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SINA-신중국

베제클리크 천불동(柏孜克里克 千佛洞, Bezeklik Grottos)

한부울 2009. 2. 18. 17:20
Mogao Cave 61 막굴 오대산(五台山) 수도사(修道寺院) 그림

http://blog.daum.net/han0114/17046076

 

베제클리크 천불동(柏孜克里克 千佛洞, Bezeklik Grottos)

Bezeklik Thousand Buddha Caves

 

                                                          Bezeklik caves


베제클리크 천불동(중국어: 柏孜克里千佛洞)은 투르판 화염산 근처 절벽에 위치한 5세기에서 9세기에 걸친 불교 벽화가 있는 석굴 유적이다.


개요


지리적으로 투르판과 선선(누란)의 중간에 있고, 타클라마칸 사막의 북동쪽 입구 무토우 계곡의 가오창 유적지, 화염산 등과도 가깝다. 화염산 아래의 서쪽 무토우 계곡의 절벽 높이 위치하고 있다.


베제클리크 천불동에는 77개의 바위를 깍아 만든 석굴이 있다. 대부분 사각형의 공간에 둥근 아치형 천장을 가지고 있으며, 종종 불화 석벽이 있는 네부분으로 나눠진 것도 있다. 이 동굴들에는 전체 천정이 수천점 불화가 그려진 벽면으로 되어 있다. 어떠한 천정은 인도인, 페르시아안, 유럽으로 둘러쌓여 있는 대규모의 부처를 채색한 불화도 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걸쳐 많은 부분이 도굴되고 파손되었지만, 여전히 그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불화들로 채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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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iew on caves동굴 정경

 

                                               View on to the valley계곡의 정경

 

                                        Frescoes of Buddhas 불화 프레스코

 

                                           Frescoes of Buddhas 불화 프레스코

 

                                             A Uyghur prince위구르의 왕자

 

                                               Closeup of the Uighur Noblemen

Uyghur Princes wearing robes and headgears. Bezeklik, Cave 9, ca. 8th/9th century CE, wall painting. Located at the Museum für Indische Kunst, Berlin-Dahlem.관모와 의상을 입은 위구르 왕자, 베제클리크 제9굴, 8~9세기 베를린 다렘 박물관

Uyghur princesses, cave 9, ca. 8-9th century CE, Museum für Asiatische Kunst위구르 왕자, 제9굴, 8~9세기 작품

 

A possible Tocharian monk (left) with an Asian buddhist monk (right)  토차리안 승려(좌)와 동양의 승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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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차, 키질석굴

[데일리안]2008-09-01 13:47:44

  

한낙연 선생의 체취가 지금도 남아 있는

키질석굴의 작은 방에서 잠시 눈을 감고 그의 넋을 달래본다


실크로드, 사막을 건너 파미르고원 가는 길 ( IV )


“소륵(오늘의 카슈가르)에서 동쪽으로 한 달을 가면 구자국에 이른다. 안서대도호부가 있는, 중국 군사의 대규모 집결처다. 절도 많고 승려도 많으며 소승법이 행해지고 있다. 고기와 파, 부추 등을 먹는다. 중국 승려들은 대승법을 행한다.” 이렇듯 쿠차는 혜초가 <왕오천축국전> 중에서 유일하게 행적의 시간을 밝힌 곳이다. 그는 이어 당시 안서도호부 절도사가 조군(趙君)이며, 중국인 승려가 주지로 있으면서 대승법을 행하는 절이 두 곳밖에 없음을 전하고 있다.

 

                                                ◇ 키질석굴 가는 길 ⓒ 들찔레


한낮을 넘긴 시간, 천산대협곡을 나와 흙먼지 나는 비포장도로를 타고 키질석굴로 향한다. 쿠차에서 서쪽으로 약 75㎞ 떨어져 있는 이곳 역시 도로공사로 인해 천산대협곡에서 거의 두 시간 반 이상을 달려야했다.


중국의 3대 석굴은 돈황 막고굴(敦惶 莫高窟, 1987년 세계유산등록), 산서성의 운강석굴(雲岡石窟, 2001년 세계유산등록), 하남성의 용문석굴(龍門石窟, 2000년 세계유산등록)을 들 수 있다. 먼저 천불동으로 알려진 돈황의 막고굴은 이 지역 토질이 진흙이 굳어져 만들어진 이암이 많아 부드럽고 약해서 벽면조각이 어려운 관계로 목조 뼈대를 상(像)의 중심에 넣어 진흙으로 덮은 소상(塑像)예술 또는 벽화예술의 형태를 취한 특징이 있다. 이에 비해 운강석굴과 용문석굴은 바위를 파서 만든 석조예술의 형태를 보여준다. 시대적으로 보면 막고굴은 4세기 말에 건국한 북위(北魏)에서 원나라(元代)에 이르기까지 유물인 45,000㎡의 벽화, 약 2,400개의 채색소상(塑像), 당, 송대의 5채의 목조건축이 보존 되어 있다. 이에 비해 운강석불은 지금부터 약 1,500년이 넘는 북위의 말기부터 494년 낙양으로 천도하기 까지 형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용문석불은 북위시대의 효문제(孝文帝)가 수도를 낙양으로 이전한 494년 이후 조성되기 시작하여 당, 송나라부터 6개의 왕조가 400년에 결처 대규모의 축조가 행해졌으며 약 1,500년의 역사가 있다. 이와 같은 석굴의 형태와 위치는 시대가 변함에 따라 불교의 흐름이 서에서 동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하다.

 

                                  ◇ 구마라즙의 동상과 키질석굴 전경 ⓒ 들찔레


그렇다면 인도에서 가장 가까운 서쪽에 위치하였으며 중국의 4대 석굴로 칭해지는 키질석굴은 당연히 그 조성연대가 가장 빠르다는 말이 된다. 키질석굴은 서기 3세기부터 9세기에 걸쳐 조성되었고 막고굴보다 규모는 작다. 황톳길을 건너 들어선 석굴은 난주의 병령사석굴이나 투르판의 보즈클리크 석굴의 규모와 비슷해 보였다. 키질석굴에는 지금까지 확인된 석굴이 236개소이며 벽화가 남아있는 곳이 75개소, 발굴되지 않은 것까지 합치면 400개가 넘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다만 석굴이 산재한 산등성이 아래 정원에 깊은 묵상에 잠긴 스님의 마른 몸을 조각한 모습이 특징이고 그 뒤로 잘 자란 백양나무 잎들의 은빛 반짝임이 눈부시다. 이는 승려 구마라즙(鳩摩羅什)의 전신상으로 1994년 그의 탄생 1,650주년을 기념하여 세운 것이다. 이 스님을 배경으로 한 산등성이를 찍은 사진이 가장 많았던 관계로 키질 석굴하면 떠오르는 대표적 이미지이기도 하다. 일생을 불경 공부와 역경에 바쳐 현장, 법현스님과 함께 중국의 3대 역경승(譯經僧)으로 추앙받는 그가 번역한 불경이 반야심경, 법화경, 금강경 등 35부 294책에 이른다고 한다.

 

    ◇ 키질석굴의 특징인 격자형 테두리안에 그려진 그림들, 주로 본생담을 담았다 ⓒ 들찔레


인도의 어느 나라 재상이었던 구마라즙의 아버지는 나라가 망하게 되자 파미르 고원을 넘어 구자국으로 와서 구자국 왕의 여동생과 결혼을 하여 구마라즙을 낳았다. 그때가 서기 344년이다. 일곱 살 때 어머니를 따라 출가를 한 구마라즙은 아홉 살에 인도로 유학을 떠났고, 12살에 다시 구자국으로 돌아왔으며 한 때 소륵국(지금의 카슈카르)에서 불교를 포교하기도 하고 구자국으로 돌아와 왕의 법사가 되기도 한다. 서기 382년, 구자국이 전진(前秦 315년~394년)에 의해 멸망되고 끌려가던 중 그를 압송하던 장군 여광(呂光)이 세운 후진(後秦)에 억류 되었다가 마침내 서기 401년 전진의 수도였던 장안으로 모셔진다.

 

                                    ◇ 제38호굴, 동자도인과 호랑이 ⓒ 들찔레


황제 요흥은 구마라즙의 설법을 들으며, 더욱 불심을 키워갔고 구마라즙 역시 오랫동안 중국에 있었기 때문에 한문에도 통달해 있었다. 이에 요흥은 구마라즙을 위해 초당사(草堂寺)에 불경 번역소를 설치하고 물심양면의 후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구마라즙은 이 역경원에서 법화경을 비롯한 많은 불경 번역을 하였다. 죽기 직전, 구마라즙은 "내가 번역한 불경에 틀린 것이 없다면 나를 화장해도 혀는 타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는데, 화장한 뒤에도 과연 혀만은 타지 않고 남아 있었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서기 413년, 70세의 나이로 입적했으며 동아시아 불교 삼론종의 조사가 되었다. 무위(武威) 북대가(北大街) 서쪽에 구마라즙의 탑이 남아있다.

 

                                    ◇ 제 17호굴,선정에 든 싯다르타 ⓒ 들찔레


위구르어로 키질의 뜻은 ´붉다´는 말이다. 이 말의 의미는 석굴을 포함한 황토산이 햇살을 받으면 투르판의 화염산처럼 붉게 변한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그러나 반대로 ´푸른 석굴´로도 불린다. 이유는 벽화그림이 파란색 안료를 많이 사용하여 그려졌다 하여 불려진 이름이다. 이 푸른색 안료는 ´라피스라줄리´(lapis-lazuli)라고 하는 것으로 우리에게는 흔히 청금석이라 알려진 광물로 부터 얻은 안료다. 이것들은 쿠차에서 생산되지 않는 것으로 서역으로부터 들여 왔으며 ´라피스라줄리´를 칠한 벽화으 푸른 부분은 세월이 변하여도 색이 변하지 않는 특징을 나타낸다.


불교가 중국으로 전해지면서 처음으로 조성된 쿠차의 키질석굴에는 ‘키질풍의 벽화’들이 그려져 있다. 초기 석굴의 벽화들이 그렇듯 이곳에는 싯다르타 탄생이전의 불교설화들을 담은 본생담(本生談)에 관한 내용들이 많으며 서역의 회화기법들이 많이 받아들여졌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둘러본 5-6개의 석굴 중 처음 들린 17호굴에는 이곳 석굴들의 벽화가 갖는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마름모꼴 격자형태의 테두리에 불교설화를 그려 넣은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마치 야수파의 그림을 보는 것처럼 굵은 테두리선이 돋보이는 그림들은 하나하나가 모두 나름의 특징들을 가지고 있었다. 천장의 비천상은 상의를 벗은 모습으로 남녀가 각각 다르게 표현되어 있으며 각종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의 벽화에서는 다수의 서역악기와 페르시아식 연주모습이 등장한다. 그 외 7호굴과 32호굴 등에서도 격자형 칸 안에 세부적으로 그려진 벽화들을 계속 볼 수 있었다.

 

                                  ◇ 제 17호굴, 지옥을 형상화한 벽화 ⓒ 들찔레


플래시를 터트리지 않아도 사진을 결단코 못 찍게 하는 관리인들의 마음에서 어떤 경계심 같은 것을 엿볼 수 있었다. 이는 군데군데 떨어져 나간 벽화들, 그리고 떼어가려고 칼금을 넣은 흔적들이 벽화들을 지금이라도 잘 지켜보자는 의지일 것이라 생각을 한다. 중국인들에게는 ‘이방의 악마들(洋鬼子)‘이라 불리는 이들에 대한 적개심이 있으며 실크로드를 방문하는 내, 외국인들에게 그들의 만행을 곧잘 설명해주고는 한다. 이 악마들은 바로 19세기 말부터 중국공산당 정권이 들어서기 까지 실크로드의 유물들을 불법으로 실어간 서양인들을 뜻한다.

 

                                             ◇ 제 17호굴, 천인상 ⓒ 들찔레


그 기원이 되는 인물은 스웨덴의 스벤 헤딘(Sven Hedin)이다. 독일의 베를린대학과 스웨덴의 웁살라대학에서 지리학을 전공한 그는 이십대 이후 1893년부터 1930년까지 네 번에 걸쳐 중앙아시아를 탐사하여 잠자고 있던 누란(樓蘭)의 유적을 발굴한 사람이다. 중국에 의해 실크로드의 가장 큰 수혜자로 알려진 오렐 스타인(Aurel Stein), 이 사람으로 인해 서양의 각 나라들이 유물전쟁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헝가리 출신의 오럴 스타인은 막고굴의 불상들과 7,000여권의 불경들을 대영박물관으로 옮겨갔으며 단단윌릭의 묻혀 있던 왕국의 유물도 고스란히 차지했다. 막고굴에서 벽화를 뜯어내기 시작한 독일의 알베르토 르콕(Albert LeCoq), 뒤늦게 유물 약탈에 뛰어들었지만 한자와 중국말을 할 수 있었던 덕택에 가장 가치 있는 문헌과 필사본들을 가장 많이 루브르박물관으로 가져간 폴 펠리오(Paul pelliot), 키질석굴을 처음 발굴했으나 지진으로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하고 뒷북을 치다가 막고굴 등에서 몇몇 마지막 수혜물을 챙긴 일본의 오타니 백작, 그리고 러시아, 미국의 약탈자들도 있었다.

 

                           ◇ 제 17호굴, 루오가 예수를 그린것 같은 벽화 ⓒ 들찔레


정작 키질석굴을 제대로 탐사하여 유물을 쟁취한 이는 독일의 알베르토 르콕이었다. 이후 ‘키질 벽화들은 중앙아시아 미술사의 정수‘라 불리게 된 계기였다. 지금도 남아있는 벽의 칼자국도 모두 르콕이 남긴 것이다. 이후 스타인과 다른 약탈자들도 이곳의 유물들을 가져갔다. 그런 역사를 가진 자연환경이 열악하여 기존에 있던 연구소도 철수를 하고 지금은 안내를 맡은 젊은 처자들만 남아 있는데 그들로부터 듣게 되는 단편적인 해설로는 아쉬움을 달랠 수가 없다.

 


이렇듯 유물을 약탈당한 키질속굴의 상처를 보듬어 안아 치유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조선족 화가였던 한낙연(韓樂然, 1898~1947)이다. 그의 흔적은 지금도 선방으로 쓰던 10호굴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1919년 상하이의 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일어났던 3.1 운동의 영향으로 항일운동에 나섰던 그는 지하 활동을 하다 1929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1931년 파리 루브르예술학원에 입학하였고 졸업 후인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중국으로 돌아와 항일투쟁에 투신하였다. 프랑스 유학 당시 중앙아시아로부터 약탈되어 전해진 불교유적들을 보았던 그는 이후 키질 천불동의 가치와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실크로드 미술에 대한 연구와 키질 천불동 벽화 모사, 발굴 작업 등에 선구적 업적을 보였다. 1947년 벽화 모사를 위해 방문하고 돌아가다 항공기 사고로 가욕관 상공에서 연구결과물과 함께 아쉽게 산화했다.

 

                                      ◇ 한낙연의 그림, 사막의 풍경을 담았다 


지금도 각 석굴의 벽면에는 그가 분류하였던 방식에 따라 아라비아 숫자로 번호가 매겨져 있어 그의 손길이 이곳 어디에고 닿지 않은 곳이 없음을 알 수 있다. 그의 흔적이 남겨진 10호굴은 사방 2.5m의 작은 방이다. 이 방안에는 그의 사진과 함께 그가 모사했던 동굴벽화나 인근의 풍경을 그려놓은 그림 몇 점이 전시되어있다. 이런 그의 그림은 1993년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유작전시회를 통해 우리에게 소개 되었고 광복 6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미술 100년 특별전으로 2005년, 덕수궁에서 열렸던 그의 전시회 당시도 나는 이 분을 몰랐다.그의 대표적 작품으로 《보살입상(1932)》 《저녁의 여심(1945)》 《실크로드 풍속(1946)》 등이 있다.

 

                                                  ◇ 한낙연의 벽화 모사도 


또 하나의 그의 흔적이 북쪽 벽에 길이 3.35m 폭 1.95m의 크기로 그의 친필로 된 제자(題字)로 남아있다. “ 본인은 독일의 르콕이 쓴 신장문화보고기와 영국의 스타인이 지은 서역고고기를 읽고 나서 신장지역이 고대 예술품을 대단히 많이 간직하고 있음을 알고는 곧 신장에 올 생각이 났다. 그리하여 1946년 6월 5일 단신으로 이곳에 와 벽화를 보니 실로 아름다운 옥이 눈앞에 가득한 것처럼 훌륭한 것이 너무나 많았다. 모두가 우리나라 여타의 동굴들로는 도저히 따를 수 없는 그러한 고상한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아쉽게도 대부분의 벽면들은 외국 고고대(考古隊)에 의해 벗겨졌는데 이것이야말로 문화사에서의 일대 손실이다. (중략) 고대문화를 더욱 빛나게 하기 위해 참관하는 제위께서는 이곳을 특별히 애호하고 잘 보관해 주시기를 삼가 바라는 바이다“

 

                                                ◇ 한낙연과 부인 류위사 (1944년)


이 글은 마치 그의 유서를 적어놓은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가 기거했던 방에 난 작은 창문 밖으로 하늘은 푸르고 나무도 풍성한 여름 한낮이건만 바람은 흙먼지를 일으켜 마음을 심란하게 만든다. 한낙연 선생의 체취가 지금도 남아 있는 작은 방에서 잠시 눈을 감고 그의 넋을 달래본다. [배강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