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SINA-신중국

소그디아나(Sogdiana) 粟特-트란소그디아나 高麗?

한부울 2009. 4. 16. 22:16

고려는 유나이티드 코리아 고려연방국가였다. http://blog.daum.net/han0114/17046399

 

소그디아나(Sogdiana) 粟特-트란소그디아나 高麗?

Sogdiana was "Sùtè" for the Chinese. Note that this is the mandarin pronunciation and not the Middle Chinese pronunciation which was used by the Chinese at the time.

 

소그디아나(Sogdiana)는, 중앙아시아의Amu Darya river(Oxus)과 Syr Darya river(Jaxartes)의 중간에 위치하여 사마르칸트Samarkand와 부하라Bukhara를 중심적인 도시로 하는 Zeravshan River 유역 지방의 고명. 대부분이 현재의 우즈베키스탄 중앙부에서 일부는 타지키스탄의 북서부에 해당된다. 이란계의 언어를 사용하면서 소그드인으로 불리는 민족이 거주한 곳에 붙여진 희랍어·라틴어의 명칭으로 서쪽 옥서스강(Amu Darya) 건너편을 트란소그디아나라고도 한다. 중국의 역사서에서는 속특이라고 기록되고 있다.

 

원래 이란(페르시아)과의 정치적·문화적 관련이 깊고, 아케메네스왕조시대의 기원 전 6 세기에는 페르시아 제국에 병합되어 그 지방주가 되었다. 이 때 소그디아나에 아랍문자가 들어오게 되면서 소그드어가 아랍문자로 표기되게 되었다. 아케메네스왕조의 멸망 후는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드로스(Alexander) 대왕에게 정복되었으나 그 가 죽은 후 남쪽에 위치하는 바크트리아의 지방주로 여겨졌다.

 

내륙 아시아의 동서교통·남북교통의 요충지여서 주변 세력의 침입이 빈번하고, 또한 대월지, 강거, 쿠샨 왕조(105년경 - 250년경), 에프탈(Ephthalites), 돌궐 등 주변의 유목국가의 지배를 받거나 사산조(Sassanid Empire) 페르시아에 복종했다. 주민인 소그드인도 교통의 요충인 점이나, 강대한 유목 국가의 산하에 있는 것을 살려 교역 활동에 종사하였고 도시 문명이 번영한다.

 

8 세기에는 아랍인에게 정복되어 이슬람교를 수용했다. 아라비아어에서는 강의 피안(彼岸)의 땅을 의미하는 마와라안나풀의 이름으로 불려졌고 이윽고 이 지명으로 정착된다. 이슬람 시대에는 언어적으로 근세 페르시아어가 이용되었고 소그드어가 쓸모없게 되면서  페르시아의 문화적인 연결이 보다 긴밀하게 되었다. 후는 언어적으로 투르크화가 진행되었으며, 페르시아어의 일종인 타지크어와 투르크제어의 우즈베크말이 통용되면서 현대에 이르고 있다.

 

10세기의 아라비아 지리학자 무카다시는 이것을 "신(神)이 만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라고 상찬하였다. 현재는 대부분이 우즈베키스탄에, 북서의 일부가 타지키스탄에 속하여 있다.


예로부터 농업이 성하며 사마르칸트·부하라 등의 도시국가가 세워졌다. 아케메네스조(朝)·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영토의 일부가 되었다가 그후 박트리아·대월지(大月氏)·쿠샨조(朝)·사산조(朝) 페르시아·에프탈·서돌궐(西突厥)의 지배를 받았고, 8세기에 아라비아인의 정복으로 이슬람화되었다. 그후 1220년에 칭기즈칸의 서정(西征)으로 공략되어 황폐화되었으나, 1370년 티무르가 사마르칸트를 수도로 하면서 부흥됐다. 오늘까지 남아 있는 이슬람 사원 등, 위관(偉觀)의 대건축물이 있었다.


15세기 말 우즈베크족의 흥기와 더불어 번영의 중심은 부하라로 옮겨졌으나, 1868년 러시아군의 점령으로 다시 사마르칸트의 중심이 되었다. 그 원주민은 이란계로 소그드인이라고 불려졌고, 예로부터 국제적 상업무역에 종사하면서 톈산[天山]산맥 북쪽 기슭, 간쑤[甘肅] 북서부, 동(東)터키스탄, 몽골고원 내부에 거류지를 만들었고, 당(唐)의 장안(長安)에도 많이 살고 있었다. 특히 흉노·돌궐·위구르 등의 유목국가의 내부에서는 사업에 종사함과 아울러 그 군주들의 정치적·문화적 고문(顧門)으로서 활약하여, 중국에서는 상호(商胡)·가호(賈胡)로 불려졌다.


751년에 탈라스강(江)의 싸움에서 아라비아군에게 당군이 패하고 당군의 포로에 의하여 제지법(製紙法)이 세계에 퍼져 파피루스나 양피지(羊皮紙)와 대체되었다. 그들은 처음에 조로아스터교를 믿었으나 후에 마니교로 개종한 자가 생겼으며, 그들의 발전에 따라 마니교가 위구르의 국교가 되었고, 이어서 당나라 때에 중국에도 전하여졌다.


그들이 사용한 달력은 티무르조(朝)의 울루그 베그 때까지 이 지방에서 사용되었고, 또한 소그드 문자에서 위구르 문자가 만들어져, 이것이 몽골문자·만주문자의 기본이 되었다. 근년에 사마르칸트 동쪽의 무그산(山), 북서의 피안즈켄트에서 소그드인의 유적과 유물이 발굴되어 생활양식과 문화가 밝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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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그디아나의 주된 제도시

타라스 

타슈켄트(石国) 

호젠드

우스르샤나(東曹国) 

주식-댄(曹国) 

이슈티한(서曹国) 

마임르그(펜지켄트 유적이 유력설 米国)

사마르칸드(康国) 

쿠샤니야(何国) 

키슈(현 샤후리·사브즈;史国)

나사후(小史国) 

브하라(安国) 

잔다나

파이칸드(畢国)


昭武九姓 소무9성(소그디아나)


康国 사마르칸트(러시아어: Самарка́нд, 우즈베크어: Samarqand, Самарқанд, 아랍어: سمرقند, 페르시아어: سمرقند)는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의 고도이고 아무다리야 강의 지류인 제라프샨 강 하류에 있고, 기계·화학·면화·비단·피혁등의 공업이 발달해 있다. 인구약 38만 명(2001년). 우즈베키스탄의 대통령 이슬람 카리모프는 이 도시출신이다.

 


주민은 400만 명이고, 우즈벡인, 타지크족, 러시아인, 유대인도 거주하고 있다.

동부이란 변경의 중심적 도시로서 일찍부터 개발되어 알렉산드로스의 동정(東征) 무렵에는 마라칸다라는 이름으로 알려졌었다. 중국에서는 남북조 이후 수(隋)·당(唐) 시대에 걸쳐 실만근(悉萬斤)·살말건(薩末建), 특히 강국(康國)으로서 유명하였다. 8세기 전반 칼리프 정권 하에 들어가 이슬람화하였으며, 9~10세기에는 이란계(系) 이슬람정권인 사만왕조 하에서 번영하였다. 그 후 카라한 왕조, 카라키타이 왕국, 호라즘 샤 왕조 등의 지배하에 점차 투르크화하였다. 요(遼)·원(元)의 사서(史書)에 심사간(尋思干)으로 보이는 것은 투르크명

Semizkend의 음을 사음(寫音)한 것이다. 13세기 전반, 몽골족의 정복 이후에는 약간 쇠퇴하였으나, 14세기 후반에 티무르 제국의 수도가 되어 크게 번영하였다. 16세기 초이래 부하라한국의 영유가 되었고, 19세기 중엽에는 러시아가 점령한 바 있었다.

                                                            레기스탄 광장

 

                                              Shakhi Zindeh Mosque

 

               그리아미르 사당[아미르의 묘]티무르의 검은돌로 된 관             

                                  

강거 (康居)는 현재 우즈베키스탄 인근 지역에 세워진 고대 국가이다. 강거의 여름 수도가 지금의 타슈켄트이다. 위치는 소그디아나의 북쪽이며 다유안(페르가나)의 북서쪽 1000km 떨어져 있다. 기원전 128년 장건이 방문한 후 기록에 남겼다. 강거는 수당왕조시대에 강국(康國)으로 개명하였지만 그 당시에 영역은 곡투르트 칸의 돌궐인들에 의해 지배되었다.

 

Countries described in Zhang Qian's report. Visited countries are highlighted in blue.

장건의 보고서에 기술된 나라들


史国 샤후리사브스(우즈베크어:Shahrisabz/Шахрисабз)는, 사마르칸드의 남 약 80㎞에 위치하는 인구 약 53,000명의 마을이다. 고도는 대략 622 m 있다.  이전에는, 중앙아시아에 있어서의 주요 도시였던 역사를 자랑해, 오늘로는 14 세기에 트르키스탄을 석권 한 티무르가 탄생한 장소로서 알려진다. 마을의 이름은, 페르시아어의「초록의 마을」(شهر سبز:「샤후레·사브즈」)에 유래한다.


2000년에, 15 세기 티무르아침 시대에 건축된 건물의 현존 하는 지구가 유네스코의 세계 유산에 등록되었다.


원래는 마음 편안해지는 장소라고 하는 의미의 케슈, 키슈 (Kesh)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던 거리이며, 고대의 샤후리사브스는, 중앙 아시아의 도시 중에서도 최고의 역사를 가진다. 알렉산트로스 3세의 장군 프트레마이오스는 바크트리아 지방의 사트랍이 되어, 이 땅에서, 하카마니슈아침은, 임종을 맞이했다. 알렉산트로스는, 기원 전 328년부터 327년의 겨울에 걸쳐, 샤후리사브스에 체재하면서 아내 로잔나를 맞아들인다.


수당대의 중국의 사료에 쓰여져 있는 소무9성의 하나사국은, 이 땅에 흥한 도시 국가이다. 「대당서역기」(「서유기」의 원안)에는 갈상나국(Sanskrit명 Kusana의 음역)의 이름으로 등장했다. 그 밖에 Kesh의 음역의 竭石国、渴石国、可石国등이라고도 쓰여졌다.


티무르는, 1336년 4월 9일, 샤후리사브스로 탄생했다. 티무르는 샤후리 사브스를 스스로의 고향이라고 생각해 여기에 스스로의 무덤을 건설하는 것을 계획했다. 그러나 티무르왕조 시대, 샤후리 사브스는 서서히 제국의 중심의 지위를 사마르칸드에 양보하게 되었다.


브하라의 수장인 아브두라 2세는, 16 세기에 거리의 대부분을 파괴해, Khanate of Bukhara왕조의 융성을 꾀했다. 전설에 의하면, 아브두라가 거리를 파괴한 것은, 샤후리사브스의 공략 시에 갑작스러운 비탈길을 오를 때에, 피로로 애마가 죽었기 때문에 그 분노가 마을로 향해졌지만, 후에 그는 스스로의 파괴 행위에 대해서 자책하는 마음에 있었다고 한다.


브하라·한국의 통치에 대해서, 샤후리사브스는 자치권 투쟁을 전개했다. 러시아 제국이 1870년에, 샤후리사브스를 자국에 병탄했지만 그 이유는 트리의 징세 청부인을 샤후리사브스의 주민이 살해한 혐의에 의한다.

 

                   코쿠·군밧즈·회교 사원(우르그·베크의 금요일 회교 사원) Kok-Gumbaz

 

                                        악·사라이 궁의 문 Aq-Saray Shahrisabz

 

                                                          Dorussiadat

 

安国 브하라(우즈베크어 : Buxoro, 러시아어 : Бухара (Bukhara))는, 우즈베키스탄의 도시에서 브하라주의 주 도. 자라후샤 강 하류역에 고대보다 돋보인 오아시스 도시에서, 1993년에는, 구시가지가 유네스코의 세계 유산에 등록되어 있다. 인구는 약 23만 7천명(1995년).

 


도시명은, 아미르국기까지 이 지역의 전통적인 서사 언어인 근세 페르시아어·체가타이어에서는خارا(Bukhārā; 브하라)와 표기된다. 여러나라어에 의한 표기에서는 Bukhara 혹은 Bokhara로 여겨지는 것이 많아 옛날에는 보하라라고 쓰여지는 일이 있었다.


20 세기의 초두까지 브하라·아미르국(브하라·한국)의 수도가 놓여져 서트르키스탄에 있어서의 정치·문화의 중심 도시에서 만났다. 특히 근세 페르시아어 문학의 발달에 이 도시가 남긴 발자국은 크다. 이러한 역사 배경으로부터, 현재는 주민의 대다수가 민족적상 우즈베크인으로 되어 있지만, 주민의 사이에서는 페르시아어계의 타지크어가 넓게 이야기해져 타지크인으로서의 아이덴티티를 가지는 사람도 많이 존재하는 복잡한 민족 구성을 가진다.

 

                                                                   Bukhara

 

                                                 

                                                              알크(城塞) 

 

                         브하라의 이스마이르·사마니묘 Samaniden-Mausoleum

 

                                  카란·회교 사원과 미나렛트 Bukhara poi kalon

 

                                 체할·미나르(4개의 미나렛트) Bukhara chor minor


石国 타슈켄트는,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우즈베키스탄 북동부, 시르다리아강의 지류인 치르치크강의 유역에 위치하는 역사적인 오아시스 도시. 인구는 대략 200만명으로, 중앙아시아 최대의 도시이다.

 

 

                                                            Tashkent

 

                                          Statue of Amir Timur in Tashkent


기후는 지중해성 기후. 여름의 더위와 건조는 어렵지만, 겨울은 비가 많이 추위도 그만큼 심하지 않다. 도시명은 테르크어로「돌골」현대 우즈베크어 표기는 Toshkent, 러시아어 표기는Ташкент (Tashkent). 페르시아어 표기에서는 تاشكند (Tāshkand)。타슈켄트와 표기되는 일도 많다.


타슈켄트는 소그드어에서의 고명을 챠츄(c'c :Čāč), 또는 챠츄칸드라고도 해, 페르시아어라도 챠츄(چاچ Chāch)로 칭해, 아라비아어에서는 샤슈(شاش Shāsh)로 불렸다. 치르치크강의 형태 만드는 타슈켄트·오아시스의 주읍으로서 또 카자흐 초원·천산산맥 호쿠로쿠의 유목 지대와 트란소그디아나의 오아시스 정주 농경 지대를 중계하는 상업도시로서 고대부터 번영했다.


국제 교역에서는 중국에까지 이름을 알려져 후한서 이래 石国로 불렸다. 또 「챠츄」의 소리사진으로서「者舌」(위서)이나 수당시대의「柘支」, 玄奘三蔵의 대당서역기에서는「赭時」라고 쓰여졌다. 소그드인이 중국 지역에서 이용한 한 자성에서는, 챠츄 출신자는 「돌石」성을 자칭했다. 750년에는 당의 장군 고선지가 石国에 침공했기 때문에 샤슈(챠츄)는 이슬람 제국에 지원을 요구해 타라스 하반의 싸움의 계기를 만들었다. 그 후 다양한 이슬람 왕조와 북방의 유목민의 지배를 거쳐 점차 도시 주민의 이슬람화·테르크화가 진전했다.


10 세기말 무렵부터「타슈켄트」라고 불리게 되었다. 西域番国志에 의하면, 15 세기 초두, 明의 永楽帝의 생명을 받은 천청이 육로에서 이 땅을「達失干」라고 하고 있다.


몽고 제국 시대에는 페르시아어의「챠츄」나 아라비아어의「샤슈」로 불리는 것이 일반적인 것 같지만, 무갈왕조의 시조 바불은 자전인「바불·나마」에 대해「타슈켄드는 서적에는

「샤슈」또는「챠츄」라고 쓰여지며 말하고 있어, 그가 중앙아시아에서 활약한 16 세기무렵에는 이미「타슈켄트」가 티무르아침의 왕족들 등으로는 보다 일반화하고 있던 것 아닌가 한다. 도시의 이름이「챠츄(샤슈)」로부터「타슈켄트」에 변화한 원인은 아마「챠츄」의 소리사진에 유래하는 「石国」를 위구르 지방등의 테르크어로 직역한 형태라고 생각되지만, 이것이 현지에서도 사용되게 된 것은 위구르 지방과 마와라안나풀 쌍방을 영유하고 있던 차가타이·우르스의 영향이 생각된다.


16 세기에는 18 세기에는 코칸드·한국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19 세기의 중반에 접어들면서 러시아 제국이 코칸드·한국을 정복하여, 러시아의 직할령에 집어넣을 수 있었던 타슈켄트에는 1867년에 트르키스탄 총독부가 설치되어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지배의 거점이 되었다. 러시아는 구시가의 외측에 러시아인이 사는 유럽적인 신시가를 만들어, 중앙아시아 경제의 중심 도시라고 해도 발전했다. 러시아 혁명을 거쳐 1924년에 우즈베크·소련 사회주의 공화국에 편입되어 그 수도가 되었다

 

曹国 

米国

何国 

火尋国 

戊地国

 

              Sogdians, depicted on a Chinese Northern Qi stela, circa 550 AD.

 

                                         Gold coin of Diodotus c. 250 BC.

 

Barbaric copy of a coin of Euthydemus I, from the region of Sogdiana. The legend on the reverse is in Aramaic script.

                               Sogdian coin, 6th century AD. British Museum.

 

          Chinese-influenced Sogdian coin, Kelpin, 8th century AD. British Museum.

 

Sogdian in Sassanid style dresses donors to the Buddha (fresco, with detail), Bezeklik, eastern Tarim Basin, China, 8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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