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SINA-신중국

백범일지(白凡逸志)로 본 대륙조선흔적(2)

한부울 2009. 1. 26. 16:35
백범일지(白凡逸志)로 본 대륙조선흔적(1)http://blog.daum.net/han0114/17045657

 

백범일지(白凡逸志)로 본 대륙조선흔적(2)

 

12. 다시 인천 감옥으로


나는 앞으로 2년(1915)을 다 못 넘기고 인천 감옥으로 이감이 되었다. 나는 그 원인을 안다. 내가 서대문 감옥 제2과장 왜놈하고 싸운 일이 있는데 그 보복으로 그 놈이 나를 힘드는 인천 축항 공사로 돌린 것이었다.

 

과연 어디를 인천이라고 했을까?

천진일 가능성이 많다.

다른 페이지에 곧 기술할 것이다.


여러 동지가 서로 만나고 위로하며 쾌활하게 3년이나 살던 서대문 감옥과 작별하고 40명 붉은 옷 입은 전중이 떼에 편입이 되어서 쇠사슬로 허리를 얽혀서 인천으로 끌려갔다. 무술(戊戌)1898 3월 초열흘날 밤중에 옥을 깨뜨리고 도망한 내가 17년만에 쇠사슬에 묶인 몸으로 다시 이 옥문으로 들어올 줄을 누가 알았으랴.


문을 들어서서 둘러보니 새로이 감방이 증축되었으나 내가 글을 읽던 그 감방이 그대로 있고, 산보하던 뜰도 변함이 없다. 내가 호랑이같이 소리를 질러 도변이놈을 꾸짖던 경무청은 매음녀 검사소가 되고, 감리사가 좌기하던 내원당(來遠堂)은 감옥의 집물을 두는 곳간이 되고, 옛날 주사, 순검이 들끓던 곳은 왜놈의 천지를 이루었다.


마치 죽었던 사람이 몇십년 후에 살아나서 제 고향에 돌아와서 보는 것 같다. 감옥 뒷담 너머 용동 마루터기에서 옥에 갇힌 불효한 이 자식을 보겠다고 우두커니 서서 내려다보시던 선친의 얼굴이 보이는 듯하다. 그러나 오늘의 김 구가 그날의 김창수라고 할 자는 없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감방에 들어가니 서대문에서 먼저 전감된 낯익은 사람도 있어서 반가왔다.

어떤 자가 내 곁으로 쓱 다가앉아서 내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그 분 낯이 매우 익은데, 당신 김창수 아니오?" 한다.


참말 청천벽력이다. 나는 깜짝 놀랐다. 자세히 본즉 17년 전에 나와 한 감방에 있던 절도 10년의 문종칠(文鍾七)이다. 늙었을망정 젊었을 때 면목이 그대로 있다. 오직 그때와 다른 것은 이마에 움쑥 들어간 구멍이 있는 것이었다. 내가 의아한 듯이 짐짓 머뭇거리는 것을 보고 제 낯바닥을 내 앞으로 쑥 내밀어 나를 쳐다보면서,


"창수 김 서방, 나를 모를 리가 있소? 지금 내 면상에 이 구멍이 없다고 보면 아실 것 아니오? 나는 당신이 달아난 후에 죽도록 매를 맞은 문종칠이오. 그만하면 알겠구려" 하는 데는 나는 모른다고 버틸 수가 없어서 반갑게 인사를 하였다. 그자가 밉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였다.


문가는 날더러,

"당시에 인천 항구를 진동하던 충신이 무슨 죄를 짓고 또 들어오셨소?" 하고 묻는다. 나는 귀찮게 생각하여서,


"15년 강도요" 하고 간단히 대답하였다.


문가는 입을 삐죽거리며,

"충신과 강도는 상거가 심원한데요. 그 때에 창수는 우리 같은 도적놈들과 동거케 한다고 경무관한테까지 들이대지 않았소? 강도 15년은 맛이 꽤 무던하겠구려" 하고 빈정거린다.


나는 속에 불끈 치미는 것이 있었으나 문의 말을 탓하기는 고사하고 빌붙는 어조로,


"충신 노릇도 사람이 하고 강도도 사람이 하는 것 아니오? 한 때에는 그렇게 놀고 한 때에는 이렇게 노는 게지요. 대관절 문 서방은 어찌하여 또 이렇게 고생을 하시오?" 하고 농쳐 버렸다.


"나요? 나는 이번에는 감옥 출입이 일곱 번째니, 일생을 감옥에서 보내는 셈이오."

"역한 - 징역 기간 - 은 얼마요?"

"강도 7년에 5년이 되어서 한 반 년 지내면 또 한 번 세상에 다녀오겠소."

"또 한 번 다녀오다니, 여보시오 끔찍한 말도 하시오. 또 여기를 들어와서야 되겠소?"


"자본 없는 장사가 거지와 도적질이지요. 더욱이나 도적질에 맛을 붙이면 별 수가 없습니다. 당신도 여기서는 별 꿈을 다 꾸리다마는 사회에 나가만 보시오. 도적질하다가 징역한 놈이라고 누가 받자를 하오? 자연 농공상에 접촉을 못하지요. 개 눈에는 똥만 보인다고 도적질하던 놈은 배운 것이 그것이라 또 도적질을 하지 않소?"


문가는 이렇게 술회를 한다.

"그렇게 여러 번째라면 어떻게 감형이 되었소?" 하고 내가 물었더니 문은, "번번이 초범이지요. 지난 일을 다 말했다가는 영영 바깥바람을 못 쏘여 보게요?" 하고 흥하고 턱을 춘다.


나는 서대문에 있을 적에 어떤 강도가 중형을 지고 징역을 하는 중에 그의 공범으로서 잡히지 않고 있다가 횡령죄의 경형으로 들어온 것을 밀고하여 중형을 지우고 저는 감형을 받고서 다른 죄수들에게 미움을 받는 사람을 보았다. 이것을 생각하니 문가를 덧들여 놓았다가는 큰일이다. 이 자가 내가 17년 전 김창수라는 것을 밀고하거나 떠벌이는 날이면 모처럼 1년 남짓하면 세상에 나가리라던 희망은 허사가 되고 만다.


그래서 나는 문가에게 친절 우친절하게 대접하였다. 사식도 틈을 타서 문가를 주어 먹게 하고 감식 - 감옥에서 주는 밥 - 이라도 문가가 곁에 있기만 하면 나는 굶으면서도 그를 먹였다. 이러다가 문가가 만기가 되어 출옥할 때에 나의 시원함이란 내가 출옥하는 것보다 못지아니하였다.


나는 아침이면 다른 죄수 하나와 쇠사슬로 허리를 마주 매여 짝을 지어 축항 공사장으로 나갔다. 흙 지게를 등에 지고 10여 길이나 되는 사닥다리를 오르내리는 것이다. 서대문 감옥에서 하던 생활은 여기 비하면 실로 호강이었다. 반달이 못하여 어깨는 붓고 등은 헐고 발은 부어서 운신을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면할 도리는 없다. 나는 여러 번 무거운 짐을 진 채로 높은 사닥다리에서 떨어져 죽을 생각도 하였으나 그것도 할 수가 없는 것이 나와 마주 맨 사람은 대개 인천에서 구두 켤레나 담배 갑이나 훔치고 두서너 달 징역을 지는 판이라 그런 사람을 죽이는 것은 도리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조금도 편하려 하는 잔꾀를 버리고 '熱則熱殺 梨 寒則寒殺 梨(더울 때는 더위로 아사리를 죽이고, 추울 때는 추위로 아사리를 죽여라)'의 선가(禪家)의 병법으로 일하기에 아주 몸을 던져 버리고 말았다. 그리하였더니 몸이 아프기는 마찬가지라도 마음은 편안하였다.


13. 출옥한 이후


이렇게 한 지 두어 달에 소위 상표라는 것을 준다. 나는 도인권과 같이 이를 거절할 용기는 없고 도리어 다행으로 생각하였다.


날마다 축항 공사장에 가는 길에 나는 17년 전 부모님께 친절하던 박영문(朴永文)의 물상 객주 집 앞을 지난다. 옥문을 나서서 오른쪽 첫 집이었다. 그는 후덕한 사람이요, 내게는 깊은 동정을 준 이다. 아버지와는 동갑이라 해서 매우 친밀히 지냈다고 한다.


우리들이 옥문으로 들고 날 때에 박 노인은 자기 집 문전에 서서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이러한 은인을 목전에 보면서도 가서 내가 아무개요 하고 절할 수 없는 것이 괴로웠다.


박 씨 집 맞은편 집이 안호연(安浩然)의 물상객주였다. 안 씨 역시 내게나 부모님께나 극진하게 하던 이였다. 그도 전대로 살고 있었다. 나는 옥문을 출입할 때마다 마음으로만 늘 두 분께 절하였다.


7월 어느 심히 더운 날 돌연히 수인 전부를 교회당으로 부르기로 나도 가서 앉았다. 이윽고 분감장(分監長)인 왜놈이 좌중을 향하여,


"55호!"


하고 부른다. 나는 대답하였다. 곧 일어나 나오라 하기로 단 위로 올라갔다. 가출옥으로 내보낸다는 뜻을 선언한다. 좌중 수인들을 향하여 점두례를 하고 곧 간수의 인도로 사무실로 가니, 옷 한 벌을 내어준다. 이로써 붉은 전중이가 변하여 흰 옷 입은 사람이 되었다. 옥에 맡아 두었던 내 돈이며 물건이며 내 품값이며 조수히 내어준다.


옥문을 나서서 첫 생각은 박영문, 안호연 두 분을 찾는 일이었으나 지금 내가 김창수라는 것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 이롭지 못할 것을 생각하고 안 떨어지는 발길을 억지로 떼어서 그 집 앞을 지나 옥중에서 사귀인 어떤 중국 사람의 집을 찾아가서 그날 밤을 묵었다.


이튿날 아침에 전화국으로 가서 안악 우체국으로 전화를 걸고 내 아내를 불러달라고 하였더니 전화를 맡아 보는 사람이 마침 내게 배운 사람이라 내 이름을 듣고는 반기며 곧 집으로 기별한다고 약속하였다.


(1914.7)나는 당일로 서울로 올라가 경의선 열차를 타고 신막(新幕)에서 일숙(一宿)하고, 이튿날 사리원에 내려 배넘이 나루를 건너 나무리벌을 지나니 전에 없던 신작로에 수십 명 사람이 쏟아져 나오고 그 선두에 선 것은 어머님이셨다. 어머님은 내 걸음걸이를 보시며 마주 오셔서 나를 붙들고 낙루하시면서,


"너는 살아왔지마는 너를 그렇게도 보고 싶어하던 화경(化敬)이 네 딸은 서너 달 전에 죽었구나. 네게 말할 것 없다고 네 친구들이 그러길래 기별도 아니하였다. 그나 그뿐인가, 화경이가 일곱 살밖에 안된 어린 그 어린것이 죽을 때에 저 죽거든 아예 옥중에 계신 아버지한테 기별 말라고, 아버지가 들으시면 오죽이나 마음이 상하시겠냐고 그랬단다"


라고 말씀을 하셨다. 나는 그 후에 곧 화경의 무덤을 찾아보아 주었다. 화경의 무덤안악읍 동쪽 산기슭 공동묘지에 있다.


어머니 뒤로 김용제 등 여러 사람이 반갑게 또 감개 깊게 나를 맞아 주었다.


나는 안신 학교로 갔다. 내 아내가 안신 학교에 교원으로 있으면서 교실 한 간을 얻어 가지고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내는 다른 부인들 틈에 섞여서 잠깐 내 얼굴을 바라보고는 보이지 아니하였다. 그는 내 친구들과 함께 내가 저녁을 먹게 하려고 음식을 차리러 간 것이었다. 퍽 수척한 것이 눈에 띄었다.


며칠 후에 읍내 이인배(李仁培)의 집에서 나를 위하여 위로연을 배설하고 기생을 불러 가무를 시켰다. 잔치 도중에 나는 어머님께 불려가서,


"내가 여러 해 동안 고생을 한 것이 오늘 네가 기생을 데리고 술 먹는 것을 보려고 한 것이냐?" 하시는 걱정을 들었다. 나를 연회석(宴會席)에서 불러낸 것은 아내가 어머님께 고발한 때문이었다.


어머님과 내 아내와는 전에는 충돌이 없지 아니하였으나 내가 옥에 간 후로 서울로 시골로 고생하고 다니시는 동안에 고부가 일심동체가 되어서 한 번도 뜻 아니 맞는 일이 없었다고 아내가 말하였다. 아내는 서울서 책 매는 공장에도 다녔고, 어떤 서양부인 선교사가 학비를 줄 테니 공부를 하라는 것도 어머님과 화경이가 고생이 될까 보아서 아니 했노라고 내외간에 말다툼이 있을 때면 번번이 그 말을 내세웠다.


우리 내외간에 다툼이 생기면 어머니는 반드시 아내의 편이 되셔서 나를 책망하셨다. 경험에 의하면 고부간에 무슨 귓속말이 있으면 반드시 내게 불리하였다. 내가 아내의 말을 반대하거나 조금이라도 아내에게 불쾌한 빛을 보이면 으레 어머님의 호령이 내린다.


"네가 옥에 있는 동안에 그렇게 절을 지키고 고생한 아내를 박대해서는 안 된다. 네 동지들의 아내들 중에 별별 일이 다 있었지마는 네 처만은 참 절행(節行)이 갸륵하다. 그래선 못쓴다"


하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집안일에 하나도 내 마음대로 해본 일이 없었고, 내외 싸움에 한 번도 이겨 본 일이 없었다. 내가 옥에서 나와서 또 한 가지 기뻤던 것은 준영 삼촌이 내 가족에 대하여 극진히 하신 것이었다.


어머님이 아내와 화경이를 데리고 내 옥바라지하러 서울로 가시는 길에 해주 본향에 들르셨을 적에 준영 삼촌은 어머님께 젊은 며느리를 데리고 어떻게 사고무친(四顧無親)한 타향에 가느냐고, 당신이 집을 하나 마련하여 형수님과 조카며느리 고생을 아니시킬 테니 서울 갈 생각은 말고 본향에 계시라고 굳이 만류하시는 것을 어머님은, 며느리는 옥과 같은 사람이라 어디를 가도 걱정이 없다 하여 뿌리치고 서울로 가셨다는 것이었다.


또 어머님과 아내가 서울서 내려와서 종산(鍾山) 우종서(禹宗瑞) 목사에게 의탁하여 있을 때에는 준영 삼촌이 소바리에 양식을 실어다 주셨다고 한다.


어머니는 이렇게 준영 삼촌의 일에 고맙게 말씀하시고 나서, "네 삼촌 님이 네게 대한 정분이 전과 달라 매우 애절하시다. 네가 나온 줄만 알면 보러 오실 것이다. 편지나 하여라" 하셨다.


어머니는 또 내 장모도 전 같지 않아서 나를 소중하게 아니, 거기도 출옥하였다는 기별을 하라고 하셨다. 내가 서대문 감옥에 있을 때에 장모가 여러 번 면회를 와 주셨다.


나는 곧이라도 준영 숙부를 찾아가 뵈옵고 싶었으나, 아직 가출옥 중이라 어디로 가려면 일일이 헌병대에 허가를 얻어야 하는데 왜놈에게 고개 숙이고 청하기가 싫어서 만기만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는 정초에 세배 겸 준영 숙부를 찾을 작정이었다.


그 후 내 거주 제한이 해제되어서 김용진 군의 부탁으로 수일 타작 간검(看檢)을 다녀왔더니 준영 숙부가 다녀가셨다. 점잖은 조카를 보러 오는 길이라 하여 남의 말을 빌어 타고 오셔서 이틀이 지나도 내가 아니 돌아오기 때문에 섭섭하게 돌아가셨다는 어머님의 말씀이었다.


정초가 되었다. 나는 찾을 어른들을 찾고 어머님을 찾아 세배 오는 손님들 접대도 끝이 나서 초닷새 날은 해주로 가서 준영 숙부님께 뵈옵고 오래간만에 성묘도 하리라고 벼르고 있던 차에 바로 초나흗날 저녁때에 재종제 태운이가 준영 숙부님이 별세하셨다는 기별을 가지고 왔다. 참으로 경악하였다. 다시는 준영 숙부의 얼굴을 뵈옵지 못하게 되었다.


14.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를

 

아버님 4 형제 중에 아들이라고는 나 하나뿐 준영 숙부는 딸 하나가 있을 뿐이었다. 오직 하나인 조카 나를 못보고 떠나시는 숙부의 심정이 어떠하셨을까. 백영 백부는 관수(觀洙), 태수(泰洙) 두 아들이 있었으나 다 조졸(早卒)하여 없고 딸 둘도 시집간 지 얼마 아니하여 죽어서 자손이 없고, 필영, 준영 두 숙부는 각각 딸 하나씩이 있을 뿐이었다.


날이 새는대로 나는 태운과 함께 해주로 달려가서 준영 숙부의 장례를 주장하여 텃골 고개 동녘 기슭에 산소를 모셨다. 그러고는 돌아가신 준영 숙부의 가사 처리를 대강 하고 선친 묘소에 손수 심은 잣나무를 점검하고 거기를 떠난 뒤로는 이내 다시 본향을 찾지 못하였다. 당숙모와 재종조가 생존하시다 하나 뵈올 길이 망연하다.


나는 아내가 보고 있는 안신 학교 일을 좀 거들어 주었으나, 소위 전과자인 나로서 그뿐 아니라, 시국(時局)이 변하여서 나 같은 사람이 전과 같이 당당하게 교육 사업에 종사할 수도, 더구나 신민회와 같은 정치 운동을 다시 계속할 수도 없었다. 지금까지 애국자던 사람들은 해외로 망명하거나 문을 닫고 숨을 길밖에 없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왜놈은 우리 민족의 청소년을 우리 지도자가 돌아보지 못하도록 백방으로 막아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어서 농촌 사업이나 해보려고 마음을 먹고 김홍량 일문의 농장 중 소작인의 풍기가 괴악한 동산평(東山坪) 농장의 농감이 되기를 자청하였다. 동산평이란 데는 수백 년 궁장으로 감관들이 협잡을 하고 농민을 타락시켜서 집집이 도박이요, 사람사람이 모두 속임질과 음해로 일을 삼았다. 할 수 없이 가난하고 괴악하게 된 부락이었다. 게다가 이곳은 수토(水土)가 좋지 못하여 토질 구덩이로 소문이 났었다.


김씨네는 내가 이런 데로 가는 것을 원치 아니하여 경치도 수토도 좋은 다른 농장으로 가라고 권하였다. 그들은 내가 한문 야학(夜學)으로 벗을 삼아 은거하는 생활을 하려는 것으로 아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는 고집하여 동산평으로 왔다.


나는 도박하는 자, 학령 아동이 있고도 학교에 안 보내는 자의 소작을 불허하고 그 대신 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자에게 상등답(上等畓) 2 두락을 주는 법을 내었다. 이리하여 학부형이 아니고는 땅을 얻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이 농장 마름으로 있으면서 소작인을 착취하고 도박을 시키던 노형극 군 형제의 과분한 소작지를 회수하여서 근면하고도 땅이 부족한 사람에게 분배하였다. 이 때문에 나는 노형극에게 팔을 물리고 집에 불을 놓는다는 위협을 받았으나 조금도 굴치 아니하고 마침내 노 군 형제를 항복 받아서 다시는 성군작당(成群作黨 : 무리를 모으고 패거리를 만드는 것 - 편집자 주*)하여 남을 음해하는 일을 아니하기로 맹세를 시켰다.


이곳은 본래 학교가 없던 데라 나는 곧 학교를 세우고 교원(敎員)을 연빙하였다. 처음에는 20명 가량의 아동으로 시작하였으나 이 농장 작인의 자녀가 다 입학하게 되니 제법 학교가 커져서 교원 한 사람으로는 부족하여 나 자신 시간으로 도왔다. 장덕준재령에서, 지일청(池一淸)은 나와 같은 지방에서 나와 비슷한 농촌 계발 운동을 하고 있었다.


내 운동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어서 동산평이 도박이 없어지고, 이듬해 추수 때에는 작인의 집에 볏섬이 들어가 쌓였다고 작인의 아내들이 기뻐하였다. 지금까지는 노름빚과 술값으로 타작마당에서 1년 소출(所出)을 몽땅 빚쟁이에게 빼앗기고 농민은 키만 들고 집으로 돌아갔다는 것이었다.


나는 농촌 중에도 가장 괴악한 동산평을 이 모양으로 그만하면 쓰겠다 할 농촌을 만들어 보려 하였다. 그러나 기미년(己未年) 3월에 일어난 만세 소리에 나는 이 사업에서 손을 떼고 고국을 떠나게 되었다. 떠날 날을 하루 앞두고 나는 작인들을 동원하여 만세 부르는 운동에는 아무 관심도 없는 듯이 가래질을 하고 있었다. 내 동정을 살피러 왔던 왜 헌병도 이것을 보고는 안심하고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삼일운동과 5.4운동은 대륙에서 벌어진 운동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46045

 

그 이튿날 나는 사리원으로 가서 경의선 열차를 타고 압록강을 건넜다. 신의주에서 재목상(材木商)이라 하여 무사히 통과하고 안동현에서는 좁쌀 사러 왔다고 칭하였다.


안동현에서 이레(2일)를 묵고 영국 국적이륭양행(怡隆洋行) 를 타고 동지 15명나흘 만에 무사히 상해 포동마두(浦洞碼頭)도착하였다. 안동현을 떠날 때에는 아직도 얼음덩어리가 첩첩이 쌓인 것을 보았는데 황포 강가에는 벌써 녹음이 우거졌다. 공승서리(公昇西里) 마호에서 첫날밤을 잤다.


이때에 상해에 모인 인물 중에 내가 전부터 잘 아는 이는 이동녕, 이광수, 김홍서(金弘敍), 서병호(徐炳浩) 네 사람이었고, 그밖에 일본, 아령, 구미 등지에서 이번 일로 모인 인사와 본래부터 와 있는 이가 5백 여 명이나 된다고 하였다.


이튿날 나는 일찍부터 가족을 데리고 상해에 와 있는 김보연(金甫淵) 집을 찾아서 거기서 숙식을 하게 되었다. 김 군은 내가 장련에서 교육 사업을 총감하는 일을 할 때에 나를 성심으로 사랑하던 청년이다. 김 군의 지도로 이동녕, 이광수, 김홍서, 서병호 등 옛 동지를 만났다.


임시 정부의 조직에 관하여서는 후일 국사에 자세히 오를 것이니 약하거니와 나는 위원의 한 사람으로 뽑혔었다. 얼마 후에 안창호 동지가 미주로부터 와서 내무총장으로 국무총리를 대리하게 되고 총장들이 아직 모이지 아니하였으므로 차장제(次長制)를 채용하였다. 나는 안 내무총장에게 임시 정부 문 파수를 보게 하여 달라고 청원하였다.


도산은 처음으로 내 뜻을 의아하게 여기는 모양이었으나 내가 이 청원을 한 동기를 듣고는 쾌락하였다. 내가 본국에 있을 때에 순사 시험 과목을 어디서 보고 내 자격을 시험하기 위하여 혼자 답안을 만들어 보았으나 합격이 못된 일이 있었다. 나는 실력이 없는 허명(虛名)을 탐하기를 두려워할뿐더러, 감옥에서 소제를 할 때에 내가 하느님께 원하기를, 생전에 한 번 우리 정부의 정청(政廳)의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게 하여 줍소서 하였단 말을 도산 동지에게 한 것이었다.


안 내무총장은 내 청원을 국무회의에 제출한 결과 돌연 내게 경무국장의 사령을 주었다. 다른 총장들은 아직 취임하기 전이라 윤현진(尹顯振), 이춘숙(李春塾), 신익희(申翼熙) 등 새파란 젊은 차장들이 총무의 직무를 대행할 때라 나이 많은 선배로 문 파수를 보게 하면 드나들기에 거북하니 경무국장으로 하였다는 것이었다.


나는 순사 될 자격도 못 되는 사람이 경무국장이 당하냐고 반대하였으나 도산은,


"만일 백범이 사퇴하면 젊은 사람들 밑에 있기를 싫어하는 것같이 오해될 염려가 있으니 그대로 행공(行公)하라" 고 강권하기로 나는 부득이 취임하여 시무하였다.


15. 진기한 일도 많으나...


대한민국(大韓民國) 2아내가 인(仁)을 데리고 상해로 오고 4어머님이 또 오시니 오래간만에 재미있는 가정을 이루게 되었다. 그 해에 신(信)이 났다.

 

임시정부이동일지

1.대한민국임시정부 설립이 1919년 4월10일

2.상하이(上海, 상해): 1919년 4월~ 1932년 5월
3.항저우(杭州, 항주): 1932년 5월 ~ 1932년 10월
4.전장(鎭江): 1932년 10월 ~ 1932년 11월
5.난징(南京, 남경): 1932년 11월~1937년 11월
6.자싱(嘉興, 가흥): 1935년 10월~1936년 2월 피난
7.창사(長沙, 창샤): 1937년 12월~1938년 7월
8.광저우(廣州, 광주): 1938년 7월~1938년 11월
9.류저우(柳州): 1938년 11월~1939년 5월
10.치장(?江): 1939년 5월~ 1940년 9월
11충칭(重慶, 중경): 1940년 9월 ~ 1945년 11월
12..구이린(桂林): 피난

 

나의 국모(國母) 보수 사건이 24년 만에 이제야 왜의 귀에 들어갔다는 보도가 왔다.


내가 본국을 떠난 뒤에야 형사들도 안심하고 김 구가 김창식이라는 것을 왜 경찰에 말한 것이다. 아아, 눈물나는 민족 의식이여! 왜의 정탐 노릇은 하여도 속에는 애국심과 동포애를 감추고 있는 것이다. 이 정신이 족히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독립 국민의 행복을 누리게 할 것을 아니 믿고 어이 하랴.


민국 5년에 내가 내무총장이 되었다.


그 안에 아내는 신을 낳은 뒤에 낙상으로 인하여 폐렴이 되어서 몇 해를 고생하다가 샹해 보륭의원(寶隆醫院)의 진찰로 서양인이 시설한 격리 병원인 홍구 폐병원(虹口肺病院)에 입원하기로 되어 보륭 의원에서 한 마지막 작별이 아주 영결이 되고 민국 6년 1월 1일에 세상을 떠나매 법계 숭산로(法界 嵩山路)의 공동묘지에 매장하였다.


내 본의는 독립 운동 기간 중에는 혼상(婚喪)은 물론하고 성대한 의식을 쓰는 것을 불가하게 알아서 아내의 장례를 극히 검소하게 할 생각이었으나, 여러 동지들이 내 아내가 나를 위하여 평생에 무쌍한 고생을 한 것이 곧 나라 일이라 하여 돈을 거두어 성대하게 장례를 지내고 묘비까지 세워주었다. 그 중에 유세관(柳世觀) 인욱(寅旭) 군은 병원 교섭과 묘지 주선에 성력을 다하여 주었다.


아내가 입원할 무렵에는 인이도 병이 중하였으나 아내 장례 후에는 완쾌하였고, 신이는 겨우 걸음발을 탈 때요, 아직 젖을 떼지 아니하였으므로 먹기는 우유를 먹었으나 잘 때는 어머님의 빈 젖을 물었다. 그러므로 신이가 말을 배우게 된 때에도 할머니란 말은 알고 어머니란 말을 몰랐다.


민국 8년에 어머님은 신이를 데리고 환국하시고 이듬해 9년에는 인이도 보내시라는 어머님의 명으로 인이도 내 곁을 떠나서 본국으로 갔다. 나는 외로운 몸으로 상해에 남아 있었다.


민국 9년 11월에 나는 국무령(國務領)으로 선거되었다. 국무령은 임시정부의 최고 수령이다. 나는 임시 의정원(臨時議政院) 의장 이동녕을 보고 아무리 아직 완성되지 아니한 국가라 하더라도 나같이 미미한 사람이 한 나라의 원수(元首)가 된다는 것은 국가의 위신에 관계된다 하여 고사(固辭)하였으나 강권에 못 이기어 부득이하여 취임하였다.


나는 윤기섭(尹琦燮), 오영선(吳永善), 김 갑(金甲), 김 철(金澈), 이규홍(李圭洪)으로 내각을 조직한 후에 헌법 개정안을 의정원에 제출하여 독재적인 국무령제를 고쳐서 평등인 위원제로 항고 지금은 나 자신도 국무위원의 하나로 일하고 있다.


내 60 평생을 돌아보니 너무도 상리(常理)에 벗어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대개 사람이 귀하면 궁함이 없겠고 궁하고는 귀함이 없을 것이언마는, 귀역궁 불귀역궁(貴亦窮 不貴亦窮 : 귀한 신분이 되어도 가난하게 지내고 귀한 신분이 아니어도 역시 가난하게 지냄 - 편집자 주*)로 평생을 궁하게 지내었다. 우리나라가 독립하는 날에는 삼천리강산이 다 내 것이 될는지 모르거니와 지금의 나는 넓고 넓은 지구면에 한 치 땅, 한 간 집도 가진 것이 없다.

 

삼천리강산은 백범선생의 글이 아니라 편집자가 주석을 단 형식에  불과하다.

본국은 삼천리강산이라는 공식을 암암리에 심어주기 위함이 아닌가 한다.


나는 과거에는 궁을 면하고 영화를 얻으려고 몽상도 하고 버둥거려 보기도 하였다. 옛날 한 유(韓愈)는 '송궁문(送窮文 : 가난을 보내는 글 - 편집자 주*)'을 지었으나 나는 차라리 '우궁문(友窮文 : 가난을 벗하는 글 - 편집자 주*)'을 짓고 싶다. 자식들에게 대하여 아비된 의무를 조금도 못하였으니 너희들이 나를 아비라 하여 자식된 의무를 하여 주기를 원치 아니한다. 너희들은 사회의 은택을 입어서 먹고 입고 배우는 터이니, 사회의 아들이 되어 사회를 아비로 여겨 효도로 섬기면 내 소망은 이에서 더 만족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붓을 놓기 전에 두어 가지 더 적을 것이 있다.


내가 동산평 농장에 있을 때 일이다. 기미 2월 26일이 어머님의 환갑이므로 약간 음식을 차려서 가까운 친구나 모아 간략하나마 어머님의 수연(壽宴)을 삼으리라 하고 내외가 상의하여 진행하던 차에 어머님이 눈치를 채시고 지금 이 어려운 때에 환갑잔치가 당치 아니하니 후년에 더 넉넉하게 살게 된 때에 미루라 하시므로 중지하였더니, 그 후 며칠이 못하여 나는 본국을 떠났다.


어머님이 상해에 오신 뒤에도 마음을 먹고 있었으나 독립 운동을 하노라고 날마다 수십 수백의 동포가 혹은 목숨을, 혹은 집을 잃는 참보를 듣고 앉아서 설사 힘이 있기로서니 어떻게 어머님을 위하여 수연을 차릴 경황이 있으랴. 하물며 내 생일 같은 것은 입 밖에 내인 일도 없었다.


민국 8년이었다. 하루는 나석주(羅錫疇)가 조반 전에 고기와 반찬거리를 들고 우리 집에 와서 어머님을 보고 오늘이 내 생일이라 옷을 전당을 잡혀서 생일 차릴 것을 사왔노라 하여서 처음으로 영광스럽게 생일을 차려 먹은 일이 있었다. 나석주는 나라를 위하여 동양척식회사(東洋拓植會社)폭탄을 던지고 제 손으로 저를 쏘아 충혼이 되었다.


나는 그가 차려준 생일을 영구히 기념하기 위하여, 또 어머님의 화연(花宴-환갑잔치)을 못해 드린 것이 황송하여 평생에 다시는 내 생일을 기념치 않기로 하고, 이 글에도 내 생일 날짜를 기입하지 아니한다.


인천 소식을 듣건대 박영문은 별세하고 안호연은 생존하다 하기로 신편에 회중시계 한 개를 사보내고 내가 김창수란 말을 하여 달라 하였으나 회보는 없었고, 성태영길림(吉林)에 와 산다 하기로 통신하였으며, 유인무는 북간도에서 누구에게 죽임을 당하고 그 아들 한경(漢卿)은 아직도 거기 살고 있다고 한다.

 

길림도 지금의 길림이 아니다.

북간도 간도도 지금의 간도 개념으로 보면 안된다.


나와 서대문 감옥에서 이태나 한 방에 있으며 내게 글을 배우고 또 내게 끔찍이 하여 주던 이종근(李種根)은 아라사 여자를 얻어 가지고 상해에 와서 종종 만났다. 이종근은 의병장 이운룡(李雲龍)의 종제로 헌병 보조원을 다니다가 이운룡이 죽이려 하매 회개하고 그를 따라 의병으로 다니다가 잡혀 왔었다. 김형진의 유족의 소식은 아직도 모르고 강화 김주경의 유족의 소식도 탐문하는 중이다.


지난 일의 연월일은 어머님께 편지로 여짜와서 기입한 것이다.

 

(일정을 기억하지 못한 것도 있겠지만 편집과정에서 의도적으로 그러한 점을 이용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내 일생에 제일 행복은 몸이 건강한 것이다. 감옥 생활 5년에 하루도 병으로 쉰 날은 없었고, 인천 감옥에서 학질로 반일(半日)을 쉰 적이 있을 뿐이다. 병원이라고는 혹을 떼노라고 제중원에 1개월, 상해에서는 서반아 감기로 20일 동안 입원하였을 뿐이다.


기미년에 고국을 떠난 지 우금 10여 년에 중요한 일, 진기한 일도 많으나 독립 완성 전에는 말할 수 없는 것이매 아니 적기로 한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한 지 일년 넘은 대한민국 11년 5월 3일에 임시 정부 청사에서 붓을 놓는다.

 

본국으로 기록했다가 처음으로 고국이라 했다

<상권 끝>

 

하편 머리말


내 나이 이제 67.(1942) 중경(重慶) 화평로(和平路) 오사야항(吳師爺巷) 1호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에서 다시 이 붓을 드니, 53세 때 상해(上海) 법조계(法曹界) 마랑로(馬浪路) 보경리(普慶里) 4호 임시정부 청사에서 '백범일지' 상권을 쓰던 때로부터 14년의 세월이 지난 후이다.


나는 왜 '백범일지'를 썼던고?


내가 젊어서 붓대를 던지고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제 힘도 재주도 헤아리지 아니하고 성패도 영욕도 돌아봄이 없이 분투하기 30여 년, 그리고 명의만이라도 임시 정부를 지키기 10여 년에 이루어 놓은 일은 하나도 없이 내 나이는 60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나는 침체된 국면을 타계하고 국민의 쓰러지려 하는 3.1 운동의 정신을 다시 떨치기 위하여 미주(美洲)와 하와이에게 있는 동포들에게 편지로 독립 운동의 위기를 말하여 돈의 후원을 얻어 가지고 열혈 남자(熱血男子)를 물색하여 암살과 파괴의 테러 운도을 계획한 것이었다.


동경 사건과 상해 사건 등이 다행히 성공되는 날이면 냄새나는 내 가죽 껍데기도 최후가 될 것을 예기하고 본국에 있는 두 아들이 장성하여 해외로 나오거든 그들에게 전하여 달라는 듯으로 쓴 것이 이 '백범일지'다.


나는 이것을 등사하여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몇 분 동지에게 보내어 후일 내 아들들에게 보여주기를 부탁하였었다. 그러나 나는 죽을 땅을 얻지 못하고 천한 목숨이 아직 남아서 '백범일지' 하편을 쓰게 되었다. 이때에는 내 두 아들도 이미 장성하였으니 그들을 위하여서 이런 것을 쓸 필요는 없어졌다.


내가 지금 이것을 쓰는 목적은 해외에 있는 동지들이 내 50년 분투 사정을 보고 허다한 과오로 은감(殷鑑)을 삼아서 다시 복철을 밟지 발기를 원하는 노파심에 있는 것이다.


지금 이 하편을 쓸 때의 정세는 상해에서 상편을 쓸 때의 것보다는 훨씬 호전되었다. 그때로 말하면 임시 정부라고 외국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 한인으로도 국무위원과 십수인의 의정원 의원 외에는 와 보는 자도 없었다. 그야말로 이름만 남고 실상은 없는 임시 정부였었다.


그런데 하편을 쓰는 오늘날로 말하면 중국 본토에 있는 한인의 각 당 각 파가 임시 정부를 지지하고 옹호할뿐더러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만여 명 동포가 이 정부를 추대하여 독립 운동 자금을 상납하고 있다.


또 외교로 보더라도 종래에는 중국·소련·미국의 정부 당국자가 비밀 찬조는 한 일이 있으나 공식으로는 거래가 없었던 것이, 지금에는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 씨가,


'한국은 장래에 완전한 자주 독립국이 될 것이다'라고 방송하였고, 중국에서도 입법원장(立法院長) 손 과(孫科) 씨가 공공한 석상에서,


'일본의 제국주의를 박멸하는 중국의 양책(良策)은 한국 임시 정부를 승인함에 있다'

 

이것은 대륙역사관으로 보았을 때 상당히 중요한 말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처음 태동시점부터 대륙조선과의 관계설정을 별개로 한 다른 주체로서 생성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관계설정으로 인하여 일단 국민당정부와 대륙귀속권 문제를 놓고 충돌 할 필요성이 없었고 미래 한반도를 근거로 한 근린관계만을 생각하게 했다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적극적으로 나서 지금의 한반도를 영토로 하는 한국임시정부를 승인코자 한 것이다.


고 부르짖었으며, 우리 자신도 워싱턴외교 위원부를 두어 이승만 박를 위원장으로 임명하여 외교와 선전에 힘을 쓰고 있고, 또 군정으로 보더라도 한국(韓國) 광복군(光復軍)이 정식으로 조직되어 이청천(李靑天)으로 총사령을 삼아 서안(西安)에 사령부를 두고 군사의 모집과 훈련과 작전을 계획 중이며, 재정도 종래에는 독립 운동의 침체, 인심의 퇴축, 적의 압박, 경제의 곤란 등으로 임시 정부의 수입이 해가 갈수록 감하여 집세를 내기도 어려울 지경이던 것이 홍구 - 상해 - 폭탄 사건 이래로 내외국인의 임시 정부에 대한 인식이 변하여서 점차로 정부의 수입도 늘어, 민국 23년도에는 수입이 53만 원 이상에 달하였으니 실로 임시 정부 설립 이래의 첫 기록이었다.

 

서안 사령부는 미국조계지라고 하지만 아직 조선 잔여세력권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모양으로 임시 정부의 상태는 상해에서 이 책 상편을 쓸 때보다 나아졌지마는 나 자신으로 말하면 일부일(一復日) 노병과 노쇠를 영접하기에 골몰하다. 상해 시대를 죽자고나 하던 시대라 하면 중경 시대는 죽어가는 시대라고 할 것이다.


만일 누가 어떤 모양으로 죽는 것이 네 소원이냐 한다면, 나는 최대한 욕망은 독립이 다 된 날 본국(本國)에 들어가 영광의 입성식(入城式)을 한 뒤에 죽는 것이지마는, 적더라도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동포들을 만나보고 오는 길에 비행기 위에서 죽어서 내 시체를 던져 그것이 산에 떨어지면 날짐승, 길짐승의 밥이 되고, 물에 떨어지면 물고기의 뱃속에 영장하는 것이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세상은 고해(苦海)라더니 살기로 어렵거니와 죽기도 또한 어렵다. 나는 서대문 감옥에서와 인천 축항 공사장에서 몇 번 자살할 생각을 가졌으나 되지 못하였고 안 매산(安梅山) 명근(明根) 형도 모처럼 굶어 죽으려고 나흘이나 식음을 전폐한 것을 서대문 옥리들이 억지로 달걀을 입에 흘려 넣어 죽지 못하였으니 죽는 것도 자유가 있는 자라야 할 일이어서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다.


나의 70 평생을 회고하면 살려고 산 것이 아니요, 살아져서 산 것이고 죽으려고 하여도 죽지 못한 이 몸이 필경은 죽어져서 죽게 되었다.


1 운동의 상해 - 1. 경무국장 당시의 사건들


기미년(1919) 3월, 안동현에서 영국사람 솔지의 배를 타고 상해에 온 나는 김보연 군을 앞세우고 이동녕 선생을 찾았다. 서울 양기탁 사랑에서 서간도 무관 학교 의논을 하고 헤어지고는 10여 년만에 서로 만나는 것이었다. 그 때에 광복 사업을 준비할 전권의 임무를 맡던 선생의 좋은 신수는 10여 년 고생에 약간 쇠하여 얼굴에 주름살이 보였다. 서로 악수하니 감개가 무량하였다.


내가 상해에 갔을 때에는 먼저 와 있던 인사들이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조직하여 김규식(金奎植)파리 평화 회에 대한민국 대표로 파견한 지 벌써 두 달이나 후였다.


3.1 운동이 일어난 뒤에 각지로부터 모여온 인사들이 임시 정부임시 의정원을 조직하여 중외에 선포한 것이 4월 초순이었다.


이에 탄생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수반은 국무총리 이승만 박사, 그 밑에 내무, 외무, 재무, 법무, 교통등 부서가 있어 광복 운동의 여러 선배 수령을 그 총장에 추대하였다.


총장들이 원지(遠地)에 있어서 취임치 못하므로 청년들을 차장으로 임명하여 총장을 대리케 하였다. 내가 내무총장 안창호 선생에게 문 파수를 청원한 것이 이때였다.


나는 문 파수를 청원한 것이 경무국장으로 취임하게 되니 이후 5년간 심문관 판사·검사의 직무와 사형 집행까지 혼자 겸하여서 하게 되었다. 왜 그런고 하면, 그 때에 범죄자의 처벌은 설유 방송(說諭放送 : 잘 타일러 내보냄 - 편집자 주*) 아니면 사형이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김도순(金道淳)이라는 17세의 소년이 본국에 특파되었던 임시 정부 특파원의 뒤를 따라 상해에 와서 왜 영사관에 매수되어 그 특파원을 잡는 앞잡이가 되려고 돈 10원을 받은 죄로 미성년자임에도 불구하고 극형에 처한 것은 기성 국가에서 보지 못할 일이었다.


내가 맡은 경무국의 임무는 기성 국가에서 하는 보통 경찰 행정이 아니요, 왜의 정탐의 활동을 방지하고 독립 운동자가 왜에게 투항하는 것을 감시하며, 왜의 마수가 어느 방면으로 들어오는가를 감시하는 데 있다. 이 일을 하기 위하여 나는 정보과 사복의 경호원(警護員) 20여 명을 썼다. 이로써 홍구의 왜 영사관과 대립하여 암투하는 것이다.


당시 프랑스 조계 당국은 우리의 국정을 잘 알므로 일본 영사관에서 우리 동포의 체포를 요구해온 때에는 미리 우리에게 알려주어서 피하게 한 뒤에 일본 경관을 대동하고 빈 집을 수사할 뿐이었다.


왜구 전중의일(田中義一)이 상해에 왔을 때에 황포마두(黃浦碼頭)에서 오성륜(吳成倫)이 그에게 폭탄을 던졌으나 폭발되지 아니하므로 권총을 쏜 것은 전중은 아니 맞고 미국인 여자 한 명이 맞아 죽은 사건이 났을 때일본, 영국, 법국(法國 : 프랑스를 말함 - 편집자 주*)세 나라가 합작하여 법조계의 한인을 대거 수색한 일이 있었다.

 

그 당시 상해에 한인 즉 조선인들이 많이 살았다는 말이다.

조선인들이 국민당정부국민으로 살아 갈 것인가 아니면 임시정부한국인으로 할 것인가를 놓고 갈등했을 시기일 것이다.


우리 집에는 어머님이 본국으로부터 상해에 오신 때였다. 하루는 이른 새벽에 왜 경관 일곱 놈이 프랑스 경관 서대납(西大納)을 앞세우고 내 침실에 들어섰다. 서대납은 나와 잘 아는 자라 나를 보더니 옷을 입고 따라오라 하여 왜 경관이 나를 결박하려는 것을 금하였다.


프랑스 경무청에 가니 원세훈(元世勳) 등 다섯 사람이 벌써 잡혀와 있었다. 프랑스 당국은 왜 경관이 우리를 심문하는 것도 허락치 아니하고 왜 영사관으로 넘기라는 것도 아니 듣고 나로 하여금 다섯 사람을 담보케 한 후에 나 아울러 모두 석방해 버렸다.


우리 동포 관계의 일에는 내가 임시 정부를 대표하여 언제나 배심관이 되어 프랑스 조계의 법정에 출석하였으므로 현행범이 아닌 이상 내가 담보하면 석방하는 것이었다. 왜 경찰이 나와 프랑스 당국과의 관계를 안 뒤로는 다시는 내 체포를 프랑스 당국에 요구하는 일이 없고, 나를 법조계 밖으로 유인해내려는 수단을 쓰므로 나는 한 걸음도 조계 밖에를 나가지 아니하였다.


내가 5년간 경무국장을 하는 동안에 생긴 기이한 일을 일일이 적을 수도 없고, 또 이루 다 기억도 못하거니와 그 중에 몇 가지만을 말하련다.


고등 정탐 선우 갑(鮮于甲)을 잡았을 때에 그는 죽을죄를 깨닫고 사형을 자원하기로 장공속죄(將功贖罪 : 장차 공을 세워 죄를 갚음 - 편집자 주*)를 할 서약을 받고 살려 주었더니 나흘 만에 도망하여 본국으로 들어갔다.


강인우(康麟佑)는 왜 경부로 상해에 와서 총독부에서 받아 가지고 온 사명을 말하고 내게 거짓 보고 자료를 달라 하기로 그리하였더니 본국에 돌아가서 그 공으로 풍산 군수가 되었다.


구한국 내무대신 동농(東農) 김가진(金嘉鎭) 선생이 3.1 선언 후에 왜에게 받았던 남작을 버리고 대동당(大同黨)을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아들 의한(懿漢) 군을 데리고 상해에 왔을 적 일이다. 왜는 남작이 독립 운동에 참가하였다는 것이 수치라 하여 의한의 처의 종형 정필화를 보내어 동농 선생을 귀국케 할 운동을 하고 있음을 탐지하고 정 가를 검거하여 심문한즉 낱낱이 자백하므로 처교하였다.


황학선(黃鶴善)은 해주 사람으로 3.1운동 이전에 상해에 온 자인데 가장 우리 운동에 열심히 있는 듯하기로 타처에 오는 지사들을 그 집에 유숙케 하였더니 그 자가 이것을 기호로 하여 일변 왜 영사관과 통하여 거기서 돈을 얻어 쓰고 일변 애국 청년에게 임시 정부를 악선전하거나 나창헌(羅昌憲), 김의한 등 십수 명이 작당하여 임시정부를 습격한 일이 있었으나 이것은 곧 진압되고 범인은 전부 경무국의 손에 체포되었다가 그들이 황학선의 모략에 속은 것이 분명하므로 모두 설유하여 방송하고 그 때에 중상한 나창헌, 김기제는 입원시켜 치료를 받게 하였다.


이 사건을 조사한 결과 황학선이가 왜 영사관에서 자금과 지령을 받아 우리 정부 각 총장과 경무국장을 살해할 계획으로 나창헌이 경성 의전의 학생이던 것을 이용하여 3층 양옥을 세를 내어 병원 간판을 붙이고, 총장들과 나를 그리로 유인하여 살해할 계획이던 것이 판명되었다.


나는 이 문초의 기록을 나창헌에게 보였더니 그는 펄펄 뛰며 속은 것을 자백하고 장인 황학선을 사형에 처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 때는 벌써 황학선은 처교(處絞 : 교수형에 처함 - 편집자 주*)된 뒤였다. 나는 나, 김 등이 전연 악의가 없고 황의 모략에 속은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2. 임시정부의 온갖 사건들


한 번은 박 모라는 청년이 경무국장 면회를 청하기로 만났다. 그는 나를 대하자 곧 낙루(落淚)하며 단총 한 자루와 수첩 하나를 내 앞에 내어 놓으며, 자기는 수일 전에 본국으로부터 상해에 왔는데 왜 영사관에서 그의 체격이 건장함을 보고, 김 구를 죽이라 하고 성공하면 돈도 많이 주려니와 설사 실패하여 그가 죽는 경우에는 그의 가족에게는 나라에서 좋은 토지를 주어 편안히 살도록 할 터이라 하고,


만일 이에 응치 아니하면 그를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엄벌한다 하기로 부득이 그러마 하고 무기를 품고 법조계에 들어와 길에서 나를 보기도 하였으나, 독립을 위하여 애쓰는 사람을 자기도 대한 사람이면서 어찌 감히 상하랴 하는 마음이 생겨서 그 단총과 수첩을 내게 바치고 자기는 먼 지방으로 달아나서 장사나 하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을 믿고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놓아 보냈었다.


나는 '의심하는 사람이어든 쓰지를 말고, 쓰는 사람이어든 의심을 말라'는 것을 신조로 하여 살아 왔거니와 그 때문에 실패한 일도 없지 아니하였으니 한태규(韓泰圭) 사건이 그 예다.


한태규는 평양 사람으로서 매우 근실하여 내가 7,8년을 부리는 동안에 내외국인의 신임을 얻었었다. 내가 경무국장을 사면한 후에도 그는 여전히 경무국 일을 보고 있었다.


하루는 계원(桂園) 노백린(盧伯麟) 형이 아침 일찍 내 집에 와서 뒤 노변에 한복 입은 젊은 여자의 시체가 있다 하기로 나가 본즉 그것은 명주(明珠)의 시체였다.


명주는 상해에 온 후로 정인과(鄭仁果), 황석남(黃錫南)이 빌어 가지고 있는 집에 식모로도 있었고, 젊은 사내들과 추행도 있다는 소문이 있던 여자다. 어느 날 밤에 한 번 한태규가 이 여자를 동반하여 가는 것을 보고 한 군도 젊은 사람이니 그런가보다 하고 지나친 것이 얼마 오래지 아니한 것이 기억되었다.


시체를 검사하니 피살이 분명하다. 머리에 피가 묻었으니 처음에는 때린 모양이요, 목에는 바로 매었던 자국이 있는데, 그 수법이 내가 서대문 감옥에서 활빈당 김 진사에게 배운 것을 경호원들에게 가르쳐 준 그것이었다. 여기서 단서를 얻어 가지고 조사한 결과 그 범인이 한태규인 것이 판명되어 프랑스 경찰에 말하여 그를 체포케 하여 내가 배심관으로 그의 문초를 듣건대 그는 내가 경무국장을 사직한 후로부터 여러 가지 사정으로 왜에게 매수되어 그 밀정이 되어 명주와 비밀히 통기하던 중, 명주가 한이 밀정인 것을 눈치를 알게 되매 한은 명주가 자기의 일을 내게 밀고할 것을 겁내어서 죽인 것이라는 것을 자백하였다.


명주는 행실이 부정할망정 애국심은 열렬한 여자였다. 그는 종신 징역의 형을 받았다. 후에 나와 동관(同官)이던 나 우(羅愚)도 한태규가 돈을 흔히 쓰는 것으로 보아 오래 의심은 하였으나 확적한 증거도 없이 내게 그런 말을 고하면 내가 동지를 의심한다고 책망할 것을 두려워하여 말을 아니하고 있었다고 하였다.


후에 한태규는 다른 죄수들을 선동하여 양력 1월 1일에 옥을 깨뜨리고 도망하기로 약속을 하여 놓고 제가 도리어 감옥 당국에 밀고하여 간수들이 담총하고 경비하게 한 후에 약속한 시간이 되매 여러 감방문이 일제히 열리며 칼, 몽둥이, 돌멩이, 재 같은 것을 가지고 죄수들이 뛰어나오는 것을 한태규가 총을 놓아 죄수 여덟 명을 즉사케 하니 다른 죄수들은 겁을 내어 움직이지 못하매 파옥 소동이 진정되었다.


그리고 이 사건을 재판하는 마당에 한태규는 제가 쏘아 죽인 여덟 명의 시체를 담은 관머리에 증인으로 출정하더란 말을 들었고, 또 그 후에 한의 편지를 받았는데 그는 같은 죄수 여덟 명을 죽인 것이 큰 공로라 하여 방면이 되었고, 전에 잘못한 것은 다 회개하니 다시 써 달라고 하였다. 나중에 듣건대 이 편지에 대한 내 회답이 없는 것을 보고 겁이 나서 본국으로 도망하여 무슨 조그마한 장사를 하고 있다고 하였다. 내가 이런 흉악한 놈을 절대로 신임한 것이 다시 세상에 머리를 들 수 없을 만큼 부끄러워서 심히 고민하였다.


내가 경무국장이던 때에 있었던 일은 이만큼 말하고 상해에 임시 정부가 생긴 이후에 일어난 우리 운동 전체의 파란곡절을 회상해 보기로 하자.


기미년, 즉 대한민국 원년(元年)에는 국내나 국외를 물론하고 정신이 일치하여 민족 독립 운동으로만 진전되었으나 당시 세계 사조(世界思潮)의 영향을 따라서 우리 중에도 점차봉건이니, 무산 혁명이니 하는 말을 하는 자가 생겨서 단순하던 우리 운동선에도 사상의 분열·대립이 생기게 되었다.

 

대륙공산주의 생성활동기

민족주의는 봉건회귀 또는 대륙조선 복구세력과 공화민주세력이었을 것이고

공산주의는 러시아 혁명 동조세력으로 새롭게 생성 태동한 시기였다고 보여진다.


임시정부 직원 중에도 민족주의니 공산주의니 하여 음으로 양으로 투쟁이 개시되었다. 심지어 국무총리 이동휘가 공산 혁명을 부르짖고, 이에 대하여 대통령 이승만은 데모크라시를 주장하여 국무회의 석상에서도 의견이 일치하지 못하고 대립과 충돌을 보는 기괴한 현상이 층생첩출(層生疊出 : 무슨 일이 자꾸 겹쳐 일어남 - 편집자 주*)하였다.


예하면 국무회의서는 러시아에 보내는 대표로 여운형, 안공근, 한형권(韓亨權) 세 사람을 임명하였건마는, 정작 여비가 손에 들어오매 이동휘는 제 심복인 한형권 한 사람만을 몰래 떠나보내고 한이 시베리아를 지났을 때쯤 하여서 이것을 발표하였다.


이동휘는 본래 강화 진위대 참령(江華鎭衛隊參領)으로서 군대 해산 후에 해삼위(海蔘威) - 블라디보스톡 -로 건너가 이름을 대자유(大自由)라고 행세한 일도 있다.

 

해삼위를 블라디보스톡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블라디보스톡이 아니다.

러시아들은 지금도 구()블라디보스톡을 회상하는 듯한 면이 있다.

 

하루는 이동휘가 내게 공원에 산보 가기를 청하기로 따라갔더니 조용한 말로 자기를 도와달라 하기로, 나는 좀 불쾌하여서 내가 경무국장으로 국무총리를 호위하는데 내 직책에 무슨 불찰이 있느냐고 물었다. 이 씨는 손을 흔들며, 그런 것이 아니라 대저 혁명(革命)이라는 것은 피를 흘리는 사업인데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독립 운동은 민주주의 혁명에 불과하니 이대로 독립을 하더라도 다시 공산주의 혁명을 하여야 하겠은즉, 두 번 피를 흘림이 우리 민족의 대불행이 아닌가, 그러니 적은 이 - 아우님이라는 뜻이니 이동휘가 수하 동지에게 즐겨 쓰는 말이다 - 도 나와 같이 공산 혁명을 하는 것이 어떤가 하고 내 의향을 묻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나는 이 씨에게,


"우리가 공산 혁명을 하는 데는 제 3 국제공산당(國際共産黨 : 흔히 코민테른이라 부르는 제 3 인터내셔널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공산주의인터내셔널[Communist International]을 지칭하는 것으로, 1차 세계대전으로 제 2 인터내셔널이 와해된 후 레닌의 지도로 각국 노동운동의 좌파가 모여 1919년 모스크바에서 창립되었다 - 편집자 주*)의 지휘와 명령을 안 받고도 할 수 있습니까?"


하고 반문하였다. 이 씨는 고개를 흔들며,

"안되지요" 한다. 나는 강경한 어조로,


"우리 독립 운동은 우리 대한민국 독자의 운동이요, 어느 제3자의 지도나 명령에 지배되는 것은 남에게 의존하는 것이니 우리 임시 정부 헌장에 위반되오. 총리가 이런 말씀을 하심은 대불가(大不可)니 나는 선생의 지도를 받을 수 없고, 또 선생께 자중하시기를 권고하오"


하였더니 이동휘는 불만한 낯으로 돌아섰다.

 

3. 공산주의자와의 대립


이 총리가 몰래 보낸 한형권이 러시아 국경 안에 들어서서 우리 정부의 대표로 온 사명을 국경 관리에게 말하였더니 이것이 모스크바 정부에 보고되어 그 명령으로 철도 각 정거장에는 재류 한인 동포들이 태극기를 두르고 크게 환영하였다. 모스크바에 도착하여서는 소련 최고 수령 레닌이 친히 한형권을 만났다. 레닌이 독립 운동 자금은 얼마나 필요하냐 하고 묻는 말에 한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2백만 루블이라고 대답한즉 레닌은 웃으며,


"일본을 대항하는 데 2백만 루블로 족하겠는가?" 하고 반문하므로 한은 너무 적게 부른 것을 후회하면서 본국과 미국에 있는 동포들이 자금을 마련하니 당장 그만큼이면 된다고 변명하였다. 레닌은,


"제 민족의 일은 제가 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고 곧 외교부에 명하니 2백만 루블을 한국 임시 정부에 지불하게 하니 한형권은 그 중에서 제 1차분으로 40만 루블을 가지고 모스크바를 떠났다.


이동휘는 한형권이 돈을 가지고 떠났다는 기별을 받자 국무원에는 알리지 아니하고 또 몰래 비서장이요, 자기의 심복인 김 립(金立)을 시베리아로 마중 보내어 그 돈을 임시 정부에 내놓지 않고 직접 자기 손에 받으려 하였으나 김 립은 또 제 속이 따로 있어서 그 돈으로 우선 자기 가족을 위하여 북간도에 토지를 매수하고 상해에 돌아와서도 비밀히 숨어서 광동(廣東) 여자를 첩으로 들이고 호화롭게 향락 생활을 시작하였다. 임시 정부에서는 이동휘에게 그 죄를 물으니 그는 국무총리를 사임하고 러시아로 도망하여 버렸다.


한형권은 다시 모스크바로 가서 통일 운동의 자금이라 칭하고 20만 루블을 더 얻어 가지고 몰래 상해에 들어와 공산당 무리들에게 돈을 뿌려서 소위 국민 대표 대회라는 것을 소집하였다. 그러나 공산당도 하나가 못되고 세 파로 갈렸으니, 하나는 이동휘를 수령으로 하는 상해파요, 다음은 안병찬(安秉贊), 여운형(呂運亨)을 두목으로 하는 일쿠츠크파요, 그리고 셋째는 일본에 유학하는 학생으로 조직되어 일인 복본화부(福本和夫)의 지도를 받는 김준연(金俊淵) 등의 엠엘(ML)당 파였다. 엠엘당은 상해에서는 미미하였으나 만주에서는 가장 맹렬히 활동하였다.


있을 것은 다 있어서 공산당 외에 무정부당까지 생겼으니 이을규(李乙奎), 이정규(李丁奎) 두 형제와 유자명(柳子明) 등은 상해, 천진 등지에서 활동하던 아나키스트의 맹장들이었다.


한형권의 붉은 돈 20만 원으로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 대회라는 것은 참말로 잡동사니회라는 것이 옳을 것이었다. 일본, 조선, 중국, 아령 각처에서 무슨 단체 대표, 무슨 단체 대표하는 형형색색의 명칭으로 2백여 대표가 모여들었는데 그 중에서 일쿠츠크파, 상해파 두 공산당이 민족주의자인 다른 대표들을 서로 경쟁적으로 끌고 쫓고 하여 일쿠츠크파는 창조론(創造論), 상해파는 개조론(改造論)을 주장하였다.


창조론이란 것은 지금 있는 정부를 해소하고 새로 정부를 조직하자는 것이요, 개조론이란 것은 현재의 정부를 그냥 두고 개조만 하자는 것이었다. 이 두 파는 암만 싸워도 귀일(歸一 : 하나로 합쳐지는 것 - 편집자 주*)이 못 되어서 소위 국민 대표회는 필경 분열되고 말았고, 이에 창조파에서는 제 주장대로 '한국 정부'라는 것을 '창조'하여 본래 정부의 외무총장인 김규식이 그 수반이 되어서 이 '한국 정부'를 끌고 해삼위로 가서 러시아에 출품하였으나 모스크바가 돌아보지도 아니하므로 계불입량(計不入量 : 따져도 도무지 양에 차지 않음 - 편집자 주*)하여 흐지부지 쓰러지고 말았다.


이 공산당 두 파느이 싸움 통에 순진한 독립 운동자들까지도 창조니 개조니 하는 공산당 양파의 언어 모략에 현혹되어 시국이 요란하므로 당시 내무총장이던 나는 국민 대표회에 대하여 해산을 명하였다. 이것으로 붉은 돈이 일으킨 한 막의 희비극이 끝을 맺고 시국은 안정되었다.


이와 전후하여 임시 정부 공금 횡령범 김 립은 오면직(吳冕稙), 노종균(盧宗均) 두 청년에게 총살을 당하니 인심이 쾌하다 하였다.


임시 정부에서는 한형권의 러시아에 대한 대표를 파면하고 안공근을 대신 보내었으나 별 효과가 없어서 임시 정부와 러시아와의 외교 관계는 이내 끊어지고 말았다.


상해에 남아 있는 공산당원들은 국민 대표회가 실패한 뒤에도 좌우 통일이라는 미명으로 민족 운동자들을 달래어 지금까지 하여 오던 민족적 독립 운동을 공산주의 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하자고 떠들었다. 재중국 청년 동맹(在中國靑年同盟), 주중국 청년 동맹(住中國靑年同盟)이라는 두 파 공산당의 별동대도 상해에 있는 우리 청년들을 쟁탈하면서 같은 소리를 하였다.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가 통일하여서 공산 혁명 운동을 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또 희극이 생겼다. '식민지에서는 사회 운동보다 민족 독립 운동을 먼저 하여라' 하는 레닌의 새로운 지령이다. 이에 어제까지 민족 독립 운동을 비난하고 조소하던 공산당원들은 경각간에 민족 독립 운동자로 졸변하여 민족 독립이 공산당의 당시(黨是)라고 부르짖었다. 공산당이 이렇게 되면 민족주의자도 그들을 배척할 이유가 없어졌으므로 유일 독립당 촉성회(唯一獨立黨促成會)라는 것을 만들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은 입으로 하는 말만 고쳤을 뿐이요, 속은 그대로 있어서 민족 운동이란 미명하에 민족주의자들을 끌어넣고는 그들의 소위 헤게모니로 이를 옭아매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민족주의자들도 그들의 모략이나 전술을 다 알아서 그들의 손에 쥐이지 아니하므로 자기네가 설도하여 만들어 놓은 유일 독립 촉성회를 자기네 음모로 깨뜨려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생긴 것이 한국 독립당(韓國獨立黨)이니 이것은 순전한 민족주의자 단체여서 이동녕, 안창호, 조완구, 이유필(李裕弼), 차이석(車利錫), 김붕준(金朋濬), 송병조(宋秉祚) 및 나 김 구가 수뇌가 되어서 조직한 것이었다. 이로부터서 민족 운동자와 공산주의자가 딴 조직을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민족주의자가 단결하게 되매 공산주의자들은 상해에서 할 일을 잃고 남북 만주로 달아났다. 거기는 아직 동포들의 민족주의적 단결이 분산, 박약하고 또 공산주의의 정체에 대한 인식이 없었으므로 그들은 상해에서보다 더 맹렬하게 날뛸 수가 있었다.


예하면, 이상룡(李尙龍)의 자손은 공산주의에 충실한 나머지 살부회(殺父會) - 아버지 죽이는 회 - 까지 조직하였다. 그러나 제 아비를 제 손으로 죽이지 않고 회원끼리 서로 아비를 바꾸어 죽이는 것이라 하니 아직도 사람의 마음이 조금은 남은 것이었다.


이 붉은 무리는 만주의 독립 운동 단체인 정의부(正義府), 신민부(新民府), 참의부(參議府), 남군정서(南軍政署), 북군정서(北軍政署) 등에 스며들어가 능란한 모략으로 내부로부터 분해시키고 상극을 시켜 이 모든 기관을 혹은 붕괴하게 하고 혹은 서로 싸워서 여지없이 파괴하여 버리고 동포끼리 많은 피를 흘리게 하니 백광운(白狂雲), 김좌진(金佐鎭), 김규식(金奎植) - 나중에 박사라고 된 김규식이 아니다 - 등 우리 운동에 없지 못할 큰 일꾼들이 이 통에 아까운 희생이 되고 말았다.


4. 껍데기만 남은 임시 정부

 

국제 정세의 우리에게 대한 냉담, 일본의 압박 등으로 민족의 독립 사상이 날로 감쇄하던 중에 공산주의자의 교란으로 민족 전선은 분열에서 혼란으로, 혼란에서 궤멸로 굴러 떨어져갈 뿐이었는데 엎친 데 덮치기로 만주의 주인이라 할 장작림(張作霖)일본의 꾀에 넘어가서 그의 치하에 있는 독립 운동자를 닥치는 대로 잡아 일본에 넘기고 심지어는 중국 백성들이 한인의 머리를 베어 가지고 가서 왜 영사관에서 한 개에 많으면 10원, 적으면 3,4원의 상금을 받게 되고


나중에는 우리 동포 중에도 독립군의 소재를 밀고하는 일까지 생겼으니, 여기는 독립 운동자들이 통일이 없이 셋, 다섯으로 갈라져서 재물, 기타로 동포에게 귀찮음을 준 책임도 없지 아니하다. 이러하던 끝에 왜가 만주를 점령하여 소위 만주국이란 것을 만드니 우리 운동의 최대 근거지라 할 만주에 있어서의 우리 운동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어 버렸다.

 

만주국은 만주에 거주하고 있던 우리 조선인들을 주축으로 한 일제 꼭두각시 정부임을 알 수 있다.


애초에 만주에 있던 독립 운동 단체는 다 임시 정부를 추대하였으나 차차로 군웅할거(群雄割據)의 폐풍이 생겨, 정의부와 신민부가 우선 임시 정부의 절제를 안 받게 되었다. 그러나 참의부만은 끝까지 임시 정부에 대한 의리를 지키더니 이 셋이 합하여 새로 정의부가 된 뒤에는 아주 임시 정부와는 관계를 끊고 자기들끼리도 사분오열하여 서로 제 살을 깎고 있다가 마침내 공산당으로 하여 서로 제 목숨을 끊는 비극을 연출하고 막을 내리고 말았으니, 진실로 슬픈 일이다.


상해의 정세도 소위 양패구상(兩覇俱傷-편집자 주*)으로 둘이 싸워 둘이 다 망한 셈이 되었다.


한국독립당 하나로 겨우 민족진영의 껍데기를 유지할 뿐이었다.


임시정부에는 사람도 돈도 들어오지 아니하여 대통령 이승만이 물러나고 박은식(朴殷植)이 대신 대통령이 되었으나, 대통령제를 국무령제(國務領制)로 고쳐 놓을 뿐으로 나가고 제 1세 국무령으로 뽑힌 이상룡(李尙龍)서간도로부터 상해로 취임하러 왔으나 각원을 고르다가 지원자가 없어 도로 서간도로 물러가고, 다음에 홍면희(洪冕喜) - 나중에 홍진(洪震) - 가 선거되어 진강(鎭江)으로부터 상해에 와서 취임하였으나 역시 내각 조직에 실패하였다. 이리하여 임시정부는 한참 동안 무정부 상태에 빠져서 의정원에서 큰 문제가 되었다.

 

만리장성 북쪽 만주세력을 기반으로 한 임시정부가 사상갈등에 전이되면서 만주세력들이 붕괴되었고 민족적 당위성이 쇠락하고 정치적인 힘을 잃으면서 와해되는 형국이다. 지금도 민족이 그러한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에서 보면 우리민족만큼 어리석은 민족도 없으며 먼저 만든 그들조차 벗어 던져버린 하찮은 외래 사상 때문에 티격태격 긴 시간동안 그토록 심하게 대립하면서 갈등한 민족도 없을 것이란 생각에 그저 안타까운 마음만 든다.

 

하루는 의정원 의장 이동녕 선생이 나를 찾아와서 내가 국무령이 되기를 권하였으나 나는 두 가지 이유로 사양하였다. 첫째 이유는 나는 해주 서촌의 일개 김 존위 - 경기도 지방의 영좌에 상당한 것 - 의 아들이니 우리 정부가 아무리 초창 시대의 추형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나같이 미천한 사람이 일국의 원수가 된다는 것은 국가와 민족의 위신에 큰 관계가 있다는 것이요, 둘째로 말하면 이상룡, 홍면희 두 사람도 사람을 못 얻어서 내각 조직에 실패하였거늘 나같은 자에게 더욱 응할 인물이 없을 것이란 것이었다.


그런즉 이 씨 말이 첫째는 이유가 안 되는 것이니 말할 것 없고, 둘째로 말하면 나만 나서면 따라 나설 사람이 있다고 강권하므로 나는 승낙하였다. 이에 의정원의 정식 절차를 밟아서 내가 국무령으로 취임하였다.


나는 윤기섭(尹琦燮), 오영선(吳永善), 김 갑 김 철, 이규홍 등으로 내각을 조직하고 현재의 제도로는 내각을 조직하기가 번번히 곤란할 것을 통절히 깨달았으므로 한 사람에게 책임을 지우는 국무령제를 폐지하고 국무위원제(國務委員制)로 개정하여 의정원의 동의를 얻었다. 그래서 나는 국무 위원의 주석이 되었으나 제도로 말하면 주석은 다만 회의의 주석이 될 뿐이요, 모든 국무 위원은 권리에나 책임에나 평등이었다. 그리고 주석은 위원들이 번차례로 할 수 있는 것이므로 매우 편리하여 종래의 모든 분리를 일소할 수가 있었다.


이렇게 하여 정부는 자리가 잡혔으나 경제 곤란으로 정부의 이름을 유지할 길도 망연하였다. 정부의 집세가 30원, 심부름꾼 월급이 20원 미만이었으나 이것도 낼 힘이 없어서 집주인에게 여러 번 송사를 겪었다.


다른 위원들은 거의 다 가권(家眷 : 거느리는 가족들 - 편집자 주*)이 있었느나 나는 아이들 둘도 다 본국 어머님께로 돌려보낸 뒤라 홀몸이었다. 그래서 나는 임시 정부 정청에서 자고, 밥은 돈벌이 직업을 가진 동포의 집으로 이 집 저 접 돌아다니면서 얻어먹었다. 동포의 직업이라 하여 전차 회사의 차표 검사원인 인스펙터가 제일 많은 직업이어서 70명 가량 되었다.


나는 이들의 집으로 다니며 아침저녁을 빌어먹는 것이니 거지 중에는 상거지였다. 다들 내 처지를 알므로 누구나 내게 미움 밥은 아니주었다고 믿는다. 특히 조봉길(曺奉吉), 이춘태(李春台), 나 우, 진희창(秦熙昌), 김의한 같은 이들은 절친한 동지들이니 더 말할 것 없고, 다른 동포들도 내게 진정으로 동정하였다.


엄항섭(嚴恒燮) 군은 프랑스 공무국(工務局)에서 받는 월급으로 석오(石吾) - 이동녕의 당호 - 나 나 같은 궁한 운동자를 먹여 살렸다. 그의 전실 임(林) 씨는 내가 그 집에 갔다가 나올 때면 대문 밖에 따라나와서 은전 한두 푼을 내 손에 쥐어주며,


"얘기 사탕이나 사 주셔요"


하였다. 아기라 함은 내 둘째 아들 신을 가리킨 것이다. 그는 초산에 딸 하나를 낳고 가엾이 세상을 떠나서 노가만(盧家彎) 공동 묘지에 묻혔다. 나는 그 무덤을 볼 때마다 만일 엄군에게 그러할 힘이 아니 생기면 내라도 묘비 하나는 해 세우리라 하였으나 숨어서 상해를 떠나는 몸이라 그것을 못한 것이 유감이다. 오늘날도 노가만 공동묘지 임씨의 무덤이 눈에 암암하다. 그는 그 남편이 존경하는 늙은이라 하여 내게 그렇게 끔찍하게 해주었다.


나는 애초에 임시 정부의 문 파수를 지원하였던 것이 경무국장으로, 노동국총판(勞動局總辦)으로, 내무총장으로, 국무령으로 오를 대로 다 올라서 다시 국무 위원이 되고 주석이 되었다. 이것은 문 파수의 자격이던 내가 진보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없어진 때문이었다. 비기건대 이름났던 대가가 몰락하여 거지의 소굴이 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일찍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시무할 때에는 중국인은 물론이요, 눈 푸르고 코 높은 영, 미, 법 등 외국인도 정청에 찾아오는 일이 있었으나 지금은 서양 사람이라고는 프랑스 순포가 왜 경관을 대동하고 사람을 잡으러 오거나 밀린 집세 채근을 오는 것밖에는 없었다. 그리고 한창적에는 천여 명이나 되던 독립 운동자가 이제는 수십 명도 못되는 형편이었다.


왜 이렇게 독립 운동자가 줄었는가. 첫째로는 임시 정부의 군무차장 김희선, 독립신문 사장 이광수, 의정원 부의장 정 인과 같은 무리는 왜에게 항복하고 본국으로 들어가고, 둘째로는 국내 각 도, 각 군, 각 면에 조직하였던 연통제(聯通制)가 발각되어 많은 동지가 왜에게 잡혔고, 셋째로는 생활난으로 하여 각각 흩어져 밥벌이를 하게 된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태에 있어서 임시 정부의 할 일이 무엇인가?

첫째로 돈이 있어야 할 터인데 돈이 어디서 나오나?

 

일제에 협조하겠다고 각서하고 맹세한 자들은 차례차례로 한반도로 귀속하여 기득권을 가졌다고 보아야 한다.


5. 이봉창과의 만남


본국과 만주와는 이미 연락이 끊겼으니,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동포에게 임시 정부의 곤란한 사정을 말하여 그 지지를 구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내 편지 정책이었다. 나는 미주와 하와이 재류 동포의 열렬한 애국심을 믿었다. 그것은 서재필, 이승만, 안창호, 박용만(朴容萬) 등의 훈도를 받은 까닭이었다.


나는 영문에는 문맹이므로 편지 겉봉도 쓸 줄 몰랐으므로 엄항섭, 안공근 등에게 의뢰하여서 쓰게 하였다.


이 편지 정책의 효과를 기다리기는 벅찼다. 그 때에는 아직 항공 우편이 없었으므로 상해 미국간에 한 번 편지를 부치고 답장을 받으려면 두 달이나 걸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다린 보람은 있어서 차차 동정하는 회답이 왔고, 시카고에 있는 김 경(金慶)은 그곳 공동회(共同會)에서 모은 것이라 하여 집세나 하라고 미화 2백 달러를 보내어 왔다. 당시 임시 정부의 형편으로는 이것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돈도 돈이려니와 동포들의 정성이 고마웠다. 김 경은 나와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었다.


하와이에서도 안창호, 가와이(加蛙伊), 현 순(玄楯), 김상호(金商鎬), 이홍기(李鴻基), 임성우(林成雨), 박종수(朴鍾秀), 문인화(文寅華), 조병요(趙炳堯), 김현구(金鉉九), 황인환(黃仁煥), 김윤배(金潤培), 박신애(朴信愛), 심영신(沈永信) 등 제씨가 임시 정부를 위하여 정성을 쓰기 시작하고,


미주에서는 국민회에서 점차로 정부에 대한 향심이 생겨서 김호(金乎), 이종소(李鍾昭), 홍 언(洪焉), 한시대(韓始大), 송종익(宋鍾翊), 최진하(崔鎭河), 송헌주(宋憲 ), 백일규(白一圭) 등 제씨가 일어나 정부를 지지하고, 멕시코에서는 김기창(金基昶), 이종오(李鍾旿), 쿠바에서는 임천택(林千澤), 박창운(朴昌雲) 등 제씨가 임시 정부를 후원하고, 동지회 방면에서는 이승만 박사를 위시하여 이원순(李元淳), 손덕인(孫德仁), 안현경(安賢卿) 제씨가 임시 정부를 유지하는 운동에 참가하였다.


그리고 하와이에 있는 안창호 - 도산이 아님 - 임성우 양씨는 내가 민족에 생색날 일을 한다면 돈을 주선하마 하였다.


하루는 어떤 청년 동지 한 사람이 거류민단으로 나를 찾아왔다. 그는 이봉창(李奉昌)이라 하였다 - 나는 그 때에 상해 거류민단장도 겸하였다 -. 그는 말하기를, 자기는 일본서 노동을 하고 있었는데 독립 운동에 참예하고 싶어서 왔으니 자기와 같은 노동자도 노동을 해먹으면서 독립 운동을 할 수 있는가 하였다.


그는 우리말과 일본말을 섞어 쓰고 임시 정부를 가정부(假政府)라고 왜식으로 부르므로 나는 특별히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민단 사무원을 시켜 여관을 잡아주라 하고 그 청년더러는 이미 날이 저물었으니 내일 또 만나자 하였다.


며칠 후였다. 하루는 내가 민단 사무실에 있노라니 부엌에서 술먹고 떠드는 소리가 들리는데 그 청년이 이런 소리를 하였다.


"당신네들은 독립 운동을 한다면서 왜 일본 천황을 안 죽이오?" 이 말에 어떤 민단 사무원이,


"일개 문관이나 무관 하나도 죽이기가 어려운데 천황을 어떻게 죽이오?" 한즉 그 청년은,


"내가 작년에 천황(일왕)이 능행(陵幸)을 하는 것을 길가에 엎드려서 보았는데, 그때에 나는 지금 내 손에 폭발탄 한 개만 있었으면 천황을 죽이겠다고 생각하였소" 하였다.


나는 그날 밤에 이봉창을 그 여관으로 찾았다. 그는 상해에 온 듯을 이렇게 말하였다.


"제 나이가 이제 서른 한 살입니다. 앞으로 서른 한 해를 더 산다 하여도 지금까지보다 더 나은 재미는 없을 것입니다. 늙겠으니까요.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1년 동안에 인생의 쾌락이란 것을 대강 맛을 보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영원한 쾌락을 위해서 독립 사업에 몸을 바칠 목적으로 상해에 왔습니다." 이 씨의 이 말에 내 눈에는 눈물이 찼다.


이봉창 선생은 공경하는 태도로 내게 국사에 헌신할 길을 지도하기를 청하였다. 나는 그러마 하고 쾌락하고 1년 이내에는 그가 할 일을 준비할 터이나 시방 임시 정부의 사정으로는 그의 생활비를 댈 길이 없으니 그 동안은 어떻게 하려는가고 물었더니, 그는 자기는 철공에 배운 재주가 있고 또 일어를 잘하여 일본서도 일본 사람으로 행세하였고 또 일본 사람의 양자로 들어가 성명도 목하창장(木下昌藏)이라 하여 상해에 오는 배에서도 그 이름을 썼으니 자기는 공장에서 생활비를 벌면서 일본 사람 행세를 하며 언제까지나 나의 지도가 있기를 기다리겠노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나는 그에게 나하고는 빈번한 교제를 말고 한 달에 한 번씩 밤에 나를 찾아와 만나자고 주의시킨 후에 일인이 많이 사는 홍로 떠나보내었다.


수일 후에 그가 내게 와서 월급 80원에 일본인의 공장에 취직하였노라 하였다.


그후부터 그가 종종 술과 고기와 국수를 사 가지고 민단 사무소에 와서 말단 직원들과 놀고 술이 취하면 일본 소리를 잘하므로 '일본 영감'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어느 날은 하오리게다를 신고 정부 문을 들어서다가 중국인 하인에게 쫓겨난 일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동녕 선생과 기타 국무원들에게 한인인지 일인인지 판단키 어려운 인물을 정부 문내에 출입시킨다는 책망을 받았고, 그때마다 조사하는 일이 있어서 그런다고 변명하였으나 동지들은 매우 불쾌하게 여기는 모양이었다.

 

중국인이라고 하면서 하인이라고 했다?

 

이럭저럭 이 와 약속한 1년이 거의 다 가서야 미국에 부탁한 돈이 왔다. 이제는 폭탄도 돈도 다 준비가 되었다. 폭탄 한 개는 왕 웅(王雄)을 시켜서 상해 병공창(兵工廠)에서, 한개는 김 현(金鉉)을 하남성 유 치(劉峙)한테 보내어 얻어온 것이니 모두 수류탄이었다. 이 중의 한 개는 일본 천황에게 쓸 것이요, 한 개는 이 씨 자살용이었다. 나는 거지 복색을 입고 돈을 몸에 지니고 거지 생활을 계속하니 아무도 내 품에 천여 원의 큰돈이 든 줄을 하는 이가 없었다.


(1932)12월 중순 어느 날, 나는 이봉창 선생을 비밀히 법조계 중흥여사(中興旅舍)로 청하여 하룻밤을 같이 자며, 이 선생이 일본에 갈 일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의논을 하였다. 만일 자실이 실패되어 왜 관헌에게 심문을 받게 되거든 이 선생이 대답할 문구까지 일러주었다. 그 밤을 같이 자고 이튿날 아침에 나는 내 헌옷 주머니 속에서 돈 뭉치를 내어 이봉창 선생에게 주며 일본 갈 준비를 다하여 좋고 다시 오라 하고 서로 작별하였다.


6. 불행히 맞지 않다


이틀 후에 그가 찾아왔기로 중흥여사에서 마지막 한 밤을 둘이서 함께 잤다. 그 때에 이 씨는 이런 말을 하였다.


"일전에 선생님이 내게 돈뭉치를 주실 때 나는 눈물이 났습니다. 나를 어떤 놈으로 믿으시고 이렇게 큰돈을 내게 주시나. 내가 이 돈을 떼어먹기로, 법조계 밖에는 한 걸음도 못 나오시는 선생님이 나를 어찌할 수 있습니까. 나는 평생에 이처럼 신임을 받아 본 일이 없습니다. 이것이 처음이요, 또 마지막입니다. 과시 선생님이 하시는 일은 영웅의 도량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 길로 나는 그를 안공근의 집으로 데리고 가서 선서식을 행하고 폭탄 두 개를 주고 다시 그에게 돈 3백 원을 주며 이 돈은 모두 동경까지 가기에 다 쓰고 동경 가서 전보만 하면 곧 돈을 더 보내마고 말하였다. 그리고 기념사진을 박을 때에 내 낯에는 체연한 빛이 있던 모양이어서 이 씨가 나를 돌아보고,


"제가 영원한 쾌락을 얻으러 가는 길이니 우리 기쁜 낯으로 사진을 박읍시다"


하고 얼굴에 빙그레 웃음을 띤다. 나도 그를 따라 웃으면서 사진을 박었다.


자동차에 올라앉은 그는 나를 향하여 깊이 허리를 굽히고 홍구를 향하여 가버렸다. 10여 일 후에 그는 동경에서 전보를 내었는데 물품은 1월 8일에 방매하겠다고 하였다. 나는 곧 2백 원을 전보환으로 부쳤더니, 편지로 미친놈처럼 돈을 다 쓰고 여관비, 밥값이 밀렸던 차에 2백 원 돈을 받아 주인의 빚을 청산하고도 돈이 남았다고 하였다.


당시 정세로 말하면 우리 민족의 독립 사상을 떨치기로 보거나 또 만보산사건, 만주 사변 같은 것으로 우리 한인에 대하여 심히 악화된 중국인의 악감을 풀기로 보거나 무슨 새로운 국면을 타개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우리 임시 정부에서 회의한 결과 한인 애국단(韓人愛國團)을 조직하여 암살과 파괴 공작을 하되 돈이나 사람이나 내가 전담하여 하고 다만 그 결과를 보고하라는 전권을 위임받았었다. 1월 8일이 임박하므로 나는 국무위원에 한하여 그 동안의 경과를 보고하여 두었었다. 1월 8일 중국 신문에,


'韓人李奉昌狙擊日皇不中'

(이봉창이라는 한국 사람이 일본 천황을 저격하였으나 맞지 않았다)


이라고 하는 동경 전보가 게재되었다. 이봉창이 일황을 저격하였다는 것은 좋으나 맞지 아니하였다는 것이 극히 불쾌하였다. 그러나 여러 동지들은 나를 위로하였다. 일본 천황이 그 자리에서 죽은 것만은 못하나 우리 한인이 정신상으로 그를 죽인 것이요, 또 세계만방에 우리 민족이 일본에 동화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니 이번 일은 성공으로 볼 것이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동지들은 내 신변을 주의할 것을 부탁하였다.


아니나다를까, 이튿날 조조에 프랑스 공무국으로부터 비밀히 통지가 왔다. 과거 10년 간 프랑스 관헌이 김 구를 보호하였으나 이번 김 구의 부하가 일황에게 폭탄을 던진 데 대해서는 일본의 김 구 체포 인도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중국 국민당 기관지 청도(靑島)의 국민일보는 특호 활자로,


'韓人李奉昌狙擊日皇不幸不中'

(이봉창이란 한국 사람이 일본 천황을 저격하였으나 불행히 맞지 않았다)


이라고 썼다 하여 당시 주둔 일본 군대와 경찰이 그 신문사를 습격하여 파괴하였고, 그 밖의 장사(長沙) 등 여러 신문에서도 '불행부중(不幸不中)'이라는 문구를 썼다 하여 일본이 중국 정부에 엄중한 항의를 한 결과로 '불행(不幸)' 자를 쓴 신문사는 모두 폐쇄를 당하고 말았다.


그러자 상해에서 일본 중 하나가 중국인에게 맞아 죽었다는 것을 빌미로 하여 일본은 1.28 상해 사을 일으켰으니, 기실은 이봉창 의사의 일황 저격과 이에 대한 중국인의 '불행부중'이라고 말한 감정이 이 전쟁의 주요 원인인 것이었다.


나는 동지들의 권에 의하여 낮에는 일체 활동을 쉬고 밤에는 동지의 집이나 창기의 집에서 자고 밥은 동포의 집으로 돌아다니면서 얻어먹었다. 동포들은 정성껏 나를 대접하였다.


십구로군채정해(蔡廷楷)중앙군 제5군장 장치중(張治中)의 참전으로 일본군에 대한 상해 싸움은 가장 격렬하게 되어서 법조계 안에도 후방 병원이 설치되어 중국측 전사병(戰死兵)의 시체와 전상병(戰傷兵)을 가뜩가뜩 실은 트럭이 피를 흘리고 왕래하는 것을 보고, 나는 언제 우리도 왜와 싸워 본국 강산을 피로 물들일 날이 올까 하고 하도 눈물이 흘러 통행인들이 수상히 볼 것이 두려워 고개를 숙이고 피해 버렸다.


동경 사건이 전해지자 미주와 하와이 동포들로부터 많은 편지가 오고 그 중에는 이번 중일 전쟁(中日戰爭)에 우리도 한몫 끼여 중국을 도와서 일본과 싸우라는 일을 하라는 이도 있고 적당한 사업을 한다면 거기 필요한 돈을 마련하마 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이번 중일 전쟁에 한몫 끼이근 임갈굴정(臨渴掘井 : 목이 마른 뒤에야 우물을 팜. 일을 너무 다급하게 서두는 것을 말함.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우물가서 숭늉 찾기'라고나 할 것 같다 - 편집자 주*)이라 준비도 없이 무엇을 하랴.


나는 한인 중에 일본군 중에 노동자로 출입하는 사람들을 이용하여 그 비행기 격납고군수품 창고연소탄을 장치하여 이것을 태워버릴 계획을 진행하고 있었으나 송호 협정(淞?協定)으로 중국이 일본에 굴복하여 상해 전쟁이 끝을 막으니 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송호 협정의 중국측 전권은 곽태기(郭泰祺)였다.

 

이에 나는 암살과 파괴 계획을 계속하여 실시하려고 인물을 물색하였다. 내가 믿던 제자요, 동지인 나석주(羅錫疇)는 벌써 연전에 서울 동양 척식 회사에 침입하여 7명의 일인을 쏘아 죽이고 자살하였고, 이승춘(李承春)천진에서 붙들려 사형을 당하였으니 이제는 그들을 생각하여도 하릴없다.


새로 얻은 동지 이덕주(李德柱), 유진식(兪鎭植)은 왜 총독의 암을 명하여 먼저 본국으로 보냈고, 유상근(柳相根), 최흥식(崔興植)은 왜의 관동군 사령관 본장번(本庄繁)암살을 명하여 만주로 보내려고 할 즈음에 윤봉길(尹奉吉)이 나를 찾아왔다. 윤 군은 동포 박 진(朴震)이가 경영하는 말총으로 모자, 기타 일용품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다가 근래에는 홍구 소채장에서 소채장수를 하던 사람이다.


윤봉길 군은 자기가 애초에 상해에 온 것이 무슨 큰일을 하려고 함이었고, 소채를 지고 홍구 방면으로 돌아다닌 것도 무슨 기회를 기다렸던 것인데 이제는 중일간에 전쟁도 끝이 났으니 아무리 보아도 죽을 자리를 구하기가 어렵다고 한탄한 뒤에 내게 동경 사건과 같은 계획이 있거든 자기를 써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려는 큰 뜻이 있는 것을 보고 기꺼이 이렇게 대답하였다.


"내가 마침 그대와 같은 인물을 구하던 중이니 안심하시오."


그러고 나는 왜놈들이 이번 상해 싸움에 이긴 것으로 자못 의기양양하여 오는 4월 29일에 홍구 공원에서 그놈들의 소위 천장절(天長節) 축하식을 성대히 거행한다 하니 이때에 한 번 큰 목적을 달해봄이 어떠냐 하고 그 일의 계획을 말하였다. 내 말을 듣더니 윤 군은,


"할랍니다. 이제부텀은 마음이 편안합니다. 준비해 줍시오" 하고 쾌히 응낙하였다.


7. 천장절 행사를 노리고


그 후, 왜의 신문인 상해 일일 신문에 천장절 축하식에 참여하는 사람은 벤또 - 도시락 - 와 물통 하나와 일장기 하나를 휴대하라는 포고가 났다.


이 신문을 보고 나는 곧 서문로(西門路) 왕 웅(王雄) - 본명은 김홍일(金弘逸) -을 방문하여 상해 병공창장 송식마(宋式馬)에게 교섭하여 일인이 메는 물통과 벤또 그릇에 폭탄 장치를 하여 사흘 한에 보내주기를 부탁케 하였더니 왕 웅이 다녀와서 말하기를, 내가 친히 병공창으로 오라고 한다 하므로 가 보니 기사 왕백수(王伯修)의 지도 밑에 물통과 벤또 그릇으로 만든 두 가지 폭탄의 성능을 시험하여 보여주었다.

 

그 당시 백범선생도 이름을 많이 개명 변명하였다는 기록이 있듯이 조선인들이 국민당정부국민이 되기 위하여 변명 또는 개명하였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시험 방법은 마당에 토굴을 파고 그 속을 사면으로 철판으로 싸고 폭탄을 그 속에 넣고 뇌관으로 긴 줄을 달아서 사람 하나가 수십 보 밖에 엎드려서 그 줄을 당기니 토굴 안에서 벼락 소리가 나며 깨어진 철판 조각이 공중을 날아오르는 것이 아주 장관이었다.


뇌관을 이 모양으로 20개나 실험하여서 한 번도 실패가 없는 것을 보고야 실물에 장치한다고 하는데 이렇게까지 이 병공창에서 정성을 들이는 까닭은 동경 사건에 쓴 폭탄이 성능이 부족하였던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는 때문이라고 왕 기사는 말하였다. 그래 20여 개 폭탄을 이 모양으로 무료로 만들어 준다는 것이었다.


이튿날 물통 폭탄과 벤또 폭탄을 병공창 자동차로 서문로 왕 웅 군의 집까지 실어다 주었다. 이런 금물을 우리가 운반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한 친절에서였다. 나는 내가 입고 있던 중국 거지 복색을 벗어 버리고 넝마전에 가서 양복 한 벌을 사 입어 엄연한 신사가 되어 가지고 하나씩 둘씩 이 폭탄을 날라다가 법조계 안에 사는 친한 동포의 집에 주인에게도 그것이 무엇이라고 알리지 아니하고 다만 귀중한 약이니 불조심만 하라고 이르고 까마귀 떡 감추듯 이 집 저 집에 감추었다.


나는 오랜 상해 생활에 동포들과 다 친하게 되어 어느 집에를 가나 내외가 없었다. 더구나 동경 사건 이래로 그러하여서 부인네들도 나와 허물없이 되어,


"선생님, 아이 좀 보아 주세요" 하고 우는 젖먹이를 내게 안겨 놓고 제 일들을 하였다. 내게 오면 울던 아이도 울음을 그치고 잘 논다는 소문이 났다.


4월 29일이 점점 박두하여 왔다. 윤봉길 군은 말쑥하게 일본식 양복을 사 입혀서 날마다 홍구 공원에 가서 식장 설비하는 것을 살펴서 그 당일에 자기가 행사할 적당한 위치를 고르게 하고 일변 백천 대장의 사진이며 일본 국기 같은 것도 마련하게 하였다. 하루는 윤 군이 홍구에 갔다가 와서,


"오늘 백천이 놈도 식장 설비하는 데 왔겠지요. 바로 내 곁에 와 선단 말예요. 내게 폭탄만 있었더면 그 때에 해버리는 건데..." 하고 아까와하였다. 나는 정색을 하고 윤 군을 책하였다.


"그것이 무슨 말이오? 포수가 사냥을 하는 법이 앉은 새와 자는 짐승은 아니 쏜다는 것이오. 날려 놓고 쏘고, 달려 놓고 쏘는 것이야. 윤 군이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을 보니 내일 일에 자신이 없나 보구려."


윤 군은 내 말에 무료한 듯이, "아니오. 그놈이 내 곁에 있는 것을 보니 불현듯 그런 생각이 나더란 말입니다. 내일 일에 왜 자신이 없어요, 있지요" 하고 변명하였다.


나는 웃는 낯으로, "나도 윤 군의 성공을 확신하오. 처음 이 계획을 내가 말할 때에 윤 군이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하지 않았소? 그것이 성공할 증거라고 나는 믿고 있소. 마음이 움직여서는 안 되오.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이 마음이 움직이는 게요" 하고 내가 치하포에 토정양량을 타살하려 할 때에 가슴이 울렁거리던 것과 고 능선 선생에게 들은,


'得樹樊枝不足奇 懸崖撒手丈夫兒' 라는 글귀를 생각하매 마음이 고요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니 윤 군은 마음에 새기는 모양이었다.


윤 군을 여관으로 보내고 나는 폭탄 두 개를 가지고 김해산(金海山)군 집으로 가서 김 군 내외에게 내일 윤봉길 군이 중대한 임무를 띠고 동삼성 - 만주라는 뜻 - 으로 떠나니 고기를 사서 이른 조반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동삼성을 왜 만주라고 해야 하였는가?

그것은 한반도 조선이는 등식을 만들기 위한 영역 축소작업에 일환이다.


이튿날은 4월 29일이었다. 나는 김해산 집에서 윤봉길 군과 최후의 식탁을 같이하였다. 밥을 먹으며 가만히 윤 군의 기색을 살펴보니 그 태연자약함이 마치 농부가 일터에 나가려고 넉넉히 밥을 먹는 모양과 같았다. 김해산 군은 윤 군의 침착하고도 용감한 태도를 보고 조용히 내게 이런 권고를 하였다.


"지금 상해에 민족 체면을 위하여 할 일이 많은데 윤 군 같은 인물을 구태여 다른 데로 보낼 것은 무엇이오?"

"일은 하는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좋지. 윤 군이 어디서 무슨 소리를 내나 들어봅시다."


나는 김해산 군에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식사도 끝나고 시계가 일곱 점을 친다. 윤 군은 자기의 시계를 꺼내어 내게 주며,


"이 시계는 어제 선서식 후에 선생님 말씀대로 6월을 주고 산 시계인데 선생님 시계는 2원 짜리니 제 것하고 바꿉시다. 제 시계는 앞으로 한 시간밖에는 쓸 데가 없으니까요" 하기로 나도 기념으로 윤 군의 시계를 받고 내 시계는 윤 군에게 주었다.


8. 홍구 공원의 폭발


식장을 향하여 떠나는 길에 윤 군은 자동차에 앉아서 그가 가졌던 돈을 꺼내어 내게 준다.


"왜 돈은 좀 가지면 어떻소?" 하고 묻는 내 말에 윤 군이,

"자동차 값 주고도 5,6원은 남아요" 할 즈음에 자동차가 움직였다. 나는 목이 메인 소리로,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


하였더니 윤 군은 차창으로 고개를 내밀어 나를 향하여 숙였다. 자동차는 크게 소리를 지르며 천하 영웅 윤봉길을 싣고 홍구 공원을 향하여 달렸다.


그 길로 나는 조상섭(趙尙燮)의 상점에 들러 편지 한 장을 써서 점원 김영린(金永麟)을 주어 급히 안창호 선생에게 전하라 하였다. 그 내용은 '오전 10시 경부터 댁에 계시지 마시오. 무슨 대사건이 있을 듯합니다'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석오 선생께로 가서 지금까지 진행한 일을 보고하고 점심을 먹고 무슨 소식이 있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후 1시쯤 해서야 중국 사람들의 입으로 홍구 공원에서 누가 폭탄을 던져서 일인이 많이 죽었다고 술렁술렁하기 시작하였다. 혹은 중국인이 던진 것이라 하고, 혹은 고려인의 소위라고 하였다. 우리 동포 중에도 어제까지 소채 바구니를 지고 다니던 윤봉길 군이 오늘에 경천위지할 이 일을 했으리라고 아는 사람은 김 구 이외는 이동녕, 이시영, 조완구 같은 몇 사람이나 짐작하였을 것이다.


이날 일은 순전히 내가 혼자 한 일이므로 이동녕 선생에게도 이날에 처음 자세한 보고를 하고 자세한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후 3시에 비로소 신문 호외로,


'홍구 공원 일인의 천장절 경축대상에 대량의 폭탄이 폭발하여 민단장 하단(河端)은 즉사하고, 백천(白川) 대장, 중광(重光) 대사, 야촌(野村) 중장 등 문무대관이 다수 중상' 이라는 것이 보도되었다.


그날 일인의 신문에는 폭탄을 던진 것은 중국인의 소위라고 하더니 이튿날 신문에야 일치하게 윤봉길의 이름을 크게 박고 법조계에 대수색이 일어났다.


나는 안공근과 엄항섭을 비밀히 불러 이로부터 나를 따라 일을 같이 할 것을 명하고 미국인 피취 - 비오생(費吾生)이라고 중국식으로 번역한다 - 씨에게 잠시 숨겨 주기를 교섭하였더니 피취 씨는 쾌락하고 그 집 2층을 전부 내게 제공하므로 나와 김 철, 안공근, 엄항섭 넷이 그 집에 있게 되었다. 피취 씨는 고 피취 목사의 아들이요, 피취 목사는 우리 상해 독립 운동의 숨은 은인이었다. 피취 부인은 손수 우리의 식절을 보살폈다.


우리는 피취 댁 전화를 이용하여 누가 잡힌 것 등을 알고, 또 잡혀 간 동지의 가족의 구제며 피난할 동지의 여비 지급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내가 전인하여 편지까지 하였건마는 불행히 안창호 선생이 이유필의 집에 갔다가 잡히고 그밖에 장헌근(張憲根), 김덕근(金德根)과 몇몇 젊은 학생들이 잡혔을 뿐이요, 독립 운동 동지들은 대개 무사함을 알고 다행히 생각하였다.


그러나 수색의 손이 날마다 움직이니 재류 동포가 안거할 수가 없고, 또 애매한 동포들이 잡힐 우려가 있으므로 나는 동경 사건과 이번 홍구 폭탄 사건의 책임자는 나 김 구라는 성명서를 즉시로 발표하려 하였으나 안공근의 반대로 유예하다가 마침내 엄항섭으로 하여금 이 성명서를 기초케 하고 피취 부인에게 번역을 부탁하여 통신사에 발표하였다. 이리하여 천황에게 폭탄을 던진 이봉창 사건이나, 상해에 백천 대장 이하를 살상한 윤봉길 사건이나 그 주모자는 김 구라는 것이 전세계에 알려진 것이었다.


이 일이 생기자 은주부(殷鑄夫), 주경란(朱慶瀾) 같은 중국 명사가 내게 특별 면회를 청하고 남경에 있던 남파(南坡) 박찬익(朴贊翊) 형의 활동도 있어 물질로도 원조가 답지하였다. 만주 사변, 만보산사건 등으로 악화하였던 중국인의 우리 한인에게 대한 감정은 윤봉길 의사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극도로 호전하였다.


왜는 제 1차로 내 몸에 20만 원 현상을 하더니 제 2차로 일본 외무성, 조선 총독부, 상해 주둔군 사령부의 3 부 합작으로 60만 원 현상으로 나를 잡으려 하였다. 그러나 전에는 법조계에서 한 발자국도 아니 나가던 나는 자동차로 영조계, 법조계 할 것 없이 막 돌아다녔다. 하루는 전차 공사 인스펙터로 다니는 별명 박대장 집에 가서 혼인 국수를 먹으러 가는 것이 10여 명 왜 경관대에게 발견되어 박대장 집 아궁이까지 수색되었으나 나는 부엌에서 선 채로 국수를 얻어먹고 벌써 나온 뒤였다. 아슬아슬하게 면하였다.


남경 정부에서는 내가 신변이 위험하다면 비행기를 보내마고까지 말하여왔다. 그러나 그들이 나를 데려가려 함은 반드시 무슨 요구가 있을 것인데 내게는 그들을 만족시킬 아무 도리도 없음을 생각하고 헛되이 남의 나라의 신세를 질 것이 없다 하여 모두 사절하여 버렸다.

 

남경정부라 함은 국민당 정부 수도가 남경이었다.


이러하는 동안에 20여 일이 지났다. 하루는 피취 부인이 나를 보고, 내가 피취 댁에 있는 것을 정탐이 알고 그들이 넌지시 집을 포위하고 지키고 있다 하므로 나는 피취 댁에 더 있을 수 없음을 깨닫고 피취 댁 자동차에 피취 부인과 나는 내외인 것처럼 동승하고 피취 씨가 운전수가 되어 대문을 나서 보니 과연 중국인, 러시아 인, 프랑스 인 정탐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 사이로 피취 씨가 차를 빨리 몰아 법조계를 지나 중국땅에 있는 정거장으로 가서 기차로 가흥 수륜사창(嘉興秀綸紗廠)에 피신하였다. 이는 박남파은주부, 저보성(楮補成) 제씨에게 주선하여 얻어놓은 곳으로 이동녕 선생을 비롯하여 엄항섭, 김의한 양군의 가족은 수일 전에 벌써 반이해 와 있었다.


나중에 들은즉 우리가 피취 댁에 숨은 것이 발각된 것은 우리가 그 집 전화를 남용한 데서 단서가 나온 것이라 하였다.

<3.1 운동의 상해> 끝


기적장강만리풍(寄跡長江萬里風) -


1. 가흥에 몸을 의탁하다


나는 이로부터 일시 가흥(嘉興)에 몸을 붙이게 되었다. 성은 조모님을 따라 장(張)이라 하고 이름은 진구(震球) 또는 진(震)이라고 행세하였다.


가흥은 내가 위탁하여 있는 저보성 씨의 고향인데 저 씨는 일찍 강소성장(江蘇省長)을 지낸 이로 덕망이 높은 신사요, 그 맏아들 봉장(鳳章)은 미국 유학생으로 그곳 동문 밖 민풍지창(民豊紙廠)이라는 종이 공장의 기사장이었다. 저 씨의 집은 가흥 남문 밖에 있는데 구식 집으로 그리 굉장하지는 아니하나 대부의 저택으로 보였다.


저 씨는 그의 수양자인 진동손(陳桐蓀) 군의 정자를 내 숙소로 지정하였는데 이것은 호숫가에 반양제로 지은 말쑥한 집이었다. 수륜사창이 바라보이고 경치가 좋았다. 저 씨 댁에서 내 본색을 아는 이는 저 씨 내외와 그 아들 내외와 진동손 내외 뿐인데 가장 곤란한 것은 내가 중국말을 통치 못함이었다. 비록 광동인(廣東人)이라고 행세는 하지마는 이렇게도 말을 모르는 광동인이 어디 있으랴.


가흥에는 산은 없으나 호수와 운하가 낙지 발같이 사통팔달하여서 7,8세 되는 아이들도 배 저을 줄을 알았다. 토지는 극히 비옥하여 물산이 풍부하고 인심은 상해와는 딴판으로 순후하여 상점에 에누리가 없고 고객이 물건을 잊고 가면 잘 두었다가 주었다.


나는 진 씨 내외와 동반하여 남호(南湖) 연우루(烟雨樓)서문 밖 삼탑(三塔) 등을 구경하였다. 여기는 명나라 때에 왜구가 침입하여 횡포하던 유적이 있었다. 동문 밖으로 10리쯤 나아가면 한(漢)나라 때 주매신(朱買臣)의 무덤이 있고, 북문 낙범정(落帆亭)은 주매신이 글을 읽다가 나락멍석을 떠내 보내고 아내 최 씨에게 소박을 받은 유적이라고 한다. 나중에 주매신이 회계 태수(會稽 太守)가 되어 올 때에 최 씨는 엎지른 동이의 물을 주워담지 못하여 낙범정 밑에서 물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가흥시(嘉興市) 연우루(烟雨樓) 삼탑(三塔) http://blog.daum.net/han0114/17046124 


가흥에 우접한 지 얼마 아니하여 상해 일본 영사관에 있는 일인 관리 중에 우리의 손에 매수된 자로부터 호항선(상해↔항주 철도)을 수색하러 일본 경관이 가니 조심하라는 기별이 왔다. 가흥 정거장에 사람을 보내어 알아보았더니 과연 변장한 왜 경관이 내려서 여기 저기 둘러보고 갔다고 하므로 저봉장의 처가인 주(朱) 씨 댁 산장으로 가기로 하였다.

 

호항선()중국 중부를 동서로 관통하는 간선철도. 길이 189㎞.


상해[上海]와 항주[杭州]를 잇는 철도로 송강[松江]·가흥[嘉興] 등의 도시를 거쳐 [杭州∼株州], 상검선[湘黔線;株州∼貴陽] 등과 연결되어 상하이와 강서성[江西省]의 남창[南昌], 호남성[湖南省]의 항주[株州]를 연락하는 동서 연락간선으로 중요하다. 1907년 영국 차관(借款)으로 건설된 호녕선 滬寧線(上海∼杭州∼寧波;1937년 완공)의 전신이다

 

난징~샹하이을 연결하는 철도를 호녕선-滬寧線(中文:沪寧鐵路, 英:Huning railway)이라고 하였고 난징을 수도로 하고 있던 1927년부터 1949년간은 경호선-京滬線(中文:京沪鐵路)이라고 했다.


주 씨는 저봉장의 재취로 첫 아기를 낳은 지 얼마 아니 되는 젊고 아름다운 부인이었다. 저 씨는 이러한 그 부인을 단독으로 내 동행을 삼아서 기선으로 하룻길 되는 해염현성(海鹽縣城) 주 씨 댁으로 나를 보내었다.


주 씨 댁은 성내에서 제일 큰 집이라 하는데 과연 굉장하였다. 내 숙소인 양옥은 그 집 후원에 있는데 대문 밖은 돌을 깔아 놓은 길이요, 길 건너대소 선박이 내왕하는 호수다. 그리고 대문 안은 정원이요, 한 협문을 들어가면 사무실이 있는데, 여기는 주 씨 댁 총경리가 매일 이 집 살림살이를 맡아보는 곳이다.


예전에는 4백여 명 식구가 한 식당에 모여서 먹었으나 지금은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직업을 따라서 대부분이 각처로 분산하고 남아 있는 식구들도 소가족으로 자취를 원하므로 사무실에서는 물자만 배급한다고 한다. 집의 생김은 벌의 집과 같아서 세 채나 네 채가 한 가족 차지가 되었는데 앞에는 큰 객청이 있고 뒤에는 양옥과 화원이 있고, 또 그 뒤에는 운동장이 있다.


해염에 대화원 이 있는데 전(錢)가 화원이 첫째요, 주가 화원이 둘째라 하기로 전가 화원도 구경하였다. 과연 전씨 댁이 화원으로 주씨 것보다 컸으나 집과 설비로는 주씨 것이 전씨 것보다 나았다.


해염 주씨 댁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이튿날 다시 주씨 부인과 함께 노리언(盧里堰)까지 가서 거기서부터는 서남으로 산길 5,6리를 걸어 올라갔다. 저 부인이 굽 높은 구두를 신고 연해 손수건으로 땀을 씻으며 7,8월 염천에 고개를 걸어 넘는 광경을 영화로 찍어 만대 후손에게 전할 마음이 간절하였다.


부인의 친정 시비 하나가 내가 먹을 것과 기타 일용품을 들고 우리를 따랐다. 국가가 독립이 된다면 저 부인의 정성과 친절을 내 자손이나 내 동포가 누구든 감사하지 아니하랴. 영화로는 못 찍어도 글로라도 전하려고 이것을 쓰는 바이다.


고개턱에 오르니 주씨가 지은 한 정자가 있다. 거기서 잠시 쉬고 다시 걸어 수백 보를 내려가니 산 중턱에 소쇄한 양옥 한 채가 있다. 집을 수호하는 비복들이 나와서 공손하게 저 부인을 맞는다.


부인은 시비에게 들려 가지고 온 고기며 과일을 꺼내어 비복들에게 주며 내 식성과 어떻게 요리할 것을 설명하고 또 나를 안내하여 어디를 가거든 얼마, 어디 어딘 얼마를 받으라고 안내 요금까지 자상하게 분별하여 놓고 당일로 해염 친가로 돌아갔다.


나는 이로부터 매일 산에 오르기로 일을 삼았다. 나는 상해에 온 지 14년이 되어 남들이 다 보고 말하는 소주항주남경이니 하는 데를 구경하기는 고사하고 상해 테두리 밖에 한 걸음을 내어 놓은 일도 없었다. 그러다가 마음대로 산과 물을 즐길 기회를 얻으니 유쾌하기 짝이 없었다.


이 집은 본래 저 부인의 친정 숙부의 여름 별장이더니, 그가 별세하매 이 집 가까이 매장한 뒤로는 이 집은 그 묘소의 묘막과 제각(祭閣)을 겸한 것이라고 한다. 명가(名家)가 산장을 지을 만한 곳이라 풍경이 자못 아름다웠다. 산에 오르면 앞으로는 바다요 좌우는 푸른 솔, 붉은 가을 잎이었다.


하루는 응과정(鷹 亭)에를 올랐다. 거기는 일좌 승방이 있어, 한 늙은 여승이 나와 맞았다. 그는 말끝마다 나무아미타불을 불렀다.


"원로 잘 오셔 계시오 아미타불. 내 불당으로 들어오시오 아미타불!" 이 모양이었다. 그를 따라 암자로 들어가니 방방이 얼굴 희고 입술 붉은 젊은 여승이 승복을 맵시 있게 입고 목에는 긴 염주, 손에는 단주를 들고 저두추파로 인사를 하였다.


암자 뒤에 바위 하나가 있는데 그 위에 지남철을 놓으면 거꾸로 북을 가리킨다 하기로 내 시계에 달린 윤도(輪圖)를 놓아보니 과연 그러하였다. 아마 자철광 관계인가 하였다.


하루는 해변 어느 진(나루터)에 장 구경을 갔다가 경찰의 눈에 걸려서 마침내 정체가 이 지방 경찰에 알려지게 되었으므로 안전치 못하다 하여 도로 가흥으로 돌아왔다.


가흥에 와서는 거의 매일 배를 타고 호수를 뜨거나 운하로 오르내리고 혹은 엄가빈(嚴家濱)이라는 농촌의 농가에 몸을 붙여 있기도 하였다.


2. 장개석과의 협의


이렇게 강남농촌을 보니 누에를 쳐서 길쌈을 하는 법이나 벼농사를 짓는 법이나 다 우리나라보다는 발달된 것이 부러웠다. 구미 문명(歐美文明)이 들어와서 그런 것 외에 고래의 것도 그러하였다.


나는 생각하였다. 우리 선인들은 한, 당, 송, 원, 명, 청 시대에 끊임이 없이 사절이 내왕하면서 왜 이 나라의 좋은 것은 못 배워오고 궂은 것만 들여왔는고, 의관(衣冠), 문물(文物), 실준중화(實遵中華)라는 것이 이조 5백 년의 당책이라 하건마는 머리 아픈 망건과 기타 망하기 좋은 것뿐이요, 이용후생에 관한 것은 없다.

 

이문구에서 반 조선 원망 어구가 많이 보인다.

과연 이러한 면이 백범선생의 진정한 뜻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마치 일제가 조선인을 지배하기 위하여 이조라고 조선을 폄하하면서 즐겨 늘어 놓는 어구라고 착각을 불러 일으키는 기록이다.

일제가 이조는 500년 동안 당파싸움만 하였고 실제하였던 역사에서 존재하지도 않았던 사대중화주의 또는 모화사상을 추구 하였다고 하면서 늘 잘못된 사회제도와 인습을 지적하는 것과 같이 하는 기록이기 때문에 이러한 기록이 사실이라면 백범선생의 곧은 민족성을 의심케 하는 부분이기도 한 것이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우리민족 스스로가 중국이고 중화이고 천제의 나라일뿐만아니라 그에 따른 모든 학문도 우리학자들이 손수 만든 것이기에 일지에 기록하고 있는 사실과 맞지 않는 부분이 많다.

때문에 누군가에 의하여 의도 되면서 조작되고 왜곡되었다고 여기지 않을 수 없는 것들이다.

물론 세계를 지배하던 모든 나라 사회제도에서 완벽하고 완전한 것은 거의 없다.

있을 수 있는 사회적 모순이 왜 대륙조선이라고 없었겠는가?

그러나 마치 몹쓸 나라에 살던 백성인 것처럼 자학하게 만들어 일제치하를 고맙게 여기고 달게 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게 하는 것은 마치 지금 친일파들이 주장하는 것과 일맥하는 것 같아 신성한 일지의 이미지에 맞지 않고 온당하지 않는 논리라고 여겨지지는 부분이다.

때문에 이부분에서 백범선생의 뜻이라고 하는데는 많은 무리가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민족의 머리에 들어박힌 것은 원수의 사대사상뿐이 아니냐. 주자학(朱子學)으로 주자 이상으로 발달시킨 결과는 공수위좌(拱手爲座)하여 손가락 하나 안 놀리고 주둥이만 까게 하여서 민족의 원기를 소진하여 버리니 남는 것은 편협한 당파 싸움과 의뢰심뿐이다.


오늘날로 보아도 요새 일부 청년들이 제 정신을 잃고 러시아로 조국을 삼고 레닌을 국부로 삼아서, 어제까지 민족 혁명은 두 번 피 흘릴 운동이니 대번에 사회주의 혁명을 한다고 떠들던 자들이 레닌의 말 한 마디에 돌연히 민족 혁명이야말로 그들의 진면목인 것처럼 들고 나오지 않는가.


주자님의 방귀까지 향기롭게 여기던 부류들 모양으로 레닌의 똥까지 달다고 하는 청년들을 보게 되니 한심한 일이다. 나는 반드시 주자를 옳다고도 아니 하고 마르크스를 그르다고도 아니한다. 내가 청년 제군에게 바라는 것은 자기를 잊지 말란 말이다.


우리의 역사적 이상, 우리의 민족성, 우리의 환경에 맞는 나라를 생각하란 것이다. 밤낮 저를 잃고 남만 높여서 남의 발뒤꿈치를 따르는 것으로 장한 체를 말라는 것이다. 제 뇌로, 제 정신으로 생각하란 말이다.


나는 엄가빈에서 다시 사회교(砂灰橋) 엄항섭군 집으로, 오룡교(五龍橋) 진동생(陳桐生)의 집으로 옮아다니며 숙식하고 낮에는 주애보(朱愛寶)라는 여자가 사공이 되어 부리는 배를 타고 이 운하, 저 운하로 농촌 구경을 다니는 것이 나의 일과였다.


가흥 성내에 있는 진명사(鎭明寺)는 유명한 도주공(陶朱公)의 집터라 한다. 그 속에는 축오자 - 암소 다섯 마리를 기르다 -하고 또 양어하던 못이 있고 절문 밖에는 '도주공유지(陶朱公遺址)'라는 돌비가 있다.


하루는 길로 돌아다니다가 큰길가 마당에서 군사가 조련하는 것을 사람들이 보고 있기로 나도 그 틈에 끼였더니 군관 하나가 나를 유심히 보며 내 앞으로 와서 누구냐 하기로 나는 언제나 하는 대로 광동인이라고 대답하였다. 이 군관이 정작 광동인일 줄이야 뉘라 알았으랴.


나는 곧 보안대 본부로 붙들려 갔다. 저 씨 댁과 진 씨 댁에 조사한 결과로 무사하게는 되었으나 저봉장 군은 내가 피신할 줄을 모른다고 책하고 그의 친우요, 중학교 교원인 과부가 하나 있으니 그와 혼인하여서 살면 행색을 감추리라고 권하였다.


나는 그런 유식한 여자와 같이 살면 더욱 내 본색이 탄로되기 쉬우니 차라리 무식한 뱃사공 주애보에게 몸을 의탁하리라 하여 뱃속에서 살기로 하였다. 오늘은 남문 밖 호숫가에 자고 내일은 북문 밖 운하가에 자고 낮에는 육지에 나와 다녔다.


이러는 동안에도 박 남파(朴贊翊), 엄 일파(엄항섭), 안신암 세 사람은 줄곧 외교와 정보 수집에 종사하였다. 중국인 친구의 동정과 미주 동포의 후원으로 활동하는 비용에는 곤란이 없었다.


박 남파가 중국 국민당 당원이던 관계로 당의 조직부장이요, 강소성 주석인 진과부(陳果夫)와 면식이 있어 그의 소개로 장개석 장군이 내게 면회를 청한다는 통지를 받고 나는 안공근, 엄항섭 두 사람을 대동하고 남경으로 갔다. 공패성(貢沛誠), 소 쟁(蕭錚) 등 요인들이 진과부 씨를 대표하여 나를 나와 맞아 중앙반점(中央飯店)에 숙소를 정하였다.


이튿날 밤에 중앙 군관 학교 구내에 있는 장개석 장군의 자택으로 진과부 씨의 자동차를 타고 박남파 군을 통역으로 데리고 갔다. 중국옷을 입은 장 씨는 온화한 낯빛으로 나를 접하여 주었다. 끝난 뒤에 장 주석은 간명한 어조로,


"동방 각 민족은 손 중산 선생의 삼민주의(三民主義)에 부합하는 민주 정치를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 고 하기로 나는 그렇다고 대답하고,


"일본의 대륙 침략의 마수가 각일각으로 중국에 침입하니 벽좌우(左右 : 주변의 사람들을 잠시 내보냄 - 편집자 주*)를 하시면 필담으로 몇 마디를 하겠소"


하였더니 장 씨는, "하오하오(좋소)" 하므로 진과부와 박남파는 밖으로 나갔다. 나는 붓을 들어,


"선생이 백만금을 허하시면 이태 안에 일본, 조선, 만주 세 방면에 폭동을 일으켜 일본의 대륙 침략의 다리를 끊을 터이니 어떻게 생각하시오?" 하고 써서 보였다.


그것을 보더니 이번에는 장 씨가 붓을 들어,


'請以計劃書詳示(계획서를 써서 자세히 보여주기를 바란다는 뜻 - 편집자 주*)' 라고 써서 내게 보이기로 나는 물러나왔다.


이튿날 간단한 계획서를 만들어 장 주석에게 드렸더니 진과부 씨가 자기의 별장에 나를 초대하여 연석을 베풀고 장 주석의 뜻을 대신 내게 전한다. 특무 공작으로는 천황을 죽이면 천황이 또 있고 대장을 죽이면 대장이 또 있으니 장래의 독립 전쟁을 위하여 무관을 양성함이 어떠한가 하기로, 나는 이야말로 불감청(不敢請)이언정 고소원(固所願)이라 하였다.


이리하여 하남성(河南省) 낙양(洛陽)의 군관 학교 분교를 우리 동포의 무관 양성소로 하기로 작정되어 제1차로 북평, 천진, 상해, 남경 등지에서 백여 명의 청년을 모집하여 학적에 올리고 만주로부터 이청천(李靑天)과 이범석(李範奭)을 청하여 교관과 영관이 되게 하였다(그러나 이 군관 학교는 겨우 제1기생의 필업을 하고는 일본 영사 수마(須磨)의 항의로 남경 정부에서 폐쇄령이 내렸다).


이때에 대일전선(對日戰線) 통일 동맹(統一同盟)이란 것이 발동하여 또 통일론이 일어났다. 김원봉(金元鳳)이 내게 특별히 만나기를 청하기로 어느 날 진회(秦淮)에서 만났더니 그는 자기도 통일 운동에 참가하겠은즉 나더러도 참가하라는 것이었다. 그가 이 운동에 참가하는 동기는 통일이 목적인 것보다도 중국인에게 김원봉은 공산당이라는 혐의를 면하기 위함이라 하기로 나는 통일은 좋으나 그런 한 이불 속에서 딴 꿈을 꾸려는 통일 운동에는 참가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3. 피난을 떠나다


얼마 후에 소위 오당 통일 회의(五黨統一會議)라는 것이 개최되어 의열단(義烈團), 신한 독립당(新韓獨立黨), 조선 혁명당(朝鮮革命黨), 한국 독립당(韓國獨立黨), 미주 대한인 독립단(美洲大韓人獨立團)이 통일하여 조선 민족 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이 되어 나왔다.


이 통일에 주동자가 된 김원봉, 김두봉(金枓奉) 등 의열단은 임시 정부를 눈에 든 가시와 같이 싫어하는 패라, 임시 정부의 해소를 극렬히 주장하였고, 당시 임시 정부의 국무 위원이던 김규식(金奎植), 조소앙(趙素昻), 최동오(崔東旿), 송병조(宋秉祚), 차이석(車利錫), 양기탁(梁起鐸), 유동열(柳東悅) 일곱 사람 중에 차이석, 송병조 두 사람을 내어놓고는


김규식, 조소앙, 최동오, 양기탁, 유동열 등 다섯 사람이 통일이란 말에 취하여 임시 정부에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니 김두봉은 좋다구나 하고 임시 정부 소재지인 항주로 가서 차이석, 송병조 양씨에게 오당이 통일된 이 날에 이름만 남은 임시 정부는 취소해 버리자고 강경하게 주장하였으나, 송병조, 차이석 양씨는 굳이 반대하고 임시 정부의 문패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각원 일곱 사람에서 다섯이 빠졌으니 국무 회의를 열 수도 없어서 사실상 무정부 상태였다. 조완구 형이 편지로 내게 이런 사정을 전하였으므로 나는 분개하여 즉시 항주로 달려갔다. 이때에 김 철은 벌써 작고하여 없고 오당 통일에 참가하였던 조소앙은 벌써 거기서 탈퇴하고 있었다.


나는 이시영, 조완구, 김붕준, 양소벽(楊小碧), 송병조, 차이석 제씨와 임시 정부 유지 문제를 협의한 결과 의견이 일치하기로 일동이 가흥으로 가서 거기 있던 이동녕, 안공근, 안경근, 엄항섭 등을 가하여 남호의 놀잇배 한 척을 얻어 타고 호상에 떠서 선중에서 의회를 열고 국무 위원 세 사람을 더 뽑으니 이동녕, 조완구와 김 구였다. 이에 송병조, 차이석을 합하여 국무 위원이 다섯 사람이 되었으니 이제는 국무 회의를 진행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오당 통일론이 나왔을 때에도 여러 동지들은 한 단체를 조직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나는 차마 또 한 단체를 만들어 파쟁을 늘이기를 원치 아니한다는 이유로 줄곧 반대하여 왔었다. 그러나 임시 정부를 유지하려면 그 배경이 될 단체가 필요하였고, 또 조소앙이 벌써 한국 독립당을 재건한다 하니 내가 새 단체를 조직하더라도 통일을 파괴하는 책임은 지지 아니하리라 하여 동지들의 찬동을 얻어 대한 국민당을 조직하였다.


나는 다시 남경으로 돌아왔으나 왜는 내가 남경에 있는 냄새를 맡고 일변 중국 관헌에 대하여 나를 체포할 것을 요구하고, 일변 암살대를 보내어 내 생명을 엿보고 있었다. 남경 경비 사령관 곡정륜(谷正倫)은 나를 면대하여 말하기를, 일본측에서 대역 김 구를 체포할 것이니 입적, 기타의 이유로 방해 말라 하기로, 자기가 김 구를 잡거든 일본서 걸어 놓은 상금은 자기에게 달라고 대답하였으니 조심하라고 하였다. 또 사복 입은 일본 경찰 일곱이 부자묘(夫子廟) 부근으로 돌아다니더라는 말도 들었다.


이에 나는 남경에서도 내 신변이 위험함을 깨닫고 회청교(淮淸橋)에 집 하나를 얻고 가흥에서 배 저어 주던 주애보를 매삭 15원씩 주기로 하고 데려다가 동거하며 직업은 고물상이요, 원적광동성 해남도(海南島)라고 멀찍이 대었다. 혹시 경관이 호구 조사를 오더라도 주애보가 나서서 설명하기 때문에 내가 나서서 본색을 탄로할 필요는 없었다.


1937 노구교(蘆溝橋) 사건이 일어나자 중국은 일본에 대하여 항전을 개시하였다. 이에 재류 한인의 인심도 매우 불안하게 되어서 오당 통일로 되었던 민족 혁명당이 쪽쪽이 분열되어 조선 혁명당이 새로 생기고, 미주 대한 독립단은 탈퇴하고 근본 의열단 분자만이 민족 혁명당의 이름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렇게 분열된 원인은 의열단 분자가 민족 운동의 가면을 쓰고 속으로는 공산주의를 실행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민족 혁명당이 분열되는 반면에 민족주의자의 결합이 생기니 곧 한국 국민당, 조선 혁명당 한국 독립당 및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모든 애국 단체들이 연결하여 임시 정부를 지지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임시 정부는 점점 힘을 얻게 되었다.


중일 전쟁은 강남에까지 미쳐서 상해의 전투가 날로 중국에 불리하였다. 일본 공군의 남경 폭격도 갈수록 우심하여 회청교의 내가 들어 있는 집도 폭격에 무너졌으나 나와 주애보는 간신히 죽기를 면하고 이웃에는 시체가 수두룩하였다. 나와 보니 남경 각처에는 불이 일어나서 밤하늘은 붉은 모전과 같았다. 날이 밝기를 기다려 무너진 집과 흩어진 시체 사이로 마로가(馬路街)에 어머님 계신 집을 찾아갔더니 어머님이 친히 문을 열으시며, 내가 놀라셨겠다는 말에 어머님은,


"놀라기는 무얼 놀라, 침대가 들썩들썩하더군" 하시고, "우리 사람은 상하지 않았나?" 하고 물으셨다.


나는 그 길로 동포 사는 데를 돌아보았으나 남기가(藍旗街)에 많이 있는 학생들도 다 무고하였다.


남경의 정세가 위험하여 정부 각 기관도 중경으로 옮기게 되었으므로 우리 광복 전선(光復戰線) 삼당(三黨)의 백여 명 대가족은 물가가 싼 장사(長沙)로 피난하기로 정하고 상해, 행주에 있는 동지들에게 남경에 모이라는 지시를 하였다. 율양(栗陽) 고당암(古堂菴)에서 선도(仙道)를 공부하고 있는 양기탁에게도 같은 기별을 하였다.


그리고 안공근을 상해로 보내어 그 가권을 데려오되 그의 맏형수 고(故) 안 의사 중근 부인을 꼭 모셔오라고 신신 부탁하였더니 안공근이 돌아올 때에 보니 제 가권뿐이요, 안 의사 부인이 없으므로 나는 크게 책망하였다.


양반의 집에 불이 나면 먼저 신위부터 안아 뫼시는 법이어늘 혁명가가 피난을 하면서 나라 위하여 몸을 버린 의사의 부인을 적진 중에 버리고 가는 법이 어디 있는가, 이는 다만 안공근 한 집의 잘못만이 아니라 혁명가의 도덕에 어그러지고 우리 민족의 수치라고 하였다. 그리고 안공근은 피난하는 동포들의 단체에 들기를 원치 아니하므로 제 뜻에 맡겨 버렸다.


나는 안휘(安徽) 둔계 중학(屯溪 中學)에 재학 중인 신이를 불러오고 어머님을 모시고 영국 윤선으로 한구(漢口)로 가고 대가족 백여 식구는 중국 목선 두 척에 행리까지 잔뜩 싣고 남경을 떠났다.

 

일제가 50만 명의 중국인(Chinese people?)을 죽였다고 자랑

http://blog.daum.net/han0114/11375715

 

남경대학살(南京大虐殺)(1937.12.13-1938.1)은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는 15만 명의 사상자가 일제에 의하여 자행되었다고 사실상 결론지었지만 보수일본인이 그 당시 서방외교관들에게 자랑삼아 한 이야기에서 인명살상수가 50만이라는 주장도 있었던 대학살극이다.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蘆溝橋(노구교)]사건 후 일본군은 대륙국민당 점유지를 전면적으로 침략하였고, 8월 13일 상하이[上海]공략에 이어 9월 5일에는 전대륙연안의 봉쇄를 선언하면서 압박했으나  국민당정부군의 강한 저항을 받아 계속 대량의 일본군대를 파견하였다. 이런 정세 속에서 제2차국·공합작이 성립되어 항일통일전선(抗日統一戰線)이 형성되었다. 계속 밀리던 국민정부는 11월 20일 충칭[重慶]으로 천도(遷都)하면서 남경이 무방비상태가 되자 12월 13일 일본군은 국민당정부 수도 남경을 점령하면서 남경성[南京城]내외에서 국민당 군인·포로·일반시민을 대량으로 학살한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지에서 당시 남경대학살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사실상 남경에 국민당정부 인민만 있었는가 하는 의문이다. 상해에서 일제가 패망한 후 일지 마지막 부분에서 백범선생이 본국으로 귀환하기 전에 환영식에 참석한 교민들이 6,000명이나 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렇다면 상당한 교민 수가 상해에 거주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지금도 무슨 환영식이라 하여 마음은 있어도 참석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참석자 수가 그것도 교민이 6,000명이라는 사실은 대단히 많은 수에 조선이들이 살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상해 뿐만아니라 일제의 경찰력이 통하지 않는 곳 그곳이 어떤 곳이라고 할지라도 몸을 피할 수 있고 안전한 지역이라고 한다면 집단적으로 거주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비록 한국임시정부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일제압제로 부터 자유스럽다면 국민당이라도 의지하려고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조선인들에게 국민당이 중화를 내세우고 대륙조선을 승계하였다고 하였거나 그렇다고 이해했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상해와 남경은 이웃이라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지역적으로 가깝다.

그런 사실에서 유추해보면 남경에도 우리 조선이들이 없었다고 할 수 없는 상황이다.

50만명이나 되는 남경대학살의 희생자들의 정확한 신분상황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전자에 주지한바와 같이 백범선생과 마찬가지로 일반인들도 살기 위해 변명()을 하거나 개명(改名)하여 조선인의 신분을 감추고 국민당정부 인민으로 얼마든지 행세 할 수 있었던 시대였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알고있는 항일의사와 민족독립운동가 이외 일반인으로서 극일, 반일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대륙조선인들이라면 분명코 일본 그늘에서 살 수 없다고 여겼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때문에 상당수 조선이들이 남경에 살았을 것이고 그 대학살극에 직접적인 피해자가 되어 희생이 되었을 가능성이 많다고 여기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어머님을 모시고 신이를 데리고 한구를 거쳐서 무사히 장사에 도착하였다(1938). 선발대로 임시 정부의 문부를 가지고 진강을 떠난 조성환, 조완구 등은 남경서 오는 일행보다 수일 먼저 도착하였고, 목선으로 오는 대가족 일행도 풍랑을 겪었다 하나 무고히 장사에 왔다. 남기가 사무소에서 부리던 중국인 채 군이 무호(蕪湖) 부근에서 풍랑 중에 물을 길어 올리다가 실족하여 익사한 것이 유감이었다. 그는 사람이 충실하니 데리고 가라 하시는 어머님의 명령으로 일행 중에 편입하였던 것이다.


내가 남경서 데리고 있던 주애보는 거기를 떠날 때에 제 본향 가흥으로 돌려보냈었다. 그 후 두고두고 후회하는 것은 그 때에 여비 백 원만 준 일이다. 그는 5년이나 가깝게 나를 광동인으로만 알고 섬겨 왔고 나와는 부부 비슷한 관계도 부지중에 생겨서 실로 내게 대한 공로란 적지 아니한데 다시 만날 기약이 있을 줄 알고 노자 이외에 돈이라도 넉넉하게 못 준 것이 유감천만이다.


4. 장사(長沙)에서의 생활


안공근의 식구는 중경으로 갔거니와 장사에 모인 백여 식구도 공동생활을 할 줄 모르므로 저마다 방을 얻어서 제각기 밥을 짓는 생활을 하였다. 나도 어머님을 모시고 또 한 번 살림을 시작하여서 어머님이 손수 지어주시는 음식을 먹었다. 그러나 이 글을 쓰는 오늘날에는 이미 어머님은 이 세상에 아니 계시다. 어머님이 계셨더면 상편을 쓸 때와 같이 지난 일과 날짜도 많이 여쭈어 볼 것이언마는 이제는 어머님은 아니 계시다.


이 기회에 나는 어머님이 내가 상처 후에 본국으로 가셨다가 다시 상해로 오시던 일을 기록하련다.


어머님이 신이를 데리고 인천에 상륙하셨을 대에는 노자가 다 떨어졌었다. 그때에는 우리가 상해에서 조석이 어려워서 어머님이 중국 사람들의 쓰레기통에 버린 배추 떡잎을 뒤져다가 겨우 반찬을 만드시던 때라 노자를 넉넉히 드렸을 리가 만무하다.


인천서 노자가 떨어진 어머님은 내가 말씀도 한 일이 없건마는 동아일보 지국으로 가서 사정을 말씀하셨다. 지국에서는 벌써 신문 보도로 어머님이 귀국하시는 것을 알았다 하면서 서울까지 차표를 사드렸다.


어머님은 서울에 내려서는 동아일보사를 가셨다. 동아일보사에서는 사리원까지 차표를 사드렸다. 어머님은 해주 본향에 선영과 친족을 찾으시지 않고 안악 김씨 일문에서 미리 준비하여 놓은 집에 계시게 하였다.


내가 인이를 데리고 있는 동안, 어머님은 당신의 생활비를 절약하셔서 때때로 내게 돈을 보내주셨다.


이봉창, 윤봉길 두 의사의 사건이 생기매 경찰은 가끔 어머님을 괴롭게 한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어머님께 아이들을 데리고 중국으로 나오시라고 기별하였다. 그 때에는 내게는 어머님이 굶으시지 않을이만한 힘이 있다고 여쭈었다.


어머님은 중국으로 오실 결심을 하시고 안악 경찰서에 친히 가겨서 출국 허가를 청하였더니 의외로 좋다고 하므로 살림을 걷어치우셨다.


그랬더니 서울 경무국으로부터 관리 하나가 안악으로 일부러 내려와서 어머님께 경찰의 힘으로도 못 찾는 아들을 노인이 어떻게 찾느냐고, 그러니 출국 허가를 취소한다고 하였다.


어머님은 대로하여서,


"내 아들을 찾는 데는 내가 경관들보다 나을 터이고, 또 가라고 허가를 하여서 가장 집물을 다 팔게 해놓고 이제 또 못 간다는 것이 무슨 법이냐. 너희놈들이 남의 나라를 빼앗아 먹고 이렇게 정치를 하고도 오래 갈 줄 아느냐?"


하면서 기절하셨다. 이에 경찰은 어머님을 김씨네에게 맡기고 가 버렸다.

그 후에 경찰이 물으면 어머님은, "그렇게 말썽 많은 길은 안 떠난다" 하시고는 목수를 불러 다시 집을 수리하고 집물(什物)을 마련하시는 등 오래 사실 모양을 보이셨다.


이러하신 지 수삭 후에 어머님은 송화 동생을 보러 가신다 칭하고 신이를 데리시고 신천으로, 재령으로, 사리원으로 도막도막 몸을 옮겨서 평양에 도착하여 숭실 중학교 재학 중인 인이를 데리고 안동현으로 가는 직행차를 타셨다.


대련서 왜 경관의 취조를 받았으나 거기서 인이의 답변으로 늙은 조모를 모시고 위해위 친척의 집으로 간다고 하여서 무사히 통과하였다. 어머님이 상해 안공근의 집을 거쳐 가흥 엄항섭의 집에 오셨다는 기별을 남경에서 듣고 나는 곧 가흥으로 달려가서 9년 만에 다시 모자가 서로 만났다.


나를 보시자마자 어머님은 이러한 의외의 말씀을 하셨다.


"나는 이제부터 너라고 아니하고 자네라고 하겠네. 또 말로 책하더라도 초달로 자네를 때리지는 않겠네. 들으니 자네가 군관 학교를 설립하고 청년들을 교육한다니, 남의 사표(師表)가 된 모양이니 그 체면을 보아주자는 것일세."


나는 어머님의 이 분부에 황송하였고, 또 이것을 큰 은전으로 알았다.

나는 어머님을 남경으로 모셨다가 따로 집을 잡고 계시게 하다가 1년이 못하여 장사로 가게 된 것이었다.


어머님이 남경에 계실 때 일이다. 청년단과 늙은 동지들이 어머님의 생신 축하연을 베풀려 함을 눈치채시고 어머님은 그들에게 그 돈을 돈으로 달라, 그러면 당신이 자시고 싶은 음식을 만들겠다 하시므로 발기하던 사람들은 어머님의 청구대로 그 돈을 드렸더니 어머님은 그것으로 단총 두 자루를 사서 그것을 독립 운동에 쓰라 하고 내어 놓으셨다.


장사로 옮아온 우리 백여 명 대가족은 중국 중앙 정부의 보조와 미국에 있는 동포들의 후원으로 생활에 곤란은 없어서 피난민으로는 고등 피난민이라 할 만하게 살았다. 더욱이 장사는 곡식이 흔하고 물가가 지천하였고, 호남성 부주석으로 새로 도임한 장치중(張治中) 장군은 나와 숙친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더욱 우리에게 많은 편의를 주었다.


나는 상해, 해주, 남경에서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변성명을 하였으나 장사에서는 언제나 버젓이 김 구로 행세하였다.


오는 노중에서부터 발론이 되었던 3당 합동 문제가 장사에 들어와서는 더욱 활발하게 진전되었다. 합동하려는 3당의 진용은 이러하였다.


첫째는 조선 혁명당이니 이청천, 유동열, 최동호, 김학규(金學奎), 황학수(黃學秀), 이복원(李復源), 안일청(安一淸), 현익철(玄益哲) 등이 중심이요, 둘째는 한국 독립당이니 조소앙, 홍 진, 조시원(趙時元) 등이 그 간부며, 다음으로 셋째는 내가 창설한 한국 국민당이니 이동녕, 이시영, 조완구, 차이석, 송병조, 김붕준, 엄항섭, 안공근, 양 묵(楊墨), 민병길(閔丙吉), 손일민(孫逸民), 조성환 등이 그 중의 주요 인물이었다.


이상 3당이 통합 문제를 토의하려고 조선 혁명당 본부인 남목청(南木廳)에 모였는데 나도 거기 출석하여 있었다.


내가 의식을 회복하여 보니 병원인 듯하였다. 웬일이냐 한즉, 내가 술에 취하여 졸도하여서 입원한 것이라고 하였다. 의사가 회진할 때에 내 가슴에 웬 상처가 있는 것을 알고 이것은 웬 것이냐 한즉, 그것은 내가 졸도할 때에 상머리에 부딪친 것이라 하므로 그런 줄만 알고 병석에 누워 있었다. 한 달이나 지나서야 엄항섭 군이 내게 비로소 진상을 설명하여 주었다.


그것은 이러하였다.


그날 밤, 조선 혁명단원으로서 내가 남경 있을 때에 상해로 특무 공작을 간다고 하여서 내게 금전의 도움을 받은 일이 있는 이운한(李雲漢)이가 회장에 돌입하여 권총을 난사하여 첫방에 내가 맞고, 둘째로 현익철, 셋째로 유동열이 다 중상하고, 넷째방에는 이청천이 경상하였는데 현익철은 입원하자 절명하고 유동열은 치료 경과가 양호하다는 것이었다.


범인 이운한은 장사 교외 작은 정거장에서 곧 체포되고 연루자로 강창제(姜昌濟) 박창세(朴昌世) 등도 잡혔었으나, 강, 박 양인은 석방되고 이운한은 탈옥하여 도망하였다.


5. 총에 맞아 죽을 뻔했으나


성 주석(省主席) 장치중 장군은 친히 내가 입원한 상아 의원(湘雅醫院)에 나를 위문하고 병원 당국에 대하여서는 치료비는 얼마가 들든지 성 정부에서 담당할 것을 말하였다고. 당시 한구에 있던 장개석 장군은 하루에도 두세 번 전보로 내 병상을 묻고 내가 퇴원한 기별을 듣고는 나하천(羅霞天)을 대표로 내게 보내어 돈 3천 원을 요양비로 쓰라고 주었다.


퇴원하여 어머님을 찾아뵈니 어머님은, "자네 생명은 하느님이 보호하시는 줄 아네. 사불범정(邪不犯正)이지." 이렇게 말씀하시고 또, "한인의 총에 맞고 살아 있는 것이 왜놈의 총에 맞아 죽은 것만 못해" 하시기도 했다.


애초에 내 상처는 중상이어서 병원에서 의사가 보고 입원 수속도 할 필요가 없다 하여 문간방에 두고 절명하기만 기다렸던 것이 네 시간이 되어도 살아 있었기 때문에 병실로 옮기고 치료하기를 시작하였다고 한다. 내가 이런 상태이므로 향항에 있던 인이에게는 내가 총을 맞아 죽었다는 전보를 놓아서 안공근은 인이와 함께 내 장례에 참여할 생각으로 달려 왔었다.


전쟁의 위험이 장사에도 파급되어서 성 정부에서도 끝까지 이 사건을 법적으로 규명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내 추측으로는 이운한이 강창제, 박창세 두 사람의 악선전에 혹하여 그런 일을 한 것인 듯하다.


내가 퇴원하여 엄항섭 군집에서 정양을 하고 있는데 하루는 갑자기 신기가 불편하고 구역이 나며 우편 다리가 마비하기로 다시 상아 의원에 가서 진찰을 받았다. 엑스 광선으로 본 결과 서양인 외과 주임이 말하기를, 내 심장 옆에 박혀 있던 탄환이 혈관을 통하여 우편 갈빗대 옆에 옮아가 있으니 불편하면 수술하기도 어렵지 아니하나 그대로 두어도 생명에는 관계가 없다 하고 또 말하기를, 오른편 다리가 마비하는 것은 탄환이 대혈관을 압박하는 때문이어니와 작은 혈관들이 확대되어서 압박된 혈관의 기능을 대신하게 되면 다리 마비하던 것도 차차 나으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던 차에 장사가 또 위험하게 되매 우리 3당의 백여 명 가족은 또 광주(廣州)로 이전하였으니 호남의 장치중 주석광동성 주석 오철성(吳鐵城) 씨에게 소개하여 준 것이었다. 광주에서는 중국 군대에 있는 동포 이준식(李俊植), 채원개(蔡元凱) 두 분의 알선으로 동산백원(東山栢園)임시 정부 청사로, 아세아 여관을 전부 우리 대가족의 숙사로 쓰게 되었다.


이렇게 정부와 가족을 안돈하고 나는 안 의사 미망인과 그 가족을 상해에서 나오게 할 계획으로 다시 향항으로 가서 안정근, 안공근 형제를 만나 강경하게 그 일을 주장하였으나 그들은 교통이 어렵다는 이유로 듣지 아니하였다. 사실상 그 때 사정으로는 어렵기도 하였다. 나는 안 의사의 유족을 적진 중에 둔 것율양 고당암에서 중국 도사 임한정(任漢廷)에게 선도를 공부하고 있던 양기탁을 구출하지 못한 것이 유감이었다.


향항에서 이틀을 묵어서 광주로 돌아오니 거기도 왜의 폭격이 시작되었으므로 또 나는 어머님과 대가족을 불산(佛山)으로 이접하게 하였다. 이것은 오철성 주석의 호의와 주선에 의함이었다.


이 모양으로 광주에서 두 달을 지나, 장개석 주석에게 우리도 중경으로 가기를 원한다고 청하였더니 오라는 회전이 왔기로 조성환, 나태섭(羅泰燮) 두 동지를 대동하고 나는 다시 장사로 가서 장치중 주석에게 교섭하여 공로(公路) 차표 석 장과 귀주성(貴州省) 주석 오정창(吳鼎昌) 씨에게로 하는 소개장을 얻어 가지고 중경 길을 떠나 10여 일만귀주성 수부 귀양(貴陽)에 도착하였다.


내가 지금까지에 본 중국은 물산이 풍부한 지방이었으나 귀주 지경(地境)에 들어서는 눈에 띄는 것이 모두 빈궁이었다. 귀양 시중에 왕래하는 사람들을 보면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모조리 의복이 남루하고 혈색이 좋지 못하였다. 원체 산이 많은 지방인데다가 산들이 다 돌로 되고 흙이 적어서 농가에서는 바위 위에다 흙을 펴고 씨를 뿌리는 형편이었다. 그 중에서도 한족(漢族)은 좀 나으나 원주민인 묘족(苗族)의 생활은 더욱 곤궁하고 야매한 모양이었다.


중국말을 모르는 나는 말을 듣고 한족과 묘족을 구별할 수는 없으나 복색으로는 묘족의 여자를 알아낼 수 있고, 안광으로는 묘족의 남자를 지적할 수가 있었다. 한족의 눈에는 문화의 빛이 있는데 묘족의 눈에는 그것이 없었다.


묘족은 요순시대의 삼묘(三苗) 씨의 자손으로서 4천 년 이래로 이렇게 꼴사나운 생활을 하고 있으니 이 무슨 전생의 업보인고. 요순 이후로는 역사상에 묘족의 이름이 다시 나타나지 아니하기로 그들은 이미 다 절멸된 줄만 알았더니 호남, 광동, 광서, 운남, 귀주, 사천, 서강 등지에 수십 백 종족으로 갈린 묘족이 퍼져 있으면서도 이렇게 소문이 없는 것은 그들 중에 인물이 나지 못한 까닭이다. 현재 광서의 백숭희(白崇禧)와 운남의 용운(龍雲) 두 장군이 묘족의 후예라 하는 말도 있으나 나는 그 진부를 단정할 자료를 가지지 못하였다.


귀양에서 여드레를 묵어서 나는 무사히 중경에 도착하였으나 그 동안에 광주가 일본군에게 점령되었다. 우리 대가족의 소식이 궁금하던 차에 다 무사히 광주를 탈출하여 유주(柳州)에 와 있다는 전보를 받고 안심하였다. 그들은 다 중경에 오기를 희망하므로 내가 교통부와 중앙당부에 교섭하여 자동차 여섯 대를 얻어서 기강(綦江)이라는 곳에 대가족을 옮겨 왔다. 군수품 운송에도 자동차가 극히 부족하던 이때에 이렇게 빌려준 중국의 호의는 이루 감사할 말이 없는 일이었다.


나는 미주서 오는 통신을 기다리노라고 우정국 - 우체국 - 에 가 있는 때에 인이가 왔다. 유주에 계신 어머님이 병환이 중하신데 중경으로 오시기를 원하시므로 모시고 온 것이었다. 나는 인이를 따라 달려가니 어머님은 내 여관인 저기문(儲奇問) 홍빈여사(鴻賓旅舍) 맞은편에 와 계셨다. 곧 내 여관으로 모시고 와서 하룻밤을 지내시게 하고 강 남쪽 아궁보(鵝宮堡) 손가화원(孫家花園)에 있는 김홍서(金弘敍) 군집으로 가계시게 하였다. 이것은 김홍서 군이 호의로 자청한 것이었다.


어머님의 병환은 인후증인데 의사의 말이 이것은 광서의 수토병으로 젊은 사람이면 수술을 할 수 있으나 어머님같이 팔십 노인으로서는 그리할 수도 없고 또 이미 치료할 시기를 놓쳐서 손 쓸 길이 없다고 하였다.


6. 광복군을 창설하다


어머님이 중경으로 오시는 일에 관하여 잊지 못할 은인이 있으니 그는 의사 유진동(劉振東) 군과 그 부인 강영파(姜映波) 여사였다. 이자는 상해에서 학생으로 있을 때부터 나를 위하여 주던 사람들인데 쿨링( 嶺)에서 요양원을 경영하던 것을 걷어치우고 제 몸이 제 몸이 아닌 나를 대신하여 내 어머님을 모시고 간호하기 위하여 중경으로 온 것이었다. 그러나 유 의사 부처가 왔을 때는 벌써 어머님은 더 손 쓸 수가 없게 되었던 때였다.


내가 중경에 와서 한 일은 세 가지였었다. 첫째는 차를 얻어서 대가족을 실어오는 일이요, 둘째로는 미주, 하와이와 연락하여 경제적 후원을 받는 일이요, 셋째는 장사에서부터 말이 되면서도 되지 못한 여러 단체의 통일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대가족도 안돈이 되고, 미주와 연락도 되었으므로 나는 셋째 사업인 단체 통일에 착수하였다.


나는 중경에서 강 건너 아궁보에 있는 조선 의용대와 민족 혁명당 본부를 찾았다. 그 당시 김 약산은 계림(桂林)에 있었으나 윤기섭, 성주식(成周湜), 김홍서, 석 정(石丁), 김두봉, 최석순(崔錫淳), 김상덕(金商德) 등 간부가 나를 위하여 환영회를 열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모든 단체를 통일하여 민족주의의 단일당을 만들 것을 제의하였더니 그 자리에 있던 이는 일치하여 찬성하였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여러 단체에도 참가를 권유하기로 결의하였다.


미주와 하와이에서는 곧 회답이 왔다. 통일에는 찬성이나 김 약산은 공산주의자인즉, 만일 내가 그와 일을 같이 한다면 그들은 나와의 관계까지도 끊어 버린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김 약산과 상의한 결과 그와 나와 연명으로, 민족 운동이야말로 조국 광복에 필요하다는 뜻으로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여기 의외의 고장이 생겼으니 그것은 국민당 간부들이 연합으로 하는 통일은 좋으나 있던 당을 해산하고 공산주의자들을 합한 단일당을 조직하는 데에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주의가 서로 다른 자는 도저히 한 조직체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나는 병을 무릅쓰고 기강으로 가서 국민당의 전체 회의를 열고 노력한 지 1개월 만에 비로소 단일당으로 모든 당들을 통일하자는 의견에 국민당의 합의를 얻었다. 그래서 민족 운동 진영인 한국 국민당, 한국 독립당, 조선 혁명당과 공산주의 전선인 조선 민족 혁명당, 조선 민족 해방 동맹, 조신 민족 전위 동맹, 조선 혁명자 연맹의 일곱으로 된 7당 통일 회의를 열게 되었다.


회의가 진행함에 따라 민족 운동편으로 대세가 기울어지는 것을 보고 해방 동맹과 전위 동맹은 민족 운동을 위하여 공산주의의 조직을 해산할 수 없다고 말하고 퇴석하였다. 이렇게 되니 7당이 5당으로 줄어서 순전한 민족주의적인 새 당을 조직하고 8개 조의 협정에 다섯 당의 당수들이 서명하였다.


이에 좌우 5당의 통일이 성공하였으므로 며칠을 쉬고 있던 차에 이미 해산하였을 민족 혁명당 대표 김 약산이 돌연히 탈퇴를 선언하였으니 그 이유는, 당의 간부들과 그가 거느리는 청년 의용대가 아무리 하여도 공산주의를 버릴 수 없으니 만일 8개 조의 협정을 수정하지 아니하면 그들이 다 달아나겠다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5당의 통일도 실패되어서 나는 민족진영 3당의 동지들과 미주·하와이 여러 단체에 대하여 나의 불명한 허물을 사과하고 이어서 원동에 있는 3당만을 통일하여 새로 한국 독립당이 생기게 되었다. 하와이 애국단과 하와이 단합회가 각각 해소하고 한국독립당 하와이 지부가 되었으니 역시 5당 통일은 된 셈이었다.


새로 된 한국 독립당의 간부로는 집행 위원장에 김 구, 위원으로는 홍 진, 조소앙, 조시원, 이청천, 김학규, 유동열, 안 훈(安勳), 송병조, 조완구, 엄항섭, 김붕준, 양 묵, 조성환, 차이석, 이복원이요, 감찰 위원장에 이동녕, 위원에 이시영, 공진원(公鎭遠), 김의한 등이었다.


임시 의정원에는 나를 국무회의 주석으로 선거하였는데, 종래의 주석을 국무위원이 번갈아 하던 제도를 고쳐서 대내, 대외에 책임을 지도록 하였다. 그리고 미국, 서울, 워싱턴에 외교 위원부를 설치하고 이승만 박사를 그 위원장으로 임명하였다.


한편 중국(국민당) 중앙정부에서는 우리 대가족을 위하여 토교(土橋) 동감폭포(東坎瀑布) 위에 기와집 세 채를 짓고 또 시가에도 집 한 채를 사 주었으나 그 밖에 우리 독립 운동을 원조하여 달라는 청에 대하여서는 냉담하였다. 그래서 나는 중국(국민당)이 일본군의 손에 여러 대도시를 빼앗겨 자신의 항전에 골몰한 이때에 우리를 위한 원조를 바라기가 미안하니 나는 미국으로 가서 미국의 원조를 청할 의사인즉 여행권을 달라고 청하였다.


그런즉 중앙 정부의 서은증(徐恩曾) 씨가 말하기를, 내가 오랫동안 중국(대륙)에 있었으니 중국에서 무슨 일을 하나 남김이 좋지 아니하냐, 사업 계획서를 제출하기를 청하므로 나는 장래 독립한 한국의 국군의 기초가 될 광복군 조직의 계획을 제출하였더니 곧 좋다는 회답이 왔다.


이에 임시 정부에서는 이청천을 광복군 총사령고나으로 임명하고, 있는 힘 - 미주와 하와이 동포가 보내어 준 4만 원 -을 다하여 중경 가능빈관(嘉陵賓館)에 중국인, 서양인 등 중요 인사를 초청하여 한국광복군 성립식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우선 30여 명 간부를 서안(西安)으로 보내어 미리 가 있던 조성환 등과 합하여 한국 광복군 사령부를 서안에 두고 이범석(李範奭)을 제1지대장으로 하여 산서(山西) 방면으로 보내고 고운기(高雲起) - 본명 공진원 -를 제2지대장으로 하여 수원(綏遠) 방면으로 보내고 나월환(羅月煥) 등의 한국청년 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를 광복군으로 개편하여 제5지대를 삼았다.


그리고 강서성 상요(上饒)에 황해도 해주 사람으로서 죽안군 제3전구 사령부 정치부에서 일보고 있는 김문호(金文鎬)를 한국 광복군 징모처 제3분처(韓國光復軍徵募處第三分處) 주임을 삼고 그 밑에 신정숙(申貞淑)을 회계조장, 이지일(李志一)을 정보조장, 한도명을 훈련조장으로 각각 임명하여 상요로 파견하였다.


독립당과 임시 정부와 광복군의 일체 비용은 미주, 멕시코, 하와이에 있는 동포들이 보내는 돈으로 썼다. 장개석 부인 송미령(宋美齡)이 대표하는 부녀위로총회(婦女慰勞總會)로부터 중국 돈으로 10만 원의 기부가 있었다.


이 모양으로 광복군이 창설되었으니 인원도 많지 못하여 몇 달 동안을 유명무실하게 지내던 중 문득 한 사건이 생겼으니 그것은 50여 명 청년이 가슴에 태극기를 붙이고 중경에 있는 임시 정부 정청으로 애국가를 부르며 들어온 것이다. 이들은 우리 대학생들이 학병으로 일본 군대에 편입되어 중국 전선에 출전하였다가 탈주하여 안휘성(安徽省) 부양(阜陽)의 광복군 제3지대를 찾아온 것을 지대장 김학규가 임시 정부로 보낸 것이었다.

 

대륙조선청년들은 일제에 의하여 강제 징용되었다.


7. 하필 이 때 일본이 항복하다니


이 사실은 중국인에게 큰 감동을 주어 중한 문화 협회(中韓文化協會) 식당에서 환영회를 개최하였는데 서양 여러 나라의 통신 기자들이며 대사관원들도 출석하여 우리 학병들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발하였다. 어려서부터 일본의 교육을 받아 국어도 잘 모르는 그들이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려고 총살의 위험을 무릅쓰고 임시 정부를 찾아왔다는 그들의 말에 우리 동포들은 말할 것도 없이 목이 메었거니와 외국인들도 감격에 넘친 모양이었다.


이것이 인연으로 우리 광복군이 연합국의 주목을 끌게 되어 미국의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 미국 전략 사무국의 약자 -를 주관하는 사전트 박사는 광복군 제2지대장 이범석과 합작하여 서안에서, 윔스 중위는 제3지대장 김학규와 합작하여 부양에서 우리 광복군에게 비밀 훈련을 실시하였다.


예정대로 3개월의 훈련을 마치고 정탐과 파괴 공작의 임무를 띠고 그들을 비밀히 본국으로 파견할 준비가 된 때에 나는 미국 작전부장 다노배 장군과 군사 협의를 하기 위하여 미국 비행기로 서안으로 갔다.


회의는 광복군 제2지대 본부 사무실에서 열렸는데, 정면 우편 태극기 밑에는 나와 제2지대 간부가, 좌편 미국기 밑에는 다노배 장군과 미국인 훈련관들이 앉았다. 다노배 장군이 일어나,


"오늘부터 아메리카 합중국과 대한민국 임시 정부와의 적 일본을 항거하는 비밀공작이 시작된다" 고 선언하였다.


다노배 장군과 내가 정문을 나올 때에 활동사진의 촬영이 있고 식이 끝났다.


이튿날 미국 군관들의 요청으로, 훈련받은 학생들의 실지의 공작을 시험하기로 하여 두곡(杜曲)에서 동남으로 40리, 옛날 한시에 유명한 종남산(終南山)으로 자동차를 몰았다. 동구에서 차를 버리고 5리쯤 걸어가면고찰이 있는데 이곳이 우리 청년들이 훈련을 받은 비밀 훈련소였다. 여기서 미국 군대식으로 오찬을 먹고 참외와 수박을 먹었다.

 

종남산(終南山) 서안에 있는 산으로서 남산(南山)이라고도 한다.


첫째로 본 것은 심리학적으로 모험에 능한 자, 슬기가 있어서 정탐에 능한 자, 눈과 귀가 밝아서 무선 전신에 능한 자를 고르는 것이었다. 이 시험을 한 심리학자는, 한국 청년이 용기로나 지능으로나 다 우량하여서 장래에 희망이 많다고 결론하였다.


다음에는 청년 일곱을 뽑아서 한 사람에게 숙마바 하나씩을 주고, 수백 길이나 되는 절벽 밑에 내려가서 나뭇잎 하나씩을 따가지고 오라는 시험이었다. 일곱 청년은 잠간 모여서 의논하더니 그들의 숙마바를 이어서 한 긴 바를 만들어 한 끝을 바위에 매고 그 줄을 붙들고 일곱이 다 내려가서 나뭇잎 하나씩을 따 입에 물고 다시 그 줄에 달려 일곱이 차례차례로 다 올라왔다. 시험관은 이것을 보고 크게 칭찬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중국(국민당) 학생 4백 명을 모아놓고 시켰건마는 그들이 해결치 못한 문제를 한국 청년 일곱이 훌륭하게 하였소. 참으로 한국 사람은 전도유망한 국민이오."


일곱 청년이 이 칭찬을 받을 때에 나는 대단히 기뻤다.


다음에 폭파술, 사격술, 비밀히 강을 건너가는 재주 같은 것을 시험하여 다 좋은 성적을 얻은 것을 보고 나는 만족하여 그 날로 두곡으로 돌아왔다.


이튿날은 중국 친구들을 찾을 차례로 서안으로 들어갔다. 두곡서안이 40리였다.


호종남(胡宗南) 장군은 출타하여서 참모장만을 만나고 성 주석 축소주(祝紹周) 선생은 나와 막역한 친우라 이튿날 그의 사저에서 석반을 같이 하기로 하였다. 성당부에서는 나를 위하여 환영회를 개최한다 하고, 서안 부인회에서는 나를 환영하기 위하여 특별히 연극을 준비한다 하고, 서안의 각 신문사에서도 환영회를 개최하겠으니 출석하여 달라는 초청이 왔다.


나는 그 밤을 우리 동포 김종만(金鍾萬) 씨 댁에서 지내고 이튿날은 서안의 명소를 대개 구경하고 저녁에는 어제 약속대로 축 주석 댁 만찬에 불려갔다. 식사를 마치고 객실에 돌아와 수박을 먹으며 담화를 하는 중에 문득 전령이 울었다. 축 주석은 놀라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중경에서 무슨 소식이 있나 보다고 전화실로 가더니 잠시 후에 뛰어나오며,


"왜적이 항복한다오!" 하였다.

'아! 왜적이 항복!'


이것은 내게 기쁜 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었다. 천신만고로 수년간 애를 써서 참전할 준비를 한 것도 다 허사다.


서안부양에서 훈련을 받은 우리 청년들에게 각종 비밀한 무기를 주어 산동에서 미국 잠수함을 태워 본국으로 들여보내어서 국내의 요소를 혹은 파괴하고 혹은 점령한 후에 미국 비행기로 무기를 운반할 계획까지도 미국 육군성과 다 약속이 되었던 것을 한 번 해보지도 못하고 왜적이 항복하였으니 진실로 전공이 가석하거니와 그보다도 걱정되는 것은 우리가 이번 전쟁에 한 일이 없기 때문에 장래에 국제간에 발언권이 박약하리라는 것이다.


나는 더 있을 마음이 없어서 곧 축씨 댁에서 나왔다. 내 차가 큰 길에 나설 때에는 벌써 거리는 인산인해를 이루고 만세 소리가 성중에 진동하였다.


나는 서안에서 준비되고 있던 나를 위한 모든 환영회를 사퇴하고 즉시 두곡으로 돌아왔다. 와 보니 우리 광복군은 제 임무를 하지 못하고 전쟁이 끝난 것을 실망하여 침울한 분위기에 잠겨 있는데 미국 교관들과 군인들은 질서를 잊을이 만큼 기뻐 뛰고 있었다. 미국이 우리 광복군 수천 명을 수용할 병사를 건축하려고 일변 종남산에서 재목을 운반하고 벽돌가마에서 벽돌을 실어 나르던 것도 이날부터 일제히 중지하고 말았다.


내 이번 길의 목적은 서안에서 훈련받은 우리 군인들을 제1차로 본국으로 보내고 그 길로 부양으로 가서 거기서 훈련받은 이들을 제2차로 떠내 보낸 후에 중경으로 돌아감이었으나 그 계획도 다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내가 중경서 올 때에는 군용기를 탔으나 그리로 돌아갈 때에는 여객기를 타게 되었다.


중경에 와 보니 중국인들은 벌써 전쟁 중의 긴장이 풀어져서 모두 혼란한 상태에 빠져 있고 우리 동포들은 지향할 바를 모르는 형편에 있었다. 임시 정부에서는 그 동안 임시 의정원을 소집하여 혹은 임시 정부 국무 위원회 총사직을 주장하고, 혹은 이를 해산하고 본국으로 들어가자고 발론하여 귀결이 못 나다가 주석인 내게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3일간 정회를 하고 있었다.


8. 중경 생활의 추억


나는 의정원에 나아가 해산도 총사직도 천만부당하다고 단언하고 서울에 들어가 전체 국민의 앞에 정부를 내어 바칠 때까지 현상대로 가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여 전원의 동의를 얻었다. 그러나 미국측으로부터 서울에는 미국 군정부가 있으니 임시 정부로서는 입국을 허락할 수 없은즉, 개인의 자격으로 오라 하기로 우리는 할 수 없이 개인의 자격으로 고국에 돌아가기로 결정하였다.


이리하여 7년간의 중경 생활을 마치게 되니 실로 감개가 많아서 무슨 말을 써야 할지 두서를 찾기가 어렵다.


나는 교자를 타고 강 건너 화강산에 있는 어머님 묘소와 아들 인의 무덤에 가서 꽃을 놓고 축문을 읽어 하직하고 묘지기를 불러 금품을 후히 주어 수호를 부탁하였다.


그러고는 가죽 상자 여덟 개를 사서 정부의 모든 문서를 싸서 중경에 거류하는 5백여 명 동포의 선후책을 정하고, 임시 정부가 본국으로 돌아간 뒤에 중국 정부와 연락하기 위하여 주중화 대표단을 두어 박찬익을 단장으로 민필호(閔弼鎬), 이 광(李光), 이상만(李象萬), 김은충(金恩忠) 등을 단원으로 임명하였다.


우리가 중경을 떠나게 되매 중국 공산당 본부에서는 주은래(周恩來), 동필무(董必武) 제씨가 우리 임시 정부 국무원 전원을 청하여 송별연을 하였고, 중앙 정부와 국민당에서는 장개석 부처를 위시하여 정부, 당부, 각계 요인 2백여 명이 모여 우리 임시 정부 국무 위원과 한국 독립당 간부를 초청하여 국민당 중앙당부 대례당에서 중국기와 태극기를 교차하고 융숭하고도 간곡한 송별연을 열어 주었다.

 

만약 백범선생께서 대륙조선 복건을 위하여 대일투쟁을 전개하였다면 과연 온전할 수 있었겠는가 하는 면과 대륙조선의 귀속권을 요구할 수 있는 백범선생이라면 그들과 적대관계가 형성 될 수 있는 문제에서 이처럼 융슝한 대접과 간곡한 송별식까지 열어 환송하였다는 것은 다시 생각하게 하는 부분이다. 이미 일제에 의하여 대륙으로부터 이동 분가(分家)하여 놓은 한반도를 본국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처지라면 그들에게 적이 아닌 손님이 분명한 것이다.

 

장개석 주석과 송미령 여사가 선두로 일어나 장래 중국과 한국 두 나라가 영구히 행복되도록 하자는 축사가 있고 우리 편에서도 답사가 있었다. 중경을 떠나던 일을 기록하기 전에 7년간 중경 생활에 잊지 못할 것 몇 가지를 적으려 한다.


첫째 중경에 있던 우리 동포의 생활에 관하여서다. 중경은 원래 인구 몇 만밖에 안 되던 작은 도시였으나 중앙 정부가 이리로 옮겨온 후로 일본군에게 점령당한 지방의 관리와 피난민이 모여들어서 일약 인구 백만이 넘는 대도시가 되었다. 아무리 새로 집을 지어도 미처 다 수용할 수 없어서 여름에는 한데에서 사는 사람이 수십만이나 되었다.


식량은 배급제여서 배급소 앞에는 언제나 장사진을 치고 서로 욕하고 때리고 하여 분규가 아니 일어나는 때가 없었다. 그러나 우리 동포는 따로 인구를 선책하여서 한 몫으로 양식을 타서 하인을 시켜 집집에 배급하기 때문에 대단히 편하였고 쌀을 쓸기까지 하였다. 먹을 물도 사용인을 시켜 길었다.


중경시 안에 사는 동포들뿐 아니라, 교외인 토교(土橋)에 사는 이들도 한인촌을 이루고 중국 사람의 중산 계급 정도의 생활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 간혹 부족하다는 불평도 있었으나 규율 있고 안전한 단체 생활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


나 자신의 중경 생활은 임시 정부를 지고 피난하는 것이 일이요, 틈틈이 먹고 잤다고 할 수 있었다. 중경의 폭격이 점점 심하여가매 임시 정부도 네 번이나 옮겼다.


첫 번 정청인 양류가(楊柳街) 집은 폭격에 견딜 수가 없어서 석판가(石版街)로 옮겼다가 이 집이 폭격으로 일어난 불에 전소하여 의복까지 다 태우고 오사야항(吳獅爺巷)으로 갔다가 이 집이 또 폭격을 당하여 무너진 것을 고쳤으나 정청으로 쓸 수는 없어서 직원의 주택으로 하고 네 번째로 연화지(蓮花池)에 70여 칸 집을 얻었는데 집세가 1년에 40만 원이라, 그러나 이 돈은 장 주석의 보조를 받게 되어 임시 정부가 중경을 떠날 때까지 이 집을 쓰고 있었다.


이 모양으로 연이어 오는 폭격에 중경에는 인명과 가옥의 손해가 막대하였으나 동포 중에 죽은 이는 신익희 씨 조카와 김영린의 아내 두 사람이 있었다. 이 두 동포가 죽던 폭격이 가장 심한 폭격이어서 한 방공호에서 4백 명이니 8백 명이니 하는 질식자를 낸 것도 이때였다.


그 시체를 운반하는 광경을 내가 목도하였는데 화물 자동차에 짐을 싣듯 시체를 싣고 달리면 시체가 흔들려 굴러 떨어지는 일이 있고, 그것을 다시 싣기가 귀찮아서 모가지를 매어 자동차 뒤에 달면 그 시체가 땅바닥으로 엎치락뒤치락 끌려가는 것이었다. 시체는 남녀를 물론하고 옷이 다 찢겨서 살이 나왔는데 이것은 서로 앞을 다투어 발악한 형적이었다.


가족을 이 모양으로 잃어 한편에 통곡하는 사람이 있으면 다른 편에는 방공호에서 시체를 끌어내는 인부들이 시체가 지녔던 금, 은, 보화를 뒤져서 대번에 부자가 된 것도 있었다. 이렇게 질식의 참사가 일어난 것이 밀매음녀 많기로 유명한 교장구(較場口)이기 때문에 죽은 자의 대다수가 밀매음녀였다.


중경은 옛날 이름으로는 파(巴)다. 지금은 성도(成都)라고 부르는 촉(蜀)과 아울러 파촉이라고 하던 데다. 시가의 왼편으로 가릉강(嘉陵江)이 흘러와서 바른 편으로 오는 양자강과 합하는 곳으로 천 톤급의 기선이 정박하는 중요한 항구다. 지명을 파라고 하는 것은 옛날 파 장군(巴將軍)이란 사람이 도읍하였던 때문이어서 연화지에는 파 장군의 분묘가 있다.


9. 드디어 고국으로 돌아오다


중경의 기후는 심히 건강에 좋지 못하여 호흡기병이 많다. 7년간에 우리 동포도 폐병으로 죽은 자가 80명이나 된다. 9월 초생부터 이듬해 4월까지는 운무가 껴서 볕을 보기가 드물고 기압이 낮은 우묵한 땅이라, 지변의 악취가 흩어지기를 아니하여 공기가 심히 불결하다. 내 맏아들 인도 이 기후의 희생이 되어서 중경에 묻혔다.


11월 5일에 우리 임시 정부 국무 위원과 기타 직원은 비행기 두 대에 갈라 타고 중경을 떠나서 다섯 시간만에, 떠난 지 13년만에 상해의 땅을 밟았다. 우리 비행기가 착륙한 비행장이 곧 홍구 신공원(虹口新公園)이라 하는데 우리를 환영하는 남녀 동포가 장내에 넘쳤다. 나는 14년을 상해에 살았건마는 홍구 공원에 발을 들여놓은 일이 일찍 없었었다.


신공원에서 나와서 시내로 들어가려 한즉 아침 여섯 시부터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6천 명 동포가 열을 지어서 고대하고 있다. 나는 거기 있는, 길이 넘는 단 위에 올라가서 동포들에게 인사말을 하였다. 나중에 알고 본즉, 그 단이야말로 13년 전 윤봉길 의사가 왜적 백천 대장 등을 폭격한 자리에 왜적들이 그 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단을 모으고 군대를 지휘하던 곳이라고 한다. 세상에 우연한 것은 없다고 생각하였다.


나는 양자반점(楊子飯店)에 묵었다. 13년은 인생의 일생에는 긴 세월이었다. 내가 상해를 떠날 적에 아직 어리던 이들은 벌써 장정이 되었고, 장정이던 사람들은 노쇠하였다. 이 오랜 동안에 까딱도 하지 아니하고 깨끗이 고절을 지킨 옛 동지 선우혁(鮮于爀), 장덕로(張德櫓), 서병호(徐丙浩), 한진교(韓鎭敎), 조봉길(曺奉吉), 이용환(李龍煥), 하상린(河相麟), 한백원(韓栢源), 원우관(元宇觀) 제씨와 서병호 댁에서 만찬을 같이 하고 기념으로 촬영하였다.


한편으로는 상해에 재류하는 동포들 중에서 부정한 직업을 하는 이가 적지 않다는 말은 나를 슬프게 하였다. 나는 우리 동포가 가는 곳마다 정당한 직업에 정직하게 종사하여서 우리 민족의 신용과 위신을 높이는 애국심을 가지기를 바란다.


나는 법조계 공동묘지에 아내의 무덤을 찾고 상해에서 10여 일을 묵어서 미국 비행기로 본국을 향하여서 상해를 떠났다. 이동녕 선생, 현익철 동지 같은 이들이 이역에 묻혀서 함께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이 유감이었다.


나는 기쁨과 슬픔이 한데 엉클어진 가슴으로 27년 만에 조국의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그리운 흙을 밟으니 김포 비행장이요, 상해를 떠난 지 세 시간 후였다.


나는 조국의 땅에 들어오는 길로 한 가지 기쁨과 한 가지 슬픔을 느꼈다. 책보를 메고 가는 학생들의 모양이 심히 활발하고 명랑한 것이 한 기쁨이요, 그와는 반대로 동포들이 사는 집들이 납작하게 땅에 붙어서 퍽 가난해 보이는 것이 한 슬픔이었다.


동포들이 여러 날을 우리를 환영하려고 모였더라는데, 비행기 도착 시일이 분명히 알려지지 못하여 이날에는 우리를 맞아주는 동포가 많지 못하였다. 늙은 몸을 자동차에 의지하고 서울에 들어오니 의구한 산천이 반갑게 나를 맞아 주었다.


내 숙소는 새문 밖 최창학(崔昌學) 씨의 집이요, 국무원 일행은 한미 호텔에 머물도록 우리를 환영하는 유지들이 미리 준비하여 주었었다.


나는 곧 신문을 통하여 윤봉길, 이봉창 두 의사와 강화 김주경 선생의 유가족을 만나고 싶다는 뜻을 말하였더니 윤 의사의 아드님이 덕산(德山)으로부터 찾아오고, 이 의사의 조카따님이 서울에서 찾아오고, 김주경 선생의 아드님 윤태(允泰) 군은 38 이북에 있어서 못 보고 그 따님과 친척들이 혹은 강화에서, 혹은 김포에서 와서 만나서 반갑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였다.


그러나 선조의 분묘가 계시고 친척과 고구가 사는 그리운 내 고향은 소위 38선의 장벽 때문에 가보지 못하고 재종형제들과 종매들의 가족이 곧 상경하여서 반갑게 만날 수가 있었다.


군정청에 소속한 각 기관과 정당, 사회단체, 교육계, 공장 등 각계가 빠짐없이 연합 환영회를 조직하여서 우리는 개인의 자격으로 들어왔건마는 '임시 정부 환영(臨時政府歡迎)'이라고 크게 쓴 깃발을 태극기와 아울러 높이 들고 수십 만 동포가 서울 시가로 큰 시위행진을 하고 그 끝에 덕수궁에 식탁이 4백여, 기생이 4백여로, 환영연을 배설하고 하지 중장 이하 미국 군정 간부들도 출석하여 덕수궁 뜰이 좁을 지경이었으니 참으로 찬란하고 성대한 환영회였다.


나는 이러한 환영을 받을 공로가 없음이 부끄럽고 미안하였으나, 동포들이 해외에서 오래 신고한 우리를 위로하는 것이라고 강잉하여 고맙게 받았다.


어느덧 해가 바뀌었다. 나는 38 이남만이라도 돌아보리라 하고 제1노정으로 인천에 갔다. 인천은 내 일생에 뜻깊은 곳이다. 스물두 살에 인천 감옥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스물세 살에 탈옥 도주하였고, 마흔 한 살 적에 17년 징역수로 다시 이 감옥에 이수되었었다. 저 축항에는 내 피땀이 배어 있는 것이다. 옥중에 있는 이 불효를 위하여 부모님이 걸으셨을 길에는 그 눈물 흔적이 남아 있는 듯하여 마흔 아홉 해 전 기억이 어제런 듯 새롭다. 인천서도 시민의 큰 환영을 받았다.


제2노정으로 나는 공주 마곡사를 찾았다. 공주에 도착하니 충청남북도 11군에서 10여만 동포가 모여서 나를 환영하는 회를 열어주었다.


공주를 떠나 마곡사로 가는 길에 김복한(金福漢), 최익현(崔益鉉) 두 선생의 영정 모신 데로 찾아서 배례하고 그 유가족을 위로하고 동민의 환영하는 정성을 고맙게 받았다. 정당, 사회 단체의 대표로 마곡사까지 나를 따르는 이가 3백 50여 명이었고, 마곡사 승려의 대표는 공주까지 마중을 왔으며, 마곡사 동구에는 남녀 승려가 도열하여 지성으로 나를 환영하니 옛날에 이 절에 있던 한 중이 일국의 주석이 되어서 온다고 생각함이었다.


48년 전에 머리에 굴갓을 쓰고 목에 염주를 걸고 출입하던 길이다. 산천도 예와 같거니와 대웅전에 걸린 주련도 옛날 그대로다.


'却來觀世間

猶如夢中事'


그 때에는 무심히 보았던 이 글귀를 오늘에 자세히 보니 나를 두고 이른 말인 것 같았다.


10. 추억이 어린 곳들을 찾아


용담(龍潭) 스님께 보각서장(普覺書狀)을 배우던 염화실(捻花室)에서 뜻깊은 하룻밤을 지내었다. 승려들은 나를 위하여 이날 밤에 불공을 드렸다. 그러나 승려들 중에는 내가 알던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이튿날 아침에 나는 기념으로 무궁화 한 포기와 향나무 한 그루를 심고 마곡사를 떠났다.


셋째 길에 나는 윤봉길 의사의 본댁을 찾으니 4월 29일이라, 기념제를 거행하였다. 그리고 나는 일본 동경에 있는 박 열(朴烈) 동지에게 부탁하여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白貞基) 세 분 열사의 유골을 본국으로 모셔오게 하고, 유골이 부산에 도착하는 날 나는 특별 열차로 부산까지 갔다. 부산은 말할 것도 없고 세 분의 유골을 모신 열차가 정거하는 역마다 사회, 교육의 각 단체며 일반 인사들이 모여 봉도식을 거행하였다.


서울에 도착하자 유골을 담은 영구를 태고사(太古寺)에 봉안하여 동포들의 참배에 편케 하였다가 내가 친히 잡아 놓은 효창 공원(孝昌公園) 안에 있는 자리에 매장하기로 하였다. 제일 위에 안중근 의사의 유골을 봉안할 자리를 남기고 그 다음에 세 분의 유골을 차례로 모시기로 하였다.


이날 미국인 군정 간부도 전부 회장하였으며, 미국 군대까지 출동할 예정이었으나 그것은 중지되고 조선인 경찰관, 육해군 경비대, 정당, 단체, 교육 기관, 공장의 종업원들이 총출동하고 일반 동포들도 구름같이 모여서 태고사로부터 효창 공원까지 인산인해를 이루어 일시 전차, 자동차, 행인까지도 교통을 차단하였다.


선두에는 애곡하는 비곡을 아뢰는 음악대가 서고 다음에는 화환대, 만장대가 따르고 세 분 의사의 영여(靈輿)는 여학생대가 모시니 옛날 인산(因山)보다 더 성대한 장의였다.


나는 삼남 지방을 순회하는 길에 보성군 득량면 득양리 김씨촌을 찾았다. 내가 48년 전에 망명중에 석 달이나 몸을 붙여 있던 곳이요, 김씨네는 나와 동족이었다. 내가 온다는 소문을 듣고 동구에는 솔문을 세우고 길닦이까지 하였다. 남녀 동민들이 동구까지 나와서 도열하여 나를 맞았다.


내가 그 때에 유숙하던 김광언(金廣彦) 댁을 찾으니 집은 예와 같으되 주인은 벌써 세상을 떠났었다. 그 유족의 환영을 받아 내가 그 때에 상을 받던 자리에서 한 때 음식 대접을 한다 하여서 마루에 병풍을 치고 정결한 자리를 깔고 나를 앉혔다. 모인 이들 중에 나를 알아보는 이는 늙은 부인네 한 분과 김판남(金判男) 종씨 한 분뿐이었다.


김씨는 그 때에 내 손으로 쓴 책 한 권을 가져다가 내게 보여주었다. 내가 이곳에 머물고 있을 때에 자별히 친하게 지내던 나와 동갑인 선(宣) 씨는 이미 작고하고 내가 필낭을 기워서 작별 선물로 주던 그의 부인은 보성읍에서 그 자손들을 데리고 나와서 나를 환영하여 주었다. 부인도 나와 동갑이라 하였다.


광주에서 나주로 향하는 도중에서 함평 동포들이 길을 막고 들르라 하므로 나는 함평읍으로 가서 학교 운동장에 열린 환영회에 한 차례 강연을 하고 나주로 갔다. 나주에서 육모정(六角亭) 이 진사의 집을 물은즉, 이 진사 집은 나주가 아니요, 지금 지나온 함평이며, 함평 환영회에서 나를 위하여 만세를 선창한 것이 바로 이 진사의 증손이라고 하였다.


오랜 세월에 나는 함평과 나주를 섞바꾼 것이었다. 그 후에 이 진사 - 나와 작별한 후에는 이 승지가 되었다 한다 - 의 증손 재승(在昇), 재혁(在赫) 두 형제가 예물을 가지고 서울로 나를 찾아왔기로 함평을 나주로 잘못 기억하고 찾지 못하였던 사과를 하였다.


이 길에 김해에 들르니 마침 수로왕릉의 추향이라, 김씨네와 허씨네가 많이 참배하는 중에 나도 그들이 준비하여 주는 평생에 처음으로 사모와 각대로 참배하였다.


전주에서는 옛벗 김형진의 아들 맹문(孟文)과 그 종제 맹열(孟悅)과 그 내종형 최경렬(崔景烈) 세 사람을 만난 것이 기뻤다. 전주의 일반 환영회가 끝난 뒤에 이 세 사람의 가족과 한 데 모여서 고인을 추억하며 기념으로 사진을 찍었다.


강경에서 공종렬의 소식을 물으니 그는 젊어서 자살하고 자손도 없으며 내가 그 집에 자던 날 밤의 비극은 친족간에 생긴 일이었다고 한다.


그 후 강화에 김주경 선생의 집을 찾아 그의 친족들과 사진을 같이 박고 내가 그 때에 가르치던 30명 학동 중에 하나였다는 사람을 만났다.


나는 개성, 연안 등을 순회하는 노차에 이 효자의 무덤을 찾았다.


'故孝子李昌梅之墓'


나는 해주 감옥에서 인천 감옥을 끌려가던 길에 이 묘비 앞에 쉬던 49년 전 옛날을 생각하면서 묘전에 절하고 그날 어머님이 앉으셨던 자리를 눈어림으로 찾아서 그 위에 내 몸을 던졌다. 그러나 어머님의 얼굴을 뵈올 길이 없으니 앞이 캄캄하였다. 중경서 운명하실 때에 마지막 말씀으로 '내 원통한 생각을 어찌하면 좋으냐' 하시던 것을 추억하였다.


독립의 목적을 달성하고 모자가 함께 고국에 돌아가 함께 지난 일을 이야기하지 못하심이 그 원통하심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저 멀고 먼 서쪽 화상산 한 모퉁이에 손자와 같이 누워계신 것을 생각하니 비회를 금할 수가 없다. 혼이라도 고국에 돌아오셔서 내가 동포들에게 받는 환영을 보시기나 하여도 다소 어머님의 마음이 위안이 아니 될까.


배천에서 최광옥 선생과 전봉훈 군수의 옛일을 추억하고 장단 고랑포(皐浪浦)에 나의 선조 경순왕릉(敬順王陵)에 참배할 적에는 능말에 사는 경주 김씨들이 내가 오는 줄 알고 제전을 준비하였었다.


나는 대한 나라 자주 독립의 날을 기다려서 다시 이 글을 계속하기로 하고 아직은 붓을 놓는다.

서울 새문 밖에서 <기적장강만리풍(寄跡長江萬里風) 끝>

 

[나의 소원]


민족 국가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 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셋째 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 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동포 여러분! 나 김 구의 소원은 이것 하나밖에는 없다. 내 과거의 70 평생을 이 소원을 위하여 살아왔고, 현재에도 이 소원 때문에 살고 있고, 미래에도 나는 이 소원을 달하려고 살 것이다.


독립이 없는 백성으로 70 평생에 설움과 부끄러움과 애탐을 받은 나에게는 세상에 가장 좋은 것이 완전하게 자주 독립한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보다가 죽는 일이다. 나는 일찍 우리 독립 정부의 문지기가 되기를 원하였거니와 그것은 우리나라가 독립국만 되면 나는 그 나라의 가장 미천한 자가 되어도 좋다는 뜻이다.


왜 그런고 하면 독립한 제 나라의 빈천이 남의 밑에 사는 부귀보다 기쁘고 영광스럽고 희망이 많기 때문이다. 옛날 일본에 갔던 박제상(朴堤上)이,

"내 차라리 계림의 개 되지가 될지언정 왜(倭) 왕의 신하로 부귀를 누리지 않겠다'

한 것이 그의 진정이었던 것을 나는 안다. 제상은 왜 왕이 높은 벼슬과 많은 재물을 준다는 것을 물리치고 달게 죽임을 받았으니 그것은, '차라리 내 나라의 귀신이 되리라' 함에서였다.


근래에 우리 동포 중에는 우리나라를 어느 큰 이웃 나라의 연방에 편입하기를 소원하는 자가 있다 하니 나는 그 말을 차마 믿으려 아니 하거니와 만일 진실로 그러한 자가 있다 하면 그는 정신을 잃은 미친놈이라고밖에 볼 길이 없다.


나는 공자, 석가, 예수의 도를 배웠고 그들을 성인으로 숭배하거니와 그들이 합하여서 세운 천당, 극락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가 아닐진대, 우리 민족을 그 나라로 끌고 들어가지 아니할 것이다.


왜 그런고 하면 피와 역사를 못 같이하는 민족이란 완연히 있는 것잉서 내 몸이 남의 몸이 됨과 같이 이 민족이 저 민족이 될 수는 없는 것이 마치 형제도 한 집에서 살기 어려움과 같은 것이다.


둘 이상이 합하여서 하나가 되자면 하나는 높고 하나는 낮아서 하나는 위에 있어서 명령하고 하나는 밑에 있어서 복종하는 것이 근본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일부 소위 좌익의 무리는 혈통의 조국을 부인하고 소위 사상의 조국을 운운하며 혈족의 동포를 무시하고 소위 사상의 동무와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적 계급을 주장하여 민족주의라면 마치 이미 진리권(眞理圈) 외에 떨어진 생각인 것같이 말하고 있다. 심히 어리석은 생각이다. 철학도 변하고 정치, 경제 학설도 일시적이어니와, 민족의 혈통은 영구적이다.


일찍 어느 민족 내에서나 혹은 종교로, 혹은 학설로, 혹은 경제적, 정치적 이해의 충돌로 하여 두 파, 세 파로 갈려서 피로써 싸운 일이 없는 민족이 없거니와 지내어 놓고 보면 그것은 바람과 같이 지나가는 일시적의 것이요, 민족은 필경 바람 잔 뒤의 초목 모양으로 뿌리와 가지를 서로 걸고 한 수풀을 이루어 살고 있다. 오늘날 소위 좌우익이란 것도 결국 영원한 혈통의 바다에 일어나는 일시적인 풍파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이 모양으로 모든 사상도 가고 신앙도 변한다. 그러나 혈통적인 민족만은 영원히 성쇠흥망의 공동 운명의 인연에 얽힌 한 몸으로 이 땅 위에 나는 것이다.


세계 인류가 네요, 내요 없이 한 집이 되어 사는 것은 좋은 일이요, 인류의 최고요 최후의 희망이요, 이상이다. 그러나 이것은 멀고 먼 장래에 바랄 것이요, 현실의 일은 아니다.


사해동포(四海同胞)의 크고 아름다운 목표를 항하여 인류가 향상하고 전진하는 노력을 하는 것은 좋은 일이요, 마땅히 할 일이나, 이것도 현실을 떠나서는 안 되는 일이니 현실의 진리는 민족마다 최선의 국가를 이루어 최선의 문화를 낳아 길러서 다른 민족과 서로 바꾸고 서로 돕는 일이다. 이것은 내가 믿고 있는 민족주의요, 이것이 인류의 현 단계에서는 가장 확실한 진리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으로서 하여야 할 최고의 임무는 첫째로 남의 절제도 아니 받고 남에게 의뢰도 아니 하는 완전한 자주 독립의 나라를 세우는 일이다. 이것이 없이는 우리 민족의 생활을 보장할 수 없을뿐더러 우리 민족의 정신력을 자유로 발휘하여 빛나는 문화를 세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완전 자주 독립의 나라를 세운 뒤에는 둘째로 이 지구상의 인류가 진정한 평화의 복락(福樂)을 누릴 수 있는 사상을 낳아 그것을 먼저 우리나라에 실현하는 것이다.


나는 오늘날의 인류의 문화가 불완전함을 안다. 나라마다 안으로는 정치상, 경제상, 사회상으로 불평등, 불합리가 있고 밖으로 국제적으로는 나라와 나라의, 민족과 민족의 시기, 알력, 침략, 그리고 그 침략에 대한 보복으로 작고 큰 전쟁이 그칠 사이가 없어서 많은 생명과 재물을 희생하고도 좋은 일이 오는 것이 아니라 인심의 불안과 도덕의 타락은 갈수록 더하니 이래 가지고는 전쟁이 그칠 날이 없어 인류는 마침내 멸망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 세계에는 새로운 생활 원리의 발견과 실천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야말로 우리 민족이 담당한 천직이라고 믿는다.


이러하므로 우리 민족의 독립이란 결코 삼천리 삼천만의 일이 아니라 진실로 세계 전체의 운명에 관한 일이요,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 곧 인류를 위하여 일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의 오늘날 형편이 초라한 것을 보고 자굴지심을 발하여 우리가 세우는 나라가 그처럼 위대한 일을 할 것을 의심한다 하면 그것은 스스로를 모욕하는 일이다. 우리 민족의 지나간 역사가 빛나지 아니함이 아니나 그것은 아직 서곡이었다. 우리가 주연 배우로 세계 역사의 무대에 나서는 것은 오늘 이후다. 삼천만의 우리 민족이 옛날의 그리스 민족이나 로마 민족이 한 일을 못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내가 원하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는 일을 하자는 것이다. 어느 민족도 일찍 그러한 일을 한 이가 없었으니 그것은 공상이라고 하지 말라. 일찍 아무도 한 자가 없길래 우리가 하자는 것이다. 이 큰 일은 하늘이 우리를 위하여 남겨 놓으신 것임을 깨달을 때에 우리 민족은 비로소 제 길을 찾고 제 일을 알아본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의 청년 남녀가 모두 과거의 조그맣고 좁다란 생각을 버리고 우리 민족의 큰 사명에 눈을 떠서 제 마음을 닦고 제 힘을 기르기로 낙을 삼기를 바란다. 젊은 삶들이 모두 이 정신을 가지고 이 방향으로 힘을 쓸진대 30년이 못하여 우리 민족은 괄목상대(刮目相對)하게 될 것을 확신하는 바이다.


1. 철학적 독재가 가장 무서운 것


나의 정치 이념은 한 마디로 표시하면 자유(自由)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는 자유의 나라라야 한다.


자유란 무엇인가, 절대로 각 개인이 제 멋대로 사는 것을 자유라 하면 이것은 나라가 생기기 전이나 저 레닌의 말 모양으로 나라가 소멸된 뒤에나 있을 일이다. 국가 생활(國家生活)을 하는 인류에게는 이러한 무조건의 자유는 없다. 왜 그런고 하면 국가란 일종의 규범의 속박이기 때문이다. 국가 생활을 하는 우리를 속박하는 것은 법이다. 개인의 생활이 국법에 속박되는 것은 자유 있는 나라나 자유 없는 나라나 마찬가지다.


자유와 자유 아님이 갈리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속박하는 법이 어디서 오느냐 하는 데 달렸다. 자유 있는 나라의 법은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서 오고 자유 없는 나라의 법은 국민 중의 어떤 일개인 또는 일계급에서 온다. 일개인에서 오는 것을 전제 또는 독재라 하고 일계급에서 오는 것을 계급 독재(階級獨裁)라 하고 통칭 파쇼라고 한다.


나는 우리나라가 독재의 나라가 되기를 원치 아니한다. 독재의 나라에서는 정권에 참여하는 계급 하나를 제외하고는 다른 국민은 노예가 되고 마는 것이다.


독재 중에서 가장 무서운 독재는 어떤 주의(主義), 즉 철학을 기초로 하는 계급 독재다. 군주나 기타 개인 독재자의 독재는 그 개인만 제거되면 그만이어니와, 다수의 개인으로 조직된 한 계급이 독재의 주체일 때에는 이것을 제거하기는 심히 어려운 것이니 이러한 독재는 그보다도 큰 조직의 힘이거나 국제적 압력이 아니고는 깨뜨리기 어려운 것이다.


우리나라의 양반 정치도 일종의 계급 독재이거니와 이것은 수백 년 계속하였다.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독일의 나치스의 일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다.


그러나 모든 계급 독재 중에도 가장 무서운 것은 철학을 기초로 한 계급 독재이다.


수백 년 동안 이조 조선에 행하여 온 계급 독재는 유교, 그 중에도 주자학파의 철학을 기초로 한 것이어서 다만 정치에 있어서만 독재가 아니라 사상, 학문, 사회생활, 가정생활, 개인 생활까지도 규정하는 독재였었다. 이 독재 정치 밑에서 우리 민족의 문화는 소멸되고 원기는 마멸된 것이다. 주자학(朱子學) 이외의 학문은 발달하지 못하니 이 영향은 예술, 경제, 산업에까지 미쳤다.


우리나라가 망하고 민력이 쇠잔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이 실로 여기 있었다. 왜 그런고 하면 국민의 머리속에 아무리 좋은 사상과 경륜이 생기더라도 그가 집권 계급의 사람이 아닌 이상, 또 그것이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는 범주 밖에 나지 않는 이상 세상에 발표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싹이 트려다가 눌려 죽은 새 사상, 싹도 트지 못하고 밟혀 버린 경륜이 얼마나 많았을까. 언론의 자유가 어떻게나 중요한 것임을 통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오직 언론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만 진보가 있는 것이다.


시방 공산당이 주장하는 소련식 민주주의란 것은 이러한 독재 정치 중에도 가장 철저한 것이어서 독재 정치의 모든 특징을 극단으로 발휘하고 있다.


즉, 헤겔에게서 받은 변증법(辨證法), 포이에르바하의 유물론(唯物論)의 두 가지와, 애담 스미스의 노동 가치론을 가미한 마르크스의 학설을 최후의 것으로 믿어 공산당과 소련의 법률과 군대와 경찰의 힘을 한 데 모아서 마르크스의 학설에 일 점 일획이라도 반대는 고사하고 비판만 하는 것도 엄금하여 이에 위반하는 자는 죽음의 숙청으로써 대하니 이는 옛날의 조선의 사문난적에 대한 것 이상이다.


만일 이러한 정치가 세계에 퍼진다면 전 인류의 사상은 마르크스주의 하나로 통일될 법도 하거니와 설사 그렇게 통일이 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불행히 잘못된 이론일진대 그런 큰 인류의 불행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마르크스의 학설의 기초인 헤겔의 변증법의 이론이란 것이 이미 여러 학자의 비판으로 말미암아 전면적 진리가 아닌 것이 알려지지 아니하였는가. 자연계의 변천이 변증법에 의하지 아니함은 뉴튼, 아인슈타인 등 모든 과학자들의 학설을 보아서 분명하다.


그러므로 어느 한 학설을 표준으로 하여서 국민의 사상을 속박하는 것은 어느 한 종교를 국교(國敎)로 정하여서 국민의 신앙을 강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옳지 아니한 일이다. 산에 한 가지 나무만 나지 아니하고 들에 한 가지 꽃만 피지 아니한다. 여러 가지 나무가 어울려서 위대한 삼림의 아름다움을 이루고 백 가지 꽃이 섞여 피어서 봄 뜰의 풍성한 경치를 이루는 것이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에는 유교도 성하고 불교도, 예수교도 자유로 발달하고 또 철학으로 보더라도 인류의 위대한 사상이 다 들어와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할 것이니 이러하고야만 비로소 자유의 나라라 할 것이요, 이러한 자유의 나라에서만 인류의 가장 크고 가장 높은 문화가 발생할 것이다.


2. 우리의 독특함을 살려서


나는 노자(老子)의 무위(無爲)를 그대로 믿는 자는 아니어니와 정치에 있어서 너무 인공을 가하는 것을 옳지 않게 생각하는 자이다. 대개 사람이란 전지전능할 수가 없고 학설이란 완전무결할 수 없는 것이므로 한 사람의 생각, 한 학설이 원리로 국민을 통제하는 것은 일시 속한 진보를 보이는 듯하더라도 필경은 병통이 생겨서 그야말로 변증법적인 폭력의 혁명을 부르게 되는 것이다.


모든 생물에는 다 환경에 순응하여 저를 보존하는 본능이 있으므로 가장 좋은 길은 가만히 두는 길이다. 작은 꾀로 자주 건드리면 이익보다도 해가 많다. 개인 생활에 너무 잘게 간섭하는 것은 결코 좋은 정치가 아니다. 국민은 군대의 병정도 아니요, 감옥의 죄수도 아니다. 한 사람 또는 몇 사람의 호령으로 끌고 가는 것이 극히 부자연하고 또 위태한 일인 것은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나치스 독일이 불행하게도 가장 잘 증명하고 있지 아니한가.


미국은 이러한 독재국에 비겨서는 심히 통일이 무력한 것 같고 일의 진행이 느린 듯하여도 그 결과로 보건대 가장 큰 힘을 발하고 있으니 이것은 그 나라의 민주주의 정치의 효과이다.


무슨 일을 의논할 때에 처음에는 백성들이 저마다 제 의견을 발표하여서 헌헌효효하여 귀일할 바를 모르는 것 같지마는 갑론을박으로 서로 토론하는 동안에 의견이 차차 정리되어서 마침내 두어 큰 진영으로 포섭되었다가 다시 다수결의 방법으로 한 결론에 달하여 국회의 결의가 되고 원수의 결재를 얻어 법률이 이루어지면 이에 국민의 의사가 결정되어 요지부동하게 되는 것이다.


이 모양으로 민주주의란 국민의 의사를 알아보는 한 절차, 또는 방식이요, 그 내용은 아니다. 즉 언론의 자유, 투표의 자유, 다수결에 복종, 이 세 가지가 곧 민주주의다. 국론(國論), 즉 국민의 의사의 내용은 그때그때의 국민의 언론전으로 결정되는 것이어서 어느 개인이나 당파의 특정한 철학적 이론에 좌우되는 것이 아님이 미국식 민주주의의 특색이다. 다시 말하면 언론, 투표, 다수결 복종이란는 절차만 밟으면 어떠한 철학에 기초한 법률도 정책도 만들 수 있으니 이것을 제한하는 것은 오직 그 헌법의 조문(條文)뿐이다.


그런데 헌법도 결코 독재국의 그것과 같이 신성불가침의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절차로 개정할 수가 있는 것이니 이러므로 민주, 즉 백성이 나라의 주권자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나라에서 국론을 움직이려면 그 중에서 어떤 개인이나 당파를 움직여서 되지 아니하고 그 나라 국민의 의견을 움직여서 된다. 백성들의 작은 의견은 이해관계로 결정되거니와 큰 의견은 그 국민성과 신앙과 철학으로 결정된다. 여기서 문화와 교육의 중요성이 생긴다.


국민성을 보존하는 것이나 수정하고 향상하는 것이 문화와 교육의 힘이요, 산업의 방향도 문화와 교육으로 결정됨이 큰 까닭이다. 교육이란 결코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교육의 기초가 되는 것은 우주와 인생과 정치에 대한 철학이다.


어떠한 철학의 기초 위에 어떠한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곧 국민 교육이다. 그러므로 좋은 민주주의의 정치는 좋은 교육에서 시작될 것이다. 건전한 철학의 기초 위에 서지 아니한 지식과 기술의 교육은 그 개인과 그를 포함한 국가에 해가 된다. 인류 전체로 보아도 그러하다.


이상에 말한 것으로 내 정치 이념이 대강 짐작될 것이다. 나는 어떠한 의미로든지 독재 정치를 배격한다. 나는 우리 동포를 향하여서 부르짖는다. 결코 결코 독재 정치가 아니 되도록 조심하라고. 우리 동포 각 개인이 십분의 언론 자유를 누려서 국민 전체의 의견대로 되는 정치를 하는 나라를 건설하자고.


일부 당파나 어떤 한 계급의 철학으로 다른 다수를 강제함이 없고, 또 현재의 우리들의 이론으로 우리 자손의 사상과 신앙의 자유를 속박함이 없는 나라, 천지와 같이 넓고 자유로운 나라, 그러면서도 사랑의 덕과 법의 질서가 우주 자연의 법칙과 같이 준수되는 나라가 되도록 우리나라를 건설하자고.


그렇다고 나는 미국의 민주주의 제도를 그대로 직역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소련의 독재적인 민주주의에 대하여 미국의 언론 자유적인 민주주의를 비교하여서 그 가치를 판단하였을 뿐이다. 둘 중에서 하나를 택한다면 사상과 언론의 자유를 기초로 한 자를 취한다는 말이다.


나는 미국의 민주주의 정치 제도가 반드시 최후적인 완성된 것이라고는 생각지 아니한다. 인생의 어느 부분이나 다 그러함과 같이 정치 형태에 있어서도 무한한 창조적 진화가 있을 것이다. 더구나 우리나라와 같이 반만 년 이래로 여러 가지 국가 형태를 경험한 나라에는 결점도 많으려니와 교묘하게 발달된 정치 제도도 없지 아니할 것이다.


가까이 이조 시대로 보더라도 홍문관(弘文館), 사간원(司諫院), 사헌부(司憲府) 같은 것은 국민 중에 현인(賢人)의 의사를 국정에 반영하는 제도로 멋있는 제도요, 과거 제도와 암행어사 같은 것도 연구할 만한 제도다. 역대의 정치 제도를 상고(詳考)하면 반드시 쓸 만한 것도 많으리라고 믿는다.


이렇게 남의 나라의 좋은 것을 취하고 내 나라의 좋은 것을 골라서 우리나라 독특한 제도를 만드는 것도 세계의 문운(文運)에 보태는 일이다.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요, 경제력도 아니다. 자연 과학의 힘은 아무리 많아도 좋으나 인류 전체로 보면 현재의 자연 과학만 가지고도 편안히 살아가기에 넉넉하다.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仁義)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이 마음만 발달이 되면 현재의 물질력으로 20억이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서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는 우리 국조(國祖) 단군의 이상이 이것이라고 믿는다.


또 우리 민족의 재주와 정신과 과거의 단련이 이 사명을 달성하기에 넉넉하고 우리 국토의 위치와 기타의 지리적 조건이 그러하며, 또 1차, 2차의 세계 대전을 치른 인류의 요구가 그러하며 이러한 시대에 새로 나라를 고쳐 세우는 우리의 탄 시기가 그러하다고 믿는다. 우리 민족이 주연 배우로 세계의 무대에 등장할 날이 눈앞에 보이지 아니하는가.


이 일을 하기 위하여 우리가 할 일은 사상의 자유를 확보하는 정치 양식의 건립과 국민 교육의 완비다. 내가 위에서 자유의 나라를 강조하고 교육의 중요성을 말한 것은 이 때문이다.


최고 문화 건설의 사명을 달할 민족은 일언이폐지하면 모두 성인을 만드는 데 있다. 대한 사람이라면 간 데마다 신용을 받고 대접을 받아야 한다. 우리의 적이 우리를 누르고 있을 때에는 미워하고 분해하는 살벌, 투쟁의 정신을 길렀었거니와 적은 이미 물러갔으니 우리는 증오의 투쟁을 버리고 화합의 건설을 일삼을 때다.


집안이 불화하면 망하고 나라 안이 갈려서 싸우면 망한다. 동포간의 증오와 투쟁은 망조(亡兆)다. 우리의 용모에서는 화기가 빛나야 한다. 우리 국토 안에는 언제나 춘풍이 태탕하여야 한다. 이것은 우리 국민 각자가 한 번 마음을 고쳐먹음으로써 되고 그러한 정신의 교육으로 영속될 것이다.


최고 문화로 인류의 모범이 되기로 사명을 삼는 우리 민족의 각원은 이기적 개인주의자여서는 안 된다. 우리는 개인의 자유를 극도로 주장하되 그것은 저 짐승들과 같이 저마다 제 배를 채우기에 쓰는 자유가 아니요, 제 가족을, 제 이웃을, 제 국민을 잘 살게 하기에 쓰이는 자유다. 공원의 꽃을 꺾는 자유가 아니라 공원에 꽃을 심는 자유다.


우리는 남의 것을 빼앗거나 남의 덕을 입으려는 사람이 아니라 가족에게, 이웃에게, 동포에게 주는 것으로 낙을 삼는 사람이다. 우리말의 이른바 선비요, 점잖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게으르지 아니하고 부지런하다. 사랑하는 처자를 가진 가장은 부지런할 수밖에 없다. 한없이 주기 위함이다. 힘드는 일은 내가 앞서 하니 사랑하는 동포를 아낌이요, 즐거운 것은 남에게 권하니 사랑하는 자를 위하기 때문이다. 우리 조상네가 좋아하던 인후지덕(仁厚之德)이란 것이다.


이러함으로써 우리나라의 산에는 삼림이 무성하고 들에는 오곡백과가 풍성하며 촌락과 도시는 깨끗하고 풍성하고 화평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동포, 즉 대한 사람은 남자나 여자나 얼굴에는 항상 화기가 있고 몸에서는 덕의 향기를 발할 것이다. 이러한 나라는 불행하려 하여도 불행할 수 없고 망하려 하여도 망할 수 없는 것이다.


민족의 행복은 결코 계급투쟁에서 오는 것도 아니요, 개인의 행복이 이기심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계급투쟁은 끝없는 계급투쟁을 낳아서 국토에 피가 마를 날이 없고 내가 이기심으로 남을 해하면 천하가 이기심으로 나를 해할 것이니, 이것은 조금 얻고 많이 빼앗기는 법이다. 일본의 이번 당한 보복은 국제적, 민족적으로도 그러함을 증명하는 가장 좋은 실례다.


이상에서 말한 것은 내가 바라는 새 나라의 용모의 일단을 그린 것이어니와 동포 여러분! 이러한 나라가 될진대 얼마나 좋겠는가. 우리네 자손을 이러한 나라에 남기고 가면 얼마나 만족하겠는가. 옛날 한토의 기자(箕子)가 우리나라를 사모하여 왔고, 공자께서도 우리 민족이 사는 데 오고 싶다고 하셨으며 우리 민족을 인(仁)을 좋아하는 민족이라 하셨으니, 옛날에도 그러하였거니와 앞으로는 세계 인류가 모두 우리 민족의 문화를 이렇게 사모하도록 하지 아니하려는가.


나는 우리의 힘으로, 특히 교육의 힘으로 반드시 이 일이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 우리나라의 젊은 남녀가 다 이 마음을 가질진대 아니 이루어지고 어찌하랴.


나도 일찍 황해도에서 교육에 종사하였거니와 내가 교육에서 바라던 것이 이것이었다. 내 나이 이제 70이 넘었으니 몸소 국민 교육에 종사할 시일이 넉넉지 못하거니와 나는 천하의 교육자와 남녀 학도들이 한 번 크게 마음을 고쳐먹기를 빌지 아니할 수 없다.[ 백범일지(白凡逸志)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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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1세) : 7월 11일 황해도 해주 백운방(白雲坊) 기동(基洞 : 텃골, 뒤에 벽성군 운산면 오담리 파산동)에서 김순영(金淳永)의 외아들로 태어남. 아버지는 빈농으로 당 27세. 어머니는 곽양식(郭陽植)의 장녀로 곽낙원(郭樂圓) 당 17세. 아명은 창암(昌巖).

1879(4세) : 천연두를 앓음.

1880(5세) : 집안이 강령(康翎) 삼거리로 이사하다.

1884(9세) : 조부상을 당하다. 국문과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다.

1887(12세) : 집에 서당을 만들고 이 생원을 초빙하여 한문 공부를 하다.

1889(14세) : 통감, 사략 등의 병서(兵書)를 읽다.

1890(15세) : 학골 정문재(鄭文哉)의 서당에 통학하며 당시(唐詩), 대학, 과문(科文) 등을 배우다.

1892(17세) : 과거에 응시했다가 낙방. 매관매직(賣官賣職)의 타락한 과거에 실망. 그 후 풍수와 관상 공부 등을 했고, 병서를 탐독. 동학(東學)에 입도한 후 이름을 창수(昌洙)라 개명.

1893(18세) : 황해도 도유사(都有司)의 한 사람으로 뽑혀 충북 보은(報恩)에서 최시형(崔時亨) 대수주(大首主)를 만남.

1894(19세) : 팔봉 접주(八峰接主)로 동학군의 선봉이 되어 해주성(海州城)을 공략했으나 실패.

1895(20세) : 신천 안태훈(安泰勳) 진사를 찾아 몸을 의탁했고, 그의 아들인 소년 안중근을 만남. 당시에 명망이 높은 해서(海西) 거유(巨儒) 고능선(高能善)의 지도를 받음. 압록강을 건너가 김이언(金利彦)이 지휘하는 의병단에 참가.

1896(21세) : 2월 안악군 치하포(安岳郡  河浦)에서 일본 군사 간첩 토전양량(土田讓亮)을 죽여 국모(國母)의 원한을 풀다. 5월 2일 일경(日警)에 체포되어 인천 감리영에 투옥됨. 감옥에서 태서신사(泰西新史), 세계지지(世界地誌) 등을 읽고 신학문에 눈뜸.

1897(22세) : 7월에 사형이 확정되고, 고종(高宗)의 특명으로 사형 직전에 특사령이 내려짐.

1898(23세) : 3월 9일 밤 탈옥, 전국을 방랑하다가 공주 마곡사(麻谷寺)의 중이 됨.

1899(24세) : 환속하여 고향에 돌아옴.

1900(25세) : 김두래(金斗來)란 이름으로 바꾸고 다시 방랑길에 오름.

1901(26세) : 엄친(嚴親) 김순영 씨 세상을 떠남(12월 9일).

1902(27세) : 장연(長淵) 친척집에서 여옥(如玉)이라는 처녀와 약혼함.

1903(28세) : 여옥이 병으로 세상을 떠난 후 기독교에 입교함. 안창호(安昌浩)의 영매(令妹) 신호(信浩)와 약혼했으나 또 파혼이 되다.

1904(29세) : 신천 사평동 최준례(崔遵禮 : 당시 18세)와 결혼함.

1905(30세) :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이 준(李儁), 이동녕 등과 함께 구국 운동에 앞장섬.

1906(31세) : 해서 교육회 총감이 되어 학교 설립을 적극 추진함.

1907(32세) : 장녀 화경(化敬) 출생.

1908(33세) : 신민회를 통한 구국 운동에 앞장서는 한편 안악에 양산 학교(楊山學校)를 세움.

1909(34세) : 전국의 강습소를 순회하며 재령 보강학교(保强學校)의 교장이 되다. 10월 안중근 의사 사건에 연좌되어 해주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석방됨.

1910(35세) : 11월 서울에서 열린 신민회 비밀 회의에 참석함.

1911(36세) : 1월 5일 사내 총독(寺內總督)을 암살하려 했다는 안명근(安明根) 사건 관련자로 체포되너 17년형을 언도받음.

1913(38세) : 옥중에서 이름을 구(九), 호를 백범(白凡)이라고 고침.

1914(39세) : 감형으로 7년의 형기를 끝내고 7월에 가출옥함.

1916(41세) : 출옥 후 김홍량(金鴻亮)의 동산평(東山坪) 농장 관리인으로 있으면서 농촌 계몽 운동에 힘씀.

1917(42세) : 장남 인(仁) 출생.

1919(44세) : 3.1운동 직후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 정부 초대 경무국장이 됨.

1922(47세) : 차남 신(信) 상해에서 태어남.

1923(48세) : 임시 정부 내무국장에 취임.

1924(49세) : 1월 1일 상해에서 부인 최 여사 폐렴으로 세상을 떠남.

1926(51세) : 12월 임시 정부의 원수(元首)인 국무령(國務領)에 취임.

1927(52세) : 헌법을 개정하여 임시 정부를 위원제로 고쳐 국무 위원에 취임.

1928(53세) : 자서전 '백범일지(白凡逸志)' 상권의 집필을 시작하다. 3월 이동녕, 이시영 등과 한국 독립당을 조직함.

1929(54세) : 5월 자서전 백범일지를 탈고하다. 재중(在中) 거류민 단장을 겸임.

1931(56세) : 한인 애국단(韓人愛國團)을 조직, 그 단장이 되어 독립 투사를 양성함.

1932(57세) : 1월 8일 이봉창(李奉昌) 일황(日皇) 저격에 실패. 4월 29일 윤봉길(尹奉吉) 의사로 하여금 상해 홍구 공원에서 폭탄을 던지게 함.

1933(58세) : 윤 의사 의거 후 신변이 위험해지자 강소성 가흥(江蘇省 嘉興)으로 피신. 가흥에서는 주애보(朱愛寶)라는 여자 사공에게 몸을 의탁함. 중국의 장개석 장군을 만나 친교를 맺고, 낙양 군관 학교(洛陽軍官學校)를 광복군 무관 양성소로 할 것을 결정함.

1934(59세) : 다시 임시 정부 국무령에 취임.

1935(60세) : 11월 가흥에서 임시 의정원 비상 회의를 열어 기구를 강화.

1936(61세) : 이동녕 등 동지들과 함께 한국 국민당을 창당.

1937(62세) : 임시 정부를 진강(鎭江)에서 장사(長沙)로 옮김.

1938(63세) : 민족주의 삼당(三黨) 통합 문제를 논의하던 남목청(南木廳)에서 조선 혁명당원 이운한(李雲漢)의 총격을 받아 1개월 동안 입원 가료함.

1939(64세) : 장사가 위험해지자 다시 광주(廣州)로 갔다가 장개석 주석의 도움으로 중경(重慶)으로 옮김. 다시 임시 정부 주석으로 취임. 어머니 곽씨 부인이 인후염으로 82세를 일기(一期)로 세상을 떠남.

1940(65세) : 5월 혁명 투쟁 각 단체를 통합, 한국 독립당에 집중케 하고 그 집행위원장에 취임. 군사 특파단(軍事特派團)을 섬서성 서안(陝西省 西安)에 상주케 하여 무장 부대 편성에 노력함.

1941(66세) : 12월 9일 임시 정부가 일본에 선전 포고함.

1942(67세) : 7월 임정과 중국 정부 사이에 광복군에 대한 정식 협정이 체결 공포됨. 광복군(光復軍)은 중국 각지에서 연합군과 공동 작전에 진력하게 됨.

1944(69세) : 2월 개정된 헌법에 따라 주석으로 재선됨. 섬서성 서안과 안휘성 부양(安徽省 阜陽)에 광복군 특별 훈련반을 설치하고 미국의 원조로 본토 상륙을 위한 군사 기술 훈련을 적극 추진키로 함.

1945(70세) : 2월 임시 정부가 일본군과 독일에 정식으로 선전 포고함. 장남 인이 호흡기병으로 세상을 떠남. 일본이 항복. 11월 23일 임시 정부 국무 위원 일동과 함께 개인 자격으로 환국함. 모스크바 삼상회의(三相會議)의 결정을 보고 12월 28일 이후 반탁 국민 운동을 적극 추진함.

1946(71세) : 2월 비상 국민 회의가 조직되어 그 총리에 취임. 인천, 마곡사 등 전국을 순회.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3 의사의 유골을 효창 공원에 봉안.

1947(72세) : 1월 비상 국민 회의가 국민 의회로 개편되어 그 부조석에 취임. 제2차 미소 공위(美蘇共委)가 열리자 반탁 투재 위원회의 활동을 이승만과 함께 추진. 11월 유엔 감시하의 남북 선거에 의한 정부 수립 결의안을 지지하다. 그의 정치 이념을 표현한 '나의 소원'을 발표.

1948(73세) : 2월 20일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泣告)함'을 발표. 4월 19일 남북 협상 참가차 평양으로 감. 5.10 선거 후부터는 건국 실천원 양성소(建國實踐員養成所)에 힘을 기울임.

1949(74세) : 6월 26일 경교장(京橋莊)에 안두희(安斗熙)의 흉탄에 맞아 서거. 7월 5일에 거족적인 국민장으로 효창 공원에 영면함.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 중장(重章)이 수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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