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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혁명(April Revolution)

한부울 2009. 4. 19. 22:37

 

전국서 제49주년 4.19혁명 기념행사 잇따라

[뉴시스] 2009년 04월 19일(일) 오후 05:08

 

 

 

국가보훈처는 19일 오전 독재정권에 항거한 4.19혁명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서울 성북구 국립4.19민주묘지에서 '제49주년 4.19혁명 기념식'을 개최했다. 이날 기념식에는 정부인사, 4.19혁명 관련단체 회원, 시민, 학생 등 2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헌화·분향, 4.19민주혁명회장의 경과보고, 기념공연과 기념사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이명박 대통령은 김양 보훈처장이 대독한 기념사를 통해 "4.19 혁명은 건국 이후 우리 현대사에 우뚝 솟아있는 산이며 자랑스러운 승리의 역사"라고 평가했다.


이 대통령은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은 우리 헌법 전문에 담겨 지금도 우리와 함께 숨 쉬고 있다"며 "이제 우리 국민들은 4월의 함성을 선진화의 동력으로 승화시키고 있고 4월의 열정을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대화합으로 계승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서울 도심에서는 4.19 기념행사가 다채롭게 펼쳐졌다.


서울강북문화원은 오후 3시 국립4.19민주묘지 정의의 횃불광장에서 4.19혁명희생자 추모음악회인 '제13회 소귀골 음악회'를 열었다. 4.19 제49주년기념행사준비위원회는 같은 시간 서울광장에서 사진전, 음악회 등 4.19혁명 제49주년 시민축제를 진행했다.


사월혁명회와 한국진보연대는 낮 12시 국립4.19민주묘지에서 4.19 49주년 합동 참배식을 개최했다. 이들 단체는 선언문을 통해 "현실의 난국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국민들이 다시 4월 혁명과 6월 민주항쟁의 정신으로 투쟁에 나서야 한다"면서 "오랜 세월 열사들이 피를 바치며 투쟁으로 쟁취한 민주주의를 지키는 일이 바로 우리의 책무"라고 밝혔다.


서울지역대학생연합은 오후 2시 서울 마로니에 공원에서 '4.19혁명 정신계승 한대련 대회'를 개최하고 민주주의 수호에 앞장섰던 열사들의 넋을 기렸다.


전국에서도 기념행사가 이어졌다.


울산에서는 대학생 신분으로 4.19 혁명에 참여했다 희생당한 정임석 열사의 추모식이 천곡동 정 열사 묘소에서 열렸다. 4.19 민주열사 정임석 추모회 주최로 열린 이날 행사는 박기수 추모회장, 강석구 북구청장, 윤임지 북구의회 의장, 이수진 울산보훈지청장, 유족 등 50여명이 참석했다.


박기수 추모회장은 "자유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꽃다운 나이에 민족의 제단에 숭고한 목숨을 바친 열사의 넋을 기리는 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며 "열사의 정신을 이어받아 진정한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다같이 앞장서 나가자"고 말했다. 김주열 열사 추모행사는 전북 남원시 금지면 옹정리 소재 김주열 열사 추모각에서 열렸다.


김 열사는 마산상고 1학년이던 1960년 3월15일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에 참가했다 실종된 뒤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채로 발견돼 4.19 혁명의 기폭제가 됐다.


부산시도 이날 오전 10시 4.19혁명 49주년 기념식을 개최했다.


부산지역 4.19혁명 희생자 33명의 위패가 모여 있는 민주공원 내 4.19혁명 영령 봉안소에서 열린 이날 기념식은 허남식 부산시장의 헌화와 분향, 경과보고, 기념사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같은 시각 부산 금정구 금정도서관에서는 신정융 열사 추모행사가 열렸다. 이날 전국의 4.19 희생자 묘역에도 유가족들과 4.19 혁명 정신을 기리는 추모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배민욱기자 뉴시스통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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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통령 4·19 묘지 참배

[대한민국 정책포털] 2009년 04월 19일(일) 오후 09:15

 

이명박 대통령이 19일 오전 서울 수유동 국립 4.19민주묘지를 참배하고 있다. <사진=청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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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혁명(April Revolution)

 


4·19 혁명은 1960년 4월 대한민국에서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이 저지른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학생을 중심으로 시작한 시위가 이루어낸 혁명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했으며 부통령 당선자 이기붕은 가족과 함께 자살하였다. 일본의 민중운동인 안보투쟁에도 영향을 준 혁명이다. 4·19 민주혁명 혹은 4·19 학생운동으로도 일컫는다.


헌법전문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완수하게 하여,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하면서 1948년 7월 12일에 제정되고 8차에 걸쳐 개정된 헌법을 이제 국회의 의결을 거쳐 국민투표에 의하여 개정한다.1987년 10월 29일


4월 19일 이전의 상황


이승만 정권은 종신집권을 위하여 언론과 사회 전반에 억압적인 조치들을 취하였다. 2월 28일 대구에서 고등학생들이 "학원의 자유보장하라", "독재정치, 부정부패를 물리치자"는 구호를 앞세우고 대구 도심으로 시위를 벌였다. 이를 2·28 대구 학생의거라고 부르고 있는데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3월 15일 마산에서 부정선거에 대한 규탄 시위가 벌어졌다.(3·15 마산시위) 3월 18일, 내무부장관 최인규와 치안국장이 마산사건의 책임을 지고 사임하였다.


4월 11일 마산시위 때 행방불명되었던 마산상고 학생 김주열의 시체가 바다에서 발견되어 검시가 이루어졌는데, 검시 결과가 발표되지 않자 시민들이 병원으로 들어가 눈에서 뒷머리까지 최루탄이 박혀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 사건은 부정선거 시정을 요구하는 시위를 전국으로 확산시키는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4월 18일 서울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정오에 총궐기 선언문을 발표한 후, 세종로-태평로 일대로 진출해 시위를 벌였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었으나, 귀교하는 도중 유지광이 이끄는 정치 깡패들로부터 기습을 받아 수십 명의 부상자를 냈다.


4월 19일


1960년 4월 19일, 전날 고려대학교학생들이 발표한 총궐기 선언문과 같은 선언을 발표한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대학생들과 이에 고무된 고등학교 학생들이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와 '서대문 경무대'로 불리던 이기붕의 자택으로 몰려갔다. 그들은 경무대로 몰려가 이승만 대통령과 면담을 요구하였고, 김주열의 죽음에 대한 관련자 처벌을 요구하였다. 이 와중에 곳곳에서 경찰의 발포가 자행돼 수십명의 학생들이 죽고, 수백명이 부상을 당했다. 한편 제1공화국 시절, 소위 '부부통령' 이라 불리던 권력의 제3인자, 곽영주 경무대 경찰서장(계급: 경무관, 현재의 대통령 경호실장)은 곡사포를 동원하여 학생들을 막았으나, 곡사포는 무너졌다.[출처 필요] 경무대 정문을 부순 순간에, 갑자기 군인들이 덮쳐서, 여기서도 많은 학생들이 희생당했다.[출처 필요] 한편, 시내의 시위대는 경찰차를 전복시키고 경찰서에 불을 질렀다. 재선거와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는 시위대에 당황한 정부는 오후 3시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기붕은 이미 자택을 빠져 나와, 경기도 양주의 모 육군부대로 피신하였다. 계엄사령관 송요찬은 시위를 강경진압하지 않고 유연하게 대처했다.


4월 19일 이후


계엄령에 주춤했던 시위는 시간이 감에 따라 더 번져갔다. 4월 23일, 장면 부통령이 사임하고 민주화를 위해 노력할 것을 선언하였다. 4월 25일에 묵묵히 지켜보던 대학 교수들까지 시위를 함으로써, 이승만의 제1공화국 정부는 무너질 위기를 맞고 있었다. 양주로 피신했던 이기붕은 4월 25일에 몰래 경무대로 들어왔다. 당시 그의 장남 이강석 소위는 이승만의 양자로 들어가 있었는데, 4월 26일 새벽 0시경에 아버지 이기붕, 어머니 박마리아, 남동생 이강욱을 총으로 쏴 죽이고, 자신도 자살했다.


4월 26일 오후 1시에 이승만은 라디오 연설을 통해, 대통령 자리에서 하야하겠다고 발표했으며, 이에 자유당도 해체하겠다고 발표했다. 오후 4시에 경무대를 떠나 이화장으로 들어갔다. 이승만은 1960년 5월에 그가 청년시기를 보낸 하와이로 망명했고, 그곳에서 조용히 살다가, 1965년 7월 19일 91세의 나이로 병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작가 최인호는 그의 연재소설 《가족》에서 이승만의 죽음에 대해 독재자다운 비참한 말로라고 비평하였다.


사망자


경무대(지금의 청와대) 앞에서의 경찰의 발포 등으로 당일 183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평가


"부정선거 다시 하라!"를 목표로 출발한 이 혁명은 이승만의 퇴진이라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얻었다. 그러나 학생들과 시민들이 흘린 피의 수혜자가 된 민주당 정권은 혁명의 계승자이기보다는 이승만 정권 수립 당시 권력의 배분에서 배제된, 어떤 의미에서 자유당 정권보다 더 보수적인 집단이었다.[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