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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여행

한부울 2009. 2. 22. 01:40
 

백범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여행

[연합뉴스]2009/01/22 09:24 송고


저장성에는 백범 김구를 위시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자취가 곳곳에 배어 있다. 백범의 주도로 매헌 윤봉길 의사가 감행한 상하이 홍커우 공원 폭탄 투척 이후 일제는 임시정부 요인들을 붙잡기 위해 마수를 뻗쳐왔다. 당시 일제의 추적을 피해 자싱과 항저우로 피신한 임시정부 요인들이 머물던 거처에는 현재 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중국인들의 도움 속에서 임시정부 지켜내


매헌의 홍커우 공원 의거는 전 세계에 백범과 임시정부의 존재를 각인시킨 사건이었다. 1932년 초 상하이를 침공한 일제는 4월 29일 일왕 생일에 맞춰 홍커우 공원에서 승전 기념 행사를 거행했다. 이날 한인애국단원인 윤봉길 의사가 백범의 지휘로 식장에 폭탄을 투척해 시라카와 대장과 가와바타 거류민단장 등을 쓰러트렸다. 의거 직후 백범은 상하이의 여러 신문에 자신이 이 거사를 계획했다고 밝혀 항일 투쟁 의지를 만방에 알렸다. 일제가 백범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된 것은 당연지사였다. 막대한 현상금이 내걸렸고 수많은 밀정과 경찰들이 백범을 뒤쫓기 시작했다. 백범은 포위망이 좁혀오자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를 떠나 자싱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때 백범을 도와준 이가 상하이 항일구원회 추푸청(初輔成) 회장이었다.

 

 

백범을 지켜주기 위한 추푸청의 헌신은 자싱 매만가에 조성된 '추푸청 역사자료 진열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신해혁명 원로이자 저장성 정부 주석을 지낸 추푸청은 자신은 물론 가족의 위험을 무릅쓰고 백범과 임시정부 요인들을 상하이에서 자싱으로 긴급히 피난할 수 있도록 도왔다. 백범이 장진구(張振球)라는 가명을 쓰며 숨어지냈던 매만가 76호 가옥도 추푸청의 양자인 천통성(陳桐生)의 집이었다.


정자식 2층 건물인 매만가 76호 가옥은 현재 '김구 피난처'로 지정돼 있다. 백범은 2층 침실을 사용했는데 남호 선착장으로 이어진 비밀 통로가 설치돼 있어 경찰이 들이닥칠 경우에도 신속하게 탈출할 수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침실 창문을 통해 밖을 내려다보면 쪽배 한 척이 묶여 있는 게 보인다. 저장성 인민정부는 2005년 '김구 피난처'와 임시정부 요인들이 머물던 매만가 일휘교 17호를 성급 문물보호단위(文物保護單位, 한국의 사적에 해당)로 지정해 관리해오고 있다.


중국인들의 조력에도 불구하고 백범은 1933년 여름, 자싱 동문에서 군관의 검문에 신분이 탄로 나 보안대 본부로 끌려가 심문을 받았다. 이 사실을 접한 추푸청은 즉시 아들 추펑장을 보내 백범이 보석으로 풀려나도록 했다. 이후 백범이 혼자 다니는 것보다 여자와 동반하는 게 안전하다고 판단해 처녀 뱃사공 주아이바오(朱愛寶)를 옆에 붙여 중국인 부부처럼 보이게 했다. 백범은 1937년 난징(南京)을 거쳐 창사(長沙)로 이동하면서 주아이바오를 자싱으로 돌려보내는데, 당시 정황을 백범일지에 남겼다.


「두고두고 후회되는 것은 그녀에게 여비로 겨우 100위안을 준 일이다. 그녀는 근 5년 동안 나를 광둥 사람인 줄 알고 섬겨왔고 나를 보살펴 준 공로가 적지 않았다. 다시 만날 기약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에 노자 외에 돈을 넉넉하게 주지 못하였는데 참으로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백범의 자취는 자싱 남쪽 하이옌(海鹽)의 남북호(南北湖)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대숲이 울창한 호숫가 언덕에 자리한 자이칭(裁靑) 별장이다. 추푸청의 사돈집에서 이용하던 여름 별채로 백범은 1932년 7월부터 약 반년 동안 일제의 추적을 피해 이곳에서 지내며 책을 읽고 글을 썼다. 또한 저장성 일대에서 활동하던 임시정부 요인들을 만나 정세를 논의하고 업무를 지도했다. 정미하고 우아한 건축 양식의 자이칭 별장은 현재 매만가 76호처럼 '김구 피난처'로 불린다.


임시정부 역경의 발자취는 항저우에도 남아 있다. 현재 창성로(長生路) 55호에는 임시정부 항저우구지기념관(杭州舊址紀念館)이 조성돼 있다. 항저우 시정부가 2002년 옛 임시정부 요인 및 가족들의 주거지를 중심으로 복원작업을 벌여 독립운동 사료전시실과 영상물 상영실로 꾸몄다. 임시정부는 1930년대 중국인들의 도움으로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가며 독립운동 세력을 정비할 수 있었다.

 

 

사진/이진욱 기자 글/장성배 기자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