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괘(儀軌) 그 아름다운 자신감을 후손에게!
[수원시민신문] 2005/10/17 [18:01]
화성성역의궤, 원행을묘정리의궤
1. 의궤란 무엇인가
1) 조선의 기록문화와 의궤
조선시대의 국왕은 막강한 권한을 가졌으며, 왕위를 후계자에게 물려주지 않는 이상 사망할 때까지 계속하는 종신직이었다. 따라서 국가의 운명은 국왕의 자질과 능력에 따라 좌우되었고, 사대부들은 국가의 존립을 위해서 국왕의 막강한 권한을 규제할 방안을 생각했다. 그 방안의 하나가 국왕의 교육이었고, 다른 하나가 철저한 기록이었다.
조선 국왕은 왕자로 태어나 죽을 때까지 교육을 받았다. 교육은 나이와 신분에 따라 보양청(輔養廳) 교육, 강학청(講學廳) 교육, 서연(書筵) 교육, 경연(經筵)으로 구분되었으며, 각 단계별 학습 상황이 보양청 일기, 강학청 일기, 서연 일기, 경연 일기로 기록되어 관리되었다. 따라서 성왕(聖王)이 되기를 꿈꾸는 국왕이라면 한시도 학문 연마를 소홀히 할 수 없었고, 사대부들은 교육을 통해 국왕을 견제할 수 있었다.
왕권을 규제하는 또 하나의 장치는 철저한 기록문화였다. 조선왕조실록은 국왕이 사망한 후에 비로소 편찬되었고, 후대의 국왕이라도 선왕의 실록을 볼 수 없게 함으로써 사관(史官)의 신분을 보장하고 기록의 진실성을 확보했다. 국왕은 자신이 살아 있을 때는 물론이고 사후에 정리될 기록까지 의식하면서 살아야 했으므로, 스스로를 단속하고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의궤는 조선시대 기록문화의 꽃이다. 주요한 국가 행사를 대상으로 한 의궤는 행사 기간 중에 국왕이 내린 명령서, 업무를 분장(分掌)한 관청 간에 오간 공문서, 업무의 분장 상황, 업무 담당자의 명단, 행사 또는 공사에 동원된 인원, 소요 물품, 경비의 지출 내역, 유공자에 대한 포상 상황을 모두 기록함으로써 국가의 재정이 낭비되거나 딴 곳으로 전용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었다.
의궤에서 발견되는 또 하나의 특징은 아름다운 기록화이다. 의궤에는 행사의 전 과정을 보여주는 반차도(班次圖)나 각종 건물 또는 물품의 모습을 그린 도설(圖說)이 수록되어 있다. 통상 천연색으로 그려진 이 그림들을 통해서 우리는 당시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느낄 수 있고, 문자 기록만으로는 파악하지 못하는 물품의 세부 사항까지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의궤는 기록과 그림이 어우러진 종합적인 행사 보고서라 할 수 있다.
2) 의궤의 역사
의궤는 조선 초부터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실록 기록에 따르면 태종 11년(1411)에 “종묘제례에 앵두를 올리는 시기가 의궤에는 5월 초하루와 보름이라고 규정되어 있다”는 구절이 있고, 세종 4년(1422)에 태종의 국장 제도를 의논하면서 태조와 정종의 상장의궤(喪葬儀軌)와 태종의 비 원경왕후의 국상의궤(國喪儀軌)를 거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의궤는 모두 17세기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며, 그 이전의 것은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규장각에 소장된 의궤 중에는 제작 연대가 1600년(선조 33)까지 올라가는 것이 있는데, 책에는 불에 그을린 흔적이 남아 있어 이러한 추정을 뒷받침해 준다.
17세기 이후 의궤는 꾸준히 제작되었고, 18세기에 들어오면 그 종류와 숫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18세기는 국가의 각종 문물과 제도를 전반적으로 재정비하는 시기였으므로, 국가적 행사의 보고서인 의궤도 많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특기할 점은, 종래의 의궤는 필사본으로만 만들어졌는데 정조대의 원행을묘정리의궤(園行乙卯整理儀軌)나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를 필두로 활자본 의궤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활자본 의궤라 하더라도 그 속에 수록된 그림은 목판을 새겨서 찍은 목판본이었다. 이 시기에 활자본 의궤가 만들어진 것은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를 보급하여 왕조의 국정 운영 상황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의궤는 19세기에도 계속 만들어졌다. 특히 정조의 정책을 계승하여 부강한 국가를 만들려 했던 고종 대에는 많은 의궤들이 제작되었는데, 그 체제나 내용에서도 정조대의 방식을 택했다. 가장 마지막에 나온 의궤는 1926년 순종황제의 국장을 기록한 순종효황제어장주감의궤(純宗孝皇帝御葬主監儀軌)와 1929년 순종황제와 순명황후의 삼년상을 치른 후 신주를 종묘에 모시는 과정을 기록한 순종효황제순명효황후부묘주감의궤(純宗孝皇帝純明孝皇后祔廟主監儀軌)이다.
따라서 의궤는 조선이 건국된 이후부터 순종황제가 사망할 때까지 꾸준히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의궤라는 이름은 이후에도 계속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때의 의궤는 특정한 행사에 관한 일체의 기록을 정리한 것이 아니라 이왕직이 관장하던 왕실 제례의 축문을 정리한 장부에 불과하였다. 왕조의 쇠망과 함께 의궤의 기록도 초라해져갔던 것이다.
3) 의궤의 종류
① 국왕의 일생
원자아기씨장태의궤(元子阿只氏藏胎儀軌), 왕자의 태(胎)를 보관할 태실(胎室)을 만들어 안장하는 과정
태실석난간조배의궤(胎室石欄干造排儀軌), 왕자가 국왕으로 즉위하면 태실을 태봉(胎封)으로 격상시키고 주위의 석물을 추가로 설치하는 과정
세자책례도감의궤(世子冊禮都監儀軌), 왕자가 왕세자로 책봉되는 과정
왕세손책례도감의궤(王世孫冊禮都監儀軌) 왕자가 왕세손으로 책봉되는 과정
고종대례의궤(高宗大禮儀軌), 1897년 고종 황제가 왕위에 있다가 황제로 즉위하는 과정
가례도감의궤(嘉禮都監儀軌), 왕실의 혼인
국장도감의궤(國葬都監儀軌), 국왕이나 왕비가 사망했을 때 장례 절차
예장도감의궤(禮葬都監儀軌), 왕세자나 세자빈이 사망했을 때 장례 절차
빈전혼전도감의궤(殯殿魂殿都監儀軌), 국왕이나 왕비의 국장에 사용되는 물품을 준비하고 제사를 집행하는 과정
산릉도감의궤(山陵都監儀軌), 장지에 무덤을 조성하는 공사
부묘도감의궤(祔廟都監儀軌), 삼년상을 치른 후 국왕의 신위를 종묘로 옮기는 과정
② 국가 행사
종묘의궤(宗廟儀軌), 사직서의궤(社稷暑儀軌) 종묘와 사직의 시설 증축, 제례 절차, 제사 기물
황단종향의궤(皇壇從享儀軌), 대보단의 제례 절차
대보단증수소의궤(大報壇增修所儀軌), 대보단의 증축 공사
친경의궤(親耕儀軌), 국왕이 전농동에 있던 적전(籍田)에 나가 시범적으로 농사를 짓는 과정
친잠의궤(親蠶儀軌), 왕비를 비롯한 왕실 여인들이 궁중에서 누에치는 행사
영접도감의궤(迎接都監儀軌), 중국 사신의 영접
③ 편찬 사업
실록청의궤(實錄廳儀軌), 실록수정청의궤(實錄修正廳儀軌)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東國新續三綱行實撰集廳儀軌)
천의소감찬수청의궤(闡義昭鑑纂修廳儀軌)
국조보감감인청의궤(國朝寶鑑監印廳儀軌)
④ 건축
영건도감의궤(營建都監儀軌), 성곽 및 건물의 건축 과정
화성성역의궤, 화성의 축성 과정
⑤ 기타
진찬의궤(進饌儀軌), 진연의궤(進宴儀軌), 궁중의 경사를 축하하기 위해 잔치
어진도사도감의궤(御眞圖寫都監儀軌), 국왕의 초상화인 어진(御眞)을 제작하는 과정
대사례의궤(大射禮儀軌), 국왕과 신하가 성균관에서 활쏘기 시합을 벌이는 행사
4) 의궤의 제작과정
○ 도감(都監)의 설치
도감은 각종 행사를 치르기 위한 임시 기구
행사 내용에 따라 명칭을 구분, 가례도감(혼례), 책례도감(국왕, 왕세자의 책봉), 국장도감(장례), 영접도감(사신 접대), 영건도감(건축)
○ 도감의 관리는 겸직
도제조(都提調) 1인, 총 책임자, 정승급
제조(提調) 3~4인, 부 책임자급인, 판서급
도청(都廳) 2~3명,
낭청(郎廳) 4~8명,
감조관(監造官), 감독관, 이상 실무 관리자, 당하관에서 임명
산원(算員, 회계), 녹사(錄事, 문서 수발), 서리(書吏, 문서 작성), 서사(書士), 고직(庫直, 창고지기), 사령(使令) 등 행정 지원
○ 행사의 시작부터 끝까지 전 과정을 날짜순으로 정리
○ 행사가 끝난 후 의궤청을 설치, 의궤 제작
5) 의궤의 보관처
의궤는 편찬 방법에 따라 필사본과 활자본으로 구분되었는데, 대부분의 의궤는 담당자가 손으로 직접 기록한 필사본이었다. 의궤는 보통 5~9부 내외로 제작되었는데, 이는 다시 열람자나 보관처에 따라 어람용(御覽用 ; 국왕이 친히 열람하는 의궤)과 분상용(分上用 ; 여러 곳에 나누어 보관한 의궤)으로 구분되었다. 어람용 의궤는 통상 1부가 제작되었으며,
1776년(정조 즉위년)에 규장각이 설립된 이후 주로 규장각에서 보관했다. 그리고 분상용 의궤는 의정부‧춘추관‧예조 등 국가 전례(典禮)를 관장하던 기관과 서울과 지방의 사고(史庫)에 분산, 보관되었다.
① 의정부와 예조
의궤가 보관된 대표적인 국가 기관으로는 의정부와 예조가 있었다. 의정부는 국가 전례를 심의 결정하는 기관이고 예조는 국가 전례를 실제로 집행하는 기관이었으므로 이들 기관에는 반드시 의궤가 배포되었다.
한말에는 관제 개혁에 따라 의궤의 보관처가 장례원(掌禮院), 비서원(秘書院), 예식원(禮式院) 등으로 바뀌는데, 이 역시 국가 전례를 집행하는 기관이었다.
② 춘추관과 사고
나머지 의궤는 춘추관과 지방 네 곳의 사고에 분산, 보관되었다. 춘추관과 지방의 사고라 하면 우리는 얼른 ꡔ조선왕조실록ꡕ을 떠올리게 된다. 실록을 편찬한 곳이 춘추관이고, 실록을 보관하는 곳이 춘추관과 지방의 사고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고에는 실록만이 아니라 왕실의 족보, 경학서, 역사서 등 국가에서 편찬하는 주요 문헌들도 함께 보관되었으며, 의궤 역시 국가의 중요 기록물로서 사고에 소중하게 보관되었다.
사고의 건물은 통상 사각(史閣)과 선원각(璿源閣)으로 구성된다. 사각은 주로 실록을 보관하는 건물이었으므로 ‘실록각’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선원각은 왕실의 족보인 선원록(璿源錄)을 비롯한 왕실 관련 자료들을 보관하는 건물이었다. 따라서 의궤도 주로 선원각에 보관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③ 외규장각
의궤를 보관한 또 하나의 장소가 강화도에 있는 외규장각이었다. 1782년(정조 5) 2월, 정조는 강화도 행궁 자리에 외규장각을 건설하고 강화부와 창덕궁 봉모당에서 보관해 왔던 왕실 관련 물품을 이곳으로 옮겼다. 이때 규장각에 보관했던 어람용 의궤도 유사시를 대비하여 외규장각으로 옮겨졌다.
강화도는 서해에서 한강으로 들어와 서울에 이르는 길목에 위치해 있어, 인체에 비유하면 머리와 몸을 연결해 주는 목 부위에 해당하는 중요한 지역이었다. 정조는 군사적으로 철통 수비를 하고 있는 강화도에 외규장각을 설치하여 규장각에 소장된 중요한 국가기록을 안전하게 분산, 보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국방상 가장 안전한 지역의 하나로 여겨졌던 강화도의 외규장각은 불운하게도 1866년 프랑스군의 침입을 받아, 보관 중이던 어람용 의궤들을 집중적으로 약탈당했고 나머지 책들 역시 불타 버리고 말았다.
④ 현재의 보관처
현재 조선시대의 의궤는 규장각, 장서각, 파리국립도서관, 일본 궁내청 등에 소장되어 있다. 의궤가 가장 많이 보관되어 있는 곳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이다. 규장각은 약 600여 종, 3,000여 책의 의궤가 소장되어 있다.
규장각 소장본은 춘추관, 예조, 네 곳의 사고에 보관되어 있던 도서가 모여든 것이므로, 책의 종류와 수효가 매우 다양하고 풍부하다. 어람용 의궤의 대다수는 1866년 병인양요 때 약탈당했거나 화를 입었지만, 그 이후 제작된 어람용 의궤는 현재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에는 300여 종, 500여 책의 의궤가 있는데 주로 적상산 사고에 보관되어 있던 것과 고종대 이후에 제작된 것들이다.
파리국립도서관에는 191종, 297책이 보관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1866년 병인양요 때에 프랑스 해군이 강화부 외규장각에서 가져간 것이다. 이밖에 프랑스에서 흘러나간 ꡔ기사진표리진찬의궤ꡕ 1종이 현재 영국에 보관되어 있으며,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유출되어 현재 일본 궁내청에 소장되어 있는 의궤도 71종이 있다.
2. 원행을묘정리의궤
1) 화성행차의 의미
1795년(을묘년)은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회갑이 되는 해이자, 1794년에 시작한 화성 축성 공사가 어느 정도 윤곽을 드러내는 시점이었으며, 정조 즉위 20년이 다 되어 가는 시점에서 자신의 권위를 펼쳐 보일 필요성이 있었다.
1795년의 화성 행차는 정조가 이룩한 위업을 과시하고 신료와 백성들의 충성을 결집시켜 자신이 추진하는 개혁에 더욱 박차를 가하려는 정치적 행사였다. 정조는 이를 통해 아버지와 자신을 따르는 친위 세력을 하나로 묶고, 장차 화성을 중심으로 펼쳐 가려는 개혁 정치의 구상을 널리 알리려고 했다.
2) 원행을묘정리의궤의 내용
① 활자본 의궤
○ 을묘년(1795년)에 현륭원에 행차한 내용을 정리(整理)한 의궤라는 뜻, 1794년 12월에 행사를 주관할 정리소(整理所)를 설치하였으므로 ‘정리소의 업무를 정리한 의궤’도 의미함
○ 활자로 인쇄한 최초의 의궤로서 이 책의 인쇄를 위해 특별히 정리자(整理字)를 만듦, 뒤에 ꡔ화성성역의궤ꡕ ꡔ홍재전서ꡕ ꡔ장헌세자예제ꡕ를 인쇄할 때도 정리자를 사용함
② 권수(卷首) 1권, 도식(圖式)
○ 화성행궁도(華城行宮圖) : 화성행궁의 전도(全圖)
○ 봉수당진찬도(奉壽堂進饌圖) : 화성행궁 봉수당에서 열린 혜경궁 홍씨의 회갑 잔치 장면을 그린 그림
헌선도(獻仙桃) : 고려 때부터 내려오는 궁중 무용으로 오래 장수하기를 축원하는 의미가 춤
몽금척(夢金尺) : 조선 태조 때 정도전이 태조의 공덕을 기리려고 만든 악장을 춤으로 만든 것
하황은(荷皇恩) : 태종이 명나라 고명을 받은 것을 축하하며 지은 노래를 춤으로 만든 것
포구락(抛毬樂) : 고려 때부터 내려오던 춤. 비단 공을 구문에 집어넣는 놀이를 겸한 춤
무고(舞鼓) : 고려 때 만들어진 춤
아박(牙拍) : 동동사(動動詞)를 부르며 상아로 만든 작은 박(아박)을 두 손에 들고 장단을 맞추며 추는 춤
향발(響鈸) : 놋쇠로 만든 방울인 향발을 좌우의 엄지손가락과 가운데손가락에 끼고 장단을 맞추면서 추는 춤
학무(鶴舞) : 대나무로 만든 푸른 학과 흰 학 속에 무용수가 들어가 춤을 추면서 연꽃을 쪼아 여는 동작을 보이는 춤
연화대(蓮花臺) : 고려 때부터 내려오던 것으로 두 송이 연꽃 속에 여자아이를 숨겼다가 꽃이 터진 뒤에 나타나게 하는 춤
수연장(壽延長) : 고려 때부터 내려오는 것으로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춤
처용무(處容舞) : 신라 헌강왕 때의 처용설화를 바탕으로 하여 꾸민 가면무
첨수무(尖袖舞) : 오색한삼을 입은 무용수가 음악에 맞추어 손을 뒤집고 엎으면서 추는 춤
선유락(船遊樂) : 신라 때부터 내려오는 것으로 채색한 배를 두고 여러 무용수가 닻줄을 끌고 배를 감으로 추는 춤
검무(劍舞) : 군인 복장을 한 두 무용수가 마주보고 찰을 휘두르며 추는 춤
○ 채화도(綵花圖) :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의 머리에 꽂았던 채색 조화 그림
어잠사권화(御簪絲圈花) : 국왕과 혜경궁 홍씨가 꽂았던 조화 그림
홍도별간화(紅桃別間花) : 관리들과 군병들이 머리에 꽂았던 조화 그림
준화(樽花) : 단지를 장식한 조화 그림
상화(床花) : 잔치상을 장식한 조화 그림. 삼층대수파련(三層大水波蓮), 이층중수파련(二層中水波蓮), 일층소수파련(一層小水波連) 등 10종
○ 기용도(器用圖) : 회갑 잔치에 사용된 기물 그림. 수주정(壽酒亭), 준화상(樽花床) 등 16종
○ 복식도(服飾圖) : 회갑 잔치에 참석한 무용수들의 복식 그림
여령복식(女伶服飾) : 여령들의 복식 그림. 화관(花冠), 황초삼(黃綃杉) 등 5종
동기복식(童妓服飾) : 동기들의 복식 그림. 유소(流蘇), 금화라대(金花羅帶) 등 6종
○ 낙남헌양로연도(洛南軒養老宴圖) : 화성행궁 낙남헌에서 정조가 개최한 양로연 장면 그림
○ 알성도(謁聖圖) : 정조가 화성 향교의 대성전을 참배하는 장면 그림
○ 방방도(放榜圖) : 화성행궁 낙남헌에서 문과 무과 시험 합격자를 발표하는 장면 그림
○ 서장대성조도(西將臺城操圖) : 화성 서장대에서 장용영 군대가 훈련을 하는 장면 그림
○ 득중정어사도(得中亭御射圖) : 화성행궁 득중정에서 정조와 신료들이 활쏘기 시합을 하는 장면 그림
○ 신풍루사미도(新豊樓賜米圖) : 정조가 화성행궁 신풍루에 올라 백성들에게 쌀 나누어 주는 것을 감독하는 장면 그림
○ 가교도(駕轎圖) : 행사에 사용된 각종 가마의 그림
가교전도(駕轎全圖) : 혜경궁 홍씨가 타고 간 가교의 전체 그림
가교분도(駕轎分圖) : 혜경궁 홍씨가 타고 간 가교의 부분 그림. 35종의 세부 그림이 있음
유옥교(有屋轎) : 행사에 사용한 유옥교의 그림
○ 주교도(舟橋圖) : 정조의 행렬이 한강의 배다리 위를 지나가는 장면을 그린 그림
○ 반차도(班次圖) : 정조의 행렬이 화성을 왕복할 때의 모습을 그린 그림. 74면에 걸쳐 1,500명 이상의 인원이 나타난다.
③ 본문 5권
○ 행사와 관련된 국왕의 명령과 대화
○ 행사에 사용된 글
○ 의식 절차(儀註)
○ 해당 관청 보고서
○ 잔치 음식의 내용과 조달 상황
○ 국왕과 혜경궁이 타고 간 가마의 재료와 비용
○ 배다리 설치
○ 행사에 참여한 내빈(內賓, 여자 손님), 외빈(外賓, 남자 손님), 군인의 명단
○ 재용(財用, 재정지출 내역), 경비의 수입과 지출을 항목별로 정리
④ 부록 4권
○ 혜경궁의 진짜 생일날인 1795년 6월 18일에 창경궁 연희당에서 열린 회갑잔치(연희당진찬도, 홍화문사미도)
○ 사도세자의 회갑일인 1월 21에 사도세자의 신위를 모신 경모궁을 참배한 일
○ 태조 이성계의 아버지인 환조(桓祖)의 탄신 8주갑(480주년)을 맞아 정조가 영흥본궁에 관리를 보내 제사를 올린 일
○ 1760년 사도세자가 충청도 온양 행궁에 가서 심은 느티나무가 35년 만에 큰 나무로 성장한 것을 기념하여 영괴대비(靈槐臺碑)를 세우고 당시 세자를 수행한 관원에게 상을 내린 일
3) 반차도의 분석
○ 경기감사 서유방, 행차의 목적지가 경기감사 관할인 경기도 화성이었기 때문에 경기감사가 선두에 섬, 서유방은 정리소의 정리사이자 경기감사의 자격으로 행렬 인도
○ 총리대신 채제공, 1795년의 행차를 총괄, 정조의 신임을 가장 크게 얻었던 실력자로 사도세자를 복권시키고 화성을 건설하려는 정조를 실무적으로 뒷받침한 측근 인사
○ 별기대 84명, 깃발을 든 군사
악대(징 나팔 호적 해금 장고 북 피리), 행렬 곳곳에 나타나는데 행렬의 보조를 유지하고 행렬을 웅장하게 보이는 효과가 있음
○ 국왕의 어보(御寶)
○ 나인 18명, 회갑잔치에서 무용을 공연할 무용수, 궁녀가 궁 밖을 출입할 때에는 얼굴을 가림
○ 국왕의 가마
수어사 심이지가 인솔하는 50명의 기병이 선도
의장기 사이에 예비마 4필
정조의 어가, 실제로는 가마를 타지 않음
용기(龍旗), 국왕을 상징, 5명의 병졸이 함께 듬
취주악대 51명, 행렬의 중앙을 인도, 장용영에서 차출
훈련도감과 장용영의 초요기, 군영의 군대를 동원할 때 사용하는 깃발
○ 혜경궁의 가마
수라가자 마차, 혜경궁에게 제공할 음식, 조카 홍수영이 감독
혜경궁 가마를 끌고 갈 예비마 8필, 정조 갑옷을 실은 말 2필
훈련도감 소속 협련군 80인, 무예청 총수 80인 사이에 혜경궁 가마
별감 6인이 최측근 경호
○ 정조의 좌마(座馬), 30명의 무예청 군사, 30명의 순라군, 별감 6인이 경호
○ 청연군주 청선군주의 쌍가마
정조의 두 누이로 2살, 4살 연하, 혜경궁의 회갑잔치를 위해 동행
○ 장용영 군사 96인
○ 약물대령의관, 국왕의 주치의
○ 용호영에서 차출된 가후금군 50인
4) 관련 기록
○ 원행정례(園行定例), 1789년 이후 매년 있었던 정조의 화성 행차와 관련된 사항을 정례화하여 정리한 책
○ <화성능행도> 병풍, ꡔ원행을묘정리의궤ꡕ에 나오는 주요 행사 장면을 천연색으로 그린 명품, 고궁박물관, 호암미술관, 일본 교토대학 문학부박물관 등에 전해짐
○ <화성원행반차도>, 천연색 두루마리, 규장각 소장, 행렬을 뒤에서 본 모양
3. 화성성역의궤
1) 화성의 축성
1789년, 정조는 천하 명당인 화산 아래에 현륭원 조성한 후 화성에 깊은 관심을 가짐
1793년, 수원을 화성(華城)으로 고치고 유수부를 설치, 오늘날 직할시 개념
화성은 華人祝聖에서 유래, 장자「천지」편
화(華) 지방 사람이 요(堯) 임금에게 장수, 부유, 자식 많기를 기원
요 임금은 욕됨, 일, 걱정이 많다며 덕성 기르기를 강조
1794년은 태조 이성계가 조선왕조의 도읍을 서울로 옮긴 지 꼭 400주년이 되는 해였는데, 이 때 정조는 수도권의 남쪽 요충지인 수원에 화성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공사 기간이 2년 여, 공사에 투입된 인원은 연 70여만 명, 공사비가 80만 냥에 이르는 거대한 공사였다.
사도세자가 살아 있었다면 혜경궁 홍씨와 함께 60세가 되는 해에 정조는 신도시 수원에 성곽과 행궁을 마련하는 공사를 시작했던 것이다. 화성 축성은 집권 20년이 다되어 가는 정조의 안정된 왕권과 절정기에 이른 조선왕조의 문화적 역량을 총체적으로 과시하는 대역사가 되었다.
2) 화성성역의궤 의 내용
① 권수(卷首) 1권
범례, ꡔ화성성역의궤ꡕ의 체제를 설명
좌목, 화성을 건설하고 의궤를 편찬하며 인쇄하는 데 참여한 인원 명단
도설(圖說)
○ 화성전도(華城全圖) : 화성 및 행궁의 전체 모습을 그린 그림. 성 둘레가 4,600보(步)임
○ 장안문외도(長安門外圖)․내도(內圖) : 화성의 북문인 장안문을 안팎에서 본 그림
○ 팔달문외도(八達門外圖)․내도(內圖) : 화성의 남문인 팔달문을 안팎에서 본 그림
○ 창룡문외도(蒼龍門外圖)․내도(內圖) : 화성의 동문인 창룡문의 안팎에서 본 그림
○ 화서문외도(華西門外圖)․내도(內圖) : 화성의 서문인 화서문을 안팎에서 본 그림
○ 남암문외도(南暗門外圖)․내도(內圖) : 팔달문의 동쪽 75보 거리에 있는 남암문을 안팎에서 본 그림
○ 동암문도(東暗門圖) : 동장대의 서쪽 166보 거리에 있는 동암문의 그림
○ 북암문도(北暗門圖) : 동북각루의 동쪽 40보 거리에 있는 북암문의 그림
○ 서암문외도(西暗門外圖)․내도(內圖) : 서장대의 남쪽 44보 거리에 있는 서암문을 안팎에서 본 그림
○ 서남암문외도(西南暗門外圖)․내도(內圖) : 서암문의 남쪽 367보 거리에 있는 서남암문을 안팎에서 본 그림. 서남포사(西南舖舍)가 있음
○ 북수문외도(北水門外圖)․내도(內圖) : 방화수류정의 서쪽 44보 거리에 있는 북수문을 안팎에서 본 그림. 위에는 화홍문(華虹門)이 있음
○ 남수문외도(南水門外圖)․내도(內圖) : 구천(龜川) 위에 있는 남수문을 안팎에서 본 그림
○ 은구도(隱溝圖) : 하수구와 작은 연못이 있는 남은구(南隱溝)와 북은구(北隱溝)의 그림
○ 서장대도(西將臺圖) : 팔달산 정상에 있는 서장대의 그림
○ 동장대도(東將臺圖) : 화성의 동북쪽에 있는 동장대의 그림
○ 동북노대외도(東北弩臺外圖)․내도(內圖) : 창룡문 북쪽 96보 거리에 있는 동북노대를 안팎에서 본 그림
○ 서북공심돈외도(西北空心墩外圖)․내도(內圖)․이도(裏圖) : 화서문 북쪽의 치(雉) 위에 있는 서북공심돈을 안팎에서, 내부구조도
○ 남공심돈외도(外圖)․내도(內圖) : 남암문 동쪽의 치 위에 있는 남공심돈을 안팎에서 본 그림
○ 동북공심돈외도(外圖)․내도(內圖)․이도(裏圖) : 노대의 서쪽 60보 거리에 있는 동북공심돈을 안팎에서 본 그림, 내부구조도
○ 봉돈외도(外圖)․내도(內圖) : 화성의 파수를 담당하는 봉돈을 안팎에서 본 그림
○ 동북각루외도(東北角樓外圖)․내도(內圖) : 옹성(甕城)의 서북쪽 19보 거리에 있는 동북각루를 안팎에서 본 그림.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이라고도 함
○ 서북각루외도(西北角樓外圖)․내도(內圖) : 화서문 남쪽 146보 거리에 있는 서북각루를 안팎에서 본 그림
○ 서남각루도(西南角樓圖) : 용도(甬道)의 남단에 있는 서남각루의 그림. 화양루(華陽樓)라고도 함
○ 동북각루도(東南角樓圖) : 구천 위에 있는 동남각루의 그림
○ 포루외도(砲樓外圖)․내도(內圖)․이도(裏圖) : 포를 장치한 포루를 안팎에서 본 그림, 내부구조도
○ 동북포루외도(東北鋪樓外圖)․내도(內圖) : 방화수류정의 동쪽 135보 거리에 있는 동북포루를 안팎에서 본 그림. 각건대(角巾臺)라고도 함
○ 북포루외도(北鋪樓外圖)․내도(內圖) : 서북포루의 서쪽 129보 거리에 있는 북포루를 안팎에서본 그림
○ 동포루외도(東鋪樓外圖)․내도(內圖) : 창룡문 남쪽과 봉돈 남쪽에 있는 동포루를 안팎에서 본 그림
○ 치성도(雉城圖) : 성벽의 돌출부인 치성의 그림
○ 중포사도(中舖舍圖) : 각건대의 아래로 320보 거리에 있는 중포사의 그림
○ 내포사도(內舖舍圖) : 행궁 뒷담장 안에 있는 미로한정(未老閒亭)의 북쪽에 있는 내포사의 그림
○ 성신사(城神祠) : 팔달산 우측 산록에 있는 성신사의 그림
○ 행궁전도(行宮全圖) : 화성행궁의 전도
○ 사직단도(社稷壇圖) : 팔달산 서쪽 산록에 위치한 사직단의 그림
○ 문선왕묘도(文宣王廟圖) : 화성의 남쪽 3리(里) 거리에 있던 향교 대성전의 그림
○ 영화정도(迎華亭圖) : 장안문 북쪽 5리 거리에 있던 영화정의 그림
○ 영화역도(迎華驛圖) : 장안문 밖 1리 거리에 있던 영화역의 그림
○ 명물각도(名物各圖) : 타(垜), 오성지(五星池) 등 화성 성벽에 있는 각종 시설물의 세부 그림 96종
○ 기계각도(器械各圖) : 화성을 축성할 때 사용한 기계들의 그림
거중기전도(擧重器全圖)․분도(分圖) : 화성을 축성할 때 무거운 물건을 들어올리기 위해 만든 거중기의 전체 그림과 부분 그림.
녹로전도(轆轤全圖)․분도(分圖) : 화성을 축성할 때 돌을 들어올리기 위해 만든 녹로의 전체 그림과 부분 그림
대거전도(大車全圖)․분도(分圖) : 화성을 축성할 때 큰 돌과 길이가 일정하지 않은 재료를 운반하기 위해 만든 대거의 전체 그림과 부분 그림
평거전도(平車全圖)․분도(分圖) : 화성을 축성할 때 중간 크기의 돌과 기둥을 운반하기 위해 만든 평거의 전체 그림과 부분 그림.
발거(發車), 동거(童車) 등 24종의 기계 그림이 있음
○ 연거도(演炬圖) : 화성에서 심야 군사훈련 장면을 그린 그림
○ 대호궤도(大犒饋圖) : 화성 축성에 참여한 군사들의 공로를 치하하기 위해 음식을 하사한 장면을 그린 그림
○ 낙성연도(落成宴圖) : 화성 축성 낙성식을 기념하는 잔치 장면을 그린 그림
② 본문 6권
○ 어제성화주략(御製城華籌略), 화성설계의 기본 계획서, 정약용이 작성한 초안을 정조가 수정, 성의 둘레, 높이, 재료, 성 주위의 도랑 등을 규정한 설계안. 성의 둘레를 원래 3,600보로 규정했지만 실제로는 4,600보로 늘어남
○ 행사와 관련된 국왕의 명령과 대화
○ 성을 쌓는 데 참여한 관리와 장인(匠人, 기술자)들에게 준 상품
○ 각종 의식의 절차
○ 공사 기간 중 관련 기관 간에 오간 공문서
○ 장인들의 명단
1,800여 명의 명단이 석수, 목수, 니장(흙을 바르는 기술자), 와옹장(기와 벽돌 제작), 화공 등 직종별로 정리되어 있다. 최무응술(崔無應述) 안돌이(安乭伊) 유돌쇠(柳乭金)와 같이 하급 신분에 속하는 사람들 이름이 많이 보이며, 이름 밑에는 근무한 일수를 하루의 반까지 계산하여 임금을 지급했음이 나타나 있다. 국가의 공식 기록에 천인들의 이름이 보이는 것도 특이하지만, 이들의 작업량을 세밀히 정리하여 일일이 품삯을 지급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 소요 물품의 수량과 사용 내역, 단가
③ 부록 3권
○ 화성에 있는 각종 건축물의 규모와 위치, 소요 경비
○ 1795년 정조가 화성에 행차한 행사와 정조가 지은 글을 소개
원행을모정리의궤와 중복, 수정 과정에서 추가된 것
3) 화성성역의궤의 편찬
○ 1796년 9월, 화성 축성공사가 끝난 후 편찬하기 시작
○ 1796년 11월 9일, 초고 완성, 그러나 앞서 완성된 ꡔ원행을묘정리의궤ꡕ와 체제가 맞지 않자 수정 작업에 들어감
○ 1800년 5월, 편찬이 끝나 인쇄 작업에 들어감, 그러나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중단됨
○ 1801년 8월, 활자본 간행이 완료됨
4. 기록문화 전통의 계승
의궤란 ‘국가 전례의 궤범(軌範)’이라는 뜻으로, 국가나 왕실에서 개최하는 행사의 전 과정을 낱낱이 기록해 둠으로써 훗날 행사의 모범이 되도록 한다는 의미이다. 현재 진행하는 행사가 훗날 행사의 모범이 되기 위해서는 행사의 준비과정에서 시작하여, 본 행사, 행사 후 마무리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관리해야 했고, 관련 기록의 관리에도 만전을 기해야 했다.
의궤를 보면 우선 그 기록의 철저함에 놀랄 수밖에 없다. 행사를 총괄하기 위해 도감을 설치하면서부터 국왕과 관청, 관청과 관청 사이에 오가는 모든 공문서가 날짜별로 정리되며, 행사에 사용된 물품들이 새로 제작된 것과 기존에 있던 것을 빌려 쓴 것을 구분되어 기록되어 있다.
행사에 참여한 인원에 대한 기록도 철저하다. 행사에 참여한 관리와 장인들의 실명이 나타나므로 천인의 이름도 볼 수가 있는데, 이는 물품의 제작이나 공사에 하자가 발생했을 경우 책임 소재를 밝히기 위해서이다. 또한 건축이나 토목공사에 관한 의궤의 경우 노동자들이 작업한 시간을 반일 단위까지 기록하였는데, 이는 임금을 지불하는 근거가 되었다. 그리고 행사에 사용된 경비 내역도 소상하게 기록되어 밥 한 그릇, 간장 한 종지, 못 하나에 이르기까지 비용이 계산되었고, 예산이 남으면 그 사용처를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의궤의 보관 역시 철저하였다. 행사를 총괄하는 도감은 의궤를 편찬해야 하는 의무를 가졌기 때문에, 의궤라는 종합보고서를 완성해야 비로소 임무가 완수할 수 있었다. 따라서 도감은 행사가 끝난 직후 바로 의궤의 편찬에 착수하였다. 또한 편찬된 의궤 중 일부는 관련 기관에 배포되어 이후의 행사에 이용되었고, 나머지 일부는 사고로 보내져 보관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수백 년 전에 만들어진 의궤를 접할 수 있는 것은 의궤의 보관에 만전을 기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의궤의 기록은 예술성까지 겸하고 있다. 궁중에 소속된 전문 화가들이 그린 도설이 대표적인데, 이는 행사의 장면이나 제작된 물품의 모습, 건축물의 구조를 상세히 설명해 주는 동시에 보는 사람에게 아름답다는 느낌을 가지게 한다.
특히 국왕의 행렬을 그린 반차도는 통상 수십 장으로 그려지는데, 이를 들여다보면 자신이 화려한 국왕의 행사에 참석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또한 어람용 의궤에서 더 잘 나타나지만, 고급 비단을 사용한 호화로운 장정과 사자관(寫字官)들의 반듯하고 단아한 글씨를 보면, 누구나 이 책이 예사로운 책이 아님을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다.
이상에서 보듯 의궤는 기록성과 예술성을 겸하며, 보관이 철저한 것이 특징이었다. 의궤에 나타나는 조선시대 기록문화의 장점은 후손에게 행사 내용을 낱낱이 공개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는 자신감, 행사 기록을 예술적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미적 감각, 수백 년이 지나도 완벽하게 보존되는 관리 기술이었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기록문화의 전통을 계승할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김 문 식(단국대 사학과)
[수원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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