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

고구려 6∼7C 동서 6000리 대국

한부울 2009. 3. 11. 12:13
 

고구려 6∼7C 동서 6000리 대국

[문화일보] 2009년 03월 10일(화) 오전 11:44


“B.C.(기원전) 30세기 초:시조 단군이 왕검성에 수도를 정하고 첫 고대국가-노예소유자국가인 조선(고조선 첫 왕조-전조선, 단군조선)을 세움. 이로써 조선민족이 장구한 원시시대에서 벗어나 문명시대, 국가시대에 들어섬.”


“B.C. 15세기 중엽:전조선이 후조선으로 교체됨. 고대국가 부여와 구려가 성립. 후조선에서 성문법 ‘범금 8조’를 제정.”


“B.C. 277년:동명왕 고주몽이 구려(졸본부여) 왕의 딸과 결혼하고 왕위를 차지함. 나라이름을 고구려로 고침. 봉건국가 고구려 건국.”


최근 국내 학계에 입수된 ‘조선역사지도첩’(사진)은 북한 사회과학원이 최신 연구성과를 집약해 표현한 역사지도란 점에서 파장이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당장 지난해 8월 캐나다 밴쿠버 브리티시컬럼비아대(UBC)에서 열린 국제학술회의에서 한 북한학자가 이 지도첩의 고대사 부분만 파워포인트 프로그램으로 소개했을 때 중국 사회과학원 소속 학자들의 관심이 집중됐었다는 노태돈 서울대(국사학) 교수의 지적처럼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항하는 측면도 적지않다. 하지만 우리에게 관심을 끄는 것은 고대사를 중심으로 남북한 간의 역사 이질화가 심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송기호 서울대(국사학) 교수는 “무엇보다 고조선(단군조선)과 고구려의 건국연대를 B.C. 30세기 초와 B.C. 277년으로 끌어올리면서 후대에 믿을 수 없는 자료들까지 모두 역사적 자료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고 밝혔다. B.C. 30세기 초에 건국된 전조선이 B.C. 15세기 중엽에 후조선으로 교체되고 같은 시기에 고대국가 부여와 구려가 성립하는 것으로 돼 있다. 여기서 등장하는 부여는 우리가 알고 있는 부여와는 다르다.


이 지도첩에서 B.C. 2세기 말엽 지도에 등장하는 후부여가 우리가 역사교과서에서 배운 부여에 해당된다. 한반도 남부에 성립되는 고대국가 진국도 B.C. 12세기에 존재한 것으로 설명돼 있다.


지도첩에는 전조선이 평양 일대에서 출발해 중국 북부와 한반도 남부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있는 것으로 표현돼 있다. 북한학계는 1960∼80년대까지는 고조선의 중심지를 랴오허(遼河) 유역으로 주장해왔으나 1990년대 들어 평양에서 단군릉을 발굴하면서 고조선의 중심지가 평양으로 바뀌었다. 노태돈 교수는 “지도첩에서 전조선 영역의 표현은 이같이 상치되는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시도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한사군의 위치는 중국의 랴오둥(遼東)반도를 포함한 랴오닝(遼寧)성 일대에 위치하고 있다. 고구려 영토가 6세기말~7세기 중엽에 가면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과 내몽골자치구, 허베이(河北)성 일대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아무르주와 연해주를 포괄하는 광대한 영토를 가진 국가로 표현돼 있는 게 이 지도첩의 가장 큰 특징. 송기호 교수는 “다른 신빙성 있는 기록들은 배제한 채 두우의 ‘통전(通典)’에 나오는 ‘고구려 영토가 수대에 동서 6000리에 달했다’는 기록에만 의존한 결과”라고 설명했다.


고려나 조선에 대한 지도의 경우, 수도 개경이나 서울(한양)의 지도 대신 서경(평양)의 지도만 실어놓은 데서 알 수 있듯 북한의 수도인 평양 중심의 역사관을 강조하고 있는 것도 이 지도첩의 특징이다.


최영창기자 문화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