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이 경계하는 책 ‘흠정만주원류고’의 메시지는…
[동아일보] 2009년 01월 25일(일) 오후 06:06
중국이 경계하는 책 '흠정만주원류고', 첫 발간 이후 232년 여 만에 한국서 첫 번역
단재 신채호 선생 이래 역사학계에 뜨거운 논란을 제공했던 청나라 역사 연구서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가 세상에 나온 지 232년 만에 한국에서 처음으로 번역됐다. 우리의 사촌격인 여진족의 거의 유일한 역사서라는 점과 번역의 난이도를 고려하면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이 책의 번역자는 전문사학자가 아닌 검찰공무원 출신의 한학자라서 더 주목을 받고 있다. 번역자인 장진근 씨는 "그간 이 중요한 책이 번역이 안됐다는 점을 이상하게 생각해왔다"면서 "사학자는 아니지만 2년에 걸쳐 최대한 정확하게 번역하려고 노력했다"고 밝혔다.
책이 번역되는 데에는 고대사에 관심이 많은 누리꾼들의 힘이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이 책의 출간 역시 전문 역사학자들 보다 온라인 역사 커뮤니티 등에서 더 큰 화제를 불러 모으고 있다.
● 재야사학자와 한문학자가 2년간 번역에 매달려
2년 전 번역을 결심한 장 씨는 자신의 블로그(blog.naver.com/ckchang1)에 번역한 내용을 차근차근 올리기 시작했다. 이 내용은 인터넷을 타고 삽시간에 소문이 퍼졌다. 낯설지만 역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담고 있는 내용을 보러 누리꾼들이 그의 블로그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고난의 번역 작업이 누리꾼들의 열렬한 지지에 의해 힘을 얻어 2년 만에 완역의 결실을 거두게 된 것.
장 씨의 번역 원고는 다시 재야사학자들의 감수를 거쳐 정식 출판물로 거듭났다. 책을 출판한 뒤에도 장 씨는 원문과 번역본을 자신의 블로그에 PDF 파일로 올려놓았다. 마음껏 가져가 검증하고 오류를 지적해 달라는 의미다.
이 책의 어떤 점이 누리꾼들과 젊은 역사 연구자들의 주목을 받는 것일까? 무엇보다 책의 성격을 규정한 '흠정(欽定)'이라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흠정'은 중국의 사서에서 자주 등장하는 표현으로 '황제가 직접 제도나 법률을 제정하는 것'을 뜻한다. 황제가 직접 짓거나 황제의 명에 의해 씌어진 책에도 '흠정'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때문에 '흠정만주원류고'란 '황제의 칙명을 받들어 만주(滿洲)의 원류(源流)에 대해 연구한 책(考)'이라는 뜻이다.
'흠정만주원류고'는 건륭 21년(1778년)에 지어졌다. 건륭제는 청나라의 르네상스를 이끈 3현제(강희-옹정-건륭) 가운데 한 명이자 청나라 문명의 결정체인 백과사전 '사고전서(四庫全書)'를 편찬한 인물이다. 그가 청 제국을 세운 여진족의 원류와 만주의 근원을 밝히기 위해 직접 편찬을 명한 것으로 미루어 꽤 중요하게 집필된 책임을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이 책의 저술에는 청나라 인문학의 절정기에 중국의 모든 역사서를 모아놓고 탐구했던 훈고학(訓¤學)의 최고 권위자 43명이 동원됐다.
일찍이 '단군조선'과 '발해'를 재발견한 것으로 알려진 단재 신채호 선생도 '흠정만주원류고'를 통해 자신의 역사관을 재정립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단재는 '조선상고사'를 통해 우리 민족을 서술하면서 이 책을 직접 언급했다. 즉, '조선(朝鮮)'의 어원이 '조용한 아침의 나라'가 아니며 "'만주원류고'에 조선의 원래 발음은 쥬신이고 그 뜻은 주신(珠申)의 소속 관경(管境)인데 관경의 뜻은 우리 배달민족이 살고 있는 온 누리"라고 밝혀 주신에서 숙신과 조선이 나왔다고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이 책에는 여진의 역사가 아닌 미처 예상치 못했던 우리의 역사가 줄줄이 흘러나온다. 부여(夫餘)와 삼한(三韓)의 역사는 물론 만주에 대한 연고권이 없을 것 같던 백제와 신라까지도 책의 주요 대목을 꿰차고 있다.
● 청나라 건륭제가 직접 집필을 지시한 만주역사의 근원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이 세워 약 200여년 존속한 것으로 알려진 발해(渤海)는 아예 여진족의 자랑스러운 선조로 당당히 책에 이름을 올렸다. 책의 중간쯤에 등장하는, 여진족이 세운 나라인 금(金)나라의 뿌리를 밝힌 대목은 꽤 충격적이다.
"금나라 시조의 이름은 합부(合富)인데 처음 고려로부터 왔다" (부족7 완안(完顔)편 金史)
"삼가 생각건대, 금나라의 시조는 원래 신라로부터 왔고, 완안씨(完顔氏)라고 하였으며, 다스리는 부를 완안부라고 하였다. 신라의 왕은 김씨 성인즉 금나라는 신라의 먼 친척이다" (부족7 완안편 원서(元書))
이렇게 청나라의 문화적 역량이 집결됐으면서 동이족의 뿌리를 밝히는 역사서가 오랜 기간 국내 사학계에서 외면 받았다는 것도 아이러니한 일이다. 1993년 단 한차례 원문이 발간됐을 뿐 지금까지 그 누구도 한글 번역을 시도한 적이 없다.
그간 학계는 이 책이 중국 정통 25서에 포함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여진족의 관점에서 서술된 '연구서적'에 불과하다는 입장을 보여 왔다. 실제 이 책은 훈고학의 전통에 따라 과거 중국 25서에 묘사된 만주 지역의 국가와 강역에 대한 내용을 재해석하고 오류를 바로 잡는 데에 집중한다. 때문에 전문 학자들은 25서 원문을 바로 참고하면 될 뿐이라는 입장인 것.
물론 모든 강단 사학계가 이 같은 입장을 취한 것은 아니다. 단군학회 회장인 선문대 이형구(64) 교수는 "내용의 진위를 떠나 청나라 관찬(官纂·관청에서 편찬한 서적)이기 때문에 그 중요성은 오래전부터 인식되어 왔다"며 "우리와 연관된 내용이 많으므로 번역이 뒤늦은 감이 있지만 조심해서 취사선택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가 바라보는 '민감성'의 근원은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함경도 이북에 살았던 여진족의 성격 때문이다. 단군을 뿌리로 하는 여진이기 때문에 우리와 사촌 격임은 확실하지만 그들의 주장을 모두 수용하면 우리의 역사가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게다가 이 책이 갖는 한계와 미스터리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 우리 민족의 원류라 알려진 숙신과 부여 읍루 물길이 다 포함됐음에도 '고구려'가 서술되지 않았다는 점이 가장 대표적이다. 그럼에도 이 책은 한반도에 머물고 있던 우리 역사의 숨통을 틔워줄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이 책의 감수를 맡은 파워북 기획위원 홍순만 씨는 "실증주의에 매몰된 우리 강단사학계는 한반도라는 강역을 지키고 민족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제대로 된 우리의 역사를 외면해 온 측면이 없지 않다"면서 "정보기술(IT)이라는 새로운 유목 환경이 열린 새로운 시대에는 만주 유목민의 역사를 제대로 아는 것이 큰 힘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남한산성의 치욕'을 겪은 조선의 지식인들은 중국을 정복한 여진족을 편향된 시각에서밖에 바라볼 수 없었다. 이제까지도 여진족은 '로또 맞은 사촌' 또는 '문명을 정복한 야만'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책은 여진이야 말로 우리와 피를 나룬 친족이자 위대한 문명을 개척한 유목민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과연 건륭제의 뜻은 232년이 지난 조선 땅에서도 빛을 볼 수 있을까?
정호재 기자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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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피해의식 벗고 IT시대 유목민 정신 재발견해야
[동아일보] 2009년 01월 25일(일) 오후 06:06
흠정만주원류고' 감수한 홍순만 씨-"IT시대 유목민의 정신을 발견해야"
만주원류고를 번역한 한학자 장진근 씨는 검찰공무원 출신으로 퇴직 이후 본격적으로 번역 작업을 시작한 '재야'파다. 감수에 참여한 파워북 기획위원 홍순만 씨의 이력 또한 이에 못지않게 흥미롭다. 역사학도가 아니라 공대 출신으로 평생 정보기술(IT) 업계에서 일했기 때문이다.
서울대 항공우주공학과 출신인 그의 최종 이력은 얼마 전 SK텔레콤에 합병된 하나로텔레콤 부사장. 평생 취미가 한국의 고대사였다지만 IT전문가 출신이 어떻게 이 책의 번역에 관여하게 된 것인지 궁금했다.
어떻게 번역작업에 관여하게 됐나?
"현직에서 물러나자 갑자기 시간이 많았다(웃음). 출판사 일을 잠시 도우며 초고를 보게 됐는데 그 순간 '필연'이란 생각이 들었다. 역사서 번역은 한문뿐 아니라 중국어에 밝아야 가능하다. 중국어는 부족했지만 한문에 능통한 장 선생이 1차 번역하면 내가 원문을 다시 보고 어색한 부분을 집어가며 다시 교정하는 방식을 택했다. 각주가 많은 책이기 때문에 나보다 1차 번역자인 장 선생의 고생이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 이후 이 책의 존재는 한국 역사학계에 널리 알려졌는데 왜 번역조차 안 되고 오늘에 이르렀을까?
"무엇보다 우리 사학계의 뿌리 깊은 피해의식이 작동했다고 생각한다. 청나라의 위세에 위협을 느낀 조선 지식인들은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18세기 후반에 정약용 선생이 '아방강역고'를 쓰면서 우리의 역사를 한반도로 수렴해 정리해버렸다. 당시 조선의 소중화주의자들이 느꼈던 지적(知的)인 위기감은 일제시대를 거쳐 탄생한 우리 강단사학자들의 심정과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국토를 보전하기 위한 방어적 역사관이 바로 그것이다. 실제 민족을 보존하고 한반도 강역을 지키기 위한 우리 사학계의 시도는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우리의 찬란한 북방 유목민의 역사를 잃고 말았다."
사료적 가치가 없다고 폄하하는 학자들도 적지 않다. 여진족의 과대평가된 역사라는 건데…
"그렇게 볼 수 없다. 그렇게 말한다면 학계의 직무유기나 다름없다. 전통 사서가 아니라 연구서(考)이기 때문에 사료적 가치가 적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이 책은 북방 유목민의 관점에서 만주 쪽을 조망해 기존 사료를 비판한 유일한 책이므로 사료적 가치보다 사관적 가치가 훨씬 더 높다. 그리고 여진을 미화했다고 본다면 명나라나 송나라 한나라 역사서는 자기 역사를 미화하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 있나? 역사란 누구나 자기 관점에서 서술하는 법이다."
이 책이 주는 충격은 다름 아닌 목차에 있다. 여진족이 발해의 구성원인 말갈족의 후예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자기의 원류에 부여 백제 신라를 포함했다는 것이 충격적이다.
"유목민의 사고는 열려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청나라는 길림, 즉 완안부에서 출발했지만 그 나라 사람들이 생각한 이동의 영토는 열린 공간이었다. 이 길림이라는 공간에 영향을 미친 국가를 다 모았다고 보면 된다. 백제와 신라도 만주와 관련이 없을 수 없다. 우리가 피해의식에 젖어 한반도에 국한해 역사를 바라보고 있는데 유목민의 이주는 아주 자연스럽게 북백두대간을 타고 남백두대간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삼한(三韓)이 왜 반도태생이 아닌 길림(만주)에 영향을 끼쳤다고 봤을까?
"어떻게 갑자기 한반도에서 마한 진한 변한이 튀어나올 수가 있겠나? 그게 더 어색한 생각이라고 본다. 단재 신채호 선생이 삼한정류고에 썼듯이 예전 숙신족(주신족)은 북백두대간에 웅거하면서 세 개의 조선으로 나뉘어 있었을 것이다. 이 세 개의 조선이 어느 날 중국 정세의 변화에 따라 마치 게르만 민족의 이동처럼 남쪽으로 이동했다고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지 않겠나?"
청나라 황제들의 성씨가 '애신각라'(愛新覺羅')라는 점은 이미 잘 알려진 얘기다. 이는 '신라를 사랑하고 잊지 말라'라는 뜻이라는 일부 재야학자들의 해석에 대해서는 어떻게 봐야 하나?
"단순하게 해석하면 '금씨의 족속'이라고 해석될 수 있다. '애신각라'라는 성을 처음 부여받은 사람은 후금의 누르하치다. 그 먼 조상은 바로 금나라의 포고리옹순인데 설화에 따르면 선녀가 붉은 과일(감)을 먹고 그를 잉태했다고 나온다. 이는 동일하게 반복되는 북방 유목민족의 설화이자 신라 시조들의 설화와 유사하다. 뿐만 아니라 이미 금나라 역사서는 포고리옹순의 뿌리가 신라에 닿아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건 터무니없는 얘기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뿌리에 관한 얘기다. 세계를 정복한 여진족이 뭐가 아쉬워서 없는 사실을 꾸며 자신들의 역사서에 신라가 뿌리라고 적겠나? 게다가 이것이 실증사학으로 입증될 얘기도 아니다. 그 당시 이동경로로 따지면 너무도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본다."
신라는 시작과 끝이 비교적 명확한 국가인데 만주연고권이 있다니 좀 어색한데.
"충분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사관은 19세기부터 20세기에 정착된 근대 민족주의적 역사관이다. 한반도 동해안에서 청진을 거쳐 백두대간 오른편 용정과 길림을 가는 것은 매우 뿌리가 깊은 이동로다. 이미 박경리 선생의 '토지'에 서희와 길상이가 그 길을 통해 길림에서 진주까지 이동하는 게 나온다. 유목민의 이동은 만주 차원이 아니라 바이칼 호수를 거쳐 중앙아시아까지 가로지르는 스케일이다."
이 때문에 일부 독자들은 '만주원류고'가 청나라가 동북아시아를 차지하기 위한 원조 동북공정이라는 표현까지 한다.
"참 속이 좁다고 말해주고 싶다. 정말 매사에 피해의식이니 답답할 따름이다."
그럼에도 2000년 가까이 북방 유목민족인 거란 몽골 여진과 조선은 다른 국가를 세워 치열하게 싸웠다. 때문에 이를 같은 민족이라고 묶는 것은 어색하다.
"물론 국가적으로는 엄연히 다른 나라들이다. 언어와 문화도 일부 다르다. 하지만 선조들이 서로 치열하게 싸웠다고 우리의 적이라고 규정할 수 있나? 유럽의 게르만 민족을 봐라. 동고트족 서고트족 반달족… 수많은 부족들이 치열하게 전쟁을 벌였다. 원래 옆에 있는 부족과는 더 치열하게 싸우는 법이다. 그러나 어찌됐건 그들은 게르만 민족이고 민족적 동질감을 느낀다. 수많은 바이킹 부족들도 그냥 노르만족일 뿐이다. 분명히 거란과 몽골 여진족이 우리 민족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들이 우리와 전혀 다른, 죽일 놈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와중에 이동하고 서로 교류를 한 셈이다.
21세기는 IT의 시대다. 영토의 개념이 희박해 지고 민족국가의 개념 또한 환골탈태해야 할 것이다. 전 세계가 하나의 네트워크로 묶일 수 있다. 이 끝에서 저 끝으로 이동할 수 있다는 유목민의 열린 시각은 우리의 소중한 자산이 된다. 중국은 겨우 동북공정이나 하면서 올드 패러다임인 영토적 야욕을 보이고 있을 뿐이다(그럼에도 우리가 부정한 청의 역사를 중국은 포용했다). 우리도 과감하게 유목민의 역사적 영토, 문화적 영토, 정신적 영토에 대한 재인식을 할 필요가 있다."
몽골이나 여진은 전 세계를 정복했던 나라인데 결국은 중화됐고, 우리는 살아남았다. 역사적 평가가 달라질 수 있는 것 아닌가?
"나는 전 세계사가 유목민(씨줄)과 정착민(날줄)이 만들어온 인간 생활의 피륙이라고 본다. 기존 정착민이 만들어 온 국가의 토대를 갑자기 유목민이 뒤섞고 교류시켜 버리는 방식이다. 중국의 3대 발명품(제지술 화약술 나침판)이 몽골족의 원나라 시대에 무역을 통해 중앙아시아와 유럽으로 건너간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21세기는 다시 찾아온 유목민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가장 개방적인 사고를 가진 민족이 세계를 이끌어 갈 수 있다. 우리가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반도에 국한됐던 우리 역사관을 빨리 탈피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우리 모두 '환빠(환단고기 마니아· 중국 대륙의 역사가 우리 민족에 의해 이뤄졌다는 주장)'가 되자는 것도 아니다. 다만 개방적 사관으로 다시금 세계무대로 자신 있게 나아가자는 얘기다."
정호재 기자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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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원류고(滿州源流考)
삼국사기가 신라 후손의 역사책이라면, '만주원류고'는 고구려, 발해 후손의 역사책이다. 즉 삼국사기가 신라 경주 출신인 김부식이 쓴 역사책이라면 만주원류고는 고구려 백두산 출신의 후금인 청 건륭 42년(1777년) 청나라의 한림원이 쓴 역사책이다. 따라서 삼국사기는 신라중심으로 서술되고, 만주원류고는 고구려, 발해 즉 만주 중심으로 서술될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일만년에 이르는 기간동안, 바이칼호 연안, 시베리아, 만주, 칸(한)반도, 그리고 연해주는 우리 한(칸)민족의 피와 땀과 눈물이 배어있는 삶의 현장이었다. 따라서 만주와 한반도에서 어떤 국호를 가진 나라가 세워졌건 그것은 하나의 민족에 의한 다수의 국가 건설이었을 뿐이다. 즉 수많은 국가들은 한민족 연방의 한 부속국가였을 뿐이었다.
곧, 만주와 몽골, 시베리아 지역에 부여가 세워지건, 고구려가 세워지건, 옥저가 세워지건, 발해가 세워지건, 금나라가 세워지건, 요나라가 세워지건, 실위국이 세워지건, 후금이 세워지건 그것은 모두 우리 한민족 연방국가의 일 개 부속국가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며 또 한반도에 조선이라는 나라가 세워지건, 고려라는 나라가 세워지건, 신라라는 나라가 세워지건, 백제라는 나라가 세워지건, 가야라는 나라가 세워지건, 대한제국이라는 나라가 세워지건, 아니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세워지건, 아니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라는 나라가 세워지건 그것은 모조리 다같은 한민족에 의해 세워진 일개 정치집단에 불과하다.
따라서 후금이 중국 본토를 정복하면서, 설령 중국으로 편입됐다 하더라도 강역상 만리장성 이북 지역은 여전히 중국 민족의 역사 무대가 아님은 분명해진다.
특히 만주원류고에서 다루는 지역은 중화족의 강역이 아닌 우리 한민족의 강역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이 책은 결단코 중화족의 역사책이 아니라 우리 한민족, 다시 말해서, 고구려인/발해인의 역사책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특히 만주원류고는 고구려의 태학박사 이문진 (李文眞)이 AD 600년(영양왕 11년)에 왕명으로 기존에 전해 오던 역사책인 《유기(留記)》 100권을 편집하여 만든 《신집(新集)》5권이 1100여년이 흐른 후에 다시 살아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현재 만주가 중국의 강역이 되어 있다고 해서, 우리 민족의 역사 마저 중국에게 빼앗길 수는 없다.현대의 다물정신은 전쟁을 통한 강역회복이 아니라 분명한 역사인식을 통한 민족사의 회복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지구촌 시대에는 이제 자연지리적인 강역은 별 의미가 없다. 옛날에는 말을 타고, 산천을 넘어야만 영토를 빼앗아 식량을 확보할 수 있었지만 현대엔 굳이 몸에 총칼을 메고 산넘고 물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타국으로부터 합법적으로 재물을 빼앗아 올 수 있다.
따라서 옛날과 같이 무력을 통한 고토수복은 이젠 다물운동의 범주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이 시대의 진정한 다물운동은 잃어 버린 우리 한민족의 역사를 다시 찾는 것이다. 이러한 철저한 역사인식은 앞으로 무한경쟁시대에 우리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중요한 벼리가 되 줄 것이기 때문이다.여기서 소개하는 만주원류고는 일제시대 조선총독부에서 간행한 <흠정만주원류고>로서 국립중앙도서관으로부터 입수한 복사본이다.이제 서론은 접어두고 만주 원류고의 개략적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권1부터 권7까지는 부족을 다루고 있다.
권1 : 숙신, 부여족
권2 : 읍루, 삼한, 물길족
권3 : 백제족
권4 : 신라족
권5 : 말갈족
권6 : 발해족
권7 : 완안, 건주족
권8부터 권13까지는 각국의 강역을 다루고 있다.
권8 : 부여, 숙신, 읍루, 삼한의 강역
권9 : 물길, 백제, 신라, 흑수말갈의 강역
특히 신라 강역과 관련해서 신라의 강역이 한반도는 물론이고 만주 길림까지 아우르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어 주목된다. 즉 신라의 계림은 경상도에 있지 않고 만주 길림이라고 단정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번 판에서 잘못된 정보에 터잡아 고구려 멸망후 만주지역을 신라가 자동흡수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견해는 오류이므로 이를 시정하기로 합니다. 한편, 신라의 계림을 만주의 길림으로 보는 만주원류고의 시각에 따르면 고구려의 강역은 박창범 교수의 삼국의 천문관측지점도대로 바이칼에서 동몽골, 흑룡강에 이르는 것으로 비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 역시 검토를 요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권10 : 발해의 국경
권11 : 요의 강역
권12 : 금의 강역
권13 : 원의 강역
권14부터 권15까지는 산천을 다루고 있는데 권14가 산악을, 권15는 하천을 다루고 있다. 물론 만주일대의 산악, 하천을 다루고 있다. 권14에 바로 그 말썽 많은 도문강(두만강)이 나온다.끝으로 권16부터 권20까지는 국가의 습속을 다루고 있다.
[다음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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