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최초개통과 백범일지 그리고 대륙조선
백범일지를 구태여 인용하지 않는다면 일제 총독부가 명시하는 조선 전화역사는 1902년 3월 19일 서울∼인천 간에 공중용 시외전화가 처음 개통되었다고 하는 기록을 믿을 수밖에 없다. 그때서야 대한제국 정부가 정식으로 전화개통을 알리면서 전문 2조로 된 [전화권정규칙(電話權定規則:임시규정)]을 공포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한반도에 전화역사가 그렇다는 것이고 대륙조선의 전화역사는 다르다.
동학농민운동이 1894년1월에 발발되었고 이어 1894년 7월 25일 청일전쟁이 발발하여 청 패배로1895년 4월 종전되었으나 곧바로 을미사변(명성황후시해사건)이 터졌으며 그로 인하여 고종이 아관파천까지 하게 된다.
대한제국성립은 고종이 아관파천을 청산하고 경운궁으로 환궁하면서 이루진 것인데 1895년 8월20일 을미사변(명성황후시해)으로 인하여 대륙조선이 사실상 망하고 목숨에 위협을 느낀 고종이 1896년 2월 11일 아관파천(러시아공사피신)하여 1897년 2월20일까지 러시아공관에 거처하였으나 다시 경운궁으로 환궁하여 그 해 8월 17일 광무란 연호를 사용하면서 10월 3일 황제칭호를 수락하고 10월12일 원구단에서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마침내 승계하면서 즉위하여 이루어 진 것이다.
승계가 이루진 것이라고 하지만 대륙조선 즉 조선은 그 때 이미 끝 난 것이었다.
청일전쟁은 대륙조선의 尊座 찬탈 전쟁이다.
청이 이기면 청이 대륙조선을 통치하는 것이고 일제가 이기면 일제가 대륙조선을 통치하는 존좌 찬탈 전쟁이었다.
청일전쟁은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이 아니라 조선령 대륙에서 일어난 전쟁이다.
대한제국은 대륙조선이란 尊座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물러나 일제에게 고스란히 넘겨주고 그 대신 일제가 정해준 자리, 위치, 지역에서 명을 부지하면서 조용히 앉아 지낼 것을 조건으로 한 것인데 일제에 의하여 완전하게 침탈 되기전 일정기간동안 유예한 것이며 독식한다는 오해를 낳고 있었던 그 당시 국제여론 무마용에 불과한 것이다.
이처럼 치밀하게 계획하고 국제적 이슈로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대륙이기 때문에 가능 한 것이다. 한반도였다면 그럴 이유가 없는 것이다. 때문에 대륙조선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최소한 대한제국 이전 까지 조선이라고 함은 대륙을 본 바탕으로 한 역사인 것이다.
백범일지에서 한반도라하지 않고 대한제국이라고 하지 않으며 본국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대륙어디를 지칭하기가 곤란하기 때문에 본국이란 애매한 명명으로 얼버무린 상황이라 해야 할 것이다.
과연 백범일지에서 본국이라고 명명한 곳은 어디일까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풀어보면 그곳은 우리나라 독립의사들의 기록에서 거론하지 않은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명명변경이 근세기에 빈번했던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독립의사들이 섣불리 거처 또는 거류할 수 없었던 장소 즉 청일전쟁으로 일제가 대륙조선으로 부터 물려받은 땅 강제적으로 빼앗은 땅 즉 대륙조선 존좌의 영토 일 것이며 그러한 지역을 지금이라도 면밀하게 따져 보면 맞아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된다.
예를 들어 상해는 마치 우리의 옛 땅 처럼 빈번하게 들락거렸다는 기록이 여기저기 난무하고 있지만 다른 지명은 결코 거론되지 않고 있다.
후세 반도사학자들에 의하여 무수하게 차단 된 것도 있겠지만 그 당시 영국, 프랑스 조계지, 조차지라고 하는 곳은 영락없이 우리 동포들이 많이 살았다.
그렇게 본다면 본국이라 곳은 상해에서 멀지 않는 곳 언제든지 왕래가 가능한 곳 그곳이 바로 빈번하게 왔다갔다 할 수 있는 곳이 아닌가 한다.
때문에 본국은 바다 건너 아니면 돌아돌아 가는 길 그리고 대륙조선(일제관할지)이 차지 하고 있었던 곳을 지나 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마치 요리조리 일경을 피해 용케도 왕래하였던 것처럼 기술하는데 의문이 없을 수 없다. 본국은 상해가 가까운 곳에 연결된 곳이다.
다시 전화문제로 돌아가 백범일지에는 명성황후시해범을 처단한다는 대의아래 일본 육군 중위 쓰치다(土田讓亮)를 살해하고 잡혀 사형선고를 받고 인천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중 이 사실이 고종에게 알려지자 곧 인천감리 이재정(李在正)을 전화로 불러 사형집행을 면하게 하였는데 그때가 1896년 윤8월 26일로 전화가 개통된 지 3일째 되는 날이었다라고 하고 있다. 전화개통일자에서도 기존 사실과 차이가 있지만 고종이 인천에 전화한 시기가 아관파천(1896.2.11~1897.2.20) 즉 러시아 공관에 거처 할 시기이다.
러시아공관에서 전화 한 것이면 몰라도 환궁하기 전이기 때문에 이상하다.
또한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조선)에는 전화가 세계에서 처음 발명된 지 6년 만인 1882년 3월 처음으로 실물이 도입되어 실험통화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1882년 3월 톈진(天津) 유학생 상운(尙雲)이 귀국(귀국이라고 하여 한반도만 떠올리면 안된다)시 휴대한 전화에 관한 용품기록이 있는데, 전선 40장(丈:약 100여 m)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실험통화를 위한 것이라 인정된다. 그는 이 기록에서 전화감청이 겨우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고 하였는데, 이는 기록상으로 볼 때 우리나라(조선)사람이 한 최초의 통화로 보아야 할 것이다.
1893년 11월에 정부는 총해관(總海關:지금의 세관)에 “일본 동경에서 구입하여 들여오는 전화기와 전료(電料) 등을 면세하라.”는 조처를 시달하였는데, 이는 궁내부(宮內府)에서 전용전화를 가설하기 위하여 구입할 때 내린 것으로 보인다.
[궁내부라 함은 궁중 사무를 총치(總治)하기 위하여 설치한 것으로서 고종 31년(1894) 7월 22일 처음으로 궁내부 관제를 제정하였다.]
이 때 전화기의 도착을 몹시 기다린 듯 인천과 부산감리(釜山監理)로부터 이를 싣고 오는 일본 상선에 관한 보고를 전보로 받았다는 기록도 있다.
이렇듯 정부의 관심 속에 기다리던 전화기는 다음해 1월 26일 인천에 도착하였고, 상운을 한성전보총국(漢城電報總局:중국에서 대리 경영한)에 보내 실험을 청하였다.
[중국이라 함을 청 이라고 오해하면 안 된다. 중국을 대륙조선이라고 보아야 합당하다. 조선을 한반도에 놓고 보면 자꾸 이상해 지니까 그 공간에 청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근세조선역사가 전부 그런 식이었다.
서로전신선(西路電信線)-한국 최초로 가설된 전신선. 1885년(고종 22) 제물포(濟物浦;현재의 인천?)를 기점으로 하여 한성(漢城;현재의 서울?)을 거쳐 의주(義州)에 이르는 전신선을 가설함으로써 처음으로 전기통신이 실용화되었다. 이 전신선은 청(淸)나라의 자금(뒤에 상환하였음)과 당시 청나라에 진출해 있던 덴마크 소속의 타이베이[臺北(대북)]전신주식회사의 기술과 한국 기술자의 합작으로 이루어졌다. 1885년 8월 3일 전선가설에 착수하여 8월 19일에는 서울과 인천 간의 경인전신선(京仁電信線)이 준공되었고, 8월 20일 한성전보총국(漢城電報總局) 개국, 9월 28일 경인간 전신선이 개통되었고, 10월 6일 의주의 운유정에 이르는 총연장 약 420㎞의 서로전신선 가설공사가 완공되었다.
이곳은 대륙조선이다.]
이듬해 3월 1일 전화기의 시험을 실시하겠다고 통고하였으나 그 이후의 기록은 없다. 아마도 전용전화의 개설을 위한 준비가 완료되어 가설공사를 기다리던 중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의 발발로 그 실현을 보지 못하였던 것으로 예측 하지만 실제 대륙에서 대륙조선이 尊座를 강압으로 일제에게 넘겨주고 비로소 정지작업이 끝난 한반도로 강제하여 들어 온 시기가 아니겠는가 여겨지는 상황이다.
이후 전화는 정식으로 일반에 공개 개통되는데 1902년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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