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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메이지유신(明治維新) 혁명동지는 서로 싸워야했는가 ?

한부울 2009. 2. 22. 01:46

 

 

왜 메이지유신(明治維新) 혁명동지는 서로 싸워야했는가 ?

[시대소리뉴스:백제사]2008/08/27 [20:16]


가고시마(鹿児島) 고려마을(高麗町)을 중심으로 존재했던 메이지유신 親高麗派-反高麗派

 

저번 글에서 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쇄국정책(鎖國政策)은 국제질서에 밝았던 우국지사(憂國之士)의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그러면서 아시아에서 오직 列島만이 개방을 통해 성공할 수 있었던 원인을 개방대응력(開放對應力)에서 찾은 바 있습니다. 아울러 최근의 개방의 물결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한 바 있습니다. 노무현 정권시절 한미FTA라는 개방을 마치 광개토태왕과 장보고의 해외개척에 빗댄 것은 국민현혹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흥선대원군과 같은 우국지사 조상님들께서 반드시 지금의 매국노들에게 준엄한 심판을 내리시라 생각합니다.


자! 그러면 혁신의 고장, 반란의 고장 가고시마(鹿児島), 정확히 고려마을(高麗町) 일대를 자세히 들여다봅시다. 저번에도 지적했지만 이 고려마을(高麗町) 일대에서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의 주역들, 즉 유신지사(維新志士)들이 태어나 자라났습니다. 이 유신지사 중에서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와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가 핵심인물입니다.

 

메이지유신(明治維新) 혁명 동지,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와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이 둘은 왜 싸워야 했는가? ©인터넷검색


메 이지유신에 관한 상세한 사항은 인터넷 검색을 통하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관심을 갖는 것은 혁명동지인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와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가 왜 갈라서 싸웠는가 하는 점입니다. 둘이 왜 싸웠을까요? 두 사람을 갈라서게 만든 것은 공교롭게도 1870년대 정한론(征韓論)입니다. 한국(韓國)을 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둘은 전쟁까지 불사합니다. 이 전쟁이 흔히 일본 최후의 내전이라 일컬어지는 세이난전쟁(西南戰爭, 1877년)입니다.

 

세이난전쟁(西南戰爭, 1877년) 당시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던 구마모토성(熊本城)©백제사


한 국(韓國)을 쳐야 한다는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는 이에 반대하는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에 밀려 고향 가고시마로 낙향합니다. 거기서 후학들을 양성하던 중 1877년 몰락해가는 사무라이들과 함께 거병하였다가 메이지정부군에 밀려 결국 고향 가고시마 성산(城山)의 동굴에서 자결합니다. 잘 아시겠지만 “라스트 사무라이”라는 영화는 이 시대를 배경으로 제작된 것입니다. 물론 일부 내용은 사실과 다르지만 말입니다.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가 자결한 가고시마 성산(城山)의 동굴©백제사


저는 혁명동지인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와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의 갈등 관계에서 중요하게 보아야 할 점은 크게 2가지라 생각합니다.


첫 번째는 半島에 있던 나라를 조선(朝鮮)이라 하지 않고 한국(韓國)이라 했다는 것입니다. 계속 말씀드리지만 半島에 있던 나라는 조선(朝鮮)이 아니라 고려(高麗)였으며, 이 고려가 동국(東國), 한국(韓國) 등으로 불리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고종(高宗) 황제가 다시 제국의 위상을 갖춘 국가를 지향할 때 국명을 대한제국(大韓帝國)이라 했던 것입니다. 굳이 근세의 조선(朝鮮)을 말한다면 대김제국(大淸帝國)이 이에 해당합니다. 이는 이미 여러 차례 말씀드린바 있습니다. 대한제국(大韓帝國) 선포는 1897년에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1870년대 일본은 半島에 있던 나라를 한국(韓國)이라 칭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사항입니다.


한일합방(韓日合邦) 당시 발표된 칙령에 의하면 “한국(韓國)을 조선(朝鮮)으로 칭한다”라는 규정이 나옵니다.(스즈키 마사유키, 1998, “근대 일본의 천황제”, 이산 p.113) 이 문구는 半島에 朝鮮이 없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설명해 줍니다. 반도에 있던 대한제국이 조선을 계승했다면 굳이 (대)한(제)국을 조선으로 칭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나라가 그 나라인데 이런 문구를 뭐 하러 삽입하겠습니까? 그냥 한국이라 하면 될 것을 말입니다. 그건 그렇고 왜 고려(高麗, 東國, 韓國)가 조선(朝鮮)이 되어야 했을까요? 이에 대해서는 후에 자세히 다룰 것입니다.


한편, 半島에 있던 나라가 고려(高麗)라면 왜 신채호(申采浩) 선생은 조선(朝鮮)을 언급했을까요? 왜 신채호 선생의 책 제목이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가 되었을까요? 그건 배달국(倍達國) 이후 선비계(鮮卑系, 朝鮮系)와 부여계(夫餘系)가 통합된 우리 민족의 최초 통합 국가가 조선(朝鮮)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책을 보면 신채호 선생은 우리 민족을 조선민족(朝鮮民族)이라 적으셨으며, 우리나라를 동국(東國)이라 부르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 朝鮮民族과 女眞이 왜 갈라서게 되었는지를 주요 연구과제로 하셨습니다.


정 리해보면 이러합니다. 신채호 선생께서는 단군 조선(檀君 朝鮮)이후 半島에 살고 있는 우리 민족을 선비계(鮮卑系, 朝鮮系)와 부여계(夫餘系)가 통합된 조선민족(朝鮮民族)으로 정의하셨으며, 일본에 강탈당한 조국은 고려(高麗, 東國, 韓國)라 정확히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신채호 선생께서는 우리 민족을 조선민족(朝鮮民族)이라 했지만 양계론(兩系論)을 통해 규정지어 보면 “조선부여 통합민족(朝鮮夫餘 統合民族, 鮮卑夫餘 統合民族)”이라 하여야 하며, 대김제국(大金帝國, 大淸帝國)을 건설한 女眞은 “조선지파 민족(朝鮮支派 民族, 鮮卑支派 民族)”이라 불러야 합니다. 아울러 列島의 대다수는 “부여지파 민족(夫餘支派民族)”에 속하게 됩니다.


정한론(征韓論)을 다루면서도 결국, 양계론(兩系論)과 남고려북조선론(南高麗北朝鮮論)이 등장하게 됩니다. 저번 글에서 이미 양계론의 현재로서의 의의를 설명한 바 있습니다. 북한이 국호를 朝鮮으로 하였던 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新羅(鮮卑系, 朝鮮系) 경순왕의 후손이라는 점을 언급한 바 있습니다. 즉 北에 朝鮮이 있는 것입니다. 일본이 북한을 정식 국호인 朝鮮이라 칭하지 않고, 굳이 北朝鮮이라 칭하는 이유도 우연이라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南高麗임을 자처하기 때문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부여계 국가인 일본이 보기에 비록 메이지유신 이후 고려제국으로부터 이탈했지만 자신들이 고려를 자처할 개연성은 충분히 갖는 것이지요. 이는 상당히 민감한 사항입니다. 이 부분은 한일합방 이후에 고려(高麗, 東國, 韓國)가 왜 조선(朝鮮)이 되어야 했는가를 다루면서 자세히 다룰 것입니다. 이미 메이지신궁(明治神宮)에도 고려개(高麗犬)가 있다는 사실을 통해 앞으로 다루어질 사항에 대해 암시는 드렸습니다.


한편 대한민국(大韓民國)은 대한제국(大韓帝國)을 계승한 국가입니다. 지금 이를 부정하려는 시도가 뉴라이트와 정치목사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만,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즉 대한민국은 고려를 계승한 국가이니 半島에서도 남고려북조선(南高麗北朝鮮)이 존재하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의 대한민국이 고려의 적통을 이어갈지는 미지수입니다. 왜냐하면 국민 대다수가 이에 대해 알지도 못하고 고민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지키는 자의 몫입니다.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와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의 갈등 관계에서 또 하나 중요하게 보아야 할 사항은 이들의 출생지역입니다. 이미 눈치가 좋으신 독자들께서는 이 두 사람의 출생지를 유심히 드려다 보셨을 것입니다. 저 자신도 가고시마를 떠나가던 중, 기차 안에서 두 사람의 출생지를 확인해 보고, 그러면 그렇지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정말 기가 막히더군요.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는 카지야마을(加治屋町)에서 태어났으며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는 고려마을(高麗町)에서 태어났습니다. 두 사람이 태어난 곳은 아주 가깝지만 천(川)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고려다리(高麗橋)가 두 사람이 태어난 마을을 연결해 주고 있습니다.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가 태어난 카지야마을(加治屋町)과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가 태어난 고려마을(高麗町) 사이엔 고려다리가 있다. ©백제사


흥 미롭게도 카지야마을(加治屋町) 출신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는 고려(高麗)를 치자고 했고, 고려마을(高麗町) 출신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는 이에 반대하였습니다. 후에 정한론(征韓論) 때문에 두 혁명 동지는 전쟁까지 불사하게 되며, 일단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가 자결을 함으로써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가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즉 메이지유신 내에 親高麗派가 승리를 거두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는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를 따랐던 시마다 이치로(島田一郎)에 의해 암살당하게 됩니다. 저는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의 암살을 통해 메이지정부가 反高麗派에 장악되었다고 판단합니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보다 심도 있는 공부가 필요합니다.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가 마지막 결사 항전을 벌였던 가고시마 성산(城山) ©백제사


중 요한 것은 메이지유신의 본질이 일단은 列島가 고려제국으로부터 이탈한 사건임은 분명하나 그 내부에 親高麗派-反高麗派가 같이 공존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공존은 메이지유신의 고장인 가고시마에서 잉태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가 도고 시게노리(東鄕茂德) 외무대신과 마찬가지로 반도에서 끌려간 도공의 후예가 아닐지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봅니다. 반도에서 끌려간 사람들은 집단적으로 모여 살았고, 그로 인해 지금까지 고려마을(高麗町)이 이어질 수 있었으며,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가 바로 그 고려마을(高麗町) 출신이라는 점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사항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메이지유신 세력들은 고려마을(高麗町)과 카지야마을(加治屋町)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아마도 고려다리(高麗町)를 기점으로 해서 서로 싸우고 화해하고 그러면서 성장했을 것이며 자연스럽게 親高麗派-反高麗派로 나누어졌을 것입니다.


저 는 두 혁명동지인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와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의 갈등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 글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대충 얼버무린 글이 대부분입니다. 아무리 갈등이 심했기로서니 고려(高麗)를 치냐 마냐 하는 문제로 전쟁까지 불사해야 했겠습니까? 어떤 글에서는 한국을 치는 시기의 문제를 가지고 갈등이 생겼다고 하는데... 이도 충분한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단지 치는 시기의 문제 때문에 혁명동지가 갈라서고 죽기 살기로 싸운다? 전혀 납득이 되지 않는 설명입니다. 분명한 것은 고려를 치는데 반대하였던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가 대만을 점령하는데 앞장섰던 것으로 보아 그가 평화주의자는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서 세동점(西勢東漸)을 이겨내기 위해서 列島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점에 두 혁명동지는 뜻을 같이 했습니다. 그러나 본국 고려를 치는 문제에 대해서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와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는 결코 같은 길을 걸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에는 자신의 출신배경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아울러 두 혁명동지는 고려제국의 정통성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에 대한 입장 차이를 결코 좁힐 수 없었을 것입니다. 중요한 점은 메이지유신 親高麗派-反高麗派의 갈등은 이후 일본이 대한제국을 접수한 후에도 대한제국 황실과의 관계설정, 고려를 조선으로 둔갑시켰던 사건 등에서 끊임없이 이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음 글에서는 동경(東京)이 왜 일본의 임시수도로 결정되었는지 설명해 보겠습니다.


[시대소리뉴스:백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