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산(天山) 박격달봉(博格達峰) http://blog.daum.net/han0114/17047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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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도 북관(北關)이 어디인가?
절대로 한반도 북한에 있는 함경북도 북관이 아니다.
아직까지도 그렇게 생각한다면 곤란하다.
북관이 한반도 북한 함경도라고 한다면 구태어 일제가 대첩비를 강점기에 수고스럽게 열도로 가지고 갈 필요성이 없었을 것이다.
즉 북관의 실제 지역을 감추기 위하여 그런 수고를 무릎쓰고 가지고 간 것이다.
그래서 먼저 북관 실체지역부터 밝혀내야 하는 것이다.
관(關)은 關門이라고 하지만 지형적으로 높게 길게 펼치진 지명을 통칭하여 만(滿:찰)이라고 하면서 동시에 관이라고 부른 것 같다.
최두환 박사는 관(關)을 파미르고원, 천산산맥이라고 비정하였다.
천산을 지목함을 보았을 때 그 以東을 만주로 보았을 것 같고 만주의 중심지역인 음산산맥을 기준으로 관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여겨지는 면도 있다.
그러한 관을 넓은 의미에서 滿洲라고 했을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만주를 다르게 세분하여 관서, 관북, 관동이라고 칭하는 것이고 넓은 지역의 만주를 東西北으로 나눈 의미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일제가 1905년 이후 러시아와 전쟁시 지금의 산해관 以東을 관동이라고 하여 關東軍을 두었다.
그렇다면 관서는 그 서쪽이 되어야 하고 관북은 관서와 관동 이북을 말해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kbs 역사스페셜에서는 북경 산해관 이동 즉 일제 관동군이 주둔하였던 곳에서 관북을 찾고 있으니 그저 할 말을 잃지 않을 수 없다.
재야에서 북경과 산해관이 20세기 초 동쪽으로 의도적으로 지명 이동된 것이라고 하였듯이 북경과 산해관이 본래 있었던 곳은 바로 천산산맥 부근 신강성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이렇게 보았을 때 관을 말한다면 구만주 정점인 陰山山脈이 기준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실록에는 조선이 원래 산세가 험하다고 했다.
천산산맥과 음산산맥이 연결된 地形山勢가 합치되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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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
경복궁에 전시중인 북관대첩비 (복제품)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는 함경북도 북평사 직을 맡고 있던 정문부 장군이 임진왜란 중 의병을 모아 왜군을 격퇴한 공을 기려 조선 숙종 때 북평사 최창대가 함경북도 길주군 임명면 (현재는 함경북도 김책시 임명동)에 세운 전공 기념 비석이다. 높이는 187cm, 너비는 66cm인 이 비석에는 당시 의병들의 활동과 공로가 1500글자 정도로 기록되어 있다.
일제의 약탈
러일 전쟁 중이던 1905년, 일본군의 미요시 중장이 북관대첩비를 그대로 둘 경우, 일본군의 북진시 조선인들의 저항을 받을 수 있으니 일본으로 가져가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일본 왕실에 타전했고 이를 승인 받아 일본으로 약탈 반출하였다. 그 뒤 일본 왕실에서 보관하다가 야스쿠니 신사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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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관대첩비 내용은 사실과 다르다?
[동아일보]2005-10-24 17:52
일제에 의해 100년 전 약탈돼 일본 야스쿠니(靖國)신사에 방치됐던 임진왜란 승전비인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 [연합]
“북관대첩비의 비문 내용은 사실과 전혀 다르니 믿지 말라.”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1905년 일본군 2사단 17여단장 이케다 마사스케(池田正介) 소장에 의해 강탈당했던 북관대첩비가 지난 20일 100년 만에 고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이케다는 당시 임명진에서 북관대첩비를 발견, 자신들의 패전 기록인 이 비석을 수치로 여겨 일본으로 가져갈 것을 상부에 건의했고 그해 10월28일 일본으로 넘어갔다.
일본은 북관대첩비를 도쿄(東京)의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에 보관 전시했다. 비 옆에는 비문의 내용을 소개하는 목패(木牌)를 만들어 세웠다. 하지만 목패의 내용이 상당부분 왜곡돼 있었던 사실이 뒤늦게 드러났다.
1926년 9월16일 일본을 방문해 북관대첩비를 직접 보고 온 이생(李生)은 당시 동아일보에 기고문을 보내와 목패에 새겨진 글을 소개하고 소감을 밝혔다.(동아일보 1926년 9월19일자 3면)
목패에는 “북관대첩비는 함경도 명천군 임명진에 있었는데 일본이 조선과 전쟁한 사실을 기재하였다. 그 비문에는 대첩(大捷)이라고 하였지만, 그 당시 사실과는 전연상위(全然相違)하니 세인(世人)은 비문을 믿지 말라.”고 적혀있었다. 하지만 이생은 기고문에서 “우리 조선인은 고래(古來)부터 패하고서 이겼다고 자찬하며 비석을 세우는 일이 없는 이상에 그 비문의 당당한 정신을 우리가 충분히 추측할 수 있다”고 반박했다.
▲ 당시 동아일보 문예면에 실린 이생(李生)의 기고문
그는 또 “무슨 곡절로 비석이 이곳에 이전되었는지는 알지 못하나 옛날의 전례로 추측하여 보면 일본이 강탈한 것이 사실일 것”이라며 “우리의 사적(史蹟)이 임명진에 있다가 이역의 일본 땅에 방치 당하고 있는 사실을 깊이 기억(記憶)하여 두자”고 썼다.
그는 야스쿠니신사를 “(일본) 국가전사장졸의 초혼제가 매년 봄, 가을로 거행되는 곳으로 그 내부에는 조선 고대의 갑옷, 군기(軍旗), 창(槍), 총(銃), 대포(大砲) 등과 청, 러, 독 전쟁시에 획득한 전시기계를 다수로 진열해 일반에게 관람하게 하였다”고 소개했다.
그는 “필자도 관람하려 들어가 보니 후면 정원에 높이가 5자, 넓이가 2자, 두께가 5치 가량의 웅장한 비석이 서 있어서, 그 비석을 정면에 서서보니 북관대첩비라 새겨져 있었다. 경악하여 비문을 자세히 보려하니 헌병이 제지하여 보지 못하고 비석 좌측의 목패만 봤다”고 일화를 전했다.
1926년은 6.10만세 운동과 김구 선생의 임정국무령(臨政國務令) 취임, 의열단원인 나석주(羅錫疇)의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 투척 등으로 일제의 탄압이 극심했던 시기였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상당부분에서 일본을 비난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이생의 글이 신문에 실렸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한편 북관대첩비는 임진왜란 때 정문부(鄭文孚)를 대장으로 한 함경도 의병의 전승을 기념한 전공비이다. 높이 187cm 너비 66cm, 두께 13cm이다.
본문에는 함경도 의병이 가토 기요마사가 거느린 왜군을 무찌르는 내용과 왜란이 일어나자 반란을 일으켜 함경도로 피난한 두 왕자를 왜적에게 넘긴 국경인(鞠敬仁)을 처형한 전말 등이 1500자 비문에 소상히 적혀있다. 기요마사는 당시 일본 최강의 조총군단을 이끌고 북진을 거듭했으나 여기서 패해 다시는 함경도 이북을 넘보지 못했다.
비는 조선 숙종 때 함경도 북평사(北評事)로 부임한 최창대(崔昌大)가 함경북도 길주군 임명에 세웠다.
조창현 동아닷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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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關大捷碑의 원문
在昔壬辰之難 其力戰破賊 雄鳴一世 水戰則有李忠武之閑山焉 陸戰則有權元 之幸州焉 有李月川之延安焉 史氏記之 游談者誦之不倦
옛날 임진란에 힘써 싸워 적을 깨뜨려 일세를 크게 울린 이로 해전에서는 이 충무의 한산대첩이 있고, 육전에서는 권 원수의 행주대첩이 있으며, 이 월천의 연안 대첩이 있어, 역사가가 그것을 기록하였고, 이야기하는 이들이 칭송하여 마지 않았다.
雖然 此猶有位地 資於乘賦什伍之出也 若起單微奮逃竄 徒以忠義相感激 卒能用烏合取全勝 克復一方者 關北之兵爲最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지위가 있어 말과 부역과 군졸들을 낼 수 있음에 힘입은 것이다. 고단하고 미약한 데서 일어나 도망하여 숨은 무리들을 분발시켜 충의로써 서로 격려하여 마침내 오합지졸을 써서 완전한 승첩을 거두어 한 쪽을 수복함과 같은 이는 관북의 군사가 제일인 것이다.
始萬曆中 倭酋秀吉 ?强?逆 規犯中國 怒我不與假道 遂大入寇 長驅至都 宣廟旣西幸而列郡瓦解 賊已陷京畿 其驍將二人 分兵首兩路 行長?行朝西 淸正主北攻 처음 만력 중에 왜의 추장 수길이 강한 군사들을 믿고 거만하게 중국을 침범하고자 엿보다가 우리가 길을 빌려 주지 않음을 성내어, 드디어 크게 쳐들어와 서울에까지 이르렀다. 선조는 이미 서쪽으로 거둥하였고, 모든 고을이 무너졌으며, 적은 이미 경기도를 함락시키고 그 무서운 장수 두 사람이 군사를 두 길로 나누니 行長은 行朝를 뒤밟아 서쪽으로 가고 淸正은 북방 침공하는 것을 맡았었다.
其秋 淸正入北道 兵銳甚 鐵嶺以北 無城守焉 於是 鞠敬仁等叛應賊 敬仁者 會寧府吏也 素惡不率 及賊到富寧 隙危扇亂 執兩王子及宰臣奔播者 ?縛諸長吏 與賊效款 鏡城吏鞠世必 其叔父也 及明川民末守木男 連謀相黨 ?受賊所署官 各據州城 聲張勢立 殺脅惟所指 數州崩駭 人莫自保
그 해 가을에 청정이 북도로 들어갔는데 적의 정예한 군대가 매우 거세었기 때문에 철령 이북은 성을 지키지 못했다. 이 때에 국경인 등이 반역하여 적에게 내응하였다. 경인은 회령부의 아전으로 본성이 악하여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적이 부령에 이르자 그 위기를 타고 난을 일으켜 피난해 온 두 왕자와 대신을 잡고 그리고 장수와 관리들을 묶어 적에게 주고 정성을 보였으며, 경성 아전 국세필은 그의 숙부요, 명천 사람 말수, 목남과 서로 무리를 지어 모두 어울려 적이 주는 관작을 받아 각각 고을을 점거하고 성세를 벌여 죽이고 위협하기를 그의 지령대로 하니, 여러 고을이 무너지고 겁내어 인민들이 스스로 보전하지 못했었다.
鏡城李鵬壽 爲氣士也 奮曰 縱國家創攘至此 兇徒敢爾耶 乃潛與崔配天ㆍ池達源ㆍ姜文佑等 謀起義兵 諸人地相夷 莫適爲將
경성 이붕수는 의기있는 선비라, 분개하며 말하되 ‘비록 국가의 어지러움이 이에 이르렀으나, 흉도가 감히 저렇게 할 수 있겠는가?’하고 최배천ㆍ지달원ㆍ강문우 등과 함께 의병 일으키기를 꾀했는데 여러 사람의 지위가 서로 비슷하여 장수 삼을 이가 마땅치 않았다.
評事鄭文孚有文武才 無兵可戰 脫身匿山谷間 聞義兵起 欣然從之 遂推鄭公
主將 鍾城府使鄭見龍ㆍ慶源府使吳應台爲次將 ?血誓義 募兵得百餘人 時北虜人侵北邊 諸公使人誘世必 ?力禦北虜 世必許之 內義兵州城 明朝 鄭公建旗鼓 上南城樓 誘世必上謁 時其入 目文佑禽之 斬以徇 赦其脅從 卽引兵南趣明川 又捕末守等斬之 會寧人亦討敬仁誅之 以應義兵 軍勢稍壯 來附者益衆 吉州人許珍ㆍ金國信ㆍ許大成 亦聚兵爲聲援
평사 정문부는 문무의 재주는 있으나 군사가 없어 싸울 수 없으므로 몸을 빼어 산골에 숨어 있던 중 의병을 일으킨다는 소문을 듣고 즐거이 좇았던 바, 마침내 정공을 추대하여 주장을 삼고 종성부사 정현룡과 경원부사 오응태 등을 차장으로 삼고 피로써 맹서하며 의병을 모집하여 백여 명을 얻었다. 그 때 북쪽 오랑캐들이 또 북쪽 변방을 침범하므로 여러 장수들이 사람을 시켜 세필을 달래어 같이 힘을 합하여 오랑캐들을 막자 하니 세필이 허락하고 의병들을 성 안으로 받아들였다. 이튿날 아침 정공이 기와 북을 세우고, 남문으로 올라오도록 꾀어 그가 현신할 때에 문우가 그를 사로잡아 목을 베어 조리돌리고, 그의 위협에 못 이겨 따른 자들은 놓아 주었다. 그리고 곧 군사를 이끌고 명천으로 가서 말수 등을 잡아 목베고 회령 사람이 또한 경인을 쳐서 목베어 의병에게 호응하니 군세가 점점 커지고 따라와 붙은 자가 더욱 많아졌으며, 길주 사람 허진ㆍ김국신ㆍ허대성이 또한 군사를 모아 성원하였다.
當是時 淸正令偏將 領精兵數千 據吉州 身率大軍 屯南關以護之 十一月 遇賊于加坡 將戰 鄭公部署諸將 見龍爲中衛將 屯白? 應台及元忠恕爲伏兵將 分屯石城ㆍ毛會 韓仁濟爲左衛將 屯木柵 柳擎天爲右衛將 屯涅河 金國信ㆍ許珍爲左右斥候將 分屯臨溟ㆍ方峙
이 때에 청정이 편장으로 하여금 정병 수천 명을 거느리고 길주에 웅거케 하고 자신은 대군을 거느리고 남관에 진을 쳐 호응하고 있었다. 11월에 적을 가파리에서 만나 싸우려는데 정공은 여러 장수들을 배치하되 현룡은 중위장을 삼아 백탑에 진을 치고, 오응태ㆍ원충서는 복병장을 삼아 석성과 모회로 나누어 진을 치고, 한인제는 좌위장을 삼아 목책에 진을 치고, 유경천은 우위장을 삼아 날하에 진을 치고, 김국신ㆍ허진은 좌우 척후장을 삼아 임명과 방치로 나누어 진을 치게 했다.
賊?勝不甚備 諸軍?起?擊 乘銳蹙之 士無不疾呼先登者 賊敗走 縱兵追之 殺其將五人 斬獲無數 盡奪其馬畜兵械 於是遠近響震 將吏亡伏者爭起應之 衆至七
千餘人 賊收入吉州城 窘不敢動 列伏于旁? 邀其出輒剿之 已而城津賊 大掠于臨溟 率輕騎襲之 ?山設伏 伺其還夾擊 大破之 又斬數百人 遂剖其腹腸 暴之大路 於是兵聲大振 賊益畏之
적들은 여러 번 이긴 끝이라 방비를 허술하게 했다. 우리 군사들은 모두 함께 일어나 불의에 공격하여 기운을 얻어 밀고 나갔는데 고함치며 앞서 나가지 않는 군사가 없으니 적이 패하여 달아났는데, 군사를 풀어 추격하여 그 장수 5명을 죽이고 목을 수 없이 베었으며, 그 말과 무기들을 모조리 빼앗았다. 그래서 원근이 진동하여 장수와 관리 중에 도망치고 숨어 엎디었던 자들이 다투어 일어나 호응하니, 무리들이 7천 명에 이르렀으며, 적은 마침내 길주성으로 들어가 움츠리고 감히 발동하지 못했는데 길 옆에 복병을 두어 나오기만 하면 무찔러 버렸다. 이윽고 성진의 적이 임명을 크게 침략하므로 정예한 기병들을 이끌고 습격했으며, 산에 기대어 복병했다가 적이 돌아오기를 기다려 협공하여 크게 깨뜨리고 또 수백 명을 목베고 마침내 그 배를 갈라 창자를 행길가에 늘어 놓자 군사의 형세가 크게 떨치고 적은 더욱 두려워하였다.
十二月 又戰于雙浦 戰方合 偏將引鐵騎橫衝之 迅如風雨 賊失勢 不及交鋒 皆散走 乘勝又破之 明年正月 又戰于端川 三戰三勝 還屯吉州休士 旣而淸正知軍不利 遣大兵迎還吉州賊 我軍尾擊 至白?大戰 又敗之 是役也 李鵬壽ㆍ許大成ㆍ
李希唐戰死 然賊遂退 不敢復北
12월에 또 쌍포에서 싸웠는데 싸움이 한창 어울리자 편장이 철기를 끌고 가로 찌르기를 풍우같이 빨리 하니 적이 세력을 잃어 맞서 보지도 못하고 모두 흩어져 달아나므로 이긴 기세를 타고 또 깨뜨렸다. 이듬해 정월에 단천에서 싸웠는데, 세 번 싸워 이기고 돌아와, 길주에 진을 치고 군사들을 쉬게 하자, 청정이 불리함을 알고 큰 군대를 보내어 길주의 적을 맞아 돌아오게 하므로 우리 군사들은 그 뒤를 쳐서 백탑에 이르러 크게 싸워 또 깨뜨렸으며,
이 전쟁에서 이붕수ㆍ허대성ㆍ이희당은 전사했으나, 적은 마침내 물러가 다시는 감히 북쪽으로 올라오지 못했다.
當是時 皇明將李如松 亦破行長於平壤 鄭公乃使崔配天 間行奏捷行在 上引見
流涕 贈鵬壽司憲府監察 賜配天秩朝散
이 때에 명나라 장수 이여송도 또한 행장을 평양에서 깨뜨렸는데, 정공이 최배천을 시켜 샛길로 행재소에 승첩을 아뢰니 임금이 불러보고 눈물을 흘리며, 붕수에게 사헌부감찰을 증직하고, 배천에게는 조산대부의 계급을 내렸다.
時觀察使怒文孚不稟節度 而疾義兵功聲出己 聞奏率以誣? 以故賞不行
그 때 관찰사 윤탁연이 문부가 절도사에게 아뢰지 않았음을 성내며 의병의 공적이 자기보다 뛰어남을 시기하여 임금께 공로를 숨기고 거짓말로 아뢰었기 때문에 공에게는 포상이 시행되지 않았다.
久之 顯宗時觀察使閔鼎重 北評事李端夏 聽於父老 以實聞 於是加贈文孚贊成鵬壽持平 餘人贈官有差 又建祠鏡城之漁郞里 祀同事諸人 賜額曰彰烈
오랜 뒤 현종 때에 관찰사 민정중과 북평사 이단하가 부로들에게 듣고 사실을 아뢰어 비로소 문부에게는 찬성, 붕수에게는 지평을 증직하고 남은 사람들에게도 차등있게 관작을 내렸으며, 또 사당을 경성 어랑리에 세워 당시 같이 일한 여러 사람들을 제사케 하고 ‘창렬’이라 사액했다.
今上庚辰 昌大爲北評事 旣與義旅之子孫 訪問前故 得事蹟爲詳 慨然想諸公之風 又嘗路所謂臨溟雙浦者 觀其營壁戰陣之所 徘徊指顧 爲之咨嗟而不能去
지금 임금 경진년(1700)에 창대가 북평사가 되어 의병의 자손들과 함께 연고지를 방문하여,사적을 자세히 얻어 개연히 제공의 기풍을 상상도 하고 또 이른바 임명ㆍ쌍포를 찾아 진치고 싸우던 자리를 거닐고 돌아보며 탄식하면서 떠나지 못하였다.
間語其長老曰 島夷之禍烈矣 三京覆而八路壞 諸公出萬死一生 提孤軍?勁寇 使我國家興王舊地 卒免於左? 而邊塞之人 興於聽聞 勸於忠義者 又誰之力也 幸州ㆍ延安 俱有碑碣 載事垂烈 東西者瞻式 以關北之功之盛而獨闕焉 庸非諸君之恥歟 咸應曰然 惟鄙人志 ?公命之 遂伐石鳩材 以人來請文 辭非其人 又來曰 斯役也 公實首議 不得命 將輟 余乃?其事 系之銘曰
그리고 부로에게 말하되 ‘섬오랑캐의 전화가 몹시 심하여 세 서울이 함락되고 팔도가 무너졌는데, 이 분들은 죽음을 걸고 외로운 군사를 이끌고서 억센 도적을 무찔러 우리나라의 발상한 옛 땅으로 하여금 마침내 오랑캐 땅이 되는 것을 면하게 했으며, 변방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일어나 충의를 서로 권하게 된 것이 그 또한 누구의 힘이더냐? 행주 연안에는 모두 비갈이 있어 사적을 적어 공렬을 나타내었으므로 동서로 오가는 이들이 우러러보고 몸을 굽히거니와 관북의 거룩한 공로를 가지고도 비갈 하나 없으니 어찌 제군의 수치가 아니겠는가’하니 모두 대답하되 ‘그렇소. 그것은 우리들의 뜻이기도 한데 하물며 공의 명령까지 있음이겠소.’하며 마침내 돌을 다듬고 재물을 모으고 사람을 시켜 글을 청하건마는 나는 적임자가 아니므로 사양했더니 다시 와서 말하되 ‘이 일은 공이 실로 발의한 사람이니 허락해 주지 않으면 일을 철폐하겠소.’하므로, 나는 마침내 그의 사적을 서술하고 새긴다.
有盜自南 讐我大邦 남쪽에서 도적이 와 명나라를 치려드니
我王于蕃 以國受鋒 우리는 이웃이 되어 온 나라가 화 입었네.
屹屹北原 狼籍穴墉 높고 높다 북방이여 오랑캐 소굴되니
有蠢者氓 不抗而從 어리석은 백성들이 저항없이 따르도다.
血口胥呑 濟毒以兇 피 머금은 입으로 흉한 독을 뿜을 적에
士也 ? ? 俊群攸同 씩씩하다 우리 군사 뭇 호걸 헌걸차다.
兵義莫利 不屑戈弓 군사란 정의가 제일, 창과 활이 부질없어
旣殲叛徒 寇莫我衝 반역자 무찌르니 저 도적 못 덤비네.
武夫鼓呼 山?海洶 병정들 북을 치니 산이 무너지듯 바다가 끓듯
師征孔赫 厥醜崩惱 우리 군사 빛난 전술 흉한 적을 무너뜨리네.
協底帝罰 匪私我忠 천벌을 내리게 함 사사 아닌 충성 때문이거
北土旣平 爾蠶我農 북쪽 땅 평정되어 누에치고 농사짓네.
大君曰咨 孰尙女功 임금이 감탄하며 누가 그대의 공보다더 하겠느냐
贈官命祠 光惠始終 벼슬 주고 사액하고 한결같은 은혜로다.
士風其烈 民可卽戎 선비 기풍 열렬하니 백성들도 용감
臨溟之厓 有石海高 임명 바닷가에 우뚝한 돌이 있어
刻之誦詞 用眠無窮 칭송을 거기 새겨 영원토록 보이노라
정문부(鄭文孚) 장군 초상화
정문부(鄭文孚) 장군의 글씨
북관유적도첩을 통해 본 함경도 戰史
북관유적도첩(北關遺蹟圖帖)>은 고려시대 예종 때부터 조선시대 선조때까지의 함경도 지방(북관)에서 침입한 적에 대해 무공을 세운 인물들의 행적이나 일화를 그림으로 그리고 그 내용을 글로 설명해 놓은 화첩이다. 북관유적도첩의 내용은 여덟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척경입비’는 고려 예종 때 평장사 윤관과 지추밀원사 오연총, ‘야연사준’은 조선 세종 때 김종서, <야전부시>는 조선 세조 때 신숙주, ‘출기파적’은 어유소, ‘등림영회’는 남이, ‘일전해위’는 신립, ‘수책거적’은 이순신, ‘창의토왜’는 정문부의 행적에 관한 것이다. 이중 ‘창의토왜’는 1592년(선조 25년) 왜군이 함경도에 들어왔을 때 의병을 일으켜 대항했던 북평사 정문부(1565년-1624년)의 활약상을 그린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경성 사찰의 노비 국세필이 반역하여 적이 주는 관작을 받으며 세력을 넓히고 있었을 때, 정문부는 창의대장이 되어 의병 300여명을 모집하였다. 이후 국세필을 꾀어 의병을 성안으로 들여 노략질하는 왜적을 물리치고 성을 수복하였으며, 강문우에게 국세필을 사로잡아 목을 베어 현수하였다는 내용이다. 최근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유입되었던 북관대첩비의 반환이 추진되고 있다. 일본 야스쿠니 신사에 보관되어 온 북관대첩비는 바로 정문부의 활약상을 비에 새긴 것으로 이 비와 함께 ‘창의토왜’는 임진왜란 당시 함경도 지방에서 활약한 의병장의 행적을 그림과 글로써 자세히 묘사하고 있는 역사고사화이다. 정호섭_ 고려대 박물관
북관유적도첩(北關遺蹟圖帖)은 17~18세기에 만들어진 역사화첩(畵帖)이다.
북관(지금의 함경도)에서 용맹과 기개을 떨친 장수들의 업적을 기록한 것이다.
고려 예종때부터 조선 선조때까지 총 8가지 에피소드를 담고있다.
척경입비(拓境立碑), 야연사준(夜宴射樽), 야전부시(夜戰賦詩), 출기파적(出奇破賊),
등림영회(登臨詠懷), 일전해위(一箭解圍), 수책거적(守柵拒敵), 창의토왜(倡義討倭)
이 그림들은 당시 조선 후기의 화법을 대표하는 매우 중요한 자료이면서, 함경도의 전사(戰使)를 엿볼수 있는 귀중한 사료이다.
1- 척경입비도(拓境立碑圖)
척경입비도는 고려의 윤관이 함경도에서 여진족을 물리친것을 그린 그림이다.
고려 예종 2년(1107년). 평장사 윤관은 지추밀원사 오원총과 각각 행원대원수, 부원수로 임명되어 17만 대군을 이끌고 북관지역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영토를 넓혔다. 함주(咸州), 복주(福州), 웅주(雄州), 영주(英州), 길주(吉州), 공험진(公險鎭)에 6성을 쌓았고 마침내 선춘령(先春嶺)에 고려지경(高麗之境)이라는 비석을 세워 경계로 삼았다.
2- 야연사준도(夜宴射樽圖)
조선 세종때, 김종서가 북방 여진족을 물리치고 6진을 개척하여 국경을 넓히고 도순문찰리사로 있을때를 그린 그림이다.
하루는 장수들과 술과 잔치로 야연을 벌이던중 갑자기 화살이 날라와 중앙의 큰 술병에 꽂혔다. 이에 장수들은 놀라서 겁을 먹고 두려워 했지만 김종서는 간사한 사람의 술수라 여기고 침착하게 연회를 진행하여 마쳤다고 한다.
김종서의 용맹과 침착함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3- 야전부시도(夜戰賦詩圖)
세조때, 함경도 도제찰사 신숙주가 여진족을 물리친 이야기이다.
여진족이 밤에 신숙주의 진영을 공격하여 군사들이 응전하고 있는데 신숙주는 두려운 기색이 없이 누워서 막료를 불러 오히려 적군을 위로하는 시 한수를 지어주었다고 한다. 전투의 혼란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신숙주의 대담함을 엿볼수 있다.
4- 출기파적도(出奇破賊圖)
조선초기 무신인 어유소의 활약에 대한 이야기이다.
세조 13년(1467년) 길주사람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키자 조정에선 회령부사 어유소를 좌대장으로 삼아 토벌을 명했다. 어유소는 홍원(洪原), 북청(北靑), 만령(蔓嶺)에서 싸웠는데 특히 만령의 적은 천혜의 자연요새에서 방어를 하니 아군이 감히 올라갈수 없었다. 어유소는 정예군을 차출해 풀과 구분하지 못하도록 푸른옷을 입히고 작은 배에 태워 벼랑을 따라 올라 적의 배후를 치게 했다. 이에 놀란 적군은 당황하였고 양방향 협공으로 인해 대승을 거두었다고 전한다.
5- 등림영회도(登臨詠懷圖)
조선초기 무신인 남이에 대한 그림이다.
남이는 이시애의 난때 약관의 나이에 총대장으로 임명되어 반란을 토벌하고 적개공신 1등에 올랐다. 난을 평정하고 돌아오던중 백두산에 올라,
"백두산 돌을 갈아 칼을 만들어 다하고 두만강 물을 퍼서 말을 먹여 없앤다.
남아가 20세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 후세에 어찌 대장부라 칭하겠는가" 라고 시를 지어 사내대장부의 포부와 기세를 설파하였다.
6- 일전해위도(一箭解圍圖)
조선 중기 무신, 신립에 대한 이야기이다.
선조 16년(1583년). 신립이 온성부사로 있을때 두만강병의 여진족이 경원도호부의 훈융진을 포위하고 장성문을 철거하는등 횡포를 부렸다. 이에 신립은 군사를 이끌고 달려들어 화살 한대로 적의 대장을 쏘아 죽였다. 두목이 쓰러지자 신립의 얼굴을 알아본 여진족은 너도나도 달아나 버렸다고 한다.
7- 수책거적도(守柵拒敵圖)
조선 중기 무신, 이순신에 대한 이야기이다.
선조 20년(1587년). 경흥도호부 순찰사 정언신이 녹둔도에 둔전을 설치했는데 당시 조산만호로 있던 이순신이 이를 관리 하였다.
가을이 되자 여진족들이 침입을 하여 목책을 따라 노략질을 하자, 이순신이 적과 싸웠다. 여진족이 목책을 공격했는데 목책의 병사들은 대부분 들에 나가 있어 방어하기가 어려웠다. 여진족 추장 마니응개가 목책안으로 들어오려 하자 활로 쏘아 죽였고 이에 여진족은 퇴각하였다. 이때를 노려 이순신은 군사를 이끌고 추격해 붙잡혀간 농민을 데려올수 있었다.
8- 창의토왜도(倡義討倭圖)
임진왜란때 의병을 일으킨 정문부에 대한 이야기이다.
선조 25(1592년)에 왜군이 함경도로 들어와 국경인,국세필등이 반란을 일으켜 왜군에 가담하였고 그세를 넓히고 있었다. 이때 북평사 정문부는 숨어있다가 이붕수가 의병을 일으킨다고 하자 그의 집에 달려와 최배천, 지달원, 강문우등과 합세해 창의대장으로 의병 300명을 이끌고 거병했다. 그는 부성(경성)에 있는 국세필을 달래어 의병을 성안으로 끌여들어 성 남쪽에서 노략하던 왜군을 물리쳤다. 이후 정문부는 국세필과 그의 일당들을 참수하고 성의 질서를 바로 잡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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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
조선국함경도임진의병대첩비(朝鮮國咸鏡道壬辰義兵大捷碑)는 높이 187cm, 너비 66cm, 두께 13cm의 석비(石碑)로서 임진왜란 때인 1592년 정문부(鄭文孚)를 대장으로 한 함경도 의병의 전승을 기념하여 세운 비로서 임진왜란이 끝난 100여년 뒤 조선 숙종 34년(1707년)에 함경도 북평사로 부임한 최창대(崔昌大)가 함경북도 길주군 임영에 건립한 전공비이며,이 비에는 함경도 의병이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거느린 왜군을 무찌른 일, 왜란이 일어나자 반란을 일으켜 함경도로 피난한 두 왕자를 왜적에게 넘긴 국경인(鞠敬仁)을 처형한 전말 등이 1,500자 비문에 소상히 적혀 있는 비인데. 1905년 러일전쟁 때 함경지방에 진출한 일본군 제2예비사단 여단장 소장 이케다 마시스케[池田正介]가 주민들을 협박하여 비석을 파내 일본으로 옮겨 '군국일본'의 상징인 도쿄 지요다[千代田]구의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에 방치된것을 한국연구원장 최서면(崔書勉)이 밝혀낸 후,비문에 이름이 있는 의병의 후손들이 일본 정부에 청원서를 내는 등 반환운동을 벌인 끝에 2005년 10월 20일에 한국에 반환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안치되어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었으며, 2006년 3월 1일에 비석이 원래 있던 북한으로 전달되고,2006년 4월 25일에는 아래의 복제비가 건립되어 경복궁의 고궁박물관 우(右)편에 전시되고 있는 것을 10월 28일 고궁박물관을 관람하고 아래의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를 답사했다.
정문부 [鄭文孚, 1565~1624] 본관 해주(海州). 자 자허(子虛). 호 농포(農圃). 시호 충의(忠毅). 1588년(선조 21) 생원이 되고 문과에 급제, 북평사(北評事)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회령(會寧)의 국경인(鞠景仁) 등이 반란을 일으켜 적군에 투항하자 의병대장이 되어 경성(鏡城)을 수복하고 회령으로 진격하여 두 왕자를 왜군에게 넘겨준 국경인의 숙부 세필(世弼)을 죽이고 반란을 평정하였다. 1593년 영흥(永興)부사, 1597년 길주(吉州)목사가 되고, 1624년(인조 2) 초회왕(楚懷王)에 대하여 지은 시(詩)로 이괄의 난에 연루되어 고문받다가 죽었다. 그후 함경도 지방민의 송원(訟寃)에 따라 신원되었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경성의 창렬사(彰烈祠), 부령(富寧)의 청암사(靑巖祠)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농포집(農圃集)》이 있다.
정문부 장군묘 [鄭文孚將軍墓]는 경기도 의정부시 용현동 산 16 번지에 있으며 경기도기념물 제37호로 지정되어 있고 묘는 부인 고령 신씨(申氏)와 합장한 분묘로 봉분 높이 1.3m이며, 둘레 16m이다.묘의 동남쪽 지점 낮은 곳에는 신도비가 있는데 1665년(현종 6)에 세웠던 것을 1861년(철종 12)에 정문부의 9대손 정인원(鄭麟元)이 추록하여 다시 세웠다. 신도비에는 임진왜란 때 장군이 군사를 이끌고 왜적을 무찌른 이야기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국경인 [鞠景仁, ?~1592] 전주에 살다가 회령(會寧)에 유배되었고, 후에 회령부(會寧府) 아전(衙前)으로 들어가 치부(致富)하였으나, 조정에 원한을 품고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군대가 회령에 이르자 무리를 모아 반란을 일으키고, 피난와 있던 두 왕자 임해군(臨海君) 진, 순화군(順和君) 보를 포박하여 가토에게 넘겨 주었다.남쪽으로 퇴각하는 가토에게서 회령 수비의 책임을 위임받았으나 북평사(北評事) 정문부(鄭文孚)의 격문(檄文)을 받은 유생 신세준(申世俊)·오윤적(吳允迪) 등에게 붙잡혀 참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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