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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3년 상해 근거리에 요코하마가 있었다.

한부울 2009. 3. 4. 00:52
 

1863년 상해 근거리에 요코하마가 있었다.


1863년 英國人 살해사건으로 발발한 살영(薩英)전쟁

 

사쓰마 번(薩摩藩)의 시마즈 히사미쓰(島津久光)가 國事周旋의 성과를 코메이(孝明)천황에게 보고하기 위해 에도(江戶)를 떠나 교토(京都)로 가던 8월21일 이른 아침의 일이었다. 약 400명으로 이뤄진 다이묘(大名·지역 영주)행렬은 시나가와(品川)를 지나 나마무기(生麥: 요코하마市 鶴見區 生麥 1-16) 가도로 접어들 때 전방으로부터 말을 탄 영국인 4명이 다가왔다.

 

그들은 上海에 거주하면서 관광을 위해 요코하마(橫濱)에 와 있던 찰스 리처드슨, 요코하마 거주 상인 윌리엄 마셜과 그의 친척 보로델 부인, 그리고 商社員 클라크 등이었다.

 

이들은 日本의 藩主쯤은 얕잡아 보았는지, 말을 되돌려 가라는 번사(藩士:사무라이)들의 손짓을 무시하고, 大名의 행렬에 끼어들었다. 사쓰마 사무라이들이 리처드슨을 칼로 난도질하여 죽여 버렸다. 마셜과 클라크는 刀傷을 입은 채 보로델 부인과 함께 도주했다. 이것이 나마무기사건의 개요다.

 

나마무기(生麥)사건 발생 후 영국은 막부에 대해 배상금 10만파운드, 사쓰마번(薩摩藩)에 대해선 범인 처벌과 배상금 2만5000파운드를 각각 요구했다. 막부는 이에 굴복하여 배상금 10만 파운드를 지급했지만, 사쓰마번(薩摩藩)은 완강하게 응하지 않았다. 이에 영국은 1863년 6월, 요코하마에 집결했던 함대를 가고시마(鹿児島)에 원정시켰다.

 

6월28일, 사쿠라지마(櫻島)가 우뚝 솟은 가고시마灣에 旗艦 유리아라스(배수톤수 2371t, 승무원 515명)를 비롯한 영국 함대 7척이 진입했다. 이에 대해 사쓰마의 함선은 3척뿐이었고, 배수량은 3척을 모두 합쳐도 1770t에 불과, 유리아라스 1척에 미치지 못했다. 함대 결전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사쓰마번은 사쿠라지마(櫻島)를 중심으로 한 5개의 포대에 5100여 명을 배치하고, 이 밖에 8000여 명을 동원하여 방어전에 나섰다.

 

이번 답사여행에서 필자는 가고시마 부두에서 페리에 승선, 약 15분 걸려 사쿠라지마의 하카마코시港에 도착했다. 섬 중앙부 南岳의 분화구에서는 때 마침 버섯구름 모양의 연기를 하늘 높이 뭉텅뭉텅 뿜어내고 있었다. 하카마코시로부터 국도 224호선을 타면 곧 모츠키(持木). 모츠키에는 사쿠라지마 대폭발(1914년) 기념탑이 서 있다. 이곳에 사쿠라지마(櫻島) 포대가 설치되어 가고시마 해안포대와 함께 錦江灣(가고시마灣)에 진입한 英國 함대를 향해 협공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薩英전투는 7월1일부터 3일까지 벌어졌다. 전투결과, 영국 측의 피해는 전사13명, 부상65명, 레이스호스號 小破. 사쓰마 측의 피해는 전사 5명, 부상 10여 명, 함선과 화물선 등 8척 燒失, 포대2개소 완전 파괴.

 

인적피해만 놓고 보면 영국측이 혼이 난 셈이지만, 물적 피해는 사쓰마측이 훨씬 심대했다. 영국함선에서 발사한 로케트 탄은 집성관 이외에도 시가지 가옥 350호, 사무라이의 가옥 160호, 사원4개를 불태웠다. 결국 이 전쟁에선 양측 모두 데미지를 입은 것이다. 그러나 존왕양이파의 감각은 달랐다.

 

『사쓰마는 유럽의 최강 영국 함대를 쫓아냈다. 훌륭하다』

 

특히 코메이 천황은 사쓰마번의 능력을 높이 평가해 히사미쓰(島津久光)를 마쓰다이라 다카모리와 함께 京都수호직으로 임명하려고 했을 정도였다. 어떻든 薩英전쟁을 치름으로써 영국과 사쓰마(薩摩)는 서로의 실력을 인정하게 되어 11월에는 화해하기에 이르렀다. 사쓰마는 영국에 배상금을 지급하고, 영국은 군함을 구입하려는 사쓰마에게 편의를 제공하기로 했다.

 

公武合體論者인 사쓰마 藩父 히사미쓰는 1863년 8월18일, 아이즈(會津)번과 薩會동맹을 맺어 在京 조슈(長州)번 및 조슈系 尊攘激派의 公卿 7人을 교토로부터 추방하는 쿠데타의 주력이 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8·18 정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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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 1863년 상해에서 멀지 않는 근거리에 요코하마가 있었다.

 

마음먹고 언제든지 갈 수 있는 곳

관광을 쉽게 할 수 있는 곳

최소한 교통편이 어렵지 않게 왔다갔다 할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상해와 요코하마이다.

 

이것은 나마무기사건에 이은 살영(薩英)전쟁의 일화이다.

그러나 그 당시 전쟁에서 어느 쪽이 이기고 졌다는 상황이 궁금한 것이 아니라 사건 발단이 된 장소 나마무기(生麥: 요코하마市 鶴見區 生麥 1-16) 가도이다.

요코하마이다.

분명히 영국인 4명(찰스 리처드슨, 요코하마 거주 상인 윌리엄 마셜과 그의 친척 보로델 부인, 그리고 商社員 클라크)이 上海에 거주하면서 관광을 위해 요코하마(橫濱)에 와 있으면서 사건에 휘말렸다고 하고 있다. 영국인이 왜구 사무라이에게 살상이 되었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영국은 가차없이 요코하마에 정박하고 있던 영국 함대를 가고시마(鹿児島)로 이동하여 사쓰마 번(薩摩藩)에 폭격을 가했다고 나온다.

그 당시 영국은 대륙식민화에 첨병으로서 아편전쟁을 일으키고 천진조약을 맺으면서 양자강 전역을 조차지하여 영역화하고 양자감 하류에 엄청난 함대를 주둔하고 있을 때 이다.

영국인이 상해에 거주하면서 관광차 요코하마에 갔다가 사무라이에게 변을 당했다고 하는 것은 절대 지금의 열도의 요코하마가 아닌 것이다.

영국인들이 상해에 거주하는 것은 양자강 전역을 걸쳐 영국함대가 주둔하고 조차지 하고 있는 지역이기 때문에 첫째 안전성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안전성이 보장되지 않을 열도 요코하마에 위험스럽게 관광차 왔다 갔다 한다는 것은 무리 일 수밖에 다.

적어도 나마무기 사건이 있었던 1863년에는 왜구의 영토가 열도가 아니라 대륙 남부 절강성이나 광동성지역일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강호(江戶)는 강소성 남부이다.

나마무기 사건이 터진곳은 상해 옆 근거리에 있는 요코하마(橫濱)시 내 나마무기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