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SINA-신중국

정한론(征韓論)인가 정조론(征朝論)인가?

한부울 2009. 3. 3. 19:02
 

일본자료에 의한 정한론이다.

지금 일본은 정한론을 말하면서 아주 자랑스럽게 여길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실은 그들에 의해 변질되고 사실과 다른 형태로 우리 앞에 있는 것들이다.

일본이 그처럼 자랑삼아 말하던 그 당시 정한론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반드시 명심하여야 할 사항은 절대 조선을 한반도에 국한하여 보아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우리는 과거 역사를 명확하게 알지 못하고 또 한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접해 볼 수 있는 모든 자료가 그들에 의하여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륙고려, 대륙조선은 대륙 아시아뿐만 아니라 적어도 한반도, 열도까지 지배권내에 두고 있었던 대국이라는 전제가 반드시 있어야 바르게 이해되는 논쟁이다.

뿌리깊이 박혀있는 반도사관이 현실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이렇듯 바르게 볼 수 없다는 걱정이 앞서고 노파심이 들지 않을 수 없어 하는 말이다.


정한론(征韓論)인가 정조론(征朝論)인가?

 

만약 정한론이면 한반도조선이고

정조론이면 대륙조선이다.

정한론인가 정조론인가 하는 문제에서 왜국(일본)이 위치한 곳도 자연스럽게 들어날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클릭원본]

                   정한논의도. 사이고 다카모리는 중앙에 착석. 메이지 10년(1877년) 작.


정한론(征韓論)은 일본이 한국(그때는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는 정책이다.


정한론은, 일본의 메이지 초기에 정부 수뇌인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 이타가키 타이스케板垣退助·에토 신페이江藤新平·고토 쇼지로後藤象二郎·소에지마 다네오미副島種臣、등에 의해 무력으로 조선을 개방시키자고 하는 주장이다. 다만 정한론의 중심적 인물인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 자신의 주장은 출병은 아니고 개방을 권하는 견한사절遣韓使節로서 스스로 조선으로 가 설득하고자 하는 견한론(遣韓論)이라고도 한다.


遣韓 : 遣使朝貢 예


에도시대 후기에, 国学이나 水戸学의 일부에서나 요시다 쇼인(吉田松陰)등이 고대 일본이 한반도에 지배권을 가지고 있었다고「고사기」·「일본 서기」에 기술되고 있다고 주창되고 있어 이러한 것을 논거로서 조선 진출을 주창하는 것은 존왕양이(尊王攘夷) 운동의 정치적 주장으로 받아들여졌다.


고사기(古史記)나 일본서기(日本書記)는 근세기에 들어 만들어진 역사이다.

일본이 서세의 힘을 빌어 열도에 신생국을 건설하고 그 나라이름을 일본으로 하면서 비로소 종족 정체성을 확립하는 문제에 골몰하며 역사만들기에 들어갔으며 그러한 역사를 마무리하기 위해서 대륙을 침략하였고 국수주의를 모토로 하는 어용사학자들을 동원하여 수많은 대륙역사 자료를 탈취하여 없애면서 혹은 조작하고 혹은 새롭게 하면서 완성한 역사일 뿐 아무런 근거도 근원도 없는 그들 종족 정체성 확립을 목적으로 한 역사 인 것이다.

때문에 위와 같은 논리는 거짓일 수밖에 없는 것이고 있을 수 없는 논리인 것이다.

 

초기의 정한론

 

표면적으로는 메이지 유신 이후에 쓰시마 섬을 개입시켜 조선에 대해, 왕정복고(대륙왕조를 배척하고 스스로 왕정을 세우다)를 한 신정부의 발족을 통고하고 개국을 강요하는 국교 교섭을 시도했지만 당시 흥선대원군의 집권 아래 쇄국정책과 척왜정책을 지향하던 조선정부가 외교문서가 종전과 다르다(종전과 다르다는 것은 朝貢冊封관계)며 개수를 요구하고 사신의 접견을 거부하는 등 국교교섭에 난항이 거듭되자 이를 계기로 일본 내에서 정한론(정한론이 아니라 征朝論이다.)이 수면 위로 부상했다. 1870년(고종7년, 명치3년)에는 사다 소이치로(佐田素一郞), 조선을 방문한 후 일본으로 돌아가 강경하고도 구체적인 정한론의 건백서(建白書)를 제출하는 등 정한론이 유력하게 대두하였다.


1872년에는 외무대신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가 군함을 이끌고 부산에 도착했지만, 조선 측은 일본의 사신이 군함을 이끌고 온 것에 대해 문제를 삼았으며, 수개월간 체류하였지만 아무런 소득을 얻지 못했다. 한편 조선정부는 부산 등지에서 성행하는 일본 상인들의 밀무역을 방지하기 워한 전령서를 내렸는데 이것이 일본 정부를 자극하였다. 특히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는 무력 침공을 주장하고 스스로 책임을 맡겠다고 자원하였다. 1873년 8월에 메이지 정부는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 등을 사절로 파견하기로 결정했지만, 같은 해 9월에 귀국한 이와쿠라 사절단(岩倉使節団)의 오쿠보 도시미치나(大久保利通)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 기도 다카요시(木戸孝允) 등이 내치에 충실해야 한다며 시기상조(1873년 이 때만 하더라도 대륙조선을 무력으로 침범하기에는 왜국형편으로서 아직 미숙하다는 것을 알았다는 말이다)를 이유로 이를 반대하자, 10월에 파견 중지가 결정되었다.


정한론이 중지되자 정한론을 주장하던 사람들이 일제히 하야하였으며(명치6년 정한론정변), 이때 하야 한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 등은 1874년의 사가(佐賀)의 난부터 1877년의 세이난 전쟁(西南戦争까지의 불평사족(不平士族:不平사무라이)난으로 반정부 운동을 이끌었다.


정한론이 대두한 것은 메이지 유신을 전후로 하여 일본 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사회문제(조선대국이 가지는 관념에 대한 불만)의 해결책이나 경제성장(대륙조선을 정벌하고 취 할 수 있는 이권획득)의 방법으로 이러한 불만을 외부로 돌리기 위한 수단으로 도모된 것이며 전쟁이 그러한 방책으로 대두되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용어


처음에는 정조론(征朝論)이라 불렀으나, 朝(조)가 “조정”(곧 일본천황)을 뜻한다고 오해를 살 수 있다고 여겨 정한론으로 바뀌었다.


처음 정조론(征朝論)이 그 당시 대륙에서던 중국이라고 칭하며 황조, 조정등 조를 명명하는 것이 대륙조선이라는 사실을 지칭하는 것이며 그러한 대륙조선과 왜국의 관계위치 그리고 국가 간 역학관계상황을 잘 보여주고 명백하게 하는 용어사용문제라고 판단된다는 점이다.

조(朝)가 일본천황을 지칭하는 용어라고 하여 한(韓)으로 바꾸었다고 하는 것은 후세 일본史家 들에 의하여 꿰 맞추어 꾸며진 말이고 그 당시 한국이란 명칭이 존재하지도 않았던 시기 즉 대한제국건립(1879)기 전이라면 정한론은 될 수 없고 정조론(征朝論)이란 용어가 사용되었다고 보아야 함이다.

조(朝)는 중국이며 대륙조선이고 황조이다.

서세에 의해 근대화를 이루었다고 자부하던 명치정부에 내각 대신들이 대륙조선의 개방문제를 놓고 엄청난 고심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고 그 고심이 얼마나 심했으면 太政官 大臣이 병으로 쓰러지기 까지 했겠는가하는 점이다.


배경


일본의 에도막부 1853년(요시나가 6년), 말기부터 명치시대 초기(1868년)에 이르기까지 당시 정부의 수뇌인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 이타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 에토 신페이)江藤新平), 고토 쇼지로(後藤象二郎), 소에지마 다네오미(副島種臣) 등에 의해 무력을 이용하여 조선을 정벌하자는 정책이다.


에도시대후기부터 고대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국학이나 미토 학의 일부나 요시다 쇼인 등이 주창하는 것을 통해 존왕양이 운동의 정치적 주장으로도 이용되었다.


임진왜란은 왜국이 대륙조선에게 수차례 요구한 자치권을 주지 않는다고 반발하고 대들면서 마음먹고 벌인 무사반란인데 이것을 우린 왜란이라고 하고 있다.

대륙조선 대국으로부터 자치권을 인정받고 통상 길을 열어준다는 것은 대단한 것이다.

에도시대까지 대륙조선 즉 중국을 대국으로 섬기던 때였고 대륙조선이 파견하는 통신사를 통하여 행사처럼 조공하는 시대였기 때문에 대국을 정벌하겠다는 마음을 먹을 수가 없다.

만약 이와 같은 일이 밝혀져 대륙조선으로부터 문책을 당할 경우 전 대신들의 목숨까지 위태로울 수밖에 없는 것이기에 내놓고 논쟁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고 보아야 한다.

때문에 이와 같은 일은 불경이다.

적어도 에도시대는 이와 같은 논쟁을 공개적으로 감히 할 수가 없었던 일이다.

하였다면 서양문물이 들어오고 대륙조선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살 수 있다는 확신이 설 때 그러한 환경이 조성되어 왜국 전체가 근대화를 이루면서 빠르게 발전을 할 때 그 시점이 바로 애도시대가 마감되면서 전면에 나타난 명치시대라고 본다.

애도시대 때 불경 여기던 대륙조선을 상대로 감히 전쟁을 벌이겠다고 하는 논쟁을 명치시대 대신들은 두렵게 생각하지 않고 마음놓고 주장하였다는 사실에서 시대 상황을 설명하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