 불상)로 그 수요가 교세의 확장과 비례하면서 급격히 증가했을 터이니 이에 따라 불상을 만드는 작업이 얼마나 활발하게 진행되었을 것인가는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실제 이를 증명하듯이 석가장 출토 <견염선정불좌상>을 다시 본뜬 듯한 같은 양식 계열의 불좌상이 많이 출토되고 있는데, 그중에서 이 <동경대학(東京大學) 공학부(工學部) 소장 선정불좌상>(도판 4)이 가장 원형(原形)과 비슷하여 다시 본뜬 초기 양식임을 알 수 있다.
상투관(冠)으로 이해한 북상투는 상투끈의 흔적조차 소멸하여 주판(珠板)알 모양으로 바뀌니 마치 족두리를 머리에 얹은 듯한 형상으로 되고, 머리칼의 표현은 편도형(扁桃形)으로 빗어 올린 곧은 머리로 바뀌었다. 이마는 좁아지고, 백호(白毫)가 사라졌으며, 눈두덩이 더 솟아올라 눈이 더욱 좁고 가늘어졌으며, 앞에서 보이던 큰 귀가 뒤로 젖혀져서 정면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눈썹과 눈두덩 사이가 깊이 패고 코가 높으며 얼굴이 길고 측면이 두터운 소위 심목고비(深目高鼻;깊은 눈과 높은 코)의 호모(胡貌;서역 오랑캐, 즉 간다라 사람의 용모)인 것만은 틀림이 없으며, 코밑수염까지도 석가장 출토 <견염선정불좌상>을 그대로 본받고 있어 느낌만으로는 구별이 불가능할 정도다.
크기가 석가장 출토 <견염선정불좌상>의 반도 안 된다는 점도 있겠으나 옷주름의 표현이 한결 생략되어 오른쪽 겨드랑이 부근에서 일어난 4줄의 파낸 옷주름선은 마치 갈퀴발처럼 성글게 왼쪽 어깨 위로 모아지듯 사라지며, 병신스러울 정도로 크게 확대된 손이 선정인(禪定印)을 짓고, 아래로 흘러내린 옷자락은 똑바로 흘러내린 포물선을 3중으로 일으켜 상체의 옷주름선과는 별개인 듯한 느낌을 준다. 팔뚝을 따라 내려온 옷주름선 역시 마치 용수철과 같이 규격 있는 계단을 이루면서 다른 옷주름선과는 전혀 연결되지 않고 있어 마치 아래위 옷을 구별지어 놓은 듯하니 소매가 달린 중국식 복장의 옷주름을 염두에 두고 표현해낸 옷주름선인 듯한 느낌이 든다.
대좌는 사자도 연화도 생략된 전방후원형(前方後圓形;앞은 네모나고 뒤는 둥근 모양)의 소박한 형태이고 광배가 붙어 있었던 듯 뒤통수에 꼬챙이가 솟아 있는 것이 아마 두원광(頭圓光)이었던 듯하다. 석가장 출토 <견염선정불좌상>에서 거신광(擧身光;온몸에서 일어나는 빛)을 상징하는 견염(肩焰)의 표현을 생략하면 자연히 이와 같은 두광의 표현만 남게 될 것이니 신광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뒷면은 왼쪽 어깨 너머로 넘겨진 대의(大衣)의 옷자락이 마치 수건을 걸어 넘긴 듯 간단하게 표현되는데, 세 줄의 굵은 음각선(陰刻線)이 포물선을 이루고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어깨를 향하여 패어 나가 옷 주름선을 형용하는 생략기법으로 처리되었는데, 양팔뚝을 따라 내려온 옷주름굼?역시 별개의 주름더미를 이루어 소매를 상징했고 꼬리뼈 부근에 한 가닥 선을 넣어 엉덩이의 갈라진 모양을 나타냈다.
석가장출토 <견염선정불좌상>으로부터 이 정도의 양식화가 이루어지려면 적어도 반세기는 걸려야 할 듯하니, 이 상양식을 3세기 전반기에 두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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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미한 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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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晉)의 삼국통일(280년) 어름에는 돈황보살(敦煌菩薩) 혹은 월지보살(月氏菩薩)이라 불리던 월지계 (月氏系)의 돈황 출신 축법호(竺法護, Dharmaraka, 曇摩羅察, 241~313년)가 장안(長安)과 낙양(洛陽)을 중심으로 역경사업(譯經事業)을 크게 일으켜 175부 354권이라는 방대한 양의 불경(佛經)을 번역해 낸다. 이외에도 무라차(無羅叉), 법립(法立), 백법조(白法祖), 섭도진(쉈道眞), 성견(聖堅) 등 많은 역경사 (譯經師)들이 활약하여 소위 고역시대(古譯時代)를 연출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함부(阿含部)와 본연부(本緣部)에 속하는 근본경전(根本經典)을 비롯하여 대승경전(大乘經典)의 백미(白眉)인 반야경(般若經)과 법화경(法華經)까지도 번역된다. 그러나 이 시기는 아직 도가적 (道家的)인 이해체계(理解體系)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소위 격의불교(格義佛敎)단계에 머물고 있었다.
따라서 불상도 아직 상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가 미흡하여 무의미한 형사(形似;비슷하게 본뜸)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 <시무외불입상(施無畏佛立像)>(도판 5)도 그런 단계의 상양식(像樣式)을 나타내는 것 중 하나다. 간다라 초기 불입상을 모방했으나 <견염선정불좌상>의 직모형식(直模形式;그대로 모방한 형식)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북상투가 감(枾) 모양의 무문단형(無文團形;무늬 없는 둥근 모양)으로 변하고 머리칼은 정면 머리 위에서 편도형(扁桃形)으로 표시되었으며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지은 오른손도 병신스럽게 확대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통견대의(通肩大衣)는 시무외인을 지은 오른손과 옷자락을 잡은 왼손에 의해서 똑바로 내려간 포물선이 가슴을 따라 내려와 넓적다리 사이에 이르고, 넓적다리 사이로부터는 별개의 포물선 무더기가 일어나 옷자락에까지 미치는데, 이런 아래위 옷주름선의 뚜렷한 구분은 역시 간다라 불입상의 옷주름선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기인한 잘못이라고 보아야 하겠다.
뒷면처리 역시 단순한 음각 포물선으로 옷주름선을 상징하고 넘겨진 옷자락은 일본 <동경대 공학부 소장 선정불좌상>의 뒷면 옷자락보다는 입체감을 냈으나 겹겹이 접힌 형태로 상당히 경직되어 있다.
옷자락을 잡은 왼손이 오른손보다 작게 표현되어 균제성(均齊性)을 상실했고 왼쪽 팔뚝에 걸어 넘긴 옷자락이 포개져 만들어진 수직 옷주름 역시 구리관 모양으로 굳센 모양을 보여준다. 이런 여러 가지 양식적 특색이 이 불입상을 3세기 중기 제작이라고 보게 하는데 이는 선학(先學)들도 이미 지적한 바이다.
단판복련(單瓣覆蓮;홑꽃잎으로 엎어 놓은 연꽃)과 자방(子房;씨방)으로 이루어진 연화좌는 따로 부어 만든 것이다. 두원광을 꽂았던 꼬챙이가 길게 돌출했고 대좌(臺座) 측면 중앙 간주(間柱;사이 기둥) 표면에 ‘조상구구(造像九軀;만든 불상이 아홉 분이다)’라는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어 업도상(業道像; 죄업을 소멸하기 위해 만드는 불상)으로 만들어진 9체의 불상 중 1구임을 알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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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영화의 극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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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래양식에 대한 무의미한 형사가 반복될 경우 형식적으로 퇴영(退孀)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어느 미술사에서나 보이는 보편적인 진리다. 중국불상 조각사에서도 예외가 아니어서 <견염선정불좌상>을 그대로 본뜨는 데서부터 두번 세번 본떠 나갈수록 양식적 퇴영현상이 노골화하더니 드디어 이 <퇴영선정불좌상>(도판 6)에 이르게 되었다. 그래서 극도의 퇴영양식을 보여주니 형식적으로는 <견염선정불좌상>을 계승했으나 그 본래의 면목은 이미 망각되고 없다.
머리는 머리칼의 표현이 사라지고 북상투는 의미없이 우뚝 솟아 있으며, 얼굴도 깊은 눈 높은 코의 간다라적 특색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눈두덩이 훨씬 높이 솟아오르고 눈은 좁고 긴 버들잎 모양으로 바뀌었으며, 볼의 굴곡 있는 양감도 소멸하여 평평하게 되었고, 간다라식 코밑수염도 없어져서 중국화하는 기미가 역력히 드러난다.
옷주름도 극단적으로 형식화하여 가슴에서는 비스듬한 돋을무늬 포물선이 거의 직각에 가깝도록 무의미하게 겹쳐지고 선정인을 지은 손 아래로 내려온 옷자락에서도 역시 네모에 가까운 돋을무늬 옷주름선이 중첩되어 도식적인 느낌을 가지게 하는데, 대좌의 사자 표현에 이르면 거의 추상성밖에는 찾을 길이 없다. 등뒤에 팬 옷주름선 역시 성긴 갈퀴발처럼 휘어지게 새겨 넣었으며, 왼쪽 어깨 너머로는 앞에서 넘긴 옷자락 표현을 보였지만 어느 경우에나 무의미성이 지배하고 있다.
엉덩이 아래로 깔고 앉은 대의(大衣)의 옷주름선이 대좌에까지 연장되는 불합리성을 보였고 앞에서 넘긴 옷자락은 입체감 상실이 고려되지 않았다. 옆면은 얇아졌으며 팔뚝을 따라 내려온 옷주름선은 파 넣은 선의 중첩이다. 귀가 떨어져 나간 듯 머리에 달라붙어 형식적인 표현에 그쳤으며 머리 뒷면에는 두광이 고정되었던 꼬챙이가 솟아 있다.
이런 극단적인 퇴영양식은 곧 이에 대해 근본적인 반성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경지에 이르렀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런데 외래요소의 퇴영적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면 본질에 대한 철저한 이해의 바탕 위에 그를 자기화해 나가는 길밖에 없다. 미술사를 통해 보면 인류는 유일한 통로를 잘도 찾아가고 있다. 중국 불상조각사에서도 바로 이런 현상이 나타나니, 이 <퇴영선정불좌상>과 거의 동시 제작이라고 생각되는 <건무4년명선정불좌상(建武四年銘禪定佛坐像)>의 출현이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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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회복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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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래양식의 맹목적 추종결과로 나타난 퇴영현상을 자기화로 극복할 단계에 이르면, 그 본질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선행했으므로 외래양식 자체에 대한 이해도도 그만큼 높아진다. 따라서 점차 외래양식을 본격적으로 재현해내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 경우 저도 모르는 사이에 토착성이 적용되어 또 하나의 신 양식이 탄생하는 것이 일반적 현상이다. 즉 자기 조형기반으로 외래양식을 소화해냄으로써 퇴영양식을 극복하는 방법과 외래양식을 철저히 이해하여 재현시킴으로써 이를 극복하는 방법이 함께 나타나는 것이다.
양대 양식의 출현은 거의 동시적인 것이지만 어느 경우거나 자기 문화능력만큼 그 수준을 상승시켜 가는데, 중국의 경우에는 고도의 청동기문화 전통과 인체조각 전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곧 자기 역량을 되찾아 본궤도에 이르기 시작한다. 이 <외래재현선정불좌상> (도판 7)은 이와 같이 자기 역량을 회복해 가는 과정에 외래양식을 재현해낸 좋은 예 중 하나다.
우선 상형식으로 보아 극단적인 퇴영양식을 보이던 <퇴영선정불좌상> 계열임을 일견해서 알 수 있다. 그런데 지나치게 높고 커져서 얼굴과 위화감을 불러일으키던 육계(肉쬇;이미 북상투의 사실적인 의미는 인도에서도 사라져서 이 시기 조상에서는 북상투를 모두 육계로 표현하고 있었으며 고대계의 의미인 uiaira는 육계로 번역되고 있었다)가 크기는 하지만 머리와 조화를 이루는 적당한 비례를 보여주게 된다.
얼굴도 기괴성을 보이던 각 부위의 무의미한 과장표현이 정리되어 서역풍이 있는 중국인의 용모로 바뀌었으며 옷주름도 도식화된 어색함으로부터 입체감이 되살아나고 있다. 상형식은 철저하게 동일한데 조각 전체에서 흐르는 생경감과 원만감은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 다르게 느껴진다. 이는 외래양식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의 바탕 위에서 자기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것과 맹목적인 추종으로 형사에 급급하던 것과의 제작자세 차이에서 연유하는 현상이었다고 생각된다.
이를 뒤이어서는 자기화 양식과 외래양식의 혼합이 다시 이루어지는데, 이는 불교가 중국의 토착화에 성공하는 것과 표리(表裏)를 이루는 것으로, 불교의 원형유지와 중국화라는 두 가지 측면을 함께 지키려는 신경향이었다. 이것은 대체로 불교를 우리나라에까지 전도할 만큼 불교의 이해와 중국화에 자신감을 가졌던 도안(道安, 314~385년)시대에 이루어진 일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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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 얼굴의 불상 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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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중국은 끊임없이 침략해 들어오는 이민족을 격퇴하거나 흡수하면서 항상 자기 민족의 우월성을 유지해왔다. 그 결과 진한(秦漢)시대에 이르면, 중국 민족만이 사람다운 사람이고 주변의 이민족들은 금수(禽獸)에 가까운 이적(夷狄;오랑캐)이라는 중화사상(中華思想)이 뿌리를 내리게 된다. 이로 말미암아 외래문화 경시의 풍조가 전통을 이루는 바, 전후한(前後漢) 400년 동안 사회를 주도해온 유교이념이 이를 더욱 굳건하게 다져 놓았다.
그러나 후한 말에 이르면 유교이념의 말폐 노정으로 윤리의 실천방법이던 예교(禮敎)가 본질을 망각하고 형식만 남아 허례화(虛禮化)하면서 현실 주도 능력을 상실하게 되니 지식인들은 노장(老莊)철학의 허무관(虛無觀)으로 허례화한 유교이념을 타파하려 한다. 그러나 고답적 처세(處世)이념인 노장철학은 오히려 공리공담과 현실도피를 일삼는 허무주의를 조장하여 청담(淸談)의 유행과 같은 파행적(跛行的)인 기속(奇俗)을 유발하여 더욱 민중과 유리됨으로써 사회는 이념부재의 사상적 공백기를 맞게 된다.
이와 때를 같이 해서 진(晋)제국이 내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이민족에게 멸망당하고 남쪽 양자강 (揚子江)가로 옮겨 그 명맥을 겨우 유지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곧 수천년 동안 지켜오던 중국문화의 기반인 황하유역을 이민족에게 빼앗긴 것이다. 이에 중국인, 즉 한족(漢族)은 무력으로 굴복당한 패배감 위에 이념부재라는 절망감 속에서 끊임없는 호족상쟁(胡族相爭;오랑캐족들이 서로 다툼)의 전화(戰禍)를 겪어야 하는 암흑기를 맞게 된다.
이런 상황에 중화의 자존 같은 것은 생각할 겨를도 없었고, 실제 그들을 지배하는 호족들은 한구(漢狗)니 악한(惡漢), 치한(癡漢) 등으로 한족을 멸시하는 칭호를 서슴지 않았으므로 현실적으로도 그것이 용납되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그것이 다만 외래사상이건 어떻건 간에 이런 현실적인 고난을 구제해 줄 수 있는 것이라면 믿고 의지하고 싶은 것이 당시 중국인들의 생각이었다.
불교는 이런 기회를 맞아 쿠샨제국의 불교 보호를 배경으로 하여 맹렬한 공세로 전도승(傳道僧)을 파견하여 중국 교화에 열을 올리게 되니, 삽시간에 불교가 전중국에 확산되어 중국은 불국토를 연상할 만큼 철저히 불교화하게 되었다. 불교가 이처럼 기름에 불붙듯이 퍼지게 된 것은 기본적으로 위와 같은 시대 여건이 작용한 것이지만 불교 자체가 가진 장점에도 원인이 있었다.
우선 불교는 인과응보에 입각한 윤회설로 합리적인 내세관을 제시하고 있어 내세관이 없던 중국인들에게 큰 충격을 준다. 다음 불상이라는 인격신상을 가지고 들어 왔다든가 수준을 달리하는 경전을 많이 가지고 들어왔다는 것이 상하에 깊은 감명을 주었으며, 탈속한 신선의 생활을 동경하는 중국인들에게 교단조직을 가진 사원생활이 선망의 대상이 되었고, 사리신비와 의약구제 또한 대중의 신앙을 얻게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위정자들에게 정치와 무관한 구세(救世)의 이념이라는 것이 해롭지 않았고, 끊임없는 쟁패(爭覇) 속에서 도술로 신이(神異)나 기적을 일으키는 신승(神僧)들의 도움이 전술적인 면에서 절대 필요했다. 그 위에 문화전통이 빈약한 호족에게는 한문화(漢文化)에 대항할 수 있는 세계 수준의 이방문화(異邦文化)라는 데서도 필요성이 더욱 공감되었을 것이다.
그중에서 호족 지배자들을 사로잡는 큰 매력은 역시 신승의 활약이었으니, 진(晋) 회제(懷帝) 영가(永嘉) 4년(310년)에 중국으로 온 서역승 불도징(佛圖澄, 232~348년)이 석조(石趙)의 국사(國師)가 되어 북중국을 교화한 사실은 그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불도징은 신술을 방편으로 삼아 교화하면서 불교의 중국화를 꾀했다. 그래서 중국인 제자 1만여명을 길러냈고 평생 892사(寺)를 건립했으며, 석조의 황제이던 석호(石虎)로 하여금 ‘부처님이 융신(戎神) 이라면 호족인 내가 받들어야 할 신’이라고 하게 할 만큼 불교를 북중국에 토착화시켜 놓았다.
그래서 중국인 얼굴을 닮은 불상을 만들어내기에 이르렀으니, 이는 불도징의 수제자인 석도안이 도가적인 이해방법을 빌려 불교를 이해하던 격의불교(格義佛敎)를 탈피하여 불경에 직접 주석을 달면서 불경 그 자체를 원의대로 이해하려는 불교의 중국화운동을 일으키는 것과 표리를 이루는 현상이라 해야 할 것이다.
즉 극단적으로 퇴영화한 외래요소를 본질적인 이해의 바탕 위에서 자기화해냄으로써 새로운 미술양식을 창안한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불교이념이 중국화되었기 때문에 그 중국화된 뿌리에서 중국화된 꽃이 피어날 수밖에 없어 중국화된 불상이 만들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 불상이 바로 하북성 석가장 부근에서 출토된 <건무4년명(建武四年銘)선정불좌상>(도판 8)이다.
이 <건무4년명선정불좌상>은 앞에서 본 간다라풍의 불상과는 전혀 상이한 조형기반 위에서 만들어졌음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하여 중국 고유의 조형기법으로 만들어낸 불상인 것이다. 얼굴이 둥글납작하고 눈두덩이 솟아 있으며 머리칼이 곱슬머리가 아닌 곧은머리 형태라는 등 황인종 용모의 특색을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인체표현 기법은 이미 진·한시대 조각에서 그 선구를 찾을 수 있으니, 진시황릉 출토의 인물상 (도판 9)이나 한묘 출토의 인물상 등이 그것이다. 옷주름이 기계적인 층판형식을 이룬 것이나 상 자체가 철저한 좌우균제에 지배되고 있는 것에서도 중국 전통의 권위주의적 조형감각을 실감할 수 있다.
이 불좌상의 방형대좌 후면에는 “건무(建武) 4년 무술(戊戌) 8월30일에 비구 아무개가 만든 업도상 (業道像)”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이것이 불도징과 도안이 석조에서 활약하던 시대에 만들어진 불상임을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 건무(建武)는 후조(後趙, 또는 石趙)의 태조인 석호(石虎)가 다스리던 시대의 연호로 건무 4년이 서기 338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역시 하북성 석가장에서 미국인 브런디지(A. Brundage)가 수집하여 샌프란시스코의 드영박물관(De Young Museum)에 기증한 것이다. 측면 처리는 등뒤로부터 이어지는 옷주름선이 위 팔뚝으로 이어지고 아래 팔뚝에서는 입체적인 옷주름 모양이 일어나서 깊이 있는 표현이 되고 있다. 얼굴은 동양적인 용모라서 측면이 편평하나 흠잡을 데 없이 사실적인 표현이다. 진한 이래의 사실적인 인체표현 전통이 이와 같이 쉽게 불상을 중국화시키는 데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귀는 아직 자연인의 보통 귀 모양으로 귓불이 늘어지지 않았고 두원광(頭圓光)을 부착시키던 꼬챙이가 돌출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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