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廣西 百濟鄕 방문記 「이 먼 곳에는 어이 오셨나요?」
1996년 9월 15일 KBS 1TV「일요스페셜」에서는 신라중심의 역사기술로 소홀히 다뤄져온 백제의 역사를 재조명하는 다큐멘터리가 방영됐다.「속 무령왕릉, 잊혀진 땅 ─ 백제22담로의 비밀」이란 이 다큐멘터리는 백제 특유의 지방 통치체제인 '담로'를 화제로 삼아 6세기 당시 활발한 해상활동을 벌였던 백제의 구역을 추적한 것이다. 담로(擔魯)란 백제의 지방 행정 구역의 하나로서, 왕자나 왕족을 보내어 다스리게 한 행정 구역을 말한다. 백제는 22담로를 두었으나 시대와 지역의 대소에 따라 수효의 변천이 있었다. 과연 '담로'는 어떤 모습의 통치체제였고, 어디에 존재했는지 또, 해외에까지 뻗어 있었던 것인가! ─ 이런 의문들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제작진은 중국과 일본, 동남아시아 일대를 섭렵하며 8개월 동안 백제의 흔적을 추적했는데 가장 큰 성과는 중국에서 백제의 지명을 찾아낸 것 일 것이다. 제작진은 베이징에서 3천km나 떨어진 베트남 인접지역 광시좡족(廣西壯族)자치구에서 '백제향(百濟鄕)'이란 이름을 찾아냈고, 이곳이 바로 중국의 사서인《송서(宋書)》에 등장했던 백제의 옛 영토 '진평군'이란 것을 알아냈다. 백제향의 중심마을 이름이 백제허(百濟墟ㆍ백제 옛터)란 것도 눈길을 끄는데 이곳에는 전남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맷돌과 외다리방아 등이 발견돼 백제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또한 지금의 중국 베이징과 톈진, 스자좡(石家莊)지역에까지 백제의 흔적이 퍼져있음을 확인했고, 더 나아가 중국사서에 기록된 백제 태수들의 임지가 중국 동해안을 따라 선을 잇듯 분포한다는 것도 밝혀, 중국 속의 백제 지배지가 베이징과 톈진지역으로부터 지금의 저장성(浙江省)지역까지 남하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줬다. 특히 제작진이 발견한 흑치상지의 묘지명(남경 박물관 소장)에서 흑치상지가 흑치지역에 봉해지면서 원래 백제의 왕성(王姓)인 부여씨를 버리고 흑치씨를 사용했다는 기록을 찾아냈는데 결국 흑치지역이 동남아시아를 뜻하기 때문에 백제의 통치지역은 동남아시아 일대까지 이어졌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소진철(蘇鎭轍)(원광대 교수, 정치 외교사)
1) 옛날「백제」는 광서지역에도 진출
오래전부터 廣西(광서)지역의 지도상 에는 ‘百濟(백제)’라는 표기의 지명이 기재되어 있으며 또한 그곳 주민들은 수백년동안 그 땅의 이름을「百濟墟(백제허)」라고 불어왔는데 진작 우리들은 그러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나 수년전 모방송사의 한 프로그램에서 그 지역의 역사를 처음으로 보도함으로서 비로서 그 존재를 알게 되었다. 廣西지역의 ‘백제’ 마을 사람들은 주로 ‘장족(壯族)’들인데 그들은 1500년이라는 긴 세월을 통해서 옛적 「백제」의 영화를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는 사람들이다.「廣西壯族自治區 邕寧縣 百濟鄕 百濟墟(광서장족자치구 옹령현 백제향 백제허)」는 바로 그러한 사람들의 생활 터전이 기도하다.
그 동안 우리와 일본의 역사사서는 대부분이「백제」의 ‘실체’를 축소하여 기록하고 있는데, 이러한 역사에 익숙해온 사람들에게 「백제」는 참으로 큰 나라로서 먼 남방의 지역에까지 진출하였다고 해도 그것을 믿을 사람은 그리 많치 않을 것이다. (주․『일본서기(日本書紀)』에 의하면 「백제」는 왜왕(倭王)이라는 천황(天皇)에게 해마다 조공을 받쳐 왔으며 또한 그들의 왕자들은 천황에 ‘인질’로 와 일본에서 어린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대륙의 최남단에 위치한 해남도(海南島)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한 산간 마을에서는 아직까지 옛「대백제」의 향수를 한 몸에 안은 체 살아가는 한 무리의 중국 소수민족 ‘장족’이 있다. (주․한 주민(장족)의 말에 의하면 이지역의 ‘장족’들은 오래전에 山東(산동) 반도의 白馬江(백마강) 지역에서 온것 같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의 조상들이 여기에 오게 된 이유는 전쟁 때문에 왔다는 이야기도 있고, 또한 장사를 하러 왔다는 말도 있다고 한다)
송(宋)나라 이후의 남조(南朝)사서에는 의래히「백제」의 대륙진출에 관한 기사가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까「백제」는 진말(晉末․서기 400년 전 후경)에 ‘료서군’과 ‘진평군’에 진출해 그곳에 ‘백제군’을 설치하고 그것을 경영하였다고 한다. (『梁書』百濟條「晉時句麗旣略有 遼東, 百濟亦 据有 遼西․晉平郡 矣, 自置 百濟郡」) 그러므로 당시의「백제」는 상당히 큰 세력을 가진 해양력을 유지한 것으로 보이며, 또한 이것을 직접 행사 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廣西 지역의 ‘백제허’도「백제」가 실지로 진출한 지점으로 보이며 ‘진평군’의 통치 영역에 속하는 ‘백제군’의 한 도읍지로 추정된다. (주․『中國古今地名大辭典』 晉平縣條 「南朝宋置 南齊因地 今當在廣西境」)
2)「 邕寧縣 百濟鄕」으로 가는 길
필자가 ‘백제허‘를 ‘진평군’․‘백제군’의 옛 도읍지로 추정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백제허(墟)’라는 그 지명 자체에 있는 것이다. 여기의 ‘허(墟)’는 사전에 의하면 그 뜻은 ‘성터’ 또는 ‘유적지’로써 그것은 ‘백제군’의 옛도읍지가 아니고서는 생길 수 없는 지명이다. 그러므로 ‘백제허’는 동북아시아의 고대사 미스터리를 풀 수 있는 중요한 실마리를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필자가 오래 전부터 이 지역을 꼭 한번 방문해서 그곳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었던 심정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나는 지난달 초(10월 초) 桂林(계림)을 경유해서 같이 갈사람(통역)을 대동하고 그곳으로 갔다. 그곳은 단신으로는 여행을 할 수 없는 오지마을인 것이다.
필자는 桂林에서 고속버스 편으로 南寧(남영)을 경유해서 근교에 위치한 邕寧(옹령)에 도착해 자리를 잡았다. 桂林-南寧간의 거리는 약 500km인데 5시간정도의 운행시간이 소요되었다. 버스는 비교적 새차로서 편리한편이었다. 차내에는 이차는 우리나라의 대우(大宇) 자동차가 만들었다고 하는 표시가 있어 한편으로는 반갑기도 했다. 중국의 고속도로는 비교적 잘 정리가 되어있는데, 통행차량이 거의 없기 때문에 운전속도는 제법 빠른 편이었다. 차도 연변에는 한참 자라고 있는 사탕수수로 밭은 꽉 차있어, 중국 남부 지방의 풍요로운 농촌 풍경을 볼 수가 있었다.
나는 南寧의 왜각도시인 邕寧에서 하루 밤을 지내고 다음날 아침 일찍이 ‘백제향‘ 행 마을버스에 몸을 실었다. 아침날씨는 화창하고 선선한 편이었다. 그러나 그 지역은 열대지대라서 하루에도 한두 차례씩은 ‘스콜 squall’이 온다고 해 나는 비에 대한 대비를 하고 떠났다. 이 지역주민들의 생활을 볼 겸 나는 마을버스에 몸을 실었는데 차체가 워낙 고물이라서 외국인이 여행하기에는 적합치 않은 편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도로도 포장이 되고 도로 사정이 좋아져서, 운행시간은 퍽 단축되었다. ‘백제허’까지의 거리는 약 150㎞인데, 종전에는 3, 4 시간 걸렸다고 하는데 최근에는 그 절반인 1시간 30분 정도 면 그곳에 갈 수가 있다.
띠처럼 이어진 백제의 흔적들
3) 마을에는 ‘백제’ 기명의 간판으로 일색
필자가 방문한 ‘백제허’는 인구가 약 1,300명 정도의 작은 농촌 마을이다(‘백제향’의 총인구는 3,300명이다). 주민의 대부분은 ‘장족’들로서 그들은 오랜 세월을「백제」의 역사를 간직하고 사러온 중국의 소수민족이다. 백제허는 오지(奧地)마을로써, 주민들의 생활여건은 아주 열약한 편이고 왜지인의 왕래도 거의 없는 편이라서 여행자가 묵을 만한 수박시설은 전무하고, 또한 식사를 제대로 할 만한 식당도 눈에 뛰지 않았다. 그러나 이 마을에도 소위 근대화와 개발의 바람은 불어 거리는 말끔히 포장이 되고, 하수공사 등 여러 가지 지반 공사가 한 참 중이었다.
마을에 들어서니 마을 유지로 보이는 한 청년이 다가와서 왜지 에서 온 우리일행을 근처의 한 골목길로 안내했다. 알고 보니 그곳은 ‘백제허’에서는 제일 번화하다는 골목인데 그 이름은 ‘百濟街(백제가)’라 하였다. 골목 양측에는 제법 깨끗한 벽돌집이 줄서 있는데 한눈에 보기에도 그곳 사람들의 생활수준은 다른 주민들보다는 난 편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마을에서는 향 (우리의 면(面)에 해당)의 이름도 ‘백제’이고 마을의 이름도 ‘백제’ 그리고 마을의 유일한 골목길의 이름까지도 ‘백제’ 라고 하니 그야 말로 ‘백제’라는 이름을 뒤집어쓰고 있는 셈이다. 동네에는 그밖에도 많은 간판이 눈에 띄었는데, 모두 ‘백제’라는 이름이 들어 있는 것 뿐 이었다.「邕寧縣地方稅局 百濟稅務所 (옹령현지방세국 백제세무소)」,「邕寧縣百濟鄕 人民政府(옹령현 백제향 인민정부)」등의 지방정부의 간판과, 「百濟文化院(백제문화원)」「百濟旅社(백제려사)」등 수없이 많은 간판들은 모두 ‘백제’라는 이름을 내세우고 있다. 나는 아직까지 이렇게 많은 ‘백제’ 라는 이름을 표기한 간판은 본 일이 없다.
나는 수년전 일본 九州(큐슈) 宮崎縣(미야사끼현)의 南鄕村(난고촌)이라는 한작 은 산간마을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마을의 전설에 의하면「백제」멸망 후「백제」를 탈출한 한 왕족의 가족들이 망명해서 이곳에 와서 살었다고 하는데 거기에는 옛날에는 ‘백제왕 신사’도 있었다고 한다. 이 마을에서도 ‘백제’의 이름이 들어 있는 간판은 여기저기에서 볼 수가 있었다. 먼저 마을에 들어서면 보이는 것은 「百濟の里(백제마을)」라는 대형 입간판이 보이며 마을 큰길가에는 마을 회관으로 보이는 큰집이 잇는데 그것은「百濟の館(백제관)」이다. 그리고「百濟茶室(백제다실)과「百濟書店(백제서점)」등등이 눈에 뛰었다. 그러나 이 정도의 숫자로서는 廣西지역의 ‘백제허’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것이다.
4) 장족들은 지금도 ‘백제’를「大百濟(대백제)」로 호칭
필자가 이 마을에 와서 더 큰 감명을 받은 것은 무엇보다도 이들 ‘장족’들은 마을의 이름을 백제허’ 라고 쓰고 그것을 발음할 때는 우리말로「대박제․ DaejBakcae」라고 해, 글자 그대로 발음을 하지 않는다. 이것은 오늘날 일본에서「백제(百濟)」라고 쓰고 그것을「구다라․くたら」라고 발음하는 것과 꼭 같은 것이다. 일본 학계는「구다라․くたら」의 어원을 밝히기를 꺼려하는데 이것은 ‘큰 나라’라는 우리의 고대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주․우리말에는 큰 뱀을 가리켜 ‘구렁이’라고 하는데 이 ‘구’자는 크다는 우리의 고어이다)
그 옛날「백제」는 우리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거대한 ‘실체’였던 것이다. ‘백제향’의 ‘장족’들은 그들의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대백제」의 위엄을 잊지 않고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모든 역사는 세월이 흐르메 따라 서서히 지어져 없어지게 마련인데, 이곳 ‘백제허’ 사람들은「대백제」의 찬란한 영화를 ‘백제墟’라는 고(古)지명으로 이어온 것이다. 그러므로 ‘백제허’ 주변에는 많은 고지명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그 마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는 団城(단성)이라는 작은 마을이 있다. 사람들은 거기에 가면 옛 성터와 같은 유적이 있다고 하는데, 나는 시간 관계상 그곳에는 들리지 못했다.
또한 거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는 그 지역에서는 제일 큰 마을인 ‘大王灘(대왕탄)’이 있는데 그 지명을 통해서 볼 때 지금의 尺江(척강)은 그 옛날에는 大王川이라 불이었을 것이다. 백제인 들은 어디를 가나 으래히 ‘대왕천’, ‘대왕포’, 나 ‘대왕궁’ 또는 ‘백제궁‘ 과 같은「대백제」의 존재를 상징하는 이름을 여기저기에다 표시하곤 한다. 우리는 이러한 경우를 고대 일본(왜국)에서 본바가 있다. ’백제허‘에서 동쪽으로 얼마를 가면 ’那樓墟(나루허)‘가 잇는데 ’장족‘들은 이것도 우리말로「대나루․ DaejNaru」라고 부른다.
지명(地名)의 생명력은 강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곳“백제향”의 고지명도 그 숨은 뜻을 통해서 볼 때「백제」는 분명 그 옛날 이 지역에서「대왕국」으로서의 위엄을 떨친 것으로 보인다. 武寧王(무녕왕) 대의「백제」를 말한 것으로 보이는『양직공도(梁職貢圖)』에 의하면 이 시대에「백제」는 22개의 담로(檐櫓)로 나라를 경영했다고 하는데 이 지역도 그런 담로지역의 하나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지역에서도「백제」는 왜국(倭國)땅에서 본바와 같은「大王年․대왕년」의 년대를 통용했을것으로 보인다. (주․『오사카 가이드』(오사카府 경찰부편)에 의하면 현재의 나마노區(옛날의 百濟野)는 1천년전에는「百濟郡 百濟鄕」으로 불렀다고 한다)
5) 백제장군 ‘흑치상지(黑齒常之)’의 고향은 어디?
나는 최근 중국에서 발간된『中國將帥全傳(중국장수전전)』이라는 일종의 장군에 관한 사전을 본 일이 있다. 이 책에는 그 동안 우리에게는 수수께끼로만 알려진 ‘흑치상지’의 고향에 관한 기록이 있는데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백제사의 지평을 크게 확대할 수 있게 되었다.
『구당서(旧唐書)』,『신당서(新唐書)』와 『삼국사기』등 여러 사서에서는 그를 그저 ‘백제서부인(百濟西部人)이라고 하는데 구체적인 기록이 없기 때문에, 그를 그저 사비(泗沘)지역의 서쪽사람으로만 여겨 왔던 것이다. 그러나 중국사람(당(唐)나라)이 말하는 ‘백제 서부인’ 은 그런 뜻이 아니고 그것은 중국에 있는 ‘료서군’이나 ‘진평군’과 같은 ‘백제군’의 통치 영역에 속하는 백제인을 통칭하는 말로 보인다. (주 ․일찌기 신라인 최치원․(崔致遠)은 백제의 대륙진출을 인정한다)
이「전전․全傳」은 놀랍게도 ‘흑치상지’는 ‘백제 서부인’이며 그는 지금의 廣西 ‘백제향’ 지역에서 출생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黑齒常之 (? ~ 689年) 唐高宗李治武則天后時名將 百濟(今廣東欽縣 西北)西部人) 그러니까 ‘흑치상지’는 그의 묘지명에서 발킨 바 와 같이 (묘지명은 약 70년 전 중국 洛陽(락양)에서 발굴) 그의 조상 문덕(文德), 덕현(德顯), 사차(沙次)등은 백제인 으로서 대대로「흑치국」의 왕에 봉해진 백제왕의 후왕(侯王)으로서 자신은 그들의 후손으로서 지금의 ‘백제향’ 지역에서 출생 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필자는 그의 출생은 629년으로 추정)
그렇다면 그의 출생은 백제사에 있어서 최대의 미스터리의 하나인「흑치국」의 위치를 비정(比定)하는 문제에 있어서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다. 과연「흑치국」은 어디에 위치했는지에 대한 답은 기록을 통해서 찾기는 어려운 게 사실이나, 정황을 종합해서 볼 때「흑치국」의 도읍지는 오늘날의 ‘백제향’ 지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금번 내가 이 지역을 방문한 주된 이유도「흑치국」의 소재를 확인해 보고 싶은 심정에서였다. 그래서 나는 이 지방의 한 유지에게 “옛날 이 고장에도 ‘흑치인’들이 살지 않았느냐?” 고 물었더니 그는 (60살은 된 듯함) 내 질문에 성큼 답하기를 “자신의 세대에서는 볼 수가 없었지만 조부의 세대에서는 볼 수가 있었다”고 한다. 자신이 어렸을 때 조부로부터 들은 이야기로는 “조부의 소년 시에는 거리에서 종종 이빨이 검은 사람들을 볼 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조부의 말은 “그들은 게을러서 이를 딱지 않아 그리된 것”이라고 한다.
나는 그의 말을 경청하였다. 그러니까 100여 년 전만 하드래도 마을의 거리에서는 ‘흑치인’들을 볼 수가 있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흑치국」의 도읍지도 이 지역의 어디엔 가에는 있었을 것이라는 나의 추정은 그리 빗나간 이야기는 아닌 상 싶다. 이런 저런 일들을 생각하는 동안에 해는 저물러 가고 나도 이만 ‘백제허’를 떠나야 할 시간이 되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흑치상지’의 조상들의 유물도 이 근방 어딘가 에는 남아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간직하고 후일 다시 이곳을 방문할 것을 기약하고 ‘백제향’을 떠났다. (주․옛날 중국의 양자강 이남의 여러 지역(대만도 포함)에서는 이빨이 검은 ‘흑치인’이 살고 있었는데, 그중 서부지역 및 서남방과 월남경내에는 많은 ‘흑치인’이 살았다고 한다)
6) 방문 소감
비록 짧은 시간의 방문이기는 하나, 여기서 나는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 처음 여기에 올 때까지만 해도 내마음한 구석에는 “과연 백제인 이 이 먼 곳에 까지 올 수 있었을까?” “왜 왔을까?” 그리고 “‘장족’들은 왜 여기 와서 살고 있을까?” 등등의 의문이 교차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곳의 ‘장족’들이 1500년이라는 긴 세월을 옛날 백제인 들의 생활양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들의 조상은 이 땅에서 백제인과 더불어 오랜 세월에 걸쳐 생활을 하였다고 하는 사실을 확신 하게 되었다.
그곳의 집집에는 데게 방앗간이 있는데, 그 방아는 쌍 다리가 아니라 ‘외다리방아’였으며, 또한 부엌(옛 날 우리의 부엌과 같이 안지는 것)의 ‘맷돌’은 주둥이에 홈이 파진 맷돌인데 이것들은 모두 옛날 백제인 들이 사용했던 양식 그대로인 것이다. 오늘날은 전라도나 일본의 오지농촌에서 나 볼 수 있는 것들이다. 그리고 마을 입구에는 큰 고목의 느티나무가 서있는데, 주민들은 그 옛날 백제인 들이 나무에 제단을 채려 놓고 마을의 소원을 비렀던 것처럼 지금도 제를 올이고 있으며, 한편 집안에는 조상을 모시는 조그마한 재단이 있는데(일본에서도 집집마다 재단을 차려 놓고 있다) 이런 관래는 옛날 백제인 들의 생활양식 그대로 인 것이다.
찾아보면 더 많은 것들이 있겠지만, 이 몇 가지의 사래만 보도라도 그런 것은 하루 이틀 만에 동화(同化)되는 것은 아니고 오랜 습관의 반복으로서 이루어지는 것이니 이 지역에 있어서의「대백제」의 존재를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더욱이 ‘장족’들은「백제」를 부를 때는 아직도 “대박제”라고 하는데, 다소 변음은 되었으나 이것은 옛적부터 불러오던 습관일 것이다. (중국말 발음으로는 빠이지(Baijixu) 라고 해 전혀 다르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아 ‘백제향’ 지역은 옛 ‘백제군’의 한 도읍지로 보이며, 또한 그곳은 동시에 ‘흑치상지’의 조상이 왕으로 봉해졌다고 하는「흑치국」의 도읍지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주․魏志倭人傳․위지왜인전(서기 240년 경의 말)에는「흑치국」에 관한 기사가 있는데 ‘왜국’에서 남쪽으로 1년의 뱃길에 있다고 한다. 그것이 어디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전술한「흑치국」과는 무관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백제人이 이 지역을 출입하였다는 사실은『일본서기』에 그 기록이 남아 있다. 推古紀(스이고기) 22년 (614년)-백제는毘崙(곤륜·캄보디아지역)에서 -온 사신을 바다에 던져 넣어 죽였다)
蘇鎭轍
1930년생, 서울大 법학과 졸업, 고등고시 행정과 합격
미국 남이리노이스大 M.A 미국 오크라호마大 Ph.D.
외무부(싱가폴, 아프카니스탄, 요르단 등지 대사)
미국 매리란드大(서울 캠퍼스) 강사, 미국 버크리大 연구교수,
원광대 교수, 아시아 史학회(동경) 회원
著書 金石文으로 본 백제 武寧王의 세계;, 한국전쟁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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