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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추(胡椒:Black pepper-Piper nigrum)
글쓴이:한부울
소제:
왜토(倭土)는 아메리카(북, 중앙, 카리브, 남)이다.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가 도착한 인도 캘리컷(Calicut)은 브라질의 쿠리치바(古里提巴:Curitiba)이다.
대항해시대는 대왜구시대이다.
'후추'란 고대인도(印度)에서 실크로드를 통하여 중국(中國)으로 들어왔으므로 호국(胡國)의 산초(山椒)라 하여 그렇게 불렀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의학에서는 호초(胡椒)라고 한다.
호(胡)라고 하면 우리는 막연하게 북방 민족으로서 오랑캐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호(胡)가 아메리카대륙을 지칭한 호칭이라는 설명을 수차에 걸쳐 이미하여 정리가 되었다고 본다.
그럼에도 호(胡)가 아메리카대륙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재확인시켜야 한다.
여태까지 호(胡)는 서역(西域)이란 대명사처럼 쓰여 중앙아시아나 좀 더 서쪽을 연장하여 중동아라비아영역 정도까지 인식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서역은 다름 아닌 서유럽 또는 더 확장하여 볼 때 아메리카 대륙일 가능성이 더 높다는 말이다.
물론 수많은 생물학적 판단이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
서역(西域)이라는 단어를 현재 동아시아대륙에 위치한 중국을 기준으로 하여 근세 사학자들이 잘못된 아집에 의한 다분히 고의적으로 해석을 했기 때문에 발생한 오류인 것이다.
후추(胡椒:pepper)를 또 다른 이름으로 블랙 페퍼(Black pepper)라고 하며 대표학명으로 'Piper nigrum' 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프랑스 푸아브르(poivre) 즉 '후추'라는 라틴이름과 '검다'라고 하는 니그럼(nigrum)이 붙은 학명으로 '검은 후추'라고 알려져 있다.
백과사전에 후추나무 줄기는 목질화(木質化, lignification)하여 마디에서 착생근(着生根)이 자라서 다른 물체에 붙어서 자라며 8m 내외가 되고 잎은 어긋나고 두꺼우며 넓은 달걀 모양에서 원형이며고 열매는 둥글고 지름 5∼6mm이며 자루가 없고 붉게 익으며 완숙하여 검은색으로 변한다고 하였다.
이것 때문에 '블랙 페퍼'라고 했던 모양이다.
후추는 여러가지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데 첫째, 성숙하기 전의 열매를 건조시켜 겉에 주름이 지며 흑색인 것을 후추 또는 검은 후추(black pepper)라하고 둘째, 성숙한 열매의 껍질을 벗겨서 건조시킨 것은 색깔이 백색이기 때문에 흰후추(white pepper)라 하며 세째, 완전히 익은 열매를 소금물에 절여 건조시켜 만든다고 하여 적후추 또는 핑크 후추(Pink Pepper)라고 하였고 네째, 흑후추와 백후추의 중간 단계의 덜 익은 후추를 소금물이나 서양식초 비니거(vinegar)에 저장해 만든 그린 후추(Green Pepper)가 있으며 다섯째, 위의 것들은 모두 후추과(胡椒科:Piperaceae)후추속(胡椒屬:Piper)이지만 이것은 운향과(芸香科:Rutaceae)화초속(花椒屬:Zanthoxylum)으로 후추의 품종이 다르지만 붉은 갈색 열매로서 중국사천(四川)을 원산지로 하는 사천 후추(Zanthoxylum:Szechuan Pepper)라 하여 강한 향과 맛을 내는 것으로 알려진 것이 있다.
이 모든 종류의 후추는 강한 향과 맛을 내기때문에 주로 가루를 내어 이용하며 작은 용기통으로 적당량을 음식에 뿌려 이용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성분으로는 매운맛의 주성분 피페린(piperine)이 5∼5.5% 들어있고, 매운맛을 내는 캬비신(chavicine)이 6% 내외, 정유가 1∼2.5% 들어 있어 한방에서는 후추가 온중(溫中), 건위(健胃), 구풍(驅風), 발한(發汗)의 효능이 있다고 하여 소화불량, 위 허약, 번위(反胃), 구토, 하리(下痢)등의 증상에 약재로 이용되었다.
후추에 대한 역사에는 상당한 흥미를 끄는 설이 많은데 중세까지만 해도 전 유럽에서 요리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로마(Rome) 비잔틴제국(Byzantium Empire:330-1453)이 무너진 이후에 그 문화를 제대로 계승하지 못한데다 이후 금욕적인 기독교 문화로 인해 의도적으로 요리에 맛을 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고 있으나 자연 그대로의 생식을 하던 식성이 몸에 배여 있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고 딱히 유럽이란 요리문화가 없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비유라고 할 수가 있겠다.
그러나 삼한고려의 요리문화가 적잖게 존재하였지만 전통유럽문화가 아니라는 부정과 아랍문화로 인식되게 하여 변질시킨 결과가 아닌가 한다.
여기에 더하여 냉장시설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당시 존재하던 요리라고는 소금에 절인고기와 말린 생선정도가 전부이었으며 가축은 부패하지 않는 기후 10월에 도살되어 다음해 봄까지 저장해서 먹었기에 아무리 소금에 절여도 금세 노린내가 나고 부패될 수밖에 없었고 이를 참고 먹기위해서는 냄새와 맛을 위장시킬 필요가 있었다는 것인데 이 때문에 유럽인들에게 향신료란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는 것이고 그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정착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원산지 인도(印度), 중국, 아랍(Arab)에서 이미 후추를 사용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유럽인들이 이 향료를 찾아나서기 전에 이미 인간생활속에 깊숙히 사용되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어 뒤늦게 유럽음식문화에 적용하는 것이니 이렇듯 새로운 것이 되어버렸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다분히 유럽문화가 향료를 찾아 나설 때 부터 기인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이야기다.
서민들은 직접 자체적으로 구할 수 있는 대부분 향신료식물 허브(Herb)인 천초(川椒:초피나물), 겨자, 마늘과 함께 고기를 먹었고 귀족들은 그보다 맛이 좋고 값비싼 후추(胡椒:pepper)를 먹었다는 것이 지금까지 근세사로 전해지고 있는 이야기다.
후추의 원래 원산지는 아랍(Arab:아라비아)의 여러지방과 인도(印度, India)라고 하며 유럽의 귀족들은 비잔틴제국을 통해 후추를 수입해 왔었다고 한다.
그러던 와중 비잔틴제국(Byzantine Empire:395-1453)이 터키 오스만제국(Ottoman Empire:1299~1922)에 무너지자 후추 값이 폭등했다고 하였으니 비잔틴제국은 유럽의 끄나풀과 마찬가지이다.
그러하니 비잔틴제국은 유럽인들의 보루라고까지 하였던 것이다.
안 그래도 수요에 공급이 따라가지 못해 상당한 가치가 앙등하던 후추였는데 유럽인들 사이에는 값이 더 오를 수밖에 없는 것이어서 후추는 교환의 매개물로 취급되면서 귀금속처럼 대신하여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결혼지참금, 세금, 집세를 후추로 계산했다는 것이고 지주들은 화폐보다 가격 안정성을 고려하여 후추로 토지대금을 받는 것을 더 선호했다고 하였으니 후추가 곧 금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검은 금"이라 불렸으며 '후추로 지불하는 지대'라고 까지 하였던 모양이다.
게르만 부족의 리더인 아락크1세는 로마제국에 침략을 포기하는 대신에 금, 은, 그리고 후추를 공물로서 요구했다고 하니 알만 한 이야기다
이런 형평에서 다시 이슬람세력에 의해 공급이 끊겨 가격이 오르면서 후추 한 주먹에 노예 10명의 가격과 동일한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로 귀하게 되자 이런 후추의 쟁탈은 전쟁원인 중 하나로 작용하기도 했고 기독교 국가와 이슬람 국가와의 전쟁의 중심에는 후추를 포함한 향신료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설득력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런식으로 계속된 전쟁에도 불구하고 이슬람세력은 향료를 장악하는 것에서 좀처럼 꺽이지 않았기 때문에 유럽 각국은 부득불 이슬람을 거치지 않고 인도(印度, India)에서 후추를 구하기 위해 방법을 찾아 나섰다는 것이 대항해시대(大航海時代:15세기 후반-18세기 중반)라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맹점을 찾을 수 있는데 이슬람을 방해세력으로 등장시키는 것도 충돌의 이미지를 강화시키는 것으로 이해되지만 적어도 향료는 다변화된 지역에서 공급될 수 있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해진다.
향료 시장은 대조선(大朝鮮)이 관할 하였을 가능성을 놓고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래 조선왕조실록 기록에서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오는데 1494년에 윤효손(尹孝孫)이 성종에게 후추에 대해 진언하길 "이제부터는 단지 공무역(公貿易)만 하도록 하여 나라의 저축(儲畜)을 넓히고 또 중국[中朝]에 가지고 가는 것을 금(禁)하소서"란 것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이다.
현재 유럽인들은 이슬람과 기독교의 충돌을 말하고 있지만 솔직히 이슬람과 기독교의 역사는 일천한 역사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이 두 종교의 역사는 원시불교에서 파생한 것들로서 혼란이 극대화된 것은 바로 근세기이었음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충돌의 역사는 오래된 것이 아니란 이야기다.
이슬람이 세계삼한역사연구에서 원시불교라고 자꾸 나타나고 이들 세력들이 현재 아시아 중동이 아니라 중앙아메리카과 남아메리카대륙 북부에서 다양한 흔적이 등장하는 것은 근세사를 바라보는 시각을 달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 역시 그곳을 배회하기는 마찬가지였다고 보인다.
현재 근세사를 두고 역사를 말하지만 실상 따지고 들어 갈 때 북아메리카대륙과 남아메리카대륙 사이를 오가며 유럽의 지중해를 들락거린 것 말고는 대항해시대랄 것이 없어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아랍이나 유럽이란 지칭된 시기도 근세기 세계사가 완성(1922)되면서 부터 비로서 생성된 호칭이라면 실제로 유럽이 가지고 있는 역사는 그들의 대항해시대부터라고 할 수밖에 없다.
마치 유럽세력들이 본래부터 존재하여 유구(悠久)한 역사가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유럽 세력을 정의한다면 다름아닌 대조선이 장악한 세계틀에서 대조선의 간섭이나 압박을 피해 다니던 집단으로서 대조선을 상대하기 위해 그들만의 힘이 필요하였고 그러한 힘을 축적하는 수단으로 자본을 택했으며 자본이 될 수 있는 모든 이윤을 독식하기 위해 거의 바다에서 무법자 행세를 한 것으로 대조선에게는 왜구(倭寇)이고 간상(奸商), 해도(海盜), 해구(海寇)였을 뿐이다.
한마디로 대왜구(大倭寇)시대가 대항해시대였던 것이다.
이들은 결국 대조선의 눈을 피해 지배력과 간섭이 못 미치는 바다를 배경으로 하여 외딴 섬들을 거주지로 삼아 기지화하면서 기존 세계질서를 무너뜨렸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을 비주류라고도 할 수 있는데 기존 지배틀에서 불만세력들이 규합한 것은 당연하고 세력들이 약탈, 강탈, 폭리등으로 축적된 자본을 무기로 대조선의 근간을 흔들면서 결국 거대한 지배영역을 넓혀나간 것으로서 결국 대조선이 이들이 가진 자본력에 쓰러진 것이라고 보인다.
이것이 우리가 서세라고 하는 실체이고 이들이 유럽인으로 둔갑한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대조선이 이들 자본력에 쓰러지고 난 후 대조선을 대신하여 그들이 세계 주류역할을 하게 되면서부터 1881년 이후 각 대륙마다 분파전쟁은 끊이질 않았다.
인종간, 종교간, 각 지역간 이간시켜 분리를 부채질 하면서 충돌을 유발시켰고 이렇게 함으로서 대조선만을 상대하던 이윤파일이 최대한으로 크게 늘어나면서 그들은 세계자본을 독식하여 마침내 그들이 갈망하던 유럽 땅에 안착하게 이른 것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이들을 세계에서 다시 없는 문화국, 문명국으로 행세를 하며 기존 삼한역사유물을 파괴하거나 그들 것을 변질 시키고자 하였으며 이것에 중심역할은 바로 기독교가 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한가지 명확한 예를 하나 들자면 삼한의 신라(新羅)가 만든 나침판(羅針盤, compass)은 그냥 재미로 만든 것이 아니다.
대항해시대가 무엇인가?
고도의 항해술을 필요한다는 것은 상식적인 이야기로서 이러한 항해술엔 나침판은 절대적인 것이다.
그런 나침판을 신라(新羅)가 만들었다.
상상을 해보라.
그냥 한반도에서 대양으로 나가지도 않고 기껏 한반도 서해나 왔다 갔다 할 것인데 무엇때문에 기어코 나침판을 만들었을까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정말 신라(新羅)가 한반도 서해나 오가는 정도로 만족했단 말인가?
천만에 말씀이다.
신라(silla)때 장보고(張保皐:?-846)가 해상왕(海商王)으로서 개척한 해상로(海上路)를 이용하여 유향(乳香)을 구하였다고 하는 것을 보면 아랍학자 이븐 쿠르다드바(Ibn Khurdāhibaha:816-912)의 저술서 '제도로 및 제왕국지(Kitabu’l Masalik wa’l Mamalik)'에 기록이 아니라도 신라가 오만까지 왕래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신라가 세계대양을 항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중국학자 치엔쉬엔(錢選)은 나침판의 방위를 지칭한 아랍어 “khann”은 복건성(福建省)의 민남어(閩南語)라고 하여 나침판은 민남인(閩南人) 즉 신라인(新羅人)의 발명품이었다라고 한 사실도 확인할 수가 있다.
홍말리(紅茉莉:Bouvardia ternifolia)로 본 민(閩)땅 멕시코
http://blog.daum.net/han0114/17050667
민남(閩南)은 바로 멕시코 남쪽지역이란 사실을 위 본 블로그에서 글쓴이의 글에서 확인 할 수가 있다.
물론 그곳에 신라(新羅)가 존재하였다는 사실까지 동아시아 중국학자가 친절하게 밝혀준 것이다.
나침판이 세계 발명이라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가 없다.
그러한 나침판을 만든 신라(新羅)가 한반도 갇혀 대양으로 나오지 못하고 한반도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 것은 한마디로 괴변이며 엉터리같은 사실을 역사라고 가르치고 있으니 한심하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신라(新羅)는 나침판이 필요한 이유가 세계 대양을 마음껏 항해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세계삼한역사에서 한 예에 불과 할 뿐이다.
본 블로그에서 글쓴이가 고려(高麗)금속활자 인쇄술에 대한 설명을 자세히 언급한 적이 있다.
이 금속활자 발명도 현대 유명세계인들이 공히 세계발명품(世界發明品)이라고 높이 평가하고 인정한 사실을 들 수 있다.
또한 고려(高麗)의 종이기술을 어땠을까?
이 종이에 대한 설명도 이미 자세하게 본 블로그에서 기술한 적이 있다.
고려종이(高麗紙)와 닥나무(Broussonetia)근원 http://blog.daum.net/han0114/17050647
고려금속활자발명과 구텐베르크와의 이상한관계 http://blog.daum.net/han0114/17050475
이렇듯 인류가 가지고 있는 가장 인류발전에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주요 발명품이 모두 삼한인(三韓人)들에 의해 완성되었다는 사실은 결코 일제가 만든 한반도 역사 따위가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서양인들이 후추에 대해 충돌의 역사만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다분히 서양인의 관점에서 나온 철학적, 관념적 세계사일뿐 실증적인 세계사는 본래 분리의 역사가 분명아니었음도 알 수가 있다.
타고르가 그의 시(詩)에서 코리아를 보고 말했듯이'Where the world has not been broken up into fragments by narrow domestic walls' "좁다란 담벽으로 세계가 조각조각 갈라지지 않은 곳"이라고 하여 하나의 세계가 코리아에 의해 견고하게 완성되고 있었다고 믿기에 충분한 어구로서 그러한 것이 진정 사실이라면 하나의 세계를 조각조각 분리시켜 만든 것은 대항해시대를 운운하는 서세(西勢)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들이 만든 근세사의 태동이 결국 인류를 충돌의 역사로 점철되게 하는 극한상황을 연출한 것이기에 진한 안타까움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의 서양세력에 의해 강탈의 역사가 아니었다면 세계는 좀 더 평화로워 졌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마치 후추로 인하여 계층간 갈등이 증폭된 것처럼 기술하고 있지만 타고르의 주장을 빌린다면 그들이 해양을 뒤집고 설치기 전까지는 하나의 세계가 되어 평온했었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 수가 있다.
오히려 그들이 나서 안정된 시장을 어지럽히고 기존 질서를 깨뜨렸다는 것을 그들이 부인할 수 없을 것이고 그러한 혼란을 최대한 이용하여 독점적인 자본을 무기로 거대한 이득을 취하고 그들이 원하는 세계사를 차지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으며 이러한 논리는 경제학적으로도 지극히 상식적인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는 이야기다.
향료시장의 혼란을 그들이 유도한 것이 아닌 자연 발생적이라고 하고 그들은 그저 대항해시대가 가만히 있는 그들을 유인한 것이라고 변명하고 합리화시키고 있다는 것은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볼 때 분노를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할 것이다.
본시 그들 눈에는 모든 문화가 자본(資本)으로 가치되고 자본이 무소불위의 조건이라는 사실을 신봉하는 것에서 그러한 결과를 낳았을 것이고 그들의 목적대로 손쉽게 얻으려는 것을 얻을 수 있었다는 간단한 이치를 숨기고 있을 뿐인 것이다.
그들이 설치기 전에 세계사정이 물론 정치적으로 이해관계에 인한 충돌이 없지 않았겠지만 종교에 의한 종교분쟁(宗敎紛爭)이나 물질로 인한 충돌이 늘 있었던 것처럼 기술되는 부분도 근대사(近代史)가 가지고 있는 자만에서 나온 시각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근대사를 보면 향료를 찾기위해 1498년 포르투갈의 예수회 탐험가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 1469-1524)가 결국 수많은 난관 끝에 인도의 캘리컷(Calicut)에 도착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말하는 대항해시대(大航海時代, Age of Discovery)의 첫 걸음이었다는 것이다.
그 때부터 그들의 배가 닿는 곳마다 원주민에게는 공포의 연속이며 살상무기로 위협하여 억압하고 자본을 축적할 수 있는 무역기지로 삼아 식민지화(植民地化)거듭하면서 급격하게 수요가 증가하고 값이 하늘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던 향료(香料)를 탈취하거나 강탈하면서 그것을 당연시하고 너도나도 해적이 되어 개인적으로 부(富)을 축적하면서 욕구를 충족시켰으며 사회신분이 상승되는 것에만 만족하며 수많은 피해를 양상한 그들이 도덕적(道德的)으로 정당했다고 강변하는 것은 맞지 않는 논리인 것이다.
오죽했으면 근세사는 강탈의 역사라고 하겠는가?
현재도 그렇지만 이렇듯 강탈은 위협으로 또는 전쟁으로 이어졌으니 그들의 목적이 자본축적에 있었다면 이것이 강탈의 역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는데 실제로 서양세력들이 설치기 시작하던 시기에 그들이 본격적으로 활동했던 항로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동남아시아의 향료를 목표로 움직인 것인가 하는 점은 계속 의문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계속 들어나고 있는 실제로 향료가 동남아시아가 아니라 중앙아메리카라면 지금 삼한 역사 상황은 어떻게 변했을까?
근세사에서 그들의 고정된 항로는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 1469-1524)의 항로를 앞세워 1816년 멕스웰과 바실 홀이 선단을 이끌고 코리아를 방문할 때와 그 이후 1840년 아편전쟁과 1868년 오페르트의 남연군 분묘 도굴 사건(南延君墳墓盜掘事件)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항로는 처음과 끝에서 조금도 변함이 없는 항로이다.
실제로 아프리카남단 케이프타운을 휘돌기나 한 것일까?
처음 유럽 땅에서 출발하여 서아프리카 거센 폭풍을 피하면서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Rio de Janeiro)에서 항로를 재정비하고 곧장 동남쪽으로 키를 돌려 케이프타운(Cape Town)을 돌아 인도아대륙 캘리컷에서 물자를 보급받아 스리랑카를 지나 방갈해를 거쳐 말레카해협(Strait of Malacca)으로 들어와 인도네시아 자바 안제레(Anjere:West Java, Indonesia)와 자카르타라고 하는 바타비아(Batavia:now Jakarta)까지의 이어지는 항로는 늘 변할 수가 없는 약 28,000km 의 대항로이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의 목재범선으로는 엄청난 위험을 감수해야 할 항해인 것이다.
여기서 이런 질문을 해야 한다.
인도(印度)가 왜 인도아대륙 즉 아세아가 되어야 한다고 근세사는 고집을 할까?
그렇다 고집이다.
내가 보기에는 집착이고 고집인 것이다.
그것의 함축된 명확한 답은 바로 신대륙 발견이란 거대한 유럽역사의 분기점을 소화할 수 있어야 하고 궁극적으로 유럽사를 바탕으로 하는 근세사를 꿰 맞추어야 하였기 때문이다.
여기부터 서양사가 전개 될 수 있는 동력이 발생한다는 계산이다.
그러나 여태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보았을 때 인도는 인도아대륙에 없었다는 것을 수차례 확인하였고 결과 결코 인도는 아시아대륙에 없었다는 결론을 얻었다.
인도(印度)는 당연히 북아메리카대륙 남부와 중앙아메리카, 남아레리카대륙 사이에 있어야 맞다.
인도(India)에서 말레카(Melaka, Malacca), 수마트라(Sumatra), 자바(Java)에는 황금을 낳는 향료 후추(pepper)가 지천에 깔렸다는 것이고 인도, 스리랑카, 중국남부에는 육계(肉桂:cinnamon, cassia)계피가 있었으며 몰루카제도(諸島)에는 고기나 생선의 누린내나 비린내를 없애주는 향료 정향(丁香:clove), 인도반다(Banda)에는 설사와 토사를 막고 입맛을 돋우는 소화제 육두구(nutmeg, mace)가 있었다고 하면서 골고루 배분을 하였지만 이러한 이야기는 정해진 틀에 짜인 스토리처럼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많이 들어 각인되어 버렸다.
이렇게 만든 것이니 자연스럽게 아메리카대륙에는 이러한 향료가 전혀 생산되지 않았던 것으로 믿을 수밖에 없다.
동남아시아와 중앙아메리카 근역의 기후환경은 거의 동일하다.
이러한 서양인들의 주장만을 어찌 사실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가?
미안하지만 향료가 동남아시아 보다 오히려 서인도제도라고 하는 그 주위가 실제로 더 희귀한 생물로 지천에 깔렸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확인 할 수가 있다.
인도(印度)가 아시아에 없었다는 사실은 삼한사서에 등장하는 각종 열대, 아열대생물의 근원지를 살펴보아도 알 수 있으며 또한 삼한사서에 등장하는 향료기록 역시 한반도 지형과는 전혀 딴판인 환경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이 모든 것들은 한반도란 기후와 지형환경을 뛰어넘는 것이기에 당연히 인도가 아시아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너무나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한 예들은 다음 사서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는데 한반도 환경이라고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1]동의보감 호초(胡椒, 후추)
성질은 몹시 따뜻하며[大溫] 맛은 맵고[辛] 독이 없다. 기를 내리고 속을 따뜻하게 하며 담을 삭이고 장부의 풍과 냉을 없애며 곽란과 명치 밑에 냉이 있어 아픈 것, 냉리를 낫게 한다. 또한 모든 생선, 고기 및 버섯독을 풀어 준다.
○ 남방에서 난다. 생김새는 우엉씨(대력자) 비슷하다. 양념으로 쓴다. 양지 쪽으로 향하여 자란 것이 후추이고 음지쪽으로 향하여 자라는 것이 필징가인데 가루내어 약으로 쓴다. 일명 부초(浮椒)라고도 한다[본초]. 古月、黑川、白川、浮椒、昧履支、玉椒
[2]성종 25년(1494 갑인 / 명 홍치(弘治) 7년) 7월 18일(갑진)
후추를 왜와 사무역하는 것과 중국에 가지고 가는 것을 금하다.
○甲辰/...” 盧思愼議: “本國與倭相隣, 其所買賣, 胡椒居多, 民間得此, 時或齎賣中朝, 賜與出於一時特恩, 非人人之所得與。 今曰, 以賜與不節, 致生此弊, 恐未爲然。 入朝使臣, 所賫物數, 自有著令, 但犯禁者, 罪之而已。” 尹壕議: “胡椒, 非本國所産, 國用外, 民間痛禁。” 韓致亨議: “賫胡椒買賣中朝者, 痛禁。” 鄭文炯議: “胡椒受賜者不多, 其赴京人賫去之物, 安得盡出於受賜耶? 胡椒多入於諸藥, 民間亦不可無者也。 如今國家儲畜甚多, 姑許私貿易, 以除公貿易之弊, 以資民間藥餌之用爲便。” 尹孝孫議: “胡椒, 倭土所産, 固不可興用往售中國。 今許令私貿易, 則興利之徒, 不無潛輸犯法之弊。 自今只令公貿易, 以廣國儲, 且禁賫赴中朝。” 從尹孝孫議。
노사신(盧思愼)은 의논하기를,
“본국(本國)과 왜(倭)와는 서로 이웃하여 그 매매(賣買)하는 것은 호초(胡椒)가 많이 차지하므로, 민간(民間)이 이를 얻어 때로는 혹 중국에 가지고 가서 팔기도 합니다. 사여(賜與)는 한때의 특은(特恩)에서 나왔으며 사람마다 얻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사여(賜與)함에 절약하지 않아 이 폐단이 생기게 되었다고 말하나, 아마도 그렇게 된 것은 아닌 듯합니다. 그리고 중국에 조회하러 들어가는 사신(使臣)이 가지고 가는 물건의 수량도 스스로 영갑(令甲)에 나타나 있으니, 다만 범금(犯禁)하는 자만 죄줄 뿐입니다.”하고, 윤호(尹壕)는 의논하기를,
“호초는 본국(本國)의 소산(所産)이 아니니, 국용(國用) 이외의 민간(民間)의 사용은 통렬히 금지하소서.”하고, 한치형(韓致亨)은 의논하기를,
“호초(胡椒)를 가지고 중국에서 매매(賣買)하는 자는 통렬히 금지하소서.”
하고, 정문형(鄭文炯)은 의논하기를,
“호초를 하사받는 자가 많지 않은데, 그 부경(赴京)하는 사람이 가지고 가는 물건이 어찌 다 하사받는 데에서 나왔겠습니까? 호초는 여러 약에 많이 들어가니, 민간(民間)에서도 또한 없을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과 같이 국가(國家)에서 저축(儲畜)함이 매우 많으면, 우선은 사무역(私貿易)을 허락함으로써 공무역(公貿易)의 폐단을 제거하여 민간의 약이용(藥餌用)으로 공급함이 편하겠습니다.”
하고, 윤효손(尹孝孫)은 의논하기를,
“호초는 왜국[倭土]의 소산(所産)이니, 진실로 흥용(興用)하고 중국(中國)에 가서 팔 수 없습니다. 이제 사무역(私貿易)하도록 허락하면 흥리(興利)하는 무리가 몰래 수입(輸入)하여 범법(犯法)하는 폐단이 없지 않을 것이니, 이제부터는 단지 공무역(公貿易)만 하도록 하여 나라의 저축(儲畜)을 넓히고 또 중국[中朝]에 가지고 가는 것을 금(禁)하소서.”하니, 윤효손(尹孝孫)의 의논을 따랐다.
조선왕조실록을 들춰보면 후추가 제주에서도 생산된 것으로 나타나고 뿐만아니라 아래 열거한 것과 같이 1399년부터 1478년까지 일본(日本)과 유구(琉球)그리고 남번조와국(南蕃爪哇國), 구변국(久邊國)들이 그렇게 귀하다는 호초(胡椒, 후추)를 쉴새없이 대조선(大朝鮮)에게 조공(朝貢)하였던 기록이 넘쳐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당시 호초(胡椒)는 금(金)보다도 귀했다고 하였던 사정을 대입하면 한반도 조선(朝鮮)이 과연 그러한 위치에 있을 수 있었는가 금방 의문을 할 수밖에 없는 이치이다.
이것은 바로 일본, 유구, 남번조와국, 구변국 들이 대조선의 간섭을 약하게 하기 위해 그들의 이윤에서 적당한 비율의 몫을 받쳤다는 것 말고 합당한 이유가 없는 것이다.
대조선에게 최소한의 예를 취하지 않을 수 없다는 당시 상황을 충분하게 알 수가 있는 것이다.
1.정종1년(1399) 일본국 대장군(大將軍)이 사신을 보내어 방물(方物)을 바치고 피로(被虜)되었던 남녀 1백여 인을 돌려보내었다.
2.태종6년(1406)일본국 단주수(丹州守)와 비주수(肥州守)가 사신을 보내어 소목(蘇木)·호초(胡椒)·옥대(玉帶)·창검(槍劍)·수우각(水牛角) 등의 물건을 바치었다.
3.태종6년(1406) 남번(南蕃)의 조와국(爪哇國:자바-Java) 사신 진언상(陳彦祥)이 전라도(全羅道) 군산도(群山島)에 이르러 왜구(倭寇)에게 약탈을 당했다.
4.세종 16년(1434) 제주 선위별감(濟州宣慰別監) 윤처공(尹處恭)이 호초(胡椒)와 저피(楮皮) 1백 근을 바치다.
5.세종13년(1431) 유구국의 정사(正使) 하례구(夏禮久)가 오매목(烏梅木) 74근, 심중청(深中靑) 20냥쭝, 호초(胡椒) 20근, 만등(蔓藤) 1백 개를 바치다.
6.세종31년(1449) 일본 살마주(薩摩州) 등원 희구(藤原熙久)가 사람을 보내어 단목(丹木) 1천근, 납철(鑞鐵) 1백근, 호초(胡椒) 9근 등을 바치다.
7.성종 9년(1478) 구변국(久邊國)주(主) 이획(李獲)이 민부(閔富)를 보내어 와서 토산물(土産物)을 바치었다.
이렇듯 귀한 후추라고 할지라도 지속적으로 조공이 쉴사이 없이 들어오는 것이기 때문에 대조선의 창고는 넘쳐났다는 것을 의미하며 성종20년(1489)에는 임금이 늘상 채색(彩色)주머니에 담은 후추(胡椒)를 의정부(議政府), 육조(六曹), 도총부(都摠府), 한성부(漢城府), 의빈부(儀賓府)의 정3품(正三品) 당상(堂上)과 승정원(承政院), 홍문관(弘文館), 예문관(藝文館) 관원에게 내려 주었다는 기록은 이렇듯 귀한 후추이지만 주요관료 신하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을 만큼 국가에 재고가 충분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한반도에서 중국이란 대국을 섬기고 허약한 왕이 있어 이리저리 자주적으로 숨도 제대로 쉴 수 없는 초라한 역사의 나라라면 이것이 어찌 가능한 이야긴가?
당시 조선의 위치문제도 그렇다.
위[1]동의보감의 기록을 보면 호초(胡椒, 후추)가 남방(南方)에서 난다고 하였는데 한반도에서 남방(南方)은 어딜 말하는 것일까?
일본인가?
일본 열도가 어떻게 한반도에서 남방(南方)이 되는가?
만약 동남아시아라고 한다면 한반도에서 서남쪽이 되니 서남방이라고 해야 맞다.
사서가 정확하기로 원칙이 되어 있는 만큼 특히 방향을 잘못 기재할 턱이 없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대조선이 현재 한반도가 아닌 곳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또한 위 글 [2]성종 25년(1494)기록을 보면 “호초는 왜국[倭土]의 소산(所産)이니.."라고 하였는데 호초(胡椒)는 왜구(倭寇)의 땅(倭土)에서 났다는 이야기다.
왜구(倭寇)의 땅이 일본 열도인가 아니면 동남아시아인가 아니면 중앙아메리카인가?
분명한 것은 후추가 나는 곳임을 알 수가 있는데 이것들이 모두 왜구 손아귀에 들어간 것이라고 풀이가 가능하다.
바로 간상(奸商), 해도(海盜), 해구(海寇)라 하던 대왜구(大倭寇)시대가 도달했던 것이다.
자 그렇다면 이 왜구의 땅 즉 후추가 난 근원지를 밝혀 이 사실을 확인 할 수밖에 없다.
黑胡椒(學名:Piper nigrum),又名黑川,是胡椒科的一种开花藤本植物,它的果实在晒干后通常可作为香料和调味料使用。同样的果实还是白胡椒、红胡椒与绿胡椒 常简称作“胡椒”的黑胡椒粉
科學分類
界: 植物界 Plantae
門: 被子植物门 Magnoliophyta
(未分级) 木兰类植物 magnoliids
目: 胡椒目 Piperales
科: 胡椒科 Piperaceae
屬: 胡椒属 Piper
種: 黑胡椒 P. nigrum
二名法
Piper nigrum L.
Michał Piotr Boym:卜彌格;1612–1659) was a Polish scientist, explorer and a Jesuit missionary to China[Flora Sinensis]
분류체계적으로 후추는 후추목(胡椒目:Piperales), 후추과(胡椒科:Piperaceae), 후추속(胡椒屬:Piper)속하는 것으로 근원지를 참고 할 수 있는 주요종을 찾을 수밖에 없는데 바로 생물학의 아버지라고 하는 린네(Carl von Linne:1707-1778)가 명명한 주요종(種) 6가지를 발췌 할 수가 있었다.
하나는 (1)라틴계 후추(Spiked Pepper)라고 하는 학명 Piper aduncum L.이고, 다음 (2)레몬 후추(lemon pepper)라고 하는 학명 Piper amalago L.이며, 세번째는 (3)필발(蓽撥:Long Pepper)이라고 하는 학명 Piper longum L.이고, 네번째(4)현재 후추(Black Pepper)라고 하는 학명 Piper nigrum L.이며, 다섯번째 (5)멕시코시티 주변에 사는 나우아족의 나우아틀어(語)로 '메카소치틀' 즉 실꽃(Mecaxochitl:Monkey's-hand)이라고 하는 학명 Piper peltatum L., 이며 나머지 학명 여섯번째로는 학명(6)Piper reticulatum L. 이다.
이것들을 DNA 분석을 바탕으로 한 생명의 백과사전(EOL:Encyclopedia of Life)이 제공한 분포지도와 디스커버 라이프(Discover life)가 제공한 분포지도를 동시에 살펴 보면 아래와 같이 나타난다.
(1)Piper aduncum L. Spiked Pepper
(2)Piper amalago L. Higuillo De Limon, HIGUILLO DE HOJA MENUDA
(3)Piper longum L. Long Pepper
(4)Piper nigrum L. Black Pepper
(5)Piper peltatum L. Monkey's-hand
[세부분포지]
FL
MEXICO, Veracruz
Jamaica, Portland
Dominican Republic, Barahona and San Cristobal
PR
VI
Dominica, Saint Patrick
(6)Piper reticulatum L.
주요종을 찾아 분포지를 살펴본 결과 (1)라틴계 후추(Spiked Pepper)라고 하는 학명 Piper aduncum L.은 중앙아메리카, 카리브해, 남아메리카대륙 북부, (2)레몬 후추(lemon pepper)라고 하는 학명 Piper amalago L.은 중앙아메리카, 카리브해, 남아메리카대륙 북부, (3)필발(蓽撥:Long Pepper)이라고 하는 학명 Piper longum L.,는 아시아의 네팔과 태국북부, 캘리포니아 알라메다(California Alameda), 미조리(Missouri)를 나타내며 (4)후추(Black Pepper)라고하는 학명 Piper nigrum L.의 분포지로는 베네수엘라(Venezuela), 동아시아(운남성保山市),온두라스(Honduras), 브라질(Brazil), 콜롬비아(Colombia), 벨리즈(Belize), 카리브해(Caribbean), 프랑스 기아나(French Guiana)라고 나타나고 원산지가 아시아 인도(印度)라고 하지만 실제로 분포지도를 보면 DNA 표식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은 후추가 우리가 알고 있듯이 인도(印度)가 아시아 인도가 되어서도 안되고 결코 아시아인도가 될 수 없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5)멕시코시티 주변에 사는 나우아족의 나우아틀어(語)메카소치틀 즉 실꽃(Mecaxochitl:
Monkey's-hand)이라고 하는 학명 Piper peltatum L.역시 분포지를 보면 플로리다(FL), 멕시코 베라쿠루즈(Veracruz), 자마이카(Jamaica)의 포트랜드(Portland), 도미니카의 바라오나(Barahona)와 산 크리스토발(San Cristobal) 그리고 푸에르토리코(PR), 버진 아일랜드(Virgin Islands)등으로 나타나는데 특이한 것은 이 원숭이 손(Monkey's-hand)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멕시코(Mexican hand)라고하여 원숭이를 멕시코로 대입하고 있음도 알 수 있다.
일본을 'Jap'이라고 하여 원숭이를 뜻하는 것도 바로 멕시코와 연결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6)Piper reticulatum L. 의 분포지로는 온두라스 이어 남아메리카대륙 북부지역을 전체를 표식하고 있다.
이러한 후추 각종의 분포지를 볼 때 DNA 분석을 바탕으로 하는 분포지도에서 아시아 인도(印度)나, 동남아시아란 것은 미약하게 나타나거나 표시될 뿐 아메리카대륙 중앙아메리카, 카리브해, 그리고 남아메리카대륙 북부를 공히 표시하고 있는 것과 비교하더라도 대항해시대라고 하여 그들의 변함없는 항로가 가르키는 목적지는 결코 아시아 인도나 동남아시아가 아님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1498년부터 설쳐되던 대항해세력들은 결코 대서양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위 분포지도들을 기준으로 한다면 위[1]동의보감에서 호초(胡椒, 후추)가 조선 남방(南方)에서 난다고 하였던 사실은 바로 중앙아메리카, 카리브해, 남아메리카대륙북부지역을 말하고 있는 것과 일치하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당시 일본, 유구, 남번조와국, 구변국들이 앞 다퉈 향료(香料)들을 조공바치던 대국 조선(朝鮮)은 바로 북아메리카대륙에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다.
일본 열도가 어떻게 한반도에서 남방(南方)이 되는가?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한다.
또한 위 글[2]성종 25년(1494)기록에“호초는 왜국[倭土]의 소산(所産)이니.."라고 한 사실도 위 분포지도를 바탕으로 한다면 왜구, 간상(奸商), 해도(海盜), 해구(海寇)가 있었던 곳은 중앙아메리카, 카리브해, 남아메리카대륙 북부지역을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후추는 근세에서 유럽에서는 기원전 400년경 아라비아상인을 통하여 전래되었다 하고 중국에는 육조시대(六朝時代:吳,東晉,宋,齊,梁,陳, 229-589)에 인도(印度)에서 바로 전해졌다고도 하였으며 또한 한나라때 서역의 호(胡國)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장건(張騫)이 비단길을 통하여 가져왔다고라고 한다는 사실도 이제는 확실하게 정리가 가능한 것이 되었다.
재론하지만 역시 서역(西域)이란 호(胡)는 아메리카대륙을 말한 것이 틀림이 없다.
이러한 위치적인 정리만이 서역과 인도란 혼란을 막을 수 있고 삼한사서에서 이야기하는 것들이 이치적으로 맞아 들어간다는 것을 알 수가 있어 비로서 모든 사실이 확연하게 증명이 되는 것이다.
반면 우리나라에는 고려(高麗)때 이인로(李仁老,1152-1220)가 지은 파한집(破閑集)에서 처음 후추란 명칭이 보이기 때문에 고려 중엽에 이미 우리나라에 알려졌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또한 고려사에는 1389년(공양왕1)에 유구(琉球)의 사신이 후추 300근을 가져왔다는 기록으로 알 수가 있는데 이 또한 한반도라고 하였으니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던 것이 아메리카대륙을 기반으로 하는 위치가 확립되니 저절로 모든 것이 풀리는 것이다.
삼한(朝鮮)은 만방의 우두머리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49382
이러한 대조선이었으니 삼한은 만방의 우두머리가 된 것이다.
대조선에 문지방이 달도록 남방지역에 있던 여러나라들이 특히 후추를 조공하던 것이 왜 갑자기 1500년 연산대에 가서 끊겼을까?
그것은 바로 15세기 말엽부터 대항해시대 또는 대왜구시대라 하여 설치기 시작한 서세들이 중앙아메리카대륙과 카리브해, 그리고 남아메리카대륙 북부까지 모두 그들이 무력으로 점령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위협하여 종전처럼 대조선에게 조공하는 것은 막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조공하던 나라들에게 값을 더 쳐주어 조선으로 들어가는 것을 최대한으로 막았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이 후추전쟁, 향료전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들이 이렇게 한 이유는 조선의 후추 재고를 바닥나게 하고 향료의 거대한 공급처를 확보하면서 기존 시장을 어지럽히고 그것을 전적으로 관리하던 조선에게 치명상을 입혀 값을 올리려는 심보였고 조선에게 발언권을 더 확보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향료 독점권을 확보하려는 것이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많은 사서에서 조선(朝鮮)과 왜(倭)가 이웃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이웃하고 있다고 하여 한반도와 열도를 생각하는 어리석은 판단은 금물이다.
그러한 판단은 반도역사관에 찌들은 사람만이 하는 생각이다.
중요한 이야긴데 왜구가 일본이란 단정을 내릴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엄밀하게 따진다면 일본(日本)이란 국명은 삼한인들이 사용한 것으로서 백제(百濟)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앞서 이야기 한 사실이 있다.
다만 근세기에 어지러운 틈을 타 백제의 국호를 일본이 꿰차고 앉은 것이다.
위 글[2]에서 유심히 관찰해야 할 것은 바로 성종20년(1489)시대의 호초(胡椒, 후추)상황이다.
1489년만 하더라도 대조선(大朝鮮)에서는 후추가 남아돌아 성종20년(1489)에 임금이 채색(彩色) 주머니에 담은 후추[胡椒]를 신하들에게 나눠주기까지 하였는데 불과 5년만인 1494년에는 중조(中朝)에까지 남용되는 것을 막고자 대신들이 임금에게 상소한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중조(中朝)역시 조선에게 후추를 공급받는 처지에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1494년경부터 후추가 귀했다는 것이고 이때부터 조선에 후추 조공이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이며 그나마 저축하고있던 후추가 함부로 써 동이 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바로 서세들이 독점권을 확보하기 위해 노렸던 상황이었음을 알게 한다.
이때가 근대사가 주장하는 항해시대가 시작되는 시기와 맞물려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이때부터 목적에 관계 없이 항해 기록들은 전부가 근세사에 바탕이 된 것임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이로부터 4년 후 1498년 포르투갈 항해사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 1469-1524)가 인도 캘리컷(Calicut)에 도착하고 만다.
그들은 이곳을 아시아 인도(印度)라고 한다.
그러나 이 인도(印度) 캘리컷은 브라질 동해안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캘리컷(Calicut)을 한문으로 고리(古里)라고 하는데 이 고리는 고리(cori), 코레(core)라는 음(音)가 합치하는 것으로 삼한을 지칭하는 명호가 그대로 전달된다.
코레(core)가 무엇인가? 바로 삼한의 대명사이다.
즉 캘리컷(Calicut)은 남아메리카대륙 남회귀선 바로 아래 남위25도, 서경50도 선상에 있는 쿠리치바(古里提巴:Curitiba)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브라질 남부 파라나(Parana)주의 주도로, 리우데자네이루(里約:1月嘅河, Rio de Janeiro)에서 800㎞ 떨어진 대서양 연안에 위치하는 도시이며 동쪽으로 약 80km 지점에 외항 파라나과(paranagua)가 위치하고 있어 포르투갈인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가 이곳에 잠입해 들어간 것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서세들의 당시 주 무대는 바로 대서양이었던 것이다.
이제 상식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되었다.
이러한 사태들을 연결시켜 보면 역사를 좀 안다 하는 사람들은 사태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이야기다.
[3]연산 6년(1500 경신 / 명 홍치(弘治) 13년) 10월 27일(무신)
뇌성 번개의 변 때문에 직언을 구하자 이에 대하여 사헌부와 홍문관에서 상소를 올리다
又聞, 近日屢以公廩財穀, 移納本宮, 其數甚夥, 未審用於何地。 義盈庫胡椒, 濟用監蘇木, 累代充積, 不可勝用, 今則蕩盡無餘。 臣等竊謂, 耗於宮中賜與, 未審賜與者何人? 司饔院賤人供饋之數猥多, 一日所費, 幾至數百。 未審供饋者何人, 所爲者何事? 誠非小弊, 臣等竊有惑焉。 伏願殿下, 躬自刻勵, 以遵恭儉, 頒衣裳而惟謹於在笥, 愛嚬笑而必待乎有功, 停不急之務, 省無用之費。
또 듣건대, 근일에 누차 국고(國庫)의 재물과 양곡을 본궁(本宮)으로 옮겨 바친 것이 그 수량이 매우 많다고 하는데, 어디 쓰는 것인지 알 수 없으며 의영고(義盈庫)의 호초(胡椒)와 제용감(濟用監)의 소목(蘇木)은 여러 대에 걸쳐 축적한 것으로서 이루 다 쓸 수가 없을 정도였는데 지금 탕진되어 버리고 남은 것이 없습니다. 신 등이 가만히 생각하건대 궁중에서 사여(賜與)하는데 소모된 모양인데, 사여 받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자세히 알 수 없으며, 사옹원(司饔院)에서 천인(賤人)들에게 대접한 수효도 대단히 많아 하루 동안에 소비되는 수량이 거의 여러 백 냥에 달하는데 공궤(供饋)받은 사람이 어떤 사람이고 한 일이 무슨 일인지 자세히 알 수가 없으니, 진실로 작은 폐단들이 아니어서 신 등이 그윽이 의혹됩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 몸소 각심하고 노력하여 조심하고 검소하게 하는 일을 준행하시되 의복가지를 나누어 주게 되더라도 상자 안에 남아 있는 것을 보아서 하고, 찡그리고 웃는 것을 아끼되 반드시 공이 있기를 기다려 하며, 급하지 않는 사무는 정지시키고 쓸 데 없는 비용을 줄이소서.
사태가 이러하니 당장에 대조선(大朝鮮)에서는 비상이 걸렸던 것이 틀림이없다.
왜구(倭寇), 간상(奸商), 해도(海盜), 해구(海寇)가 방해하는 바람에 후추뿐만아니라 향료들이 고갈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충분히 인지할 수 있는 상황이다.
바로 위[3]조선왕조실록 연산 6년(1500)기록을 보면 상황이 긴박하게 흐르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사헌부와 홍문관에서 임금에게 상소하길 '의영고(義盈庫)의 호초(胡椒)와 제용감(濟用監)의 소목(蘇木)은 여러 대에 걸쳐 축적한 것으로서 이루 다 쓸 수가 없을 정도였는데 지금 탕진되어 버리고 남은 것이 없고 어떻게 소모되었는지 알길이 없다고 하면서 재고바닥이 난 급한 상황을 임금에게 전달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본래 그냥 얻은 것일 수록 귀함을 모르니 헤프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두말 할 것도 없이 왜구(倭寇)라 통칭되던 세력 간상(奸商), 해도(海盜), 해구(海寇)가 향료가 생산되는 곳을 점령하고 공급할 수 없도록 막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은 1500년도에 들어 향료무역이 점차 서세(西勢)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우리가 분류학적으로 후추(Black Pepper)를 학명 'Piper nigrum L.'이라고 하는데 특히 일본인들이 'nigrum'를 양후추(洋胡椒)라고 불러 구별한다는 사실이 특이하다.
모든 사서에서는 분명 후추를 왜토소산(倭土所産)이라고 하였는데 정작 왜구라고 하는 일본인들은 양후추라 하였다는 사실은 혼란스럽게 한다. 이것은 후추생산지가 양인(洋人)들이 있었던 곳이라고 생각되는 것으로 양(洋)은 해양세력들을 말한 것이며 그곳을 왜토(倭土)라고 했을 것이다.
조선(朝鮮)의 일반서민들을 양인(良人)이라 하였으며 양키(Yankee:洋鬼)를 양귀라고 하는 것을 보면 바다에 사는 귀신 같은 사람을 말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왜토(倭土)란 이렇게 독점권을 확보한 양키, 서세들의 전진기지 또는 별칭으로 양후추라고 하였을 것이며 위 후추의 분포지를 살펴보더라도 이러한 세력들은 분포지 베네수엘라(Venezuela), 온두라스(Honduras), 브라질(Brazil), 콜롬비아(Colombia), 벨리즈(Belize), 카리브해(Caribbean), 프랑스 기아나(French Guiana)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던 것이 분명하게 들어난 것이다.
이것을 어찌 허튼소리라고 할 수 있겠는가.[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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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신료(후추)
검은 후추와 흰 후추
Black, green, pink (Schinus terebinthifolius), and white peppercorns
후추의 열매는 직경 5mm의 핵과로 열매 안에 한 개의 씨가 있으며 다 익으면 어두운 붉은 색을 띤다. 후추는 향신료로 쓰기 위해 다 익기 전에 수확하여 건조하며 이렇게 만들어진 후추는 검은 빛을 띤다. 흰 후추, 붉은 후추도 모두 같은 열매로 만든 것인데, 흰 후추는 검은 후추의 껍질을 제거한 것이고 붉은 후추는 다 익은 열매를 사용한 것이다. 검은 후추와 백색 후추가 요리에 주로 쓰인다.
검은 후추를 만들기 위해 아직 녹색을 띠고 있는 설익은 후추를 수확하여 뜨거운 물에 데친다. 가열 과정에서 세포벽이 파괴되고 효소가 세포에서 빠져나오게 되어 건조 과정에서 열매는 갈색을 띠게 된다. 열매는 햇볕이나 건조기를 이용하여 수일 간 말린다. 건조된 후추 열매는 쪼그라들고 더욱 짙은 빛을 띠게 되어 주름진 검은 모습을 띠게 된다.
흰 후추는 후추의 씨만을 사용하여 만든다. 검은 후추를 만드는 것보다 좀 더 잘 익은 후추 열매를 수확하여 일주일 간 물에 담가 과육 부분이 부패하여 부드럽게 변하길 기다린다. 부드럽게 변한 과육을 잘 문질러 제거하면 흰색 씨앗 부분만이 남게 되며 이를 말려 흰 후추를 만든다.
일반적이지는 않으나 설익은 후추 열매를 가열하지 않고 말려 녹색 후추로 쓰거나 다 익은 후추 열매를 이용한 붉은 후추를 만들기도 한다. 후추는 가루를 내어 후추통에 담아 각종 요리의 양념으로 사용한다.
생물학적 특징
후추 열매
후추나무는 여러해살이 목본 덩굴 식물이다. 다 자라면 높이 4미터에 이르며 가지에서 덩굴이 나와 땅에 닿을 때까지 자란다. 잎은 어긋나기로 나며 다 자란 잎은 길이가 5 ~ 10센티미터에 폭은 3 ~ 6센티미터가 된다. 꽃은 매우 작고 잎자루 옆에 여러 송이가 줄지어 피며 꽃이 지고 난 뒤 열매가 맺힌다.(그림 참조)
후추 농장에서는 후추나무의 가지를 40 ~ 50센티미터 길이로 잘라 꺾꽂이하여 증식시킨다. 주변에 다른 식물이 자라지 않도록 뿌리 주변을 덮개로 덮고 퇴비를 주어 생장을 돕는다. 2 ~ 3년 정도 자라면 열매를 맺기 시작한다.
Piper nigrum from an 1832 print
Peppercorn close-up
A depiction of Calicut, India published in 1572 during Portugal's control of the pepper trade
Pepper harvested for the European trader, from a manuscript Livre des merveilles de Marco Polo (The book of the wonders of Marco Polo)
향료 중 주요 상품은
인도 ·수마트라 ·자바의 후추(pepper),
인도 ·스리랑카 ·중국 남부의 육계(肉桂:cinnamon/cassia),
몰루카 제도(諸島)의 정향(丁香:clove),
반다(Banda)의 육두구(nutmeg/mace) 등이었다. [위키백과]
White Peppercorns
일명 ‘백후추”라고 하며, 검은 통후추열매와 같은 것으로 완전히 익은 후 따서 껍질을 벗기고 씨를 말려서 만든다. 부드럽고 밝은 색을 띄며 부드러운 향을 내고, 밝은 색의 요리에 주로 사용한다.
Black Peppercorns
일명 ‘흑후추’라고 하며, 일반적으로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는 후추로 익기 전에 따서 주름지고 검은색이 될 때까지 건조 시켜 만든다. 흑 후추는 미량의 단맛과 약간의 매운맛, 강한 향을 낸다.
Pink Peppercorns
일명 ‘적후추’라고 하며, 완전히 익은 열매를 소금물에 절여 건조시켜 만든다. 일반적인 후추와 비교할 때 건조된 상태가 딱딱하지 않고 손으로 부숴질 정도로 부드러우며, 고기나 생선 요리시 색과 단맛, 매운 향을 증가 시킨다. 원산지는 아프리카 남동부의 섬인 마다가스카(Madagascar)로 솔 향과 비슷한 쥬니퍼 향을 낸다.
Green Peppercorns
흑후추와 백후추의 중간 단계의 덜 익은 후추를 소금물이나 비니거에 저장해 만드는 이 후추는 신선한 향을 내지만 자극적이지는 않다. 녹후추는 자극적이지 않아서 생선이나 고기요리에 잘 어울린다.
Szechuan Peppercorns
중국이 원산지로 붉은 갈색 열매인 이 후추는 일반적인 후추와는 서로 다른 품종이지만 강한 향과 맛을 낸다. 어린 흑후추와 닮은 모양을 하고있는 이 후추는 강한 향을 더 내기위해 때때로 따기전에 열매에 열을 가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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