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화? 중국?
歸化는 다른 나라의 국적을 얻어 그 나라 백성이 되는 뜻이고
中國이라함은 支那中國이 아니라 中原을 다스리는 주체 天子가 있는 京都 즉 중앙정부이다.
당과 신라, 송과 고려, 명 청과 조선이 종속관계, 천자국과 朝貢國 굴레를 만들어 그것을 사실처럼 여기게 한 것은 일제가 심어 둔 반도사관, 식민사관에 의한 것들이다.
그 결과 오늘날 멀쩡한 학자들까지 반도사관이란 사슬에 묶여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귀화라는 것은 어찌 보면 민족을 떠나 국가를 넘나 들 수 있는 편리한 단어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러한 단어를 감히 다민족국가인 고구려 백제 신라와 고려, 조선역사에 접목하려드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귀화 보다 더 적합한 표현은 귀속이란 단어가 더 옳다고 생각한다.
일제가 대륙사를 한반도에 끼어 넣을 때 종속관계를 만들어 天子와 朝貢國으로 나누고자 함이 목적이었다.
그들은 목적한바 그대로 이루었고 한국역사학자 모두를 허수아비같이 만들고 말았다.
이 허수아비같은 학자들은 모든 사실에서 분명코 연합적인 성격이 농후함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따로 떼어 놓는 것도 부족하여 오그라들게 하지 못해 안달을 한다.
이것이 바로 반도사관, 식민사관이 주는 피폐이다.
누가 단일민족이고 백의민족이라고 했는가?
고구려, 신라, 백제, 고려, 조선역사에 단일민족이란 개념은 없었다.
나라가 거대하면 거대 할수록 단일 민족만으로 유지되거나 지속될 수 없는 것이 정한 이치이다.
고구려도 신라도 백제도 삼국을 통일한 고려 그 이후 조선도 모두가 단일민족이 아니라 多民族群이었다. 단일민족이란 어원은 단일을 빙자하여 대륙사를 반도에 집어넣으려고 하는 일제의 극악한 수단에 의한 결과이었을 뿐이다.
이기사에서도 보듯이 당, 송, 명, 청을 대륙의 국가로 보고 고구려, 신라, 백제, 고려, 조선을 한반도 국가로 한정하여 보았기 때문에 중국이니 귀화니 단일이니 하는 것이다.
당신라, 송고려, 명조선, 청조선이라고는 왜 보지 못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면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이해되고 풀리는 의문들이다.
학자란 자신에게 솔직해야 한다.
학자가 오히려 의구심을 증폭시키고 말도 안 되는 논리를 만들어 국민을 호도하거나 기만하면 학자의 도리라고 할 수가 없다.
학자의 진정함이란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고 사실이 있는 그대로 바라 볼 줄 아는 순수한 학문이 주는 마음으로 볼 수 있어야 하며 그러함에서 한가지 더 붙인다면 이해관계가 전혀 없어야 한다는 말이다.
지금 우리의 역사진단은 코끼리 다리 만지기식 진단이다.
무엇인가 고증할 수 있는 유물이 나타나면 그것을 이치적으로 또는 사실적으로 보지 않고 먼저 지레짐작 반도사관, 식민사관에 묶어 대입하기에만 바쁘다 보니 이런 얼토당토하지도 않는 답이 나오는 것이다.
어찌 답답하고 한심하다 하지 않겠는가?
그들에게 우리가 무엇을 기대할 것인지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역사자체가 무엇인지 그곳에 과연 민족역사가 옳게 살아 숨쉬고 있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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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귀화 중국인 후손 묘지명 발견
[연합뉴스] 2009년 04월 17일(금) 오후 03:50
민경삼 교수 '부인 왕씨 묘지명' 공개
당 제국이 급속한 해체기에 접어든 880-890년대 무렵 당나라를 떠나 신라로 귀화한 중국인의 후손 묘지명이 공개됐다.
한중문화교류사 전공인 백석대 민경삼(閔庚三) 교수는 18일 서강대 마테오관에서 열리는 신라사학회(회장 김창겸) 제82차 학술발표회를 통해 지난 2005년 5월 중국 허난성 뤄양시(洛陽市) 남쪽 룽먼(龍門)에서 출토된 '송 고 석인 왕씨 묘지명'(宋故碩人王氏墓誌銘)에 대한 연구성과를 내놓는다.
민 교수에 의하면 이 묘지명은 현재 뤄양대학이 소장하고 있는데 부인의 가계 내력과 품성, 행적 등을 기록한 몸돌과 덮개돌이 함께 발견됐다. 덮개돌에는 전서체(篆書體)로 각 행 3글자씩 3행에 걸쳐 '宋故碩人王氏墓誌銘'(송나라의 돌아가신 부인 왕씨 묘지명)이라는 글자를 새겼다. 몸돌은 검푸른 빛이 도는 청석(靑石)을 한 변 길이 73㎝인 정방형 판석으로 깎아 만들었으며 그 표면에는 각행 39글자씩 38행에 걸쳐 묘지문(墓誌文)을 새겼다.
이 묘지문을 분석한 결과, 그 주인공 왕씨는 고려사(高麗史)에는 '왕림'(王琳), 송사(宋史)에는 '왕빈'(王彬)이라는 표기로 각각 등장하는 중국 귀화인 후손의 손녀이면서, 송사에 열전이라는 형식으로 그 행적이 비교적 소상하게 남은 양외(楊畏)라는 사람의 부인으로 밝혀졌다고 민 교수는 말했다.
묘지명에 의하면 부인 왕씨는 송나라 선화(宣和) 6년(1124) 8월15일 향년 66세로 사망해 그 해 10월 29일 룽먼에 있던 남편 양외의 무덤에 합장됐다.
가문 내력에 대해 묘지명은 "고조가 난리를 피해 배를 타고 바다 남쪽으로 가니 신라왕이 한번 보고는 기특하게 여겨 상국(相國)에 임명했다. 증조는 이름이 인간(仁侃)인데 아버지를 이어 국가 권력을 잡았다가 훗날 광록경(光祿卿)에 봉해졌다"고 했다.
민 교수는 이런 묘지명 내용과 자치통감, 송사, 그리고 고려사 등의 각종 문헌 관련 기록을 종합할 때, 부인 왕씨의 부계는 아버지 왕종망(王宗望), 조부 왕빈(王彬), 증조 왕인간(王仁侃), 고조 왕언영(王彦英)으로 정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가문은 880-890년대 무렵 왕언영-인간 부자가 신라로 귀화해 고려 초기까지 정착해 왕실의 후원을 받다가 왕빈 시대에 이르러 다시 본국인 중국으로 돌아간 것으로 보인다.
부인 왕씨의 할아버지는 고려사에서 "경종 5년(980), 최한(崔罕)과 왕림(王琳)을 송나라에 유학 보내 태학에 입학게 하니, 성종 11년(986)에 두 사람이 모두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했다"는 기록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이에서 보이는 '왕림'(王琳)은 송사에서는 '왕빈'(王彬)으로 표기되는데 이번 묘지명을 통해 '왕빈'이 옳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고려사에서는 고려 경종이 왕빈을 유학생으로 파견했다고 했지만, 이번 묘지명에서는 18살에 송의 조광윤이 천하를 안정시켰다는 말을 듣고는 고려왕에게 요청해 중국으로 돌아가 총애를 입어 각종 고위직을 역임했다고 기술했다. 하지만 속자치통감장편(續資治通鑒長編)이란 문헌에는 "순화(淳化) 3년(992)에 황상이 직접 도공거인(道貢擧人)을 시험하고는 고려의 빈공진사(賓貢進士)들인 왕빈(王彬)과 최한(崔罕) 등에게 급제의 조서를 내리고 관직을 제수하고는 본국으로 돌려보냈다"고 했다.
민 교수는 "이런 기록들을 통해 왕빈은 고려에서 파견되어 송나라 태학에 들어갔다가 진사에 급제하고 잠시 고려로 돌아왔다가는 다시 중국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관직생활을 하고 생애를 마쳤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묘지명은 그의 손녀인 부인 왕씨가 "기이한 자질을 갖고 태어났"으며, "부모를 섬김에도 효녀로 소문이 났"고 "시부모 또한 극진히 봉양했다"고 칭송하면서, 하지만 슬하에 자식을 두지 못했으며, 평소 불교에 심취해 정각(淨覺)이라는 법명이 있었다고 덧붙였다.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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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귀화 중국인 후손 묘지명
[연합포토] 2009년 04월 17일(금) 오후 05:07
(서울=연합뉴스) 당 제국 해체기인 880-890년대 무렵 당나라를 떠나 신라로 귀화한 중국인의 후손인 `송고석인왕씨묘지명'(宋故碩人王氏墓誌銘)이 2005년 5월 중국 허난성 뤄양시(洛陽市) 남쪽 룽먼(龍門)에서 출토됐다. 사진은 그 덮개. 현재 뤄양대학이 소장한 이 묘지명 주인공은 고려사와 송사에 각각 왕림(王琳)과 왕빈(王彬)이라는 표기로 보이는 인물의 손녀다. 2009.4.17 <문화부 기사참조, 백석대 민경삼 교수 제공 >/2009-04-17 17:06:36/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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