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SINA-신중국

청불전쟁 (Sino-French War)

한부울 2009. 2. 28. 00:08

장강(長江)은? http://blog.daum.net/han0114/17049756 
병인, 신미양요가 벌어진 강화는 지금의 중경일까? http://blog.daum.net/han0114/17049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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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불전쟁은 대륙조선(sino:支那朝鮮)과 프랑스전쟁이다.

청불전쟁 (Sino-French War)


1883~1885년 

 

                                 Operations of the Sino-French war (1884-1885)

 

병인양요(1866년)는 프랑스가 조선에게 된 통 얻어터진 사건이다.

그로부터 20년이 채 못된시기에 다시 똑같은 경로로 쳐 들어 온 것이다.

병인양요가 일어난 곳은 절대 한반도가 될 수 없다.

 

                                                                  Sino

                                                            French

 

                                                       Black Flag Army


장소 : 베트남 북부, 푸저우 등 중국 남부

결과 : 청나라의 패배로 베트남을 프랑스에게 내어줌

교전국 청나라-프랑스


지휘관

이홍장 풍자재 장지동 

나폴레옹 3세 쿠르베† 데그리

병력 프랑스 1만 5000명


청불전쟁 혹은 중불전쟁은 1884년 8월에서 1885년 4월까지 베트남 북부의 통킹을 프랑스가 차지하기 위하여 벌인 전쟁이다. 프랑스는 전쟁의 목표를 달성했으나 중국은 19세기에 외국과 겨룬 전쟁에 비교하여 훌륭한 전쟁을 수행한 편이었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청나라가 외국의 적과 싸워 이긴 전쟁이라고 보는 경우도 있다.

 

                                       Commandant Henri Rivière (1827–83)


경과


청불전쟁의 시작은 1883년 베트남 북부에서 시작되었는데 프랑스가 베트남을 식민지로 만들고 군대를 주둔시키자 이에 청나라가 반대하며 군비를 강화했다. 그러나 전쟁이 시작되자 청나라는 프랑스에게 크게 패배하고 프랑스는 1만 5000명의 군대와 쿠르베 제독을 앞세워 손타이, 바쿠닌, 타이구엔, 훈호와 등의 도시와 손타이 강 델타지방도 점령했다.


전쟁이 지루하게 끌자 청나라 대신 이홍장은 1884년 5월에 프랑스의 푸르니에와 간명조약리-푸르니에 협약을 맺었다. 하지만 프랑스는 전쟁을 다시 시작해 청군을 공격했으나 청나라는 장지동을 육군책임자로 삼고 청군의 반격으로 100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에 프랑스는 2억 5000만 프랑의 배상금과 청군의 철수를 요구하면서 프랑스함대는 청나라 복주의 미미군항을 공격하고 청나라의 11척의 신식군함으로 이루어진 복건수군을 전멸시켰으며 청나라 최대의 조선소인 미미조선소를 파괴했다.


3일 후에 청나라가 프랑스에 선전 포고를 하자 프랑스 함대는 복주에서 대만으로 상륙하려다가 실패하고 1885년 3월에 절강연안에 침입했으나 청군의 포격으로 제독 쿠르베가 부상을 당해 6월에 부상으로 평도호에서 사망한다. 그리고 베트남 안남 지방에서는 풍자재가 군대를 이끌고 프랑스군을 무찌르고 란손을 점령했으며 총사령관 데그리가 중상을 입고 프랑스로 패주했다.


게나다 섭주 전선에서도 청나라의 흑기군이 프랑스군을 격퇴시키자 프랑스에서는 페리내각이 실각했다. 1885년 3월 31일에 유럽에 가있던 청나라의 증기택이 강화를 성공시켜 1885년에 중국이 리-푸르니에 협약을 인정한다는 파리조약 체결로 조인되었다.

 

Rivière attempts to rescue a bogged French cannon during the Battle of Paper Bridge (19 May 1883)


베트남의 식민지화

 

Flag of the Dynasty, 1802 – 1863

 

19세기 처음에 베트남에는 완조(阮朝)(이하 응우엔 왕조)가 성립했지만, 영토의 확장을 목표로 하는 나폴레옹 3세치세의 프랑스는, 베트남에의 몇 차례에 걸치는 도발행동 뒤, 1857년에 발생한 베트남에 의한 크리스트교도 박해의 보복으로서 다음 1858년에 스페인과 함께 침공했다(제1차 仏安전쟁). 1862년까지 계속된 공격에 의해, 베트남은 사이공 조약(제1차)으로 코치 세멘시나의 프랑스에의 할양을 인정했다. 이것을 근거로 프랑스는 다음 해에 캄보디아를 보호국으로 하고, 1869년에 코치세멘시나 3성을 영유 했다. 그 후 본국에서는 나폴레옹 체제가 붕괴했지만, 1873년에 재차 공격, 제2차 仏安전쟁이 되어 다음 해에 제2차 사이공 조약을 체결했다.


코친차이나(Cochinchina)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 베트남 남부의 사이공을 중심으로 한 남부지역이었다. 이 지역에 대한 프랑스의 식민지 통치기간은 1864년에서 1948년까지 지속되었다. 이후 성립된 남베트남은 1954년에 코친차이나와 안남의 남부를 통합하여 수립된 것이다. 베트남에서는 이 지역을 쟈딘(1779-1832), 남 키(1834-1945), 남 보(1945-48), 남 판(1948-56), 남 비엣(1956-75)이라고 부르다가 현재는 미엔 남이라고 부른다. 프랑스에서는 여전히 코친차이나라고 불려지고 있다.


17세기에 베트남은 북쪽의 트린 왕조와 남쪽으로 완조(阮朝)응우엔 왕조로 양분된다. 유럽인들은 북쪽을 통킹이라고 불렀고, 남쪽은 코친차이나 또는 꽝남(廣南:Quảng Nam)이라고 불렸다.


프랑스의 식민지 지배기간 동안, 코친차이나의 영역은 더 남하하였으며, 수세기 전 캄보디아에 의해 통치 당했던 남부 대부분을 언급하는 말이 되었다. 그리고 사이공이 그 중심이 되었다. 나머지 두 지역 중 완조(阮朝)응우엔 왕조가 다스리던 후에를 중심으로 한 중부를 안남이라 불렀고, 하노이를 중심으로 한 북부를 통킹이라고 불렀다.


코친이라는 말은 원래 말레이지아어의 쿠치(Kuchi)에서 비롯되었다. 이것은 베트남 전체를 가르키던 말이었다. 이 용어가 중국에서 '자오지'(交趾)로 유래되었고, 베트남에서는 '쟈오 치'라고 발음을 하였다


전면전쟁


프랑스는 베트남 전 국토의 영유를 획책하여, 1882년에 세번째의 공격을 걸쳐 수도 하노이를 제압해 버렸다. 여기에 있어 완조(阮朝)를 속국이라고 보고, 종주국을 자부하고 있던 청은 베트남에 지원을 실시하여, 1883년 6월에 유영복(劉永福)의 군단이 프랑스에 도전, 서전에서 타격을 주었지만, 곧바로 중부 유에가 공략되어 8월에 유에조약(알만조약)으로 프랑스는 베트남을 보호국으로 한다.


1884년 6월에는 제2 유에 조약에 의해 베트남의 군사권을 장악 했지만, 이·훌니에 협정을 양국이 거부, 8월에 프랑스 함대가 대만을 봉쇄하고, 전면 전쟁이 시작되었다. 프랑스군은 다음 1885년 2월에 영파를 봉쇄하였으나 3월에 청이 반공하여 국경의 런손을 공략했다. 영국의 조정으로 1885년 6월 9일에 텐진조약(李·파트노르조약)이 조인되어 청은 安南와 東京의 주권을 방폐해 전쟁이 종료했다.

                          Admiral Anatole-Amédée-Prosper Courbet (1827–85)

 

           European residents walk warily in the streets of Guangzhou, autumn 1883


Son Tay and Bac Ninh

                                   The capture of Son Tay, 16 December 1883

 

                                     The capture of Bac Ninh, 12 March 1884


The Tientsin Accord and the Treaty of Hue

                Chinese regular soldiers photographed during the Sino-French war


The Bac Le ambush

                                          The Bac Le ambush, 23 June 1884


Fuzhou and the Min River

                      The Battle of Fuzhou, 23 August 1884 (19th century painting)


French occupation of Keelung

                              A Chinese depiction of the French landing at Keelung


Shipu Bay, Zhenhai Bay and the rice blockade

          French torpedo launch attacking the Chinese frigate Yuyuan, 14 February 1885


인도차이나 식민지의 완성


프랑스는 벌써 장악 한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병합하여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연방을 건설, 1893년에는 라오스를 보호국으로서 연방에 넣어, 식민지가 완성했다. 이 체제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 의해 연방이 해체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French victories in the delta

                                          The battle of Kep, 8 October 1884

 

                                      General Louis Brière de l'Isle (1827–96)


The Lang Son Campaign

                                      The Lang Son Campaign, February 1885

 

                                      The capture of Lang Son, 13 February 1885

 

                       Chinese prisoners captured by the French at Tuyen Quang

Bang Bo, Ky Lua and the retreat from Lang Son

                                               Chinese fortifications at Bang Bo

 

                         Lieutenant-Colonel Paul-Gustave Herbinger (1839–86)


Final engagements

French soldiers and local townsfolk pose for the camera in front of a temple in Makung in the Pescadores Islands.

 

Chinese cannon captured by the French, founded in Jiangxi in April 1841. Musée de l'Armée, Paris.

일본과의 관계


이때 외무경· 이노우에(井上馨)은 프랑스와 짜고 청을 협격으로 하려고 획책했지만, 사이고 쓰구미치(西郷従道)가 맹 반대했기 때문에 참전을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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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령 인도차이나


Union Indochinoise 존속 기간 : 1887년 - 1953년

 

수도 사이공, 하노이

공용어 프랑스어, 크메르어 라오스어,베트남어

정부형태  식민지령 연방

프랑스령1887년

- 라오스1893년


북베트남 독립1945년 9월 2일

남베트남 독립1949년 6월 14일

라오스 독립1949년 7월 19일

캄보디아 독립 1953년 11월 9일


면적• 전체  750,000 km²

인구

• 1753년 어림21,599,582명

• 인구밀도  28.8명/km²


통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화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프랑스어: L'Indochine française, 베트남어: Đông Dương thuộc Pháp, 통용: 불령 인도지나(佛領 印度支那))은 동남아시아의 프랑스 식민지로 이뤄진 연방으로 코친차이나, 통킹, 안남, 라오스, 캄보디아로 이루어져 있었다.


프랑스 지배 이전 중부의 후에에 기반을 둔 완조(阮朝)응우엔 왕조의 베트남은 세로 형태로 길게 뻗은 국토를 북기(北圻), 중기(中圻), 남기(南圻)와 북성(北城), 근기(近畿), 가정성(嘉定城) 등의 이름으로 북부와 중부 그리고 남부를 구별하였다.


1883년 제1차 후에조약(계미조약)으로 베트남이 프랑스의 보호령이 된 이후에 완조(阮朝)응우엔 왕조가 있던 중부는 월남 이전의 명칭인 안남으로 호칭하고 실권이 없는 명목상 황제의 자치를 허용하였고, 북부는 통킹으로 명명하였다. 통킹은 15세기 하노이가 종종 동경(東京, Dong Kinh))으로 불리던 데서 유래한 지명이다. 남부는 코친차이나라는 명칭을 부여하였으며, 남부의 코친차이나는 프랑스의 영향력이 가장 높은 식민지로서 중부, 남부, 북부 세 지역 중 가장 풍요롭고 개방적이었으며, 국제적인 지역으로 탈바꿈되었다.


베트남


코친차이나


메콩 강 삼각주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한 지역이다. 프랑스군이 최초로 점령, 통치했던 지역이다. 그 정청은 사이공, 현 호치민 시에 설치되었다.


안남


중부 베트남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이다. 현재의 중부 베트남보다는 더 넓은 지역이며, 프랑스에 종속되어 있었던 완조(阮朝)응우옌 왕조의 수도인 후에를 중심으로 했다.


통킹(東京)

통킹(로마자로는 Tonkin/Tongkin/Tongking 등으로 표기됨)은 베트남 북부 홍 강 유역 지역을 말한다. 이 지역의 중심 도시인 하노이의 옛 이름인 "동낀"(Đông Kinh, 東京)에서 유래했다.


베트남의 전통적인 중심지인 홍 강 삼각주를 중심으로 하는 베트남 북부의 지역이다. 마 강을 경계로 안남과 맞닿아 있었고, 프랑스 점령기 초기 때 청군이나 중국 군벌과 프랑스군의 군사적 충돌이 주로 일어났던 지역이기도 하다. 하노이에 그 정청이 설치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벌어져 1940년 프랑스가 독일에 무릎을 꿇자 독일 점령하의 프랑스의 비시 정권이 임명한 장 드꾸(Jean Decoux) 장군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정부는 일본과 협력하여 일본군의 베트남 주둔을 허용하는 조약에 서명하여 일본군이 베트남에 주둔하게 되었다.


라오스


캄보디아: 1887-1949


19세기 중순부터 프랑스에 의한 인도차이나 반도의 식민지화가 시작되었다. 노로돔 국왕은 프랑스와 교섭해 1863년부터 캄보디아는 프랑스의 보호국 즉,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 1887년에는 캄보디아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편입되었다. 1907년에는 시암으로부터 앙코르 부근의 영토를 탈환하였다.


1940년에는 일본군이 인도차이나에 침공하였고, 이 기회를 틈타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은 1945년 3월 12일에 캄보디아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하면서 1946년에는 다시 프랑스의 보호 하로 돌아와 독립은 소멸하게 된다.


시아누크 국왕은 끈질기게 독립 운동을 계속해 1947년에는 헌법을 공포하였고, 1949년에 프랑스 연합 내에서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1953년에는 경찰권, 군사권을 회복해 완전 독립을 이룰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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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 Huế


후에(베트남어: Huế, 쯔놈: 化)는 베트남 중부에 위치한 도시로 투아티엔후에

(Thừa Thiên-Huế) 성(省)의 성도이다. 1802년부터 1945년까지는 베트남(응우엔 조)의 수도였다. 많은 역사적 기념물과 건축물들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 도시에 있는 후에 사원은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인구는 약 340,000명이다.

 

                                                            흐엉 강(후에 강


)베트남 중부의 흐엉 강(Sông Hương, 香江) 하구에 자리하고 있으며, 남중국해와 매우 가깝다. 수도 하노이와는 540km, 베트남 최대도시인 호찌민 시와는 644km의 거리에 위치해 있다. 베트남은 역사, 문화적으로 북부와 남부가 서로 별개의 과정을 거쳐왔는데, 북과 남을 가르는 기준점이 바로 이 후에이다. 현대에는 베트남전쟁 최대의 유혈 전투였던 후에전투가 벌어지는 현대사의 무대가 되었다.

 

                                                                왕궁 평면도


가장 뛰어난 관광지이자 볼거리는 왕궁으로서 인근에 황제가 머물던 궁과 묘가 있다. 후에 전체를 통틀어 흐엉 강의 북쪽 지역인 구 시가지에 대부분의 유적이 자리한다. 완조(阮朝)응우엔 왕조의 황제는 성 안에서 머물렀는데 이는 성벽으로 둘러쌓인 거대한 공간이었다. 이 성 안쪽의 왕궁은 금지된 도시였고, 오직 황제들과 첩들 그리고 측근들만이 접근할 수 있었다. 함부로 들어갔다가는 사형을 당하였다. 후에의 역사 관광지로서 유지하기 위하여 재건축의 노력이 진행되고 있으나 오늘날 금지된 영역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구시가지는 전통을 간직한 채 예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1993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1] 남쪽 지역(신시가지)은 서울의 강남과 같이 신개발지역이 많기 때문에 거주지와 비즈니스 거점이다.

 

                                                              자금성 입구


1802년부터 1945년까지 13대에 걸쳐 이어진 응웬 왕조의 왕궁(베트남어: Kinh thành Huế, Imperial City, Huế)은 성벽으로 둘러쌓여 있는 요새이자 궁전이다. 이곳의 뜰은 가로 세로 각각 2킬로미터, 높이 5미터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그 성벽은 다시, 해자로 둘러싸여 있었다. 해자에 담을 물은 후에를 관통하여 흐르는 흐엉강에서 끌어왔다. 이러한 구조물을 시터들(citadel)이라고 한다. 시터들 안에는 거의 2.5킬로미터의 방어선을 구축한 왕궁이 있었다. 대개의 관광객이 입장하는 왕궁의 정문인 남문 누각에 오르면 왕궁 전체가 한눈에 보인다. 남문 정면에 중국의 자금성을 본떠 지은 디엔타이호아(Điện Thái Hoà, 太和殿, 태화전)가 있으며 디엔타이호아의 왼쪽에 각 왕의 위패가 모셔진 사원인 현임각이 있다. 그 외에도 왕궁 안에는 왕족의 저택과 사원들, 황제를 위한 인클로져(enclosure)인 자금성(베트남어: Tử Cấm thành, 紫禁城, 뚜깜탄, the Purple Forbidden City)이 있다. 그 명칭은 중국의 자금성을 본딴 것이다. 이름만을 본딴 것이 아니어서, 자금성에는 수많은 궁전과 문, 궁정들이 있었다. 자금성은 응웬 왕조의 황족들을 위한 곳이었다.

 

                                                             카이딘 황릉


대략적으로 후에에서 흐엉 강을 따라서, 후에의 외곽 남쪽에 민망(Minh Mạng)황제, 뜨득(Tự Đức)황제, 카이딘(Khải Địn) 황제 등의 묘지들을 포함한 무수히 많은 또 다른 기념물들이 있다. 카이딘 황릉은 완조(阮朝)응웬 왕조의 마지막 황릉으로 1931년 완성됐다. 베트남과 유럽의 건축양식이 섞인 특이한 구조의 황릉이다. 콘크리트 석상이 유럽인의 모습과 유사하다. 내부의 옥좌에는 청동에 금박을 입힌 카이딘 황제의 등신상이 있으며 그 아래 황제의 시신이 안치돼 있다. 민망 황제릉은 내외부 장식이 아름답기로 손꼽힌다. 입구에 들어서면 초승달 모양의 인공 호수가 눈에 들어오며 황제의 공덕비가 세워진 정자 아래쪽에 문무석 및 동물 모양의 석상들이 늘어서 있다. 또한 티엔무 사원(Chùa Thiên Mụ)이 유명한데, 이 사원은 강을 따라 도심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후에에서 가장 큰 사원이며 이 도시의 공식 상징이기도 하다. 레쯕(Le Truc) 거리 3번지에 있는 훼 박물관(Hue Museum of Royal Fine Arts)은 응웬 왕조의 여러가지 다앙한 유물들을 보존하고 있다. 궁정에서 사용되었던 물건과 외국에서 온 선물 등을 전시해놓은 전통가옥 모양의 본관과 철제, 석제 전시품들을 전시해놓은 정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후에는 베트남 중부에서 찾아볼 수 있는 가장 한적하면서도 별난 곳이다. 베트남의 유명인들 다수가 이곳 태생이거나 후에에서 한번쯤은 머물고자 한다.


역사


후에는 원래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베트남의 남부 전역을 통치했던 봉건 왕조인 응웬 왕조에 수도로서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찐삼(Trịnh Sâm)이 점령했던 1775년에는, 도시 이름이 푸쑤안(Phú Xuân)이었다. 1802년 마지막 황제 지아롱(Gia Long, 응웬푹안 Nguyễn Phúc Ánh이라고도 한다.)이 베트남 전역의 통치권을 양도받게 되자, 후에는 국가 전체의 수도가 되었다. 이후 1945년까지 베트남의 수도로 자리매김한다. 황제 바오 다이가 퇴위당하고 공산 정부가 출범하자 하노이가 수도로 승격된다. 1949년 친프랑스 인사와 합작하여 황제가 다시 복권을 시도하였지만 그때 황제는 후에가 아닌 사이공으로 정부청사를 세우고자 한다. 공산주의자를 비롯해 전 베트남 국민은 황제의 복고에 반대하였다.


베트남 전쟁 당시, 후에는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의 경계에 매우 가까운 곳에 위치하였고 매우 중요한 요새 역할을 하였다. 후에는 그 경계의 남쪽, 즉 남베트남에 속해 있었는데, 후에 전투(Battle of Hue)에 속하는 1968년 뗏(Tết) 공세 때, 이 도시는 물리적으로도 심각하게 피해를 입었을 뿐만 아니라, 그 명성도 손상되었다.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건물에 미군이 폭격을 가하여 역사적인 유물과 유적이 송두리째 파괴되었다. 또한 공산주의 세력에 의하여, 악명 높은 후에 학살(massacre at Huế)이 자행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난 뒤에도 상당 기간 동안 "봉건 시대의 유산"이라는 이유로, 역사 유적 복원과 봉건 유적에 대한 관심이 미비하여 한동안 방치되었다. 베트남 정부의 정책 쇄신을 통해 중세 왕조의 유적 복원 작업이 완료 혹은 진행 단계에 머물고 있다.


음식


후에의 음식은 베트남 전역으로부터 가져온 재료들이 쓰인다. 다른 지방과 가장 큰 차이점은 채식주의가 뚜렷하다는 것이다. 완전 채식주의인 식당들이 시내 곳곳에 흩어져 있고, 불교적인 믿음에서 한 달에 두 번 채식을 하는 전통을 가진 이 지역 사람들이 이곳을 이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