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SINA-신중국

영길리국표선기(英吉利國漂船記)

한부울 2009. 2. 24. 13:31

영국英吉利國 자칭 대영국이라고 하는 나라 가 동양에 끼친 영향은 그야말로 세계변역을 이루도록 한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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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23대 임금 (1800-1834)

純祖 19卷, 16年(1816 丙子 / 청 가경(嘉慶) 21年) 7月 19日(丙寅) 2번째기사

○ 忠淸 水使 李載弘 狀啓以爲:

 

이재홍이 충청도 마량진 갈곶 밑에 이양선 두 척이 표류해 온 일을 보고하다

 

馬梁鎭 葛串下, 異樣船二隻漂到。 該鎭僉使 趙大福 , 地方官 庇仁 縣監 李升烈 聯報以爲, ‘漂到異樣船隻, 雖多費人力, 多用船隻, 莫可曳入。 故十四日平明, 僉使縣監, 同往異樣小船所浮處, 先以眞書問之, 以不知搖頭, 更以諺文問之, 又以不知揮手。 如是詰難者移時, 終不得問答, 畢竟渠自執筆書之, 而似篆非篆, 似諺非諺, 莫可通辨。 其左右上下層閤間, 無數書冊中, 渠又拈出二卷, 一卷給僉使, 一卷給縣監。 故開卷見之, 則亦是非篆非諺, 又莫能曉解, 還爲授之, 則固辭不受, 納之袖中。 冊子與受之際, 有一眞書葉紙, 似是該國去來文字, 故取之以來。 人物則箇箇削髮, 頭著則或以黑毛爲之, 或以繩爲之, 形如銅鑪臼。 衣服則上衣或白三升, 或黑氈, 右袵結單錘, 下衣多着白三升, 而如行纏狀, 其製甚狹, 僅容其胯。 襪子則以白三升揮裹, 履則以黑皮造之, 狀如發莫, 以纓納之。 所持之物, 或佩金銀環刀, 或佩金銀粧刀, 或佩乾靈龜。 或持千里鏡。 而其人名數, 間間滿載, 難以詳計, 似近八九十名。 又往其大船而問情, 則人物服色所佩所持, 一如小船, 而以眞以諺, 俱以不知搖頭, 名數比小船似可屢倍, 船上房間, 或坐或起, 或往或來, 極其紛錯, 難以指的計數。 而書冊器物, 倍加於小船。 毋論大小船, 蓋其製樣, 奇奇怪怪, 層層間間, 寶器與異物, 其他鐵木等物名不知者, 難以勝計。 而其中又有女人。 目下所見者, 只爲一名, 而白布裹頭, 着紅色裳。 兩船俱設冶所, 鑄者皆大鐵丸箭鏃等物。 僉使縣監下船之時, 其中一漢, 持一卷冊固授, 與小船所受二卷, 合三卷。 於焉之間, 西北風正吹, 大小兩船, 不時放砲, 次第擧帆, 直放西南間烟島外洋。 故僉使縣監, 指揮諸船, 一時追及, 則其疾如飛, 勢無以執留, 只自看望, 則前船杳無其形, 後船隱然有迷見之狀, 而日已落地, 莫可瞭望。 兩船什物摘奸件記及小船中所得一幅眞書牋, 竝謄書粘付上送’ 云。 小船中所得一幅書牋謄書, ‘ 英吉利國 水師官員下, 書爲陳明事。 送該憲知悉。 據本年閏六月初旬間, 有我 英吉利國 五隻船, 送我 英國 王差定, 從各人到 天津 北蓮河 口, 今王差等, 俱進京朝, 見萬歲爺, 因 天津 外洋水淺, 遇有大風, 免不得壞船, 故各船, 不敢在彼處碇泊, 今要回 粤東 候, 王差回國, 玆經過此處。 請該憲給以買食物, 自取淸水飮用也。 左有蓋我王差印爲據矣。 嘉慶 二十一年月日書。’”


충청 수사(忠淸水使) 이재홍(李載弘) 의 장계에,

 

“ 마량진(馬梁鎭) 갈곶[葛串] 밑에 이양선(異樣船) 두 척이 표류해 이르렀습니다. 그 진(鎭)의 첨사 조대복(趙大福) 과 지방관 비인 현감(庇仁縣監) 이승렬(李升烈) 이 연명으로 보고하기를, ‘표류하여 도착한 이양선을 인력과 선박을 많이 사용하였으나 끌어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14일 아침에 첨사와 현감이 이상한 모양의 작은 배가 떠 있는 곳으로 같이 가서, 먼저 한문으로 써서 물었더니 모른다고 머리를 젖기에, 다시 언문으로 써서 물었으나 또 모른다고 손을 저었습니다. 이와 같이 한참 동안 힐난하였으나 마침내 의사를 소통하지 못하였고, 필경에는 그들이 스스로 붓을 들고 썼지만 전자(篆字)와 같으면서 전자가 아니고 언문과 같으면서 언문이 아니었으므로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좌우와 상하 층각(層閣) 사이의 무수한 서책 가운데에서 또 책 두 권을 끄집어내어, 한 권은 첨사에게 주고 한 권은 현감에게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책을 펼쳐 보았지만 역시 전자도 아니고 언문도 아니어서 알 수 없었으므로 되돌려 주자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기에 받아서 소매 안에 넣었습니다. 책을 주고받을 때에 하나의 작은 진서(眞書)가 있었는데, 그 나라에서 거래하는 문자인 것 같았기 때문에 가지고 왔습니다. 사람은 낱낱이 머리를 깎았고, 머리에 쓴 모자는 검은 털로 만들었거나 노끈으로 만들었는데 모양이 동로구(銅鑪臼)와 같았습니다. 의복은 상의는 흰 삼승포[三升布]로 만들었거나 흑전(黑氈)으로 만들었고 오른쪽 옷섶에 단추를 달았으며, 하의는 흰 삼승포를 많이 입었는데 행전(行纏) 모양과 같이 몹시 좁게 지어서 다리가 겨우 들어갈 정도였습니다. 버선은 흰 삼승포로 둘러쌌고, 신은 검은 가죽으로 만들었는데 모양이 발막신[發莫]과 같고 끈을 달았습니다. 가진 물건은 금은 환도(金銀環刀)를 차기도 하고 금은 장도(金銀粧刀)를 차기도 하였으며, 건영귀(乾靈龜)를 차거나 천리경(千里鏡)을 가졌습니다. 그 사람의 수는 칸칸마다 가득히 실어서 자세히 계산하기 어려웠으나, 8, 90명에 가까울 듯하였습니다. 또 큰 배에 가서 실정을 물어 보았는데, 사람의 복색, 패물, 소지품이 모두 작은 배와 같았고, 한문이나 언문을 막론하고 모두 모른다고 머리를 저었습니다. 사람의 숫자는 작은 배에 비하여 몇 갑절이나 될 것 같은데, 배 위와 방 사이에 앉아 있기도 하고 서 있기도 하였으며, 가기도 하고 오기도 하는 등 매우 어수선하여, 하나 둘 세어 계산하기 어려웠습니다. 서책과 기물(器物)은 작은 배보다 갑절이나 더 되었습니다. 큰 배나 작은 배를 물론하고 그 제도가 기기 괴괴하며, 층이나 칸마다 보배로운 그릇과 이상한 물건이 있었고, 기타 이름을 알 수 없는 쇠와 나무 등의 물건이 이루 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습니다. 그 가운데 또 여인이 있었습니다. 눈앞에서 본 것은 단지 한 명뿐이었는데, 흰 베로 머리를 싸매고 붉은색 치마를 입었습니다. 두 배에 모두 대장간이 설치되었는데, 만드는 것은 모두 대철환(大鐵丸), 화살촉 등의 물건이었습니다. 첨사와 현감이 배에 내릴 때에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책 한 권을 가지고 굳이 주었는데, 작은 배에서 받은 두 권과 합하면 세 권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서북풍이 불자 크고 작은 배가 불시에 호포(號砲)를 쏘며 차례로 돛을 달고 바로 서남 사이 연도(煙島) 밖의 넓은 바다로 나갔습니다. 그래서 첨사와 현감이 여러 배를 지휘하여 일시에 쫓아갔으나 마치 날으는 새처럼 빨라서 사세상 붙잡아 둘 수 없었으므로 바라보기만 하였는데, 앞의 배는 아득하여 형체가 보이지 않았고 뒤의 배는 어슴프레 보이기는 하였으나 해가 이미 떨어져서 바라볼 수가 없었습니다. 두 배의 집물 적간건기(什物摘奸件記)와 작은 배에서 얻은 한 폭의 진서전(眞書牋)을 모두 베껴 쓴 다음, 첨부하여 올려보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작은 배에서 얻은 한 폭의 서전(書牋) 내용에, ‘ 영길리국(英吉利國) 3696) 수사 관원(水師官員)에게 글을 주어 진명(陳明)하는 일로 해헌(該憲)에 보내니, 잘 알기 바랍니다. 금년 윤6월 초순 사이에 우리 영길리국 에서 5척의 배로 우리 영국왕(英國王) 이 차정한 사신과 수행한 사람들을 보내어 천진(天津) 북연하(北蓮河) 입구에 도착하여, 지금 왕의 사신 등이 모두 북경 에 나아가 황제[萬歲爺]를 뵈었으나 천진 외양(外洋)의 수심이 얕은데다가 큰 바람까지 만나 배의 파괴를 면할 수 없기 때문에, 각 선척이 그곳에 감히 정박하지 못하고 지금 월동(粤東)에 돌아가서 왕의 사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려 귀국하려고 합니다. 이에 그곳을 지나게 되었으니, 해헌(該憲)은 음식물을 사도록 해 주고 맑은 물을 가져다 마시고 쓰도록 해 주십시오. 왼쪽에 우리 왕께서 보낸 사신의 인장(印章)이 찍혀 있으니 증거가 될 것입니다. 가경(嘉慶) 21년 월 일에 씁니다.’고 하였습니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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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원직지(燕轅直指) 제1권   

출강록(出疆錄) ○ 임진년(1832, 순조 32) 11월 25일


맑음. 건자포(乾者浦)에서 길을 떠나 50리를 가 황가장(黃家莊)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또 50리를 가 통원보(通遠堡)에 이르러 머물러 잤다. 오늘은 모두 100리를 갔다.

평명(平明)에 길을 떠나 10리를 가 백안동(伯顔洞)에 이르렀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원(元) 나라 때 백안(伯顔)이 군사를 머물게 한 곳이라 한다.


또 10리를 가 마고령(麻姑嶺)에 이르렀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마고가 일찍이 이 땅에 와서 놀았다고 한다. 마두(馬頭)들이 돌 위의 구멍을 가리키며 ‘이것이 마고의 발자취라 한다.’라고 하니 야인(野人)들의 말이란 근거 없음이 이와 같다.


다시 10리를 가 송참(松站)에 이르렀는데, 옛 이름은 설유참(薛劉站)이다.


당 나라 태종이 고구려를 칠 때 설인귀(薛仁貴)와 유인원(劉仁願)이 군사를 주둔시켰던 곳이므로 이름하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설리참(雪裡站)이라 잘못 부르는데, 설리(雪裡)와 설유(薛劉)는 중국 발음이 같기 때문이다. 지금 송참이라고 하는 것은 여기에 오면 비로소 소나무가 있기 때문이니, 역시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름한 것이다. 명 나라 때의 진동보(鎭東堡)가 바로 이 땅이라고 한다.


또 5리를 가 소장령(少長嶺)에 이르니, 일명 규령자(叫嶺子)이다. 다시 5리를 가 옹북하(瓮北河)에 이르니 일명 삼가하(三家河)이다. 내의 근원이 분수령(分水嶺)의 동쪽에서 나와 동으로 흐르다가 답동(畓洞) 이하의 여러 물과 함께 흘러 삼강(三江)으로 들어간다고 한다.


다시 5리를 가 대장령(大長嶺)에 이르니 일명 장령자(長嶺子)다. 다시 8리를 가 유가하(劉家河)를 건너고, 또 2리를 가 황하장(黃河莊)을 지나니 일명 황가장(黃家莊)인데, 여기서 점심을 먹었다.


황력 재자관(皇曆齎咨官)이 먼저 여기를 지나다가 와서 뵙기에 수본(手本)을 얻어 보니, 황제(皇帝)가, 영길리국(英吉利國 영국) 일을 타당하게 처리하였다 하여 크게 표창하는 유시를 내리고 상으로 비단[緞] 80필을 싸 보낸다는 내용이다. 대개 올해 6월에 영국 배가 홍주(洪州)에 와 정박하여 실정과 행적이 달리 추측할 수 없더니 7월이 되어서야 바람을 만나 곧 떠나갔다. 묘당(廟堂)에서 뒷날의 염려를 생각하여, 황력(皇曆)의 사행(使行) 길에 주문(奏聞)하므로 이렇게 하였다는 것이다. 따로 ‘영길리국 표선기(英吉利國漂船記)’가 있다.


재자관(齎咨官)에게 돌아올 날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으니, 내년이라야 만날 것이라 한다. 집에 보낼 편지를 지어 그 편에 부쳤다.

또 5리를 가 팔도하(八渡河)를 건넜다. 팔도하는 일명 금가하(金家河)라고 하니, 즉 옹북하(瓮北河)의 상류이다. 하나의 강물인데도 여러 번 건너게 되므로 팔도(八渡)라고 이름했다는 것이다.

노가재의 《연행일기》에, “여기에 꿩을 파는 자가 많다.”고 하였는데, 이번 길에는 보지 못했다.


다시 10리를 가 임가대(林家臺)에 이르니, 일명 금계하(金鷄河)이다. 또 20리를 가 저물어서야 통원보(通遠堡)에 이르러 머물러 잤다. 통원보는 요 나라 천총(天聰) 무렵에 진이보(鎭夷堡)를 설치했었고, 청 나라 초기에 봉황성으로 옮겨, 지금은 성첩(城堞)이 다 무너지고 남아 있지 않다.

밤에 부사를 가 보았다.

 

附英吉利國漂船記

 

壬辰七月。英吉利國船漂到洪州不毛島後洋。引泊于古代島前港。錦伯狀啓。自廟堂馳送任譯。與洪州牧使及水虞候。同爲問情。以書問曰。爾們遠涉險海。多經辛苦。能無渰死疾病之憂耶。答無死無病。貴大官員禮待遠客。散憂歡喜。問船中柴糧無乏否。答欠少柴鷄牛蔬菜而已。問爾們居生何國何地方。答我國名英吉利國。又號大英國。而居蘭墩忻都斯坦地。問爾們阾國有小英國。故稱大英國耶。答未有。因三國合爲一。皇上一位主管。故稱大英國。問三國之名。云何。答英吉利國,愛蘭國,斯客蘭國耳。問皇上一位。謂誰。答我英國君。問爾國知大淸乎。答北京皇帝國。問年年相通。亦有貢獻否。答大淸人到我國。我國人到大淸交易。兩國均大。均權勢。不進貢。問無君臣之分耶。答欽差從本國上北京。不叩頭階下。問因何事。往何處。何月日。遇何風到此否。答因公貿易設約。只到此。上奉貴國大王千歲階下文書。今年二月二十日。逢西南風。向東來。問只要到此則非風所漂也。答中意要來奉文書。問此是爾國王命而來耶。答文書解說。問貿易設約。何謂。答貿易設約。彼此有禮。公而不私。又公司之事情。只在候大王聖旨。問公司之事情。何事。答立設誼交易。且此禮物載船。寫貨單將文書。上奉大官爺。轉奏大王千歲階下。只候批回。問交易則要何物。答我們羊布大呢羽毛硝玻璃器時辰表等貨。要買貴國金銀銅大黃藥材並他樣貨物。聽我看見中意。問我國本非金銀銅所產地。外他貨物皆無。從何交易。答貴國寔多好貨寶。貴國大王準我買賣。尊官員百姓穿美衣服。不亦好乎。如今只祈帶產物幾許。遠容看一看。此與中國同樣。問此船所載物貨幾許。答金銀八百兩。問貨物。爾國所產耶。答是也。問要用何處。答行處可賣。此地方。亦要賣。問船人共幾許。答六十七人。問姓名年歲居住。答四品子爵船主胡夏米年三十。居蘭墩。出海李士年三十二。居蘭墩。六品擧人醫生何年二十九。居蘭墩。第一夥長波綠年三十八。居蘭墩。第二夥長心遜年二十二。居蘭墩。第三夥長若翰年二十。居蘭墩。畫士弟文年十九。居蘭墩。侍從者米士年十五居蘭墩。必都盧年二十。居蘭墩。夥計辟多羅年四十。居忻都斯坦。馬行年二十六。居忻都斯坦。林爾年三十。居忻都斯坦。林紅年三十四。居忻都斯坦。巴加年二十六。居忻都斯坦。巴地年二十九。居忻都斯坦。水手年三十四。居忻都斯坦。耶熳年二十。居忻都斯坦。肉翰年二十一。居忻都斯坦。明夏年四十四。居忻都斯坦。馬興年二十五。居忻都斯坦。馬是年二十六。居忻都斯坦。馬是年二十五。居忻都斯坦。陳舟年三十一。居忻都斯坦。又四人皆姓名陳舟。居忻都斯坦。而但年各不同。遜海年二十。居忻都斯坦。又十人亦皆姓名遜海。居忻都斯坦。而年各不同。第一廚子慕義年五十。居忻都斯坦。第二廚子無理年三十。居忻都斯坦。止帆吳長年二十一。居忻都斯坦。班施年五十九。居忻都斯坦。施慢年十八。居忻都斯坦。施環年十六。居忻都斯坦。施尼年十八。居忻都斯坦。問子爵之稱。擧人之稱。何謂。答公侯伯子男。子爲第四。故曰四品子爵。擧人是文考。問馬興陳舟遜海等諸人。何姓名之相同耶。答視若兄弟者同姓名。英國之法也。問此船。公船否。私船否。答公船。問船號云何。答安利。問船標有之否。答有。問官職之人。何以乘船。答官職奉文書。何不乘船。倘民人。何敢奉文書。問官職者何稱船主。答主張一船故耳。問兵器何以載船乎。答公船。故載兵器。環刀三十,銃三十五,鎗二十四,大大砲八。問爾國有弓矢否。答無。問英國之人。以船爲家而生耶。答非也。居屋。問何穀農之耶。答大米。五穀有農。問英國山多耶。水多耶。答山多。問英國京城云何。答蘭墩。問英國地方幾里。答與中國一樣。問蘭墩城大小。答七十五里。問文武官員幾許。答幾百位。問英國王貴姓。答咸卽。問自英國至北京幾里。至我國幾里。答距北京約七萬里。水路四萬里。陸路三萬里。距貴國。水路七萬里。問自爾國至我國路遠。其間過幾箇國。答有大小國。小國難詳。而大國一爲法蘭。二爲品松。三爲鵝羅斯。四爲粤地里亞。問來時見過來處國人否。答有見有不見。問所經四國。在北耶。在南耶。答或西南。或東南。問來此時。過我國境幾處。答長山,鹿島,東小島。問何月日到長山。長山在何方。而留幾日。答那在北方。留港內半日。問見長山之人否。答見漁人幾百。問相與言耶。答祈買糧。他們說話。小地沒有而已。問長山港內有人家幾許。答不見知。問留此時。文書禮物。何不捧上耶。答無大人在那。問何日至鹿島,東小島。留幾日。答六月二十四日到。留四日。問自長山至鹿島之時。幾留他處耶。答漁人已寫告耳。問長山書問人姓名爲誰。答着輕不問。問鹿島亦何以知之。答到此處後知。問此船以何材木。何歲造成耶。答桋木。七年前造。


부(附) 영길리국 표선기(英吉利國漂船記)

임진년 7월에 영국 배가 홍주(洪州) 불모도(不毛島) 뒷바다에 표류해 오자, 고대도(古代島) 앞 항구에 끌어다 정박시키고, 충청 감사가 장계하였다. 묘당(廟堂)에서는 임역(任譯)을 보내어 홍주 목사 및 수사(水使), 우후(虞候)와 함께 실정을 묻게 하였다.

글을 써 묻기를,


“너희들이 멀리 험한 바다를 건너느라 많은 괴로움을 겪었을 터인데 빠져 죽거나 병을 앓는 염려가 없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죽은 일도 없고 병도 없었습니다. 귀국의 큰 관원이 먼 나라 사람을 예의로 대우하니 걱정이 없어지고 즐겁게 되었습니다.”

“배 안에 나무나 식량은 떨어진 것이 없는가?”

“나무, 닭, 소는 떨어져 가고 채소뿐입니다.”

“너희들은 어느 나라 어느 지방에 거주하는가?”

“우리나라 이름은 영길리국(英吉利國 영국) 또는 대영국(大英國)이라 하고, 난돈(蘭墩 런던)과 흔도사탄(忻都斯坦 힌두스탄) 지방에 살고 있습니다.”

“너희들의 이웃 나라에 소영국(小英國)이 있어 대영국이라고 하는 것인가?”

“있지 않습니다. 세 나라가 합하여 하나가 되고 황상(皇上) 한 분이 주관하기 때문에 대영국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 나라의 이름은 무엇 무엇인가?”

“영국, 애란국(愛蘭國 아일랜드), 사객란국(斯客蘭國 스코틀랜드)입니다.”

“황상 한 분은 누구를 말하는가?”

“우리 영국 임금입니다.”

“너희 나라에서도 대청(大淸)을 아는가?”

“북경(北京) 황제국(皇帝國)이라고 합니다.”

“해마다 서로 통상하며 또한 가져다 바치는 것이 있는가?”

“청 나라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오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대청에 가 교역하는데, 두 나라가 고루 크고 세력이 같으므로 진공(進貢)하지 않습니다.”

“군신(君臣)의 분별이 없는가?”

“흠차(欽差)가 우리나라에서 북경에 가도 계단 아래에서 고두례(叩頭禮)를 행하지 않습니다.”

“무슨 일로 어느 곳을 가다가, 어느 곳에서 언제 어떤 바람을 만나 여기에 왔는가?”

“공적으로 무역 조약을 맺고자 단지 이곳에 와서 귀국(貴國)의 대왕 천세폐하(大王千歲陛下)께 문서를 바치려고 올해 2월 20일에 서남풍(西南風)을 만나 동쪽으로 향하여 왔습니다.”

“만일 여기에 도착하려고 하였다면 바람에 표류된 것이 아니잖은가?”

“중의(中意)는 문서를 바치려고 온 것입니다.”

“문서는 너희 나라 임금의 명으로 온 것인가?”

“문서를 해설(解說)하러 온 것입니다.”

“무역 조약을 맺는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무역 조약을 하려면 피차간에 예가 있는 것이어서 공적(公的)인 것이지 사적(私的)인 것이 아니며, 또한 공사(公司)의 사정은 오직 대왕(大王)의 성지(聖旨)를 기다리는 데 있습니다.”

“공사의 사정이란 무슨 일인가?”

“우의(友誼) 있는 교역(交易)을 설립(設立)해야 합니다. 또 이러한 예물(禮物)이 배에 실려 있으며, 화단(貨單)을 쓴 문서를 가지고 위로 대관대인(大官大人)에게 바쳐 대왕 천세폐하께 주달하여 그 비답(批答)을 받는 것입니다.”

“교역한다면 무슨 물건을 요구하는가?”

우리들은 양포(羊布), 우단[大呢], 우모(羽毛), 초자(硝子), 유리 그릇, 시계 등의 물품으로 귀국의 금(金), 은(銀), 동(銅)과 대황(大黃) 같은 약재 및 다른 물화(物貨)를 사고자 하는데, 우리들이 보고 마음에 맞아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본래 금, 은, 동이 나는 데가 아니고, 그 나머지 다른 물화도 없으니 무엇으로 교역을 하겠는가?”

“귀국은 진실로 좋은 물화와 보물이 많으니, 귀국 대왕께서 우리와의 매매를 윤허하신다면 귀국의 관원과 백성들이 좋은 의복을 입게 될 것이므로,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같아서는 다만 산물(産物) 몇 가지를 가지고 가 이것이 중국의 것과 같은 모양의 것인지 알아보게 하여 주시기 바랄 뿐입니다.”

“이 배에 실은 물화가 얼마나 되는가?”

“금은으로 800냥입니다.”

“그 물화는 너희 나라에서 나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어디에 쓰려는 것인가?”

“가는 곳마다 팔 수 있는 것으로서 이 지방에서도 팔려고 합니다.”

“선원(船員)은 모두 몇 사람이나 되는가?”

“67명입니다.”

“성명과 나이, 거주지는?”

“4품(品) 자작(子爵) 선장(船長) 호하미(胡夏米)는 나이 30, 난돈(蘭墩 런던)에 살고, 출해리사(出海李士)는 나이 32, 난돈에 살고, 6품(品) 거인(擧人) 의생(醫生) 하(何)는 나이 29, 난돈에 살고, 제일 과장(第一夥長) 파록(波綠)은 나이 38, 난돈에 살고, 제이 과장 심손(心遜)은 나이 22, 난돈에 살고, 제삼 과장 약한(若翰)은 나이 20, 난돈에 살고, 화사(畫師) 제문(弟文)은 나이 19, 난돈에 살고, 시종(侍從) 미사(米士)는 나이 15, 난돈에 살고, 필도로(必都盧)는 나이 20, 난돈에 살고, 과계(夥計 심부름꾼) 벽다라(辟多羅)는 나이 40, 흔도사탄(忻都斯坦 힌두스탄)에 살고, 마행(馬行)은 나이 26, 흔도사탄에 살고, 임이(林爾)는 나이 30, 흔도사탄에 살고, 임홍(林紅)은 나이 34, 흔도사탄에 살고, 파가(巴加)는 나이 26, 흔도사탄에 살고, 파지(巴地)는 나이 29, 흔도사탄에 살고, 수수(水手)는 나이 34, 흔도사탄에 살고, 야만(耶熳)은 나이 20, 흔도사탄에 살고, 육한(肉翰)은 나이 21, 흔도사탄에 살고, 명하(明夏)는 나이 44, 흔도사탄에 살고, 마흥(馬興)은 나이 25, 흔도사탄에 살고, 마시(馬是)는 나이 26, 흔도사탄에 살고, 마시(馬是)는 나이 25, 흔도사탄에 살고, 진주(陳舟)는 나이 31, 흔도사탄에 살고, 네 사람도 모두 성명이 진주(陳舟)로 흔도사탄에 사는데 다만 나이가 각각 틀리고, 손해(遜海)는 나이가 20, 흔도사탄에 살며, 열 사람도 역시 모두 성명이 손해로 흔도사탄에 사는데 나이가 각각 같지 않으며, 제일 주자(第一廚子) 모의(慕義)는 나이 50, 흔도사탄에 살고, 제이 주자 무리(無理)는 나이 30, 흔도사탄에 살고, 지범(止帆) 오장(吳長)은 나이 21, 흔도사탄에 살고, 육반(班) 시년(施年)은 나이 59, 흔도사탄에 살고, 시만(施慢)은 나이 18, 흔도사탄에 살고, 시환(施環)은 나이 16, 흔도사탄에 살고, 시니(施尼)는 나이 18, 흔도사탄에 삽니다.”

“자작(子爵)이란 칭호와 거인(擧人)이란 칭호는 무엇을 일컫는 것인가?”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男)에 자가 넷째 번이 되므로 4품 자작이라 한 것이요, 거인은 곧 문고(文考)입니다.”

“마흥(馬興), 진주(陳舟), 손해(遜海) 등 여러 사람은 어찌 성명이 서로 같은가?”

“형제처럼 여기는 사람은 성명을 같게 하는 것이 영국의 법입니다.”

“이 배는 공선(公船)인가 사선(私船)인가?”

“공선입니다.”

“배 이름을 무엇이라 하는가?”

“안리(安利)입니다.”

“선표(船標)를 가지고 있는가?”

“있습니다.”

“관직을 가진 사람이 어찌하여 배를 탔는가?”

“관리가 문서(文書)를 받드니 어찌 배를 타지 못합니까? 만일 민간인이라면 어떻게 감히 문서를 모시겠습니까?”

“관직이 있는 사람을 어찌하여 선주(船主)라고 하는가?”

“배 전체를 주관하기 때문입니다.”

“병기(兵器)는 무엇하려고 배에 실었는가?”

“공선이기 때문에 병기를 실었습니다. 환도(環刀)가 30자루, 총이 35자루, 창이 24자루, 대대포(大大砲)가 8문(門)입니다.”

“너희 나라에도 활과 화살이 있는가?”

“없습니다.”

“영국 사람들은 배를 집으로 삼아 사는가?”

“아닙니다. 집에서 삽니다.”

“무슨 곡식의 농사를 짓는가?”

“대미(大米)와 오곡(五穀)의 농사를 짓습니다.”

“영국은 산이 많은가 물이 많은가?”

“산이 많습니다.”

“영국 서울을 무엇이라 하는가?”

“난돈(蘭墩 런던)이라 합니다.”

“영국은 면적이 몇 리나 되는가?”

“중국과 같습니다.”

“난돈(蘭墩 런던) 성(城)은 얼마나 큰가?”

“75리입니다.”

“문무(文武) 관원은 얼마나 되는가?”

“몇 백 명이나 됩니다.”

“영국왕의 성(姓)은 무엇인가?”

“함즉(咸即)입니다.”

“영국에서 북경까지는 몇 리나 되며, 우리나라까지는 몇 리나 되는가?”

북경과의 거리는 약 7만 리인데, 수로(水路) 4만 리에 육로 3만 리이며, 귀국과의 거리는 수로로 7만 리입니다.”

“너희 나라에서 우리나라까지 길이 먼데, 그 사이에 몇 개의 나라를 지나왔는가?”

“크고 작은 나라가 있습니다. 작은 나라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큰 나라로 하나는 법란(法蘭 프랑스), 둘은 품송(品松 프로이센), 셋은 아라사(鵝羅斯 러시아), 넷은 오지리아(奧地里亞 오스트리아)입니다.”

“올 때에 지나온 곳의 나라 사람들을 보았는가?”

“본 곳도 있고 보지 않은 곳도 있습니다.”

“지나온 네 나라가 북쪽에 있는가 남쪽에 있는가?”

“서남쪽이나 동남쪽에 있었습니다.”

“여기 올 때 우리나라 국경을 몇 군데나 거쳤는가?”

“장산(長山), 녹도(鹿島), 동소도(東小島)를 지나왔습니다.”

“몇 월 며칠에 장산에 이르렀으며, 장산은 어느 쪽에 있고, 며칠이나 머물렀는가?”

“그곳은 북쪽에 있었으며, 항구 안에 반나절쯤 머물렀습니다.”

“장산 사람들을 보았는가?”

“어부 몇 백 명을 보았습니다.”

“서로 말한 일이 있는가?”

“식량을 사려고 하였으나, 그들이 ‘작은 땅도 없다.’고 말할 뿐이었습니다.”

“장산 항구 안에 인가(人家)가 얼마나 있던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곳에 머물 때 문서와 예물을 왜 받들어 올리지 않았는가?”

“대인이 그곳에 있지 않아서입니다.”

“어느 날 녹도(鹿島), 동소도(東小島)에 이르러 며칠이나 머물렀는가?”

“6월 24일에 도착하여 4일 동안 머물렀습니다.”

“장산에서 녹도로 갈 때에 몇 번이나 다른 곳에 머물렀는가?”

“고기 잡는 사람들이 이미 써서 알려 주었습니다.”

“장산에서 글을 써서 물은 사람의 성명이 누구인가?”

“경솔하게 되겠기에 묻지 않았습니다.”

“녹도는 또 어떻게 알았는가?”

“이곳에 온 뒤에 알았습니다.”

“이 배는 무슨 재목으로 어느 해에 만들었는가?”

가시나무[桋木]로 7년 전에 만든 것입니다.”

 

이렇게 문답하는 동안 적간(摘奸)을 꾀하자, 그들이 일제히 방해하여 막고 배 안에 출입(出入)하지 못하게 하였다. ‘변방의 사정은 중요한 일이어서 이렇게 할 수 없다.’는 뜻의 글을 써서 보였으나 끝내 따르지 않고, 물품 목록도 보기를 청했으나 또한 보여 주지 않으니, 재화(財貨)의 다소와 집물(什物)이 얼마인지를 자상하게 알 길이 없었다. 그리고 그 배의 상하에 장치한 칸 수도 적간할 수가 없었는데, 물은즉 답하기를,


“큰 것이 10칸, 작은 것이 20칸입니다.”

 

하였다. 그 사람들의 용모는 더러는 희어 분을 바른 것 같고, 더러는 검어 먹을 칠한 듯하며, 혹 머리털을 완전히 깎기도 하고 혹 정수리를 깎아 버리고 뇌(腦) 위의 털을 조그맣게 한 가닥으로 땋아 드리웠다.

 

입은 의복은 양포(羊布)나 성전(猩氈)이나 삼승(三升)으로 만들었다. 저고리는 두루마기[周衣] 모양이나 협수(狹袖) 모양인데 띠를 붉은 단(緞)으로 하였고, 적삼[衫]은 단령(團領) 오른편 섶에다 금단추를 옷깃이 합쳐진 곳에 달았는데 그 소매가 넓거나 좁다. 바지는 우리나라의 것과 모양이 같아 넓기도 하고 좁기도 하며 더러는 검고 더러는 희며, 관작(官爵)이 있는 사람의 의복은 무늬 있는 단(緞)이 선명하였다.

 

머리에 쓰는 것으로 자작(子爵) 호하미(胡夏米)의 것은 푸른 단(緞)으로 만들되 마치 족두리같이 앞을 검은 뿔로 장식하였다. 그 밖의 것은 혹은 홍전(紅氈) 혹은 검은 삼승(三升)으로 더러는 감투[甘吐] 모양같이 하고 더러는 두엄달이(頭掩達伊) 모양같이 하고 더러는 풀로 짠 전립(氈笠) 모양과 같이 하였다.

 

버선[襪子]은 흰 좌사(左紗)나 흰 삼승으로 만들었는데 등 위에 꿰맨 데가 없고, 신[鞋]은 검은 가죽으로 만들어 발막(發莫) 모양과 같았다.

 

선체(船體)는 외[瓜]를 쪼갠 듯이 뱃머리와 선미(船尾)가 뾰족하고, 그 길이는 30발[把], 너비는 6발이다. 삼(杉) 나무 쪽[片]을 붙이는데 쇠못으로 박고, 못대가리의 폭 사이를 기름 섞은 회(灰)로 발랐다. 물에 잠기는 기둥과 판자는 모두 구리쇠 쪽을 붙이고 구리쇠 못으로 총총 박았으며, 치목(鴟木 키)도 구리로 둘러싸 선미 밖에 붙였다. 상하 삼판(杉板)에 유리로 창문을 냈고, 좌우 삼판 위에 난간을 만들되 판목(板木)으로 칸을 가로질러 꾸몄으며, 뱃머리에는 취사장을 만들었다. 선미에 선관(船官)이 거처하는 방을 만들었는데 지극히 화려하게 하였으며, 방 위에 판자를 깔고 사방에 놋쇠로 난간을 만들었다. 뱃머리에는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기름 섞은 회로 발라 꽂았는데 마치 멀리 바라보는 듯한 모양이었다.

 

또 긴 나무를 반쯤 눕게 꽂아 앞 돛[㠶]의 끈을 매달았다. 선상(船上)의 허리 중앙에 닻[碇]이 닿는 데를 만들었는데, 아래는 판자를 깔아 안정되어 흔들리지 않게 하고, 위는 장구 모양으로 하여 맷돌처럼 움직이게 만들고 놋쇠[豆錫]로 장식하여 세워 두었다. 닻줄은 철사로 꼬았는데 크기가 서까래만 하다. 배 양쪽 머리에는 각각 건령구(乾靈龜)를 설치하고, 배 좌우에는 쇠 갈고리를 박아 돛끈을 매달았다.

 

배 가운데의 1칸에는 검고 흰 염소, 닭, 오리, 돼지, 개를 기르는데 그 수효를 헤아릴 수 없다. 배 양쪽 머리에는 각종 색깔의 기를 꽂아 앞길의 물 깊고 얕음을 재는 데 호응하였다. 관작(官爵)이 있는 자가 거처하는 문 앞에는 한 사람을 시켜 갑옷을 입고 칼을 잡고 온종일 시위(侍衛)하여 출입하는 사람을 금하게 하였다.

 

물 긷는 배 네 척은 푸르거나 검게 칠하였고, 본판(本板)을 구리쇠로 만들어 항상 선미의 좌우에 달아 두다가 때때로 물에 띄워 사용하였다. 돛대는 앞 돛대는 19발, 가운데의 돛대는 22발, 뒤 돛대는 16발이다. 앞뒤와 가운데의 돛대는 각각 3층과 6층으로 수레바퀴 모양과 같이 만들고, 놋쇠로 난간을 상층과 가운데 층에 하고 나무대 둘을 가로로 붙여 사람을 수용할 곳을 만들었다. 큰 활대[弓竹]를 항시 3층의 위에 걸되, 흰 삼승 돛을 또 3층으로 나누어 붙여 수시로 폈다 거뒀다 한다. 돛끈[帆索]은 드리우기를 줄이 헝클어진 것 같은데 간간이 큰 가닥이 있고, 또한 작은 끈으로 구름사다리[雲梯] 모양을 묶어 만들어, 돛을 펼 때에는 사람이 그 층 위에 올라가 폈다.

그들이 쓰는 그릇은 화기(畫器)와 유리요, 수저는 모두 은이었다.

 

그 주문(奏文) 한 봉(封)과 예물 세 봉을 굳이 거절하고 받지 않았더니 심지어는 그 종선(從船)에다 옮겨 싣고 보내오기를 몇 차례인지 모르며 쫓아 보내기를 또한 한두 차례가 아니었다. 끝내 그만두지 않고 마침내는 강가에 실어다 두므로, 주문(奏文) 및 예물을 우선 동임(洞任)의 집에 봉하여 주고 엄하게 수직(守直)하도록 단속하여 처분을 기다리기로 하였다. 작은 책자 세 권과 예물의 물명(物名) 도록(都錄) 세 벌을 그들이 주기에 책자 한 권과 도록 한 벌은 영문(營門)에 봉하여 올리고, 또 한 벌은 수영(水營)에 봉하여 올리고, 또 1벌은 병영(兵營)에 봉하여 올렸다. 선표(船標)는 자획(字畫)이 꼬불꼬불하여 거칠고 어지러워 도화(圖畫)와 같아 해득하여 모방해 낼 수가 없으므로 베끼어 올리지 못하였다.

 

그들의 성명, 나이, 용모의 특징을 성책(成冊)하여 올렸으며 공궤(供饋), 수직(守直)하는 절차를 연이어 더욱 단속하여 거행하게 하였다. 실정을 문초하는 절차가 가장 시급한 일인데 일문일답(一問一答) 외에는 지리하다고 하거나 눈썹을 찌푸리며 좋아하지 않거나 손을 흔들며 묻지 말라고 하였다. 이상은 홍주 목사 및 수영 우후가 순영(巡營)에 고한 사연.


“지금 보고한 사연 속의 그 사람들이 대답한 것을 보건대, 심상한 표류선과는 다른 데가 있습니다. 무릇 관계되는 일의 거행을 더욱 자상히 살펴야 하는데 배 안의 물건들을 끝내 적발하지 못하여 법례에 어긋남이 있고, 실정을 문초하는 사연 가운데 의당 물어야 될 것을 묻지 않은 것이 또한 많이 있습니다. 이른바 주문(奏文)과 예물(禮物)이 이미 서로 통신(通信)하는 나라의 것도 아니고 명분도 없이 바치는 것이면 그들이 비록 굳이 받기를 청하더라도 단연코 조정의 처분이 있기 전에는 마음대로 받을 수 없다는 뜻으로 말을 좋게 하여 깨우쳐 일러 돌려주고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두어 차례 갔다 왔다 하다가 마침내 동리 일 보는 사람에게 봉하여 두게 되었으니, 이것은 받아 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어서 일의 근본[事體]으로써 헤아리면 천부당만부당합니다.

 

당해(當該) 수영 우후와 홍주 목사가 처음에 지체하고 진행하지 못한 것은 풍우(風雨)에 막힌 때문에 완만하여 일에 미치지 못함을 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다음번으로는 보고하는 사연의 모호함이 또한 매우 소홀한 데다가 그 배를 경솔하게 먼저 고대도(古代島)로 끌어다 정박시킨 것도 경솔한 짓에 가깝습니다. 일이 끝나기를 기다려 논감(論勘)할 작정이었으나, 그 사람들의 주문 및 예물을 봉하여 도로 전하지 못한 것을 다만 잘못으로 간주하여 말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너무나 변방 사정에 관계되는 일이라 결단코 그대로 두고 그 일이 끝남을 기다리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수영 우후 김영수(金瑩綬)와 홍주 목사 이민회(李敏會)를 먼저 파출하십시오.

 

그들이 책자 한 권과 예물 도록(禮物都錄) 한 벌을 신(臣)의 영(營)에 봉하여 올린 것은 이미 그들의 사정을 기록하여 보인 것이므로 굳게 봉하여 비변사(備邊司)로 올려보냈습니다. 물명 도록(物名都錄) 같은 것도 다른 범상한 문자와 다르고, 예물을 이미 받아서는 부당하다면 도록 역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므로 원본을 도로 내려보내어 그 사람들에게 돌려주게 하고, 따로 한 벌을 등본하여 비변사로 올려보냈습니다.

 

그 사람들의 말에 이미 무역(貿易) 조약의 설립과 주문(奏文), 예물 등의 말이 있었는데, 이보다 엄밀한 일이 없는 데다가 또한 전에는 없던 예로서 감히 함부로 논의하여 청할 수 없습니다. 이에 낱낱이 계문(啓聞)하고, 그들의 나이와 용모의 특징도 한결같이 성책(成冊)의 기록에 따라 조례대로 다음에 기록하였으니,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하도록 하소서.

 

그 사람들의 대답 가운데 이미 장산(長山) 항구 안에 반나절 동안 머물며 식량 사는 일 등의 문답이 있고, 또 녹도(鹿島) 동쪽 작은 섬에 갔다고 하였는데, 그 소재지(所在地)를 자상하게 심문하여 기록하지 못하고, 보고한 사연이 또한 너무도 소홀하여 빠뜨림이 있어 다시 더 자세하게 탐문하여 보고하게 하였습니다. 배 안의 집물(什物)도 다시 여러 가지로 간절하게 깨우쳐 일일이 적간하여서 기록하여 보고하도록 말을 만들어 신칙(申飭)하였습니다. 정탐(偵探), 수직(守直), 공궤(供饋)와 잡인을 금하는 등의 절차를 각별하게 거행하여 혹시 조금이라도 소홀히 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뜻에서 연이어 더욱 신칙하였습니다. 다시 신(臣)의 영(營) 비장들을 보내어 함께 입회(立會)하여 검칙(檢飭)하게 하였습니다. ……” 이상은 충청 감사의 장계 발미.

 

영국 사람이 원래 사는 땅은 중국과의 거리가 멀리 7만 리나 떨어져 있다. 즉 이런데도 그 배는 남쪽으로 떠나 아프리카 대륙[亞非利加洲]이라는 큰 지방을 거쳐 드디어 동북쪽으로 와서 오필(奧必)에 이르렀다. 이렇게 먼 길을 다니는데도 영국 사람들이 탄 배는 시원스럽게 빠르고 편안하여 이처럼 중난하고 큰 바다를 떠다녔으니, 감히 그 목적한 일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때로 그들은 광풍이 크게 일어남을 만나게 되면 오직 선주(船主)와 과장(夥長) 등의 좋은 계책이나 사공의 담력만 믿고 가다가 얼마 가지 않아 배가 부서지는 환란을 당하기도 한다. 또 해양(海洋)에 있으면 해적들이 감히 향해 오지 못한다 한다. 그 나머지 국사(國事) 등에 관한 말은 문세(文勢)가 기괴하여 다 해석하기 어려우므로 감히 올려 기록하지 못하였다. 이상은 영국 인품과 국사의 대략적 설명.


“대영국(大英國) 선주(船主) 호하미(胡夏米)는 삼가 수군절도사 이 대인(李大人)에게 품합니다. 현재 영국 배가 여기에 이르렀는데, 문서와 아울러 미미하나마 드릴 토산물을 조선국 대왕 전하께 받들어 올릴 것이 있습니다. 이에 간청하오니 관원을 시켜 보내어 우리들을 응접 인도하여 조정에 문서를 받들고 가 주달하게 하여 주시면 위덕(威德)이 적지 않겠습니다. 임진(壬辰) 33년 6월 27일 호하미 착서(着署).” 그 아래 붉은 인장을 찍었음. 이상은 그 사람들의 편지.

“미미한 물품을 바쳐 올립니다. 삼가 바라건대, 대왕 천세폐하께서 은혜를 내리시어 멀리 버리지 말아 주소서. 애석하게도 기묘한 진품(珍品)이나 보배롭게 보아 주실 성상의 하람에 받들어 올릴 만한 것이 없습니다. 오직 이것으로 삼가 공경하는 뜻을 펴고, 아울러 현지 배에 싣고 온 물화의 견본을 보여 드릴 따름입니다.” 이상은 그 사람들의 주문.

우단[大呢] 홍색 1필, 청색 1필, 흑색 1필, 포도색 1필.

우모(羽毛) 홍색 1필, 청색 1필, 포도색 1필, 종색(棕色) 1필, 황색 1필.

양포(羊布) 14필, 잡물(雜物)ㆍ천리경(千里鏡) 2개, 파리 그릇[玻瓈器] 6건, 꽃무늬 금 전고(鈿叩) 6벌, 그 나라의 지리서[道里書] 26가지. 이상은 그 사람들의 예물 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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純祖 32卷, 32年(1832 壬辰 / 청 도광(道光) 12年) 7月 21日(乙丑) 4번째기사


○ 公忠 監司 洪羲瑾 狀啓:

홍희근이 홍주의 고대도 뒷 바다에 정박한 영길리국의 배에 대해 보고하다

六月二十五日, 何國異樣三帆竹船一隻, 來泊於 洪州 古代島 後洋, 而云是 英吉利國 船, 故使地方官 洪州 牧使 李敏會 , 水虞候 金瑩綬 , 馳進問情, 則言語難通, 以書字問答, 而國名 英吉利國 , 又號 大英國 居 蘭墩忻都斯担 地, 英吉利國 愛蘭國 、 斯客蘭國 , 合爲一國, 故稱 大英國 , 國王姓 威氏 , 地方與 中國 一樣, 蘭墩 地方七十五里, 國中山多水小, 五穀, 皆有邊界, 近于昆連, 卽 雲南省 發之一條河流, 英國 一所地方, 而入大海。 距 北京 約七萬里, 水路四萬里, 陸路距 朝鮮 水路七萬里, 歷 法蘭治 、 我斯羅 、 呂宋 , 越 地理亞 等國始到。 船材以桋木造成, 船體如破苽形, 而頭尾尖, 長三十把, 廣六把, 杉幅之付以鐵釘, 揷之上中莊間數, 大十間, 小二十間, 船頭尾各置乾靈龜, 船中置黑白羔, 置鴨雞塒猪圈, 船尾頭揷各色旗, 有爵者之居門前一人, 著甲衣樣按劍, 終日長立, 以禁出入之人, 汲水船四隻, 常懸於左右, 有用時則放水。 前、中、後帆竹, 各作三層, 白三升帆, 亦分三層, 所用器皿畫器, 樽甁琉璃, 匙則銀也, 船中所載兵器, 環刀三十, 銃三十五, 槍二十四, 大火砲八, 船中人六十七人, 船主四品子爵 胡夏米 , 六品擧人 隨生甲利 、 出海李士 , 第一夥長 波祿 , 第二夥長 心遜 , 第三夥長 若翰 , 畫士 弟文 , 寫字 老濤高 , 侍從者, 米士必都盧 , 夥計 辟多羅馬 、 行林爾 、 林紅把 、 加巴地 , 水手 嘉他 、 拉尼 、 耶熳 、 周翰 、 明夏 及 馬興 六人, 陳舟十人, 遜海二十人, 廚子 慕義 、 無理 , 止帆 吳長萬 、 跟班 、 施五 、 施慢 、 施難 、 施環 、 施譫 、 施尼 、 施八 。 容貌或白如塗粉, 黑如染墨, 或全削頭髮, 或削去百會以前, 而以腦上少許髮一條編垂, 所着衣服, 或洋布或猩猩氈, 或三升各色緞, 而上衣則或着周衣樣, 或着狹袖樣, 或以紅緞帶之赤衫, 則團領右袵, 以金團錘, 懸於合袵處處, 其袖或狹或廣, 有爵人所着紋緞鮮明。 頭着則胡夏米以靑緞製, 如足道里, 前飾黑角, 其外則或以紅氈, 或以黑三升, 或爲甘土樣, 或爲頭掩達伊, 或以草織如煎骨狀襪子, 則或白左紗或白三升, 而背上無縫處, 鞋以黑皮, 形如發莫。 船載物貨, 玻璃器五百, 硝一千担, 火石二十担, 花布五十疋, 刀子一百, 剪子一百, 蠟燭二十担, 燈臺三十, 燈籠四十, 鈕一萬餘, 腰刀六十, 幷價銀八萬。 兩國俗世主耶蘇之學, 與中華交易, 由來二百年之久, 與大 淸國 均, 大均權勢不進貢, 從本國上 北京 , 不叩頭階下, 大 淸 皇帝懷柔遠人, 近因吏憲, 不體上旨, 所以皇恩不及遠客, 且外商, 因吏員勒索, 多被阻亂云。 通貨之國, 友羅巴國 , 法蘭西國 , 阿壬民拉國 , 者 耳馬尾國 , 大呂宋國 , 波耳都斯國 , 亞非利加國 , 寔力國 , 令仃都國 , 大 淸國 , 交隣之國, 我羅斯國 , 法蘭治國 , 荷蘭國 , 波呂斯國 , 英國 地方, 其在 毆羅巴 , 人亦有貴, 地方在此 亞未利加 , 其亦有好大地方, 又在 西忻慶 其有海島盛, 多在 亞非利加 極南角, 好望之甲, 爲 垂圍 之屬地, 又於太平南洋, 有屬 英國 許多發達下落之地方, 終者在 亞西亞州 , 多有海島, 且 忻都斯担 , 古圍 各地方, 皆入於 英國 版圖矣。 其最近 中國 屬 英國 之下落地方, 爲 榏能埠 、 馬地班埠 、 馬拉加埠 與 先嘉陂埠 。 ‘今年二月二十日, 逢西南風來此, 以國王命, 奉文書禮物, 上奉貴國千歲階下, 只候批回, 因公貿易設約, 以洋布、大呢、羽毛綃、琉璃器、時辰表等, 貨買貴國金、銀、銅、大黃等藥材, 所謂上獻禮物, 大呢紅色一疋, 靑色一疋, 黑色一疋, 葡色一疋, 羽毛紅色一疋, 靑色一疋, 葡色一疋, 棕色一疋, 黃色一疋, 洋布十四疋, 千里鏡二箇, 琉璃器六件, 花金鈕六排, 本國道理書二十六種。’ 又於七月十二日, 有異樣小艇一隻, 自 瑞山 看月島 前洋, 來泊 泰安舟師倉里 前浦, 向本里民人, 啁啾作語, 投諸冊子於洲邊, 仍卽回船以去, 而所投冊子, 合四卷內, 二卷竝匣各七張, 又一卷幷匣爲十二張, 又一卷無匣, 而只爲四張云。 故 古代島 問情官, 以此事更問於彼船, 則答以 ‘今十二日卯時, 乘從船往北方, 經夜於洋中, 十三日未明來了, 而同往者七人, 冊四卷給之, 而人名不相知云。’ 彼人書出糧、饌、蔬菜、鷄、猪等雜物單子一張而求請, 故牛二頭, 猪四口, 雞八十隻, 醎魚四担, 各蔬菜二十斤, 薑二十斤, 葱頭二十斤, 蒜頭二十斤, 苦椒十斤, 白紙五十卷, 穀四担, 麥麪一担, 蜜糖五十斤, 酒一百斤, 烟葉五十斤入給, 彼人以奏文一封, 禮物三封, 懇乞轉上, 而牢却不受, 則彼人乃投之於江邊, 又以小冊子三卷, 禮物物名都錄二件給之云。 自京別定譯官 吳繼淳 , 馳往問情, 手本以文書禮物, 彼人終不肯還受, 屢日相持, 至十七日酉時, 潮水初落, 則彼人輩一齊諠譁, 絶去我船之繼繩, 擧碇揭帆, 直向西南間而去, 故蒼黃追往, 則彼船捷利, 我船質鈍, 追之不及, 文書禮物, 竟不得還傳’ 云”

 

 

備局啓言: “此船必是海中諸國之行商者, 而偶到我國地界, 將此奏文禮物, 以爲嘗試交易之計, 計旣不遂, 彼亦不得不退去, 而但其奏文禮物仍置者, 殊涉訝惑。 遠人事情, 雖難測度, 在我處置, 所當審愼, 令問情官譯官等, 一一照數, 堅加櫃封, 幷與我人等處所給書冊, 而無遺收聚, 同爲封裹, 留置於本州官庫。 公忠 水使 李載亨 , 虞候 金瑩綬 , 地方官 洪州 牧使 李敏會 , 問情時擧行之稽滯顚錯之罪, 請依道臣論勘, 施以罷職之典。” 幷允之。 又啓言: “此 英吉利國 , 雖不在大國朝貢之列, 以其所納冊子觀之, 閩 、 廣 等處地方之商船往來, 歲不下六七十隻云, 則今此來泊我國之事情, 或不無轉通大國之慮, 不可不自我國, 先發以防後患。 令槐院, 枚擧事實, 撰出咨文, 從便入送于禮部。” 從之。

 

공충 감사(公忠監司) 홍희근(洪羲瑾) 이 장계에서 이르기를,

“6월 25일 어느 나라 배인지 이상한 모양의 삼범 죽선(三帆竹船) 1척이 홍주(洪州) 의 고대도(古代島) 뒷 바다에 와서 정박하였는데, 영길리국(英吉利國) 의 배라고 말하기 때문에 지방관인 홍주 목사(洪州牧使) 이민회(李敏會) 와 수군 우후(水軍虞候) 김형수(金瑩綬) 로 하여금 달려가서 문정(問情)하게 하였더니, 말이 통하지 않아 서자(書字)로 문답하였는데, 국명은 영길리국(英吉利國) 또는 대영국(大英國) 이라고 부르고, 난돈(蘭墩) 과 흔도사단(忻都斯担) 이란 곳에 사는데 영길리국 · 애란국(愛蘭國) · 사객란국(斯客蘭國) 이 합쳐져 한 나라를 이루었기 때문에 대영국 이라 칭하고, 국왕의 성은 위씨(威氏) 이며, 지방(地方)은 중국(中國) 과 같이 넓은데 난돈(蘭墩) 의 지방은 75리(里)이고 국중에는 산이 많고 물은 적으나 오곡(五穀)이 모두 있다고 하였고, 변계(邊界)는 곤련(昆連)에 가까운데 곧 운남성(雲南省) 에서 발원(發源)하는 한줄기 하류(河流)가 영국 의 한 지방을 거쳐 대해(大海)로 들어간다고 하였습니다. 북경(北京) 까지의 거리는 수로(水路)로 7만 리이고 육로(陸路)로는 4만 리이며, 조선(朝鮮) 까지는 수로로 7만 리인데 법란치(法蘭治) · 아사라(我斯羅) · 여송(呂宋) 을 지나고 지리아(地理亞) 등의 나라를 넘어서야 비로소 도착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또 선재(船材)는 이목(桋木)을 썼고 배의 형체는 외[瓜]를 쪼개 놓은 것같이 생겼으며, 머리와 꼬리 부분은 뾰족한데 길이는 30파(把)이고 넓이는 6파이며 삼(杉)나무 폭을 붙인 대목은 쇠못으로 박았고, 상층(上層)과 중층(中層)은 큰 것이 10칸[間]이고 작은 것이 20칸이었으며, 선수(船首)와 선미(船尾)에는 각각 건영귀(乾靈龜)를 설치했고, 배 안에는 흑백의 염소[羔]를 키우며 오리와 닭의 홰[塒]를 설치하고 돼지 우리도 갖추고 있었으며, 선수와 선미에는 각색의 기(旗)를 꽂고 작위(爵位)가 있는 자의 문전에 있는 한 사람은 갑옷 모양의 옷을 입고 칼을 차고 종일토록 꼿꼿이 서서 출입하는 사람을 제지하였으며, 급수선(汲水船) 4척을 항상 좌우에 매달아 놓고 필요할 때에는 물에 띄워 놓았습니다. 전(前)·중(中)·후(後)의 범죽(帆竹)은 각각 3층을 이루고 있고 흰 삼승범(三升帆)도 3층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사용하는 그릇은 화기(畵器)이고 동이[樽]와 병(甁)은 유리였으며 숟가락은 은(銀)으로 만들었고, 배 안에 실은 병기(兵器)는 환도(環刀) 30자루, 총 35자루, 창 24자루, 대화포(大火砲) 8좌(座)이었습니다.

 

또 배에 타고 있는 사람은 총 67인이었는데, 선주(船主)는 4품(品) 자작(子爵) 호하미(胡夏米) 이고, 6품 거인(擧人)은 수생갑리(隨生甲利) 출해리사(出海李士) 이며, 제1과장(第一夥長)은 파록(波菉)이고, 제2과장은 심손(心遜) 이고, 제3과장은 약한(若翰) 이고, 화사(畵士)는 제문(弟文) 이며, 사자(寫字)는 노도고(老濤高) 이고, 시종자(侍從者)는 미사필도로(米士必都盧) 이며, 과계(夥計)는 벽다라마(辟多羅馬) · 행림이(行林爾) · 임홍파(林紅把) · 가파지(加巴地) 이고, 수수(水手)는 가타(嘉他) · 랍니(拉尼) · 야만(耶熳) · 주한(周翰) · 명하(明夏) 및 마흥(馬興) 6인이며, 진주(陳舟)에 10인, 손해(遜海)에 20인이고, 주자(廚子)는 모의(慕義) 와 무리(無理) 이며. 지범(止帆)은 오장만(吳長萬) 이요, 근반(跟班) 시오(施五) · 시만(施慢) · 시난(施難) · 시환(施環) · 시섬(施譫) · 시니(施尼) · 시팔(施八) 이었습니다.

 

용모(容貌)는 더러는 분(粉)을 발라 놓는 것처럼 희기도 하고 더러는 먹물을 들인 것처럼 검기도 하였으며, 혹자는 머리를 박박 깎기도 하였고 혹자는 백회(百會) 이전까지는 깎고 정상(頂上)에서 조그만 머리카락 한 가닥을 따서 드리운 자도 있었으며, 입고 있는 의복은 혹은 양포(洋布)를 혹은 성성전(猩猩氈)을 혹은 3승(升)의 각색 비단을 입고 있었는데 웃도리는 혹 두루마기 같은 것을 입기도 하였으며 혹 소매가 좁은 모양을 입기도 하고 혹 붉은 비단으로 띠를 두르기도 하고, 적삼은 단령(團領)을 우임(右袵)5753) 하고 옷섶이 맞닿은 여러 곳에 금단추(金團錘)를 달았으며 소매는 좁기도 하고 넓기도 하였는데 작위(爵位)가 있는 사람이 입는 문단(紋緞)은 빛깔이 선명하였습니다. 머리에 쓴 것은 호하미(胡夏米) 는 푸른 비단으로 족두리처럼 만들었는데 앞쪽은 흑각(黑角)으로 장식하였고, 그 외의 사람은 붉은 전(氈)이나 흑삼승(黑三升)으로 더러는 감투 모양으로 더러는 두엄달이(頭掩達伊) 모양으로 만들었고 혹 풀[草]로 전골냄비 모양으로 엮기도 하였습니다. 버선[襪子]은 흰 비단으로 만들기도 하고 백삼승(白三升)으로 만들기도 하였으나 등에 꿰맨 흔적이 없었고, 신[鞋]은 검은 가죽으로 만들었는데 모양은 발막(發莫)5754) 과 같았습니다.

 

배에 실은 물품은 파리기(玻璃器) 5백 개, 초(硝) 1천 담(担), 화석(火石) 20담, 화포(花布) 50필, 도자(刀子) 1백 개, 전자(剪子) 1백 개, 납촉(蠟燭) 20담, 등대(燈臺) 30개, 등롱(燈籠) 40개, 뉴(鈕) 1만여 개, 요도(腰刀) 60개인데, 아울러서 값으로 따지면 은화(銀貨) 8만 냥(兩)이라 하였습니다.

 

나라의 풍속은 대대로 야소교(耶蘇敎)를 신봉해 왔으며, 중국 과의 교역은 유래(由來)가 2백 년이나 되었는데 청국(淸國) 과 크기가 같고 권세가 비등하였으므로 조공(朝貢)도 바치지 않았고 그 나라에서 북경 에 가도 계하(階下)에서 머리를 조아리지 않는다 하였으며, 대청 황제(大淸皇帝)는 먼 나라 사람을 너그럽게 대해 주려 하였으나 요사이는 관리들이 황제의 뜻을 잘 받들지 않으므로 황은(皇恩)이 외국인에게는 미치지 못하고 있으며 또 외국 상인은 관리의 횡포로 인하여 많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교역하고 있는 나라는 우라파국(友羅巴國) · 법란서국(法蘭西國) · 아임민랍국(阿壬民拉國) · 자이마미국(者耳馬尾國) · 대여송국(大呂宋國) · 파이도사국(波耳都斯國) · 아비리가국(亞非利加國) · 식력국(寔力國) · 영정도국(伶仃都國) · 대청국(大淸國) 이며, 교린(交隣)하는 나라는 아라사국(我羅斯國) · 법란치국(法蘭治國) · 하란국(荷蘭國) · 파려사국(波呂斯國) 이라 하고, 영국(英國) 의 지방은 구라파(歐羅巴) 에 있는데 사람을 귀히 여기고 있으며, 지방이 또 아미리가(亞未利加) 에 있는데 그 역시 크고 좋은 땅이고, 또 서흔경(西忻慶) 에도 있어 섬들이 많으며, 아비리가(亞非利加) 의 극남단(極南端)에 있는 호망(好望)의 갑(甲)은 수위(垂圍) 의 속지(屬地)이고, 또 태평양의 남쪽 바다에도 영국 에 소속된 허다한 미개(未開)한 지방이 있으며, 그 끝은 아서아주(亞西亞州) 에 있는데 섬들이 많고, 또 흔도사단(忻都斯担) · 고위(古圍) 각 지방도 모두 영국 의 판도(版圖)에 들어왔다고 하였습니다. 최근에 중국 에서 영국 으로 소속된 미개한 지방으로는 익능부(榏能埠) 마지반부(馬地班埠) 마랍가부(馬拉加埠) · 선가파부두(先嘉陂埠頭) 라 하였습니다.

 

그들은 ‘금년 2월 20일 서남풍을 만나 이곳에 와서 국왕의 명으로 문서와 예물을 귀국의 천세 계하(千歲階下)에 올리고 비답이 내리기를 기다리기로 하였으며 공무역(公貿易)을 체결하여 양포(洋布)·대니(大呢)·우모초(羽毛綃)·유리기(琉璃器)·시진표(時辰表) 등의 물건으로 귀국의 금·은·동과 대황(大黃) 등의 약재(藥材)를 사고 싶다’고 하였는데, 이른바 바칠 예물은 대니(大呢) 홍색 1필, 청색 1필, 흑색 1필, 포도색 1필과 우모(羽毛) 홍색 1필, 청색 1필, 포도색 1필, 종려색(棕櫚色) 1필, 황색 1필, 양포(洋布) 14필, 천리경(千里鏡) 2개, 유리기 6건(件), 화금뉴(花金紐) 6배(排)와 본국의 도리서(道理書) 26종이라 하였습니다.

 

또 7월 12일에 모양이 이상한 작은 배 한 척이 서산(瑞山) 의 간월도(看月島) 앞 바다로부터 태안(泰安) 의 주사창리(舟師倉里) 앞 포구(浦口)에 와서 이 마을 백성들을 향하여 지껄이듯 말을 하면서 물가에 책자(冊子)를 던지고는 바로 배를 돌려 가버렸는데, 던진 책자는 도합 4권 중에서 2권은 갑(匣)까지 합하여 각각 7장이고 또 한 권은 갑까지 합하여 12장이었으며 또 한 권은 갑도 없이 겨우 4장뿐이었다 하기에, 고대도(古代島) 의 문정관(問情官)이 이 일로 저들 배에 다시 물으니, 답하기를, ‘금월 12일 묘시(卯時)에 종선(從船)을 타고 북쪽으로 갔다가 바다 가운데에서 밤을 새우고 13일 미명(未明)에 돌아왔는데 같이 간 사람은 7인이고 책자 4권을 주었으나 받은 사람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또 저들이 식량·반찬·채소·닭·돼지 등의 물목 단자(物目單子) 한 장을 써서 내면서 요청하였기 때문에, 소 2두, 돼지 4구(口), 닭 80척(隻), 절인 물고기 4담(担), 갖가지 채소 20근(斤), 생강(生薑) 20근, 파부리 20근, 마늘뿌리 20근, 고추 10근, 백지(白紙) 50권, 곡물 4담(担), 맥면(麥麵) 1담, 밀당(蜜糖) 50근, 술 1백 근, 입담배 50근을 들여보내 주었습니다.

 

저들이 주문(奏文) 1봉(封)과 예물 3봉을 전상(轉上)하기를 간청하였으나 굳이 물리치고 받지 아니하니, 저들이 마침내 물가에 던져버리고 또 작은 책자 3권과 예물의 물명 도록(物名都錄) 2건(件)을 주었다고 하기에, 서울에서 내려온 별정 역관(別定譯官) 오계순(吳繼淳) 이 달려가서 문정(問情)하였는데, 그의 수본(手本)에 의하면 문서와 예물을 저들이 끝내 되돌려 받지 않으려 하여 여러 날을 서로 실랑이를 하다가 17일 유시(酉時)에 이르러 조수(潮水)가 물러가기 시작하자 저들이 일제히 떠들면서 우리 배와 매 놓은 밧줄을 잘라 버린 뒤에 닻을 올리고 돛을 달고 서남쪽을 향하여 곧장 가버려 황급히 쫓아갔으나 저들 배는 빠르고 우리 배는 느리어 추급(追及)하지 못하고 문서와 예물은 결국 돌려줄 수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비국(備局)에서 아뢰기를,

 

“이 배는 필시 바다 가운데에 있는 나라들의 행상(行商)하는 배일텐데, 우연히 우리 나라 지경에 이르러 주문(奏文)과 예물(禮物)을 가지고 교역을 시도해보려 하다가 계획이 이루어지지 않자 저들도 물러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나, 다만 그 주문과 예물을 그대로 두고 간 것은 자못 의아롭습니다. 먼 곳에서 온 사람들의 속셈을 비록 헤아리기는 어려우나 우리의 처리에 있어서는 의당 신중히 해야 하겠으므로, 문정관(問情官)과 역관 등으로 하여금 일일이 수량을 확인하여 궤(櫃)에 봉해 두게 하고 우리들에게 준 책자를 빠짐없이 모아 함께 봉(封)하여 본주(本州)의 관고(官庫)에 보관하게 하여야 하겠습니다. 공충 수사(公忠水使) 이재형(李載亨), 우후(虞候) 김형수(金瑩綬), 지방관 홍주 목사(洪州牧使) 이민회(李敏會) 가 문정할 때에 거행이 지연되고 처리가 전착(顚錯)된 죄는 묻지 않을 수 없으니, 청컨대 도신(道臣)이 논감(論勘)한 대로 파직의 율로 시행하소서.”

하니, 모두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이번의 영길리국 은 비록 대국(大國)에 조공(朝貢)을 바치는 열에 있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들이 바친 책자로 보면 민월(閩越) 과 광주(廣州) 등지로 왕래하는 상선(商船)이 1년이면 6, 70척에 밑돌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이번에 우리나라에 와서 정박한 사실이 혹 대국에 전해질 염려도 없지 않으니 우리나라에서 먼저 발설(發說)하여 후환을 막지 않을 수 없습니다. 괴원(槐院)5755) 으로 하여금 사실을 매거(枚擧)하여 자문(咨文)을 짓게 하여, 형편에 따라 예부(禮部)에 들여보내야 하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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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종24대 임금 (1834-1849)

憲宗 12卷, 11年(1845 乙巳 / 청 도광(道光) 25年) 6月 29日(己未) 2번째기사

 

영국 배가 나타나 녹명지와 여러 나라 지도·종려선을 던지고 가다

○是月, 異樣船, 出沒往來於湖南 興陽 及 濟州 海中, 自稱 大英國 船, 所到島嶼上, 輒豎白小旗, 以測水繩量海中淺深, 築石塗灰, 以標其方位, 結三株木, 置鏡板于其上, 羅拜行祭, 濟州 譯學通事馳往問情, 則以所謂錄名紙及諸國地圖棕櫚扇二柄投之, 遂張帆向東北去。

 

이달에 이양선(異樣船)이 호남(湖南) 흥양(興陽) 과 제주(濟州) 의 바다 가운데에 출몰 왕래하며 스스로 대영국(大英國) 의 배라 하면서 이르는 섬마다 곧 희고 작은 기를 세우고 물을 재는 줄로 바다의 깊이를 재며 돌을 쌓고 회를 칠하여 그 방위(方位)를 표하고 세 그루의 나무를 묶어 그 위에 경판(鏡板)을 놓고 벌여 서서 절하고 제사를 지냈는데, 역학 통사(譯學通事)가 달려가서 사정을 물으니, 녹명지(錄名紙)라는 것과 여러 나라의 지도(地圖)와 종려선(棕櫚扇) 두 자루를 던지고는 드디어 돛을 펴고 동북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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憲宗 12卷, 11年(1845 乙巳 / 청 도광(道光) 25年) 9月 15日(癸酉) 1번째기사


10월 안으로 선비를 다 뽑도록 하고, 영국 배에 관해 동래 왜관에 서계를 보내고 동무에 전보하도록 하다

 

○癸酉/上御 熙政堂 , 引見大臣備局堂上。 左議政 金道喜 啓言: “陞庠取士, 限以十月, 卽古規也。 雖不一遵此例, 每以春秋暇日, 間間設行, 不待深冬而告訖, 所以程其課而遊於藝, 使不至奔走廢業, 猶不失古意。 近年以來, 春夏秋三節, 不設一抄, 輒於窮冬隆冱, 陸續開場, 至或臨歲末, 未滿抄而草草磨勘。 揆以試事, 已極艱窘, 而使諸生之赴擧者, 抛棄三冬, 不讀一字, 實非勸課之本意。 請令政院, 另飭泮長, 使之依古規, 以十月內畢抄。” 從之。 又啓言: “向以 英 舶一款, 已有咨報禮部之仰請者。 而 日本 , 自講和以後, 凡有邊情所關, 互相通報, 至於異樣船蹤跡叵測者, 則尤加嚴防, 非但邊虞之同恤, 或慮邪法之播傳, 屢以此書契, 往復, 載在 《同文彙考》 矣。 今番洋船之出沒閃忽, 雖不得其要領, 而其在交隣以信之義, 似當據實相報, 且彼若聞知, 而責我以不報, 則難於爲答, 倘或厥船, 轉到彼境, 自彼先報, 則在我爲慊。 臣意則令禮曹, 詳具異樣船來往形止, 另致書契於萊館, 仍令轉報 東武 , 以示警邊防修前約之意。 恐好矣。” 從之。

 

임금이 희정당(熙政堂) 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좌의정 김도희(金道喜) 가 아뢰기를,

 

“승상(陞庠)에서 선비를 뽑는 것은 10월까지로 한정하니, 곧 고규(古規)인 것입니다. 한결같이 이 규례를 따르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매번 봄·가을의 한가한 때에 간간이 설행(設行)하고 한겨울이 되기 전에 끝내는 것은, 과업을 나누어 학예를 익혀서 분주히 학업을 폐기하게 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므로 오히려 고규의 의의를 잃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근년 이래로 봄·여름·가을에는 한번도 뽑지 않다가 문득 한겨울의 한추위에 잇달아 개장(開場)하고 혹 연말에 닥치면 뽑는 수에 차지 않아도 허둥지둥 마감합니다. 시사(試事)로 헤아려 보더라도 이미 지극히 군색한데 부거(赴擧)하는 유생(儒生)이 포기하고 삼동(三冬)에 한 자도 읽지 않게 하니, 실로 권과(勸課)하는 본의에 어긋납니다. 정원(政院)으로 하여금 각별히 반장(泮長)에게 신칙(申飭)하여 고규에 따라 10월 안으로 다 뽑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접때 영국(英國) 배에 관한 일 때문에 이미 예부(禮部)에 자보(咨報)할 것을 우러러 청한 바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본(日本) 은 강화(講和)한 이래 무릇 변정(邊情)에 관계되는 것이 있으면 서로 통보하고 종적을 헤아릴 수 없는 이양선(異樣船)일 경우 더욱더 엄히 막아 변방의 걱정을 함께 돌볼 뿐더러 혹 사법(邪法)이 전파될세라 염려하여 여러 번 이 때문에 서계(書契)가 왕복하였으니, 《동문휘고(同文彙考)》 에 실려 있습니다. 이번에 양선(洋船)이 순식간에 출몰한 것은 비록 그 요령은 알지 못하나 신의로 교린(交隣)하는 의리로서는 사실에 의거하여 서로 통보해야 할 듯합니다. 또 그들이 들어서 알고 통보하지 않았다고 우리에게 책망한다면 대답하기 어려울 것이고, 혹 그 배가 저들의 지경으로 옮겨 가서 저들이 먼저 통보한다면 우리로서는 찐덥지 않을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예조(禮曹)로 하여금 이양선이 왕래한 상황을 상세히 갖추어 동래 왜관(東萊倭館)에 서계를 보내고 동무(東武) 696) 에 전보(轉報)하게 하여 변방(邊防)을 경보하고 전약(前約)을 이행하는 뜻을 보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조선왕조실록 이외 자료

1840 헌종6년 12월 영국선 2척, 제주도에서 소 등 가축을 약탈해 감.

1845 헌종11년 6월 영국군함 사마랑호(Samarang, 함장 Edward Belcher) 무단으로 제주도와 전라도 서남해안을 측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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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 25대 임금(1849-1863)

조선왕조실록에 철종대에 영국왕래 자료가 없다.

하지만 이외 자료에는

1855 철종6년 12월 영국 함선 호네트호가 독도(호네트섬이라 명명)를 측량. 영국 함선 실비아호가 부산에 옴. 프랑스 함선 비르지니호가 동해안을 측량함.

1859 철종10년 5월 영국 선박이 동래에 나타남. 12월 영국 선박 2척이 동래에 나타남. 

1860 철종11년 3월 영국 선박이 동래에 나타남. 4월 영국 선박이 영암 추자도에서 난파, 조운선으로 상해로 돌려보냄.

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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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26대 임금(1863-

高宗 2卷, 2年(1865 乙丑 / 청 동치(同治) 4年) 8月 20日(壬子) 5번째기사


황해 감사 홍순목이 청국과 영국 사람이 이단책 16권을 자라리 부근의 포구에 던지고 갔던 것을 보고하다


黃海 監司 洪淳穆 以“水使 尹錫九 馳報, ‘ 淸 船一隻, 來到于 紫羅里 近浦, 船中人九名, 俱是 淸 人。 其中一人, 身長五尺, 紫面靑眼, 鬚髮細捲, 腰佩短銃, 手執鐵椎, 稱云 英吉利國 人。 一塊紙束, 擲下沙場, 仍向南海。 欲執無柰, 欲問未遑, 故所投紙塊, 堅封上送’云矣。 異船之若是閃忽, 聞極驚駭。 形止探察次, 馳送臣營軍官矣, 回告內, ‘船隻無跡可尋, 故各浦另加瞭望之意嚴飭。 而紙塊段, 異端書十六卷、曆書一卷, 姑爲留置, 待回關擧行’爲辭矣。 今此異船出沒近洋, 瞭望追捕之意, 申飭該水使。 冊子, 旣是異國邪書, 則封上與燒火, 請令廟堂稟處”啓。 敎曰: “異船之過境, 雖因去來閃忽, 未及詳探, 事係邊情, 殊涉驚駭。 瞭望之節, 另加操飭。 所留冊子, 亦使封留水營。”


황해 감사(黃海監司) 홍순목(洪淳穆) 이, ‘수사(水使) 윤석구(尹錫九) 가 급보하기를, 「 자라리(紫羅里) 근방의 포구(浦口)에 청국(淸國) 배 1척(隻)이 들어왔는데 배 안의 사람 9명(名)은 모두 청국 사람입니다. 그 중 1명은 키가 5척(尺)이고 얼굴은 자줏빛이고 눈은 푸른빛이며 수염과 머리털은 온통 곱슬곱슬하고 허리에는 짧은 총을 차고 손에는 철퇴를 들었는데 영국(英國) 사람이라고 칭하면서 종이 한 뭉치를 모래펄에 던져놓고는 남쪽 바다로 향했습니다. 붙잡자니 어쩔 도리가 없고 물어보려고 하였으나 겨를이 없어, 던진 종이뭉치만 단단히 봉해서 올려 보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상한 배가 이렇게 갑자기 나타난 것은 듣기에도 몹시 놀랍기에 종적을 탐지하기 위해 신의 감영(監營) 군관(軍官)을 급히 보냈더니, 회고(回告)하기를, 「그 배의 종적을 찾을 수 없어서 각 포구에 특별히 망을 잘 보도록 엄하게 신칙하였습니다. 종이뭉치는 이단서(異端書) 16권과 역서(曆書) 1권인데 일단 그대로 놔두고 회관(回關)을 기다려서 처리하려고 합니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번과 같이 이상한 배가 근해에 출몰하면 망을 잘 보고 있다가 추격하여 붙잡으란 뜻으로 해당 수사(水使)에게 신칙했습니다. 서적은 외국의 요사스러운 책이니 봉하여 올릴지 불살라 버릴지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하게 하소서.’라고 아뢰니, 전교하기를,

 

“우리의 국경을 넘어온 이상한 배가 비록 훌쩍 왔다가 훌쩍 가버려 미처 상세히 탐지하지 못하였으나 변방의 실정에 관계되는 일로서 매우 놀랍다. 잘 보도록 각별히 조칙(操飭)할 것이며 놔두고 간책도 봉한 채로 수영(水營)에 보관해 두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