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제클리크 천불동(柏孜克里克 千佛洞, Bezeklik Grottos)
http://blog.daum.net/han0114/17046075
한락연의 고향이 지금의 길림성 용정으로 보면 안된다.
적어도 1898년에는 만주내 길림성 용정은 키질 석굴과 가까운 내몽고지역이다.
그 이후 일제에 의하여 만주가 대륙동북삼성으로 이동되었다.
************************************
한락연과 키질 석굴
조선족출신 중 혁명예술가 키질·둔황 벽화에 숨결 묻다
▲ 한락연이 그린 키질 석굴의 불교 벽화 모사도. 설법하는 보살상과 기악비천상을 그렸다.
‘그는 피카소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고 초현실주의적이었다… 또한, 그는 예술사학자이자 탐험가로서 쿠차 천불동에서 당나라 초기의 투시화와 인체해부도를 발견했다. 그의 성은 한씨, 이름은 락연. 이름이 그 사람을 닮았고, 사람은 그의 예술을 닮았으며, 그의 예술은 그 곳, 그때를 발견했다. 그는 변경 동포로서, 변경 지역의 생활과 문화를 가장 사랑했다…’
20세기 초 중국의 저명 미술인 청청은 조선족 화가 한락연(1898~1947)이 그린 쿠차 실크로드 벽화의 모사도 전시를 보고 나서 이런 평문을 남겼다. 글 속의 변방동포는 화가 한락연이 조선족임을 암시하는 구절이었을 터다.
청청의 찬사처럼 화가 한락연은 우리에겐 낯설지만 중국 미술계에서 근대 양화의 대가, 실크로드 문화유산의 수호자로 미술사 책마다 언급되는 대가다. 중국 연변에서 태어나 중국 본토와 유럽을 누비며 화업을 닦았으며 40년대엔 서역 문화유산을 조사하는 데 여생을 바쳤다. 연변 출신의 그가 무슨 까닭으로 정반대쪽 실크로드 문화유산의 지킴이가 되었던 것일까. 조만간 <한겨레>에 연재될 정수일 교수의 실크로드 답사 특집 팀이 신장성 쿠차의 벽화 유적을 답사하던 길은 또한 20세기초 유일하게 서역을 누빈 한국인이던 한락연의 자취를 더듬는 길이기도 했다.
서역 음악의 본고장인 쿠차는 기원전후부터 실크로드 교역의 중심지였고, 당나라 때는 안서도호부가 설치되어 고선지 장군이 서역 정벌 본거지를 두었던 곳이다. 한락연의 숨결 묻은 키질 석굴은 쿠차 시가에서 70여 km 떨어진 산악 계곡 속에 있다. 쿠차 시가에서 출발해 텐산 산맥의 지맥을 보면서 협곡의 지세를 물결치듯 타넘는 이차선 가도를 가로질러 1시간 여를 가면 석굴 공원이 나타난다. 그랜드캐년 같은 웅장한 협곡과 소금강이 흐르는 계곡을 지나는 길은 서유기의 모험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환상적이다. 이 지역 출신으로 불경을 번역한 고승 구마라지바의 동상이 서있는 공원 들머리를 지나 석굴로 오르니 감각적 색조에 입체감 뛰어난 천불, 보살상 등의 환상적 이미지들이 눈을 때린다. 한락연의 자취는 그가 발견한 10굴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굴 벽에서 이목구비 뚜렷한 그의 액자 초상과 조사 때 와서 손수 남긴 글들을 볼 수 있다.
“1946년 6월 5일에 도착하여 벽화를 보고 아름다움을 느꼈다. 거기에는 고상한 예술가치가 있고 각지의 어느 동굴에서도 없는 것이 있었다. 애석하게도 대부분 벽화는 외국의 고고학자들이 떼어갔다. 이것은 문화상의 커다란 손실이다… 고대 문화를 발견하고 빛내기 위해 참관자 여러분은 특히 사랑하고 보호해주기 바란다.”
한락연의 경력은 파란만장이란 말에 걸맞다. 44년 깐수성으로 거처를 옮겨 키질과 둔황 벽화를 조사하기 전까지 그는 혁명과 예술을 병행한 지사였다. 3·1운동의 영향으로 항일운동에 뛰어들어 23년 공산당에 입당한 뒤 상하이, 우한 등에서 지하조직 활동을 했으며 29년 프랑스로 유학가서 그곳의 신인상파와 다다 화풍에 영향 받으며 유럽 곳곳의 미술유산을 섭렵했다. 귀국 뒤 국공합작을 도우며 선전화 등을 그리다 3년간 국민당 정부에 의해 투옥됐으며 43년 출옥 뒤 택한 길이 실크로드 유산의 연구·모사 작업이었다. 비행기 사고로 작고하는 47년 7월까지 수차례 키질과 둔황 벽화를 찾아 모사 및 발굴 연구에 매달리는데, 키질 벽화를 처음 모사했을 뿐 아니라 다른 실크로드 유적과의 차이점, 유산적 가치에 대한 논문도 먼저 발표한다. 헬레니즘풍의 감각적 회화로 인정받는 키질 석굴의 미술사적 가치를 처음 발견해내고 석굴 개수를 정리하고 번호표를 매기는 작업을 한 것은 바로 그의 업적이다. 90년대 처음 국내에 그를 소개한 권영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출옥 뒤 한락연이 서역을 향한 것은 예술을 필수품처럼 중시하되 소재주의·상업주의에 영합하는 것을 반대한 역사의식의 소산으로 봐야한다”고 말한다.
지금 그의 자취 어린 키질 석굴을 찾는 한국인들은 별로 없다. 관객 모집이 안돼 실크로드 투어에서 외면당하고, 어쩌다 와도 한락연의 자취를 지나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게 현지인들의 말이다. 정수일 교수는 “추념 비석이라도 고국에서 세워야 할 것”이라고 했다. 같이 벽화를 모사한 동료 창수홍의 전시 때 남긴 고인의 글이 여운으로 남는다. “…문명은 노력하지 않고 거저 얻은 것이 아니라 문화 전사들의 비통한 전투를 거쳐 얻은 축적이다. 이는 공유의 재산인 것이다…”
쿠차/노형석 기자
**************************************************
한락연(1898―1947)
중국 서쪽에 있는 쿠차에 대한 궁금증을 갖고 알아보던 중에, 나는 뜻밖의 한 인물을 만났다. 물론 쿠차를 처음 알아보려고 했던 것은 고구려 유민 고선지 장군에 대한 흔적을 찾고자 함이었다. 그런데 고구려 유민 있었던 고선지 장군보다 더 가까운 거리에 있는 나의 형제를 만나게 된 것이다.
참으로 기적 같은 일이다.
기적이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알았는데, 나만 몰랐던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부끄러운 일이라고 해야 옳다.
1898 중국 길림성 용정에서 출생
1914 용정전화국의 화무원
1919 3.13용정항일투쟁 참가, 태극기를 직접 그려 나누어줌, 소련으로 감
1922 중국민주주의 혁명가 손중산 선생 방문, 그의 교시에 커다란 고무
1923 중국 공산당에 가입, 상해미술전문학교 2년간 수학
1929 프랑스 유학
1937 귀국 후 항일투쟁 계속, ‘동북항일구망총회’의 선전과 연락사업 참가
1940 보계 경비사령부에 체포, 수감
1943 출옥, 제자 황주와 함께 많은 풍경화와 풍속화를 그림. 개인전 수차례가 짐
1945 신강, 하서주랑, 돈황 등지로 감
1947 초 전람회, 7월에 전람회 고고발굴을 위해 란주로 가는 여객기를 타고 가는 도중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
한락연(1898―1947)은 저명한 조선족화가이며 고고학가, 혁명렬사이다. 일찍 상해미술전과학교를 졸업하고 구라파에 류학했다. 항전시기 중국에 돌아와 예술가의 신분으로 국만당고급장령들사이에서 통전공작을 하면서 항전승리와 대서북의 해방사업에 탁월한 공헌을 한 사람이다. 그는 서방회화예술을 따라배운 선구자이고 20세기전반기 민중에 접근한 유화가이며 중국에서 커즐석굴을 발견하고 연구한 첫사람이며 조선족 가운데서 처음으로 중국미술계에 진출한 첫 공산당원이다. 한락연은 세계반파쑈전사로 중국 전역은 물론 유럽과 아시아대륙을 넘나들면서 풍부한 예술유산과 고고학의 성과들을 남겼으며 이루다 헤아릴수 없는 예술정신을 후세에 남겼다. 그의 전기적 색채가 짙은 경력은 미술사학자들의 각별한 중시를 받았으며 중외문화교류사와 세계혁명사책에 영원히 기록될것이다.
력사적인 원인으로 한락연의 예술성과와 중국미술사에서의 지위는 아직도 진일보의 평가를 기다려야 한다. 지금까지 발견된 세간에 남은 200여점의 작품은 중국미술관과 그의 자녀들 그리고 기타 수장가들이 수장한 작품들이다. 이번 회화전에는 121점의 작품이 전시된다.
예술전 첫날 《한락연 및 그의 회화예술 학술연토회》가 열리는데 한락연과 그의 회화예술에 대해 한차례의 전면적인 회고를 하게 되고 또 그의 예술생애와 예술성과에 대해서 한차례의 총결과 연구를 진행하게 된다.
주) 연변조선자치주의 문법은 북한의 체계를 따르기에 우리 한국 문법과는 조금 다르다.
위의 글은 <백두넷>에 실린 한락연의 예술전에 대한 글이다.
다음 아래의 글은 역시 한락연에 대한 것으로, <길림신문>에서 발췌한 글이다.
한락연은 1898년 12월 8일에 룡정에서 태여났다.
한락연이 최초로 참가한 항일활동은 1919년 룡정에서 있은 《3 13》운동이다. 이 시기 그는 초기 고려공산당활동에 참가, 《3 13》 시위자들이 들었던 태극기 대부분이 한락연이 만든것이다. 1923년 상해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한락연은 이때로부터 반제국주의, 반봉건주의의 민족해방운동에 적극 뛰여들었다. 1923년말, 한락연은 상해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당의 파견을 받고 동북에 왔다. 그는 봉천(지금의 심양)에서 개인회화전시를 하는 한편 《향도》, 《중국청년》을 비롯한 진보적인 간행물과 맑스 레닌주의 서적들을 소자원, 염보항 등에게 제공해주었다.
1925년, 한락연은 할빈 보육중학교에서 미술교원으로 있으면서 지하공작을 했다. 그는 초도남, 조상지 , 왕광록 등과 함께 청년독서회를 조직하고 맑스 레닌주의를 선전하였다.
1929년 한락연은 서양회화예술을 배우기 위해 홀몸으로 프랑스에 갔다. 1934년 3월 1일, 부의가 황위에 오르고 위만주국을 건립한 소식에 접한 한락연은 프랑스 류학중인 동북학생들을 조직하여 《프랑스 중국 동북 4개성 동학선언》을 발표,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정책을 폭로하였다. 그후 한락연은 프랑스 대표로 유럽화교 조직인 전 세계화교구국련합회 제2차 대회에 참석, 후보집행위원으로 선출됐다.
1937년, 양호성장군이 프랑스 빠리방문을 마치고 귀국할 때 유럽 중국공산당은 프랑스와 독일에 체류중인 공산당원과 청년단중의 10여명 청년을 선정해 양호성장군과 함께 귀국하게 했는데 그가운데 한락연이 있었다. 프랑스에서 돌아온 한락연은 주은래의 동의를 거쳐 무한 동북항일구국총회 지도사업에 참가, 이럴즈음에 많은 조선혁명가들을 알게 되였다.
곽말약이 지도하는 제 3청 예술가연안방문단에 든 한락연은 1938년 11월 20일에 모택동의 접견을 받았다. 이 시기 그가 창작한 《노예살이를 원치 않은 인민들은 일떠나 일본제국주의를 소멸하자!》라는 거폭의 유화가 한구( 口) 세관청사에 걸렸고 《전민항전》 이란 유화는 황학루(黃 樓)에 걸려있었다.
1939년 3월, 국민정부 당정위원회가 설립되면서 한락연은 소장지도원으로 임명돼 위원회의 일을 했다. 위원회 과업은 주로 전지(戰地)의 각 당파 및 각 부대간의 관계를 조절하고 마찰을 제거했다.
한락연이 공산당원이었다거나 그가 민족자였거나 그런 사상적인 문제는 내게 있어서 그리 중요한 의미를 주진 못한다. 다만 그 격정의 시대에서 살아있던 예술가란 점이 내겐 무척 흥미로운 일이었다.
고국을 잃어버린 힘든 시기에 프랑스로 유학을 갔던 것도 흔한 일이 아니며, 쿠차의 키질석굴을 최초로 발견하여 그 중요성과 의미를 알아내고 복원의 중요성을 밝히며 주력하였다는 것도 신기한 일이었다. 중국의 동북쪽에 살았던 그가 서북쪽의 키질석굴을 알아본 일도 생각해보면 참으로 신비한 일이다.
쿠차는 서역 36국 중 최대의 나라였다.
7세기 당나라가 그곳에 안서도호부를 설치하여 서역경영의 중심기지로 삼았던 곳이다. 고구려 유민인 고선지 장군이 그곳에서 중국의 서역경영을 진두지휘한 역사적 사실은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키질석굴은 3세기부터 10세기까지 조성된 석굴로 쿠차에서 67㎞거리의 무자르트 강이 흐르는 절벽에 있다. 키질은 위구르 말로 '붉다'는 뜻이라고 한다. 키질석굴은 돈황의 막고굴, 용문석굴, 운강석굴과 함께 중국 4대 석굴로 꼽히는 곳이다.
석굴 입구에는 그곳 출신으로 불교전파에 공헌한 구마라습의 청동상이 있다.
그런데 용정(龍井) 출신의 미술가인 한락연이 어떻게 그렇게 먼 곳에 있는 키질 석굴을 찾아냈으며 그 의미를 밝혔는지 참 신기한 일이다. 미술가였던 한락연은 그의 미술을 통하여 적극적인 항일운동에 나서기도 했다.
그의 항일 투쟁 의지를 북돋우는 그림은 중국 공산당들도 모두 흠모하여 지금 우한(武漢)의 황학루에 걸리기도 했다고 한다.
우한에 있는 친구에게 물어봐서 확인해봐야겠다. 우한 하면 황학루가 떠올라 그저 시인 최호의 <황학루>를 찾으러 우한에 한 번 가봐야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생각지도 못한 덤으로 한락연을 만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하니 참으로 기분이 묘해진다.
아무튼 한락연이란 존재를 우연히 알게 된 것은 내게 있어서 매우 귀한 보물을 얻은 것이나 다름 없다. 하지만 그가 1947년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했다는 것은, 마치 영화 같은 엔딩 효과를 준다. 극적으로 살았던 사람은 죽을 때까지 왜그렇게 극적으로 죽어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덧붙여서...황학루
黃鶴樓 황학루- 崔顥 최호 -
昔人已乘黃鶴去 옛날의 한 선인이 누런 학을 타고 떠난 뒤
此地空餘黃鶴樓 지금 이 자리에는 황학루만 남았도다.
黃鶴一去不復返 한번 간 황학은 다시 오지 않고,
白雲千載空悠悠 흰 구름만 유유히 천 년을 기다리네.
晴川歷歷漢陽樹 맑은 강 청명하여 한양의 수목 푸르르고,
春草萋萋鸚鵡洲 앵무주의 방초들은 더욱 더 무성하다.
日暮鄕關何處是 해질 녘 고향 땅은 그 어디에나 있으리오?
煙波江上使人愁 강 위에 낀 안개 사람의 수심 부추긴다.
황학루에 올라가 시를 지으려 했던 그 유명한 이백이 그만 최호만한 시를 짓지 못하겠노라 하며 붓을 씻어버리고 왔다는 전설이 있다.
과연 그 이야기가 사실인지는 잘 모를 일이다. 하지만 시성인 이백을 들어 비유하곤 할 정도로 최호의 시가 명작이란 말은 맞는 것 같다. 황학루의 전설을 소재로 삼아 나그네의 심정을 잘 표현한 <황학루에 올라 登黃鶴樓>라는 시는 참으로 많은 사람의 입에 회자할만한 작품이다.
나도 빨리 황학루에 올라 최호만한 시를 읊진 못하더라도 이백처럼 붓이라도 씻고 내려오고 싶다. 혹시 아직까지 있다면 한락연의 그림까지 함께 감상할 횡재까지 누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올 겨울에는 우한으로 여행을 떠나야 할까 보다.
초원에서의 생활 ㅡ 한락연
10굴: 8굴 옆인데 조선인 화가 한약연(韓藥然)의 초상과 간단한 이력이 적혀있다. 그는 조선족으로서 일제 시기에 이곳 키질 석굴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일찍부터 연구와 벽화 묘사에 열중하였는데 비행기 사고로 죽었다고 한다.
한락연 작 ‘광명을 찾아가는 유목민’(1945년)
*******************
기괴한 소금계곡...사막의 옛왕국 쿠차
“왕궁의 장려함은 신의 거처와 같고, 외성은 장안성과 흡사하며 집들은 장려하다.” “군대가 대대적으로 집결된 곳이다. 절도 많고 승려도 많다.” 중국 역사책과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전하는 옛 쿠차국 풍경이다. 그런데 취재수첩에는 “미루나무가 하늘을 찌르는 황톳길을 지나고 있다. 거위, 오리, 양, 염소, 트럭, 당나귀 마차와 사람들이 먼지를 함께 마신다”라고 적혀 있다. 천산산맥과 타클라마칸사막 틈을 가로질러 닿은 쿠차의 인상은 그러했다.
한 뒤 그 유민의 후예 고선지는 이곳 안서도호부 절도사가 되어 서역을 호령했다. 그 도호부 성터 역시 모두 흙으로 변해 현지 가이드도 쉽게 찾을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극과 극은 통하는 법. 황량함이 극에 달하면 화려함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쇠락한 도시에서 깨달았다.
이른 아침, 간밤을 온수도 변변히 나오지 않는 호텔 방에서 보낸 사람들은 작은 버스를 타고 소금계곡(염수계곡)으로 향했다. 날은 우중충했고 추웠다. 사막에서 우리를 따라왔던 거대한 흙덩어리(토괴)들이 다시 도로 양편으로 솟았다. 깊게 주름이 패인 흙덩어리들은 모두 회색이다. 노루 한 마리가 봉우리 틈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세상에, 노루라니! 가이드는 노루도 있고 낙타는 더 많다고 했다. 척박한 환경에 적응해 그들은 사막의 짠 물을 마시고 날카로운 가시풀을 먹고 산다고 했다.
흙덩어리들이 점차 높아지고 톱니처럼 날카롭게 변해갔다. 노루에 놀란 사람들은 점점 기괴해져 가는 풍경을 스치며 다시 놀라기 시작했다. 버스가 멎었다. “소금계곡입니다. 30분 정차하겠습니다.” 사람들은 버스 밖으로 튕겨나갔다.
‘어안이 벙벙하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다. 이방인들이 입고 있는 때깔 고운 나들이옷을 빼면, 하늘까지 우중충한 그 아침, 세상 모든 것이 회색이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그 하늘을 찔러 피투성이로 만들려는 듯, 창처럼 날카롭고 상어 이빨처럼 무시무시한 예봉의 연속이었다. 예봉의 앞자락 뒤로 또 예봉들이 도열하고 그 뒤 안개는 또 다시 창과 이빨들이 득실거렸다. 거기에 강 바닥까지 물 대신 소금이 배어나와 하얗게 변해 있으니, 잿빛 가득한 그 풍경은 기기묘묘, 황당무계, 이해불능했고 별세상에 상륙한 사람들은 야단법석, 우왕좌왕, 좌충우돌 그 자체였다. 지구상에 요괴들의 소굴이 있다면 틀림없이 이곳이다. 황량함의 극단이 이렇게 전면적이고 충격적인 모습으로 변신한 것이다. 현장법사 역시 천축행 바쁜 걸음을 우회해 이곳을 완상했다고 했다. 가이드의 재촉에 사람들은 아쉬움을 삼키며 버스에 올랐고 버스는 키질석굴로 향했다. 요괴들은 우리들을 15㎞나 더 쫓아왔다.
키질석굴은 돈황석굴에 앞서 서기 4세기부터 조성된 불교 석굴이다. 하지만 이슬람세력과 20세기 초 서구 탐험대들이 1000년의 시차를 두고 파괴해 거의 껍데기만 남아 있다. 조금 남은 그리스와 간다라양식 벽화들은 서역 미술 연구에 중요한 자료다. 아, 그런데 어둠만 남은 그 석굴 속에서 ‘한락연’ 이름 석 자를 발견했을 때의 가슴 뭉클함이란!
화가 한락연(1898~1947). 길림성 용정 생. 조선족. 상해예술전문학교 및 파리 루브르예술학원 졸업. 30년대 귀국 후 서역 예술 조사작업에 몰두. 1947년 7월 30일 키질 석굴 조사 후 우루무치를 거쳐 집이 있는 난주로 돌아오다 비행기 사고로 사망.
석굴 한쪽 벽에는 그가 남긴 글귀와 그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그는 이곳에 작은 오두막을 짓고 동료들과 함께 석굴 조사를 수행했다. 석굴 연구소장은 “‘한락연’이 아니라 ‘한루오란’”이라고 정정했지만, 그런게 어딨나. 4000㎞를 달려와 대면한 그의 이름은 한루오란이 아니라 한·락·연이다. 하지만 사전허가가 없었기에 촬영은 금지됐다. 낙심해 있는 나에게 누군가가 다가와 허가를 내줬다. 동행했던 일본 와세다대학 실크로드조사연구소 소장 오카우치 교수가 협상을 대신해줬다고 했다. 그에게 감사한다. 1993년 북경에서 한락연 유작전이 열렸다.
한락연을 만났다는 뿌듯함을 안고 소금계곡을 돌아나왔다. 버스는 거위, 오리, 양, 염소, 트럭, 당나귀 마차와 사람들이 함께 먼지를 마시는 도시로 돌아가 청진사에 멎었다. 중국화된 이슬람사원이다. 맑은 눈망울의 아이들이 사원 앞에서 놀다가 이방인들을 반겼다. 골목에는 당나귀 마차가 지나고, 옆에는 위구르인들의 주식 ‘난’(납작한 밀빵) 만들기가 한창이다. 이방인에 둘러싸인 사람들은 까르륵 웃어댔다. 우리들도 따라 웃었다.
그들의 일상을 한참 바라보다가 사람들은 도심을 벗어나 사막 반대편으로 갔다. 또 하나의 옛 성터, 스바시 고성이다. 사람들은 폐허가 된 성터에서 그릇 파편을 찾아 헤매며 석양을 맞았다. 하루 종일 혼자서 사막을 지키던 양치기가 이방인을 반가이 맞이해 줬다. 그렇게 쿠차의 하늘이 저물었다. 자연에 대한, 문화에 대한, 그리고 역사와 치열한 삶에 대한 겸허를 가르쳐준 그 하늘.
조선일보 (박종인기자)
****************************
한락연의 생애
어디서나 당당한 조선인으로 살자
한낙연은 1929년 연말에 중국에서부터 힘겹게 들고 간 자신의 수채화 작품으로 개인전을 열 계획을 세웠다. 그러자 리옹에 도착한 이후로 미술의 길을 걷는다는 이유만으로 친해진 창수훙(常書鴻), 뤼쓰바이(呂斯百) 등 한낙연보다 먼저 프랑스에 와 있던 중국 유학생들이 만류했다. 특히 창수홍은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며 반대의 뜻을 내비쳤다.
“뜻은 좋지만 너무 성급한 것 아냐? 너도 알다시피 프랑스는 예술 수준이 중국보다 높은 나라야. 그것이 우리가 그림을 배우러 이곳까지 온 이유이기도 하고. 그런데….”
“말을 빙빙 돌리지 말고 속시원히 얘기해봐. 아직 내 그림이 개인전을 열 수준은 안 된단 말이지?”
그는 주위 사람들이 차마 꺼내지 못하고 입안에서 삼키고 있는 말을 대신 내뱉었다. 창수홍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들도 알다시피 나도 내 그림이 부족한 것은 알아. 그러기에 땡전 한 푼 없이 이곳까지 그림 공부를 하러 온 거고. 하지만 난 프랑스인이 아니야. 그러니 그림은 배우되 프랑스 화가와 똑같이 그릴 필요는 없지 않겠어?”
“네 생각이 뭔지는 알겠어. 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괜히 창피를 당하기만 할 텐데. 아직은 네가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이곳의 수준을 잘 모르는 것 같은데 리옹도 그림에서는 파리 못지않은 도시야.”
“충고는 고마워. 하지만 나는 매달 정부에서 돈이 나오는 너희들 관비생과는 처지가 달라. 나는 지금 빵을 사 먹을 돈과 이달치 월세로 낼 돈도 필요해. 당장 길거리로 쫓겨나야 할 판이야. 하지만 나를 동정할 생각은 마. 한족인 너희들과 달리 조선인인 나는 이미 중국에서부터 늘 이렇게 살며 그림을 그려왔어. 중요한 것은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안다는 거야.”
당시 중국 정부는 관비 유학생을 선진국으로 보냈다. 그들은 충분하진 않지만 학비를 중국정부로부터 보조받았기 때문에 고학생인 한낙연보다는 공부하기가 수월했다.
실크로드와의 만남
이 무렵 그는 오랜 세월 속에서 빛을 잃고 바스라져가는 둔황의 천불동(千佛洞) 벽화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바로 거기에 있음을 깨닫는다. 부처를 모신 1000여 개가 넘는 석굴이 있다고 해서 천불동이라 이름 붙여진 그곳에는 1900년 초부터 외국 학자들에 의해 발굴작업이 시작됐지만 발굴한 석굴보다는 발굴하지 못한 것이 더 많이 남아 있었다. 석굴 안에서 사람의 손길을 기다리며 어둠 속에 숨어 있을 벽화에 밝은 햇빛을 보게 해주는 것이 자신에게 부여된 또 다른 임무라고 생각했다.
그가 둔황의 천불동에 관한 이야기를 접한 것은 사실 그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프랑스에 머물 무렵 그는 도서관에서 펠리오가 발굴한 유물을 찍은 사진집을 보면서 언젠가 기회가 닿는다면 그곳으로 가서 자신의 눈으로 직접 벽화를 확인해보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중국으로 들어온 이후 바쁜 생활 때문에 잊고 지냈던 둔황의 천불동 벽화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 그곳임을 깨달았다. 그림은 그 다음에 그려도 늦지 않을 성싶었다. 또한 서양화풍을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선 중국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화풍을 익히는 것도 중요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때까지 서양의 것만 배우려 했지 정작 중요한 자신의 것을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그는 보따리를 챙겼다.
석굴 벽화 모사에 전력
그해가 가기 전인 늦가을 무렵 그는 시안에 있던 가족을 데리고 중국의 오지인 란저우로 이사한다. 그곳의 독특한 풍광을 화폭에 담으면서 그는 신장(新疆) 지구에 흩어져 있는 석굴 벽화를 탐사할 준비를 서두른다. 석굴 벽화?발굴하고 연구하는 것은 그가 그때까지 공부해온 미술 공부와는 다른 차원의 학문이었으므로 세심한 준비가 필요했다.
화가 본연의 역할에서 벗어나 고고학자로 새출발을 하려는 한낙연에게는 다른 사람이 갖지 못한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석굴 벽화를 원래 그대로 모사(模寫)하는 기술이었다. 그것은 단시간의 수련으로 이뤄질 수 없는 고도의 손재주를 필요로 했다. 따라서 화가로서 그가 갖고 있던 재능은 발굴탐사를 하는 데 큰 힘이 됐다. 발굴 준비를 하면서도 그는 붓을 놓지 않고 자신의 눈에 비친 중국 변방지구의 풍광과 사람들의 모습을 수채화로 남긴다.
한낙연의 명성이 중국에 널리 알려진 것은 키질(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에 걸친 사막지대)의 석굴 벽화를 재현한 모사화지만 화가로서 그의 탁월한 재능은 동시대의 풍광과 사람들의 삶을 수채화로 생생하게 그려낸 풍속화에서 빛을 발휘했다.
한편 1945년 신장과 둔황 등지로 그림을 그리러 떠났던 한낙연은 그곳의 경비책임을 맡은 허시(河西) 경비사령 타오즈웨와 사귀게 된다. 타오즈웨는 국민당 소속 장교였으나 부패한 국민당 정권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이내 마음속 이야기까지 터놓고 주고받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된다. 타오즈웨는 일제의 패망 후 국공내전이 한창이던 1949년 9월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중국공산당 쪽으로 귀순하는데, 그 배경에는 모르긴 해도 한낙연이 그에게 끼친 영향도 없지 않을 것이다.
한낙연이 란저우에 머무는 동안 길고 긴 항일전은 일본의 패망으로 끝났다. 하지만 승리의 기쁨은 잠시일 뿐, 드넓은 중국대륙은 다시 국공내전에 빠져들었다. 일제 패망과 함께 중국에서 활동하던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은 해방된 조국으로 귀국을 서둘렀다. 조국 광복이라는 그들의 1차적 목표가 달성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낙연은 그들과 달리 귀국 대열에 끼지 않고 계속 란저우에 머물렀다.
아마 귀국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둔황에 있는, 그 정확한 숫자조차 알 수 없는 석굴이 그의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이미 그때 제대로 관리되지 않은 채 방치된 석굴들을 하루빨리 발굴 복원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자칫 잘못하면 그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문화유산이 흐르는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낙엽처럼 바스러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국공내전의 와중에 오지에 있는 석굴 벽화의 발굴과 보존에 관심을 가질 책임 있는 중국정부 당국자는 없었다.
그때부터 한낙연은 모든 일을 제쳐두고 석굴 벽화의 발굴과 모사 작업에 매달린다. 석굴벽화 모사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해방이 된 지 몇 달이 지난 1945년 10월, 그는 그곳에서 반가운 사람을 만난다. 프랑스 리옹에서 처음 만나 그림에 대해 열띤 토론을 했던 화가 창수홍이었다.
알고 보면 창수홍도 한낙연 못지않게 둔황 석굴 벽화의 발굴과 보존에 인생을 건 사람이었다. 창수홍이 둔황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파리의 어느 서점에서 구한, 펠리오가 편집한 둔황 천불동에 관한 책이었다. 그는 프랑스로 유학 와서야 조국인 중국의 고대 미술이 지닌 아름다움을 알게 됐으며, 그것이 중국인도 아닌 외국인에 의해 알려지고 그런 문화유물들이 헐값에 외국으로 반출된 사실을 알고 분노와 슬픔을 한꺼번에 갖게 됐다. 그래서 1936년 귀국해 베이징예술전문학교에 자리를 잡으면서 둔황 유적을 발굴 보존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였으나 귀기울여주는 당국자는 별로 없었다. 그의 외침은 1942년 말 국민당 정부가 여론에 밀려 국립 둔황예술연구소를 세움으로써 달성될 수 있었다. 하지만 충칭에서 그곳까지 오는 길은 멀고도 멀었다.
창수홍과 의기투합
1943년 3월에야 그곳에 도착한 창수홍은 이후 줄곧 그곳을 떠나지 않고 둔황 천불동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창수홍을 만난 한낙연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자네가 어떻게 이곳에 있나? 십년 전 이미 파리미술전에 입상한 자네 정도의 실력이면 마음만 먹었다면 지금쯤 중앙화단에서 한자리 차지하고도 남았을 텐데….”
“그런데서 한자리 차지하고 있으면 뭘 하나. 그림이 대체 뭐야? 후손으로서 조상이 물려준 귀중한 그림마저 제대로 챙기지 못하면서 어떻게 진정한 화가라고 할 수 있나?”
“그렇긴 하지만 너무 뜻밖이라 나도 놀랐네.”
“물론 나도 자네 말대로 그곳에 남아 있고 싶은 생각이 없지는 않았네. 그곳에 있으면 그런대로 편안한 일상을 보장받을 수 있었을 테니까. 그러나 한번 생각해보게. 그림쟁이의 진정한 길은 무엇인가? 내가 왜 이곳에서 모래 섞인 밥을 먹고 있는지 알고 싶다고 했지?”
창수홍의 진지한 말투에 한낙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파리미술학교에 다니던 때야. 어느 날 일하던 식당에서 청소를 하고 학교로 돌아오다 우연히 근처 서점에 들렀는데 그곳에서 펠리오가 펴낸 둔황 천불동이라는 책을 발견했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저 막고굴에 관한 책인데 한편으로는 기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은근히 부아가 치밀더군. 왜 우리 중국의 귀중한 문화재를 그들이 마음대로 훔쳐가서….”
창수홍이 가슴 저 밑에서 차오르는 울분을 감추지 못하는지 말을 삼켰다. 한낙연도 그의 심정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역시 창수홍과 비슷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그런 울분과 분노가 아무도 이곳으로 가라고 등을 떼밀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두 사람을 이곳으로 불러왔는지도 모른다.
“그때 결심했지. 중국으로 돌아가서 내 능력이 닿는 한 둔황의 천불동은 내 손으로 지키겠다고.”
“자네한테 그런 일이 있었군. 난 내가 먼저라고 생각했는데 자네보다는 항상 한 발짝 늦네. 어쨌든 이렇게 만나서 정말 반가워.”
한낙연이 발굴 작업으로 거칠어진 창수홍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화가의 손이라기보다 막일꾼의 손이라고 해야 어울릴 정도였다.
“그보다 자네는, 잘은 모르지만, 그동안의 활동경력으로 보면 지금쯤 당의 높은 곳에서 조국의 운명을 책임지는 일에 매달려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모래먼지와 바람밖에 없는 이곳으로 왔나. 뭐 크게 잘못을 저지르고 귀양이라도 오기 전에는 이런 곳에 발을 내디딜 만큼 한가한 사람은 아닌 것으로 아네만….”
창수홍이 씩 웃으며 말했다. 파리에서부터 가깝게 지낸 창수홍은 한낙연이 어떤 사람인지 대충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한낙연은 그에게 중국으로 귀국한 이후 활동하다 국민당 정부에 체포돼 3년 가까운 감옥생활을 거쳐 주위의 도움으로 출옥한 사연과 자신에게 붙은 출옥조건을 설명해줬다.
“웃기는구먼. 차라리 그림을 그리지 말라 그러지. 화가에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어디 있어?” 창수홍이 울분을 터뜨렸다.
“어렵게 멀리 갈 필요가 뭐 있나. 그게 바로 우리가 발 디딘 이 땅 중국의 현실이야.”
그는 창수홍에게 자신의 계획을 털어놓았다.
“자네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니 정말 반가워. 그렇지 않아도 가끔씩은 지금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나 하는 생각에 외롭고 힘들었는데, 자네가 이 일에 매달린다니 정말 천군만마를 얻은 듯하네. 우리 앞으로 잘해보세.”
두 사람은 힘주어 손을 맞잡았다.
생각이 통한다는 것은 이래서 좋은 것이리라. 파리에서 헤어진 후 10여 년 만에 만난 두 사람은 밤늦도록 이야기꽃을 피웠다.
발굴작업과 작품활동 병행
란저우로 돌아온 한낙연은 당시 중국공업합작협회 고문으로 그곳에서 공합(工合)운동을 펼치고 있던 뉴질랜드 출신 작가 레위 앨리를 찾아갔다. 뜻만 있었지 둔황의 석굴 벽화를 발굴할 만한 재정적 형편이 되지 않았던 한낙연은 예전부터 교류를 가졌던 레위 앨리에게 자신의 계획을 설명하고 도움을 청했다. 그의 뜻에 동감한 레위 앨리가 지원해준 자동차를 이용해 한낙연은 1946년 4월 탐사팀을 이끌고 우루무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그는 본격적으로 탐사와 발굴에 나선다. 둔황 막고굴의 수백개 석굴과 신장과 쿠처(庫車) 등지의 석굴 및 고분 벽화가 그의 탐사팀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한낙연은 자신의 발굴결과를 ‘신장문화보물고의 새발견-옛 고창국 예술탐사기’라는 글로 정리해 ‘신강일보’에 발표한다. 이 글은 중국에서는 최초로 신장의 고대문화 유적지인 고창국의 문화유물을 체계적으로 세상에 알렸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그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둔황연구원에서 개최한 학술보고회에서 ‘키질 벽화와 둔황 벽화의 관계’라는 논문을 발표한다. 논문 요지는 키질의 벽화가 둔황의 벽화보다 규모에서는 작은 편이나 대신 벽화의 내용이나 형식 면에서는 둔황의 벽화보다 가치가 더 높고 또 제작연도도 오래됐다는 것이었다. 1907년 헝가리의 고고학자 스타인에 의해 둔황 막고굴의 고문서들이 도난당한 이후 둔황 주변의 유적에 대한 탐사연구는 주로 펠리오와 르콕 같은 서구 학자들에 의해 이뤄지고 있는 실정이었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혜초의 ‘왕오천축국전’도 둔황 천불동에서 유적 발굴작업을 하던 프랑스의 동양학자 펠리오에 의해 1908년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문제는 그들이 단순히 둔황 유적에 대한 발굴과 연구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발굴된 유적을 제 나라로 가져가버렸다는 사실이었다. 중국은 학자적 양심을 위반한 그들의 행동을 비난했으나 정작 그때까지 중국인 학자에 의한 연구실적은 미미한 형편이었다. 발굴작업이 한창이던 무렵 한낙연은 벗에게 보낸 편지에서 외국인 학자들이 자행한 벽화의 약탈과 파괴행위에 대해 깊은 분노를 표시했다.
“외국인들은 이곳의 석굴 벽화를 훔쳐갔을 뿐만 아니라 벽에 새겨진 한자까지 모조리 지워버렸소.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희미하게나마 이곳의 글자들이 한자로 씌어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소. 그리고 벽화의 인물들이 입고 있는 옷으로 봐서 그들이 한족인 게 분명히 드러나오. 그런데 어떻게 그자들이 그것을 없앤단 말이오. 어쨌든 이곳은 그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중국의 귀중한 문화재요.”
화가로서 안정된 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고고학자로 새출발을 한 한낙연은 이곳 사람들에게 소문으로만 전해지던 옛 고창국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옛 성터를 찾아내려고 노력한 끝에 7월말 그 사막 한가운데서 모래더미에 파묻혀 가던 옛 성터를 발견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이런 작업을 하면서도 그는 붓을 놓지 않았다. 그는 발굴탐사 와중에 만나는 신장 소수민족의 삶과 그곳만의 독특한 풍광을 화폭에 담았다. 그리고 그 결과를 가지고 개인전을 열었다. 개인전은 중국 중심부에 제대로 소개되지 않은 변방인 신장 위구르 지방의 풍광과 그곳 사람들의 풍속을 알리는 한편 그림을 판 돈으로 발굴작업에 필요한 예산을 충당할 수 있는 일거양득의 일이었다. 정부 지원을 받지 못하는 그로서는 발굴작업을 계속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산을 확보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이때 그려진 한낙연의 그림에 대해 그의 오랜 벗이던 창수홍은 이런 평가를 내린다.
“그의 그림은 어떤 작품이나 다 명랑한 빛과 색으로 충만해 딱딱하고 어색한 점이 없다. 특히 그의 숙련된 수채화 기교는 최고 경지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다.”
창수홍의 이런 평가는 석굴 벽화를 있는 그대로 베껴내는 모사작업에 특히 유용했다. 벽화가 있는 석굴 속에서 벽화를 그대로 모사하는 작업은 정확성 못지않게 순발력과 신속성이 요구되는 작업이었기 때문이다.
붓끝에서 되살아난 키질의 석굴 벽화
해가 바뀐 1947년 봄, 한낙연은 탐사팀을 이끌고 키질의 천불동으로 향했다. 그가 이번에 발굴지로 선택한 곳은 깊은 산속이었다. 대부분의 석굴이 가파른 절벽 중간에 입구를 내서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동안 외국 학자들의 발굴작업이 수차례 있었지만 그들은 이곳을 피해갈 수밖에 없었다.
탐사팀은 새로운 석굴을 발견할 때마다 일일이 번호를 매겨나갔다. 이때 그의 탐사팀이 발굴한 석굴마다 매겨놓은 번호는 현재까지 그대로 불린다. 석굴의 번호가 75번이 되었을 때 계획했던 탐사날짜가 거의 다 돼가고 있었다. 이는 외부 지원을 제대로 받을 수 없는 그의 탐사팀이 갖고 들어간 식량은 물론 탐사와 벽화의 모사작업을 위한 도구와 물감 등이 거의 바닥났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런데 예정된 탐사기일이 일주일쯤 남았을 무렵 탐사팀은 13호 석굴 옆에서 또 다른 석굴 하나를 발견했다. 그런데 그 석굴은 기존에 발견한 석굴에서 보던 벽화와는 그 모양과 색채가 전혀 달랐다. 놀란 한낙연은 그 석굴에 특별1호라는 이름을 붙이고 탐사일정을 열흘 정도 늦춰가며 그 석굴의 발굴과 벽화 모사작업을 안간힘을 다해 끝마쳤다.
당초 예정보다 훨씬 늦은 7월경에야 우루무치로 돌아온 한낙연은 우루무치의 ‘신강일보’ 대강당에서 그의 생애 스무 번째 개인전을 연다. 특기할 점은 다른 전시회와 달리 입장료를 받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것은 입장료조차 힘에 겨워하는 많은 이에게 사막의 건너편에 있는 천불동 벽화를 그림으로나마 보여주고 싶은 생각에서였다. 특히 이 전시회의 중심은 키질 천불동의 벽화였는데, 전시된 그림 가운데 특히 사람들의 눈길을 끈 것은 새로 발굴한 특별1호 굴 안의 벽화인 ‘본생의 이야기’와 ‘석가모니의 좌우’였다.
둔황에 몸과 혼을 묻다
두 차례의 대규모 발굴작업을 통해 한낙연은 일회적인 발굴 작업이 아닌 체계적인 발굴이 필요함을 절감했다. 그리고 시간에 쫓겨 허겁지겁 하는 작업이 자칫 잘못하면 귀중한 문화재의 보존에 치명적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신장지역 고고학 발굴 5개년 계획을 세우기로 했다. 발굴작업이 급하다고 해서 마음먹은 대로 하루아침에 되는 것은 절대로 아니라는 점을 몇 차례의 발굴작업에서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런 성급한 발굴은 오히려 수천년을 내려온 귀중한 문화재의 파괴라는 더 큰 화를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5년간에 걸친 본격적인 탐사계획의 사전준비를 위해 란저우와 우루무치로 바쁘게 오가던 그는 끝내 실크로드에 몸과 혼을 묻었다. 그러기에 그의 발굴작업에 많은 기대를 걸었던 중국의 문화계 인사들은 그의 죽음을 더 안타까워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그는 가고 없지만 석굴 벽화에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은 시기, 누구보다 먼저 그 중요성을 깨닫고 발굴과 보존에 온 힘을 다한 한낙연. 그가 어떤 마음자세로 작업에 임했는지 엿볼 수 있는 흔적이, 현장에 남아 있어 그를 아끼는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래준다.
그는 자신이 발굴한 키질 10호굴 북쪽 벽에 이런 글을 새겨놓았다.
“예술적 가치가 높은 아름답고 귀중한 벽화들을 보니 우리나라의 여러 곳에 있는 동굴들이 이에 비할 바가 못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벽화는 외국 발굴단들이 뜯어가버렸다. 이는 문화상의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한낙연의 지적대로 외국 발굴단은 찾아낸 벽화 중 탐 나는 귀중한 부분을 약품을 이용해 그대로 뜯어가는 야만적 행위를 일삼았다. 발굴단이라기보다는 도굴꾼에 가까운 행위였다. 아마 그들은 옮길 수만 있었다면 석굴을 그대로 자기네 나라로 옮겼을 것이다. 벽화가 석굴의 바위틈에 새겨져 있다는 것을 천만다행으로 생각해야 할 정도였다. 그는 그 글의 끝에다 훗날 이 석굴을 찾을 사람들에게 부탁하는 말까지 남겨놓았다.
“우리의 귀중한 고대문화를 더욱 빛내기 위하여 참관자 여러분께서는 아끼고 잘 보존하기를 부탁드린다.”
한낙연은 이미 그때 자신이 발굴한 석굴 벽화가 훗날 사람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될 것임을 예견했던 것이다. 발굴작업에 임하는 그의 마음자세를 엿볼 수 있는 글이 새겨져 있는 키질의 10호굴. 그곳에 들어가면 관람객을 기다리고 있는 그를 만날 수 있다. 중국 당국이 그의 발굴작업을 기리기 위한 목적으로 그곳에 그의 초상화를 걸어놓았기 때문이다. 초상화 속의 그는 사망한 지 반세기가 지난 지금에도 흐르는 세월과 상관없이 나이먹지 않은 그때 그 모습으로 석굴 벽화와 호흡을 같이하고 있다. 다만 한낙연이 아닌 한낙연의 중국식 발음인 ‘한라오란’으로 불리고 있는 것이 수만리 먼 그곳까지 찾아간 한국인이 보기에 아쉬운 점일 것이다.
하지만 정작 한낙연 본인은 거기에 대해 가타부타 말이 없다. 생전의 벗 레위 앨리는 그에 대한 회고에서 이런 글을 남겼다.
“그의 이름을 들으면 나는 아주 친절한 감을 느낀다. 그 이름은 위대한 정신이 있고 사람들의 경모를 자아내며 아주 매력적인 사람의 이름이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중국의 혁명사업에 바쳤다.”
앨리의 지적대로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던 시절, 키질의 천불동 벽화를 발굴하고 모사작업을 하다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목숨까지 바친 한낙연. 국공내전 이후 중국대륙의 주인이 된 중국공산당은 그의 공을 잊지 않았다. 화가와 혁명가, 그리고 고고학자로 중국을 위해 살았던 그에게 혁명열사라는 칭호를 내린다. 그리고 그의 유가족에게 ‘광영지가(光榮之家)’라는 호칭까지 하사한다.
'세계삼한역사 > SINA-신중국'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왜 메이지유신(明治維新) 혁명동지는 서로 싸워야했는가 ? (0) | 2009.02.22 |
---|---|
백범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여행 (0) | 2009.02.22 |
막굴 오대산(五台山) 수도사원 그림 (0) | 2009.02.18 |
베제클리크 천불동(柏孜克里克 千佛洞, Bezeklik Grottos) (0) | 2009.02.18 |
삼일운동과 5.4운동은 대륙에서 벌어진 운동이다. (0) | 2009.02.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