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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트리아 Bactria 대하(大夏), 월지(月支), 쿠샨왕조

한부울 2009. 1. 23. 23:08
 

박트리아 Bactria 박달 밝다


박트리아, 대하(大夏), 월지(月支), 쿠샨왕조 (영문위키번역) 번역: 이태수


아무다르야: 다르야는 팔라비어로 바다 또는 강. ‘아무’는 아물(Āmul)이라는 도시에서 유래하였고, 현재의 Türkmenabat(39.5N, 63.3E)이다. Türkmenabat은 시릴릭어로 turkmen이고, 투르크메니스탄 레밥주의 주도(州都)이며, 공식명칭은 Chardzhou이고, 또는 Chardjui이며 그 뜻은 ‘네개의 강’이다. 아무다르야는 vakhsh강과 panj강이 합류된 강으로, 현지인은 에덴동산 또는 천국의 네개의 강중의 하나인 gihon에서 유래된 jayhoun이라고 부른다. 희랍어로 Oxus강이라고 하며, 유래는 Vakhsh(왁쉬)강이다. 옥수스강은 Matsya Purana(비슈누의 첫번째 화신의 신화)에서는 Chakshu강이고, Tushara (Rishika?)족, Lampaka족, Pahlava족, Parada족과 Shaka족의 나라를 통과한다 (마하바라타 힌두 서사시에 나오는 부족명).

 

해석: 아무다르야는 한자로 알목하, 아목하이다. 투르크멘니스탄에서는 ‘투르크멘(Turkmen)’이라고 하는데 토문(土門), 두만과 음이 유사하다. 위 내용으로 볼 때 에덴의 위치가 아무하가 될 수 있으며, 마하바라타 힌두서사시의 역사적 배경이 아무하가 될 수 있다. 또 박트리아는 페르시아어로 ‘박타르’이므로 ‘배달’과 통한다.

 

사천성은 四川이므로 아무 다르야강의 유래와 일치하는 네 개의 강이다. 인류의 시원은 중앙아시아이기 때문에 사천성의 지명도 위에서 따왔을 것이다.

 

                                               Map of Bactria 박트리아 지도

[클릭원본]

                                     Ancient cities of Bactria. 박트리아의 고대 도시


Bactria (Bactriana, Bākhtar in Persian, بـلـخ (spelled: Bhalakh) and Daxia in Chinese) is a historical region of Greater Iran. Known by the ancient Greeks as "Bactriana" the region is located between the range of the Hindu Kush and the Amu Darya (Oxus); in later times, the region became known as Tokharistan. The name of the region has survived to present time in the name of Afghan province "Balkh".


Bactria was bounded on the east by the ancient region of Gandhara. The Bactrian language is an Iranian language of the Indo-Iranian sub-family of the Indo-European family.


The Bactrians are among the ancestors of the modern-day Tajiks


박트리아: 페르시아어로박트리아나, 박타르, 아랍어와 인도어로 발리카, 한자로 대하(大夏).

박트리아는 힌두쿠시 산맥과 아무다리야 강(옥서스) 사이에 위치한 나라로 박트리아라는 명칭은 고대 그리스어로 지어진 이름이다. 그 수도는 박트라(오늘날 발크)였다. 박트리아는 동쪽으로 고대 간다라 지방과 마주하고 있었다.


박트리아 언어는 박트리아어(고대 이란어 계열)로 인도이란어파와 인도유럽어족 계통이었다. 박트리아인들은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 북부와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남부에 거주하고 있는 타지크 족 선조들의 일파다.


박트리아는 기본적으로 현재 아프가니스탄의 북쪽이다. 그것은 적합한 기후의 산지이다. 물이 많고 땅은 비옥하다. 박트리아는 이란족의 고향이다. 근래에는 중앙아시아의 모든 나라를 지칭하는데 쓰인다.


Geography


Bactria is basically what is now northern Afghanistan. It is a mountainous region with a moderate climate. Water is abundant and the land is very fertile. Bactria was the home of one of the Iranian tribes. Modern authors have often used the name in a wider sense, as the designation of all the countries of Central Asia.


지리: 박트리아는 기본적으로 현재 아프가니스탄 북부에 있다. 그 곳은 따뜻한 날씨의 산지(山地)이다. 물은 풍부하고 땅은 비옥하다. 박트리아는 이란부족 중의 하나의 고향이었다. 현대의 작가들은 종종 이 이름을 넓은 의미로 ‘중앙아시아의 모든 국가’ 명칭으로 사용해왔다.

 

역사


박트리아 마르기아나 고고학 복합체 Bactria-Margiana Archaeological Complex (BMAC)

 

      여신들, 박트리아, 아프가니스탄, 2000-1800 BCE Godesses, Bactria, Afghanistan,


BMAC는 옥수스 문화라고 하며, 중앙아시아의 현대의 고고학 명칭이고, BC2200-1700년이며, 투르크메니스탄, 북부 아프가니스칸, 남부 우즈베키스탄, 서부 타지키스탄에 있고, 중심은 고대 박트리아 영역의 아무다르야(옥수스)강의 상류에 있다. 이곳은 소련 고고학자 빅토르 사리아니디(1976)가 발견하고 이름을 붙였다. 박트리아는 현재의 북부 아프가니스탄의 박트라(현 발크) 지역에 대한 희랍 이름이었고, ‘마르기아나’는 마르구의 페르시아 군주에 대한 희랍어 이름이며, 마르구의 수도는 현 투르크메니스탄의 메르브(MERV)이었다.

[MERV: 한자로 목록(木鹿), 페르시아어로 Mary, 12세기 최대 도시. Mary주의 주도, 위치는 37.6N, 61.8E]


작가들에 따르면, 박트리아는 아리안족의 고향이었으며, 그들은 BC2500-2000년에 남서쪽으로는 이란에 들어갔고, 인도 북서부에 들어갔다. 그 후 중앙아시아의 페르시아 제국 (550–330 BC)의 북부 주가 되었다. 바로 이 지역은 산이 많은 나라의 비옥한 토지가 투란 사막으로 둘러쌓여 있으며, 조로아스터교의 예언자 Zarathushtra가 태어나고 첫번째 신봉자들을 얻었던 지역으로 알려졌다. 아베스탄 언어는 조로아스터교 성전의 고대 언어로, 산스크리트어와 관련 있는 고(古) 이란어였다. 오늘날 몇몇 학자들은 아베스탄 언어는 산스크리트어의 서부 방언이었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두 언어가 아리안족의 가장 오래된 인도-이란어였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아베스탄 언어는 서양식으로 발전되었다.


키루스와 알렉산더 Cyrus and Alexander


박트리아가 메디안 제국의 일부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씨루스 대왕(590 BC 또는 576 — 530 BC)에 의해 종속되었으며, 그 때부터 페르시아 제국의 군주의 하나가 되었다(사트라피는 산스크리트어로 크샤트리야(kshatriya)이고 군인계급 또는 왕).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가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패배하고 뒤이은 혼란에서 살해당한 후에, 시해자 베수스(BC329사망)는 박트리아의 군주인데, 그의 군주에 기초한 국민저항군을 조직하려 했다.

알렉산더는 별 어려움 없이 소그드(이란족, 粟特)와 이란을 정복했다; 강력한 저항에 부딪힌 곳은 옥수스강을 넘어 남쪽뿐이었다. 알렉산더 사후 마케도니아 제국은 결국 알렉산더 장군들(의 국가)로 분리되었다. 박트리아는 창건자 셀로우코스를 따서 셀로우코스(BC312-64년) 왕조의 일부가 되었다.

 

[소그디아: 이란족의 고대문명으로 한자로 속특이고, 페르시아어로 수구다이다. 현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 부하라, 후잔드(khujand), 케쉬이다. 주 도시는 사마르칸. 위치는 박트리아의 북쪽, 콰레즘(화레즘)의 동쪽, 강거(康居)국의 남동쪽에 있으며, 자라프샨 계곡을 따라 아무다르야와 시르다르야 강 사이에 있다.

강거(康居)국: 대완(大宛, Ferghana)의 북서쪽의 왕국으로 소그드 왕국의 시기이다. 한나라 장건이 BC128년 방문함. 이 부족은 월지족을 닮았고, 월지국은 남쪽에 흉노는 동쪽에 있다(월지국이 박트리아).

한나라 때 장건이 갔었던 지역으로, 이 지역은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지로, 희랍국가입니다. 따라서 한자 이름과 희랍 이름이 있습니다.] 


셀레우코스 제국 Seleucid Empire


마케도니아인들은 (특히 셀레우쿠스 1세와 그의 왕자 안티오쿠스 1세)가 셀레우코스 제국을 창건하고 동 이란에 많은 그리스 마을을 세웠다. 그리고 그리스 어가 그곳에 잠시 지배적이였다. 그리스의 존재가 그리스에 더 가까웠던 영역보다 박트리아에 더 유명한 파라독스는 페르시아 왕의 제신뢰성이 부족한 그리스 인을 제국의 가장 먼 지방으로 이주시키는 정책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


그레코-박트리아 왕국 Greco-Bactrian Kingdom

 

고대의 최대 금화의 그레코 박트리아 왕 유크라티데스 1세 Gold stater of the Greco-Bactrian king Eucratides, the largest gold coin of Antiquity.

 

그레코 박트리아의 지도와 그 최대 Map of the Greco-Bactrian at its maximum extent, circa 180 BCE


판고 (180 BCE)셀레우코스 제국의 왕들이 싸워야 했던 많은 어려움들과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공격은 박트리아 총독 디오도투스에게 독립(기원전 255년)을 선언하고 소그디아나를 정복할 기회를 주었다.


그는 그레코-박트리아 왕국의 창건자였다. 디오도투스 1세와 그의 계승자들은 셀레우코스 제국 특히 안티오쿠스 3세의 공격으로부터 스스로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는 결국 기원전 190년 로마에 의해 격파되었다.


그레코-박트리아는 매우 강하여 그들의 영토를 인도로 팽창시켰다. 박트리아는 대부분 아리아나의 동쪽과 윗쪽에 위치하지만 부분이 아리아나에 북쪽으로 길게 늘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기름을 제외한 모든 것을 생산하였다. 박트리아를 반란케 한 그리스인들은 그들이 주인이 된 아리아나의 비옥함 때문에 매우 강력하게 되어 아리아나 뿐만 아니라 인도와 더 많은 종족이 그들에 의해 정복되었다.



The founder of the Indo-Greek KingdomDemetrius I (205-171 BCE), wearing the scalp of an elephant, symbol of his conquest of India.[인도-희랍 왕국의 개창자 데메트리우스(BC205-171)는 꼬끼리 머리 가죽을 쓰고 있는데, 인도 정복의 상징이다]


인도-희랍 왕국 : Indo-Greek Kingdom


박트리아 왕 유티데무스와 아들 데메트리우스는 힌두쿠쉬를 넘어서 북부 아프가니스탄과 인두스 계곡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짧은 시간에 그들은 권력을 휘둘렀다; 대 희랍제국은 극동에서 일어서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 제국은 내부 불화와 계속된 왕위찬탈로 분열되었다. 드메트리우스가 인도로 진격할 때, 그의 장군 유크라티데스은 스스로 박트리아의 왕이라 했으며, 곧 모든 지역에서 찬탈자가 나타났으며, 자신을 왕이라 하고 서로 싸웠다.

그들 대부분을 오직 그들의 주화로만 알 수 있는데, 주화의 대부분은 아프카니스탄, 파키스탄, 인도에서 발견된다. 이러한 전쟁에 의해서 희랍인들의 우세적인 위치는 다른 경우보다 훨씬 빨리 깎아 내려갔다. 데메트리우스와 유크라티데스왕은 아테네의 표준 주화를 포기하고 토착 표준을 도입했는데, 희랍 소수민족 밖에서 지원을 얻기 위해서였다. 인도에서 이것은 훨씬 더 진척되었는데, 인도-희랍왕 메난데르(밀린다왕)은 대 정복자로서 불교에 귀의했다. 그의 계승자는 좀 오랫동안 그럭저럭 권력을 유지했지만, 기원10년쯤에 모든 희랍의 왕들은 사라졌다.

 

[대승경전 밀린다王問經에 밀린다왕과 비구 나가세나와의 문답이 있다. 이 경전은 한글로 번역되 한국 사찰에 많이 보급되었다. 희랍인들이 불교에 귀의하게 된 것은 전불시대(역사이전의 부처의 시대)에 불교를 믿었었기 때문이고, 소크라테스의 철학으로 인해 고등 불교를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왕문경에 보면 밀린다왕의 질문은 상당히 수준이 높다. 서양인 답게 질문이 직설적이다. 또 희랍어, 페르시아어, 산스크리트어는 같은 언어에서 유래된 것이기 때문에 불교를 이해하는데 빠른 것이다.


인도-희랍왕국은 기원10년 인도-스키타이인의 침공으로 멸망했다. 이 시기에 파키스탄의 동부에 ‘Taxila’라고 하는 도시들이 있었는데 이 도시들에 여러 왕가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이 왕국은 대승불교 형성에 영향을 끼쳤다. 특히 불상을 조각함. 초기불교에서는 불제자는 부처를 존중하는 의미로 보리수 아래에 앉아 있는 부처의 모습에서 보리수와 그의 제자들만 그리고 부처의 모습은 ‘좌대’만을 표시했다. 그러나 희랍인들은 부처를 신으로 여겼기 때문에 신상처럼 불상을 조각한 것이다.]


사카(塞,새)족과 월지(月支)족-Sakas and Yuezhis


사카족이 부처의 씨족 샤키야족과 관련이 있다는 증거는 없다.

그레코-박트리아 제국의 몰락은 갑자기 완벽히 전복되었는데, 먼저 사카족에 의해서, 그 다음은 월지족에 의해서였다. 월지족은 나중에는 쿠샨(貴霜,귀상)족이라고 한다. 쿠샨족은 대하(박트리아)를 정복했는데 그 당시는 한무제의 장건이 방문할 때이고 기원전 126년에 서역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것이다.

그러나 쿠샨왕조의 출현은 희랍에서 수천마일 떨어진 곳에서는 역설로 서술될 뿐이었다. 그러나 그 문화적 영향은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다; 간다라 문화라고 하는 동서양의 예술적 혼합은 수백년동안 제국에서 살아남았다.

 

The treasure of the royal burial Tillia tepe is attributed to 1st century BC Sakas in Bactria.[왕실 부장품 틸리야 테페는 BC1세기 박트리아의 사카족의 것이다.]


중국과의 교류-Contacts with China


대하는 기원전3세기 중국에서 서역의 신비왕국을 가리키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아마도 그레코-박트리아 왕국의 확장과 더불어 첫번째 접촉의 결과일 것이고, 기원전 126년 장건에 의해 박트리아를 가리키는 것으로 쓰여졌다.

장건의 보고서는 기원전 1세기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되어있다. 약 백만의 사람들이 작은 왕 또는 지사의 통치아래 성안에서 살고 있는 문명도시를 서술하고 있다. 대하는 시장이 활기찬 부유한 나라이고, 다양한 물품을 거래하고, 멀리는 남부 중국까지 거래한다. 장건이 대하를 방문할 때는, 주요한 왕이 없었으며, 박트리아 왕국은 월지족 유목민을 지배하고 있었고, 월지족은 옥수스강(아무다르여) 넘어 왕국의 북쪽에 거주하고 있었다. 전반적으로 장건은 전쟁을 두려워하고 교활하고 풍속이 문란한 사람들이라고 서술했다.

다음 보고서에서, 한무제는 페르가나(대완), 박트리아(대하), 파르티아(안식국)의 복잡한 도시문명을 듣고서 그들과 상업교류에 관심을 가졌다:

 “천자는 이 모든 것을 듣고서 이와 같이 생각했다: 페르가나(대완)와 박트리아(대하)와 파르티아(안식)은 큰 나라이고, 희귀한 것이 많고, 고정된 장소에 거주하고, 중국인과 어느정도 같은 직업을 가지고 있지만, 군대는 약하고, 중국의 풍부한 물산에 관심을 갖는다.(한서, 전한)


이러한 교류는 즉각 중국에서 여러 사신을 파견하게 되었고, 실크로드를 발전시키게 하였다.[위는 깊이 있는 내용이 없어 보입니다]

 

Zhang Qian taking leave from emperor Han Wudi, for his expedition to Central Asia from 138 to 126 BCE, Mogao Caves mural, 618-712 CE.[장건의 한무제와의 이별, 기원전138-126년 중앙아시아 탐방, 서기 618-712년의 막고굴 벽화]


토하리스탄: 토하리 왕국-Tokharistan


월지족이 정착함에 따라(서 양에서는 ‘토차리언’이라고 함) 박트리아의 일반적인 지역은 토하리스탄으로 불려졌다. 기원 1세기부터 3세기까지, 토하리스탄은 쿠샨왕조의 통치아래 있었다. 그 다음은 사사니드왕조의 통치를 받았다. 그 후 5세기에 씨오니테와 헤프탈리테의해

지배되었다. 7세기 돌궐 가한(왕)의 짧은 통치 후에는 아랍에게 정복되었다.

[토하리스탄의 영역은 쿠샨 박트리아와 같으며, 남부 타지키스탄, 북부 아프가니스탄과

Surxondaryo(아무강 지류)강이다.

 

           Kushan worshipper with Zeus/Serapis/Ohrmazd, Bactria, 3rd century CE.

 

                            Kushan worshipper with Pharro, Bactria, 3rd century 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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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3. 신화는 동서양이 공유

중산 2008-04-09 18:50:24.0

 

박트리아는 페르시아어로 박타르이므로 박달, 배달이 됩니다. 즉 배달의 역사를 이란인 희랍인과 공유한다는 것입니다. 상고시대의 고조선, 삼한의 역사는 페르시아,인도,그리스와 공유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즉 고조선의 역사 중에서 그리스 로마신화, 힌두신화, 페르시아 신화 등의 내용은 고조선의 역사를 가리킬 수 있다고 봅니다.

특히 신라의 이름 지명을 보면 범어, 페르시아어, 희랍어와 닮은 것이 많습니다.

신화중에서 내용이 같다면 연원이 같은 것에서 출발하여 각색되어 변형된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몽골-돌궐의 텡그리 신앙은 단군신앙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미주 인디언까지 해당됩니다.

 

댓글 2. 전불시대

중산 2008-04-09 18:32:19.0

 

위키영문사이트 참고서적을 보면 주로 서양인 학자입니다. 부처는 1만년, 5천년, 3천년 이내에몇 천만년동안 출현해왔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문명주기설에 따른 것으로, 사상이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야, 부처가 출현하여 설법을 하는 것입니다. 원시시대에는 출현해도 알아듣는 사람이 없기 때문임. 부처의 출현이후 문명은 더욱 고도화 되고, 일반적으로 최후에는 물질과학 수준이 높아지고, 정신적인 수준은 떨어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최후에는 전쟁, 사막화, 질병, 지각변동, 혜성충돌 등으로 인류의 문명은 하루아침에 또는 시간을 두고 사라지게 됩니다. 소겁, 중겁, 대겁이라 하는데, 긴 기간에 일어난 재앙 또는 넓은 지역의 재앙을 대겁이라 한다면, 짧은 기간 좁은 범위의 재앙은 소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주기는 종류가 엄청 많습니다.

 

적어도 1만년에 한번씩 문명은 고도화되고 지구는 엄청난 재앙으로 인하여 살아남은 소수에 의해 원시시대로 돌아가게 됩니다. 불경은 시간개념이 희박하여 몇천년전의 일도 몇 겁전이라고 쓰는데, 1겁은 어떤때는 1억년입니다.


원시7불은 시간적으로 무슨 의미인지 알 수 가 없습니다. 두가지로 볼 수 있는데, 예를 들면 백만년 동안이면 백만명의 부처가 출현한 것으로 보면, 이 기간의 대표적인 부처를 원시7불의 하나로 적는 방식입니다. 그러면 원시7불 중 한분 한분마다 백만년마다 출현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총 7백만년이 됩니다. 적어도 원시 7불은 석가모니 직전의 부처이름이 아니고, 몇 십만년전, 몇 백만년 전의 부처 이름입니다.


역사 이전은 사료가 별로 없으므로 무슨 시대구분을 못하지만, 수련계에서는 지구의 역사를 모모 부처의 시대로 구분하는 것입니다. 현재의 시기는 '석가모니불 시대'에 해당되고 거의 끝나가는 시점입니다.

 

댓글 1. 전불은 가섭불

최남석 2008-04-09 12:38:45.0

 

전불은 가섭불입니다  대승공교 이지요 새거란 (스기타이) 으로서 알타이에서 발상한 새부루(서가불)은 주술밀교입니다.

페르시아 가 이란 북부에 있다가 지금의 페르시아로 갔는데 달마대사 가 이곳 원 페르시아 출생이고  달마는 가섭의 공교를 계승하여 지나에 전했으며 니힐리즘이 이곳에서 발상한 사상으로 쏘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야스퍼스 니체로 이어지다 정치적 허무주의로 악화 되어 나찌의 파시즘이 나왔습니다. (최남석 연구 미완성 결론) 기고하신 글은 저자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저 하고 맥락이 닿아 있네요.


[대륙조선사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