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SINA-신중국

東北角樓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

한부울 2009. 3. 15. 00:34
 

우리는 다른 것은 몰라도 역사문제만큼은 스스로 낮추어 보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한 것은 100년 동안 반도사관에 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우리가 만들고 우리가 이룩한 역사조차도 바로보지 못하는 당달봉사 역사관이고 보니 우리의 참역사도 분간 할 수 없으며 반도사학자들이 남의 것이라고 에둘러 말하는 것에도 전혀 의심치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에서 우리의 역사가 없다.

중국의 영향을 받아..중국의 기풍으로..중국을 모방하여...등등 늘 듣는 것들이다.

여기 좀 더 세밀한 눈살미로 아래 사진들을 한번보자.

방화수류정은 조선시대 건축된 정자 중에 걸작이라고 했다.

수원화성 방화수류정은 말 그대로 현대에 와서 만들어진 조형물일뿐이다.

수원 방화수류정은 중국 청나라 북학 건축사조의 영향을 받고 전통건축과 결합시킨 것이라고 평한다. 북학건축사조 북경을 말한다.

북경 자금성 동북각루하고 너무나도 비슷하기 때문이다.

과연 그러한 풀이가 맞는가?

 

인공으로 파 연(淵) 형태를 만들어 놓은 못을 용연(龍淵)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고 글자를 연상할 때 무엇인가 모자라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용(龍)은 둘째치고 연(渊)이라고 하면 우리나라에 있는 못처럼 얕은 못이 아니다.
그야말로 심연(深渊)이어야 한다.
용이 나올 수 있는 깊은 못이 되어야 한다.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에서 말하는 광교산의 일맥이 용머리가 되어 솟은 것 이라고 하는 솟아오른 바위 용바위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수원화성에 못이 용연(龍淵)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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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北角樓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

[한겨레]2005.06.22(수) 16:42

 

△ 방화수류정과 버드나무 우거진 용연 연못의 봄날 정경이다. 오늘날 방화수류정은 문짝과 온돌이 뜯겨나갔고, 용연도 못 둘레와 못 안의 섬이 동심원 모양으로 잘못 복원되어 200여 년전 원형이 훼손되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조선 건축문화의 백미인 수원 화성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은 무엇일까. 답사객들이라면 단연 성곽 동북쪽 용연 연못가 바위 위에 있는 방화수류정(동북각루)을 꼽게 마련이다. ‘꽃을 찾고 버드나무를 따라 노닌다’는 뜻을 지닌 이 유명한 정자는 아래의 연못 용연을 끼고 화성 내외부가 사방으로 눈에 착 감겨오는 절세의 전망이 이름 높다. 또한 18세기 당시 중국과 조선의 첨단 축조 기법을 고루 녹여 지은 복잡다기한 팔작지붕 건축 양식도 후대 건축학자들의 찬사를 받고 있다. 김동욱 경기대 교수는 그의 책 <실학정신으로 세운 조선의 신도시 수원 화성>(돌베개)에서 “이 시대에 ‘올해의 명건축’을 뽑았다면 방화수류정이 1등상을 받았을 것”이라면서 “이 건물의 구조적 실험은 큰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고 극찬하고 있다. 이 정자를 사적 3호 화성의 일부가 아닌 단독 국보로 지정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만만치않다.


이 누각이 상찬을 받는 것은 조망 못지않게 풍류와 군사용도를 겸한 정조시대 복합적 문화정신이 구조에 올올히 녹아 있기 때문이다. 화성 건설일지인 <화성성역의궤> 도설은 동북각루를 그림과 함께 이렇게 설명한다. “광교산의 한 쪽 기슭이 남에서 벋어내려 선암산이 되었고, 다시 서쪽으로 감돌아 몇 리를 내려가 용두(방화수류정이 있는 높은 바위)에서 그치고서 북쪽을 향해 활짝 열렸다… 성이 이곳에 이르면 산과 들이 만나고 물이 돌아 흘러 대천에 이르니 여기야말로 동북 모퉁이의 요해처이다. 장안문을 잡아 당겨 화홍문과 이어지고 서로 앞뒤로 마주 응하여 1면을 제압한다. 마침내 절벽을 따라 성을 쌓고 바위에 누를 세우니 편액은 방화수류정이라 하였다…’


화성 사방 굽어보는 군사적 요충지에도

꽃과 버드나무와 벗하는 풍류가 어렸구나


요해처, 즉, 화성 사방을 다 굽어볼 수 있는 군사적 요충지이므로 누각을 지었다는 얘기다. 방화수류정의 본질은 감시용 군사 지휘소가 되는 셈이다. 1795년 윤2월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화성 회갑연을 앞두고 누각을 불과 45일 만에 지은 것도 이런 경비 차원의 절박한 사정이 있었던 까닭에서 비롯되었다. 실제로 누각 동북쪽 난간 아래의 기단 속에 병사들이 주둔하는 진지방과 총 쏘는 구멍인 총안 19개가 뚫려 있다.


건축적 측면에서 방화수류정은 중국 청나라 북학 건축사조의 영향을 전통 건축과 결합시켰다. 주춧돌 위에 나무 기둥 틀을 세운 뒤 그 사이를 벽돌로 채운 아래층은 십자 무늬가 반복되는 미감이 일품이다. 지붕 서까래를 고정시키는 기둥을 감싼, 지붕꼭지의 장식물인 절병통 또한 그러하다. ㄱ자꼴 평면에 사방에서 달리 보이는 팔작지붕 등의 화려한 외관과 엄중한 군사시설이 대비되는 이 누각은 마치 풋풋한 미모와 강한 완력을 겸비한, 강인한 낭자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정조 또한 이 누각을 극진히 사랑했다. 매년 화성을 들렀던 그는 행궁에서 방화수류정으로 산책하면서 화성축성의 성과인 북녘 만석거의 너른 논밭과 도심지 풍경을 흐뭇하게 감상하곤 했다. 1795년 혜경궁 홍씨의 화성 회갑연 때 문헌 기록을 보면 그는 방화수류정에 올라 화성 풍경을 굽어보며 방어에 편한 화성 성곽제도의 우수성을 자화자찬한다. 화성에 대한 높은 자부심을 털어놓은 것이다. 1797년 정월 군복을 입고 누각 층계 위에 올라가 화살을 쏜 뒤 정조가 남긴 시는 묵향 어린 방화수류정 풍류의 백미라 할만하다. ‘봄날 성을 두루 돌아도 아직 해는 지지 않고. 방화수류정의 구름 낀 경치 더욱 맑고 아름답구나/ 수레를 세워놓고 세번 쏘기가 묘하니/ 만 그루 버드나무 그림자 속에 화살은 꽃과 같네.’ 같은 해 추석 때는 조정 중신들과 달맞이 잔치를 했다고 왕족실록은 전하니, 이 때 정조는 자신의 시를 머리속에 떠올렸을 것이다. 지금도 누각에 가면 당시 정조와 중신들의 잔치 자리배치를 짐작하는 재미가 있다. 임금은 남쪽을 보고 앉으므로 북쪽 누각의 튀어나온 퇴간이 정조의 자리이며, 그 아래 서남쪽으로 길쭉하게 이어진 공간이 중신들이 앉던 자리다.


방화수류정은 정조시대 문화정치의 쇠퇴와 운명을 같이 한다. 정조 사후엔 임금 행차가 끊어지고 지방관 연회장이 되었다가 일제시대 주민들의 행락공간으로 변질된다. 누각의 온돌과 창호문은 일제 때 뜯기고, 지붕의 절병통은 최근 꼭지가 날아갔다. 운치를 더했던 용연 연못은 20년대 대홍수에 휩쓸렸다가 70년대 원형을 잃고 정연한 동심원 모양의 못으로 바뀌었다. 지난 주말 찾은 누각 안에는 관광객들이 난간에 발을 걸치고 누워 코를 골고 있었다.

 

 

 

 

 

수원/글·사진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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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루는 성곽 부분 가운데 높은 구릉을 택하여 누각 모양의 건물을 세워, 주위 일대를 감시하고, 때로는 휴식을 즐길 수 있는 정자처럼 다기능적인 성격을 지닌 건물이다. 화성에는 4곳의 각루가 배치되어 있는데, 동북각루/서북각루/서남각루/동남각루가 바로 그것이다.


1. 동북각루(방화수류정)


방화수류정이라고도 불리는 동북각루는 북수문의 동쪽 구릉 정상에 위치해 있다. 정조 18년 9월 4일 진시에 터 닦기 공사에 착수하여 10월 7일 오시에 상량했으며, 10월 19일에 완공되었다. 바로 앞에는 연못 속에 섬을 만든 용연이 있고, 성벽도 돌출된 위치에 있어 동북 및 서북쪽의 전망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누각에는 방화수류정이란 현판이 걸려있는데, 전참판 조윤형이 쓴 것이다.


그 형태가 불규칙하면서도 조화를 이루고 주위의 자연 경관과도 아름답게 어울려 조선시대 정자 건물의 높은 수준을 보여주는 걸작 가운데 하나이다. 북수문인 화홍문에서 동쪽으로 경사져 올라간 위치인 데다가 아래쪽으로는 용연이 내려다보이는 곳의 성벽에 절묘하게 대어서 용두라는 지형 위에 누각을 세운 것이다.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과 용연(龍淵)


동북각루(東北角樓)인 방화수류정과 그 아래 연못 위에 솟아오른 바위는 광교산의 일맥이 용머리가 되어 솟은 것이라고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에서는 말하고 있다. 한국 정자를 대표할 만큼 아름다운 이 각루는 평면구조가 아닌 다각화된 형상으로 사계절 변화의 미가 지금도 독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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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及中軸線區域

 1、正陽門內

 2、天安門

 3、華表

 4、午門

 5、太和門

 6、太和門前銅獅

 7、嘉量石亭

 8、日晷

 9、銅鶴、銅龜

 10、太和殿

 11、中和殿

 12、保和殿

 13、乾淸門

 14、乾淸宮

 15、交泰殿

 16、坤甯宮

 17、遵義門

 18、養心殿

 19、體元殿

 20、翊坤宮

 21、中正殿

 22、雨華閣

 23、寶華殿前的香爐

 24、慈甯宮

 25、武英門

 26、文淵閣(前面)

 27、禦箭亭“訓守冠服國語騎射碑”

 28、錫慶門

 29、皇極殿

 30、甯壽宮

 31、欽安殿

 32、景陽宮

 33、噴水器

 34、千秋亭

 35、絳雪軒

 36、養性齋

 37、承光門

 38、神武門

 39、神武門內望景山

 40、紫禁城的東北角樓

 

 

 

 

 41、大高玄殿前習禮亭

 42、景山頂上望見北方

西苑三海區域

 1、永安寺前寶塔前景

 2、永安寺寶塔北面

 3、紫禁城全景(從永安寺望去)

 4、永安寺寶塔

 5、永安寺塔前景

 6、萬佛樓

 7、金鼇玉(蟲東)橋

 8、萬善殿后堂一一千聖殿

 9、中南海“紫光閣” 

 10、瀛台

 11、雙魚亭

 12、流杯亭

 13、雲繪樓

이和園區域

 1、萬壽山遊廊

 2、萬壽山牌樓

 3、萬壽山前面

 4、智慧海

 5、萬壽山后寶塔

 6、昆明湖淸晏舫

壇廟

 1天壇園丘

 2、皇穹宇

 3、祈年殿

 4、先農壇

 5、慶成宮

 6、觀耕台

 7、太歲殿

 8、日壇具服殿

 9、雍和宮法輪殿

 10、萬福閣

 11、東黃寺、西黃寺

其他

 1、朝陽門以北城牆

 2、朝陽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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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remonial de L'achevement des Travaux de Hoa Syeng (COREE) (1800)

화성건립완성과 의식


Extract from the Academic Journal "T'oung-Pao" published in Leiden,Netherlands Volume 9 ,Number 5. 8 vo.14 pages plus 39 plates . T'oung-Pao is an academic jounral publsihed from 1890 in Leiden,Netherlands covering history ,culture and art of China and neighbouring countries. This material is based on the Report titled "HWA SEONG SONGYOK EGE" in 10 volumes covering all process of construction of the FORTRESS HWA SEONG in the City of Suwon,Kyungki-do,Korea. The FORTRESS was built from 1794 to 1796 . After the construction of the FORTRESS HWA SEONG , the Report was made in 1801 by the cabinet of Yi Danasty by the order of the King.The FORTRESS Hwaseong, Changdeokgung (Palace), Bulguksa (Temple) and Seokguram (Stone Cave), were registered as World Cultural and Natural Heritage during the 21st General Assembly of the World Heritage Committee of UNESCO on Dec. 4, 1997.


Author :  Henri Chevalier

출판사 Librairie et Imprimerie ,Leide,Netherland

1895

Fren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