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민족

아인자츠그루펜 (Einsatzgruppen)

한부울 2009. 2. 8. 18:24
 

아인자츠그루펜 (Einsatzgruppen)


Einsatzgruppen(독일어: 특수임무부대, 간섭 전투군)는 준군사적인 전투군으로 2차 대전 이전과 기간 중에 Heinrich Himmler에 의해 편성되고 Schutzstaffel(SS)에 의해 움직였다. 그들의 제1위의 임무는 나치스 전범 재판에서 SS 장군 Erich von dem Bach에 의하면 : "유태인, 집시 및 소련 정치위원의 전멸" 그들은 정복한 영토에서 아돌프 히틀러의 유태인 문제의 최종적 해결

(final solution: 민족말살 - 독일어: Die Endlosung der Judenfrage)의 이행에 있어서 주된 구성요소 였다.

 

                                                      Heinrich Himmler


Ordnungspolizei(나치 시기의 독일 경찰), Waffen-SS(친위대), 및 지방의 지원병들에서 병력들을 주로 형성한, 그리고  Gestapo(비밀경찰), Kripo(범죄조사기관), 그리고 SD(SS 및 NSDAP의 정보부) 장교들에 의해 이끌어진 이 암살단은 독일군을 따랐는데, 동쪽에 소련으로 도중에 동유럽을 거쳐 전진했기 때문이었다. 점령지에서 아인자츠그루펜은 필요로 할 경우 부가적인 방위와 인력을 위해 또한 지역 민중을 이용했다. 아인자츠그루펜의 활동은 SS와 제3제국의 분과에서 병사들의 넓은 공동 관리를 통해 확대되었다.


그들 자체의 기록에 의하면, 아인자츠그루펜은 일백만명 이상의 유태인과, 거의 모든 민간인을 사법 심사 없이 그리고 합법의 외관없이(판결의, 군법 또는 행정법의 낭독이 없이), 죽였는데 폴란드 지식인으로 시작해 빨리 진행하여, 1941년까지 주로 동부 유럽의 유태인들을 사살 했다. 역사가 Raul Hilberg는 1941년과 1945년 사이에 아인자츠그루펜과 SS는 130만 이상의 유태인을 야외 사살로 죽였다고 평가한다.

 

1942 년에 소련, Ukrainian SSR, Vinnitsa에 있는 가득찬 대규모 무덤에서 무릎 꿇은 유태인을 사살하려 준비한 Einsatzgruppe D 병사 : The last Jew in Vinnitsa.

 

역  사


아인자츠그루펜은 Reinhard Heydrich에 의해 편성된 특별한 목적을 위한

Einsatzkommando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데, 1938년3월에 오스트리아에 대한 Anschluss

(합병)의 결과 정부 건물과 기록을 장악하기 위해 것이었다. 독일에 의해 점령된 지역에 있는 정부 건물 장악의 임무와 함께 동반 문서와 고위 공무원의 심문이 아인자츠그루펜의 본래 임무였다. 1938년 여름에, 독일이 그해 10월1일로 예정된 체코슬로바키아의 침공을 준비하고 있을 때에, 아인자츠그루펜이 창설되었다.

 

목적은 아인자츠그루펜으로 독일군의 뒤를 쫓아 이동시키는 것이었는데, 체코슬로바키아로 진군해서 정부 문서와 관청을 장악하려고 전진했을 때였다. Einsatzkommando와 다른, 아인자츠그루펜은 무장되었고 임무를 성취하기 위해 자유롭게 파괴적인 무력을 사용하는 것을 위임받았다.


1938년의 뮌헨 협정은 전쟁을 예방했고 그것을 위해 아인자츠그루펜이 본래 창설되었으나 독일이 1938년 가을에 Sudetenland를 점령했으므로, 그것은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에 형식적으로 속한 관청을 점거하기 위해 그 지역으로 이동했다. 1939년3월15일에 체코슬로바키아의 체코 일부의 나머지 점령 후에 아인자츠그루펜은 재편성되어서 다시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에 형식적으로 속한 관청을 확보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아인자츠그루펜은 결코 영구적인 편성이 아니었다 ; 오히려 그들은 SS, SD, 그리고 각종 독일 경찰력인, Ordnungspolizei, Gendarmerie, Kripo 및 Gestapo와 같은 데서 대부분 모집한 특별한 목적을 위한 부대였다.


군사 출정이 종결되자마자, 만일 필요성이 아인자츠그루펜 부대로 부활하기 위해 발생했다면 일반적으로 동일한 인원이 다시 모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인자츠그루펜 부대는 해체되었다.

 

                                                      Reinhard Heydrich


1939년5월에, 아돌프 히틀러는 그해 8월25일로 계획한 폴란드 침공을 결정했다(나중에 9월1일로 뒤로 옮겼다). 응답으로, Heydrich는 아인자츠그루펜을 독일 육군을 쫓아 이동시키기 위해 다시 재편성했다. 초기의 작전과 달리, Heydrich는 아인자츠그루펜 지휘관들에게 백지 위임장을 주었는데 독일이 적으로 생각하는 그룹에 속한 누구든지 죽이기 위한 것이었다.

 

                     1939년10월에, Einsatzkommando - Leszno에 의한 폴란드인의 처형.

 

                                    1939년12월, Bochnia에서 폴란드인의 처형.


1939년에 폴란드의 점령 후에 아인자츠그루펜은 상류 계급, 지식 계급인, 성직자와 교사와 같은 폴란드인들을 죽였다. 나치는 모든 슬라브 민족을 아인자츠그루펜(인간 이하)로 생각해서 폴란드인을 더 낮은 급에 종이나 노예로 사용할 것을 원했다. 아인자츠그루펜의 임무는 그런고로 폴란드인들의 강제적인 비정치화와 폴란드 국민의 주체성에 최대한 확실히 공감한 그룹의 제거에 있었다. 히틀러에 의해 진술된 것으로, Armenian quote(아르메니아 인용문)에서, 부대가 보내졌다 :"... 그들에 대한 명령으로 무자비하게 그리고 동정 없이 폴란드 민족과 언어의 남성, 여성 그리고 어린이들을 죽음에 보내려고. 단지 이 방식만으로 우리는 필요로 하는 생활공간을 획득할 수 있다." "무엇이든지 우리가 폴란드에 상류 계층의 모습에서 발견한 것은 제거될 것이다 ."고 히틀러는 지시했었다.


1940년5월에 네덜란드, 벨기에 그리고 프랑스의 독일의 침공에 뒤이어 아인자츠그루펜은 다시한번 독일군을 좇아 이동했으나 폴란드에서 작전과는 달리, 1940년 서부 유럽에서 아인자츠그루펜의 작전은 본래의 권한인 관청과 문서를 확보하는 것 안에 있었다. 바다사자 작전(Operation Sealion) 계획이 있었던, 영국 침공을 위한 독일 계획이 착수되어서, 6개의 아인자츠그루펜이 영국에 침공 부대에 뒤따를 것이 예정되었다. "바다사자"를 위해 계획한 아인자츠그루펜은 즉시 체포될 것인 2,820명의 인사들의 리스트(전후에 The Black Book으로 알려진)를 제공받았다.


1941년에 독일의 소련 침공 후에, 아인자츠그루펜의 주요한 임무는 공산주의자 장교와 유태인을 폴란드에서 보다 훨씬 더 큰 규모로 죽이는 것이었다.

이런 아인자츠그루펜은 Reichssicherheitshauptamt (RSHA - 제3제국 방위 본청)의 통제하에 있었다 ; 즉, Reinhard Heydrich와 그의 후계자 Ernst Kaltenbrunner 휘하에. Heydrich에 의해 지시된 본래 권한이 4개의 아인자츠그루펜을 위해 소련에 바바롯사 작전

(Operation Barbarossa)의 일부로 보내졌는데, 소련 정부와 공산당의 관청과 문서들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 소련 정부의 고등의 핵심 당원의 전부를 제거하기 위해 ; 그리고 모든 지역의 유태인들에 대해 대학살을 선동하고 조장하기 위해. Heydrich가 1941년7월2일에 기초한 명령은 아인자츠그루펜이 고등 및 중등 계급의 모든 소련 관리 ; 코민테른의 일원 ; "극단주의자" 공산당 일원 ; 공산당의 중앙에, 지방에 그리고 지역 위원회의 일원 ; 소련군 인민위원 ; 그리고 유태인 출신의 모든 공산당 일원을 처형하는 것이라 명시했다. 유태인에 관하여 일반적으로, "어떠한 조치도 어떤 숙청을 방해하기 위해 취해지지 않을 것이고 숙청은 반공산주의자 또는 반유태인 일단에 의해 새로이 점령한 영토에서 착수될 것이다. 이에 반해서, 이것들은 비밀스럽게 조성될 것이다."


아인자츠그루펜이 소련으로 진군했으므로, 1941년7월 이후에, 조장한 대학살 보다 오히려 지역 유태인 자체의 대규모 살인에 점점 더 몰두했다. 처음에, 아인자츠그루펜은 일반적으로 유태인 남성들 사살에 한정했으나 여름이 지냈을 때, 점점 더 모든 유태인이 연령 또는 성별에 관계없이, 살해당했다. 4개의 아인자츠그루펜 중에 최고의 흉악함은 Einsatzgruppe A였는데, 이전에 소련에 의해 점령된 Estonia, Latvia 및 Lithuania의 발트 제국에서 군사행동을 취했다. Einsatzgruppe A는 최초의 Einsatzgruppe였으며 그것의 지역에 있는 모든 유태인을 조직적으로 전멸시키는 것을 시도했다. 1941년12월 이후에, 다른 3개의 아인자츠그루펜은 Raul Hilberg이 "두번째 일소"라고 불렀던 것을 시작했고 1942년의 여름까지 계속되었으며, 거기서 그들은 똑같이 조직적으로 그들의 지역에 모든 유태인을 살해함으로써 Einsatzgruppe A와 경쟁하기를 시도했다.


그들은 통틀어 일백오십만 이상의 유태인, 공산당, 전쟁 포로, 그리고 Roma(집시)를 살해했다. 그들은 또한 오십만명을 더 살해함으로 독일군 부대와 지역의 반유대주의자를 도왔다. 그들은 침공의 초기에 기동력있는 부대였으나 점령 후에는 정주했다. 더구나 아인자츠그루펜은 대게릴라 작전을 소련의 점령된 지역에서 수행하기 위해 자주 사용되었다.


대학살(Holocaust)


금후, 아인자츠그루펜에 의해 사용된 살해 방법이 비효율적이라는 것이 발견되었다 : 그것은 비용이 많이 들며, 부대의 사기를 저하시켰고 때때로 희생자들을 매우 빠르게 사살하지 않았다. Wannsee 회의에서, SS 및 다양한 그 밖의 관리들이 희생자들을 죽이는 더 효과적인 방법을 찾기 위해 만났다 ; 이것은 궁극적으로 가스실을 포함하는 Vernichtungslagern 또는 전멸 수용소의 설립을 이끌었다. 이것과 다른 계획 하에, 추정된 6백만 유태인과 5백만의 비유태인이 결국 생명을 잃게 될 것이었다.


살해의 방법


아인자츠그루펜은 전형적으로 독일 육군 편성의 뒤에 가까이 따라서 도시와 마을로 진군했는데, 그곳들은 많은 수의 유태인들이 산다고 알려졌었다. 그들이 마을에 들어가자마자, 유태인과 비유태인 공산주의자들을 요구하는 지시를 내렸는데 마을에서 추방을 위해 집합시키는 것이었다. 승낙을 거부한 이들은 무자비하게 박해하였다. 과정은 다음과 같았다 :

 아인자츠그루펜의 Sonderkommando 부대(수용소에서 유태인 무덤 파는 사람과 혼동되지 않았지만)는 진격하는 부대로 보내져서 처형을 조정했는데 "적국"의 인구를 집결시켜 지역의 조력자(Mannschaft,"Junaks" (리투아니아의 예전 죄수)의 양쪽) 또는 우크라이나 경찰관

(Gendarmes)을 모집하는 것 이었다 ; 그 다음에 Einsatzkommando가 도착하여 유태인과 공산주의자를 처형하는 것이었다. 살해는 몇몇의 방법과 패턴을 따랐다 :


동부 유럽의 정복된 도시 지역에서, 많은 유태인들은 숲 또는 건물 안쪽과 같은 가까운 위치에서 살해당했다. 살아남은 유태인들은 게토(ghettos : 유태인 강제 거주지역)에 구금되었다. 질병과 영양실조에서 사망율은 높았다 ; 게토에서 그룹들은 주기적으로 살해와 총살되었고 또는 전멸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이것의 실례는 리투아니아의 Kaunas시에 있다 ; Kaunas의 유태인들은 게토에 집결된 후에 수천명을 한 번에 학살하기 위해 Kaunas의 제7 및 제9 요새(감시 요새)에 보내졌다.


작은 시골 지역에, 또는 전쟁 지역에, 유태인들은 숲과 대규모의 무덤 가까이에서 죽음에 재빨리 이끌어졌는데 무덤은 흔히 희생자들에 의해 파졌다. 그 같은 경우의 예는 우크라이나에 Dovno 마을에 있다.


큰 도시에서, 주로 전투지역에서, 나치는 소규모 지역 위원회를 8~12명의 중요한 유태인들로 만들곤 했는데, Judenrat로 알려진 그들은 지역 유태인들을 격리수용을 위해 모으는 것을 요구 받았다. 유태인들(Judenrat 대표를 포함해서)은 그때 미리 준비된 참호 또는 천연의 구덩이로 강제로 걷게 된 다음 총살되었다. 실례들은  Babi Yar에서 대학살과 Ponary 대학살이 있다.


소총에 의한 처형에 대안은 존재했다. Einsatzgruppe D 및 Einsatzkommando Kulmhof에 의해 사용된 가스 트럭은 죽음의 수용소 헬름노(Chelmno)에서 실례가 있다. 또 다른 가끔 더 작은 마을에서 사용한 것은 유태인을 유기된 빌딩에 가두는 것이었고 그 다음에 불태우거나 폭발시켰는데, 이것은 다소 드물었다.


모여진 그들은 그다음에 도시와 마을 바깥쪽의 지정된 장소로 보내지게 될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이런 대학살 장소는 사전에 땅을 판 무덤인, 얕은 구덩이, 또는 깊은 계곡(Babi Yar에서 1개, Kiev의 바로 외곽을 포함하여)이었고, 사형 집행인들이 이미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들을 사살하라는 명령을 갖고 기관총 또는 권총을 머리에 발사하는 것이었다. 사살자들은 또한 희생자들의 의복과 그 밖의 소지품들을 빼앗아서 약간의 희생자들은 그들의 처형 직전에 옷이 벗겨지게 되었다. 죽자마자 희생자들은 손 삽 또는 불도저로 매장되곤 했다. 약간의 희생자들은 사살되지 않고 부상만 당해서 산채로 매장되었다. 소수가 무덤의 바깥으로 기어오르려 애를 썻다고 그뒤에 자세히 열거한다. (Martin Gilbert, The Holocaust)


아인자츠그루펜은 그 밖의 추축군에 의해 원조되었는데, 독일군의 선정된 일원을 포함하고, Walther von Reichenau 및 Erich von Manstein 장군과 Waffen SS을 포함하였다. Baltics 및 Ukraine에서, 그들은 또한 지역의 협력자를 모집했다 - 사살에 있어 돕는 hiwis(자원한 원조자).


사냥꾼 보고서(The Jäger Report)


아인자츠그루펜은 대량 살육의 대부분을 기록하였고 이런 공식기록 중에 최고의 악명 높은 것의 하나가 Jager Report인데, Einsatzkommando 3의 작전을 Lithuania에서 5개월 동안 망라한 것이다. Einsatzkommando 3의 지휘관, Karl Jage에 의해 쓰여진 그것은 자세한 목록을 포함하는데 총137,346명의 희생자인, 각각의 대학살을 요약한 것이며, 그리고"...나는 Einsatzkommando 3가 유태인 문제를 Lithuania에서 해결하는 목표를 달성했다. 일하는 유태인과 그들의 가족들 이외에, Lithuania에서 더 이상 유태인은 없다고 오늘 확인할 수 있다"고 말한다. 달아난 Jager는 연합군에게 잡혔는데, 전쟁이 종결했을 때였다. 거짓 신원을 가장하여, 사회에 농장주로 되돌아올 수 있었는데, 그의 보고서가 1959년3월에 발견될 때 까지였다. 그의 죄로 체포되어 고발된, Jager는 Hohenasperg에 있는 교도소에서 자살했는데 그가 1959년6월에 재판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Jager 보고서 1941년12월부터 "Einsatzgruppe A에 의해 실행된 유태인 처형"이란 제목이 붙은 지도. "기밀의 독일 문제"라고 표시한 지도는 발트 지역에서 총살된 유태인의 숫자를 보여주며 근거로 표시한다 : "평가한 유태인의 숫자는 여전히 가지고 있는 128,000명이다."


팔레스타인의 영국 위임 통치령에 생존한 유태인에 대한 계획된 대학살(Holocaust)


독일 역사가 Klaus-Michael Mallman 및 Martin Cueppers에 의한 2006년 연구는

Einsatzgruppe가 팔레스타인의 영국 위임 통치령에 있는 유태인을 죽이기 위해 1942년에 만들어졌다고 말한다. "Einsatzgruppe Egypt"는 그리스, 아테네에 근처에 있는 중이어서 팔레스타인에 롬멜(Erwin Rommel) 장군의 아프리카 군단(Afrika Korps)으로 가려고 준비되었고, 일단 독일군이 거기에 도착하자마자 위임 통치령에 있는 대략500,000명의 유태인을 죽이기 위한 것이었다. 그 기동성 있는 살인 부대는 SS 중령 Walter Rauff에 의해 지휘되는 것이었다. 계획은 24명으로 살인 분대에 속했는데 협력자를 지역의 아랍 인구에서 입대시키는 것이었고 그 결과 "대규모 살인이 독일군 지휘 하에 훼방 없이 계속될 것이었다."

 

                                                독일 아프리카 군단의 표장


그 일단은 그리스를 결코 떠나지 않았는데 롬멜의 군대가 엘 알라메인 전투(Battle of El Alamein)에서 연합군에 의해 패배 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중동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전후


Heinrich Himmler 및 Adolf Hitler에게 직접적으로 책임이 있는 아인자츠그루펜의 결정적인 권한은, SS와 경찰 지휘관들에 있었고 모든 아인자츠그루펜의 활동과 보고를 주어진 지역에서 감독했다. 2차 대전이 끝날 무렵에, SS와 경찰 지휘관들의 대부분은 동부 유럽과 소련에서 활동들을 감시했었는데 간단히 모습을 감추었고, 전쟁 범죄로 처형되거나, 체포전에 자살했다. 낮은 계급의 일원들에 대해서는, 그들 중의 많은 수가 전투에서 전사하였고, 체포되었고, 동부 전선에서 처형되거나 러시아 수용소에 투옥되어 죽음을 당했다. 보다 작은 계급의 일원들은 독일로 또는 다른 나라로 돌아갔는데 명백히 고발되지 않아서(그들의 많은 숫자 때문에) 간단히 민간인 생활로 돌아갔다.


2차 대전을 끝맺음에 있어서 아인자츠그루펜의 고위 지도자들은 미군 점령군 법정 앞에 놓였는데, 인류에 대한 범죄, 전쟁 범죄, 그리고 SS(범죄 조직이라 포고되었던 것)에 일원임으로 다양하게 고발되어서 그 뒤의 뉘른베르크 재판의 아인자츠그루펜 재판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4명의 사형선고와 5명의 무기징역이 재판 중에 있었으나, 단지 4명의 처형이 1951년6월7일에 실행되었고 이 선고의 나머지는 경감되었다.


구  성(1941년)

 

                                    Einsatzgruppen massacres in eastern Europe 

Einsatzgruppe :

발트 공화국의 Einsatzgruppe A

벨로루시의 Einsatzgruppe B

북부와 중앙 우크라이나의 Einsatzgruppe C

베사라비아, 남부 우크라이나, 크림 반도와 (최후에는) 카프카스 산맥의 Einsatzgruppe D, 영국의 Einsatzgruppe

중동의 Einsatzgruppe


출 처 : http://en.wikipedia.org/wiki/Einsatzgrupp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