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SINA-신중국

조선말 대륙조선군 병력수가 989,376명 이었다.

한부울 2009. 3. 13. 14:46

 

CHINESE RECORDER MISSIONARY JOURNAL

SHANGHAI, AMERICA PRESBYTERIAN MISSION PRESS 1886

(중국기록과 선교보고 : 미국장로회상해지부)

 

corea- military officers(1886 :고종23년)

 

 

 

 

 

생략..

The army is supposed to number 989,376 men, cavalry(기병) and infantry(보병), to wit(using the previously-described alternative names of each provi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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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tropolitan province 시(市), 도(道) 128,443 명

hu si 湖西 139,229 명

湖西 旧地名,因位于南四湖西面而得名。1949年设湖西专区,专署驻单县。辖金乡、单县、鱼台、巨野、城武、嘉祥、复程(解放后由曹县、城武2县析置,驻青崮集)等7县及单县城关区。1950年撤销单县城关区,改设为镇。1952年湖西专区划归山东省。

hu nan 湖南 210,574 명

ling nan 嶺南 310,447 명

hai si 海西 (황해도 일대) 봉산탈춤이 성했던 곳-靑海西 153,828 명

kwan tung 關東 46,839 명


from which it appears that Tung King and Kwan Peh have no...


Tung King (Tonkin-東京) 베트남 북부에 대한 유럽 서양인의 호칭이다. 동경이라 불리었다. 

Kwan Peh (關北) 함경도이다-청해이북 신강성지역(新疆: 위구르 투르판)을 평안도라 하고 그 동쪽을 함경도라 하는데 지금의 내몽고 일대지역이 아닌가 한다.

 

또 한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관이란 고정관념이다.

우리가 보통 반도사관 영향으로 관동, 관서, 관북이라는 지명때문에 관이라고 하면 무조건 산해관(山海關)을 기준으로 하려는 경향이 많다.

그것은 일제가 반도사에 맞추기 위하여 명명하고 정리한 것일 뿐 사실이 될 수 없다.

관은 잘 알다시피 함곡관(凾谷關)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

그러나 대륙지명이동시 그러한 기준도 무시하고 관(關)을 광()으로 고쳐 불렀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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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년 시대배경

1882년(7월19일) 임오군란

1882년(8월30일) 일본과 제물포조약

1884년(12월4일) 갑신정변(甲申政變)

1885년 (1월 9일) 일본과 한성조약(漢城條約)

서양 자료에는 1882년부터 대륙조선 존재가 사라졌다고 보았다.

고려는 유나이티드 코리아 였다. http://blog.daum.net/han0114/17046399

그럼에도 1886년 미국선교기관에서는 대륙에 존재하는 조선군사정보를 위와 같이 보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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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과 호서 호주( 湖西,  湖州) http://blog.daum.net/han0114/17045952

 

                                                              [hu si]西

 

                                                         [hu nan]

 

 

                                                         [ling nan] 嶺南

[hai si] 海西

[kwan tung] 關東

 

                                                            [Tung King] 東京

[Kwan Peh] 關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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關東

從19世紀中後期到20世紀初,曾經有數千萬華北(尤其是山東、河北兩省)的破產農民為謀生計,從海陸兩路前往東北地區,稱為「闖關東」。在此以前,由於東北地區為清朝的發跡之地,故清廷將東北地區列為軍事禁區,禁止漢人向那裡移民。到19世紀中後期開始,此一政策逐漸鬆動。1907年,正式設立行省,改為與內地相同的行政管理體制,並向漢人移民開放。到民國初年,軍閥張作霖統治時期,隨著東北農業與工業的開發,鐵路的修建,漢人闖關東也達到高潮。其結果是:


함곡관(函谷关)의 동쪽을 가리키는 역사적 호칭. 秦漢으로부터 당까지의 중국의 통일 왕조의 대부분이 咸陽이나 長安에 수도를 두었기 때문에, 수도를 지키는 함곡관을 기준으로서 관동·관중·関西라고 하는 지역 호칭이 흥했다. 산해관의 동쪽을 가리키는 호칭. 원명 이후 북경이 수도로서 정착하면서 북경의 동쪽을 방어하는 산해관의 동방, 즉 현대의 중국 동북부에 해당되는 지역을 관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關北

함경도 관북(關北)으로 부른다.

본래는 숙신국(肅愼國)의 땅이다. 당우(唐虞), 즉 요순(堯舜) 시대와 하(夏) 나라·은(殷) 나라·주(周) 나라의 삼대(三代)에서는 숙신이라 하였고, 한(漢) 나라·진(晋) 나라에서는 읍루라 하였고, 북조(北朝)에서는 물길(勿吉)이라 하였고, 수(隋) 나라·당(唐) 나라에서는 말갈(靺鞨)이라 하였고, 발해(渤海)·송(宋) 나라·원(元) 나라에서는 여진(女眞)이라 하였다. 한나라 무제(武帝) 원봉(元封) 4년(기원전 107)에 현토군을 두었다. 지금의 함흥(咸興)으로, 뒤에 이맥(夷貊)의 침입을 받아 군(郡)을 구려(句麗), 즉 고구려의 서북으로 옮겼다. 뒤에 옥저국(沃沮國)의 땅이 되었다. 옥저는 개마대산(蓋馬大山)의 동쪽에 있었고, 동옥저의 경계는 함흥·정평(定平)·홍원(洪原)으로 낭림산(狼林山)의 동쪽이며, 황초령(黃草嶺)·부전(赴戰嶺) 2산맥의 남쪽이다.


북옥저(北沃沮)의 경계는 북청(北靑)·이원(利原)·단천(端川)으로서 장백산(長白山)을 한계로 삼았고, 남옥저(南沃沮)의 경계는 영흥(永興)·고원(高原)·문천(文川)·덕원(德源)·안변(安邊)으로 철령(鐵嶺) 서쪽을 한계로 하였는데, 곧 검산(劒山)으로 쭉 이어져 뻗은 큰 줄기이다. ○동옥저·남옥저·북옥저는 따로 3나라가 있는 것이 아니고, 땅의 경계로 말한 것이다. 고구려(高句麗) 태조왕(太祖王) 4년(56)에한(漢) 나라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병진년(56)이다. 동옥저를 정벌하여 그 성읍을 빼앗았고, 동쪽 경계를 개척하여 창해(滄海)에 이르렀다. 진(晋) 나라 초에 신라 북쪽 경계가 이하(泥河)에서 그쳤다. 지금의 덕원 북쪽 경계이다. 당나라 중종(中宗) 때 발해국 남쪽 경계가 영흥에 이르렀으며, 신라 말에는 여진(女眞)이 점거하였다. 고려 성종(成宗) 14년(995)에 정평(定平) 이남이 삭방도(朔方道)에 소속되었고, 도련포(都連浦)로 경계를 삼았다. 고려 정종(靖宗) 2년(1036)에 동계(東界)라 일컬었고, 10년에는 삼관문(三關門)을 설치했고 정주(定州)·선덕(宣德)·원흥(元興)이다. 장성을 쌓아 여진을 방비하였다. 고려 문종(文宗) 원년(1047)에 동북면(東北面)으로 일컬었다. 혹은 동면(東面)·동로(東路)·동북로(東北路)·동북계(東北界)라 일컬었다. 고려 예종(睿宗) 2년(1107)에 여진의 성(城)을 공격하여 몰아내고는 9성(九城)을 설치하였고, 같은 왕 4년에는 여진에 돌려주고 다시 도련포로 경계를 삼았다. 고려 인종(仁宗) 3년(1125)에 금(金) 나라 사람이 오로지 웅거하며 갈라(曷懶)·휼품(恤品)의 2로(二路)를 두었다. 함흥(咸興)에서 경성(鏡城)까지이다. 금나라의 치세가 끝날 때까지 바꾸지도 고치지도 않았는데, 금나라가 멸망하게 되자 원(元) 나라 사람이 계속 이어갔다. 고려 고종(高宗) 45년(1258)에 화주(和州)의 남북은 원 나라의 수중에 들어갔다.

공민왕(恭愍王) 5년(1356)에 강릉삭방도(江陵朔方道)로 고쳤다. 화주(和州)·등주(登州)·정주(定州)·장주(長州)·예주(預州)·고주(高州)·문주(文州)·의주(宜州)의 8주와 선덕(宣德)·원흥

(元興)·영인(寧仁)·요덕(耀德)·정변(靜邊)의 5진(鎭)을 수복하였다.


수춘군(壽春君) 이수산(李壽山)을 도순문사(都巡問使)로 삼아 파견하여, 강역을 정하고 다시 동북면으로 불렀다. 몽고에 몰락한 지 무릇 99년 만에 비로소 수복한 것이다. 명(明) 나라 태조(太祖) 홍무(洪武) 무진년(1388)에 비로소 강릉도(江陵道)와 나뉘어 스스로 1도가 되었는데, 삭방도라 일컬었다. 대개 철령 이북을 삭방도라 일컫고, 이남을 강릉도라 일컫는다. 혹은 나누거나 혹은 합치므로 칭호가 한결같지 않다. 초년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 공험 이남, 삼척(三陟) 이북을 통틀어 동계(東界)로 불렀다. 조선(朝鮮) 태조(太祖) 6년(1397)에 정도전(鄭道傳)에게 명하여 군현(郡縣)의 지계(地界)를 구획하여 정하도록 했고, 같은 왕 7년에는 공주(孔州)·경주(鏡州)의 2주를 두었다. 태종(太宗) 13년(1413)에 영길도(永吉道)로 고쳤고, 같은 왕 16년에는 함길도(咸吉道)로 고쳤다. 세종(世宗) 19년(1437)에 김종서(金宗瑞)에게 명하여 6진(六鎭)을 개척하게 하고 성읍(城邑)을 설치했다. 성종(成宗) 1년(1470)에 영안도(永安道)로 고쳤고, 중종(中宗) 4년(1509)에 함경도(咸鏡道)로 고쳤다. 무릇 25읍이다.남도가 15읍이고, 북도가 10읍이다.


순영(巡營)은 함흥부(咸興府)에 있다.

남병영(南兵營)은 북청부(北靑府)에 있다.

북병영(北兵營)은 경성부(鏡城府)에 있다.

방어영(防禦營)은 길주목(吉州牧)에 있다.


토포영(討捕營)영흥(永興)·덕원(德源)·홍원(洪原)·갑산(甲山)·삼수(三水)·명천(明川)·회령(會寧)·경원(慶源)에 있다.


영흥진(永興鎭) 관하(管下)정평(定平)·고원(高原)이다.

○영흥·정평·고원은 예전에 함흥진 관하였다.

안변진(安邊鎭) 관하덕원(德原)·문천(文川)이다.

북청진(北靑鎭) 관하홍원·이원(利原)이다.

○단천(端川)은 예전에 북청진 관하였다.

경성진(鏡城鎭) 관하명천(明川)이다.

○길주(吉州)는 옛날에 경성진(鏡城鎭) 관하였다.


독진(獨鎭)은 함흥·단천·삼수·갑산·길주·경원·회령·종성(鍾城)·온성(穩城)·경흥(慶興)·부령

(富寧)·무산(茂山)·장진(長津) 후주(厚州)이다.

북병영(北兵營)의 관하는 혜산(惠山)·훈융(訓戎)·동관(潼關)·고령(高嶺)·유원(柔遠)·미전(美錢)·어유간(魚遊澗)·볼하(乶下)·성진(城津)·조산(造山)·서수라(西水羅)이다. 이상은 독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