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일지(白凡逸志)로 본 대륙조선흔적(1) http://blog.daum.net/han0114/17045657
백범일지(白凡逸志)로 본 대륙조선흔적(2) http://blog.daum.net/han0114/17045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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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일지에 기록된 사건 장소가 대륙인가 반도인가?
[백범일지]는 독립운동가이며 정치가인 백범 김구(金九 1876∼1949)가 직접 쓴 자서전으로 상·하 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의 친필 원본은 백범 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에 보존되어 있는데, 김지림(金志林)을 통한 친필본의 윤문(潤文)으로 이 책이 간행되었다.[백과사전]
潤文: 글을 윤색함
광복 후 국사원(國史院)에 설치된 출판소에서 김지림·김흥두(金興斗)가 편집 실무와 보급을 맡아 나오게 된 ≪백범일지≫ 초판본의 반응이 예상 밖이어서 이듬해 1948년 3월 1일자로 재판본도 잇달아 나오게 되었다...원본을 토대로 한 미국 컬럼비아대학 소장의 김구가 미주 동포에 보낸 필사본 외에도 내용을 다소 늘여 베껴둔 김구의 친필 아닌 필사본도 나돌고 있어 한국 서지학사에 있어서 특기할 책이라 하겠다.
백범일지는 상·하편과 말미에 수록된〈나의 소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편은 김인(金仁)·김신(金信) 두 아들에게 쓴 편지형식으로 머리말을 1929년 5월 3일 상해에서 기록한 것으로 나와 있다. 이 책 서두에 실린 ‘저자의 말’은 1947년 개천절로 명기되어 있어 ≪백범일지≫가 근 20년에 걸쳐 완성된 것이다. 과장이나 수식이 없이 사실대로를 밝히는데 주력한 이 전기에서, 상해 집필의 상편이 〈우리집과 내 어린 적〉·〈기구한 젊은 때〉·〈방랑의 길〉·〈민족에 내놓은 몸〉의 순서로 엮어져 있다. 하권은 김구가 주도한 1932년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의 두 차례에 걸친 항일거사, 곧 이봉창(李奉昌)의사의 1·8일왕(日王)저격의거와 윤봉길(尹奉吉)의사의 4·29상해의거로 임시정부가 상해를 떠나 중국 각처로 표류하다가 충칭으로 옮겨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집필한 것으로서 칠순을 앞둔 망명가의 회고기록이 되고 있다.[백과사전]
위는 백과사전에 나오는 개략적인 내용이다.
김구선생의 친필 원본이 백범 김구선생 기념 사업회에 보존되어 있는데 그 친필본을 김지림(金志林)이 윤문하였고 친일인사 김흥두(金興斗)가 간행 전반을 진두지휘했다는 내용이다.
물론 潤文(글을 윤색함)은 김지림이 했겠지만 사건 진행상 대륙상황과 반도상황이라는 점에서 지역적으로 분명하게 괴리가 있음을 발견 할 수 있는데 혹 저자의 뜻과 의지와는 다르게 또는 실제 있었던 사건 지역과 다르게 편집 왜곡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책에서 그냥 선생의 뜻만 전달 받을 수 있는 것으로 만족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친일인사들이 출간 전 다수가 개입되었다는 정황이 있기 때문에 백범일지가 본의 아니게 온전할 수 없다는 점과 출간을 염두에 두고 의도적으로 지역문제 만큼은 수정되었을 가능성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때문에 일지에 기록된 사건이나 사건진행흐름 그리고 시간적인요소, 저자 백범선생이 느꼈던 애국애족감정등을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지역 위치적인 문제만을 가지고 친일인사들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문제를 타협하거나 협약이 있어 다르게 고치거나 수정되었을 가능이 많다고 하는 점에 있는 것이다.
이 책이 주는 민족이 기본적으로 가져야 할 교훈이나 지침은 충분히 우리가 되새겨 높은 가르침으로 근본을 삼아야 할 부분임에 틀림없지만 아주 중대한 사실에서 진실이 가려져 진정한 회고의 가치를 망실케 할 수도 있는 문제가 있다면 밝혀 바르게 해야 하는 점도 무시 될 순 없다.
사건장소가 한반도인가 아니면 대륙인가 하는 문제를 등한 시 할 수 없음은 선생이 태어나 어릴 적 모든 정서가 깊이 자란 곳이기에 더 없이 중요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동시에 실제로 우리민족 즉 조선인이 삶을 이어온 본거지 거류지를 바르게 모른되서야 이치적으로도 있을 수 없는 노릇이다.
만약 선생의 일지에서 우리가 알지 못하던 사실 조선말 대륙상황을 면밀하게 조명 할 수만 있다면 선생인들 좋아하지 않으시겠는가?
그것은 우리민족을 바르게 태어나게 할 수 있는 지름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지 여기저기에서 의심치 않을 수 없는 지역적, 위치적 모순이 분명하게 있고 의도적으로 감추려고 하는 면도 있으며 작심하고 표기하지 않는 문제성이 없지 않다.
그러한 것들은 분명히 친일적 사고에 의하여 편집과정에서 발생 한 것들일 것이다.
더군다나 미국 컬럼비아대학이 소장하고 있는 원본을 토대로 한 김구선생의 필사본 외에도 내용을 다소 늘여 베껴둔 김구선생의 친필 아닌 필사본도 많이 나돌고 있다 하니 조작되고 왜곡될 수 있는 소지가 다분히 많다는 점이다.
환생하신 백범선생을 우리가 대면하지 않고서는 그대로 받아 들일 수 없는 것들이다.
원본이 있어 그 원본 일지을 보고 반도역사 전체를 뒤 흔들 수 있는 문제가 발생 할 소지가 있다던가...대륙인가 반도인가 하는 지역적, 위치적인 문제가 밝혀질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면 그러한 것을 보거나 알고서 친일인사들이 그냥 관망만하고 지켜보고만 있었을 것이란 생각을 도저히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백범선생의 거룩한 뜻 이외 사건 중심적 장소, 위치가 반도인가 대륙인가를 확실하게 밝혀야 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중요한 문제를 두고 백범일지를 말할 수 없다.
진실을 밝혀 백범김구선생이 실제 태어나고 자란 곳이 어디인가를 우리가 마땅히 알아야 한다.
그 문제가 풀어지면 실타래처럼 엉커져 있는 대륙역사가 밝혀지는 것이다.
백범선생의 거룩한 뜻을 우리가 올바르게 전수하고 받으려면 이러한 문제부터 풀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함이 후손으로서 마땅히 지켜 나가야 할 보존의 도리란 것도 알아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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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백범일지
[한국일보]2007/04/04 23:02:09
내적 성장 과정·시대의 굴곡 아우른 ‘No.1 자서전’
다양한 구국사상들 비판적 수용
백범의 민족주의 진화과정 한눈에
정치인 필독서 목록 항상 상위에
<백범일지>의 원본. 백범의 둘째 아들인 김신 전 교통부 장관이 소장하고 있다.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제공
영국 총리를 지낸 처칠은 <제2차 세계대전 회고록>으로 1953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처칠의 예에서 보듯, 서구에서 자서전은 유명 인사라면 누구나 출간하는 문학의 중요 장르이며 역사적인 자료로도 높은 가치를 인정받는다.
근대 이후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자서전을 꼽으라면 백범 김구의 <백범일지(白凡逸志)>(국사원)가 단연 눈에 띈다. 올해로 출간된 지 60돌을 맞은 이 책이 여전히 우리시대의 명저로 인정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나라에 <백범일지>에 버금가는 자서전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 책이 초ㆍ중ㆍ고생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전 국민의 교양서로 자리매김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러한 이유만으로 이 책의 가치를 매긴다면, 그것은 나무만 보고 정작 숲은 보지 못하는 격이다.
변변한 교육도 받지 못한 백범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에 오르는 과정은 그야말로 극적이다. 이 책 <백범일지>는 암울한 시대 상황을 뚫고 민족 지도자로 거듭나는 백범의 생애와, 구한말부터 해방 직전까지의 사회상과 국제정세를 동시에 보여준다. 백범의 내면적 동력이 형성되고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도 이 책의 큰 미덕이다.
1997년 다시 나온 <백범일지>(돌베개)를 주해한 도진순 창원대 교수는 “백범은 동학, 위정척사, 불교, 기독교 등을 접한 뒤 근대적인 애국계몽운동가, 민족주의자, 통일운동가로 활동했다”며 “당시 거의 모든 구국 사상의 조류를 받아들인 셈”이라고 말했다.
도 교수의 지적처럼, <백범일지>를 더욱 비범하게 만든 것은 백범이 다양한 사상을 흡수하면서 보여준 인식의 전환 과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는 점이다. 백범은 과거의 것을 청산하고 새로운 것만 좇지 아니하고, 과거로부터 긍정적인 면을 계승하고 이를 새로운 사상과 융합하는 방식을 택했다.
따라서 백범의 삶을 관통하는 민족주의라는 사상은 동학의 평등적 세계관, 위정척사의 민족적 의식, 개화사상의 근대적 선진성을 계승하고 양반적 세계관, 화이론적 세계관, 식민주의와의 친화성 등을 탈각시키며 발전을 거듭한 것이다. <백범일지>는 구한말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창(窓)’ 역할을 담당하면서도 개인의 역동적인 사상의 변화와 성숙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의 제목에서 드러나듯, ‘일지(逸志)’는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다. 역사에 가려진 이야기를 글로 남기고자 했던 백범의 의중은 책의 구성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1947년 출간된 국사원 본을 기준으로 본다면 <백범일지>에는 상권, 하권 그리고 속편 격인 귀국 직후의 활동과 <나의 소원>이 수록돼 있다. 상권은 1928, 29년 백범이 상해임시정부에서 국무령에 취임한 이후 노모와 두 아들을 고국으로 떠나보낸 시기에 쓰여졌다.
따라서 목숨에 대한 위협이 상존하는 독립운동의 최고 지도자가 자신의 생애를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아들에게 남기는, 일종의 ‘유서’인 셈이다. 반면 하권은 1942년 중경임시정부 당시 해외 동포를 포함, 독자를 어느 정도 고려한 상황에서 독립운동의 경과를 알리기 위해 쓰여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상이한 성격의 상ㆍ하권에 대한 평가는 학자마다 견해가 다르다. 도진순 교수는 “상권은 사적인 내용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지만, 유서 형식의 글인 만큼 그 진정성이 탁월하다”고 평가했다. 반면 백범학술원의 신용하(이화여대 석좌교수) 원장은 “개인의 성장과정을 서술한 상권에 비해 자신이 걸어온 독립운동에 대한 공과를 냉정하게 평가한 하권의 사료적 가치가 더 높다”고 말했다.
<백범일지>는 이승만 정부 시절에는 금서로 분류돼 별로 대접을 받지 못했고 독자도 소수였다. 그러나 4ㆍ19 이후 백범 암살 사건에 대한 재조명이 이뤄지면서 <백범일지>도 뒤늦게 주목받는다.
많은 문인, 교수, 사회운동가들이 이 책을 읽고 큰 감동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대통령 후보 시절 이 책을 완독한 것이나,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최근 이 책을 추천 도서로 소개한 것 등을 보면 <백범일지>는 여전히 정치인의 필독서다.
<백범일지>의 아쉬운 점이라면 신탁 통치 이후 조국의 통일을 위해 노력한 백범의 행적을 찾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백범은 <나의 소원>을 통해 자신이 만들고자 한 대한민국의 모습과 이를 위한 실천 방안을 보여주었다.
백범은 당시 우리 민족에게 필요한 힘은 무력, 경제력, 자연과학이 아니라 ‘교육과 문화’라고 역설했다. 탈냉전 이후 문화로 대변되는 ‘연성 권력’(soft power)의 중요성을 주장한 조지프 나이 하버드대 교수의 견해에 견주어볼 때 백범의 선견지명이 돋보인다.
물론 백범이 당시 신탁통치, 분단, 냉전 등과 같은 현실 정치를 순진하게 받아들여 이상적인 주장을 펼쳤다는 비판이 존재한다. 게다가 해방 직후에는 교육과 문화가 아니라 안보와 경제가 훨씬 중요했다는 지적도 있다.
이에 대해 신용하 원장은 “눈앞의 정치적 이익에 사로잡히지 않고 강대국이 강요하는 구도를 뛰어넘으려 한 백범의 사상을 주목해야 한다”며 “<백범일지>를 통해 드러난 그의 사상은 ‘민족 통일’이라는 과제를 안고 있는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한 시대적 화두(話頭)이며 우리가 앞으로 계승하고 발전시켜야 할 과제”라고 주장했다.
백범 김구 연보
1876년 - 황해도 해주 출생, 아명은 창암(昌巖)
1896년 -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복수로 일본군 중위 살해. 투옥
1898년 - 탈옥 후 공주 마곡사에서 중이 됨
1914년 - 이름을 구(九), 호를 백범(白凡)으로 고침
1919년 - 중국으로 출국. 상해임시정부 경무국장 취임
1926년 - 임시정부 국무령 취임
1928, 29년 - <백범일지> 상권 집필
1940년 - 임시정부 초대 주석으로 선출
1942년 - <백범일지> 하권 집필
1945년 - 일본 항복 후 환국. 반탁운동 전개
1947년 - 국사원에서 <백범일지> 간행
1948년 - 김규식 등과 평양 행. 남북협상 후 조국통일에 관한 공동 성명서 발표
1949년 - 경교장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에 의해 피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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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일지 1947년 백범 생존때 첫 출간… 편집에 춘원 이광수도 참여
<백범일지(白凡逸志)>는 백범의 유일한 저서이다. 그의 명성에 걸맞게 대중적으로 사랑받고 있는 이 책은 현존 도서 가운데 이종(異種)이 많기로 유명하다. 1947년 국사원에서 처음 나온 뒤 여러 출판사를 통해 20여 종의 <백범일지>가 출간됐다. 어린이용 동화까지 포함하면 지금까지 80여 종이 나왔다.
<백범일지>는 크게 세 종류로 구분된다. 국사원에서 간행된 <백범일지>(1947), 백범의 측근에 의한 필사본을 바탕으로 서문당에서 간행된 <원본 백범일지>(1989), 유족이 공개해 집문당에서 영인한 친필본 <백범일지>(1994)가 그것이다. 물론 원본은 유족이 소유한 친필본이다. 그러나 대중에겐 국한문 혼용의 친필본보다 윤문을 거친 교열본이 친숙하다.
최초의 교열본인 국사원본 <백범일지>는 출간본의 시조라는 의미 외에도 백범 생존 당시 출간됐다는 사실 때문에 상당한 권위를 지닌다. 국사원본에는 유족이 소장한 원본에 없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1942년 이후 광복군과 임시정부의 활동, 그리고 귀국 후 백범의 행적과 <나의 소원>이 그 것이다. 이런 점 때문에 국사원본은 원본과 대등한 권위를 갖고 있다.
국사원본의 또 다른 특징은 편집에 춘원 이광수가 참여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국사원본은 교열본 중 문학적으로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국사원본은 원본을 많이 생략했다는 약점을 지니고 있다. 백범이 저술할 당시 상ㆍ하권을 예상하지 못했고, 집필에도 시차가 있어 내용의 중복으로 인한 생략과 요약이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또 원본에 수록된 윤봉길 의사 거사 직후 상해 민족운동단체의 동향과 이에 대한 백범의 비난에 대해 국사원본은 언급조차 하지 않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서문당본도 제목에서와 같이 원본으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이는 1947년 한민당 총무였던 장덕수 암살사건의 재판에 대한 증거자료로 사용하기 위해 급하게 필사한 것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른 교열본에 비해 삭제 부분이 적지만 필사본에서 누락한 부분을 그대로 반복하는 오류가 존재한다.
이에 대해 도진순 창원대 교수는 "<백범일지> 연구를 위한 영인본 외에도 대중을 위한 정확한 교열본이 필요하다"며 "거듭된 출간으로 인한 오류의 반복을 경계하고, 텍스트 본래의 순수성을 회복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일보]김회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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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윗줄 오른쪽 세 번째) 선생을 비롯, 임시정부 요인들이 지난 1934년 중국 저장성 자싱에서 임정에 도움을 준 중국인의 집에서 찍은 기념사진. 뒷줄 왼쪽부터 진동생, 성명미상 중국인, 김의한, 이동녕, 박찬익, 김구, 엄항섭, 주봉장(김구 선생의 임시거처를 마련해준 중국인 저보성씨의 아들). 백범기념관 제공
중경시절의 백범(1942년경)
휘호에 열중하는 백범
백범의 글씨는 심하게 떨림체이다. 이는 1938년5월 장사에서 저격받아 심장아래 박힌 총알이오른쪽아래로 이동하여 수전증이 심해진탓이다. 그래서 백범자신은 자신의 서체를'총알체'라고 농담하기도 했다
가흥시절의 백범-사진은 윤봉길의사의 의거로 일제의 압박을 피해 가흥에서 지낼 때. 사진 왼쪽부터 백범,진동생,이동녕,엄항섭(1935년)
[민정시찰차 개성에 들른 백범 일행]
선죽교.사진왼쪽부터 안낙생, 엄항섭, 백범, 이길호, 한 사람건너 선우진, 김선량, 한 사람 건너 민완식 (1947년)
[동아일보 자료 사진]
백범선생 사인 담긴 사진 [동아일보 자료 사진]
중국에서 환국 후 경교장 2층 집무실에서의 백범 김구 주석 [출처 : 경교장복원범민족추진위원회]
이승만과 김구 [동아일보 자료 사진]
환국하는 독립운동 거목 45년 11월 23일 임정요인들과 함께 김포공항을 통해 환국하는 김구. 환영시민들이 준 화환을 목에 걸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36년간의 광복을 맞은 임시정부의 김구주석이 감격어린 표정으로 귀국, 동포의 뜨거운 영접을 받았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백범일지-이 책은 독립운동가이며, 정치가인 백범 김구(金九,1876∼1949) 선생이 직접 쓴 자서전으로, 상·하 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백범일지 白帆逸志
지정번호 : 보물 제1245호
지정연월일 : 1997년 6월 12일
시 대 : 1947
종 별 : 원고본
수 량 : 2권 1책
재 료 : 저지
소 유 자 : 김신
소 재 지 :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135-28
백범일지≫는 독립운동가이며, 정치가인 백범 김구(金九, 1876∼1949)가 직접 쓴 자서전으로, 상·하 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의 친필 원본은 백범 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에 보존되어 있는데, 김지림(金志林)을 통한 친필본의 윤문으로 이 책이 간행되었다.
김구는 17살 때 조선왕조 최후의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동학(東學)에 입문하여 19세에 팔봉접주가 되어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을 공격했다. 21살 때는 국모의 원한을 갚는 거사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었으나 탈옥하여 공주 마곡사에 입산, 승려가 되기도 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 독립운동에 몸을 던졌으며, 안중근과 안명근 의사의 의거에 관여하였다. 1919년 3·1운동 직후 상해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과 내무총장을 거쳐 1926년 국무령에 취임하였다. 1939년에는 임시정부 주석에 취임하였고, 이듬해 한국광복군을 조직하여 항일무장부대를 편성, 1941년 대일선전포고를 하였다.
일기의 상편은 1929년 김구가 53세 되던 해에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1년 정도 독립운동을 회고하며 김인·김신 두 아들에게 쓴 국한문 혼용체의 편지형식으로, <우리집과 내 어릴 적>, <기구한 젊은 때>, <방랑의 길>, <민족에 내놓은 몸> 등의 순서로 기록하고 있다. 하편은 김구가 주도한 1932년 한인애국단의 두 차례에 걸친 항일거사, 곧 이봉창(李奉昌)의사의 1·8 일왕(日王)저격의거와 윤봉길(尹奉吉)의사의 4·29 상해의거로 표류하다가 중경(重慶)으로 옮겨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집필한 것으로서 칠순을 앞둔 망명가의 회고록이다. 이에는 <3·1운동의 상해>, <기적 장강 만리풍> 등의 제목 아래 민족해방을 맞게 되기까지 투쟁 역정을 기록하고 있다. 상·하편 뒤에 붙은 <나의 소원>은 <민족국가>·<정치이념>·<내가 원하는 우리나라> 등 세편의 글로 된 완전독립의 통일국가 건설을 지향하는 김구의 민족이념과 정신이 잘 나타나 있다.
≪백범일지≫는 김신(金信)에 의해 1947년 12월 15일 도서출판 국사원(國士院)에서 초간 발행을 한 이후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국내·외에서 10여본이 각 출판사를 통해 중간되었다. 또한, 엄항섭(嚴恒燮)이 엮은 ≪김구선생최근언론집≫ (1948)에도 수록되어 있어 민족통일의 교본으로 보급되어 왔다. 더욱이 김구가 상해 이후 중경까지 27년간 임시정부 요직을 두루 지내며 틈틈이 써놓은 친필 원본이란 것과 임시정부의 1차 사료로서 독립운동사 연구와 위인전기 사료로 귀중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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