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거리측정 수레 기리고차<記里鼓車>복원
[조선일보] 2008년 11월 25일(화) 오전 04:06
조선시대에도 택시 미터기가 있었다? 지난 14일 개관한 국립과천과학관에 전시된 기리고차(記里鼓車)가 바로 그것이다. 기리고차는 거리를 재는 수레로 현재의 택시 미터기처럼 얼마나 달렸는지를 알려준다. 톱니바퀴의 움직임을 이용한 원리도 비슷하다. 세종 대에 첫 선을 보인 기리고차는 이후 지도 제작과 토목공사 등에 널리 이용됐다. 심지어 천문관측도구인 간의(簡儀)와 함께 지구 위도 1도를 현재와 유사한 수준으로 실측하기도 했다.
◆톱니바퀴가 돌아 거리 측정
기리고차는 세종 23년인 1441년에 거리를 재는 반(半)자동 수레로 처음 선을 보였다. 기리고차는 중국 송나라의 사서에도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세종 때에 이를 개량한 것으로 추정된다.
기리고차는 겉으로 보면 말이 끄는 수레에 말을 모는 사람과 수레에 앉아 있는 사람이 보이는 평범한 모습이다. 다만 수레에 앉은 사람 옆에 종과 북이 달려 있는 것과 수레 내부에 세 개의 톱니바퀴가 정교하게 설치되어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세종이 온천욕을 하러 갈 때 1리(里)를 가면 기리고차의 종이 여러 번 울리고 5리를 가면 인형이 북을 한 번 치고, 10리를 가면 북이 여러 번 울렸다고 한다. 여기까지는 자동으로 이뤄졌다. 다만 북이 울릴 때마다 사람이 책에 기록을 해야 했기에 기리고차는 반자동 거리 측량 수레에 해당된다.
기리고차의 원리는 오늘날 택시의 주행거리를 재는 미터기와 흡사하다. 기리고차는 세 개의 톱니바퀴가 서로 연결된 구조로 돼 있다. 수레의 바퀴가 굴러가면서 바로 위에 얹혀진 첫 번째 톱니바퀴를 돌린다. 거리를 재는 세 개의 톱니바퀴 중에 아래 바퀴이다. 아래 바퀴가 한 바퀴 돌면 120자(尺)의 거리를 잰다. 한 자는 30.3㎝ 정도이다. 아래 바퀴가 15번 돌면 거리로는 1800자를 기리고차가 이동하게 된다. 이때 중간 바퀴가 한 번 회전하게 된다. 마치 산수에서 1이 열 개 모이면 다음 자리 수인 10으로 이동하는 것과 같다. 중간 바퀴가 10번 회전하면 위쪽 바퀴가 한 번 회전하게 된다. 위쪽 바퀴가 한 번 회전하면 거리는 1만8000자가 된다. 현재의 5.4㎞ 정도에 해당한다.
기리고차는 토목공사에도 사용됐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문종 1년에 현재의 서울 지역에서 제방공사를 할 때 기리고차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기리고차 이전의 측량법은 새끼줄이나 노끈을 자처럼 사용하는 방식이 주를 이뤘다. 하지만 새끼줄이나 노끈은 물에 젖기만 해도 기준이 되는 새끼줄의 길이가 달라져 자의 용도로 부적합했다.
기리고차는 정밀도가 요구되는 각종 지도 제작에도 큰 힘이 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단종 2년에 황극치평도, 세조 9년에 동국지도 등이 잇따라 제작된 데서 알 수 있다.
신흥대 지적과 김추윤 교수는 "농업 사회인 조선에서 정확한 토지 측량은 합리적인 세금 징수로 이어졌을 것"이라며 "세종의 기리고차 제작은 국가 통치를 체계화하는 데 밑거름이 됐다"고 말했다.
◆지구의 위도를 재다
지구의 적도부터 북극까지를 90등분한 것이 위도이다. 북한에서 펴낸 '조선기술발전사'에 따르면 세종 때에는 기리고차와 간의를 사용해 위도 1도를 측량하기도 했다.
위도 1도의 길이를 알기 위해서는 지표상에서 위도 1도만큼 벌어진 두 지점을 찾아내야 한다. 두 지점을 찾는 데는 간의를 이용한다. 그리고 기리고차를 이용해 두 지점의 거리를 측정하면 된다.
세종 때 측정한 두 지점의 거리는 108㎞로 서울 부근의 위도 1도(약 110㎞)와 거의 비슷해 기리고차의 정밀한 계측 능력을 입증하고 있다. 지구가 완전한 구 형태가 아니어서 위도 1도의 길이는 지역별로 조금씩 다르다.
기리고차는 정확히 누가 만들었는지는 문헌에 나오지 않는다. 현재 알려진 기리고차의 제원도 세종 당시에 출간된 문헌이 아니라 영·정조 시대의 실학자 홍대용이 쓴 주해수용(籌解需用)에 실려 있다. 근대의 기리고차에 대한 연구도 북한에서 더욱 활발히 이뤄졌다. 북한은 1996년에 '조선기술발전사'라는 책을 편찬해 기리고차에 대한 자세한 제원을 소개했다. 과천과학관은 홍대용의 책과 북한의 연구를 토대로 기리고차를 복원했다.
조호진 기자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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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때 거리를 측정하던 수레. 우리나라에서는 옛날부터 지역 간의 거리를 재어 그것을 이수(里數)로 나타내왔다. 거리를 재는 법은 시대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겠으나, 가장 정확한 근세의 측정법으로는 긴 줄자를 쓰는 방법이 있다. 이러한 측정법은 인력이 많이 들기 때문에 원시적 방법이라 하겠다.
그 수레는 1리(里)를 갈 때마다 나무로 만든 인형이 북을 쳐서 거리를 알리게 만든 자동거리 측정용 수레였다. 이 수레의 측정원리는 오늘날의 자동거리계와 같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런 기리고차가 중국에서는 진(晉)나라 때부터 사용되었다 했는데, 그것은 1리마다 인형이 북을 치고, 10리를 갈 때마다 종을 울리게 만들었다 한다. 그 구조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송사 宋史≫에 그 제작기구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둘레가 18척(尺)인 바퀴가 돌 때마다 그 회전이 톱니바퀴〔齒車〕를 통하여 회전수를 알 수 있게 만들어 1백 번 회전할 때마다 1리를 알리는 북을 치게 만들었다고 했다. 세종 때도 장영실(蔣英實)이 왕명을 받아 중국에 유학하여 기술을 배워 가지고 와 1434년에 자격루(自擊漏)를 완성하였고, 1438년에는 옥루(玉漏)도 완성하였다.
이러한 기계적인 기구가 만들어졌다면 기리고차의 기구쯤은 손쉽게 만들 수 있었을 것이므로 이것도 역시 장영실의 작품으로 추측된다. 추측하건대 세종 때의 기리고차도 그 바퀴의 둘레가 세종주척(世宗周尺) 18척이 되는 직경 119.15㎝의 양 바퀴 초거로서 바퀴가 1백 번 회전할 때마다 나무인형이 북을 쳐 소리로 1리 를 알리도록 만들었다. 물론 바퀴의 회전수는 톱니바퀴로 자동적으로 계산이 되게 설계되었다.[엠파스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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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地圖]
개 설
일반적으로 다양한 사물들을 한 폭에 그리기 어려우므로 사용 목적에 따라 모든 지형지물에서 필요한 요소들만 선택하게 된다. 고대로부터 현재까지 발달하여 왔는데, 지도에는 그 당시에 필요로 하였던 요소들이 그려지게 되어 그 시대의 문화·사회 상황 등을 파악할 수 있는 훌륭한 자료가 된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예부터 지도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지도의 작성과 인쇄, 지도책의 발달과 보급이 현저해졌다. 문헌상으로는 삼국시대에도 지도가 있었고, 고려시대에는 한반도의 모양이 현재와 비슷할 정도로 파악되고 있었다.
그러나 현재 전해지는 지도는 모두 조선시대의 것이고, 특히 인쇄술이 일반화된 16세기 이후의 지도가 대부분이다. 세계지도의 작성에도 많은 노력을 해왔다.
현재 이 지도의 사본들이 일본 경도(京都)를 비롯해서 덴리(天理) 등에 전하여지고 있으나, 우리 나라에 남아 있는 것은 아직 알려진 바 없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지도책의 발달이 현저하였다. 현재까지 전하여지는 조선시대의 지도책은 그 내용의 다양성과 수량의 많음으로 인하여 고지도(古地圖) 연구가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특히, 지도책의 첫머리에 주로 실려 있는 천하도(天下圖)라고 불리는 원형(圓形) 세계지도는 우리 나라 특유의 세계지도로서 동양적인 세계관을 지도로 표시한 것이다. 축척과 방위가 정확한 대축척지도의 출현은 1700년대에 정상기(鄭尙驥)가 제작한 〈동국지도 東國地圖〉에서 시작되는데, 이는 약 40만분의 1 축척의 도별도(道別圖)이다.
그 뒤 1800년대에 이르러 김정호(金正浩)의 약 16만분의 1 축척지도인 ≪청구도≫와 ≪대동여지도≫의 출현을 보게 되었다. 현대적인 측량기술의 도입과 대축척지도의 작성은 대한제국정부에 의하여 광무연간에 시도되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일제 치하로 들어갔다.
따라서 현대적인 5만분의 1 지도의 완성은 일제강점기에 완성을 보았다. 항공사진에 의한 현대지도의 제작과 수정은 건설교통부 국립지리원(國立地理院)의 전신인 국립건설연구소(國立建設硏究所, 1961년 창설)에서 시작되며, 현재는 국립지리원에서 이 사업을 수행하고 있다.
삼국시대 및 고려시대의 지도
삼국시대 이전의 지도에 관한 직접적인 기록은 남아 있는 것이 없다. 그러나 고려시대에 편찬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중국의 기록과 지도를 통한 간접적인 자료, 그리고 고구려시대의 벽화 등을 통해서 삼국시대의 지도에 대한 윤곽을 엿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의 영류왕 11년(628)에 견당사(遣唐使)를 통하여 당나라에 고구려의 지도를 보냈다는 기록이 있으며, 평양 부근에서 발굴된 4세기경의 고구려 벽화의 지도로 미루어 당시 그림지도 형식으로 만든 지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의 지도에 관해서는 ≪삼국유사≫ 남부여조(南扶餘條)에 보이는 ‘도적(圖籍)’이라는 표현과 ‘백제지리지(百濟地理志)’라는 기록이 있어 지도가 존재하였음을 말해 준다. 신라에도 지리지가 있었고, 지도도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삼국사기≫ 권7 문무왕 11년(671)조에 신라와 백제간의 경계를 지도에 의하여 살펴보았다는 기록이 그 증거이다. 고려시대의 지도는 현재 전하여지는 것은 없다. 그러나 중국에 전하여지는 한반도의 지도와 조선 초기의 기록을 통해서 그 지도의 내용을 추측할 수 있다.
즉, 중국에 전하여지는 지도로서 명나라 때 출판된 나홍선(羅洪先)의 ≪광여도 廣輿圖≫에 들어 있는 조선도(朝鮮圖)는 고려시대 우리 나라 지도의 윤곽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1396년(태조 5)에 만들어진 ≪동문선 東文選≫ 권92에 수록된 삼국도후서(三國圖後序)는 ≪광여도≫의 조선도보다 산세(山勢)와 하천을 선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현재의 낭림·태백·소백 산맥의 줄기를 선명하게 서술하고, 황해에 흘러드는 여러 하천과 남해로 흐르는 가야진(伽耶津:지금의 낙동강) 및 분수령의 개념을 뚜렷이 전해 주고 있어 이회의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조선 부분과 유사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 전기의 지도
[세계지도]
편의상 세계지도와 우리 나라 지도로 나누어 조선 전기의 지도를 살펴보기로 한다. 세계지도로서는 세계의 지리적 지식을 수집하여 편집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와 중국 중심의 천하도(天下圖), 즉 동양 지도를 들 수 있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지도 하단에 기록된 권근(權近)의 발문에 의하면 1402년(태종 2)에 좌정승 김사형(金士衡), 우정승 이무(李茂)와 이회가 만들었다고 하며, 그 사본이 일본 류코쿠대학(龍谷大學) 등에 전하고 있다.
이 지도는 마테오 리치(Matteo Ricci)의 〈곤여만국전도 坤輿萬國全圖〉가 17세기에 들어올 때까지 우리 나라에서뿐만 아니라 동양에서 가장 훌륭하고 오래된 세계지도로 알려져 있다. 이 지도의 우리 나라 부분은 전도로서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지도이다. 또한 간접적으로 고려시대의 지도를 추측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 지도는 이택민(李澤民)의 〈성교광피도 聲敎廣被圖〉와 천태승 청준(淸濬)의 〈혼일강리도 混一疆理圖〉를 중국에서 들여와 이들 지도에 우리 나라와 일본을 추가시켜 만든 것이다.
발문에 의하면 〈성교광피도〉는 지도가 상세하였고, 〈혼일강리도〉는 국도연혁(國都沿革)이 상세하였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지도의 윤곽, 지명·하천 등은 전자를 따랐으며, 상단의 역대제왕의 국도연혁은 후자를 따른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 나라와 일본이 결여된 것으로 생각되는 이들 지도에 박돈지(朴敦之)가 1401년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가져온 〈일본도 日本圖〉와 조선 초기에 있었다는 이회의 〈팔도지도 八道地圖〉 등을 추가하여 만든 것으로 추측된다. 천하도는 중국의 도교적인 세계관을 잘 나타낸 지도로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와는 다른 계통의 세계지도이다.
이는 중심 대륙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비해(裨海), 그 바깥을 둘러싸고 있는 환대륙(環大陸), 그 바깥을 영해(瀛海)로 둘러싸는 원형의 세계지도이다. 천하도는 단독으로 그려진 것이 드물고 대부분 지도책의 첫 면 또는 뒷표지 이면에 그려져 있다.
천하도의 기원에 대하여 여러 가지 해석이 내려지고 있으나, 중국이나 일본에는 전하여지는 것이 없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천하도에 나타난 고대인의 세계관을 중국 전국시대의 추연(鄒衍)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사상적 기원은 중국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지도화하여 만든 천하도는 우리 나라 사람의 손에 의하여 만들어졌음을 의심할 수 없게 되었다. 그 기원이 중국이냐 또는 우리 나라이냐 하는 문제는 기록으로 찾기는 어려우나 천하도는 현재 우리 나라에만 남아 있고 오랫동안에 걸쳐 발달하였으므로 그 모양과 내용이 다양하다.
조선 초기에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와 천하도 이외에 중국 중심의 동양지도, 만주와 우리 나라 북방 경계지방, 일본 등에 관한 지도들이 만들어졌다.
1469년(예종 1)에는 동양세계를 뜻하는 〈천하도〉가 완성되었고, 1471년(성종 2)에는 신숙주(申叔舟)의 ≪해동제국기 海東諸國記≫에 삽입된 해동제국총도, 유구국지도(琉球國地圖), 일본국서해도구주지도(日本國西海道九州地圖) 등이 목판으로 간행되었다.
[우리 나라 지도]
본격적인 지도제작사업이 시작된 세종대에 들어서기 전에 우리 나라 지도로는 이회의 〈팔도지도〉가 있었다. 이 지도는 현재 단독으로 전하지는 않으나 앞에서 말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조선 부분과 같은 지도로 추측할 수 있다.
그 이유로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실제로 편집한 사람이 이회라는 것과 양성지(梁誠之)의 상주문(上奏文)에 이회의 〈팔도도〉를 언급한 점 등을 들 수 있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조선지도의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 압록강은 거의 동서 방향으로 흐르고 두만강의 유로(流路)는 자세히 모르고 있었다.
둘째, 한반도의 모양을 비교적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즉, 한반도의 동서 폭과 남북 길이의 비율이 현재의 지도와 큰 차이가 없고 해안선의 굴곡도 정확하게 나타나 있다. 셋째, 하천과 산맥의 표시에 중점을 두고 있다. 한강과 낙동강의 하계망(河系網)은 거의 현재와 같으나 대동강·압록강·두만강은 유로가 간략하며 부정확하다.
지형 표시는 태백산맥·소백산맥·낭림산맥 등 산줄기를 표시한 점이 특색이다. 개개의 산은 특별한 표시 없이 산맥의 해당 부분에 백두산·지리산 등의 글자를 썼을 뿐이다. 산맥과 하계망의 자세한 표시는 분수령과 하천의 유역에 대한 개념을 뚜렷이 해준다.
세종시대의 지도제작사업은 각 지역의 행정기구를 동원하여 자료를 수집하는 한편, 중앙에서 직접 사람을 각지에 파견하여 자료를 수집·편집하였고, 지도제작에도 새로운 방법이 도입되었다. 1437년(세종 19)에 완성된 천문의기(天文儀器)의 하나인 간의(簡儀)는 천체를 관측하기 위한 측각기(測角器)로서 위도 측정에 사용할 수 있었다.
또 혼천의(渾天儀)를 천문용시계로 사용하여 경도(經度)의 측정도 가능하게 되었다. 세조 때에는 일종의 소박한 삼각측량기구인 인지의(印地儀)를 만들어 사용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방위와 원근을 측량하는 기구였다. 그리고 1441년에는 10리마다 자동적으로 북을 치도록 고안된 기리고차(記里鼓車)가 만들어졌다.
이렇게 세종에서 세조에 걸치는 동안 과학적인 지도작성을 위한 기초작업이 완료되고, 그 지도제작사업의 성과로 정척(鄭陟)과 양성지의 〈동국지도 東國地圖〉가 완성되었다. 1455년(세조 1) 8월 12일에 집현전 직제학에게 지리지를 편찬하고 지도를 작성할 것을 명한 지 8년 만에 이 지도가 이루어진 것이다.
현재, 국사편찬위원회 소장의 〈조선방역지도 朝鮮方域之圖〉는 정척·양성지의 동국지도형에 속하는 것으로 보인다. 〈동국지도〉를 이회의 〈팔도지도〉와 비교하면, 첫째로 압록강과 두만강의 유로가 많이 개선되었다.
즉, 〈팔도지도〉에서 거의 동서 방향이던 압록강의 유로가 동북∼남서 방향이 되고 두만강은 하류에서 남류(南流)하는 것이 잘 나타나 있다. 둘째로 하계망과 산계(山系)에 있어서 특히 압록강·두만강·대동강·청천강의 유로가 한강이나 낙동강의 그것과 거의 같을 정도로 자세하고 정확하게 되었다.
셋째로 〈팔도지도〉에 없던 교통로, 경도(京都)까지의 일정과 이수(里數)가 표시되었고 포구도 표시되었다. 목판인쇄 지도로 조선 후기에까지 널리 사용된 지도로 ≪동국여지승람≫의 팔도총도(八道總圖)와 도별분도(道別分圖)를 들 수 있다. 이 지도는 보통 동람도(東覽圖)라고 불리며 널리 보급된 지도책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동람도는 이회의 〈팔도지도〉, 정척·양성지의 〈동국지도〉보다 뒤에 발간된 지도이나 그 내용과 지도 윤곽이 오히려 퇴보된 느낌을 준다. 즉, 팔도총도는 동서의 폭이 남북 길이에 비교하여 실제보다 약 2배 정도 과장되어 있을 뿐 아니라 함경도와 평안도의 북부가 많이 왜곡되어 있고 내용도 다른 지방과 비교하면 간략하게 되어 있다.
팔도총도의 윤곽이 부정확한 것은 지도작성에 필요한 정보가 부족한 것이 아니고, 책으로 출판하기 위한 목판의 규격에 따라 좌우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 지도에도 하계망이 강조되어 있는 점은 이회·정척 등의 지도와 같으나 산맥을 표시하지 않고 각지의 진산(鎭山)만을 표시한 점이 다르다.
동람도는 인문현상(人文現象)에 중점을 둔 지도이다. 동람도는 지표현상을 자세하게 나타내려는 대축척지도와는 달리 당시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지표현상에 대한 공간지각(空間知覺)을 나타낸 소축척지도이다. 이것은 목판인쇄가 널리 보급된 조선 중기 이후의 지도책에 전달되어 일반 지식층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조선 후기의 지도
조선 후기에는 마테오 리치와 페르비스트(Verbiest,F., 南懷仁) 등의 서양식 세계지도를 통하여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확대되는 한편, 우리 나라 지도에서는 정상기와 김정호에 의한 대축척지도의 발달을 보게 되었다.
[세계지도]
조선 후기의 세계지도는 조선 초기에 작성된 이회의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와 천하도 계열의 지도가 그대로 후기에까지 계승되는 가운데 중국을 통하여 마테오 리치의 〈곤여만국전도〉가 1603년(선조 36)에 우리 나라에 도입되고, 1720년대에 페르비스트의 〈곤여전도 坤輿全圖〉가 도입되어 새로운 세계지도에 관한 지식을 가지게 되었다.
야소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의 〈곤여만국전도〉는 경위선을 사용하고 신대륙까지 표시한, 당시의 서구에서 가지고 있던 최신의 정보를 망라한 훌륭한 세계지도였다. 이 지도는 완성된 다음해에 우리 나라에 도입되었고, 그 필사본이 현재 규장각에 전해지고 있다.
마테오 리치의 세계지도는 여러 번 개정판이 나왔으며 가장 훌륭한 〈양의현람도 兩儀玄覽圖〉는 현재 숭실대학교 박물관에 전하여지고 있는데, 세계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희귀본에 속한다. 페르비스트의 〈곤여전도〉는 동반구도와 서반구도로 된 지도로서 1860년(철종 11)에 우리 나라에서 중간(重刊)되어 널리 보급되었다.
그 판본의 대부분이 현재 규장각에 전해지고 있다. 위에 언급한 2종의 세계지도 외에 널리 보급된 서양기원의 세계지도로서 최한기(崔漢綺)와 김정호가 1834년에 공동으로 중간한 〈지구전후도 地球前後圖〉가 있다.
목판본인 관계로 당시의 지식층에 널리 보급되었으며 필사본으로도 전해지고 있다. 경위선을 사용한 서양 세계지도를 모사하고 중간을 하는 한편, 1700년대에는 새로운 지식을 소화해 가면서 우리 나름대로 세계지도의 출현을 보게 되었다.
1700년대에 작성된 〈여지전도 輿地全圖〉는 이러한 시대의 흐름에 따라 서양에서 도입된 세계지도와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그리고 중국 중심의 동양 지도 등을 절충하여 만든 아시아·유럽·아프리카를 포함하는 지도이다.
이 지도는 목판본이며 상단에 중국 각 지방에서 경도(京都)·순천부(順天府)까지의 이수가 적혀 있고, 지도의 좌우측 상부에 여백을 이용하여 조선 및 중국 각 지방의 위도와 경도가 적혀 있다. 중국은 북경을 기준으로, 우리 나라는 한성(漢城)을 기준으로 경도를 표시하고 있다.
세계지도 이외에 중국을 중심으로 동양을 나타내는 지도의 종류가 조선 중기에서 후기에 이르기까지 계속 발달하였다. 이 계통의 지도로서 〈천하여지도 天下輿地圖〉를 들 수 있다. 이 지도는 대부분이 필사본이고, 숭실대학교 소장본에는 건륭정묘(乾隆丁卯, 1747년)에 작성되었음이 밝혀져 있다.
지도의 윤곽이 매우 정확하며 우리 나라 부분이 크게 그려져 있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천하대총일람지도 天下大總一覽之圖〉도 숭실대학교의 〈천하여지도〉와 같은 유형의 지도이다.
중국을 중심으로 하고 주변 국가를 간단히 표시한 중국식 세계지도는 조선 후기에 널리 이용되었는데, 김수홍(金壽弘)의 〈천하고금대총편람도 天下古今大總便覽圖〉가 그 대표적인 것으로 목판본과 필사본이 모두 전해진다.
그 내용을 보면, 지도의 상단에 ≪대명일통지 大明一統志≫ 노정기(路程記)와 ≪당두우통전 唐杜佑通典≫이 실려 있고, 좌측에 자세한 서문이 있다. 중앙에 해안선의 윤곽을 거의 무시한 장방형의 중국과 만리장성 이북의 쑹화강·장백산 등 만주지방에 관한 내용과 고비사막·북해로 생각되는 것이 표시되어 있다.
우리 나라는 압록강·두만강·백두산이 표시되어 있을 뿐이고 반도의 모양은 그려져 있지 않다. 이 지도는 지도와 그 지역의 간단한 연혁을 기록한 역사지도이다.
[우리 나라 지도]
17세기 이후의 지도 발달에서 나타나는 현저한 변화는 자세한 대축척지도의 발달이다. 조선 초기의 지도는 대부분 100만분의 1 이하의 소축척지도인데 정상기의 〈동국지도〉와 김정호의 ≪청구도≫·≪대동여지도≫는 모두 50만분의 1 이상의 대축척지도로서 여러 장을 연결하여 조선전도가 되도록 만든 데 의의가 있다.
정상기의 〈동국지도〉는 모두 필사본이며 전국도와 도별도로 되어 있다. 이 지도는 정확한 위치나 거리를 나타내기 위하여 정확한 축척을 사용한 것이 그 이전의 지도와 다른 점이다. 지도의 여백에 제척(梯尺)을 종(縱)으로 표시하고 그 옆에 백리척(百里尺)이라고 표시하였는데, 약 40만분의 1의 축척이 된다.
축척을 직접 표시한 지도는 이 〈동국지도〉 이전에는 아직 알려진 것이 없다. 이러한 축척표시와 각 도별도를 이어 맞추어 훌륭한 우리 나라의 전도가 되도록 한 것은 대축척지도 발달에 새로운 계기를 마련하였다. 김정호는 우리 나라를 도별로 구분하지 않고 남북을 29층, 동서를 22판으로 나눈 좌표방안(座標方眼)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이 방안에 해당하는 지도를 만들고 그것을 모두 이어 맞추면 우리 나라 전도가 되도록 고안하였다. 이 지도가 바로 1834년(순조 34)에 김정호가 완성한 ≪청구도≫이다. ≪청구도≫는 축척이 약 16만분의 1의 대축척도엽이며 현대식 대축척지도 성격을 지니고 있는 지도책이다.
책의 내용은 최한기의 서문과 김정호 자신이 만든 범례, 그리고 1면 크기의 역사지도인 동방제국도(東方諸國圖)·사군삼한도(四郡三韓圖)·삼국전도(三國前圖)·본조팔도성경합도(本朝八道盛京合圖)와, 4면 크기의 신라9주군현총도(新羅九州郡縣總圖)·고려오도양계주현총도(高麗五道兩界州縣總圖)·본조팔도주현총목(本朝八道州縣總目)이 들어 있다.
4면 크기의 신라·고려·조선의 지도는 행정구역 및 지명의 시대적 변천을 개관할 수 있는 역사지도이며 동시에 ≪청구도≫의 각 지방을 찾기 위한 색인 구실을 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자세한 범례와 부록으로 당시의 행정구역별 호구·전결(田結)·곡총(穀總)·군총(軍總) 등을 초록하고 있어 대축척지도이면서 현대적인 지도책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김정호는 ≪청구도≫를 완성한 뒤 27년 만인 1861년(철종 12)에 ≪대동여지도≫를 발간하였다.
≪대동여지도≫는 ≪청구도≫의 자매편으로 ≪청구도≫의 내용을 보충하고 일반사람들이 사용하기에 편리하도록 지도책의 형식에서 벗어나 분첩절첩식(分帖折疊式)으로 만들었다. 축척은 ≪청구도≫와 같이 약 16만분의 1이나 역사지도와 군현별 통계를 실은 부록은 제외되었다.
지도의 내용은 ≪청구도≫와 큰 차이가 없으나 지형의 표시, 하천, 교통로 등이 정밀하다. 산맥의 표시방법은 추상화된 면과 선으로 표시된 일종의 그림자 모양인 산악투영법(山嶽投影法)을 사용하고 있다. ≪대동여지도≫는 산계(山系)와 하계망(河系網)이 상세하고 정확한 것이 특징이다.
산계와 하계망은 풍수지리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서 당시의 사회적 요구가 지도에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대동여지도≫의 산맥 표시방법은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보기 어려운 독특한 방법이며 묘도(墓圖)에서의 지형 표시방법에서 발전시킨 것으로 생각된다.
김정호는 22첩의 ≪대동여지도≫를 바탕으로 약 90만분의 1 축척의 ≪대동여지전도 大東輿地全圖≫와 서울의 산세와 성내 및 주변을 상세히 그린 ≪수선전도 首善全圖≫를 목판본으로 간행하였다.
[조선 후기의 목판본]
우리 나라 전도(全圖)로 가장 널리 보급된 지도는 1820년대에 작성된 〈해좌전도 海左全圖〉일 것이다. 그러나 지도의 제작자는 분명하지 않다. 지도의 윤곽과 크기에 있어서 정상기의 〈동국지도〉에 들어 있는 우리 나라 전도를 후대에 판각하고 우리 나라의 연혁을 지도의 여백에 추가한 것으로 짐작된다.
〈해좌전도〉의 압록강 유로는 정상기의 〈동국지도〉와 같으나 김정호의 〈대동여지전도〉와는 뚜렷이 구별된다. 중국을 통해서 서구의 지도학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천문측량에 의한 경위선을 사용한 한반도의 지도제작이 늦어진 것은 애석한 일이다.
정상기의 〈동국지도〉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는 모두 좌표방안에 의한 것이지 현대 지도에서 말하는 경위선은 아니었다.
[관방도와 지도책]
조선 후기의 고지도 중에는 군사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진 관방지도(關防地圖)가 비교적 많이 남아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은 압록강을 중심으로 관서지방과 요하유역을 포함하는 것, 두만강을 중심으로 우리 나라의 관북지방과 만주 동부를 포함하는 것, 그리고 남해안의 해안경비를 위한 수영(水營) 및 해안지방이 자세한 지도 등이 있다.
〈서북강계도 西北疆界圖〉·〈영고탑총람도 寧古塔總覽圖〉·〈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 西北彼我兩界萬里一覽之圖〉·〈영남호남연해형편도 嶺南湖南沿海形便圖〉 등은 작자나 연대가 알려져 있지 않은 채 전해 오고 있다.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는 우리 나라 북부와 흑룡강에서 산해관(山海關)에 이르는 만주지방을 포함하는 대형지도(91.5×130㎝)이다. 지도의 내용은 중요한 요새지 및 도로와 이수, 성책 등이 기록된 대표적인 북방 관방도이다. 제작연대는 백두산의 석비(石碑)가 표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1700년대 이후의 것으로 추측된다.
〈영남호남연해형편도〉는 우리 나라 남해안 전체를 포함하는 대지도로서 항로와 항구, 섬, 봉화대 등이 기록되었고 항구의 선박 수용수, 해저지형·대피항 (待避港) 등이 표시된 수로도와 수로지(水路誌)를 겸하고 있는 지도이다.
이 지도는 명·청 등지에서 편집한 지도와 우리 나라의 〈항해공로도 航海貢路圖〉·〈서북강해변도 西北江海邊圖〉를 합쳐서 만든 것으로 우리 나라의 북부지방과 만주 및 현재의 북경 북부에까지 이르는 넓은 지역을 나타낸 지도이다.
지도의 내용은 성책·만리장성에 관한 자세한 기록뿐만 아니라 요동반도의 산맥·하천에 대해서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관방지도에는 넓은 지역의 성책·요새뿐만 아니라 중요한 성책·산성 등을 상세하게 그린 지도들도 제작되었다.
조선 후기의 고지도의 특징 중의 하나는 지도책의 발달이다. 지도책은 중국과 일본에서는 별로 발달하지 않았으나 우리 나라에서는 널리 보급되고 애용되었다. 그 종류는 매우 다양하나 지도책의 내용으로 보아 네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즉, ① 천하도·중국도·일본국도·유구국도(琉球國圖)·팔도도로 되어 있는 것, ② 천하도·중국도, 중국의 각 지방 분도(分圖), 일본국도·유구국도로 된 것, ③ 천하도·중국도·유구국도·일본국도·요계관방지도·연도(燕都)·조선전도·도성도(都城圖)·팔도분도(八道分圖)·군읍지도로 된 것, ④ 대축척지도책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즉, 우리 나라와 외국을 모두 포함하는 것과 주로 외국만을 포함하는 것, 또는 우리 나라 지도만으로 한정시킨 것으로 대별된다.
이 밖에도 〈강원도지도〉·〈영남지도〉·〈전라도지도〉 등 도별도와 〈안동읍도 安東邑圖〉·〈신안지도 新安地圖〉 등의 군현도가 각 도와 각 군현별로 작성되었으며, 특수한 산천·수리(水利)·교통·산성·사찰·사원(祠院)·역참·도회(都會) 등을 그린 특수지도가 있다. 이들은 대축척지도 또는 그림지도로 구체적이므로 당시 상황을 잘 반영해 주는 자료가 된다.
현대 지도
경위선 좌표를 기입한 한반도의 지도는 1899년에 학부 편집국에서 간행한 〈대한전도 大韓全圖〉이며 우리 나라에서 만든 현대식 지도의 처음이라고 생각된다. 〈대한전도〉 이전에도 방위와 축척이 정확하고 좌표를 기입한 지도가 있었으나 경위선을 지도의 좌표로 사용한 것은 이 지도가 처음이다.
대한제국 정부에서 현대식 측량을 담당하는 양지아문(量地衙門)을 설치한 다음해에 만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대지도 작성의 노력은 일제의 침략으로 종식되었고, 지도제작사업은 일인의 손에 넘어갔다. 일본은 청일전쟁에 사용하기 위하여 이미 200만분의 1 지도를 완성하였고, 1910년부터 1915년 사이에 한반도 전체의 측량을 완료하였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1914년에서 1918년 사이에 우리 나라 전역에 걸친 722매의 5만분의 1 지형도를 평판측량에 의하여 완성하였다. 이와 동시에 도시 부분의 2만 5000분의 1, 2만분의 1, 1만분의 1 지도도 부분적으로 작성하였다.
[과도기의 지도]
일제강점기의 측량·지도제작사업은 1930년대 후반기부터는 군사적인 목적에 초점이 맞추어졌기 때문에 일본 육지측량부(陸地測量部)에서 실시했으며, 측량성과는 비밀문서로 다루어졌다. 광복을 맞은 우리 나라는 일제강점기의 측지 및 지도에 관한 성과의 일부를 일본에서 인수받게 되었다.
1945년 9월에 일본 육지측량부로부터 5만분의 1 지도 원판 722매를 당시의 미군정청이 인수하였고,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그 지도 원판을 우리 정부가 인수하게 되었다. 그리고 내무부 토목국에는 조선총독부에서 사용하던 ‘조선 삼각점 및 수준점 성과표’가 보존되어 있었으므로 이들 자료가 기초를 이루었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삼각망 또는 수준망의 정비상황과 일본측 지계와의 결합상황 등을 헤아릴 수 있는 각종 측량기록은 끝내 전하여지지 않았다. 정부 수립 후 측지사업의 중요성과 시급함을 깊이 인식하고 있던 우리 정부에서는 기술과 장비를 보완하기 위하여 미군의 지원을 받고 있던 군(軍)으로 하여금 측지업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이에 따라 육군공병감실에서 측지업무를 관장하였고 그 뒤 1949년 7월에는 육군본부 직할 측지감실에서, 그리고 같은해 8월에는 육군 제868측지부라는 소규모 부대를 편성하여 일본 육지측량부의 지도 원판에 의한 지도의 수정 및 인쇄를 전담하도록 하였다.
이 시기에 특기할 만한 것은 1946년에 미군은 한국 전역에 걸쳐 지도제작을 위한 항공사진 촬영을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이 성과를 이용하여 우리 나라의 5만분의 1 기본도와 2만 5000분의 1 시가도의 편집과 제작을 미 극동사령부 휘하의 제64공병측지대대에 실시하도록 하였다.
6·25전쟁과 더불어 군용지도의 수요가 급증하였으며 지도내용의 수정과 보완이 요청되었다. 이에 따라 당시까지의 단색지도를 다색지도로 재편성하는 한편, 지명을 한자에서 한글로, 지도투영법을 횡축메르카토르(Transverse Mercator) 좌표체계에서 국제횡축메르카토르 좌표체계로 변환하였다.
1952년 6월에는 제868측지부를 해체하고 제401공병측지중대를 창설하였다. 그 뒤 몇 차례의 변동을 겪은 뒤 1960년 4월에 연대 규모의 육군측지부대로 개편되어 기구와 기능 양면의 확대와 발전을 하게 되었다. 한편, 미 육군에서도 극동측지부대로 하여금 항공사진 측량방법에 의하여 1954년까지 우리 나라 5만분의 1 지도 720매의 제작을 완료하였다.
휴전 후 육군에서는 전쟁으로 3분의 2 이상이 망실 또는 파손된 측지기준점 복구·재설(再設)을 시작하였으며, 1956년 1월에는 미육군과 한미지도협정을 체결하여 지도제작에 있어서의 상호 지원 및 중복사업의 배제, 항공사진 측지자료 및 간행물의 교환을 정기적으로 하게 되었다.
1957년 8월에는 국방부 산하기관으로 지리연구소가 창설됨으로써 정부기관으로서 측지기구의 첫 탄생을 보게 되었다. 이 연구소의 기능은 기본도의 작성, 측지기준점의 조사, 복구 및 재설과 지명의 조사·정비 등의 사업이었다.
그러나 기술요원의 부족과 시설장비의 미비 등으로 독자적인 업무 전반을 담당할 수 없어 일부업무는 육군측지부대에서 시행하도록 하고 그 성과만을 관리, 보존하는 과도적인 측지사업을 추진하였다.
[국토개발과 지도]
국방부 지리연구소는 1961년 2월 15일에 내무부 산하 국립건설연구소에 이관되었다. 5·16군사정변 이후에 국토의 종합개발계획에 따른 국토의 효율적인 개발·이용·보전을 위한 각종 건설사업이 활발히 추진됨에 따라 그 사업의 입안과 계획, 실시를 위하여 지도가 필수적인 기본자료로 등장하였다.
첫째로 미군이 작성하여 육군측지부대에서 보관하고 있는 5만분의 1 지도를 민수용(民需用) 지도로 수정, 보완하는 작업을 시작하여 1963년에 남한 전역에 걸친 350개의 지도를 완성하였다. 이 기간중에서 중요한 계기는 1965년에 이루어진 한화협동항공사진측량사업(韓和協同航空寫眞測量事業)이다.
이 사업의 결과로 항공사진에 의한 측량과 지도작성의 장비 도입, 기술자의 양성을 하게 되었고, 우리 손으로 직접 대축척지도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이 협정은 1971년 9월에 종결되었으나 그 동안의 준비와 기술의 축적으로 항공측량과 현대적인 도화시설(圖化施設)에 의하여 남한 전역에 걸친 762매의 2만 5000분의 1 지도를 1974년에 완성시켰다.
그리고 2만5000분의 1 도엽을 기초로 5만분의 1 지도도 아울러 수정하였다. 그뿐 아니라 일제강점기에 사용하던 5만분의 1 지도의 규격인 15′E×10′N(20×20㎞)을 15′E×15′N(20×30㎞)으로 고쳤고, 2만5000분의 1 지도도 7.5′E×7.5′N으로 수정하여 지도 매수를 감소시켜 인력 및 비용을 절감시켰다.
즉, 지금까지의 정사각형 도엽이 남북이 긴 장방형 도엽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이 기간의 중요한 변화로서는 종전까지 5만분의 1 축척의 도엽이 기본도였으나, 이때부터 2만5000분의 1 축척의 지도가 기본도 구실을 하게 된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이때부터 국립건설연구소 작성의 기본도를 기초로 하여 군사용 지도를 편집하기에 이르렀다.
기본도 작성 외에 1968년부터는 고속도로 건설, 공업단지 조성, 4대강 유역 개발사업 등 대단위 국토개발사업에 항공사진 측량이 활발하게 응용됨에 따라 토지이용현황도를 비롯한 각종 주제도(主題圖) 제작사업도 이 기간에 활발히 추진되었다.
[국립지리원의 발족과 지도의 다양화]
1974년 11월에 국립건설연구소는 건설부 국립지리원으로 개편되었고 기구의 확장과 사업내용도 다양화되었다. 특기할 사항은 주요 도시 및 개발지역의 5000분의 1 세밀도 작성을 1974년부터 시작한 것이다. 이 세밀도는 국토의 개발·이용·보전에 필요한 계획에 직접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지도로서 주목할만한 성과이다.
또한 국제적으로 통일된 표준도법에 의한 220만분의 1 세계지도를 편집, 발간하였고, 우리 나라의 자연·경제·사회·문화 등의 현황을 지도화한 주제도로서 국세지도책(國勢地圖冊)을 만들기 시작하여 1989년에 ≪대한민국국세지도≫를 발간하였다. 이 밖에도 토지이용현황도·연안해안기본도 등을 작성하였다.
국립지리원의 지도제작사업 외에도 정부기관에서 작성되는 주제도, 각 지방자치단체에서 만든 각종 지도의 수는 최근에 급증하였다. 뿐만 아니라 개인기업체에서 만든 일반용 지도의 수도 그 수요의 증가와 더불어 일반화되고 있다.
이러한 지도의 수요는 교통기관의 발달과 관광객의 증가 등으로 증대되고 있으며 상업적인 지도 출판이 점차 활기를 띠고 있다. 일반용 지도책의 보급은 아직 시작에 지나지 않는다. 1960년대 후반에 일반용 지도가 간략하게 나온 바 있으나 상품가치는 거의 없었다.
1980년대에 들어서서 비로소 선진국가에서 볼 수 있는 지도책이 개인 출판사에서 나왔고, 그 수요도 점차 증가 추세에 있다.
≪참고문헌≫ 朝鮮科學史(洪以燮, 正音社, 1946)
≪참고문헌≫ 韓國文化史大系 Ⅲ(高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1968)
≪참고문헌≫ 韓國科學技術史(全相運, 正音社, 1976)
≪참고문헌≫ 한국의 지도(방동인, 세종대왕 기념사업회, 1976)
≪참고문헌≫ 韓國古地圖(韓國圖書館學硏究會, 1977, 韓國地誌-總論-(建設部國立地理院, 1980), Geographyand Cartography(Needham,J., Science and Civilization in China, Vol. 3,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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