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SINA-신중국

골란 고원(Golan Heights)과 고란산(皐蘭山)

한부울 2009. 3. 29. 22:32
 

골란 고원(Golan Heights)과 고란산(皐蘭山)

[아시아문화사연구회]최두환 09.03.27 22:57

 

부여군 부여읍(扶餘邑) 부소산(扶蘇山)북쪽 백마강변에 있는 절 고란사(皐蘭寺)는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98호로 지정되었다. 백제 말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할 뿐,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않는다. 절 뒤 바위틈에 고란정(皐蘭井)이 있으며, 그 위쪽바위틈에 고란초(皐蘭草)가 나 있다.


이것이 대한민국의 "고란(皐蘭)"과 관계된 력사의 한 토막이다.


다른 사실을 하나 보자.


감숙성 란주시(蘭州市)에 있는 금성박물관(金城博物館)이 있는 고을이며, 이곳엔 현지 주민마저도 고란사(皐蘭寺)를 잘 알지 못하지만, 그곳엔 희한하게도 고란산(皐蘭山:해발2,700m)이 있다. 관광하려면 버스 기사에게 웃돈을 주고 산으로 갈 수 있다.


산은 매우 가파르고 위험하다. 란주(蘭州) 시내 한가운데에 절벽처럼 솟아오른 고란산(皐蘭山) 정상에 한 마을이 있는데, 현지 촌로에게 고란사(皐蘭寺)를 물어보면, 대개 옛날에는 “皐蘭寺”가 있었는데 여러 번 개축하여 지금은 “이랑”이라는 장수(將帥)의 사당이라고 한단다.


참으로 희한하다.


이 "皐蘭"을 한자로 발음을 표기하면 어떻게 될까?

쉽게 말하면 그냥 "Golan"[골란]이 아닌가?


골란 고원은 지명은 성서에 나오는 바샨 지방의 도피처인 골란 성에서 유래한다(신명 4:43, 여호 20:8).


물론 평균 해발고도 1,000m. 다마스쿠스 남쪽에 있으며, 서쪽은 요르단강(江) 계곡, 남쪽은 야르무크강(江) 계곡을 끼고 있다.


6세기에는 가산 왕국이 세력을 폄으로써 북쪽의 비잔틴제국과 남쪽의 유목민들 사이에서 완충국 역할을 하였는데, 그 이후에도 력사는 빠져 있고, 겨우 1894년 프랑스의 유대계 금융가 E. 로트쉴 남작이 이곳에 유대인 정착지를 건설하기 위해 많은 땅을 사들였고, 이어 미국 ·캐나다 ·유럽의 여러 단체도 같은 목적으로 땅을 사들였다.


이 정도의 력사뿐인 "골란 고원"!

이곳은 지금은 완전 폐허다. 그 찬란했던 력사의 고장이!

왜 1894년 이전에 이곳에 이렇게도 력사가 없을까?

그리고 지금의 중국사에서 감숙성 고란산이니, 고란사니 하는 곳의 력사는 그곳 주민들이 왜 잘 모르고 있을까?


한(漢)의 고조 류방이 평성에서 흉노족에게 포위되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는 등 대외적으로 세력은 그다지 강하지 않았다. 국내를 평정하고 통일한 것이 고작이었다. 고조 류방의 시대에서 1세기가 지나고 무제 시대가 열린 뒤에야 비로소 흉노를 무력으로 격파하기 시작했다. 흉노의 혼사왕(渾邪王)이 한에게 투항하자 그때까지 흉노가 유목을 하던 하서 지방이 한조의 세력권에 들어오게 되었다. 4군중에 가장 서쪽인 돈황지방에는 흉노가 들어오기 전에 월씨족이 살고 있었다. 월씨족에 대해서는 이란계,, 터키계, 티베트계라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다. 한 때는 흉노의 왕자를 인질로 삼았을 정도로 세력이 컸다. 그런데 인질이었던 흉노의 왕자 모돈이 탈출해서 선우(흉노의 왕자)가 되어 월씨를 공격했다.


월씨의 왕은 살해되었으며, 주민들은 서쪽으로 도망해 아프가니스탄 북부에서 중앙아시아에 걸친 지방에 새로운 국가를 건설했다. 월씨의 이동은 기원전 176년의 일로 한의 문제 시대였다.


흉노를 물리치기 위한 전략을 여러 가지로 생각하던 무제는 서쪽으로 도망친 월씨와 연합해 흉노를 협공하려고 계획했다. 그 계획으로 멀고 먼 서쪽의 월씨에게 갔던 것이 장건(張騫)이라는 인물이었다. 도중에 흉노에게 잡혀 10여 년이나 억류된 끝에 그는 겨우 월씨의 나라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월씨는 풍요로운 땅에 매료되어 더 이상 흉노에게 적개심을 갖지 않게 되었다. 그리하여 중국과 월씨의 군사동맹은 성립되지 않았다. 목적은 이루지 못했지만, 장건의 여행은 서역의 모습을 알게 되는 수확을 거둘 수 있었다.


이 짧은 력사 이야기에서 흉노라는 월씨와의 관계를 보면, 皐蘭(Golan)과 무관하지 않을 터이며, 이것이 서-아시아의 끝에 있는 시리아와 이스라엘의 어름에 있는 골란(Golan)고원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골란고원의 력사가 비어있는 데는 그만한 리유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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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성종 22년(1491, 홍치, 신해) 4월 28일의 기사를 보자.


(1)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 신종호(申從濩) 등이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에 이르기를,


“선왕(先王)이 사이(四夷)를 통치하시면서 공물[貢]을 바치지 않으면 명분을 닦고 왕(王)으로 여기지 아니하면 문덕(文德)을 닦는다 하였으니, 그 신중함이 이와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만둘 만한 것을 그만두지 않고 위험을 꾀하고 요행을 바라면서 금수(禽獸) 〈같은 무리와〉 이기고 지는 것을 비교한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요즈음 북쪽 오랑캐들이 사납고 교만하여 제왕(帝王)의 강토를 침범하였으므로, 전하께서 대단히 노하시어 홀로 예산(睿算)을 운용하시고, 앞으로 죄를 신문하는 거사를 일으키려고 하십니다.


대사헌 신종호가 상소한 내용이다. 그가 살았던 나라의 사실을 례를 들어 말하고 있다.


이웃나라의 사실을 찾아서 말했을까?


여기서 문제의 핵심은 "선왕이 사이를 통치하였다"는 사실이다. 이 "사이"는 사방에 사는 백성들이다. 동이/남만/서융/북적이다. 또 "북쪽 오랑캐들이 황제의 땅에 침입했다"는 말이다. 이 황제의 땅이 누구의 것이겠는가?


다음은 <속동문선>권15 칠언률시에 "집에 준마(駿馬) 한 필이 있어 기른 지 몇 십년이 되었더니, 어떤 날 병도 없이 죽었다. 내가 오랫동안 슬퍼하고 아까워하다가 시를 지어 그 사연을 적었다."는 "신종호(申從濩)"의 시가 있다.


(2)

말 있었네, 말 있었네, 말 중에도 황류마 / 有馬有馬黃騮馬

화경 같은 두 눈에 대쪽 같은 귀 / 眼挾菱鏡耳批竹

바다 건너 멀리 탐라국서 와서 / 渡海遠自耽羅國

장안 시장에서 그 날쌘 몸을 자랑했네 / 長安市上驚飛肉

네가 소원이었더면 장대 향토 수십 리 / 不顧章臺香土數十里

취막ㆍ주렴 푸른 버들 속으로 / 翠幙珠簾綠楊裏

금편 한 번 쳐들자 네 발굽이 껑충껑충 / 金鞭弄影四蹄驕

길 가득 지는 꽃에 봄바람이 일 뻔도 했고 / 滿路紅雨東風起

또 네가 소원이었더면, 옥장 만군 중의 대장을 태우고 / 又不顧玉帳分弓萬貔貅

고란산 밑에서 아직 싸움이 안 멎어 / 皐蘭山下戰未休

장팔사모 쇠 안장으로 / 丈八蛇矛銕鍜鞍

변방에서 오랑캐 두목의 머리를 벨 뻔도 했지만 / 塞外追斬戎王頭

너는 삼생 숙원이 호사를 싫어하여 / 三生宿願厭豪奢

하필 적막한 시인의 집에 와서 / 寂寞來到詩人家

음편 옆에 한 병의 술을 걸고 / 吟鞭傍掛一壺酒

산꼭대기ㆍ물가녘을 두루 놀러 다녔지 / 遊遍山顚與水涯


위의 (1)에 대사헌이었던 신종호인 듯한데, 탐라가 나오고, 장안이 나오고, 고란산이 나온다. 여기서도 그저 고사의 인용일까? 아니면 그 고사에 맞는 지역의 사실을 말했던 걸까?


국가지도자에겐 가장 합리적인, 가장 효과적인, 가장 효률적인 일을 해내기 위하여 고사를 교훈삼고, 활용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면, 이 지역을 어디로 잡아야 할까?


(3) 만전(萬全)의 〈계책을〉 놓아두고 다섯 가지 어려움을 범하시니, 아마도 뒷날 한없는 후회를 남길 듯합니다. 한(漢)나라 무제(武帝)가 전대의 치욕을 분하게 여겨 대단한 기세로 장수에게 명하여 대막(大幕: 大漠)을 끊고 고란(皐蘭)을 무찌르게 하여 위세를 사막(沙漠)에 떨쳤습니다. 그러나 군사와 말이 죽어서 해내(海內)가 텅빌 정도로 소모 되었으므로, 늙어서 잘못을 뉘우치고 마침내 윤대(輪對)의 조칙[詔]을 내렸습니다.


이 사례는 바로 황제의 땅에 침법 해온 북쪽 오랑캐를 가리키는 말이다.


b.c. 120 때의 일이지만, 그곳의 사람들이 침입했던 곳의 사례를 말한 것이다. 큰 사막을 끊어서 "고란" 지방을 안정시켰다는 말이다.


이 "고란" 지방은 매우 큰 사막이 있는 지역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큰 사막[大幕/大漠]이, 여느 사람들이 해석해놓은, "대막(大漠)은 흥안령(興安嶺)의 서쪽에서부터 시작하여 흑룡강성(黑龍江省)·찰합이성(察哈爾省)·외몽고(外蒙古)·신강성(新疆省)의 변경에 걸친 사막(沙漠)을 말함"일까?


설사 이렇게 풀더라도 한반도 조선으로 해석될, 인용될 고사는 아닌 것이다. 더구나 1491년이라면 말이다.


이 큰 사막!


(4) 부여의 백마강 : 조룡대(釣龍臺)ㆍ낙화암ㆍ자온대(自溫臺)ㆍ고란사(皐蘭寺) 등이 있으니 백제 때의 고적이다. 암벽이 기묘하고 아름다우며 경치가 뛰어나게 좋다.


이 (4)의 내용은 <연려실기술>별집 제16권 지리전고 산천의 형승에 나오는 것이다. "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 ..."라는 노래가 있기도 한데 부여의 백마강에는 "고란사"가 있고, 거기는 백제 땅이고, 거기는 참으로 암벽이 기묘하고 아름다우며 경관이 좋다고 했다.


이런 지리적 경관을 감상하려면 어디여야 할까?

배우 서태화씨가 다녀봤던 아시아의 저 서쪽 끝의 땅에는 없었던가? 나는 보았는데, ....


[아시아문화사연구회]최두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