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SINA-신중국

백범일지(白凡逸志)로 본 대륙조선흔적(1)

한부울 2009. 1. 26. 15:40
백범일지에 기록된 사건 장소가 대륙인가 반도인가?

http://blog.daum.net/han0114/170458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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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일지(白凡逸志)로 본 대륙조선흔적(1)


저자의 말


이 책은 내가 상해(上海)와 중경(중경)에 있을 때에 써 놓은 ‘백범일지(白凡逸志)’를 한글 철자법에 준하여 국문으로 번역한 것이다. 끝에 본국(?)에 돌아온 뒤의 일을 써 넣었다.


애초에 이 글을 쓸 생각을 낸 것은 내가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주석이 되어서 내 몸에 죽음이 언제 닥칠는지 모르는 위험한 일을 시작할 때에 당시 본국에 들어와 있던 어린 두 아들에게 내가 지낸 일을 알리자는 동기에서였다.


이렇게 유서 대신으로 쓴 것이 이 책의 상편이다. 그리고 하편은 윤봉길 의사사건 이후에, 중일 전쟁의 결과로 우리 독립 운동의 기지와 기회를 잃어, 목숨을 던질 곳이 없이 살아남아서 다시 오는 기회를 기다리게 되었으나, 그때에는 내 나이 벌써 70을 바라보아 앞날이 많지 아니하므로 주로 미주(美洲)와 하와이에 있는 동포를 염두에 두고, 민족 독립 운동에 대한 나의 경륜과 소회(素懷)를 고하려고 쓴 것이다. 이것 역시 유서라 할 것이다.


나는 내가 살아서 고국에 돌아와서 이 책을 출판할 것은 몽상도 아니하였다. 나는 완전한 우리의 독립 국가가 선 뒤에 이것이 지나간 이야기로 동포들의 눈에 비치이기를 원하였다. 그런데 행이라 할까, 아직 독립의 일은 이루지 못하고 내 죽지 못한 생명만이 남아서 고국에 돌아와 이 책을 동포의 앞에 내어놓게 되니 실로 감개가 무량하다.


나를 사랑하는 몇 친구들이 이 책을 발행하는 것이 동포에게 다소의 이익을 드림이 있으리라 하기로 나는 허락하였다.


이 책을 발행하기 위하여 국사원 안에 출판소를 두고 김지림 군과 삼종질 홍두가 편집과 예약, 수리의 일을 하고 있는바 혹은 번역과 한글 철자법 수정으로, 혹은 비용과 용지의 마련으로, 혹은 인쇄로 여러 친구와 기관에서 힘쓰고 수고한 데 대하여 고마운 뜻을 표하여 둔다.


끝에 붙인 '나의 소원' 한 편은 내가 우리 민족에게 하고 싶은 말의 요령을 적은 것이다. 무릇 한 나라가 서서 한 민족이 국민 생활을 하려면 반드시 기초가 되는 철학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없으면 국민의 사상이 통일되지 못하여 더러는 이 나라의 철학에 쏠리고 더러는 저 민족의 철학에 끌리어 사상의 독립, 정신의 독립을 유지하지 못하고 남을 의지하고 저희끼리는 추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현상으로 보면 더러는 로크의 철학을 믿으니 이는 워싱턴을 서울로 옮기는 자들이요, 또 더러는 마르크스, 레닌, 스탈린의 철학을 믿으니 이들은 모스크바를 우리의 서울로 삼자는 사람들이다.


워싱턴도 모스크바도 우리의 서울은 될 수 없는 것이요, 또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니 만일 그것을 주장하는 자가 있다고 하면, 그것은 예전 동경을 우리 서울로 하자는 자와 다름이 없을 것이다. 우리의 서울은 오직 우리의 서울이라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철학을 찾고, 세우고 주장하여야 한다. 이것을 깨닫는 날이 우리 동포가 진실로 독립 정신을 가지는 날이요, 참으로 독립하는 날이다.


'나의 소원'은 이러한 동기, 이러한 의미에서 실린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내가 품은, 내가 믿는 우리 민족 철학의 대강령(大綱領)을 적어 본 것이다.


그러므로 동포 여러분은 이 한 편을 주의하여 읽어 주셔서 저마다의 민족 철학을 찾아 세우는 데 참고를 삼고 자극을 삼아 주시기를 바라는 바이다.


내가 이 책 상편을 쓸 때에 열 살 내외이던 두 아들 중에서 큰 아들 인은 그 젊은 아내와 어린 딸 하나를 남기고 연전에 중경에서 죽고, 작은 아들 신이가 스물여섯 살이 되어서 미국으로부터 돌아와 아직 홀몸으로 내 시중을 들고 있다. 그는 중국의 군인인 동시에 미국의 비행 장교다. 그는 장차 우리나라의 군인이 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


이 책에 나오는 동지들 중에 대부분은 생존하여서 독립의 일에 헌신하고 있으나, 이미 세상을 떠난 이도 많다.


최광옥, 안창호, 양기탁, 현익철, 이동녕, 차이석, 이들도 다 이제는 없다. 무릇 난 자는 다 죽는 것이니 할 수 없는 일이어니와, 개인이 나고 죽는 중에도 민족의 생명은 늘 있고, 늘 젊은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시체로 성벽을 삼아서 우리의 독립을 지키고 우리의 시체로 발등상을 삼아서 우리의 자손을 높이고, 우리의 시체로 거름을 삼아서 우리의 문화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혀야 한다.


나는 나보다 앞서서 세상을 떠나간 동지들이 다 이 일을 하고 간 것을 만족하게 생각하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내 비록 늙었으나 이 몸뚱이를 헛되이 썩히지 아니할 것이다.


나라는 내 나라요, 남들의 나라가 아니다. 독립은 내가 하는 것이지 따로 어떤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민족 삼천만이 저마다 이 이치를 깨달아 이대로 행한다면 우리나라가 독립이 아니될 수도 없고, 또 좋은 나라, 큰 나라로 이 나라를 보전하지 아니 할 수도 없는 것이다. 나 김 구가 평생에 생각하고 행한 일이 이것이다.


나는 내가 못난 줄을 잘 알았다. 그러나 아무리 못났더라도 국민의 하나, 민족의 하나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쉬지 않고 하여 온 것이다. 이것이 내 생애요, 이 생애의 기록이 이 책이다.


그러므로 내가 이 책을 발행하기에 동의한 것은 내가 잘난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못난 한 사람이 민족의 한 분자로 살아간 기록이므로 해서이다. 백범(白凡)이라는 내 호가 이것을 의미한다. 내가 만일 민족 독립 운동에 조금이라도 공헌한 것이 있다고 하면, 그만 것은 대한 사람이면, 하기만 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우리 젊은 남자와 여자들 속에서 참으로 크고 훌륭한 애국자와 엄청나게 빛나는 일을 하는 큰 인물이 쏟아져 나오기를 믿거니와, 그와 동시에 그보다도 더 간절히 바라는 것은 저마다 이 나라를 제 나라로 알고 평생에 이 나라를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하는 것이니 나는 이러한 뜻을 가진 동포에게 이 '범인의 자서전'을 보내는 것이다.


단군기원 사천이백팔십년(1947) 십일월 십오일 개천절 날

김 구

 

머리말


인(仁) 신(信) 두 어린 아들에게-


아비는 이제 너희가 있는 고향에서 수륙(水陸) 5천 리를 떠난 먼 나라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어린 너희를 앞에 놓고 말하여 들릴 수 없으매 그 동안 나의 지난 일을 대략 기록하여서 몇몇 동지에게 남겨 장래 너희가 자라서 아비의 경력을 알고 싶어 할 때가 되거든 너희에게 보여주라고 부탁하였거니와, 너희가 아직 나이 어리기 때문에 직접으로 말하지 못하는 것이 유감이지만 어디 세상사가 뜻과 같이 되느냐.


내 나이는 벌써 쉰셋이건마는 너희는 이제 겨우 단 열 살과 일곱 살밖에 안 되었으니 너희의 나이와 지식이 자라질 때에는 내 정신과 기력은 벌써 쇠할 것일 뿐 아니라, 이 몸은 이미 원수 왜(倭)에게 선전 포고를 내리고 지금 사선(死線)에 서 있으니 내 목숨을 어찌 믿어 너희가 자라서 면대하여 말할 수 있을 날을 기다리겠느냐. 이러하기 때문에 지금에 이 글을 써 두려는 것이다.


내가 내 경력을 기록하여 너희에게 남기는 것은 결코 너희더러 나를 본받으라는 뜻은 아니다. 내가 진심으로 바라는 바는 너희도 대한민국의 한 국민이니 동서와 고금의 허다한 위인 중에서 가장 숭배할 만한 이를 택하여 스승으로 섬기라는 것이다. 너희가 자라더라도 아비의 경력을 알 길이 없겠기로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이다.


다만 유감되는 것은 이 책에 적는 것이 모두 오랜 일이므로 잊어버린 것이 많은 것은 사실이나, 하나도 보태거나 지어 넣은 것이 없는 것도 사실이니 믿어 주기 바란다.


대한민국 11년 5월 3일

중국 상해에서 아비


우리 집과 내 어릴 적(1) - 몰락한 양반 집안의 후손


우리는 안동 김씨 경순왕(敬順王)의 자손이다.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이 어떻게 고려 왕건 태조의 따님 낙랑공주의 부마가 되어서 우리들의 조상이 되셨는지는 '삼국사기'나 안동 김씨 족보를 보면 알 것이다.


경순왕의 팔세손이 충렬공(忠烈公), 충렬공의 현손이 익원공인데 이 어른이 우리 파의 시조요, 나는 익원공에서 21대 손이다. 충렬공, 익원공은 모두 고려조의 공신이거니와 이조(친일단어)에 들어와서도 우리 조상은 대대로 서울에 살아서 글과 벼슬로 가업을 삼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리 방조 김자점(金自點)이 역적으로 몰려서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게 되매, 내게 11대조 되시는 어른이 처자를 이끌고 서울을 도망하여 일시 고향에 망명하시더니, 그곳도 서울에서 가까워 안전하지 못하므로 해주 부중에서 서쪽으로 80리 백운방(白雲坊) 텃골(基洞) 팔봉산 양가봉(八峰山 楊哥峰) 밑에 숨을 자리를 구하시게 되었다.


그곳 뒷개(後浦)에 있는 선영에는 11대 조부모의 산소를 비롯하여 역대 선산이 계시고 조모님도 이 선영에 모셨다.


그 때에 우리 집이 멸문지화를 피하는 길이 오직 하나뿐이었으니, 그것은 양반의 행색을 감추고 상놈 행세를 하는 일이었다. 텃골에 처음 와서는 조상님네는 농부의 행색으로 묵은장이를 일구어 농사를 짓다가 군역전(軍役田)이라는 땅을 짓게되면서부터 아주 상놈의 패를 차게 되었다. 이 땅을 부치는 사람은 나라에서 부를 때에는 언제나 군사로 나서는 법이니 그 때에는 나라에서 문(文)을 높이고 무(武)를 낮추어 군사라면 천역, 즉 천한 일이었다.


이것이 우리 나라를 쇠약하게 한 큰 원인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리하여서 우리는 판에 박힌 상놈으로, 텃골 근동에서 양반 행세하는 진주 강씨, 덕수 이씨들에게 대대로 천대와 압제를 받아왔다. 우리 문중(門中)의 딸들이 저들에게 시집을 가는 일은 있어도 우리가 저들의 딸에게 장가든 일은 없었다.


그러나 중년에는 우리 가문이 꽤 창성하였던 모양이어서 텃골 우리 터에는 기와집이 즐비하였고, 또 선산에는 석물(石物)도 크고 많았으며, 내가 여남은 살까지도 우리 문중에 혼상대사(婚喪大事)가 있을 때에는 이정길이란 사람이 언제나 와서 일을 보았는데, 이 사람은 본래 우리 집 종으로서 속량 받은 사람이라 하니, 그는 우리 같은 상놈의 집에 종으로 태어났던 것이라 참으로 흉악한 팔자라고 아니 할 수 없다.


우리가 해주에 와서 산 뒤로 역대(歷代)를 상고하여 보면 글하는 이도 없지 아니하였으나 이름난 이는 없었고, 매양 불평객이 많았다.


내 증조부는 가어사(假御使) 질을 하다가 해주 영문에 갇혔다가 서울 어느 양반의 청편지(請片紙)를 얻어다 대고 겨우 형벌을 면하였다는 말을 집안 어른들께 들었다. 암행어사라는 것은 임금이 시골 사정을 알기 위하여 신임하는 젊은 관원에게 무서운 권세를 주어서 순회시키는 벼슬인데, 허름한 과객의 행색으로 차리고 다니는 것이 상례다.


증조 항렬 네 분 중의 한 분은 내가 대여섯 살까지 생존하셨고, 조부 형제는 구존하셨고, 아버지 4형제는 다 살아계시다가 백부 백영(伯永)은 얼마 아니하여 돌아가셔서 나는 다섯 살 적에 종형들과 함께 곡하던 것이 기억된다.


아버지 휘(諱) 순영(淳永)은 4 형제 중에 둘째 분으로서 집이 가난하여 장가 못가고 노총각으로 계시다가 24세 때에 삼각 혼인이라는 기괴한 방법으로 장련에 사는 현풍 곽씨(玄風 郭氏)의 딸 열 네 살 된 이와 성혼하여 증조부 댁에 부쳐 살다가 2,3년 후에 독립한 살림을 하시게 된 때에 내가 태어났다. 그 때 어머님의 나이는 열일곱이요, 푸른 밤송이 속에서 붉은 밤 한 개를 얻어서 감추어 둔 것이 태몽이라고 어머니는 늘 말씀하셨다.


병자년 7월 11일 자시(子時) - 이 날은 조모님 기일(忌日)이었다 - 에 텃골에 있는 웅덩이 큰댁이라고 해서 조부와 백부가 사시는 집에서 태어난 것이 나다. 내 일생이 기구할 예조였는지, 그것은 유례가 없는 난산이었다. 진통이 일어난 지 6,7일이 되어도 순산은 아니되고, 어머니의 생명이 위태하게 되어 혹은 약으로, 혹은 예방으로 갖은 시험을 다 해도 효험이 없어서, 어른들의 강제로 아버지가 소의 길마를 머리에 쓰고 지붕에 올라가서 소의 소리를 내고야 비로소 내가 나왔다고 한다.


겨우 열 일곱 되시는 어머니는 내가 귀찮아서 어서 죽었으면 좋겠다고 짜증을 내셨다는데 젖이 말라서 암죽을 먹이고 아버지가 나를 품속에 품고 다니시며 동네 아기 있는 어머니의 젖을 얻어 먹이셨다.


먼 촌 족대모 핏개댁(稷浦宅)이 밤중이라도 싫은 빛 없이 내게 젖을 물리셨단 말을 듣고 내가 열 살 갓넘어 그 어른이 작고하신 뒤에는 나는 그 산소 앞을 지날 때마다 경의를 표하였다. 내가 마마를 치른 것이 세 살 아니면 네 살 적인데 몸에 돋은 것을 어머니가 예사 부스럼 다스리듯이 죽침으로 따서 고름을 빼었으므로 내 얼굴에 굵은 벼슬 자국이 생긴 것이다.


내가 다섯 살 적에 부모님은 나를 데리시고 강령 삼거리(康翎三街里)로 이사하셨다. 거기는 뒤에는 산이요, 앞은 바다였다. 종조, 재종조, 삼종조 여러 댁이 그리로 떠나오시기 때문에 우리 집도 따라간 것이었다. 거기서 이태를 살았는데, 우리 집은 어떻게나 호젓한지 호랑이가 사람을 물고 우리 집 문전으로 지나갔다. 산 어귀 호랑이 길목에 우리 집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밤이면 한 걸음도 문 밖에는 나서지 못하였다. 낮이면 부모님은 농사하러 나가시거나 혹은 바다에 무엇을 잡으러 가시고, 나는 거기서 그 중 가까운 신풍 이생원(新豊 李生員) 집에 가서 그 집 아이들과 놀다가 오는 것이 일과였다.


그 집 아이들 중에는 나와 동갑되는 아이도 있었으나, 두세 살 위 되는 아이들도 있었다. 하루는 그 애들이 이놈 해줏놈 때려주자고 공모하여 나는 무리하게도 한 차례 매를 맞았다. 그러고는 분해서 나는 집에 와서 부엌에서 큰 식칼을 가지고 다시 이생원 집으로 가서 기습으로 그놈들을 다 찔러 죽일 생각으로 울타리를 뜯고 있는 것을 열 일 여덟 살 된 그 집 딸이 보고 소리소리 질러 오라비들을 불렀기 때문에 나는 목적을 달치 못하고 또 그놈들에게 붙들려 실컷 얻어맞고 칼만 빼앗기고 집으로 돌아왔다 식칼을 잃은 죄로 부모님께 매를 맞을 것이 두려워서 어머님께서 식칼이 없다고 찾으실 때에도 나는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또 하루는 집에 혼자 있노라니까 엿장수가 문전으로 지나가면서,


"헌 유기나 부러진 수저로 엿들 사시오." 하고 외쳤다.


나는 엿은 먹고 싶으나 엿장수가 아이들의 자지를 잘라 간다는 말을 어른들게 들은 일이 있으므로 방문을 꽉 닫아걸고 엿장수를 부른 뒤에 아버지의 성한 숟가락을 발로 디디고 분질러서 반은 두고 반만 창구멍으로 내어밀었다. 헌 숟가락이어야 엿을 주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엿장수는 내가 내어미는 반동강 숟갈을 받고 엿을 한 주먹 뭉쳐서 창구멍으로 들여 밀었다. 나는 반동강 숟가락을 옆에 놓고 한창 맛있게 엿을 먹고 있을 즈음에 아버지께서 돌아오셨다. 나는 사실대로 아뢰었더니, 다시 그런 일을 하면 경을 친다고 꾸중만 하시고 때리지는 아니하였다.


우리 집과 내 어릴 적(2) - 아버지와 백부들


또 한 번은 역시 그 때의 일로, 아버지께서 엽전 스무 냥을 방 아랫목 이부자리 속에 두시는 것을 보았다. 아버지가 나가시고 나 혼자만 있을 때에 심심은 하고 동구 밖 거릿집에 가서 떡이나 사먹으리라 하고 그 스무 냥 꾸러미를 모두 꺼내어 허리에 감고 문을 나섰다. 얼마를 가다가 마침, 우리 집으로 오시는 삼종조(三從祖)를 만났다.


"네, 이 녀석, 돈은 가지고 어디로 가느냐?" 하고 내 앞을 막아 서신다.

"떡 사먹으러 가요." 하고 나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하였다.

"네 아비가 보면 이 녀석 매맞는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거라." 하고 삼종조는 내 몸에 감은 돈을 빼앗아다가 아버지를 주셨다.


먹고 싶은 떡도 못 사먹고 마음이 자못 불평하여 집에 와 있노라니, 뒤따라 아버지께서 돌아오셔서 아무 말씀도 없이 빨랫줄로 나를 꽁꽁 동여서 들보 위에 매어 달고 회초리로 후려갈기시니, 아파서 죽을 지경이었다. 어머니도 밭에서 아니 돌아오신 때라 말려줄 이도 없이 나는 매를 맞고 달려 있었다. 이때에 마침 장련(長連) 할아버지라는 재종조께서 들어오셨다. 이 어른은 의술을 하는 이로서 나를 귀애하시던 이다. 내게는 정말 천행으로 이 어른이 우리 집 앞을 지나시다가 내가 악을 쓰고 우는 소리를 듣고 달려 들어오신 것이었다.


장련 할아버지는 들어오시는 길로 불문곡직하고 들보에 달린 나를 끌어 내려 놓으신 뒤에야 아버지께 까닭을 물으셨다. 아버지가 내 죄를 고하시는 말씀을 다 듣지도 아니하시고 장련 할아버지는 나이는 아버지와 동갑이시지마는 아저씨의 위엄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치시던 회초리를 빼앗아서 아버지의 머리와 다리를 함부로 한참 동안이나 때리시고 나서야 비로소,


"어린 것을 그렇게 무지하게 때리느냐?"


하고 책망하셨다. 아버지께서 매를 맞으시는 것이 퍽도 고소하고 장련 할아버지가 퍽도 고마웠다.


장련 할아버지는 나를 업고 들로 나가서 참외와 수박을 실컷 사먹이고 또 그 할아버지 댁으로 업고 가셨다.


장련 할아버지의 어머니 되시는 증종조모께서도 그 아드님으로부터 내가 아버지한테 매를 맞은 연유를 들으시고,


"네 아비 밉다. 집에 가지 말고 우리 집에서 살자."


하고 아버지의 잘못을 누누이 책망하시고 밥과 반찬을 맛있게 하여 주셨다. 나는 얼마만큼 마음이 기쁘고 아버지가 그 할아버지한테 맞던 것을 생각하니 상쾌하기 짝이 없었다. 이 모양으로 이 댁에서 여러 날을 묵어서 집에 돌아왔다.


한 번은 장마비가 많이 와서 근처에 샘들이 솟아서 여러 갈래 작은 시내를 이루었다. 나는 빨강이, 파랑이 물감통을 집에서 꺼내어다가 한 시내에는 빨강이를 풀고, 또 한 시내에는 파랑이를 풀어서 붉은 시내, 푸른 시내가 한 데 모여서 어울려지는 양을 장난으로 구경하고 좋아하다가 어머니께 몹시 매를 맞았다.


종조께서 이곳에서 작고하셔서 백여리나 되는 해주 본향으로 힘들여 행상(行喪)한 것이 빌미가 된 것인지, 내가 일곱 살 되던 해에 이르러는, 여기 와서 살던 바툰 일가들이 한 집, 두 집 해주 본향으로 돌아갔다. 우리 집도 이 통에 텃골로 돌아올 때에 나는 어른들의 등에 업혀 오던 것이 기억된다.


고향에 돌아와서는 우리 집은 농사로 살아가게 되었으나 아버지께서 비록 학식은 기성명 정도지마는 허위대가 좋고 성정이 호방하고, 술이 한량이 없으셔서 강씨, 이씨라면 만나는대로 막 때려 주고는 해주 감영에 잡혀 갇히기를 한 해에도 몇 번씩 하셔서 문중에 소동을 일으키셨다.


인근 양반들이 아버지를 미워하지마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 때 시골 습관에 누가 사람을 때려서 상처를 내면 맞은 사람을 때린 사람의 집에 떠메어다가 누이고 그가 죽나 살아나나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 집에는 한 달에도 몇 번씩 피투성이가 되어서 다 죽게 된 사람을 메어다가 사랑에 누이는 때도 있었다.


아버지가 이렇게 사람을 때리시는 것은 비록 취중에 한 일이라 하더라도 다 무슨 불평에서 나온 것이었다. 아버지는 당신께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라도 양반이나 강한 자들이 약한 자를 능멸하는 것을 보시고는 참지 못하여서 '수호지'에 나오는 호걸들 식으로 친불친을 막론하고 패어 주었다. 이렇게 아버지가 불같은 성정이신 줄을 알므로, 인근 상놈들은 두려워 공경하고 양번들은 무서워서 피하였다.


해마다 세말(歲末)이 되면 아버지는 달걀, 담배 같은 것을 많이 장만하여서 감영의 영리청, 사령청에 선사를 하였다. 그러면 그 회사(回謝)로 책력이며, 해주먹 같은 것이 왔다. 이것은 강씨, 이씨 같은 양반들이 감사나 판관에게 가 붙는 것에 대응하는 수였다.


영리청이나 사령청에 친하게 하는 것을 계방(契房)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계방이 되어 두면 감사의 영문이나 본아에 잡혀가서 영청이나 옥에 갇히는 일이 있더라도 영리와 사령들이 사정을 두기 때문에 갇히는 것은 명색뿐이요, 기실은 영리, 사령들과 같은 방에서 같은 밥을 먹고 편히 있고 또 설사 태장, 곤장을 맞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사령들은 매우 치는 시늉을 하고, 맞는 편에서는 죽어가는 엄살만 하면 그만인 것이다.


그뿐더러 만일 아버지께서 되잡아 양반들을 걸어서 소송을 하여서 그들이 잡혀오게 되면 제아무리 감사나 판관에게 뇌물을 써서 모면한다 하더라도 아버지의 편인 범 같은 영속들에게 호되게 경을 치고, 많은 재물을 허비하게 된다. 이렇게 망한 부자가 1년 동안에 10여 명이나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아버지를 무서워하는 인근 양반들은 그를 달래려 함인지 아버지를 도존위(都尊位)에 천하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도존위 행공을 할 때에는 다른 도존위와 반대로 양반에게 용서 없이 엄하고, 빈천한 사람들에게는 후하였다. 세금을 받는 데도 빈천한 사람의 것은 자담하여 내는 수가 있었지마는, 그들에게 가혹히 하는 일은 없었다. 이 때문에 3년이 못 되어서 아버지는 공전흠포(公錢欠逋) - 공금 횡령 - 로 면직을 당하셨다. 그래서 아버지는 인근에 사는 양반들의 꺼림과 미움을 받아서 그들의 아낙네와 아이들까지도 김순영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치를 떨었다.


아버지의 아이 적 별명은 효자였다. 그것은 할머니께서 돌아가실 때에 아버지께서 왼손 무명지를 칼로 잘라서 할머니의 입에 피를 흘려 넣으셨기 때문에 소생하셔서 사흘이나 더 사셨다는 것이었다.


아버지 4형제 중 백부 - 휘 백영 - 는 보통 농군이셨고, 셋째 숙부도 특기할 일이 없으나 넷째 계부 - 휘 준영 - 가 아버지와 같이 특이한 편이셨다. 계부는 국문을 배우는 데도 한 겨울 동안에 가자에 기역자도 못 깨우치고 말았으되, 술은 무량으로 자시고, 또 주사가 대단하여서 취하기만 하면 꼭 풍파를 일으키는데 아버지는 양반에게만 주정을 하셨지마는, 준영 계부는 아무리 취하여도 양반에게는 감히 손을 못 대고 일가 사람에게만 덤비셨다. 그러다가 조부님께 매를 얻어맞으시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내가 아홉 살 적에 조부님 상사가 났는데 장례날에 이 삼촌이 상여 메는 사람들에게 야료(惹鬧)를 하여서 결국은 그를 결박을 지어놓고야 장례를 모셨다. 장례를 지낸 뒤에 종증조의 발의로 문회(門會)를 열고 이러한 패류(悖類)는 그대로 둘 수가 없으니, 단단히 정치를 하여서 후환을 막아야 한다 하여 의논할 결과로 준영 삼촌을 앉은뱅이를 만들기로 작정하고 발 뒤꿈치를 베었으나 분김에 한 일이라 힘줄은 다 끊어지지 아니하여서 병신까지는 안 되었다.


그러나 그가 조부댁 사랑에 누워서 호랑이처럼 영각을 하는 바람에 나는 무서워서 그 근처에도 못가던 것이 생각난다. 지금 생각하니 상놈의 소위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 때에 어머니는 내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너의 집의 허다한 풍파가 모두 술 때문이니, 두고 보아서 네가 또 술을 먹는다면 나는 자살을 하여서 네 꼴을 안 보겠다." 나는 이 말씀을 깊이 새겨들었다.


우리 집과 내 어릴 적(3) - 글공부를 시작하다


이때쯤에는 나는 국문을 배워서 이야기책은 읽을 줄 알았고 천자(千字)도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얻어 배워서 다 떼었다. 그러나 내가 글공부를 하리라고 결심한 데는 한 동기가 있었다.


하루는 어른들에게서 이러한 말씀을 들었다. 몇 해 전 일이다. 문중에 새로 혼인한 집이 있었는데, 어느 할아버지가 서울 갔던 길에 사다가 두셨던 관을 밤에 내어 쓰고, 새 사돈을 대하였던 것이 양반들에게 발각이 되어서 그 관은 열파(裂破)를 당하고 그로부터 다시는 우리 김씨는 관을 못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몹시 울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어찌해서 양반이 되고, 우리는 어찌해서 상놈이 되었는가고 물었다. 어른들이 하는 말은 이러하였다. 방아메 강씨도 그 조상은 우리 조상만 못하였지마는 일문(一門)에 진사(進士)가 셋이나 살아 있고, 자라소 이씨도 그러하다고. 나는 어떻게 하면 진사가 되느냐고 물었다. 진사나 대과(大科)나 다 글을 잘 공부하여서 큰 선비가 되어서 과거에 급제를 하면 된다는 대답이었다.


이 말을 들은 뒤로 나는 부쩍 공부할 마음이 생겨서 아버지께 글방에 보내어 달라고 졸랐다. 그러나 아버지도 주저하지 아니할 수 없으셨다. 우리 동네에는 서당이 없으니 이웃 동네 양반네 서당에를 갈길밖에 없다. 그런데 양반네 서당에서 나를 받아줄지 말지도 알 수 없는 일이어니와, 또 거기 들어간다 하더라도 양반의 자식들의 등쌀에 견디어 낼 것 같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얼른 결단을 못하다가 마침내 우리 동네 아이들과 이웃 동네 상놈의 아이들을 모아서 새로 서당을 하나 만들고 청수리 이 생원이라는 양반 한 분을 선생으로 모셔 오기로 하였다. 이 생원은 지체는 양반이지마는 글이 바투어 양반 서당에서는 데려가는 데가 없기 때문에 우리 서당으로 오신 것이었다.


이 선생이 오신다는 날 나는 머리를 빗고 새 옷을 갈아입고 아버지를 따라서 마중을 나갔다. 저쪽에서 나이가 쉰 남짓 되어 보이는 키가 후리후리한 노인 한 분이 오시는데 아버지께서 먼저 인사를 하시고 나서 날더러,


"창암(昌岩)아, 선생께 절하여라." 하셨다. 나는 공손하게 너붓이 절을 하고 나서, 그 선생을 우러러보니 신인(神人)이라 할지 하느님이라 할지 어떻게나 거룩해 보이는지 몰랐다.


우선 우리 사랑을 글방으로 정하고, 우리 집에서 선생의 식사를 받들기로 하였다. 그 때에 내 나이가 열 두 살이었다.


개학하던 첫날 나는 '마상봉한식(馬上逢寒食)' 다섯 자를 배웠는데, 뜻은 알든 모르든 기쁜 맛에 자꾸 읽었다. 밤에도 어머니께서 밀매가리 하시는 것을 도와드리면서 자꾸 외었다. 새벽에는 일찍 일어나서 선생님 방에 나가서 누구보다도 먼저 배워서 밥그릇 망태기를 메고 먼 데서 오는 동무들을 가르쳐 주었다.


이 모양으로 우리 집에서 석 달을 지내고는 산골 신존위 집 사랑으로 글방을 옮기게 되어서 나는 밥그릇 망태기를 메고 고개를 넘어서 다녔다. 집에서 서당에 가기까지, 서당에서 집에 오기까지 내 입에서는 글소리가 끊어지는 일이 없었다. 글동무 중에는 나보다 정도가 높은 아이도 있었으나 배운 것을 강(講)을 하는 데는 언제나 내가 최우등이었다.


이러한 지 반 년 만에 선생과 신존위 사이에 반목이 생겨서 필경 이 선생을 내어 보내게 되었는데, 신존위가 말하는 이유는 이 선생이 밥을 너무 많이 자신다는 것이었거니와, 사실은 그 아들이 둔재여서 공부를 잘못하는데 내 공부가 일취월장(日就月將)하는 것을 시기함이었다.


한 번은 월강 - 한 달에 한 번 하는 시험 - 때에 선생이 내게 조용히 부탁하신 일이 있었다. 내가 늘 우등을 하였으니 이번에는 일부러 잘못하고 선생이 뜻을 물어도 일부러 모르라 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기러하오리다 하고 약속을 하고 그대로 하였다. 이리하여서 이날에 신존위의 아들이 처음으로 한 번 장원(壯元)을 하였다.


신존위는 대단히 기뻐서 이 날 닭을 잡고 한 턱을 잘 내었다. 그러나 번번이 신존위의 아들을 장원시키지 못한 죄로 이 선생이 퇴짜를 맞은 것이니 참으로 상놈의 행사라고 아니할 수 없다. 하루는 내가 아침밥을 먹기 전에 선생님이 우리 집에 오셔서 나를 불러 작별 인사를 하실 때에 나는 정신이 아뜩하여서 선생님의 품에 매어달려서 소리를 내어 울었다. 선생님도 눈물이 비오듯하였다. 나는 며칠 동안은 밥도 아니 먹고 울기만 하였다.


그 후에도 어떤 돌림 선생 한 분을 모셔다가 공부를 계속하게 되었으나, 이번에는 아버지께서 갑자기 전신불수가 되셔서 자리에 누우시게 되었기 때문에 나는 공부를 전폐하고 아버지 심부름을 하지 않으면 아니 되게 되었다. 근본 빈한한 살림에 의원이야 약이야 하고 가산을 탕진한 끝에 겨우 아버지는 반신불수로 변하여서 한편 팔과 다리를 쓰시게 된 것만도 천행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아버지가 반신불수시고는 살 수가 없으니, 어떻게 하여서라도 병은 고쳐야 하겠다 하여 어머니는 병드신 아버지를 모시고 무전여행을 나서시게 되었다. 문전걸식을 하면서 고명 의원을 찾아서 남편의 병을 고치자는 것이었다.


집도 가마솥도 다 팔아 없어지고, 나는 백모님 댁에 맡긴 몸이 되어서 종형들과 소고삐를 끌고 산과 들로 다니며 세월을 보내었다.


부모님은 안악, 신천, 장연 등지로 유리표박하시는 동안에 아버지 병환이 신기하게도 차도가 계셔서 못쓰던 팔, 다리도 잘은 못해도 쓰게 되셨다. 그래서 내 공부를 시키실 목적으로 다시 본향으로 돌아오셨다. 일가들이 얼마씩 추렴을 내어서 의지(義肢)를 장만하고, 나는 또 서당에를 다니게 되었다.


책은 남의 것을 빌어서 읽는다고 하더라도 지필묵(紙筆墨) 값이 나올 데가 없었다. 어머님이 김품과 길쌈품을 팔아서 지필묵을 사주실 때에는 어찌나 고마운지 이루 말로 다 형용할 수 없었다.


내 나이 열 네 살이 되매, 선생이라는 이가 모두 고루해서 내 마음에 차지 아니하였다. 벼 열 섬짜리, 닷 섬짜리, 하고 훈료가 많고 적은 것으로 선생의 학력을 평가하였다. 그들은 다만 글만 부족할 뿐 아니라, 그 마음씨나 일하는 것에 남의 스승이 될 자격이 보이지 아니하였다.


우리 집과 내 어릴 적(4) - 과거 시험과 관상 공부


그 때에 아버지는 내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밥 벌어먹기는 장타령이 제일이라고 큰 글 하려고 애쓰지 말고, 행문이나 배우라는 것이었다. '우명문표사단(右明文標事段)' 하는 땅 문서 쓰기, '우근진소지단(右謹陳訴旨段)' 하는 솟장 쓰기, '維歲次敢昭告于(유세차감소고우)' 하는 축문 쓰기, '僕之第幾子未有伉儷(복지제기자미유항려)' 하는 혼서지 쓰기, '복미심차시(伏未審此時)' 하는 편지 쓰기를 배우라 하시므로 나는 틈틈이 이 공부를 하여서 무식촌 중에 문장이 되어서 문중에서는 내가 장차 존위 하나는 하리라고 촉망하게 되었다.


그러나 내 글은 이제 겨우 속문 정도에 지나지 못하지마는 뜻은 한 동네의 존위에는 있지 아니하였다. '통감(通鑑)', '사략(史略)'을 읽을 때에 '왕후 재상의 씨가 따로 있으랴(王侯將相寧有種乎)'하는 진승(陳勝)의 말이나, 칼을 빼어서 뱀을 베었다는 유방의 일이나, 빨래하는 아낙네에게 밥을 빌어먹은 한신의 사적을 볼 때에는 나도 모르게 어깨에서 바람이 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 가세로는 고명한 스승을 찾아갈 수는 없어서 아버지께서도 무척 걱정을 하시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마침 공부할 길이 하나 뚫렸다. 우리 동네에서 동북으로 10리쯤 되는 학골이라는 곳에 정문재(鄭文哉)라는 이가 글을 가르치고 계셨다. 이 이는 문벌은 우리 집과 마찬가지로 상놈이었으나 과문 - 과거하는 글 - 으로는 당시에 굴지되는 큰 선비여서 그 문하에는 사처에서 선비들이 모여들었다.


이 정 선생이 내 백모와 재종간이므로 아버지께서 그에게 간청하여 훈료(訓料) 없이 통학하며, 배우는 허락을 얻으셨다. 이에 나는 날마다 밥 망태기를 메고 험한 산길을 10리나 걸어서 기숙하는 학생들이 일어나기도 전에 대어 가는 일이 많았다.


제작 - 글짓기 - 으로 과문의 초보인 대고풍십팔구(大古風十八句)요, 학과로는 '한당시'와 '대학' '통감' 등이요, 습자에서 분판만을 썼다.


이때에 임진경과(壬辰慶科)를 해주에서 보인다는 공포가 났으니 이것이 우리나라의 마지막 과거였다. 어느 날 정 선생은 아버지께 이런 말씀을 하시고 나도 과거를 보기 위하여 명지 - 과거에 글 지어 바치는 종이 -를 쓰는 연습으로 장지 다섯 장을 구해 오셔서 나는 그 다섯 장 종이가 까맣게 되도록 글씨를 익혔다.


과거날이 가까워 오매 우리 부자는 돈이 없으므로 과거 중에 먹을 만큼 좁쌀을 지고 정 선생을 따라 해주로 갔다. 여관에 들 형편이 못되므로 전에 아버지께서 친해 두셨던 계방에 사처를 정하였다.


과거날이 왔다. 선화당 옆에 있는 관풍각(觀風閣) 주위에는 새끼줄을 둘러 늘였다. 정각에 부문(赴門)을 한다는데 선비들이 접을 따라서 제 접 이름을 쓴 백포기를 장대 끝에 높이 들고 모여들었다. 산동접(山洞接), 석담접(石潭接) 이 모양이었다. 선비들은 검은 베로 만든 유건(儒巾)을 머리에 쓰고, 도포를 입고 접기를 따라 꾸역꾸역 밀려들어 좋은 자리를 먼저 잡으려고 앞장선 용사패들이 아우성을 하는 것도 볼 만하였다. 원래 과장에는 노소도 없고, 귀천도 없이 무질서한 것이 유풍이라 한다.


또 가관인 것은 늙은 선비들의 걸과 - 과거에 급제를 시켜달라고 비는 것 - 라는 것이다. 둘러늘이 새끼 그물 구멍으로 모가지를 쑥 들이밀고 이런 소리를 외치는 것이다.


"소생의 성명은 아무이옵는데, 먼 시골에 거생하면서 과거마다 참예하였사옵는데 금년이 일흔 몇 살이올시다. 요 다음은 다시 참과 못하겠사오니 이번에 초시라도 한 번 합격이 되오면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


이 모양으로 혹은 큰 소리로 부르짖고, 혹은 방성대곡도 하니 한편 비루도 하거니와 또 한편 가련도 하였다.


내 글은 짓기는 정 선생이 하시고 쓰기만 내가 쓰기로 하였으나 내가 과거를 내 이름으로 아니 보고 아버지의 이름으로 명지(名紙)를 드린다는 말에 감복하여서 접장 한 분이 내 명지를 써 주기로 하였다. 나보다는 글씨가 낫기 때문이었다. 제 글과 제 글씨로 못하는 것이 유감이었으나 차작(借作)으로라도 아버지가 급제를 하셨으면 좋을 것 같았다.


차작으로 말하면 누구나 차작 아닌 것이 없었다. 세력 있고 재산 있는 사람들은 모두 글 잘하는 사람에게 글을 빌고 글씨 잘 쓰는 사람에게 글씨를 빌어서 과거를 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좋은 편이었다. 글은 어찌 되었든지 서울 권문세가(權門勢家)의 청편지 한 장이나 시관의 수청 기생에게 주는 명주 한 필이 진사나 급제가 되기에는 글 잘하는 큰 선비의 글보다도 빨랐다. 물론 우리 글 따위는 통인의 집 식지(食紙)감이나 되었을 것이요, 시관의 눈에도 띄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진사 급제는 미리 정해놓고 과거는 나중 보는 것이었다.


이번 과거에 나는 크게 실망하였다. 아무리 글공부를 한댔자, 그것으로 발천(發闡)하여 양반이 되기는 그른 세상인 줄을 깨달았다. 모처럼 글을 잘해서 세도 있는 자제들의 대서인 되는 것이 상지상(上之上)일 것이었다.


나는 집에 돌아와서 과거에 실망한 뜻을 아뢰었더니 아버지도 내가 바로 깨달았다고 옳게 여기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 그러면 풍수 공부나 관상 공부를 하여 보아라. 풍수를 잘 배우면 명당을 얻어서 조상님네 산소를 잘 써서 자손이 복록을 누릴 것이요, 관상에 능하면 사람을 잘 알아보아서 성인군자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 말씀을 매우 유리하게 여겨서 아버님께 청하여 '마의상서(麻衣相書)'를 빌어다가 독방에서 석 달 동안 꼼짝 아니하고 공부하였다. 그 방법은 면경을 앞에 놓고 내 얼굴을 보면서 일변 얼굴의 여러 부분의 이름을 배우고, 일변 내 상의 길흉을 연구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내 얼굴을 관찰해 보아도 귀격이나 부격과 같은 좋은 상은 없고, 천격, 빈격, 흉격 뿐이었다. 전자에 과장에서 실망하였던 것을 상서에서나 회복하려 하였더니, 제 상을 보니 그보다도 더욱 낙심이 되었다. 짐승 모양으로 그저 살기나 위해서 살다가 죽을까. 세상에 살아 있을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이렇게 절망에 빠진 나에게 오직 한 가지 희망을 주는 것은 마의상서 중에 있는 다음의 구절이었다.


'얼굴 좋음이 몸 좋음만 못하고, 몸 좋음이 마음 좋음만 못하다(相好不如身好 身好不如心好).'


이것을 보고 나는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로 굳게 결심하였다. 그러나 마음이 좋지 못하던 사람으로 마음이 좋은 사람이 되는 법이 무엇인가. 여기에 대하여서 마의상서는 아무 대답도 주지 못하였다. 이래서 상서는 덮어 버리고 '지가서(地家書)'를 좀 보았으나 거기도 취미를 얻지 못하고, 이번에는 병서를 읽기 시작하였다. '손무자(孫武子)' '오기자(吳起子)' '삼략(三略)' '육도(六韜)' 등을 읽어 보았다. 알지 못할 것도 많으나, 장수의 재목을 말한 곳에,


'태산이 무너지더라도 마음이 동치 말고, 사졸로 더불어 달고 씀을 같이 하며, 나아가고 물러남을 범과 같이 하며, 남을 알고 저를 알면 백 번 싸워도지지 아니하리라(泰山覆於前 心不妄動 與士卒同甘苦 進退如虎 知彼知己 百戰不敗).'


이 구절이 내 마음을 끌었다. 이때에 내 나이가 열일곱 살, 나는 일가 아이들을 모아서 훈장질을 하면서 잘 알지도 못하는 병서를 읽고 1년의 세월을 보내었다.


우리집과 내 어릴 적(5) - 동학과의 만남

 

이때(1892)에 사방에는 여러 가지 괴질이 돌았다. 어디서는 진인이 나타나서 바다에 달리는 화륜선(火輪船 - 汽船)을 못 가게 딱 붙여놓고 세금을 받고야 놓아주었다는 둥, 머지 아니하여 계룡산에 정도령이 도읍을 할 터이니 바른목에 가 있어야 새 나라의 양반이 된다 하여 세간을 팔아 가지고 아무개는 계룡산으로 이사를 하였다는 둥, 이러한 소문이었다.


그런데 우리 동네에서 남쪽으로 20리쯤 가서 갯골이란 곳에 사는 오응선(吳應善)과 그 이웃 동네에 사는 최유현(崔琉鉉)이라는 사람이 충청도 최도명(崔道明)이라는 동학(東學) 선생에게서 도를 받아 가지고 공부를 하고 있는데 방에 들고 나기에 문을 열지 아니하며, 문득 있다가 문득 없어지며, 능히 공중으로 걸어다니므로 충청도 그 선생 최도명한테 밤 동안 다녀온다고 하였다. 나는 이 동학이라는 것에 호기심이 생겨서 이 사람들을 찾아보기로 결심하였다.


나는 남에게 들은 말대로 누린 것, 비린 것을 끊고 목욕하고 새 옷을 입고 나섰다. 이렇게 하여야 받아준다는 것이었다. 내 행색으로 말하면 머리는 빗어서 땋아늘이고 옥색 도포에 끈목띠를 띠었다. 때는 내가 열여덟 살 되던 정초였다.


갯골 오씨 집 문전에 다다르니 안으로부터 무슨 글을 읽는 소리가 나오는데, 그것은 보통 경전이나 시를 읽는 소리와는 달라서 마치 노래를 합창하는 것과 같았다. 공문(拱門)에 나아가 주인을 찾았더니 통천관(通天冠)을 쓴 말쑥한 젊은 선비 한 사람이 나와서 나를 맞는다.


내가 공손히 절을 한즉, 그도 공손히 맞절을 하기로 나는 황공하여서 내 성명과 문벌을 말하고 내가 비록 성관(成冠)을 하였더라도 양반댁 서방님인 주인의 맞절을 받을 수 없거늘, 하물며 편발( 髮) 아이에게 이런 대우가 과도한 것을 말하였다. 그랬더니 선비는 감동하는 빛을 보이면서 그는 동학도인이라 선생의 훈계를 지켜 빈부귀천에 차별이 없고, 누구나 평등으로 대접하는 것이니, 미안해 할 것 없다고 말하고 내가 찾아온 뜻을 물었다.


나는 이 말을 들으매 별세계에 온 것 같았다. 내가 도를 들으러 온 뜻을 고하니 그는 쾌히 동학의 내력과 도리의 요령을 설명하였다. 이 도는 용담 최수운(龍潭 崔水雲) 선생께서 천명하신 것이나, 그 어른은 이미 순교하셨고 지금은 그 조카님 최해월(崔海月) 선생이 대도주(大道主)가 되셔서 포교를 하신다는 것이며, 이 도의 종지(宗旨)로 말하면 말세의 간사한 인류로 하여금 개과천선하여서 새 백성이 되어 가지고 장래에 진주 - 참 임금 -를 뫼시어 계룡산에 새 나라를 새우는 것이라는 것 등을 말하였다.


나는 한 번 들으매, 심히 환희심이 발하였다. 내 상호가 나쁜 것을 깨닫고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로 맹세한 나에겐는 하느님을 몸에 모시고 하늘도를 행하는 것이 가장 요긴한 일일뿐더러 상놈 된 한이 골수에 사무친 나로서는 동학의 평등주의가 더할 수 없이 고마웠고, 또 이씨의 운수가 진하였으니 새 나라를 세운다는 말도 해주의 과거에서 본 바와 같이 정치의 부패함에 실망한 나에게는 적절하게 들리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나도 입도할 마음이 불같이 일어나서 입도 절차를 물은 즉 쌀 한 말, 백지 세 권, 황초 한 쌍을 가지고 오면 입도식을 행하여 준다고 하였다. '동경대전(東經大典)' '팔편가사(八編歌詞)' '궁을가(弓乙歌)' 등 동학의 서적을 열람하고 집에 돌아왔다. 아버지께 오씨에게서 들은 말을 여쭙고 입도할 의사를 품하였더니 아버지께서는 곧 허락하시고 입도식에 쓸 예물을 준비하여 주셨다. 이렇게 하여서 내가 동학에 입도한 것이었다.


동학에 입도한 나는 열심히 공부를 하는 동시에 포덕 - 전도 - 에 힘을 썼다. 아버지께서도 입도하셨다. 이때의 형편으로 말하면 양반은 동학에 오는 이가 적고, 나와 같은 상놈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내가 입도한 지 불과 수월에 연비(連臂) - 포덕하여 얻은 신자라는 뜻 - 가 수백 명에 달하였다. 이렇게 하여 내 이름이 널리 소문이 나서 도를 물으러 찾아오는 이도 있고 내게 대한 무근지설(無根之說)을 전파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대가 동학을 하여 보니 무슨 조화가 나던가?"


하는 것이 가장 흔히 내게 와서 묻는 말이었다. 사람들은 도를 구하지 아니하고 요술과 같은 조화를 구하는 것이었다. 그런 질문을 받을 때에는 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악을 짓지 말고, 선을 행하는 것이 이 도의 조화이니라."


이것이 나의 솔직하고 정당한 대답이언마는 듣는 이는 내가 조화를 감추고 자기네에게 아니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김창수(金昌洙) - 창암이라던 아이명을 버리고 이때부터 이 이름을 썼다 - 는 한 길이나 떠서 걸어 다니는 것을 보았노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 모양으로 있는 소리, 없는 소리 섞어 전하여서 내 명성이 황해도 일대 뿐만 아니라, 멀리 평안남북도에까지 현자하여서 당년에 내 밑에 연비가 무려 수천이나 달하였다. 당시 황평 양서 동학당 중에서 내가 나이가 어린 사람으로서 많은 연비를 가졌다 하여 나를 애기 접주라고 별명지었다. 접주라는 것은 한 접의 수령이란 말로서 위에서 내리는 직함이다.


이듬해엔 계사년(癸巳年) 가을에 해월 대도주로부터 오응선, 최유현 등에게 각기 연비의 성명 단자 - 명부 -를 보고하라는 경통(敬通 ; 공함이라는 뜻)이 왔으므로 황해도 내에서 직접 대도주를 찾아갈 인망 높은 도유(道儒) 열다섯 명을 뽑을 때에 나도 하나로 뽑혔다.


편발로는 불편하다 하여 성관하고 떠나게 되었다. 연비들이 내 노자를 모아 내고, 또 도주님께 올릴 예물로는 해주 향목도 특제로 맞추어 가지고 육로, 수로를 거쳐서 충청도 보은군(報恩郡) 장안(長安)이라는 해월 선생 계신 곳에 다다랐다. 동네에 쑥 들어서니 이 집에서도 저 집에서도,


'지기금지원위대강(至氣今至願爲大降)

시천주조화정(侍天主造化定)

영세불망만사지(永世不忘萬事知)'


하는 주문을 외는 소리가 들리고 또 일변으로는 해월 대도주를 찾아서 오는 무리, 일변으로는 뵈옵고 가는 무리가 연락부절하고 집이란 집은 어디나 사람으로 꽉꽉 찼었다. 우리는 접대인에게 우리 일행 15명의 명단을 부탁하여 대도주께 우리가 온 것을 통하였더니, 한 시간이나 지나서 황해도에서 온 도인을 부르신다는 통지가 왔다.


우리 일행 열다섯은 인도자를 따라서 해월 선생의 처소에 이르러 선생 앞에 한꺼번에 절을 드리니, 선생은 앉으신 채로 상체를 굽히고 두 손을 방바닥에 짚어 답배를 하시고 먼 길에 수고로이 왔다고 간단히 위로하는 말씀을 하셨다.


우리는 가지고 온 예물과 도인의 명단을 드리니, 선생은 소임을 부르셔서 처리하라고 명하셨다. 우리가 불원천리하고 온 뜻은 선생의 선풍도골도 뵈오려니와, 선생께 무슨 신통한 조화 줌치 - 신비한 재주- 나 받을까 함이었으나 그런 것은 없었다. 선생은 연기(年紀)가 육십은 되어 보이는데 구레나룻이 보기 좋게 났는데, 약간 검은 터럭이 보이고 얼굴은 여위었으나 맑은 맵시다.

 

동학(東學) 대륙 공주 서호와 서주 http://blog.daum.net/han0114/17045951 


우리집과 내 어릴 적(6) - 군사를 일으키다


큰 검은 갓을 쓰시고 동저고리 바람으로 일을 보고 계셨다. 방문 앞에 놓인 수철 화로의 약탕관에서 김이 나고 끓고 있는데 독삼탕 냄새가 났다. 선생이 잡수시는 것이라고 한다. 방 내외에는 여러 제자들이 옹위하고 있다.


그 중에도 가장 친근하게 모시는 이는 손응구(孫應九), 김연국(金演局), 박인호(朴寅浩) 같은 이들인데, 손응구는 장차 해월 선생의 후계자로 대도주가 될 의암 손병희(義菴 孫秉熙)로서 깨끗한 청년이었고, 김은 연기가 사십은 되어 보이는데 순실한 농부와 같았다. 이 두 사람은 다 해월 선생의 사위라고 들었다. 손씨는 유식해 보이고 '천을천수(天乙天水)'라고 쓴 부적을 보건대 글시 재주도 있는 모양이었다.


우리 일행이 해월 선생 앞에 있을 때에 놀라운 보고가 들어왔다. 전라도 고부(古阜)에서 전봉준(全琫準)이가 벌써 군사를 일으켰다는 것이었다. 뒤이어 또 후보(後報)가 들어왔다. 어떤 고을 원이 도유 - 동학도를 닦는 선비 - 의 전가족을 잡아 가두고 가산을 강탈하였다는 것이었다. 이 보고를 들으신 선생은 진노하는 낯빛을 띠고 순 경상도 사투리로,


"호랑이가 몰려 들어오면 가만히 앉아 죽을까, 참나무 몽둥이라도 들고 나서서 싸우지"


하시니 선생의 이 말씀이 곧 동원령이었다. 각지에서 와서 대령하던 대접주(大接主)들이 물끓듯 살기를 띠고 물러가기 시작하였다. 각각 제 지방에서 군사를 일으켜 싸우자는 것이었다.


우리 황해도에서 온 일행도 각각 접주라는 첩지를 받았다. 거기에는 두건 속에 '해월인(海月印)이라고 전자로 새긴 인이 찍혀 있었다. 선생께 하직하는 절을 하고 물러나와 잠시 속리산을 구경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들어섰다.


벌서 곳곳에 사람들이 떼를 지어 모이고 평복에 칼 찬 사람을 가끔 만나게 되어 있었다. 광혜원(廣惠院) 장거리에 오니 만 명이나 됨직한 동학군이 진을 치고 행인을 검사하고 있었다. 가관인 것은 평시에 동학당을 학대하던 양반들을 잡아다가 길가에 앉히고 짚신을 삼기는 것이었다.


우리 일행은 증거를 보이고 무사히 통과하였다. 부근 촌락에서 밥을 짐으로 지어 가지고 도소(都所), 이를테면 사령부로 날라오는 것을 무수히 길에서 만났다. 논에서 벼를 베던 농민들이 동학군이 물밀 듯 모여드는 것을 보고 낫을 버리고 달아나는 것도 보았다. 서울에 이르러 경군 - 서울 군사 - 이 삼남(三南)을 향하여서 행군하는 것과 만났다. 9월에 해주에 돌아왔다.


황해도 동학당들도 들먹들먹하고 있었다. 첫째로는 양반과 관리의 압박으로 도인들의 생활이 불안하였고, 둘째로는 삼남 -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 으로부터 향응하라는 경통이 빗발치듯 왔다. 그래서 15접주를 위시하여 여러 두목들이 회의한 결과 거사하기로 작정하고 제1회 총소집의 위치를 해주 죽천장(竹川場)으로 정하고 각처 도인에게 경통을 발하였다.


나는 팔봉산 밑에 산다고 하여서 접 이름을 팔봉이라고 짓고 푸른 갑사에 '팔봉도소(八峰都所)'라고 크게 쓴 기를 만들고 표어로는 '척양척왜(斥洋斥倭)' 넉 자를 써서 높이 달았다. 그리고는 서울서 토벌하러 내려올 경군과 왜병과 싸우기 위하여 연비 중에서 총기를 가진 이를 모아서 군대를 편제하기로 하였다.


나는 본시 산협장생이요, 또 상놈인 까닭에 산포수 연비가 많아서 다 모아본즉 총을 가진 군사가 7백 명이나 되어 무력으로는 누구의 접보다도 나았다. 인근 부호의 집에 간직하였던 야간의 호신용 무기도 모아 들였다.


최고 회의에서 작정한 전략으로는 우선 황해도의 수부인 해주성을 빼앗아 탐관오리와 왜놈을 다 잡아 죽이기로 하고 팔봉 접주 김창수로 선봉장을 삼는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내가 평소에 병서에 소양이 있고 또 내 부대에 산포수가 많은 것도 이유이겠지만 자기네가 앞장을 서서 총알받이가 되기 싫은 것이 아마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쾌히 선봉이 되기를 허락하고 다른 부대더러 뒤에 따라오라 하고 나는 '선봉(先鋒)'이라고 쓴 사령기를 들고 말을 타고 선두에 서서 해주성을 향하여 전진하여서 해주성 서문 밖 선녀산에 진을 치고 총공격령이 내리기를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었다.


이윽고 총지휘부에서 총공격령이 내리고 작전 계획은 선봉장인 나에게 일임한다는 명령이 왔다. 나는 이렇게 계획을 세워서 본부에 아뢰고 곧 작전을 개시하였다. 지금 성내에 아직 경군은 도착하지 아니하고 오합지중(烏合之衆)으로 된 수성군(守城軍) 2백 명과 왜병 일곱 명이 있을 뿐이니 선발대로 하여금 먼저 남문을 엄습케 하여 수성군의 힘을 그리로 끌게 한 후에 나는 서문을 깨뜨릴 터인즉 총소(總所) - 도소에 대한 말이니 총사령부라는 뜻 -에서 형세를 보아서 허약한 편을 도우라는 것이었다. 총소에서는 내 계획을 채용하여 한 부대를 남문으로 향하여 행진케 하였다.


이때에 수명의 왜병이 성 위에 올라 대여섯 방이나 시험 사격을 하는 바람에 남문으로 향하던 선발대는 도망하기를 시작하였다. 왜병은 이것을 보고 돌아와서 달아나는 무리에게 총을 연발하였다. 나는 이에 전군을 지휘하여서 서문을 향하여 맹렬한 공격을 개시하였는데 돌연 총소에서 퇴각하라는 명령이 내리고 우리 선봉대는 머리도 돌리기 전에 뒤에 따르던 군사가 산으로 들로 달아나는 것이 보였다. 한 군사를 붙들어 퇴각하는 까닭을 물으니 남문 밖에 도유 서너 명이 총에 맞아 죽은 까닭이라고 한다.


이렇게 되니 선봉대만 혼자 머물 수도 없어서 비교적 질서있게 퇴각하여 해주에서 서쪽으로 80리 되는 회학동(回鶴東) 곽감역(郭監役) 댁에 유진하기로 하였다. 무장한 군사는 축이 안 나고 거의 전부 따라와 있는 것이 대견하였다.


나는 이번의 실패에 분개하여서 잘 훈련된 군대를 만들기에 힘을 다하기로 하였다. 동학 도유거나 아니거나 간에 장교의 경험이 있는 자는 비사후폐(秘事厚幣)로 초빙하여다가 군사를 훈련하는 교관으로 삼았다. 총쏘기는 말할 것도 없고 행보하는 법이며 체조며 온갖 조련을 다하였다. 좋은 군대를 만드는 것이 싸움에 이기는 비결이라고 믿은 것이었다.


하루는 어떤 사람 둘이 내게 면회를 청하였다. 구월산 밑에 사는 정덕현(鄭德鉉), 우종서(禹鍾瑞)라는 사람들이었다. 찾아온 까닭을 물었더니 그 대답이 놀라웠다. 동학군이란 한 놈도 쓸 것이 없는데 들은즉 그대가 좀 낫단 말을 듣고 한 번 보러 왔다는 것이다. 옆에 있던 내 부하들이 두 사람의 말이 심히 불공함을 분개하였다. 나는 도리어 부하를 책망하여 밖으로 내어보내고 나서 이상한 손님과 셋이서 마주앉았다.


우리집과 내 어릴 적(7) - 동학 접주 이름을 버리다


나는 공손히 두 사람을 향하여 '선생'이라고 존칭하고, 이처럼 찾아와 주셨으니 무슨 좋은 계책을 가르쳐 주시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그런즉 정씨가 더욱 교만한 태도로 말하기를, 비록 계책을 말하기로니 네가 알아듣기나 할까, 실행할 자격이 없으리라고 비웃은 뒤에, 더욱 호기 있는 어성으로, 동학 접주나 하는 자들은 어줍지 않게 호기가 충천하여 선비를 초개(草芥)와 같이 보니 너도 그런 사람이 아니냐고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더욱 공손한 태도로,


"이 접주는 다른 접주와 다를는지 선생께서 한 번 가르쳐 보신 뒤에야 알 것이 아닙니까?"


하였다. 그들은 둘이 다 니보다 십년장은 될 것 같았다.


그제야 정씨가 흔연히 내 손을 잡으며 계책을 말하였다. 그것은 이러하였다.


(1) 군기를 정숙히 하되 비록 병졸을 대하더라도 하대하지 아니하고 경어를 쓸 것.

(2) 인심을 얻을 것이니 동학군이 총을 가지고 민가로 다니며 집곡이니 집전이니 하고 강도적 행위를 하는 것을 엄금할 것.

(3) 초현(招賢)이니 어진 이를 구하는 글을 돌려 널리 좋은 사람을 모을 것.

(4) 전군을 구월산에 모으고 훈련할 것.

(5) 재령, 신천 두 고을에 왜(倭)가 사서 쌓아 둔 쌀 2천 석을 몰수하여 구월산 패엽사(貝葉寺)에 쌓아 두고 군량으로 쓸 것.


나는 곧 이 계획을 실시하기로 하고 즉시 전군을 집합장에 모아 정씨를 모주(謀主), 우씨를 종사(從事)라고 공포하고 전군을 지휘하여 두 사람에게 최경례(最敬禮)를 시켰다. 그러고는 구월산으로 진을 옮길 준비를 하던 차에 어떤 날 밤에 신천 청계동 안 진사(安 進士)로부터 밀사가 왔다. 안 진사의 이름은 태훈(泰勳)이니 그의 맏아들 중근(重根)은 나중에 이등박문을 죽인 안중근이다. 그는 글 잘하고 글 잘 쓰기로 이름이 서울에까지 떨치고 또 지략도 있어 당시 조정의 대관들까지도 그를 무섭게 대우하였다.


동학당이 일어나매 안 진사는 이를 토벌하기 위하여 그의 고향인 청계동 자택에 의려소(義旅所)를 두고 그의 자제들로 하여금 모두 의병이 되게 하고 포수 3백 명을 모집하여서 벌써 신천 지경 안에 있는 동학당을 토벌하기에 많은 성공을 하여서 각 접이 다 이를 두려워하고 경계하던 터이었다.


나는 정 모주로 하여금 이 밀사를 만나게 하였다. 그의 보고에 의하면 나의 본진이 있는 회학동과 안 진사의 청계동이 불과 20리 거리이니 만일 내가 무모하게 청계동을 치려다가 패하면 내 생명과 명성을 보장하기 어려울 것이니 그러하면 좋은 인잴ㄹ 하나 잃어버리게 될 것인즉 안 진사가 나를 위하는 호의로 이 밀사를 보냈었다는 것이었다. 이에 곧 나는 참모 회의를 열어서 의논한 결과 저편에서 나를 치지 아니하면 나도 저편을 치지 아니할 것, 피차에 어려운 지경에 빠질 경우에는 서로 도울 것이라는 밀약이 성립되었다.


예정대로 나의 군사는 구월산으로 집결하였다. 재령, 신천에 있던 쌀도 패엽사로 옮겨왔다. 한 섬을 져 오면 서 말을 준다고 하였더니 당일로 다 옮겨졌다. 날마다 군사 훈련도 여행(勵行)하였다. 또 인근 각동에 훈령하여 동학당이라고 자칭하고 민간에 행패하는 자를 적발하여서 엄벌하였더니 며칠이 안 지나서 질서가 회복되고 백성이 안도하였다.


또 초현문을 발표하여 널리 인재도 수탐하였다. 송종호(宋宗鎬), 허곤(許坤) 같은 유식한 사람을 얻었다. 패엽사에는 하은당(荷隱堂)이라는 도승이 있어서 수백 명 남녀 승도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나는 가끔 그의 법설을 들었다.


이러는 동안에 경군왜병해주를 점령하고 옹진, 강령 등지를 평정하고 학령을 넘어온다는 기별이 들렸다. 그들의 목표가 구월산일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화근은 경군이나 왜병에 있지 아니하고 나와 같은 동학당인 이동엽(李東燁)의 군사에 있었다.


이동엽은 구월산 부근 일대에서 가장 큰 세력을 잡은 접주로서 그의 부하는 나의 본진 가까이까지 침입하여 노략질을 함부로 하였다. 우리 군에서는 사정없이 그들을 체포하여 처벌하였기 때문에 피차간에 반목이 깊어진데다가 우리 군사들 중에 군율에 의한 형벌을 받고 앙심을 품은 자와 노략질을 마음대로 하고 싶은 자들이 이동엽의 군대로 달아나는 일이 날로 늘었다.


이리하여 이동엽의 세력은 날로 커지고 내 세력은 날로 줄었다. 이에 나는 최고 회의를 열고 의논한 결과 나는 동학 접주인 칭호를 버리기로 하고 군대를 허곤에게 맡기기로 하였다. 이는 나의 병권을 빼앗으려 함이 아니오, 나를 살려내고자 하는 계책이었다. 이에 허곤은 송종호로 하여금 평양에 있는 장호민(張好民)에게 보내는 소개 편지를 가지고 평양으로 떠나게 하였으니 이것은 황주 병사의 양해를 얻어서 일을 정치적으로 해결하려 함이었다.


이때는 내 나이가 열 아홉, 갑오년(甲午年) 섣달이었다. 나는 몸에 열이 나고 두통이 심하여서 자리에 눕게 되었다. 하은당 대사는 나를 그의 사처인 조실에 혼자 있게 하고 몸소 병구완을 하였다. 수일 만에 내 병이 홍역인 것이 판명되어서 하은당은,


"홍역도 못한 대장이로군"


하고 웃었다. 그러고는 홍역을 다스린 경험이 있는 늙은 승수자(承受者) 한 분을 가려 내 조리를 맡게 하였다.


이렇게 병석에 누워 있노라니 하루는 이동엽이 전군을 이끌고 패엽사로 쳐들어온다는 급보가 있고 뒤이어 어지러이 총소리가 나며 순식간에 절 경내에는 양군의 육박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원래 사기가 저상한데다가 장수를 잃은 나의 군사들은 불의의 습격을 받아서 일패도지(一敗塗地)하고 나의 본진은 적의 제압한 바 되고 말았다. 나의 군사들은 보기에도 흉하게 도망하여 흩어지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이동엽의 호령이 들렸다.


"김 접주에게 손을 대는 자는 사형(死刑)에 처한다. 영장 이종선(領將 李鍾善) 이놈만 잡아 죽여라." 이 말을 듣고 나는 이불을 차고 마루 끝에 뛰어 나가서,


"이종선은 내 명령을 받아서 무슨 일이나 한 사람이니 만일 이종선이가 죽을 죄를 지었거든 나를 죽여라!" 하고 외쳤다.


이동엽이 부하에게 명하여서 나를 꼭 껴안아서 수족을 놀리지 못하게 하고 이종선만을 끌고 나가더니 이윽고 동구에서 총소리가 들리자, 이동엽의 부하는 다 물러가고 말았다.


이종선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나는 동구로 달려 내려갔다. 과연 그는 총을 맞아 쓰러지고 그의 몸에 입은 옷은 아직도 불에 타고 있었다. 나는 그의 머리를 안고 통곡하다가 내 저고리를 벗어 그의 머리를 싸주었다. 이 저고리는 내가 남의 웃사람이 되었다 하여 어머니께서 지어 보내주신 평생 처음 입어보는 명주 저고리였다. 동민들은 백설 위에서 내가 벌거벗고 통곡하고 앉았는 것을 보고 의복을 가져다가 입혀 주었다. 나는 동민들을 지휘하여 이종선의 시체를 매장하였다.


우리 집과 내 어릴 적(8) - 청계동 안 진사의 집으로


이종선은 함경도 정평 사람으로서 장사차로 황해도에 와서 살던 사람이다. 총사냥을 잘하고 비록 무식하나 사람을 거느리는 재주가 있으므로 내가 그를 화포령장(火砲領將)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종선을 매장한 나는 패엽사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부상동 정덕현 집으로 갔다. 내게서 그 동안 지낸 일을 들은 정씨는 태연한 태도로,


"이제 형은 할 일 다한 사람이니 편안히 쉬고서 유람이나 떠나자"


하고 내가 이종선의 원수 갚을 말까지도 눌러 버리고 말았다. 이동엽이가 패엽사를 친 것은 제 손으로 저를 친 것과 마찬가지다, 경군과 왜병이 이동엽을 치기를 재촉한 것이라고 하던 정씨의 말이 그대로 맞아서 정씨와 내가 몽금포 근처에 숨어 있는 동안에 이동엽을 잡혀가서 사형을 당하였다. 구월산의 내 군사와 이동엽의 군사가 소탕되니 황해도의 동학당은 전멸이 된 셈이었다.


몽금포 근동에서 석 달을 숨어 있다가 나는 정씨와 작반(作伴)하여 텃골에 부모를 찾아뵈옵고 정씨의 의견을 좇아 청계동 안 진사를 찾아 몸을 의탁하기로 하였다. 나는 패군지장으로 일찍 적군이던 안 진사의 밑에 들어가 포로의 대우를 받을 것을 불쾌히 생각하였으나 정씨는 안 진사의 위인이 그렇지 아니하여 심히 인재를 사랑한다는 말과 전에 안 진사가 밀사를 보낸 것도 이런 경우를 당하면 자기에게 오라는 듯이라고 역설하므로 나는 그 말대로 한 것이었다.


텃골 본향에서 부모님을 뵈온 이튿날 정씨와 나는 곧 천봉산(千峰山)을 넘어 청계동에 다다랐다. 청계동은 사면이 험준하고 수려한 봉란으로 에워 있고 동네에는 띄엄띄엄 40, 50호의 인가가 있으며, 동구 앞으로 한 줄기 개울이 흐르고 그곳 바위 위에는 '청계동천(淸溪洞天)'이라는 안 진사의 자필 각자가 있었다. 동구를 막는 듯이 작은 봉우리 하나가 있는데 그 위에는 '포대'가 있고 길어귀에 파수병이 있어서 우리를 보고 누구냐고 물었다.


명함을 드리고 얼마 있노라니 의려장(義旅長)의 허가가 있다 하여 한 군사가 우리를 안내하여 의려소인 안 진사 댁으로 갔다. 문전에는 연당이 있고, 그 가운데는 작은 정자가 있는데 이것은 안 진사 6 형제가 평일에 술을 마시고 시를 읊는 곳이라고 한다. 대청 벽상에는 의려소 석 자를 횡액으로 써 붙였다. 안 진사는 우리를 정청에 영접하여 수인사를 한 후에 제일 첫 말이,


"김 석사가 패엽사에서 위험을 면하신 줄을 알았으나 그 후 사람을 놓아서 수탐하여도 계신 곳을 몰라서 우려하였더니 오늘 이처럼 찾아주시니 감사하외다" 하시고 다시,

"들으니 구경(俱慶) 하라 하시던데 양위 분은 안접하실 곳이 있으시오?" 하고 내 부모에 관한 것을 물으신다.


내가 별로 안접하실 곳이 없는 뜻을 말하였더니 안 진사는 즉시로 오일선(吳日善)에게 총 멘 군사 30명을 맡기며,


"오늘 안으로 텃골로 가서 김 석사 양위를 뫼셔 오되, 근동에 있는 우마를 징벌하여 그 댁 가산 전부를 반이해 오렷다" 하고 영을 내렸다. 이리하여 우리 집이 청계동에 우접하게 되니 내가 스무 살 되던 을미년 2월일이었다.


내가 청계동에 머문 것은 불과 4,5 삭이지마는 이 동안은 내게는 심히 중요한 시기였다. 그것은 첫째로는 내가 안 진사과 같은 큰 인격에 접한 것이요, 둘째로는 고 산림(高山林)과 같은 의기 있는 학자의 훈도를 받게 된 것이었다.


안 진사는 해주 부중에 10여 대나 살아오던 구가의 자제였다. 그 조부 인수(仁壽)가 진해 현감을 지내고는 세상이 차차 어지러워짐을 보고 세상에서 숨을 뜻을 두어 많은 재산을 가난한 일가에게 나누어 주고 약 3백 석 추수하는 재산을 가지고 청계동으로 들어오니 이는 그곳이 산천이 수려함과 족히 피난처가 될 만한 것을 취함이었다. 이때는 장손인 중근이 두 살 적이었다.


안 진사는 과거를 하려고 서울 김종한(金宗漢)의 문객이 되어 다년 유경(留京)하다가 진사가 되고는 벼슬할 뜻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와서 형제 여섯 사람이 술과 시로 세월을 보내고 뜻 있는 벗을 사귀이기로 낙을 삼고 있었다. 안씨 6 형제가 다 문장 재사(文章才士)라 할 만하지마는 그 중에서도 셋째인 안 진사가 눈에 정기가 있어 사람을 누르는 힘이 있고, 기상이 뇌락(磊落)하여 비록 조정의 대관이라도 그와 면대하면 자연 경외(敬畏)하는 마음이 일어났다.


내가 보기에는 그는 퍽 소탈하여서 비록 무식한 하류들에게까지도 조금도 교만한 빛이 없이 친절하고 정녕하여서 상류나 하류나 다 그에게 호감을 가졌었다. 얼굴이 매우 청수하나 술이 과하여 코 끝이 붉은 것이 흠이었다. 그는 율을 잘하여서 당시에도 그의 시가 많이 전송되었고, 내게도 그가 득의의 작을 흥 있게 읊어주는 일이 있었다. 그는 '황석공소서(黃石公素書)'를 자필로 써서 벽장문에 붙이고 취흥이 나면 소리를 높여서 그것을 낭독하였다.


그 때에 안 진사의 맏아들 중근은 열세 살로서 상투를 짜고 있었는데 머리를 자주 수건으로 질끈 동이고 돔방총이라는 짧은 총을 메고 날마다 사냥을 일삼고 있어 보기에도 영기가 발발하고 청계동 군사들 중에 사격술이 제일이어서 짐승이나 새나 그가 겨눈 것은 놓치는 일이 없기로 유명하였다.


그의 계부 태건과 함께 언제나 함께 사냥을 다니고 있었다. 그들이 잡아오는 노루와 고라니로는 군사들을 먹이고 또 진사 6 형제의 주연의 안주를 삼았다. 진사의 둘째 아들 정근(定根)과 셋째 공근(恭根)은 다 붉은 두루마기를 입고 머리를 땋아 늘인 도련님들로 글을 읽고 있었는데 진사는 이 두 아들에게 대하여서는 글을 아니 읽는다고 걱정도 하였으나 중근에 대하여서는 아무 간섭도 아니하는 모양이었다.


고 산림의 이름은 능선(能善)인데 그는 해주 서문 밖 비동에 세거하던 사람으로서 중암 조중교(重菴 趙重敎)의 문인이요, 의암 유인석(柳麟錫)과 동문으로서 해서에서는 행검으로 굴지되는 학자였다. 이도 안 진사의 초청으로 이 청계동에 들어와 살고 있었다.


내가 고 산림을 처음 대한 것은 안 진사의 사랑에서여니와 그는 날더러 자기의 사랑방에 놀러 오라는 말을 하므로 나는 크게 감복하여서 이튿날 그의 집에 찾아갔다. 선생은 늙으신 낯에 기쁨을 띠시고 친절하게 나를 영접하시고 아드님 원명(元明)을 불러 나와 상면케 하였다. 원명은 나이 서른 살쯤 되어 보이는데 자품은 명민한 듯하나 크고 넓음이 그 부친의 뒤를 이을 것 같지는 아니하였다. 원명에게는 15, 16세나 된 맏딸이 있었다.


우리 집과 내 어릴 적(9) - 특별한 만남


고 선생이 거처하시는 사랑은 작은 방 하나인데 사람들의 좌우명과 선생 자신의 심득 같은 것을 둘러 붙였으며, 선생은 가만히 꿇어앉아서 마음을 잡는 공부를 하시며 간간이 '손무자' '삼략' 같은 병서도 읽으셨다.


고 선생은 날더러, 내가 매일 안 진사 집 사랑에 가서 놀더라도 정신 수양에는 효과가 적을 듯하니 매일 선생의 사랑에 와서 같이 세상사도 말하고 학문도 토론함이 어떠냐고 하였다. 나는 이러한 대 선생이 내게 대하여 이처럼 특별한 지우(知遇)를 주시는 것을 눈물겹게 황송하고 감사하게 생각하고 나는 좋은 마음 가진 사람이 되려던 소원을 말씀드리고 모든 것을 고 선생의 지도에 맡긴다는 성의를 표하였다.


과거에 낙심하고 관상에 낙심하고 동학에 실패한 자포자기에 가까운 심리를 가지게 되었었다. 나 같은 것도 고 선생과 같으신 큰 학자의 지도로 한 사람 구실을 할 수가 있을까? 스스로 의심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이런 말씀을 아뢰었더니 고 선생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이 저를 알기도 쉬운 일이 아니어든 하물며 남의 일을 어찌 알랴. 그러므로 내가 그대의 장래를 판단할 힘은 없으나 내가 한 가지 그대에게 확실히 말할 것이 있으니 그것은 성현을 목표로 하고 성현의 자취를 밟으라는 것이다. 이렇게 힘써 가노라면 성현의 지경에 달하는 자도 있고 못 미치는 자도 있거니와 이왕 그대가 마음 좋은 사람이 될 뜻을 가졌으니 몇 번 길을 잘못 들더라도 본심만 변치 말고 고치고 또 고치고 나아가고 또 나아가면 목적지에 달할 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니 괴로워하지 말고 행하기만 힘쓰라."


이로부터 나는 매일 고 선생 사랑에 갔다. 선생은 내게 고금의 위인을 비평하여 주고 당신의 연구하여 깨달은 바를 가르쳐 주고 화서아언(華西雅言)이며, '주자백선(朱子百選)'에서 긴요한 절구를 보여 주셨다.


선생이 특히 역설하시는 바는 의리에 관해서였다. 비록 뛰어난 재능이 있더라도 의리에서 벗어나면 그 재능이 도리어 화단이 된다고 하셨다.


선생은 경서를 차례로 가르치는 방법을 취하지 아니하고 내 정신과 재질을 보셔서 뚫어진 곳은 깁고 빈 구석을 채워주는 구전심수(口傳心授)의 첩경을 택하심이었다. 선생은 내게 결단력이 부족하다고 보셨음인지, 아무리 밝히 보고 잘 판단하였더라도 실행할 과단력이 없으면 다 쓸데없단 말씀을 하시고,


'나무가지를 잡아도 발에는 힘주지 않고

언덕에 매달려도 손에 힘주지 않는 것이 장부이다

(得樹樊枝不足奇 懸崖撒手丈夫兒)' 라는 글귀를 힘있게 설명하셨다.


가끔 안 진사가 고 선생을 찾아오셔서 두 분이 고금의 일을 강론하심을 옆에서 듣는 것은 참으로 비할 데 없이 취미 있는 일이었다. 나는 가끔 고 선생 댁에서 놀다가 저녁밥을 선생과 같이 먹고 밤이 깊고 인적이 고요할 때까지 국사를 논하는 일이 있었다.


고 선생은 이런 말씀도 하셨다. 예로부터 천하에 흥하여 보지 아니한 나라도 없고 망해 보지 아니한 나라도 없다. 그런데 나라가 망하는 데도 갸륵하게 망하는 것이 있고 더럽게 망하는 것이 있다.


어느 나라 국민이 의로써 싸우다가 힘이 다하여 망하는 것은 거룩하게 망하는 것이요, 그와 달라서 백성이 여러 패로 갈려서 한 편은 이 나라에 붙고 한 편은 저 나라에 붙어서 외국에는 아첨하고 제 동포와는 싸워서 망하는 것은 더럽게 망하는 것이다.


이제 왜의 세력이 전국에 충만하여 궐내에까지 침입하여서 대신도 저의 마음대로 내고들이게 되었으니 우리나라가 제2 왜국이 아니고 무엇인가. 만고에 망하지 아니한 나라가 없고 천하에 죽지 아니한 사람이 있던가.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일사보국(一死報國)의 일건사가 남아 있을 뿐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선생은 비감한 낯으로 나를 보시고 나는 비분을 못 이겨서 울었다.


망하는 우리나라를 망하지 않도록 붙들 도리는 없는가 하는 내 물음에 대하여서는 선생은 청국과 서로 맺는 것이 좋다 하시고 그 이유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청국이 갑오년 싸움에 진 원수를 반드시 갚으려 할 것이니 우리 중에서 상당한 사람이 그 나라에 가서 그 국정도 조사하고 그 나라 인물과도 교의를 맺어 두었다가 후일에 기회가 오거든 서로 응할 준비를 하여 두는 것이 필요하다.


나는 선생의 이 말씀에 감동하여 청국으로 갈 마음이 일어났다. 그러나 나와 같이 어린 것이 하나 가기로 무슨 일이 되랴 하는 뜻을 말씀드린즉 선생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책망하시고 누구나 제가 옳다고 믿는 것을 혼자만이라도 실행하는 것이 필요하니 저마다 남이 하기를 바랄 것이 아니라 저마다 제 일을 하면 자연 그 일을 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이라, 어떤 사람은 정계에, 또 어떤 사람은 학계나 상계에, 이처럼 제가 합당한 방면으로 활동하여서 그 결과가 모이면 큰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하셨다.


이 말씀에 나는 청국으로 갈 결심을 하고 그 뜻을 고 선생께 아뢰었다. 선생은 크게 기뻐하셔서 내가 떠난 뒤에는 내 부모까지도 염려 말라 하셨다.


나는 의리로 보아 이 뜻을 안 진사에게 통함이 옳을까 하였으나 고 선생은 이에 반대하였다.


안 진사가 천주학(天主學)을 믿을 의향이 있는 모양인데 만일 그렇다면 이는 양이(洋夷 ; 서양 오랑캐)를 의뢰하려 함이니 대의에 어그러지는 일인즉 지금 이런 큰일을 의논할 수 없다. 그러나 안 진사는 확실히 인재니 내가 청국을 유력한 뒤에 좋은 일이 있을 때에 서로 의논하는 것도 늦지 아니하니 이번에는 말없이 떠나라는 것이었다.


나는 무엇이나 고 선생의 지시대로 하기로 결심하고 먼길을 떠날 준비를 하였다.

<우리 집과 내 어릴 적> 끝


기구한 젊은 때(1) - 참빗장수로 변장하고


내가 청국을 향하여 방랑의 길을 떠나기로 작정한 바로 전날, 나는 넌지시 안 진사를 마지막으로 한 번 보고 속으로만이라도 하직하는 정을 표하려고 안 진사 집 사랑에를 갔다가 참빗장수 한 사람을 만났다. 그 언어 동작이 아무리 보아도 예사 사람이 아닌 듯하기로 인사를 청한즉 그는 전라도 남원 귓골 사는 김형진(金亨鎭)이란 사람이요, 나와 같이 안동 김씨요, 연치는 나보다 8,9세 위였다. 나는 참빗을 사겠노라고 그를 내 집으로 데리고 와서 하룻밤을 같이 자면서 그의 인물을 떠보았다.


과연 그는 보통 참빗장수가 아니요, 안 진사가 당시에 대문장, 대영웅이라는 말을 듣고 한 번 찾아보러 일부러 떠나온 것이라고 한다. 인격이 그리 뛰어나거나 학식이 도저한 인물은 못되나 시국에 대하여서 불평을 품고 무슨 일이나 하여 보자는 결심이 있어 보였다. 이튿날 그를 데리고 고 선생을 찾아 선생에게 인물 감정을 청하였더니 선생은, 그가 비록 주뇌가 될 인물은 못되나 남을 도와서 일할 만한 소질은 있어 보인다는 판단을 내리셨다. 이에 나는 김씨를 내 길동무로 삼기로 하고 집에서 먹이던 말 한 필을 팔아서 여비를 만들어 가지고 청국에 가는 길을 떠났다.


우리의 계획은 백두산을 보고 동삼성 - 만주 -을 돌아서 북경으로 가자는 것이었다. 평양까지는 예사대로 가서 거기서부터는 나도 김형진 모양으로 참빗과 황화장수로 차리기로 하고 참빗과 붓, 먹과 기타 산읍에서 팔릴 만한 물건을 사서 둘이서 한 짐씩 걸머졌다. 그리고 평양을 떠나서 을밀대모란봉을 잠시 구경하고 강동, 양덕, 맹산을 거쳐 함경도로 넘어서서 고원, 정평을 지나 함흥 감영에 도착하였다.


강동 어느 장거리에서 하룻밤을 자다가 칠십 늙은이 주정장이한테 까닭모를 매를 얻어맞고 한신(韓信)이 회음(淮陰)에서 어떤 젊은 놈에게 봉변당하던 것을 이야기하고 웃은 일이 있었다. 고원 함관령의 이태조가 말갈을 쳐 물린 승전비를 보고 함흥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길다란 남대천 나무다리와 또 네 가지 큰 것 중의 하나라는 장승을 보았다.


이 장승은 큰 나무에 사람의 얼굴을 새긴 것인데 머리에는 사모를 쓰고 얼굴에는 주홍칠을 하고 눈을 부릅뜨고 있는 것이 매우 위엄이 있었다. 이런 것 넷이 둘씩둘씩 남대천 다리 머리에 갈라 서 있었다. 옛날에는 장승이란 것이 큰 길목에는 어디나 서 있었으나 함흥의 장승이 그 중 크기로 유명하여서 경주의 인경은진의 돌미륵연산의 쇠가마와 함께 사대물(四大物)이라고 꼽히던 것이었다.


함흥의 낙민루(樂民樓)는 이태조가 세운 것으로 아직도 성하게 남아 있었다.


흥원, 신포에서 명태잡이하는 것을 보고, 어떤 튼튼한 아낙네가 광주리에 꽃게 한 마리를 담아서 힘껏 이고 가는데 게의 다리 한 개가 내 팔뚝보다도 굵은 것을 보고 놀랐다.


함경도에 들어서서 가장 감복한 것은 교육 제도가 황해도나 평안도보다 발달된 것이었다. 아무리 초가집만 있는 가난한 동네에도 서재와 도청은 기와집이었다. 홍원 지경 어느 서재에는 선생이 세 사람이 있어서 학과를 고등, 중등, 초등으로 나눠서 각각 한 반씩 담당하여 가르치는 것을 보았다.


이것은 옛날 서당으로서는 드문 일이었다. 서당 대청 좌우에는 북과 종을 달고 북을 치면 글 읽기를 시작하고 종을 취면 쉬었다. 더구나 북청함경도 중에서도 글을 숭상하는 고을이어서 내가 그곳을 지날 때에도 살아 있는 진사가 30여 명이요, 대과에 급제한 조관이 일곱이나 있었다. 가위 문향(文鄕)이라고 나는 크게 탄복하였다.


도청이란 것은 동네에서 공용으로 쓰는 집이다. 여염집보다 크기도 하고 화려도 하다. 사람들은 밤이면 여기 모여서 동네일을 의논도 하고 새끼 꼬기, 신 삼기도 하고, 이야기책도 듣고, 놀기도 하고, 또 동네 안에 뉘 집에나 손님이 오면 집에서 식사만 대접하고 잠은 도청에서 자게 하니 이를테면 공동 사랑이요, 여관이요, 공회당이다. 만일 돈없는 나그네가 오면 도청 예산중에서 식사를 공궤(供饋)하기로 되어 있다. 모두 본받을 미풍이라고 생각하였다.


우리가 단천 마운령을 넘어서 갑산읍에 도착한 것이 을미년 7월이었다. 여기 와서 놀란 것은 기와를 인 관청을 제외하고는 집집마다 지붕에 풀이 무성하여서 마치 사람이 안사는 빈터와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뒤에 알고 보니, 이것은 지붕을 덮은 봇껍질을 흙덩이로 눌러 놓으면 거기 풀이 무성하여서 아무리 악수가 퍼부어도 흙이 씻기지 아니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봇껍질은 희고 빤빤하고 단단하여서 기와보다도 오래 간다 하며, 사람이 죽어 봇껍질로 싸서 묻으면 만 년이 가도 해골이 흩어지는 일이 없다고 한다.


혜산진(惠山鎭)에 이르니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만주를 바라보는 곳이라 건너편 중국 사람의 집에 개의 짓는 소리가 들렸다. 압록강도 여기서는 걸어서 건널 만하였다.


혜산진에 있는 제천당(祭天堂)우리나라 산맥의 조종이 되는 백두산 밑에 있어 예로부터 나라에서 재관을 보내어 하늘과 백두산 신께 제사를 드리는 곳이다. 그 주변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눈 쌓인 유월의 백두산에 운무가 감돌고

만고에 끊이지 않고 흐르는 압록강이 또 용솟음친다.

(六月雪色山白頭而雲霧

萬古流聲水鴨綠而 湧)


우리는 백두산 가는 길을 물어가면서 서대령을 넘어 삼수, 장진, 후창을 거쳐 자성중강을 건너서 중국 땅인 마울산(帽兒山)에 다다랐다. 지나온 길은 무비 험산 준령이요, 어떤 곳은 70,80리나 무인지경도 있어서 밥을 싸 가지고 간 적도 있었다. 산은 심히 험하나 맹수는 별로 없었고, 수풀이 깊어서 지척을 분별치 못할 데가 많았다.


나무 하나를 벤 그루 위에 7,8명이 모여 앉아서 밥을 먹을 만할 것도 드물지 않다고 한다. 내가 본 것 중에도 통나무로 곡식 넣을 통을 파느라고 장정 하나가 그 통 속에 들어가서 도끼질을 하는 것이 있었다. 장관인 것은 이 산봉우리에 섰던 나무가 쓰러져 저 산봉우리에 걸쳐 있는 것을 우리는 다리 삼아서 건너간 일이 있었다.


이 지경은 인심이 대단히 순후하고, 먹을 것도 넉넉하여서 나그네가 오면 극히 반가와하여 얼마든지 묵여 보내었다. 곡식은 대개 귀밀과 감자요, 산 개천에는 이면수라는 물고기가 많이 나는데 대단히 맛이 좋았다. 옷감으로 짐승의 가죽을 쓰는 것이 퍽이나 원시적이었다. 삼수 읍내에는 민가가 겨우 30 호밖에 없었다.


기구한 젊은 때(2) - 만주의 동포들


마울산에서 서북으로 노인치(老人峙)라는 영을 넘고 또 넘어 서대령으로 가는 길에서 우리는 백 리에 두어 사람이나 우리 동포를 만났는데, 대부분 금점꾼이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우리더러 백두산 가는 것이 향마적 때문에 위험하니 가지 말라고 하므로 우리는 유감이나마 백두산 참배를 중지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방향을 돌려 만주 구경이나 하리라 하고 통화(通化)로 갔다.


통화는 압록강 연변의 다른 현성과 마찬가지로 설립된 지 얼마 안 되어서 관사의 성루의 서까래가 아직도 흰 빛을 잃지 아니하였다. 성내에 인가가 모두 5백 호라는데, 그 중에는 우리나라 사람이 한 집 있었다. 남자는 변발을 하여서 중국 사람의 모양을 하고 현청의 통사로 있다는데, 그의 처자들은 우리 옷을 입고 있었다. 거기서 10리쯤 가서 심 생원이라는 동포가 산다 하기로 일부러 찾아갔더니, 정신없이 아편만 먹는 사람이었다.


만주로 돌아다니는 중에 가장 미운 것은 호통사였다. 몇 마디 한어(漢語)를 배워 가지고는 불쌍한 동포의 등을 긁고 피를 빨아먹는 것이었다. 우리 동포들은 갑오년 난리를 피하여 생소한 이 땅에 건너와서 중국 사람이 살 수가 없어서 내버린 험한 산골을 택하여 화전을 일구어서 조나 강냉이를 지어 근근히 연명하고 있었다. 호통사라는 놈들은 중국 사람들에게 붙어서 무리한 핑계를 만들어 가지고 혹은 동포의 전곡을 빼앗고, 혹은 부녀의 정조를 유린하는 것이었다.


한 곳에를 가노라니 어떤 중국인의 집에 한복을 한 처녀가 있기에 이웃 사람에게 물어본 즉, 그 역시 호통사의 농간으로 그 부모의 빚값으로 중국인의 집에 끌려온 것이라고 하였다. 관전(寬甸), 임강(臨江), 환인(桓仁) 어디를 가도 호통사의 폐해는 마찬가지였다.


어디서나 토지는 비옥하여서 한 사람이 지으면 열 사람이 먹을 만하다. 오직 귀한 것은 소금이어서 이것은 의주로부터 배로 물을 거슬러 올라와서 사람의 등으로 져 나르는 것이라 한다. 동네들의 인심은 참으로 순후하여 본국 사람이 오면 '앞대나그네'가 왔다 하여 혈속과 같이 반가와하고, 집집이 다투어서 맛있는 것을 대접하려고 애를 쓰고 남녀노소가 모여와서 본국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졸랐다.


그들의 대개는 일청 전쟁에 피난간 이들이지마는 간혹 본국서 죄를 짓고 도망해 온 사람도 있었다. 그 중에는 민요에 장두가 되었던 호걸도 있고, 공금을 흠포한 관속도 있었다.


집안(輯安)의 광개토대왕비는 아직 몰랐던 때라 보지 못한 것이 유감이어니와, 관전의 임경업 장군의 비각을 본 것이 기뻤다.(문구로보았을때 지역위치 편집흔적) '삼국충신임경업지비(三國忠臣林慶業之碑)'라고 비면에 새겨 있는데, 이 지방 중국 사람들은 병이 나면 이 비각에 제사를 드리는 풍속이 있다고 한다.


이 지방으로 방랑하는 동안에 김이언(金利彦)이란 사람이 청국의 도움을 받아서 일본에 반항할 의병을 꾸미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사람들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김이언은 벽동 사람으로서 기운이 있고 글도 잘하여 심양 자사(瀋陽刺史)에게서 말 한 필과 '삼국지' 한 벌을 상급으로 받았기 때문에 중국 사람들에게도 대접을 받는다고 하였다. 우리는 이 사람을 찾아보기로 작정하고, 먼저 그 인물이 참으로 지사인가 협잡꾼이나 아닌가를 염탐하기 위하여 김형진을 먼저 떠나보내고 나는 다른 길로 수소문을 하면서 뒤따라가기로 하였다.


하루는 압록강을 앞으로 한 백 리나 격한 노중(路中)에서 궁둥이에 관인을 찍은 말을 타고 오는 젊은 청국 장교 한 사람을 만났다. 그의 머리에 쓴 마라기 - 청국 군인의 모자 - 에는 옥로(玉鷺)가 빛나고 붉은 솔이 너풀거렸다. 나는 중국말을 모르므로 내가 여행하는 취지를 적은 글을 만들어서 품에 지니고 있었는데 이것을 그 장교에게 내어 보였다. 그는 내가 주는 글을 읽더니 다 읽기도 전에 소리를 내어서 울었다. 내가 놀라서 그가 우는 까닭을 물으니 그는 내 글 중에,


'왜적과 더불어 평생을 같이 할 수 없음을 통탄한다

(痛彼倭敵與我不共戴天之讐)'


라는 구절을 가리키며 다시 나를 붙들고 울었다. 나는 필담을 하려고 필통을 꺼내었더니, 그가 먼저 붓을 들어서 왜(倭)가 어찌하여 그대의 원수냐고 도리어 내게 묻는다. 나는 일본이 임진으로부터 세세에 원수일 뿐만 아니라, 지난달에 왜가 우리 국모(國母)를 불살라 죽였다고 쓰고, 다음에 그대야말로 무슨 연유로 내 글을 보고 이대도록 통곡하는가 하고 물었다.


그의 대답을 듣건대, 그는 작년 평양 싸움에 전망한 청국 장수, 서옥생(徐玉生)의 아들로서 강계 관찰사에게 그 부친의 시체를 찾아주기를 청하였던 바 찾았다 하기로 와 본즉 그것은 아버지의 시체가 아니므로 허행(虛行)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한다.


나는 평양 보통문 밖에 '서옥생전사지지(徐玉生戰死之地)'라는 목패를 보았다는 말을 하였다. 그의 집은 금주(錦州)요, 집에는 1천 5백 명 군사를 기르고 있었는데 그 아버지 옥생이 그 중에서 천 명을 데리고 출정하여서 전멸하였고, 지금 집에는 5백 명이 남아 있으며, 재산은 넉넉하고 자기의 나이는 서른 살이요, 아내는 몇 살이며, 아들이 몇, 딸이 몇이라고 자세히 가르쳐 준 뒤에 내 나이를 물어, 내가 그보다 연하인 것을 알고는 그는 나를 아우라고 부를 터이니 그를 형이라고 부르라 하여 피차에 형제의 의를 맺기를 청하고 우리 서로 같은 원수를 가졌으니 함께 살면서 시기를 기다리자 하여 나더러 그와 같이 금주로 가기를 청하고, 내가 대답도 할 사이 없이 내 등에 진 짐을 벗겨 말에게 달아매고 나를 붙들어 말 안장에 올려놓고 자기는 걸어서 뒤를 따랐다.


나는 얼마를 가며 곰곰이 생각하였다. 기회는 썩 좋은 기회였다. 내가 원래 이 길을 떠난 것이 중국의 인사들과 교의를 맺자는 것이었는데, 이제 서씨와 같은 명가와 인연을 맺는 것은 고소원(固所願)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것은 김형진에게 알릴 길이 없는 것이었다. 만일 김형진과만 같이 있었던들 나는 이때에 서를 따라 갔을 것이다.


나는 근 1년이나 집을 떠나 있어 부모님 안부도 모르고 또 서울 형편도 못 들었으니, 이 길로 본국에 돌아가 근친도 하고, 나라 일이 되어가는 양도 알아본 뒤에 금주로 형을 따라 갈 것을 말하고 결연하게 그와 서로 작별하였다.


나는 참빗장수의 행세로 이 집, 저 집에서 김이언의 일을 물어가며 서와 작별한 지 5,6일 만에 김이언의 근거지 삼도구(三道溝)에 다다랐다.


김이언은 당년 50여 세에 심양에서 5백 근 되는 대포를 앉아서 두 손으로 들었다 놓았다 할만큼 기운이 있는 사람이다. 내가 보기에 용기가 부족한 것 같고, 또 자신이 과하여 남의 의사를 용납하는 도량이 없는 것 같았다. 도리의 그의 동지인, 초산에서 이방을 지냈다는 김규현(金奎鉉)이란 사람이 의리도 있고 책략도 있어 보였다.


기구한 젊은 때(3) - 강계성의 전투

 

김이언은 제가 창의의 수령이 되어서 초산, 강계, 위원, 벽동 등지의 포수와 강 건너 중국 땅에 사는 동포 중에 사냥총이 있는 사람을 모집하여서 한 3백 명 무장한 군사를 두고 있었다. 창의의 명의로는 국모가 왜적의 손에 죽었으니 국민 전체의 욕이라 참을 수 없다는 것이요, 이 뜻으로 글 잘하는 김규현의 붓으로 격문을 지어서 사방에 산포하였다.


나와 김형진과 두 사람도 참가하기로 하여 나는 초산, 위원 등지에 숨어 다니며 포수를 모으는 일과 강계 성중에 들어가서 화약을 사오는 일을 맡았다. 거사할 시기는 을미년(乙未年) 동짓달 초생 압록강이 얼어붙을 때로 하였다. 군사를 강 얼음 위로 몰아서 강계성을 점령하자는 것이었다.


나는 위원에서 내가 맡은 일을 끝내고, 책원지(策源地)인 삼도구로 돌아오는 길에 압록강을 건너다가 엷은 얼음을 밟아서 두 팔만 얼음 위에 남기고 몸이 온통 강 속에 빠져 버렸다. 나는 솟아오를 길이 없어서 목청껏 사람 살리라고 소리를 지를 뿐이었다. 내 소리를 들은 농민들이 나와서 나를 얼음 구멍에서 꺼내어 인가로 데리고 갔을 때에는 내 의복은 벌써 딱딱한 얼음 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마침내 강계성을 습격할 날이 왔다. 우선 고산리(高山鎭)를 쳐 거기 있는 무기를 빼앗아서 무기 없는 군사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것이 첫 실책이었다. 나는 고산리를 먼저 치지 말고 곧장 강계성을 엄습하지고 주장하였다.


우리가 고산리를 쳤다는 소문이 들어가면 강계성의 수비가 더욱 엄중할 것이니, 고산리에서 약간의 무기를 더 얻는 것보다는 출기불의(出其不義)로 강계를 덮치는 jt이 유리하다는 것이었다. 김규현, 백진사 등 참모도 내 의견에 찬성하였으나, 김이언은 종시 제 고집을 세우고 듣지 아니하였다.


고산리에서 무기를 빼앗은 우리 군사는 이튿날 강계로 진군하여 야반에 독로강(禿魯江) 빙판으로 전군을 몰아 선두가 인풍루(仁風樓)에서 10 리쯤 되는 곳에 다다랐을 때에, 강 남쪽 송림 속에서 화승불이 번쩍번쩍하는 것이 보였다. 그 때에는 모두 화승총이었으므로 군사는 불붙은 화승을 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 송림 속으로부터 강계대 장교 몇이 마주 나와 김이언을 찾아보고 첫말로 묻는 말이 이번에 오는 군사 중에 청병이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김이언은 이에 대하여 이번에는 청병은 아니왔다, 그러나 우리가 강계를 점령하였다고 기별하는 대로 오기로 하였다고 말하였다.


이것이 정직한 말일는지는 모르거니와 전략적인 대답은 아니었다. 여기에 대하여서도 작전 계획에 김이언은 실수가 있었다. 애초에 나는 우리 중에 몇 사람이 청국 장교로 차리고 선두에 설 것을 주장하였으나, 김이언은 우리 국모의 원수를 갚으려는 이 싸움에 청병의 위력을 가장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 강계성 점령은 당당하게 흰옷을 입은 우리가 할 것이요, 또 강계대의 장교도 이미 내응할 약속이 있으니 염려 없다고 고집하였다.


나는 이에 대하여 강계대의 장교라는 것이 애국심으로 움직이기보다 세력에 쏠릴 것이라 하여 청국 장교로 가장하는 것이 전략상 극히 필요하다고 하였으나, 김이언은 끝까지 듣지 아니하였던 것이다. 그랬던 차에 이제 강계대 장교가 머리를 흔들고 돌아가는 것을 보니, 나는 벌써 대세가 틀렸다고 생각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 장교들이 저의 진지에 돌아갈 때쯤하여 화승불들이 일제히 움직이더니 땅땅 하고 포성이 진동하고 탄알이 빗발같이 이리로 날아왔다. 잔뜩 믿고 마음을 놓고 있던 이편의 천여 명 군마는 얼음판 위에서 대혼란을 일으켜서 이리 뛰고 저리 뛰어 달아나기를 시작하고, 벌써 총에 맞아 쓰러지는 자, 죽는다고 아우성을 하고 우는 자가 여기저기 있었다.


나는 일이 다 틀렸음을 알고, 또 김이언으로 보면 이번에 여기서 패하고는 다시 회복 못할 것으로 보고, 김형진과 함께 슬며시 떨어져서 몸을 피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군사들이 달아나는 것과는 반대 방향으로 도리어 강계성에 가까운 쪽으로 피하였다. 인풍루 바로 밑인 동네로 갔더니 어느 집에도 사람이 없었다. 우리는 그 중에 큼직한 집으로 갔다.


밖에서 불러도 대답이 없고, 안에 들어가도 사람은 없는데 빈 집에 큰 젯상이 놓이고 그 위에는 갖은 음식이 벌어져 있고, 상 밑에는 술병이 있었다. 우리는 우선 술과 안주를 한바탕 배불리 먹었다. 나중에 주인이 돌아와서 하는 말이 그 아버지 대상제를 지내다가 총소리에 놀라서 식구들과 손님들이 모두 산으로 피난하였던 것이라 한다.


우리는 이튿날 강계를 떠나 되넘이 고개를 넘어 수일 만에(거리측정불가?) 신천으로 돌아왔다. 청계동으로 가는 길에 나는 호열자(虎列刺)로 하여서 고 선생의 맏아들 원명의 부처가 구몰하였다는 말을 듣고 크게 놀랐다. 나는 집에도 가기 전에 먼저 고 선생 댁을 찾았더니, 선생은 도리어 태연자약하셨다. 나는 어색하여 말문이 막혔다. 내가 부모님 계신 집으로 가려고 하직을 할 때에 고 선생은 뜻 모를 말씀을 하셨다.


"곧 성례를 하게 하자"


하시는 것이었다. 집에 와서 부모님의 말씀을 듣잡고 비로소 내가 없는 동안에 고 선생의 손녀, 즉 원명의 딸과 나와 약혼이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부모님은 번을 갈아서 약혼이 되던 경로를 말씀하셨다. 아버지의 말씀은 이러하였다 -


하루는 고 선생이 집에 찾아오셔서 아버지를 보시고, 요새에는 아들도 없고 고적할 터이니 선생의 사랑에 오셔서 담화나 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느날 아버지께서 고 선생 댁 사랑에를 가셨더니, 고 선생은 아버지께 내가 어려서 자라던 일을 물으셨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어려서 공부를 열심으로 하던 일, 해주에 과거보러 갔다가 비관하고 돌아오던 일, 상서(相書)를 보고는 제 상이 좋지 못하다고 낙심하던 일, 상이 좋지 못하니 마음이나 좋은 사람이 된다고 동학에 들어가 도를 닦던 일, 이웃 동네에 사는 강씨와 이씨들은 조상의 뼈를 파는 양반이지만 저는 마음을 닦고 몸으로 행하여 산 양반이 되겠다던 일들이었다.


어머님은 내가 어렸을 때에 강령에서 살적에 칼을 가지고 그 집 식구들을 모두 찔러 죽인다고 신풍 이 생원 집에 갔다가 칼만 빼앗기고 매만 맞고 돌아왔다는 것, 돈 스무 냥을 허리에 두르고 떡을 사먹으러 가다가 아버지께 되게 매를 맞은 것, 푸른 물감 붉은 물감을 꺼내다가 온통 개천에 풀어놓은 것을 어머니가 단단히 때려주셨다는 것 같은 것이었다.


이랬더니 하루는 고 선생이 아버지께 나와 고 선생의 장손녀와 혼인하면 어떠냐고 말을 내시고, 아버지께서는 문벌로 보거나 덕행으로 보거나, 또 내 외모로 보거나 어찌 감히 선생의 가문을 욕되게 하랴 하여 사양하셨다. 그런즉 고 선생은 아버지를 보시고 내가 못생긴 것을 한탄 말라 하시고, 창수는 범의 상이니 장차 범의 냄새를 피우고 범의 소리를 내어서 천하를 놀라게 할 날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리하여서 내 약혼이 된 것이었다.


기구한 젊은 때(4) - 혼담이 나오다


나는 부모님의 말씀을 듣고 고 선생께서 나 같은 것을 그처럼 촉망하셔서 사랑하시는 손녀를 허하심에 대하여 큰 책임을 감당키 어렵게 생각하였다. 더구나 선생께서,


"나도 맏아들 부처가 다 죽었으니, 앞으로는 창수에게 의탁하려오" 하셨다는 것과, 또,

"내가 청계동에 와서 청년을 많이 대하여 보았으나 창수만한 남아는 없었소"


하셨다는 말씀을 듣자올 때에는 더욱 몸둘 곳이 없었다. 그 규수로 보더라도 그 얼굴이나 마음이나 가정교훈을 받은 점으로나 나는 만족하였다.


이 약혼에 대하여 부모님이 기뻐하심은 말할 것도 없었다. 외아들을 장가들인다는 것만도 기쁜 일이어든, 하물며 이름 높은 학자요, 양반의 집과 혼인을 하게 된 것을 더욱 영광으로 생각하시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비록 없는 살림이라도 혼인 준비에 두 집이 다 바빴다.


아직 성례(成禮) 전이지마는 고 선생 댁에서는 나를 사위로 보는 모양이어서 혹시 선생 댁에서 저녁을 먹게 되면 그 처녀가 상을 들고 나오고 6,7세 되는 그의 어린 동생은 나를 아재라고까지 부르며 반가와하였다. 이를테면 내 장인 장모인 원명 부처의 장례도 내가 조력하여서 지냈다.


나는 선생께 이번 여행에서 본 바를 보고하였다. 두만강, 압록강 건너편의 땅이 비옥하고 또 지세도 요해로 되어 족히 동포를 이식하고 양병도 할 수 있다는 것이며, 그곳 인심이 순후한 것이며, 또 서옥생의 아들과 결의 형제가 되었다는 등을 낱낱이 아뢰었다.


때는 마침 김홍집(金弘集) 일파가 일본의 후원으로 우리나라 정권을 잡아서 신장정(新章程)이라는 법령을 발하여 급진적으로 모든 제도를 개혁하던 무렵으로서, 그 새 법의 하나로 나오 것이 단발령(斷髮令)이었다. 대군주 폐하라고 부르는 상감께서 먼저 머리를 깎고 양복을 입으시고는 관리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모두 깎이자는 것이었다.


이 단발령이 팔도에 내렸으나 백성들이 응종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서울을 비롯하여 감영, 병영 같은 관아가 있는 큰 도회지에서는 목목에 군사가 지켜 서서 행인을 막 붙들고 상투를 잘랐다. 이것을 늑삭(勒削, 억지로 깎는 것)이라고 하여 늑삭을 당한 사람은 큰일이나 난 것처럼 통곡을 하였다. 이 단발령은 크게 민원(民怨)을 일으켜서 어떤 선비는 도끼를 메고,


'이 목은 자를지언정 이 머리는 깎지 못하리이다'


하는 뜻으로 상소를 올렸다. '차라리 지하에 목 없는 귀신이 될지언정, 살아서 머리 깎은 사람은 아니 되리라(寧爲地下無頭鬼 不作人間斷髮人)'는 글귀가 마치 격서 모양으로 입에서 입으로 전파하여 민심을 선동하였다.


이처럼 단발을 싫어하고 반대하는 이유가 다만 유교의 '내 온 몸을 부모로부터 받았으니 감히 이를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이 효의 시작(身體髮膚受之父母 不敢毁傷孝之始也)'에서 나온 것이 아니요, 이것은 일본이 시키는 것이라는 반감에서 온 것이었다.


군대와 경찰관은 이미 단발이 끝나고 문관도 공리에 이르기까지 실시하는 중이었다.


나는 고 선생께 안 진사와 상의하여 의병을 일으킬 것을 진언하였다. 이를테면 단발 반대의 의병이어니와 단발 반대는 곧 일본 배척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회의는 열렸으나 안 진사의 뜻은 우리와 달랐다. 이길 가망이 없는 일을 일으킨다면 실패할 것밖에 없으니 천주교나 믿고 있다가 시기를 보아서 일어나자는 것이 안 진사의 의사였다. 그는 머리를 깎이게 되면 깎아도 좋다고까지 말하였다.


안 진사의 말에 고 선생은 두 말을 아니 하시고,


"진사, 오늘부터 자네와 끊네" 하고 자리를 차고 일어나 나갔다. 끊는다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예로부터 선비가 절교를 선언하는 말이다.


이 광경을 보고 나도 안 진사에 대하여 섭섭한 마음이 났다. 안 진사 같은 인격으로서 되었거나 못되었거나 제 자라에서 일어난 동학은 목숨을 내어놓고 토벌까지 하면서 서양 오랑캐의 천주학을 한다는 것부터도 괴이한 일이어니와 그는 그렇다 하고라도 목을 잘릴지언정 머리를 깎지 못하려거든, 단발할 생각까지 가졌다는 것은 대의에 어그러지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안 진사의 태도에 실망한 고 선생과 나는 얼른 혼인이나 하고는 청계동을 떠나기로 작정하였다. 나는 금주 서옥생의 아들을 찾아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천만염외에 불행한 일이 또 하나 생겼다. 어느 날 아침 일찍이 고 선생이 나를 찾아오셔서 대단히 낙심한 얼굴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어제 내가 사랑에 앉았노라니 웬 김가라는 자가 찾아와서 당신이 고 아무요 하기로 그렇다 한즉 그자가 내 앞에다가 칼을 내어 놓으며 하는 말이, 들으니 당신이 손녀를 김창수에게 허혼을 하였다 하니 그러면 첩으로 준다면 모르되 정실로는 아니 되리다. 김창수는 벌써 내 딸과 약혼한 지가 오래오.


그러기로 나는, 김창수가 정혼한 데가 없는 줄 알고 내 손녀를 허한 것이지 만일 약혼한 데가 있다면야 그러할 리가 있는가. 내가 김창수를 만나서 해결할 터이니 돌아가라고 해서 돌려보내기는 했으나 내 집안에서는 모두 큰 소동이 났네."


나는 이 말을 듣고 모든 일이 재미없이 된 줄을 알았다. 그래서 선생께 뚝 잘라 이렇게 여쭈었다.


"제가 선생님을 사모하옵기는 높으신 가르침을 받잡고자 함이옵지 손서가 되는 것이 본의는 아니오니 혼인하고 못하는 것에 무슨 큰 상관이 있사오리까. 저는 혼인은 단념하고 사제의 의리로만 평생에 선생님을 받들겠습니다."


내 말을 들으시고 고 선생은 눈물을 흘리시고, 장래에 몸과 마음을 의탁할 사람을 찾으려고 많은 심력을 허비하여서 나를 얻어 손서(孫壻)를 삼으려다가 이 괴변이 났다는 것을 자탄하시고 끝으로,


"그러면 혼인 일사는 갱무거론(更無擧論)일세. 그런데 지금 관리의 단발이 끝나고는 백성들에게도 단발을 실시할 모양이니 시급히 피신하여 단발화 - 머리 깎이는 화란 -를 면하게. 나는 단발화가 미치면 죽기로 작정했네" 하셨다.


나는 마음을 지어먹고 고 선생의 손녀와 혼인을 아니하여도 좋다고 장담은 하였으나 내심으로는 여간 섭섭하지 아니하였다. 나는 그 처녀를 깊이 사랑하고 정이 들었던 것이다.


기구한 젊은 때(5) - 나룻배를 타고


이 혼사에 훼사를 놓은 김가라는 사람은 함경도 정평에 본적을 둔 김치경(金致景)이다. 10여 년 전에 아버지께서 술집에서 그를 만나 술을 같이 자시다가 김에게 8, 9세 되는 딸이 있단 말을 들으시고 취담으로, '내 아들과 혼사하자' 하여 서로 언약을 하고 그 후에 아버지는 그 언약을 지키셔서 내 사주도 보내시고 또 그 계집애를 가끔 우리 집에 데려다 두기도 하였는데, 서당 동무들이, '함지박 장수 사위'라고 나를 놀려먹는 것도 싫었고, 또 한 번은 얼음판에 핑구를 돌리고 있는데 그 계집애가 따라 와서 제게도 핑구를 하나 만들어 달라고 나를 조르는 것이 싫고 미워서, 집에 돌아와 어머니께 떼를 써서 그 애를 제 집으로 돌려보내고 말았다. 그러나 약혼을 깨뜨린 것은 아니었다.


그 후 여러 해를 지내서 갑오년 일청전쟁(日淸戰爭)이 일어나자 사람들은 아들딸을 혼인시켜야 한다고 어린 것들까지도 부랴부랴 성례를 하는 것이 유행하였다. 그 때 동학 접주로 동분서주하던 내가 하루는 여행을 하고 돌아오니 집에서는 그 여자와 나와 성례를 한다고 떡과 술을 마련하고 모든 혼구를 다 차려 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한사코 싫다고 버티어서 마침내 김치경도 도리어 무방하게 생각하여 아주 이 혼인은 파혼이 되고, 김은 그 딸을 돈을 받고 다른 사람에게 정혼까지 한 것이었다. 그런데 내가 고씨 집에 장가든다는 소문을 듣고 돈이라도 좀 얻어먹을 양으로 고 선생 댁에 와서 야료를 한 것이었다.


아버지께서는 크게 분노하여 김치경을 찾아가서 김과 한바탕 싸우셨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 다시 주워담을 수는 없었다. 이리하여 내 혼인 문제는 불행한 끝을 맺고 고 선생도 청계동에 더 계실 뜻이 없어 해주 비동의 고향으로 돌아가시고 나는 금주 서씨의 집으로 가노라고 역시 청계동을 떠났다. 이리하여서 내 방랑의 길은 다시 계속되었다.


평양 감영에 다다르니 관찰사 이하로 관리 전부가 벌써 단발을 하였고, 이제는 길목을 막고 행인을 막 붙들어서 상투를 자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머리를 안 깎이려고 슬몃슬몃 평양을 빠져나와 촌으로 산읍으로 피난을 가고 백성의 원망하는 소리가 길에 찼다. 이것을 보고 나는 머리 끝까지 분이 올랐다. 어떻게 해서라도 왜의 손에 노는 이 나쁜 정부를 들어엎어야 한다고 주먹을 불끈불끈 쥐었다.


안주 병영에 도착하니 게시판에 단발을 정지하라는 영이 붙어 있었다. 임금은 개혁파가 싫어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하시고 수구파들은 러시아의 세력에 등을 대고 총리대신 김홍집을 때려죽이고 개혁의 수레바퀴를 뒤로 돌려놓은 것이었다. 이로부터 우리 나라에 러시아와 일본과의 세력 다툼이 시작되고 친아파와 친일파의 갈등이 벌어지게 되었다.


나는 한성 정국의 변동으로 심기가 일전하였다. 구태여 외국으로 갈 것이 무엇이냐, 삼남에서는 곳곳에 의병(義兵)이 일어난다고 하니 본국에 머물러 시세를 관망하여서 새로 거취를 정하기로 하고 길을 돌려 용강을 거쳐서 안악으로 가기로 하였다.


나는 치하포(鴟河浦) 나룻배에 올랐다. 때는 병신년(丙申年)1896 2월 하순이라 대동강 하류인 이 물길에는 얼음산이 수없이 흘러내렸다. 남녀 15, 16명을 태운 우리 나룻배는 얼음산에 싸여서 행동의 자유를 잃고 진남포 아래까지 밀려 내려갔다가 조수를 따라서 다시 상류로 오르락내리락하게 되었다. 선객은 말할 것도 없고 선부들까지 이제는 죽었다고 울고불고 하였다.


해마다 이때 이 목에서는 이런 참변이 생기는 일이 많았는데 우리가 지금 그것을 당하게 된 것이었다. 배에는 양식이 없으면 비록 파선하기를 면하더라도 얼어죽거나 굶어죽을 것이다. 다행히 나귀 한 마리가 있으니 이 모양으로 여러 날이 가게 될 경우에는 잔인하나마 잡아먹기로 하고 한갓 울고만 있어도 쓸 데 없으니 선객들도 선부들과 함께 힘을 써 보자고 내가 발론하였다. 여럿이 힘을 합하여 얼음산을 떠밀어 보자는 것이다.

 

(이상하다.

1. 나룻배를 꼼짝 못하도록 할 수 있는 큰 얼음산(빙산)이 매년 이맘때 대동강에 둥실떠 다닐 정도로 많아 걸리면 조수로 인하여 강을 수일간 오르락 내리락 할 정도였다니 도저히 한반도 대동강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 할 수 없다.

2. 대동강에 몇날 몇일 갇혀 나귀 한마리로 끼니 대용하겠다고 염려할 정도로 절박한 입장인데 강 규모로 보아서 도저히 한반도 대동강이라고 생각 할 수 없다. 대륙이다.)

아무다리야 [Amudarya]옥수스 강 http://blog.daum.net/han0114/17045933 


나는 몸을 날려 성큼 얼음산에 뛰어 올라서 형세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큰 산을 의지하여 작은 산을 떠밀고, 이러한 방법을 반복하여서 간신히 한 줄기 살 길을 찾았다. 이리하여 치하포에서 5 리쯤 떨어진 강 언덕에 내리니 강 건너 서쪽 산에 지는 달이 아직 빛을 남기고 있었다. 찬 바람 속에 밤길을 걸어서 치하포 배주인 집에 드니 풍랑으로 길이 막혀서 묵는 손님이 삼간방에 가득히 누워서 코를 골고 있었다.


우리 일행도 그 틈에 끼여 막 잠이 들려 할 즈음에 벌써 먼저 들었던 사람들이 일어나서 오늘 일기가 좋으니 새벽물에 배를 건네달라고 야단들이다. 이윽고 아랫방에서부터 벌써 밥상이 들기 시작한다.


나도 할 수 없이 일어나 앉아서 내 상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방안을 휘 둘러보았다. 가운데 방에 단발한 사람 하나가 눈에 띄었다. 그가 어떤 행객과 인사하는 것을 들으니 그는 성은 정씨요, 장연에 산다고 한다. 장연에서는 일찍 단발령이 실시되어서 민간에도 머리를 깎은 사람이 많았었다.


그러나 그 말씨가 장연 사투리가 아니요, 서울말이었다. 조선말이 썩 능숙하지마는 내 눈에는 그는 분명히 왜놈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의 흰 두루마기 밑으로 군도집이 보였다. 어디로 가느냐 한즉 그는 진남포로 가는 길이라고 한다.


보통으로 장사나 공업을 하는 일인(日人) 같으면 이렇게 변복, 변성명을 할 까닭이 없으니 이는 필시 국모를 죽인 삼포오루(三浦梧樓) 놈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의 일당일 것이요, 설사 이도 저도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 국가와 민족에 독균이 되기는 분명한 일이니 저놈 한 놈을 죽여서라도 나라의 수치를 씻어보리라고 나는 결심하였다. 그리고 나는 내 힘과 환경을 헤아려 보았다. 삼간방 40여 명 손님 중에 그놈의 패가 몇이나 더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열일곱 여덟 살 되어 보이는 총각 하나가 그의 곁에서 수종을 들고 있었다.


나는 궁리하였다. 저놈은 둘이요, 또 칼이 있고 나는 혼자요, 또 적수공권(赤手空拳)이다. 게다가 내가 저놈에게 손을 대면 필시 방안에 있는 사람들이 달려들어 말릴 것이요, 사람들이 나를 붙잡고 있는 틈을 타서 저놈의 칼은 내 목에 떨어질 것이다. 이렇게 망설일 때에 내 가슴은 심히 울렁거리고 심신이 혼란하여 진정할 수가 없어 심히 마음에 고민하였다. 그 때에 문득 고 선생의 교훈 중에,


'나무가지를 잡아도 발에는 힘주지 않고

언덕에 매달려도 손에 힘주지 않는 것이 장부이다

(得樹樊枝不足奇 懸崖撒手丈夫兒)'


라는 글귀가 생각이 났다. 벌레를 잡은 손을 탁 놓아라, 그것이 대장부다. 나는 가슴 속에 한 줄기 광명이 비침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문자답하였다.


'저 왜놈을 죽이는 것이 옳으냐?'

'옳다.'

'내가 어려서부터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였느냐?'

'그렇다.'


'의를 보았거든 할 것이요, 일의 성불성을 교계(敎誡)하고 망설이는 것은 몸을 좋아하고 이름을 좋아하는 자의 일이 아니냐?'


'그렇다. 나는 의를 위하는 자요, 몸이나 이름을 위하는 자는 아니다.'


기구한 젊은 때(6) - 왜놈 장교를 죽이다


이렇게 자문자답하고 나니 내 마음의 바다에 바람은 자고 물결은 고요하여 모든 계교(計巧)가 저절로 솟아오른다. 나는 40여명 객과 수백 명 동민을 눈에 안 보이는 줄로 꽁꽁 동여 수족을 못 놀리게 하여 놓고, 다음에는 저 왜놈에게 터럭 끝만한 의심도 일으키지 말아서 안심하고 있게 하여 놓고, 나 한 사람만이 자유자재로 연극을 할 방법을 취하기로 하였다.


다른 손님들이 자던 입에 새벽 밥상을 받아 아직 3분지 1도 밥을 먹기 전에 그보다 나중 상을 받은 나는 네댓 술에 한 그릇 밥을 다 먹고 일어나서 주인을 불러 내가 오늘 해전으로 7백 리 길을 걸어야 하겠으니, 밥 일곱 상을 더 차려 오라고 하였다. 37, 38세 됨직한 골격이 준수(俊秀)한 주인은 내 말에 대답은 아니하고, 방안에 있는 다른 손님들을 둘러보며,


"젊은 사람이 불쌍하다. 미친놈이로군" 하고 들어가 버렸다.


나는 목침을 베고 한편에 드러누워서 방안의 물의와 그 왜놈의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어떤 유식한 듯한 청년은 주인의 말을 받아 나를 미친놈이라 하고, 또 어떤 담뱃대를 붙여 문 노인은 그 젊은 사람을 책하는 말로,


"여보게, 말을 함부로 말게. 지금인들 이인(異人)이 없으란 법이 있겠나. 이러한 말세에 이인이 나는 법일세" 하고 슬쩍 나를 바라보았다. 그 젊은 사람도 노인의 눈을 따라 나를 흘낏 보더니, 입을 삐죽하고 비웃는 어조로,


"이인이 없을 리야 없겠죠마는 아 저 사람 생긴 꼴을 보셔요. 무슨 이인이 저렇겠어요" 하고 내게 들려라 하고 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그 왜는 별로 내게 주목하는 기색도 없이 식사를 필하고는 밖으로 나가 문설주에 몸을 기대고 서서 방안을 들여다보면서 총각이 연가 - 밥값 - 회계하는 것을 보고 있었다.


나는 때가 왔다 하고, 서서히 일어나 '이놈!' 소리를 치면서 발길로 왜놈의 복장(腹臟)을 차니, 그는 거의 한 길이나 되는 계하에 나가 떨어졌다. 나는나는 듯이 쫓아 내려가 그 놈의 모가지를 밟았다. 삼간 방문 네 짝이 일제히 열리며, 그리로 사람들의 모가지가 쑥쑥 내밀어졌다. 나는 몰려나오는 무리를 향하여,


"누구나 이 왜놈을 위하여 감히 내게 범접하는 놈은 모조리 죽일 테니 그리 알아라!" 하고 선언하였다.


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 발에 채이고 눌렸던 왜놈이 몸을 빼쳐서 칼을 빼어 번쩍거리며 내게로 덤비었다. 나는 내 면상에 떨어지는 그의 칼날을 피하면서 발길을 들어 그의 옆구리를 차서 거꾸러뜨리고 칼을 잡은 손목을 힘껏 밟은즉 칼이 저절로 언 땅에 소리를 내고 떨어졌다. 나는 그 칼을 들어 왜놈의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점점이 난도를 쳤다.


2월 추운 새벽이라 빙판이 진 땅 위에 피가 샘솟듯 흘렀다. 나는 손으로 그 피를 움켜 마시고 또 왜의 피를 내 낯에 바르고 피가 뚝뚝 떨어지는 장검을 들고 방으로 들어가면서, 아까 왜놈을 위하여 내게 범하려던 놈이 누구냐 하고 호령하였다. 미처 도망하지 못한 행객들은 모조리 방바닥에 넓적 엎드려 어떤 이는,


"장군님, 살려줍시오. 나는 그 놈이 왜놈인 줄 모르고 예사 사람으로 알고 말리려고 나갔던 것입니다" 하고, 또 어떤 이는,


"나는 어저께 바다에서 장군님과 함께 고생하던 사람입니다. 왜놈과 같이 온 사람이 아닙니다" 하고 모두 겁이 나서 벌벌 떨고 있는 사람들 중에 아까 나를 미친놈이라고 비웃던 청년을 책망하던 노인만이 가슴을 떡 내밀고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장군님, 아직 지각없는 젊은 것들이니 용서하십시오" 하였다.


이때에 주인 이 선달 화보(李先達 和甫)가 감히 방안에는 들어오지도 못하고 문 밖에 꿇어앉아서,


"소인이 눈깔만 있고 눈동자가 없사와 누구신 줄을 몰라뵈옵고, 장군님을 멸시하였사오니 죽어도 한이 없사옵니다. 그러하오나 그 왜놈과는 아무 관계도 없삽고, 다만 밥을 팔아먹은 죄밖에 없사옵니다. 아까 장군님을 능욕한 죄로 그저 죽여줍소서" 하고 땅바닥에 머리를 조아린다.


나는 주인에게 그 왜가 누구냐고 물어서 얻은 바에 의하면 그 왜는 황주에서 조선 배 하나를 얻어 타고 진남포로 가는 길이라고 한다. 나는 주인에게 명하여 그 배의 선원을 부르고 그 배에 있는 그 왜의 소지품을 조속히 들이라 하였다. 이윽고 선원들이 그 왜의 물건을 가지고 와서 저희들은 다만 선가(船價)를 받고 그 왜를 태운 죄밖에 없으니 살려달라고 빌었다.


소지품에 의하여 조사한즉 그 왜는 육군 중위 토전양량(土田讓亮)이란 자요, 엽전 8백 냥이 짐에 들어 있었다. 나는 그 돈에서 선인들의 선가를 떼어주고 나머지는 이 동네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라고 분부하였다. 주인 이 선달이 곧 동장이었다.


시체의 처치에 대하여 나는 이렇게 분부하였다. 왜놈은 다만 우리나라와 국민의 원수만 될 뿐 아니라 물 속에 있는 어별(魚鼈)에게도 원수인즉 이 왜의 시체를 강에 넣어 고기들로 하여금 나라의 원수의 살을 먹게 하라 하였다.


주인 이 선달은 매우 능간하게 일변 세수 제구를 들이고 일변 밥 일곱 그릇을 한 상에 놓고 다른 상 하나에는 국수와 찬수를 놓아서 들였다. 나는 세수를 하여 얼굴과 손에 묻은 피를 씻고, 밥상을 당기어서 먹기를 시작하였다. 밥 한 그릇을 다 먹은 지기 10분밖에 안 되었지마는 과격한 운동을 한 탓으로 한두 그릇은 더 먹을 법하여도 일곱 그릇을 다 먹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아까 한 말을 거짓말로 돌리기도 창피하여서 양푼을 하나 올리라 하여 밥과 식찬을 한데 쏟아 비비고 숟가락을 하나 더 청하여 두 숟가락을 연포겨 가지고 한 숟가락 밥이 사발통만 하도록 보기 좋게 큼직큼직하게 떠서 두어 그릇 턱이나 먹은 뒤에 숟가락을 던지고 혼잣말로,


"오늘은 먹고 싶은 왜놈의 피를 많이 먹었더니 밥이 아니 들어가는구나" 하고 시치미를 떼었다.


식후에 토전의 시체와 그의 돈 처치를 다 분별하고 나서, 주인 이화보를 불러 지필을 대령하라 하여 '국모의 원수를 갚으려고 이 왜를 죽였노라' 하는 뜻의 포고문을 한 장 쓰고 그 끝에 '해주 백운방 기동 김창수(海州 白雲坊 基洞 金昌洙)'라고 서명까지 하여서 큰길가 벽상에 붙이게 하고 동장인 이화보더러 이 사실을 안악 군수에게 보고하라고 명한 후에 유유히 그곳을 떠났다.


기구한 젊은 때(7) - 옥에 갇히다


신천읍에 오니 이 날이 마침 장날이라 장꾼들이 많이 모였는데, 이곳저곳에서 치하포 이야기를 하는 것이 들렸다. 어떤 장사가 나타나서 한 주먹으로 일인을 때려 죽였다는 둥, 나룻배가 빙산에 끼인 것을 그 장사가 강에 뛰어 들어서 손으로 얼음을 밀어서 그 배에 탄 사람을 살렸다는 둥, 밥 일곱 그릇을 눈 깜짝할 새에 다 먹더라는 둥, 말들을 하고 있었다.


집에 돌아와 부모님께 지난 일을 낱낱이 아뢰었더니, 부모님은 날더러 어디로 피하라고 하셨으나 나는 나라를 위하여서 정정당당한 일을 한 것이니 비겁하게 피하기를 원치 않을뿐더러, 만일 내가 잡혀가 목이 떨어지더라도 이로서 만민에게 교훈을 준다 하면 죽어도 영광이라 하여 태연히 집에 있어서 잡으러 오기를 기다렸다.


그로부터 석 달이 지나서 병신년 5월 열 하룻날 새벽에 내가 아직 자리에 누워 일어나기도 전에 어머님이 사랑문을 여시고,


"이애, 우리 집을 앞뒤로 보지 못하던 사람들이 둘러싸누나" 하시는 말씀이 끝나자, 철편과 철퇴를 든 수십 명이,

"네가 김창수냐?" 하고 덤벼든다.

나는, "그렇다. 나는 김창수여니와 그대들은 무슨 사람이관대 요란하게 남의 집에 들어오느냐?"


한즉 그제야 그 중에 한 사람이 '내부훈령등인(內部訓令等因)'이라 한 체포장을 내어 보이고 나를 묶어 앞세운다. 순검과 사령이 도합 30여 명이요, 내 몸은 쇠사슬로 여러 겹을 동여매고 한 사람씩 앞뒤에서 나를 결박한 쇠사슬 끝을 잡고 나머지 사람들은 전후좌우로 나를 옹위하고 해주로 향하여 길을 재촉한다.


동네 20여 호가 일가이지마는 모두 겁을 내어 하나도 감히 문을 열고 내다보는 이도 없다. 이웃 동네 강시, 이씨네 사람들은 김창수가 동학을 한 죄로 저렇게 잡혀간다고 수군거리는 것이 보였다.


이틀 만에 나는 해주옥에 갇힌 몸이 되었다. 어머니는 밥을 빌어다가 내 옥바라지를 하시고 아버지는 영리청, 사령청, 계방(契房)을 찾아 예전 낯으로 내 석방 운동을 하셨으나, 사건이 워낙 중대한지라 아무 효과도 없었다.


옥에 갇힌 지 한 달이나 넘어서 목에 큰 칼을 쓴 채로 선화당 뜰에 끌려 들어가사 감사 민영철에게 첫 심문을 받았다. 민영철은,


"네가 안악 치하포에서 일인을 살해하고 도적질을 하였다지?" 하는 말에 나는,

"그런 일이 없소" 하고 딱 잡아 떼었다.


감사는 언성을 높여서 "이놈, 네 행적에 증거가 소연하거든 그래도 모른다 할까? 이봐라, 저 놈 단단히 다루렸다!"


하는 호령에 사령들이 달려들어 내 두 발목과 무릎을 칭칭 동이고, 붉은 칠을 한 몽둥이 두 개를 다리 새에 들이밀고 한 놈이 한 개씩 몽둥이를 잡고, 힘껏 눌러서 주리를 튼다. 단번에 내 정강이의 살이 터져서 뼈가 허옇게 드러난다. 지금 내 왼편 정강이 마루에 있는 큰 허물이 그때에 상한 자리다. 나는 입을 다물고 대답을 아니 하다가 마침내 기절하였다.


이에 주리를 그치고 내 면상에 냉수를 뿜어서 소생시킨 뒤에 감사는 다시 같은 소리를 묻는다. 나는 소리를 가다듬어서,


"민의 체포장을 보온즉, '내부훈령등인'이라 하였은즉, 이것은 관찰부에서 처리할 안건이 아니오니, 내부로 보고하여 주시오" 하였다. 나는 서울에 가기 전에 내가 그 일인을 죽인 동기를 말하지 아니하리라고 작정한 것이었다.


내 말을 듣고 민 감사는 다시는 아무 말도 없이 나를 내려 가두었다. 그로부터 두 달을 지낸 7월 초에 나는 인천으로 이수가 되었다. 인천 감리영(仁川 監理營)으로부터 4,5 명의 순검이 해주로 와서 나를 데리고 가는 것이었다.


일이 이렇게 되니, 내가 집에 돌아올 기약이 망연하여서, 아버지는 집이며 가장집물을 모두 방매하여 가지고, 서울이거나 인천이거나 내가 끌려가는 대로 따라가셔서 하회를 보시기로 하여 일단 집으로 돌아가시고 어머니만 나를 따라오셨다.


해주를 떠난 첫날은 연안읍에서 하룻밤을 자고, 이튿날 나진포(羅津浦)로 가는 길에 읍에서 5 리쯤 가서 길가 어느 무덤 곁에서 쉬게 되었다. 이 날은 일기가 대단히 더워서 순검들도 참외를 사먹으며 다리쉼을 하였다. 우리가 쉬고 있는 곁 무덤 앞에는 비석 하나가 서 있었다. 앞에는 '효자이창매지묘(孝子李昌梅之墓)'라 하고, 뒤에는 그의 사적이 새겨져 있다.


그 비문에 의하건대, 이창매는 본래 연안부의 통인(通引) - 원의 곁에 모셔 말을 받아 내리고 올리고 하는 천한 구실 - 으로서 그 어머니가 죽으매, 춥거나 덥거나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거나 한결같이 그 어머니의 산소를 모셨다 하여 나라에서 효자 정문을 내렸다 하였고, 또 이창매의 산소 옆의 그 아버지의 묘소 앞에는 그가 신을 벗어 놓고 계절(階節) 앞으로 걸어 들어간 발자국과 무릎을 꿇었던 자리와 향로와 향합을 놓았던 자리에는 영영 풀이 나지 못하였고, 혹시 사람들이 그 움푹 파인 자리를 메우는 일이 있으면 곧 뇌성이 진동하며, 큰 비가 퍼부어 메운 흙을 씻어내고야 만다고 한다.


그 근처 사람들과 순검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귀로 듣고 돌비에 새긴 사적을 눈으로 보매 나는 순검들이 알세라 어머님이 알세라 하고 피섞인 눈물을 흘렸다. 저 이창매는 죽은 부모에 대하여서도 저처럼 효성이 지극하였거늘 부모의 생전에야 오죽하였으랴. 그런데 거의 넋을 잃으시고 허둥허둥 나를 따라오시는 내 어머니를 보라. 나는 얼마나 불효한 자식인가. 나는 쇠사슬에 끌려서 그 자리를 떠나면서 다시금다시금 이 효자의 무덤을 돌아보고 수없이 마음으로 절을 하였다.


내가 나진포에서 인천으로 가는 배를 탄 것이 병신 7월 25일, 달빛도 없이 캄캄한 밤이었다. 물결조차 안 보이고 다만 소리뿐이었다. 배가 강화도를 지날 때쯤하여 나를 호송하는 순검들이 여름 더윗길에 몸이 곤하여 마음놓고 잠든 것을 보시고 어머니는 뱃사공께도 안 들릴 만한 입 안엣 말씀으로,


"얘야, 네가 이제 가면 왜놈의 손에 죽을 터이니 차라리 맑고 맑은 물에 너와 나와 같이 죽어서 귀신이라도 모자(母子)가 같이 다니자"


하시고 내 손을 이끄시고 뱃전으로 가까이 나가신다. 나는 황공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면서 이렇게 여쭈었다.


"제가 이번 가서 죽을 줄 아십니까, 결코 안 죽습니다. 제가 나를 위하여 하늘에 사무친 정성으로 한 일이니, 하늘이 도우실 것입니다. 분명히 안 죽습니다." 어머니는 그래도 바다에 빠져 죽자고 손을 끄시므로 나는 더욱 자신있게,


"어머니, 저는 분명히 안 죽습니다" 하고 어머니를 위로하였다. 그제야 어머니도 죽을 결심을 버리시고,


"나는 네 아버지하고 약속했다. 네가 죽는 날이면 양주(兩主) 같이 죽자고..." 하시고 하늘을 우러러 두 손을 비비시면서 알아듣지 못할 낮은 음성으로 축원을 올리신다. 여전히 천지는 캄캄하고 안 보이는 물결 소리만 들렸다.


기구한 젊은 때(8) - 왜놈 죽인 뜻을 밝히다

 

나는 인천옥에 들어갔다. 내가 인천옥에 이수된 것은 갑오경장(甲午更張)에 외국 사람에 관련된 사건을 심리하는 특별 재판소를 인천에 둔 까닭이었다.

 

(나진포에서 출발시간을 기록하였음에도 인천도착한 시간일시는 기록하지 않았다. 편집과정에서 삭제 되었을 가능성을 배제 할 수 없다. 후일 거리측정을 할 수 없게 하기 위하여...)


내가 들어 있는 감옥은 내리(內里)에 있었다. 마루터기에 감리서(監理署)가 있고, 그 좌익이 경무청, 우익이 순검청인데, 감옥은 순검청 앞에 있고 그 앞에 이 모든 관아로 들어오는 2층 문루가 있었다. 높이 둘러쌓은 담 안의 나지막한 건물이 옥인데 이것을 반으로 갈라서 한편에는 징역하는 전중이와 강도, 절도, 살인 등의 큰 죄를 지은 미결수를 가두고, 다른 편에는 잡수를 수용하였다.


미결수는 평복이지만 징역하는 죄수들은 퍼런 옷을 입었고, 저고리 등에는 강도, 살인, 절도, 이 모양으로 먹으로 죄명을 썼다. 이 죄수들이 일하러 옥 밖에 끌려나갈 때에는 좌우 어깨를 아울러 쇠사슬로 동여서 이런 것을 둘씩둘씩 한 쇠사슬에 잡아매어 짝패를 만들고, 쇠사슬 끝매듭이 죄수의 등에 가게 하였는데, 여기를 자물쇠로 채웠다. 이렇게 한 죄수들을 압뢰 - 간수 - 가 몰고 다니는 것이 보였다.


처음 인천옥에 갇힐 때에 나는 도적으로 취급되어서 아홉 사람을 함께 채우는 길다란 착고에 다른 여덟 명의 한 복판에 발목을 잠갔다. 한 달 전에 잡혀왔다는 치하포 주인 이화보가 내가 옥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반가와하였다. 그날 내가 토전양량을 죽인 이유를 써서 이화보의 집 벽에 붙인 것은 일인이 떼어서 감추고 나를 전혀 강도로 몬 것이라고 한다. 어머니는 옥문 밖까지 따라오셔서 눈물을 흘리고 서 계신 것을 나는 잠간 고개를 돌려서 뵈었다.


어머니는 향촌에서 생장하셨으나 무슨 일에나 과감하시고 더욱 침선(針線)이 능하시므로 감리서 삼문 밖에 개성 사람 박영문(朴永文)의 집에 가서 사정을 말씀하시고, 그 집 식모로 들어가셔서 이 자식의 목숨을 살리시려 하셨다. 이 집은 당시 인천항에서 유명한 물상 객주(物商客主)로 살림이 크기 때문에 식모, 침모의 일이 많았다.


어머니가 이런 일을 하시는 값으로 하루 삼시 내게 밥을 들이게 한 것이었다. 하루는 옥사장이 나를 불러서 어머니도 의접할 곳을 얻으시었고, 밥도 하루 삼시 들어오게 되었으니 안심하라고 일러주었다. 다른 죄수들이 나를 무척 부러워하였다. 나는 옛 사람이,


'부모님께서 나를 낳으시고 기르신 고생하심이 커서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나 하늘처럼 높아 다할 길이 없어 슬프구나(哀哀父母 生我 勞 欲報其恩 昊天罔極)'


이라 한 것을 다시금 생각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어머니께서는 나를 먹여 살리시느라고 천겹만겹의 고생을 하셨다. 불경에 부모와 자식 천천생의 은애의 인연이란 말이 진실로 허사가 아니다.


옥 속은 더할 수 없이 불결하고 아직도 여름이라 참으로 견딜 수가 없었다. 게다가 나는 장질부사가 들어서 고통이 극도에 달하였다. 한 번은 나는 자살을 할 생각으로 다른 죄수들이 잠이 든 틈을 타서 이마에 손톱으로 '충(忠)' 자를 새기고 허리띠로 목을 매어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숨이 끊어진 동안의 일이었다. 나는 삽시간에 고향으로 가서 내가 평소에 친애하던 재종제 창학(昌學) - 지금은 태운(泰運) - 과 놀았다.


'오랜 세월 고향을 눈앞에 그리며 지내니, 굳이 부르지 않아도 내 영혼은 이미 가 있구나(故園長在目 魂去不須招)'가 과연 허언이 아니었다.


문득 정신이 드니 옆에 있는 죄수들이 죽겠다고 고함을 치고 야단들을 하고 있다. 내가 죽은 것을 걱정하여 그 자들이 그러는 것이 아니라 아마 인사불성 중에 내가 몹시 요동을 하여서 착고가 흔들려서 그 자들의 발목이 아팠던 모양이었다.


그 후로는 사람들이 지켜서 내게 자살할 기회도 주지 아니하였거니와, 나 자신도 병에 죽거나 원수가 나를 죽여서 죽는 것은 무가내하(無可奈何)라 하더라도 내 손으로 내 목숨을 끊는 일은 아니하리라고 작정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병은 나았으나 보름 동안이나 음식을 입에 대어보지 못하여서 기운이 탈진하여 갱신을 못하였다. 그런 때에 나를 심문한다는 기별이 왔다. 나는 생각하였다. 해주에서 다리뼈가 드러나는 악형을 겪으면서도 함구불언한 뜻은 내부에 가서 대관들을 대하여 한 번 크게 말하려 함이었지마는 인제는 불행히 병으로 인하여 언제 죽을는지 모르니 부득불 이곳에서라도 왜를 죽인 취지를 다 말하리라고.


나는 옥사정의 등에 업혀서 경무청으로 들어갔다. 들어가면서 도적 문초하는 형구가 삼엄하게 벌여 놓인 것을 보았다. 옥사정이가 업어다가 내려놓는 내 꼴을 보고 경무관 김윤정(金潤晶)은 어찌하여 내 형용이 저렇게 되었느냐고 물은즉, 옥사정은 열병을 앓아서 그리 되었다고 아뢰었다.


김윤정은 나를 향하여,


"네가 정신이 있어, 족히 묻는 말을 대답할 수 있느냐?" 하고 묻기로 나는,

"정신은 있으나 목이 말라붙어서 말이 잘 나오지 아니하니 물을 한 잔 주면 마시고 말하겠소" 하고 대답하였다. 그런즉 김 경무관을 술을 들이라 하여 물 대신에 술을 먹여 주었다.


김 경무관은 청상(廳上)에 앉아 차례대로 성명, 주소, 연령을 물은 뒤에, 모월 모일 안악 치하포에서 일인 하나를 살해한 일이 있느냐고 묻기로 나는,


"있소" 하고 분명히 대답하였다.

"그 일인을 왜 죽였어? 그 재물을 강탈할 목적으로 죽였다지?" 하고 경무관이 묻는다. 나는 이때로다 하고 없는 기운이지마는 소리를 가다듬어,


"나는 국모 폐하의 원수를 갚으려고 왜구(倭仇) 한 명을 때려죽인 사실이 있으나 재물을 강탈한 일은 없소" 하였다. 그런즉 청상에 늘어앉은 경무관, 총순, 권임 등이 서로 맥맥히 돌아볼 뿐이요, 정내는 고요하였다.


옆 의자에 걸터앉아서 방청인지 감시인지 하고 있던 일본 순사 - 뒤에 들으니 와다나베라고 한다 - 가 심문 벽두에 정내(庭內)의 공기가 수상한 것을 보았음인지 통역에게 무슨 일이냐고 묻는 모양인 것을 나는 죽을힘을 다하여,


"이놈!" 하고 한 소리 호령을 하고, 말을 이어서,


"소위 만국공법(萬國公法) 어느 조문에 통상, 화친하는 조약을 맺고서 그 나라 임금이나 왕후를 죽이라고 하였더냐. 이 개 같은 왜놈아. 너희는 어찌하여 감히 우리 국모 폐하를 살해하였느냐. 내가 살아서는 이 몸을 가지고, 죽으면 귀신이 되어서 맹세코 너희 임금을 죽이고 너희 왜놈들을 씨도 없이 다 없이해서 우리나라의 치욕을 씻고 말 것이다"


하고 소리를 높여 꾸짖었더니, 와다나베 순사는 그것이 무서웠던지 '칙쇼, 칙쇼' 하면서 대청 뒤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칙쇼'는 짐승이란 뜻으로 일본말의 욕이란 것은 나중에 들어서 알았다. 정내의 공기는 더욱 긴장하여졌다.


기구한 젊은 때(9) - 이렇게 호랑이 같은...


배석하였던, 총순인지 주사인지 분명치 아니하나, 어떤 관원이 경무관 김윤정에게 이 사건이 심히 중대하니 감리 영감께 아뢰어 친히 심문하게 함이 마땅하다는 뜻을 진언하니 김 경무관이 고개를 끄덕여 그 의견에 동의한다. 이윽고 감리사 이재정(李在正)이 들어와서 경무관이 물러난 주석에 앉고 경무관은 이 감리사에게 지금까지의 심문 경과를 보고한다. 정내에 있는 관속들은 상관의 분부가 없이 내게 물을 갖다가 먹여준다.


나는 이 감리사가 나를 심문하기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그를 향하여 입을 열었다.


"나 김창수는 하향 일개 천생이언마는 국모 폐하께옵서 왜적의 손에 돌아가신 국가의 수치를 당하고는 청천백일하에 제 그림자가 부끄러워서 왜구 한 놈이라도 죽였거니와, 아직 우리 사람으로서 왜왕을 죽여 국모 폐하의 원수를 갚았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거늘, 이제 보니 당신네가 몽백(蒙白) - 국상으로 백립을 쓰고 소복을 입었다는 말 -을 하였으니, 춘추대의에 군부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는 몽백을 아니 한다는 구절은 잊어버리고 한갖 영귀와 총록을 도둑질하려는 더러운 마음으로 임금을 섬긴단 말이오?"


감리사 이재정, 경무관 김윤정, 기타 청상에 있는 관원들이 내 말을 듣는 기색을 살피건대 모두 낯이 붉어지고 고개가 수그러졌다. 모두 양심에 찔리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내 말이 다 끝난 뒤에도 한참 잠자코 있던 이 감리사가 마치 내게 하소연하는 것과 같은 음성으로,


"창수가 지금 하는 말을 들으니, 그 충의와 용감을 흠모하는 반면에 황송하고 참괴한 마음이 비길 데 없소이다. 그러나 상부의 명령대로 심문하여 올려야 하겠으니 사실을 상세히 공술해 주시오"


하고 말에도 경어를 쓴다. 이때 김윤정이 내 병이 아직 위험 상태에 있다는 뜻으로 이 감리사에게 수군수군하더니, 옥사정을 명하여 나를 옥으로 데려가라고 명한다. 내가 옥사정의 등에 업혀 나가노라니, 많은 군중 속에 어머니의 얼굴이 눈에 띄었다. 그 얼굴에 희색이 있는 것을 보고 나는 아마 군중이나 관속들에게 내가 관정에서 한 일을 듣고 약간 안심하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나중에 어머님께 들은 말씀이어니와, 그날 내가 심문을 당한다는 말을 들으시고, 어머님은 옥문 밖에 와서 기다리시다가 내가 업혀 나오는 꼴을 보시고, 저것이 병중에 정신없이 잘못 대답하다가 당장에 맞아 죽지나 않나 하고 무척 근심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내가 감리사를 책망하는데 감리사는 아무 대답도 못하였다는 둥, 내가 일본 순사를 호령하여 내어쫓았다는 둥, 김창수는 해주 사는 소년인데 민 중전마마의 원수를 갚노라고 왜놈을 때려죽였다는 둥 하는 말을 듣고 안심이 되셨다고 하셨다. 나를 업고 가는 옥사정이 어머니 앞을 지나가며,


"마나님 아무 걱정 마시오. 어쩌면 이런 호랑이 같은 아들을 두셨소?" 하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나는 감방에 돌아오는 길로 한바탕 소동을 일으켰다. 나를 전과 같이 다른 도적들과 함께 착고를 채워 두는 데 대하여 나는 크게 분개하여 벽력같은 소리로,


"내가 아무 의사도 발표하기 전에는 나를 강도로 대우하거나 무엇으로 하거나 잠자코 있었다마는 이왕 내가 할 말을 다 한 오늘날에도 나를 이렇게 홀대한단 말이냐. 땅에 금을 그어놓고 이것이 옥이라 하더라도 그 금을 넘을 내가 아니다. 내가 당초에 도망갈 마음이 있었다면 그 왜놈을 죽인 자리에 내 주소와 성명을 갖추어서 포고문을 붙이고 집에 와서 석 달이나 잡으러 오기를 기다리겠느냐? 너희 관리들은 왜놈들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내게 이런 나쁜 대우를 한단 말이냐?"


하면서 어떻게나 내가 몸을 요동하였던지 한 착고 구멍에 발목을 넣고 있던 여덟 명 죄수가 말을 더 보태어서 내가 한 다리로 착고를 들고 일어나는 바람에 자기네 발목이 다 부러졌노라고 떠들었다. 이 소동을 듣고 경무관 김윤정이 들어와서,


"이 사람은 다른 죄수와 다르거늘 왜 도적 죄수와 같이 둔단 말이냐. 즉각으로 이 사람을 좋은 방으로 옮기고 일체 몸은 구속치 말고 너희들이 잘 보호하렷다!"


하고 옥사정을 한편 책망하고 한편 명령하였다. 이로부터 나는 옥중에서 왕이 되었다.


이런 지 얼마 아니하여서 어머님이 면회를 오셨다. 어머님 말씀이, 아까 내가 심문을 받고 나온 뒤에 김 경무관이 돈 1백 쉰 냥 - 30 원 -을 보내며 내게 보약을 사먹이라 하였다 하며, 어머니께서 우접하시는 집 주인 내외는 말할 것도 없고, 사랑손님들까지도 매우 나를 존경하여서 '옥중에 있는 아드님이 무엇을 자시고 싶어하거든 말만 하면 해드리리다' 하더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아홉 사람의 발목을 넣는 큰 착고를 한 발로 들고 일어났다는 것은 이화보를 여간 기쁘게 하지 아니하였다. 대개 그가 잡혀 와서 고생하는 이유가 살인한 죄인을 놓아 보냈다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밥 일곱 그릇을 먹고, 하루 7백 리 가는 장사를 어떻게 결박을 지우느냐고 변명하던 그의 말이 오늘에야 증명된 것이었다.


이튿날부터는 내게 면회를 구하는 사람이 밀려오기 시작하였다. 감리서, 경무청, 순검청, 사령청의 수백 명 관속들이 내게 대한 선전을 한 것이었다. 인천항에서 세력 있는 사람 중에도 또 막벌이꾼 중에도 다음 번 내 심문 날에는 미리 알려달라고 아는 관속들에게 부탁을 하였다고 한다.


두 번째 심문 날에도 나는 전번과 같이 압뢰의 등에 업혀서 나갔는데 옥문 밖에 나오면서 둘러보니 길에는 사람이 가득 찼고, 경무청에는 각 관아의 관리와 항내(港內)의 유력자들이 모인 모양이요, 담장이나 지붕이나 내가 심문을 받을 경무청 뜰이 보이는 곳에는 사람들이 하얗게 올라가 있었다.


정내에 들어가 앉으니, 김윤정이가 슬쩍 내 곁으로 지나가며,


"오늘도 왜놈이 왔으니 기운껏 호령하시오" 한다. 김윤정은 지금은 경기도 참여관이라는 왜의 벼슬을 하고 있으나 그때에는 나는 그가 의기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였었다. 설마 관청을 연극장으로 알고 나를 한 배우로 삼아서 구경거리를 만든 것일 리는 없으니, 필시 항심 없는 무리의 일이라 그 때에는 참으로 의기가 생겼다가 날이 감에 따라서 변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기구한 젊은 때(10) - 감옥에서 배운 것들


둘쨋날 심문에 나는 전번에 할 말은 다 하였으니 더 할 말은 없다고 한 마디로 끝막고 뒷방에 앉아서 나를 넘겨다보고 있는 와다나베를 향하여 또 일본을 꾸짖는 말을 퍼부었다.


그 이튿날부터는 더욱더욱 면회하러 오는 사람이 많았다. 그들은 대개 내 의기를 사모하여 왔노라, 어디 사는 아무개니 내가 출옥하거든 만나자, 설마 내 고생이 오래랴, 안심하라, 이런 말을 하였다.


이렇게 찾아오는 사람들은 거의 다 음식을 한 상씩 차려 가지고 와서 나더러 먹으라고 권하였다. 나는 가져온 사람이 보는 데서 한두 젓가락 먹고는 나머지는 죄수들에게 차례로 나누어 주었다.


그 때의 감옥 제도는 지금과 달라서 옥에서 하루 삼시 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죄수가 짚신을 삼아서 거리에 내다가 팔아서 쌀을 사다가 죽이나 끓여 먹게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내게 들어온 좋은 음식을 얻어먹는 것은 그들의 큰 낙이었다.


제 3 차 심문은 경무청에서가 아니요, 감리서에서 감리 이재정 자신이 하였는데, 인천 인사가 많이 모인 모양이었다. 요샛말로 하면 방청이다. 감리는 내게 대하여 매우 친절히 말을 묻고, 다 묻고 나서는 심문서를 내게 보여 읽게 하고 고칠 것은 나더러 고치라 하여 수정이 끝난 뒤에 나는 '백(白)' 자에 이름을 두었다. 이날은 일인이 없었다.


수일 후에 일인이 내 사진을 박는다 하여 나는 또 경무청으로 업혀 들어갔다. 이날도 사람이 많이 모여 있었다. 김윤정이 내 귀에 들리라고,


"오늘 저 사람들이 창수의 사진을 박으러 왔으니, 주먹을 불끈 쥐고 눈을 딱 부릅뜨고 박히시오" 한다.


그러나 우리 관원과 일인과의 사이에 사진을 박히리, 못 박히리 하는 문제가 일어나서 한참 동안 옥신각신하다가 필경은 청사 내에서 사진을 박는 것을 허할 수 없으니, 노상에서나 박으라 하여서 나를 노상에 앉혔다. 일인이 나를 수갑을 채우든지, 포승으로 얽든지 하여 죄인 모양을 하여 달라고 요구한 데 대하여 김윤정은,


"이 사람은 계하 죄인(啓下罪人) - 임금이 친히 알아 하시는 죄인이라는 뜻 - 인즉 대군주 폐하께서 분구가 곕시기 전에는 그 몸에 형구를 대일 수 없다" 하여서 딱 거절하였다.


그런즉 일인이 다시 말하기를,


"형법이 곧 대군주 폐하의 명령이 아니오? 그런즉 김창수를 수갑을 채우고 포승으로 얽는 것이 옳지 않소?" 하고 기어이 나를 결박하여 놓고 사진을 박기를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김윤정은,


"갑오경장 이후에 우리 나라에서는 형구를 폐하였소" 하고 잡아뗀다. 그런즉 왜는 또,

"귀국 감옥 죄수를 본즉, 다 쇠사슬을 차고 다니는데..." 하고 깐깐하게 대들었다.


이제 김 경무관은 와락 성을 내며,


"죄수의 사진을 찍는 것은 조약에 정한 의무는 아니오, 참고 자료에 불과한 세세한 일에 내정 간섭은 받을 수 없소"


하고 소리를 높여서 꾸짖는다. 둘러섰던 관중들은 경무관이 명관이라고 칭찬하고 있었다.


이리하여서 나는 자유로운 몸으로 길에 앉은 대로 사진을 박게 되었는데, 일인은 다시 경무관에게 애걸하여 겨우 내 옆에 포승을 놓고 사진을 박는 허가를 얻었다.


나는 며칠 전보다는 기운이 회복되었으므로 모여 선 사람들을 향하여 한바탕 연설을 하였다.


"여러분! 왜군들이 우리 국모 민 중전마마를 죽였으니, 우리 국민에게 이런 수치와 원한이 또 어디 있소. 왜놈의 독이 궐내에만 그칠 줄 아시오? 바로 당신들의 아들과 딸들이 필경은 왜놈들의 손에 다 죽을 것이오. 그러니 여러분! 당신들도 나를 본받아서 왜놈을 만나는 대로 다 때려죽이시오. 왜놈을 죽여야 우리가 사오" 하고 나는 고함을 하였다. 와다나베놈이 내 곁에 와서,


"네가 그렇게 충의가 있으면 왜 벼슬을 못하였나?" 하고 직접 내게 말을 붙인다.


"나는 벼슬을 못할 상놈이니까 조그마한 왜놈이나 죽였다마는, 벼슬을 하는 양반들은 너희 황제의 모가지를 베어서 원수를 갚을 것이다" 하고 나는 와다나베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이날 김윤정에게 이화보를 놓아 달라고 청하였더니 이화보는 그날로 석방되어서 좋아라고 돌아갔다. 이로부터 나는 심문은 끝나고 판결만을 기다리는 한가한 몸이 되었다. 내가 이 동안에 한 일은 독서, 죄수에게 글을 가르치는 것, 죄수들을 위하여 소장을 대서하는 것이었다.


나는 아버지께서 들여주신 '대학'을 읽고 또 읽었다. 글도 좋거니와 다른 책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나는 감리서에 다니는 어떤 젊은 관리의 덕으로 천만 의외에 여기서 내 20 평생에 꿈도 못 꾸던 새로운 책을 읽어서 새로운 문화에 접촉할 수가 있었다.


그 관리는 나를 찾아와서 여러 가지 새로운 말을 하여 주었다. 구미(歐美) 문명국의 이야기며, 우리나라가 옛 사상, 옛 지식만 지키고 척양척왜로 외국을 배척만 하는 것으로는 도저히 나라를 건질 수 없다는 것이며, 널리 세계의 정치, 문호, 경제, 과학 등을 연구하여서 좋은 것은 받아들여서 우리의 힘을 길러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창수와 같은 의기남아로는 마땅히 신학식을 구하여서 국가와 국민을 새롭게 할 것이니 이것이 영웅의 사업이지, 한갖 배외사상만을 가지고는 나라가 멸망하는 것을 막을 수 없지 아니한가"


하여 나를 일깨워 줄뿐더러 중국에서 발간된 '태서신사(泰西新史)' '세계지지(世界地誌)' 등 한문으로 된 책자와 국한문으로 번역된 조선 책도 들여 주었다. 나는 언제 사형의 판결과 집행을 받을지 모르는 몸인 줄 알면서도, 아침에 옳은 길을 듣고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생각으로 이 신서적을 수불석권(手不釋卷)하고 탐독하였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읽는 것을 보고 감리서 관리도 매우 좋아하였다.


이런 책들을 읽는 동안 나는 서양이란 무엇이며, 오늘날 세계의 형편이 어떠한 것을 아는 동시에 나 자신과 우리나라에 대한 비판도 하게 되었다. 나는 고 선생이 조상의 제사에 부르는 축문에 명나라의 연호인 영력 몇 년을 쓰는 것이 우리 민족으로서는 옳지 아니한 것도 깨달았고 안 진사가 서양 학문을 공부한다고 절교하던 것이 고 선생의 달관이 아니라고(?) 보게 되었다.


기구한 젊은 때(11) - 사형 집행을 앞두고

 

내가 청계동에 있을 때에는 고 선생의 학설을 그대로 받아 척양척왜가 나의 유일한 천직으로 알았고, 옳은 도가 한 줄기 살아 있는 데는 오직 우리 나라 뿐이요, 저 머리를 깎고 양복을 입은 무리들은 모두 금수와 같은 오랑캐라고만 믿고 있었다.


그러나 태서신사 한 권만 보아도 저 눈이 움푹 들어가고 코가 우뚝 솟은 사람들이 결코 원숭이에서 얼마 멀지 아니한 오랑캐가 아니오, 오히려 나라를 세우고 백성을 다스리는 좋은 법과 아름다운 풍속을 가졌고, 저 큰 갓을 쓰고 넓은 띠를 띤 신선과 같은 우리 탐관오리야말로 오랑캐의 존호를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나는 이에 우리나라에 가장 필요한 것은 저마다 배우고 사람마다 가르치는 것이라 깨달았다. 옥중에 있는 죄수들을 보니 글을 아는 이는 없고 또 그들의 생각이나 말이 모두 무지하기가 짝이 없어서 이 백성을 이대로 두고는 결코 나라의 수치를 씻을 수도 없고, 다른 나라와 겨루어 나갈 부강한 힘을 얻을 수도 없다고 단정하였다.


이에 나는 내가 깨달은 바를 곧 실행하여서 내 목숨이 있는 날까지 같이 옥중에 있는 죄수들만이라도 가르쳐 보려 하였다. 죄수는 들락날락하는 자를 아울러 평균 백 명 가량인데 그 열에 아홉까지는 양서부지(兩書不知)였다. 내가 글을 가르쳐 주마 한즉 그들은 마다고는 아니 하고 배우는 체를 하였으나 그 중에 몇 사람을 제하고는 글에 뜻이 있는 것보다 내 눈에 들어서 맛있는 음식을 얻어먹으려는 목적인 것 같았다.


도적이나 살인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그들에게는 글을 배워서 더 좋은 사람이 되어 보겠다는 생각조차 일어나지 아니하는 것 같았다.


조덕근(曺德根)이란 자는 '대학'을 배우기로 하였는데, 그 서문에 '인생팔세 개입소학(人生八歲皆入小學)'이라는 구절을 소리 높이 읽다가 '개입소학'을 '개 아가리 소학'이라고 하여서 나는 허리가 끊어지도록 웃었다. 이 자는 화개동 갈보의 서방으로서 갈보 하나를 중국으로 팔아 보낸 죄로 10년 징역을 받은 것이었다.


때는 건양(建陽) 2년 즈음이라 '황성신문(皇城新聞)'이 창간되었다 하여 누가 내게 들여 주는 어느 날 신문에 내 사건의 전말을 대강 적고 나서 김창수가 인천 감옥에서 죄수들에게 글을 가르치므로 감옥은 학교가 되었다고 씌어 있었다.


나는 죄수의 선생질을 하는 한편, 또 대서소도 벌인 셈이었다. 억울하게 잡혀온 죄수의 말을 듣고 내가 소장을 써주면 그것으로 놓여 나가는 이도 있어서 내 소장 대서가 소문이 나게 되었다. 더구나 옥에 갇혀 있으면서 밖에 있는 대서인에게 소장을 써 달래려면 매우 힘도 들고 돈도 들었다.


그런데 같은 감방에 앉아서 충분히 할 말을 다 하고 소장을 쓰는 것은 인찰지 사는 값밖에는 도무지 비용이 들지 아니하였다. 내가 소장을 쓰면 꼭 득송(得訟)한다고 사람들이 헛소문을 내어서 관리 중에 내게 소장을 지어 달라는 자도 있고, 어느 관원에게 돈을 빼앗겼다 하는 사람의 원정(原情)을 지어서 상관에게 드려 그 관리를 파면시킨 일도 있었다. 이러므로 옥리들도 나를 꺼려서 죄수를 함부로 학대하지 못하였다.


이렇게 글을 가르치고, 대서를 한 여가에는 나는 죄수들에게 소리를 시키고 나도 소리를 배우고 놀았다. 나는 농촌 생장이지마는 기실 노래 한 가락, 익살 한 마디도 할 줄을 몰랐다.


그 때 옥의 규칙이 지금과는 달라서 낮잠을 재우고 밤에는 조금도 눈을 붙이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것은 다들 잠든 틈을 타서 죄수가 도망할 것을 염려함이었다. 그러므로 죄수들은 밤새도록 소리도 하고 이야기책도 읽기를 허하였던 것이다. 이 규칙은 내게는 적용되지 아니하였으나 다른 사람들이 그러하므로 나도 자연 늦도록 놀다가 자게 되었다.


자꾸 듣는 동안에 자연 시조니 타령이니 남이 하는 소리의 맛을 알게 되어서 나도 배울 생각이 났다. 나는 갈보 서방 조덕근한테 평시조, 엮음시조, 남창 지름, 여창 지름, 적벽가, 새타령, 개구리타령 등을 배워서 남들이 할 때면 나도 한몫 들었다.


이러고 있는 동안에 세월이 흘러서 7월도 거의 다 갔다. 하루는 '황성신문'에 다른 살인, 강도죄인 몇과 함께 인천 감옥에 있는 살인강도 김창수를 아무 날 처교(處絞) - 목을 달아 죽임 - 한다는 기사가 난 것을 보았다. 그 날짜는 7월 스무 이렛날이던가 한다.


사람이 이런 일을 당하면 부러 태연한 태도를 꾸밀 법도 하지마는 어찌된 일인지 내 마음은 조금도 경동되지 아니하였다. 교수대에 오를 시간을 겨우 반일을 격하고도 나는 음식이나 독서나 담화나 평상스럽게 하고 있었다. 그것은 아마 고 선생께 들은 말씀 중에 박태보(朴泰輔)가 보습으로 단근질을 받을 때에,


'이 쇠가 식었으니 더 달구어 오너라' 고 한 것이며, 심양에 잡혀갔던 삼학사의 사적을 들은 영향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사형을 당한다는 신문 기사를 본 사람들은 뒤를 이어 찾아와서 마지막 인사를 하고는 눈물을 흘렸다. 이를테면 조상(弔喪)이다. 아무 나으리, 아무 영감하는 사람들도 찾아와서,


"김 석사, 살아나와서 상면할 줄 알았더니 이것이 웬일이오?" 하고 두 주먹으로 눈물을 씻고 갔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밥을 손수 들고 오신 어머님이 평시와 조금도 다름이 없으심이었다. 아마 사람들이 내가 죽게 되었다는 말을 아니 알려드린 것인가 하였다.


나는 조상하는 손님이 돌아간 뒤에는 여상히 '대학'을 읽고 있었다. 인천 감옥 죄수의 사형 집행은 언제나 오후에 하게 되었고, 처소는 우각동(牛角洞)이란 것을 알므로 나는 아침과 점심을 잘 먹었다. 죽을 때에는 어떻게 하리라 하는 마음 준비도 할 마음이 없었다.


나는 이렇게 아무러하지도 아니하건마는 다른 죄수들이 나를 위하여 슬퍼해 주는 정상(情狀)은 차마 볼 수가 없었다. 내게 음식을 얻어먹은 죄수들이며, 글을 배운 제자들, 그리고 나한테 혹은 소장을 써 받고 혹은 송사에 대한 지도를 받아오던 잡수들이 애통하는 양은 그들이 제 부모상에 그러하였을까 의심할이만큼 간절하였다.


차차 시간은 흘러서 오후가 되고 저녁때가 되었다. 교수대로 끌려 나갈 시각이 바싹바싹 다가오는 것이다. 나는 내 목숨이 끊어질 순간까지 성현의 말씀에 잠심(潛心)하여 성현과 동행하리라 하고, 몸을 단정히 하고 앉아서 대학을 읽고 있었다.


그럭저럭 저녁밥이 들어왔다. 사람들은 내가 특별한 죄수가 되어서 밤에 집행하는 것이라고 생각들 하고 있었다. 나는 예기하지 아니하였던 저녁 한 때를 이 세상에서 더 먹은 것이었다.


기구한 젊은 때(12) - 두 번의 아슬아슬한 위기


밤이 초경이 되어서 밖에서 여러 사람이 떠들석하고 가까이 오는 인기척이 나더니 옥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옳지, 인제 때가 왔구나' 하고 올 것을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나와 한 방에 있는 죄수들은 제가 죽으러 나가기나 하는 것처럼 모두 낯색이 변하고 덜덜 떨고들 있었다. 이때에 문밖에서,


"창수, 어느 방에 있소?" 하는 소리가 들린다.

"이 방이오" 하는 내 대답은 듣는 것 같지도 않고, 방문도 열기 전부터 어떤 소리가,


"아이구, 이제는 창수 살았소! 아이구, 감리 영감과 전 서원과 각청 직원이 아침부터 밥 한 술 못먹고 끌탕만 하고 있었소. 창수를 어찌 차마 우리 손으로 죽이느냐고. 그랬더니 지금 대군주 폐하께옵서 대청에서 감리 영감을 불러 곕시고, 김창수 사형은 정지하랍신 친칙을 받잡고 밤이라도 옥에 내러가 김창수에게 전지(傳旨)하여 주랍신 분부를 듣고 왔소. 오늘 얼마나 상심하였소?"


하고 관속들은 친동기가 죽기를 면하기나 한 것처럼 기뻐하였다. 이것이 병신년1896 윤 8월 26일이었다. 뒤에 알고 보니 내가 사형을 면하고 살아난 데는 두 번 아슬아슬한 일이 있었으니, 그것은 이러하였다.


법부대신이 내 이름과 함께 몇 사형 죄인의 명부를 가지고 입궐하여 삼감의 칙재를 받았다. 상감께서는 다 재가를 하였는데 그 때에 입직하였던 승지 중에 하나가 내 죄명이 국모보수(國母報讐)인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겨서 이미 재가된 안건을 다시 가지고 어전에 나아가 임금께 뵈인즉, 상감께서는 즉시 어전 회의를 여시와 내 사형을 정지하기로 결정하시고 곧 인천 감리 이재정을 전화로 부르신 것이라 한다.


그러므로 그 승지의 눈에 '국모보수' 네 글자가 아니 띄었더라면 나는 예정대로 교수대의 이슬이 되었을 것이니, 이것이 첫째로 이상한 인연이었다.


둘째로는 전화가 인천에 통하게 된 것이 바로 내게 관한 전화가 오기 사흘 전이었다고 한다. 만일 서울과 인천 사이에 전화 개통이 아니 되었던들 아무리 우으로서 나를 살리려 하셨더라도 그 은명(恩命)이 오기 전에 나는 벌써 죽었을 것이었다고 한다.

 

전화개통과 백범일지 그리고 대륙조선 http://blog.daum.net/han0114/17045883


그러자, 감리서 주사가 뒤이어 찾아와서 하는 말에 의하면 내가 사형을 당하기로 작정되었던 날 인천항 내 서른 두 물상 객주들이 통문(通文)을 돌려서 매호에 한 사람 이상 우각동에 김창수 처형 구경을 가되 각기 엽전 한 냥씩을 가지고 와서 그것을 모아서 김창수의 몸값을 삼자, 만일 그것만으로 안 되거든 부족액은 서른 두 객주가 담당하자고 작정하였더라고 한다. 감리서 주사는 내게 이런 말을 들려주고 끝으로,


"아무러나 김 석사, 이제는 천행으로 살아났소. 며칠 안으로 궐내에서 은명이 계실 터이니 아무 염려 말고 계시오" 하고 갔다.


이제는 다들 내가 분명히 사형을 면한 것을 알게 되었다. 마치 상설(霜雪)이 날리다가 갑자기 춘풍이 부는 것과 같다. 옥문이 열리는 소리에 벌벌 떨고 있던 죄수들은 내게 전하는 이러한 소식들을 듣고 좋아서 죽을 지경인 모양이었다. 신골방망이로 착고를 두드리며 온갖 노래를 다 부르고 청바지 저고리짜리들이 얼씨구나 좋을씨구 춤을 춘다, 익살을 부린다, 마치 푸른 옷을 입은 배우들의 연극장을 지어낸 듯하였다.


죄수들은 내가 그날 아무 일도 없는 듯이 태연자약한 것은 이렇게 무사하게 될 줄을 미리 알았던 것이라고 제멋대로 해석하고, 나를 이인(異人)이라 하여 앞날 일을 내다보는 사람이라고들 떠들었다. 더구나 어머님은 갑꼬지(갑곶) 바다에서 내가 '안 죽습니다' 하던 말을 기억하시고 내가 무엇을 아는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시는 모양이요, 아버님도 그런 생각을 가지시는 것 같았다.


대군주(大君主)의 칙령으로 김창수의 사형이 정지되었다는 소문이 전파되자 전일에 영결하던 사람들이 이번에는 조상이 아니요, 치하하러 왔다. 하도 면회인이 많으므로 나는 옥문 안에 자리를 깔고 앉아서 몇 날 동안 응접을 하였다. 전에는 다만 나의 젊은 의기를 애석히 여기는 것뿐이었거니와, 칙명으로 사형이 정지되는 것을 보고는 미구에 우으로서 소명(召命)이 내려서 내가 영귀(榮貴)하게 되리라고 짐작하고 벌써부터 내게 아첨하는 사람조차 생기게 되었다. 이런 일은 일반 사람들만 아니라 관리 중에도 있었다.


하루는 감리서 주사가 의복 한 벌을 가지고 와서 내게 주고 말하기를, 이것은 병마우후 김주경(兵馬虞侯 金周卿)이라는 강화 사람이 감리 사또에게 청하여 전하는 것인즉, 이 옷을 갈아입고 있다가 그 김주경이 오거든 만나라고 하였다.


이윽고 한 사람이 찾아왔는데 나이는 사십이나 되어 보이고, 면목이 단단하게 생겼다. 만나서 별말이 없고 다만,


"고생이나 잘 하시오. 나는 김주경이오" 하고는 돌아갔다.


어머니께서 저녁밥을 가지고 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김 우후가 아버님을 찾아서 부모님 양주의 옷감과 용처(用處)에 보태라고 돈 2백 냥을 두고 가며 열흘 후에 또 오마고 하였다 한다. 이 말 끝에 어머니는,


"네가 보니 그 양반이 어떻더냐. 밖에서 듣기에는 아주 훌륭한 사람이라 하더구나" 하시기로 나는,


"사람을 한 번 보고 어찌 잘 알 수 있습니까마는 그 사람이 하는 일은 고맙습니다" 하였다.


김주경에게 내 일을 알린 것은 인천옥에 사령 반수로 있는 최덕만(崔德萬)이었다. 최덕만은 본래 김의 집 비부였었다. 김주경의 자는 경득이니, 강화의 아전의 자식이었다. 병인양요(丙寅洋擾) 뒤에 대원군이 강화에 3천 명의 무사를 양성하고 섬 주위를 두루 포루(砲樓)를 쌓아 국방 영문을 세울 때에 포량고지기 - 군량을 둔 창고를 지키는 소임 - 가 된 것이 그의 출세의 시초였다. 그는 성품이 호방하여 초립동이 시절에도 글읽기를 싫어하고 투전을 일삼았다.


한 번은 그 부모가 그를 징계하기 위하여 며칠 동안 광 속에 가두었더니, 들어갈 때에 그는 투전목 하나를 감추어 가지고 들어가서 거기 갇혀 있는 동안에 투전에 대한 여러 가지 묘법을 터득하여 가지고 나와서 투전목을 여러 만 개 만들되 투전짝마다 저는 알 수 있는 표를 하였다.


이 투전목을 강화도 안에 있는 여러 포구에 분배하여 뱃사람들에게 팔게 하고 자기는 이 배 저 배로 돌아다니면서 투전을 하였다. 어느 배에서나 쓰는 투전목은 다 김주경이가 만든 것이라, 그는 투전짝의 표를 보아 알기 때문에 얼마 아니 하여서 수십 만 냥의 돈을 땄다.


기구한 젊은 때(13) - 무위로 돌아간 석방 운동


김주경은 이렇게 투전하여 얻은 돈으로 강화와 인천의 각 관청의 관속을 매수하여 그의 지휘에 복종케 하고 또 꾀 있고 용맹 있는 날탕패를 많이 모아 제 식구를 만들어 놓고는 어떠한 세도 있는 양반이라도 비리(非理)의 일을 하는 자가 있으면 직접이거나 간접이거나 꼭 혼을 내고야 말았다.


경내(境內)에 도적이 나서 포교가 범인을 잡으러 나오더라도 먼저 김주경에게 물어보아서 잡아가라면 잡아가고, 그에게 맡기고 가라면 포교들은 거역을 못하였다. 당시에 강화에는 큰 인물 둘이 있으니 양반에는 이건창(李健昌)이요, 상놈에는 김주경이라고 하였다. 이 두 사람은 강화 유수도 건드리지 못하였다. 대원군(大院君)은 이런 말을 듣고 김주경에게 군량을 맡는 중임을 맡긴 것이다.


하루는 사령반수 최덕만이가 내게 와서 하는 말이, 김주경이가 어느 날 자기 집에 와서 밥을 먹으면서 말하기를, 김창수를 살려내야 할 터인데, 요새에 정부의 대관놈들이 모두 눈깔에 동록이 슬어서 돈밖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아니하니, 이번에 집에 가서 가산을 모두 족쳐 팔아 가지고 김창수의 부모 중에 한 분을 데리고 서울로 가서 무슨 짓을 해서라도 석방 운동을 하겠노라 하더라고 하였다. 최덕만이 이 말을 한 지 10여 일 후에 과연 김주경이가 인천에 와서 내 어머님을 모시고 서울로 갔다.


뒤에 듣건대, 김주경은 첫째로 당시 법부대신 한규설(韓圭卨)을 찾아서 내 말을 하고 이런 사람을 살려내어야 충의지사(忠義志士)가 많이 나올 터이니 폐하께 입주하여 나를 놓아 주도록 하라고 하였다.


한규설도 내심으로는 찬성이나 일본 공사 임권조(林權助)가 벌써 김창수를 아니 죽였다는 문제로 삼아서 대신 중에 누구든지 김창수를 옹호하는 자는 무슨 수단으로든지 해치려 하니, 막무가내하라고 폐하께 입주하는 일을 거절하므로 김주경은 분개하여 대관들을 무수히 졸욕하고 나와서 공식으로 법부에 김창수 석방을 요구하는 소지를 올렸더니 그제사 '그 뜻은 가상하나 일이 중대하니 여기서 마음대로 할 수 없다(其義可尙 事關重大 未可擅便向事)' 하였다.


그 뒤에도 제 2차, 제 3차로 관계 있는 각 아문 - 관청 - 에 소장을 드려 보았으나 어디나 마찬가지로 이리 미루고 저리 미루어 결말을 보지 못하였다. 이 모양으로 김주경은 7,8삭 동안이나 나를 위하여 송사를 하는 통에 그 집 재산은 다 탕진되었고, 아버지와 어머니도 번갈아서 인천에서 서울로 오르락내리락하셨으나 필경 아무 효과도 없이 김주경도 마침내 나를 석방하는 운동을 중지하고 말았다.


김주경은 소송을 단념하고 집에 돌아와서 내게 편지를 하였는데, 보통으로 위문하는 말을 한 끝에 오언절구 한 수를 적었다.


'새는 조롱을 벗어나야 좋은 새이며 고기가 통발 - 고기 잡는 기구 -을 벗어나니 어찌 예사스러울까. 충신은 반드시 효(孝가) 있는 집에서 찾고 효자는 평민의 집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脫籠眞好鳥 拔扈豈常鱗 求忠必於孝 請看依閭人)' 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내게 탈옥을 권하는 말이다. 나는 김주경이가 그간 나를 위하여 심력을 다한 것을 감사하고, 구차히 살 길을 위하여 생명보다 중한 광명을 버릴 뜻이 없으니 염려하지 말라고 답장하였다.


김주경은 그 후 동지를 규합하여 관용청룡환(靑龍丸), 현익호(顯益號), 해룡환(海龍丸) 세 척 중에서 하나를 탈취하여 해적이 될 준비를 하다가 강화 군수의 염탐한 바가 되어서 일이 틀어지고 도망하였는데 중로에서 그 군수의 행차를 만나서 군수를 실컷 두들겨 주고 해삼위 방면으로 갔다고도 하고 근방 어느 곳에 숨어 있다고도 하였다.

 

해삼위(海蔘威) : 블라디보스톡이라고 하는 러시아령 항구다. 그러나 블라디보스톡도 현재 불라디보스톡이 아니다. old Vladivostok (구 블라디보스톡)을 밝혀야 하는데 산동성(위해위:威海衛가 있다)이나 아니면 요동반도라고 생각이 된다. 강화군수를 패고 달아난 곳이 해삼위라고 하면 바다를 건너 갔다는 말인데 그런 문구가 없다. 강화 중로가 대륙이라면 말이 되지만 그렇지 않고 한반도 강화라면 이해 할 수 없는 지리구도다.


그 후에 아버지는 김주경이가 서울 각 아문에 드렸던 소송 문서 전부를 가지고 강화에 이건창을 찾아서 나를 구출할 방책을 물으셨으나 그도 역시 탄식만 할 뿐이었다고 한다.


나는 그대로 옥중 생활을 계속하고 있었다. 나는 신학문을 열심으로 공부하였다. 나는 만사를 하늘의 뜻에 맡기고 성현으로 더불어 동행하자는 생각은 변함이 없었으므로 탈옥 도주는 염두에 두지 아니하고 있었다. 그러나 10년역 조덕근, 김백석(金百石), 3년 수 양봉구(梁鳳求), 이름은 잊었으나 종신수도 하나 있어서 그들은 조용할 때면 가끔 내게 탈옥하자는 뜻을 비추었다.


그들은 내가 하려고만 하면 한 손에 몇 명씩 쥐고 공중으로 날아서라도 그들을 건져낼 수 있는 것같이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두고두고 그들이 눈물을 흘려가며 살려 달라고 조르는 바람에 내 마음도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생각에는 나는 얼마 아니하여 우으로부터 은명이 내려서 크게 귀하게 되겠지마는 나마저 나가면 자기들은 어떻게 살랴 하는 것이었다.


나는 생각하였다. 상감께서 나를 죄인으로 알지 아니하심은 내 사형을 정지하라신 친칙으로 보아 분명하고, 동포들이 내가 살기를 원하는 것도 김주경을 비롯하여 인천항의 물주 객상들이 돈을 모아서 내 목숨을 사려고 한 것으로 알 수 있지 아니 하냐. 상하가 다 내가 살기를 원하나 나를 놓아 주지 못하는 것은 오직 왜놈 때문이다.


내가 옥중에서 죽어 버린다면 왜놈을 기쁘게 할 뿐인즉, 내가 탈옥을 하더라도 의리에 어그러질 것은 없다고. 이리하여 나는 탈옥할 결심을 하였다. 내가 조덕근에게 내 결심을 말한즉 그는 벌써 살아난 듯이 기뻐하면서 무엇이나 내가 시키는 대로 할 것을 맹세하였다. 나는 그에게 말하여 돈 2백 냥을 들여오라 하였더니 밥을 나르는 사람 편에 기별하여서 곧 가져왔다. 이것으로 탈옥의 한 가지 준비는 된 것이었다.


둘째로는 큰 문제가 있으니, 그것은 강화 사람 황순용(黃順用)이라는 사람을 손에 넣는 것이었다. 황가는 절도죄로 3년 징역을 거의 다 치르고 앞으로 나갈 날이 멀지 아니하므로 감옥의 규례대로 다른 죄수를 감독하는 직책을 맡아 가지고 있었다. 이놈을 손에 넣지 아니하고는 일이 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 황가에게 한 약점이 있으니, 그것은 그가 김백석을 남색으로 지극히 사랑하는 것이었다. 김백석은 아직 17, 18세의 미소년으로서 절도 3범으로 10년 징역의 판결을 받고 복역하는 지가 한 달쯤 된 사람이었다. 나는 김백석을 이용하여 황가를 손에 넣기로 계획을 정하였다.


(14) 탈옥하다


나는 조덕근으로 하여금 김백석을 충동하여, 김백석으로 하여금 황가를 졸라서, 황가로 하여금 내게 김백석을 탈옥시켜 주기를 빌게 하였다. 계교는 맞았다. 황가는 날더러 김백석을 놓아달라고 졸랐다. 나는 그를 준절히 책망하고 다시 그런 죄 될 말은 말라고 엄명하였다. 그러나 김백석에게 자꾸 졸리우는 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눈물을 흘리면서 나를 졸랐다.


내가 뿌리치면 뿌리칠수록 그의 청은 간절하여서 한 번은,


"제가 대신 징역을 져도 좋으니 백석이만 살려줍시오"


하고 황가는 울었다. 비록 더러운 애정이라 하더라도 애정의 힘은 과연 컸다. 그제야 내가 황가의 청을 듣는 것 같이, 그러면 그러마고 허락하였다. 황은 백배 사례하고 기뻐하였다. 이리하여 둘째 준비도 끝이 났다.


다음에 나는 아버님께 면회를 청하여 한 자 길이 되는 세모난 철창 하나를 들여 줍소사고 여쭈었다. 아버지께서는 얼른 알아차리시고 그날 저녁에 새 옷 한 벌에 그 창을 싸서 들여주셨다.


이제는 마지막으로 탈옥할 날을 정하였으니, 그것은 무술년 3월 초아흐렛날이었다.


이날 나는 당번하는 옥사정 김가에게 돈 1백 50냥을 주어, 오늘 밤에 내가 죄수들에게 한턱을 낼 터이니 쌀과 고기와 모주 한 통을 사달라 하고 따로 돈 스물 닷 냥을 옥사정에게 주어 그것으로는 아편을 사먹으라고 하였다. 이 옥사정은 아편장인 줄을 내가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죄수에게 턱을 낸 것은 전에도 한 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에 옥사정도 예사로이 알았을 뿐더러 아편 값 스물 닷 냥이 생긴 것이 무엇보다도 좋아서 두말없이 모든 것을 내 말대로 하였다.

 

한반도에서 아편쟁이가 있었다는 사실은 금시초문이다.

아편은 대륙에서 통용된 것이다.


관속(官屬)이나 죄수나, 나는 조만간 은명으로 귀히 되리라고 믿었기 때문에 아무도 내가 탈옥 도주를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할 리가 없었다. 조덕근, 양봉구, 황순용 김백석 네 사람도 나는 그냥 옥에 머물러 있고 자기네만을 빼어 놓을 줄로 믿고 있었다.


저녁밥을 들고 오신 어머님께, 자식은 오늘 밤으로 옥에서 나가겠으니 이 밤으로 배를 얻어 타고 고향으로 돌아가셔서 자식이 찾아갈 때를 기다리시라고 여쭈었다.


50명 징역수와 30명 미결수들은 주렸던 창자에 고깃국과 모주를 실컷 먹고 취흥이 도도하였다. 옥사정 김가더러 이 방 저 방 돌아다니며 죄수들 소리나 시키고 놀자고 내가 청하였더니 김가는 좋아라고,


"이놈들아, 김 서방님 들으시게 장기대로 소리들이나 해라" 하고 생색을 보이고 저는 소리보다 좋은 아편을 피우려고 제 방에 들어가 박혔다.


나는 적수 방에서 잡수 방으로, 잡수 방에서 적수 방으로 왔다갔다 하다가 슬쩍 마루 밑으로 들어가서 바닥에 깐 박석 - 정방형으로 구운 옛날 벽돌 -을 창끝으로 들쳐내고 땅을 파서 옥밖에 나섰다. 그리고 옥 담을 넘어 줄사다리를 매어 놓고 나니 문득 딴 생각이 났다. 다른 사람들을 끌어내려다가 무슨 일이 날는지 모르니, 이 길로 나 혼자만 나가 버리자 하는 것이었다.


그자들은 좋은 사람도 아니니 기어코 건져낸들 무엇하랴. 그러나 얼른 돌려 생각하였다. 사람이 현인군자에게 죄를 지어도 부끄러웁거늘, 하물며 저들과 같은 죄인에게 죄인이 되고서야 어찌 하늘을 이고 땅을 밟으랴. 종신토록 수치가 될 것이다.


나는 내가 나온 구멍으로 다시 들어가서 천연스럽게 내 자리에 돌아가 앉았다. 그들은 여전히 흥에 겨워서 놀고 있었다. 나는 눈짓으로 조덕근의 무리를 하나씩 불러서 나가는 길을 일러주어서 다 내어 보내고 다섯째로 내가 나가 보니 먼저 나온 네 녀석들은 담을 넘을 생각도 아니하고 밑에 소복히 모여 앉아서 벌벌 떨고 있었다.


나는 하나씩 하나씩 궁둥이를 떠받쳐서 담을 넘겨 보내고 마지막으로 내가 담을 넘으려 할 때 먼저 나간 녀석들이 용동 마루로 통하는 길에 면한 판장을 넘느라고 왈가닥거리고 소리를 내어서 경무청과 순검청에서 무슨 일이 난 줄 알고 비상소집의 호각 소리가 나고 옥문 밖에서는 벌써 퉁탕퉁탕하고 급히 달리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나는 아직도 옥 담 밑에 섰다. 인제는 내 방으로 돌아갈 수도 없은즉, 재빨리 달아나는 길밖에 없건마는 남을 넘겨주기는 쉬워도 길 반이나 넘는 담을 혼자 넘기는 어려웠다. 줄사다리로 어름어름 넘어갈 새도 없다. 옥문 열리는 소리, 죄수들이 떠들썩하는 소리까지 들려온다. 나는 죄수들이 물통을 마주 메는 한 길이나 되는 몽둥이를 짚고 몸을 솟구쳐서 담 꼭대기에 손을 걸고 저편으로 넘어 뛰었다.


이렇게 된 이상에는 내 길을 막는 자가 있으면 사생결단을 하고 결투를 할 결심으로 판장을 넘지 아니하고 내 쇠창을 손에 들고 바로 삼문을 나갔다. 삼문을 지키던 파수 순검들은 비상 소집에 들어간 모양이어서 거기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탄탄대로로 나왔다. 들어온 지 2년 만에 인천옥을 나온 것이었다. '기구한 젊은 때' 끝


방랑의 길(1) - 넓은 천지에 나와서


옥에서는 나왔으나 어디로 갈 바를 몰랐다. 늦은 봄 안개가 자욱한데다가 인천은 연전 서울 구경을 왔을 때에 한 번 지났을 뿐이라, 길이 생소하여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캄캄한 밤에 물결 소리를 더듬어서 모래사장을 헤매다가 훤히 동이 틀 때에 보니 기껏 달아난다는 것이 감리서 바로 뒤 용동 마루턱에 와 있었다.

 

사실 인천(제물포)라고 하는데 김구선생도 지리에 확실성을 가지지 않고 있다.


잠시 숨을 태우며 휘휘 둘러보노라니, 수십 보 밖에 순검 한 명이 칼 소리를 제그럭제그럭 하고 내가 있는 데로 달려오고 있었다. 나는 길가 어떤 가겟집 함실아궁이를 덮은 널판자 밑에 몸을 숨겼다. 순검의 흔들리는 환도집이 바로 코끝을 스칠 듯이 지나갔다.


아궁이에서 나오니 벌써 훤하게 밝았는데, 천주교당의 뾰죽집이 보였다. 그것이 동쪽인 줄 알고 걸어갔다.


나는 어떤 집에 가서 주인을 불렀다. 누구냐 하기로 "아저씨 나와 보세요"하였더니, 그는 나와서 의심스러운 눈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김창수인데 간밤에 인천 감리가 비밀히 석방하여 주었으나, 이 꼴을 하고 대낮에 길을 갈 수가 없으니, 날이 저물 때까지 집에 묵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주인은 안 된다고 거절하였다.


또 얼마를 가노라니까 모군꾼 하나가 상투바람에 두루마기를 걸치고 소리를 하며 내려왔다. 그는 식전에 막걸리집으로 가는 모양이었다. 나는 또 사실을 말하고 빠져나갈 길을 물었더니, 그 사람은 대단히 친절하게 나를 이끌고 좁은 뒷 골목길로 요리조리 사람의 눈에 안 띄게 화개동(花開洞) 마루터기까지 가서 이리 가면 수원이요, 저리 가면 시흥이니, 마음대로 어느 길로든지 가라고 일러주었다. 미처 그의 이름을 못 물어본 것이 한이다.


나는 서울로 갈 작정으로 시흥 가는 길로 들어섰다. 내 행색을 보면 누가 보든지 참말로 도적놈이라고 할 것이다. 염병에 머리털은 다 빠져서 새로 난 머리카락을 노끈으로 비끄러매어서 솔잎상투로 짜고 머리에는 수건을 동이고, 두루마기도 없이 동저고릿 바람인데, 옷은 가난한 사람의 것이 아닌 새 것이면서 땅 밑으로 기어나올때에 군데군데 묻은 흙이 물이 들어서 스스로 살펴보아도 평상한 사람으로 보이지는 아니하였다.


인천 시가를 벗어나서 5 리쯤 가서 해가 떴다. 바람결에 호각 소리가 들리고 산에도 사람이 희끗희끗하였다. 내 이런 꼴로는 산에 숨더라도 수사망에 걸릴 것 같으므로 허허실실로 차라리 대로변에 숨으리라 하고 길가 잔솔밭에 들어가서 솔포기 밑에 몸을 감추고 드러누웠다. 감추어지지 않는 얼굴을 솔가지를 꺾어서 덮어놓았다.


아니나 다를까, 칼 찬 순경과 벙거지 쓴 압뢰들이 지껄이며, 내가 누워 있는 곁으로 지나갔다. 그들의 주고받는 말에서 나는, 조덕근은 서울로, 양봉구는 배로 달아난 것을 알았고, 내게 대해서는, "김창수는 장사니까 자기 어려울 거야. 허기야 잘 달아났지, 옥에서 썩으면 무얼하게"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나는 다 알 수가 있었다.


나는 온종일 솔포기 밑에 누워 있다가 순검이 누구누구며, 압뢰 김장석(金長石) 등이 도로 내 발뿌리를 지나서 인천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야 누웠던 자리에서 일어나 나오니, 벌써 황혼이었다. 나오기는 하였으나 어제 이른 저녁밥 이후로는 물 한 방울 못 먹고 눈 한 번 못 붙인 나는 배는 고프고 몸이 곤하여 촌보를 옮기기가 어려웠다.


나는 가까운 동네 어떤 집에 가서, 황해도 연안에 가서 쌀을 사가지고 오다가 북성고지 앞에서 배 파선을 한 서울 청파 사람이라고 말하고 밥을 좀 달라고 하였더니, 주인이 죽 한 그릇을 내다 주었다. 나는 누구에게 정표(情表)로 받아서 몸에 지니고 있던 화류 면경을 꺼내어 그 집 아이에게 뇌물로 주고 하룻밤 드새기를 청하였으나 거절을 당하였다.


그러고 보니 죽 한 그릇에 엽전 한 냥을 주고 사먹은 셈이 되었다. 그 때 엽전 한 냥이면 쌀 한 말 값도 더 되었다. 나는 또 한 집 사랑에 들어갔으나 퇴짜를 맞고 하릴없이 방앗간에서 자기로 하였다. 나는 옆에 놓인 짚단을 날라다가 깔고 덮고 드러누웠다. 인천 감옥 이태의 연극이 이에 막을 내리고 방앗간 잠이 둘째 막의 개시로구나 하면서 소리를 내어서 '손무자'와 '삼략'을 외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거지가 글을 다 읽는다" 하는 것은 상관없으나 또 어떤 사람이,

"예사 거지가 아니야. 아까 저 사랑에 온 것을 보니 수상한 사람이데..." 하는 말에는 대단히 켕겼다. 그래서 나는 미친 사람의 모양을 하느라고 귀둥귀둥 혼자 욕설을 퍼붓다가 잠이 들었다.


새벽 일찍 일어나서 버리고개를 향하고 소로로 가다가 밥을 빌어먹을 생각으로 어떤 집 문전에 섰다. 나는 거지들이 기운차게 너출지게 밥을 내라고 떠들던 양을 생각하고,


"밥 좀 주시우"


하고 불러 보았으나, 내깐에는 소리껏 외친다는 것이 개가 짖을 만한 소리밖에 안 나왔다. 주인은 밥은 없으니 숭늉이나 먹으라고 숭늉 한 그릇을 주었다. 그것을 얻어먹고 또 걸었다.


오랫동안 좁은 세계에서 살다가 넓은 천지에 나와서 가고 싶은 대로 활활 갈 수 있는 것이 참으로 신통하고 상쾌하였다. 나는 배고픈 줄도 모르고 옥에서 배운 시조와 타령을 하면서 부평, 시흥을 지나 그날 당일양화도 나루에 다다랐다. 강만 건너면 서울이언마는 날은 저물고 배는 고프고 또 나룻배를 탈래야 선가(船價) 줄 돈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동네 서당을 찾아 들어갔다.


선생과 인사를 청한즉, 그는 내가 나이 어리고 의관이 분명치 못함을 봄인지 초면에 하대를 하였다. 나는 정색하고,


"선생이 이렇게 교만무례하고 어찌 남을 가르치겠소? 내가 일시 운수가 불길하여 길에서 도적을 만나 의관과 행리를 다 빼앗기고 이 꼴로 선생을 대하게 되었소마는 사람을 그렇게 괄시하는 법이 어디 있소. 허, 예절을 알 만한 이를 찾아온다는 것이, 어 참 봉변이로고"


하고 일변 책하고 일변 빼었다. 선생은 곧 사과하고 다시 인사를 청하였다. 그러고는 그날 밤을 글 토론으로 지내고 아침에는 선생이 아이 하나에게 편지를 써주기에 나룻배 주인에게 전하여 나를 선가 없이 건너게 하였다.


나는 옥에서 사귀었던 진 오위장(陳 五衛將)을 찾아갔다. 이 사람은 남영희궁에 청지기로 있는 사람으로서 배오개 유기장이 5,6명과 짜고 배를 타고 인천 바다에 떠서 백동전을 사주(私鑄, 동전을 위조하는 것)하다가 깡그리 붙들려서 1년 동안이나 나와 함께 옥살이를 하였다. 그들은 내게 생전 못잊을 신세를 졌노라 하여 날더러 출옥하는 날에는 꼭 찾아달라는 말을 남기고 나왔다.


2. 감옥 친구들을 찾아


내가 영희궁을 찾아간 것은 황혼이었다. 진 오위장은 마루 끝에 나와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더니,


"아이구머니, 이게 누구요?"


하고 버선발로 마당에 뛰어내려와서 내게 매어달렸다. 그리고 내 손을 끌고 방으로 들어가서 내가 나온 곡절을 듣고는 일변 식구들을 불러서 내게 인사를 시키고, 일변 사람을 보내어 예전 공범들을 청해왔다. 그들은 내 행색이 수상하다 하여 '나는 갓을 사오리다', '나는 망건을 사오겠소', '나는 두루마기를 내리다' 하여 한 사람이 한 가지씩 추렴을 모아서 나는 3,4년 만에 의관을 하고 나니 저절로 눈물이 떨어졌다. 이렇게 나는 날마다 진 오위장 일파와 모여 놀며 며칠을 유련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나는 조덕근을 두 번이나 찾아갔으나, 이 핑계 저 핑계하고 나를 따로 만나주지 아니하였다. 중되인인 나를 아는 체하는 것이 이롭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진 오위장 집에서 잘 먹고, 잘 놀고 수일을 쉬어서 여러 사람이 모아주는 노잣돈을 한 짐 잔뜩 걸머지고 삼남 구경을 떠나노라고 동작이 나루를 건넜다. 그 때에 내 심회가 심히 울적하여 승방뜰이라는 데서부터 술 먹기를 시작하여 매일 장취로 비틀거리며 걷는 길이 수원, 오산(烏山)장에 다다랐을 때에 벌써 한 짐 돈을 다 써 버리고 말았다.


나는 오산장에서 서쪽으로 가서 있는 김 삼척(金三陟)의 집을 찾기로 하였다. 주인은 삼척 영장을 지낸 사람으로서 아들이 6형제가 있는데 그 중에 맏아들인 김동훈이 인천항에서 장사를 하다가 실패한 관계로 인천옥에서 월여나 고생을 할 때에 나와 절친하게 되었었다. 그가 옥에서 나올 때 내 손을 잡고 꼭 후일에 서로 만나기를 약속한 것이었다. 나는 김 삼척 집에서 대환영을 받아서 그 아들 6형제로 더불어 밤낮으로 술을 먹고 소리를 하고 며칠을 놀다가 노자까지 얻어 가지고 또 길을 떠났다.


강경에 공종렬(孔鍾烈)을 찾으니, 그도 인천옥에서 사귄 사람으로서 그 어머니도 옥에 면회하러 왔을 때에 알았으므로 많은 우대를 받고 공종렬의 소개로 그의 매부 진 선전(陳宣傳)을 전라도 무주에 찾은 후, 나는 이왕 삼남에 왔던 길이니, 남원에 김형진을 찾아보리라 하고 이동(耳洞)을 찾아갔다. 동네 사람 말이 김형진의 집이 과연 대대로 이 동네에 살았으나 연전에 김형진이 동학에 들어서 가족을 끌고 도망한 후로는 소식이 없다고 한다. 나는 대단히 섭섭하였다.


전주 남문 안에서 약국을 하는 최군선(崔君善)이가 자기의 매부라는 말을 김형진한테 들었던 것을 기억하고 찾아갔으나, 최는 대단히 냉랭하게 그가 처남인 것은 사실이나 무거운 짐을 그에게 지우고 벌써 죽었다고 원망조로 말할 뿐이었다. 나는 비감을 누를 수 없어서 부중으로 헤매었다.


마침 그날이 전주 장날이어서 사람이 많았다. 나는 어떤 백목전 앞에 서서 백목을 파는 청년 하나를 보았다. 그의 모습이 김형진과 흡사하기로 그가 흥정을 하여 가지고 나오기를 기다려서 붙잡고,


"당신 김서방 아니오?" 하고 물은즉 그가 그렇다고 하기로 나는 다시,

"노형이 김형진 씨 계씨 아니시오?" 하였더니, 그는 무슨 의심이 났는지 머뭇머뭇하고 대답을 못한다. 나는,


"나는 황해도 해주 사는 김창수요. 노형 백씨 생전에 혹시 내 말을 못 들으셨소?" 하였더니, 그제서야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그의 형이 생전에 노상 내 말을 하였을 뿐 아니라 임종시에도 나를 못보고 죽는 것이 한이라고 하였다는 말을 하였다.


나는 그 청년을 따라서 금구 원평(金溝 院坪)에 있는 그의 집으로 갔다. 조그마한 농가였다. 그가 그 어머니와 형수에게 내가 왔다는 말을 고하니, 집안에서는 곡성이 진동하였다. 김형진이 죽은 지 열아흐레째 되는 날이었다.


나는 几硯(궤연:혼백이나 신주를 모셔 두는 기구)에 곡하고 늙은 어머니와 젊은 과수에게 인사를 하였다. 고인에게는 맹문(孟文)이라는 8,9세 되는 아들이 있고, 그의 아우에게는 맹열(孟悅)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나는 이 집에서 가버린 벗을 생각하고 수일을 더 쉬고 목포로 갔다. 그것도 무슨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때의 목포는 아직 신개항지(新開港地)여서 관청의 건축도 채 아니 된 엉성한 곳이었다. 여기서 우연히 양봉구를 만났다. 나와 같이 탈옥한 넷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에게서 나는 조덕근이가 다시 잡혀서 눈 하나가 빠지고 다리가 부러졌다는 말과 그 때에 당직이던 김가가 아편인으로 옥에서 죽었단 말을 들었다. 내게 관한 소문은 못들었다고 하였다. 양봉구는 약간의 노자를 내게 주고, 이곳은 개항장이 되어서 팔도 사람이 다 모여드는 데니 오래 머물 곳이 못된다 하여 어서 떠나라고 권하였다.


나는 목포를 떠나서 광주를 지나 함평에 이름난 육모정(六毛亭) 이 진사(李進士) 집에 과객으로 하룻밤을 잤다. 이 진사는 부유한 사람은 아니었으나 육모정에는 언제나 빈객이 많았고, 손님들께 조석을 대접할 때에는 이 진사도 손님들과 함께 상을 받았다. 식상은 주인이나 손님이나 일체 평등이요, 조금도 차별이 없었고 하인들이 손님들께 대하는 태도는 그 주인께 대하는 것과 꼭 같이 하였다. 이것은 주인 이 진사의 인격의 표현이어서 참으로 놀라운 규모요, 가풍이었다.


육모정은 이 진사의 정자여니와 그 속에는 침실, 식당, 응접실, 독서실, 휴양실 등이 구비되었다. 그 때에 글을 읽던 두 학동이 지금의 이재혁(李載爀), 이재승(李載昇) 형제다.


나는 하룻밤을 쉬어 떠나려 하였으나 이 진사는 굳이 만류하여 얼마든지 더 묵어서 가라는 말에는 은근한 진정이 풍겨 있었다. 나는 주인의 정성에 감동되어 육모정에서 보름을 묵었다.


내가 내일은 이 진사 집을 떠난다는 말을 듣고 나를 자기 집으로 청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나보다 다소 연장자(年長者)인 장년의 한 선비로 내가 육모정에 묵는 동안 날마다 와서 담화하던 사람이다.


나는 그의 청을 물리칠 수가 없어서 저녁밥을 먹으러 그의 집으로 갔다. 집은 참말 게딱지와 같고 방은 단 한 칸뿐이었다. 그 부인이 개다리 소반에 주인과 겸상으로 저녁상을 들여왔다. 주발 뚜껑을 열고 보니 밥은 아니요, 무엇인지 모를 것이었다. 한 숟가락을 떠서 입에 넣으니, 맛이 쓰기가 곰의 쓸개와 같았다.


이것은 쌀겨와 팥으로 만든 겨범벅이었다. 주인은 내가 이 진사 집에서 매일 흰밥에 좋은 반찬을 먹는 것을 보았지마는 조금도 안 되었다는 말도 없고, 미안하다는 빛도 없이 흔연히 저도 먹고 내게도 권하였다. 나는 그의 높은 뜻과 깊은 정에 감격하여 조금도 아니 남기고 다 먹었다.


3. 중이 되다


나는 함평을 떠나 강진, 고금도, 완도를 구경하고 장흥을 거쳐 보성으로 갔다. 보성서는 송곡면 - 지금은 득량면이라고 고쳤다 한다 - 득량리에 사는 종씨 김광언(金廣彦)이라는 이를 만나 그 여러 댁에서 40여 일이나 묵고 떠날 때에는 그 동네에 사는 선(宣) 씨 부인한테 필낭 하나를 신행 선물로 받았다.


보성을 떠나 나는 화순, 동복, 순창, 담양을 두루 구경하고 하동(河東) 쌍계사(雙溪寺)에 들러 칠자아자방(七字亞字房)을 보고 다시 충청도로 올라와 계룡산 갑사에 도착한 것은 감이 벌겋게 익어 달리고, 낙엽이 날리는 늦은 가을이었다.


나는 절에서 점심을 사먹고 앉았더니, 동학사(東鶴寺)로부터 왔노라고 점심을 시켜 먹는 유산객 하나가 있었다. 통성명을 한즉, 그는 공주에 사는 이 서방이라고 하였다. 연기는 40이 넘은 듯한테, 그가 들려주는 자작의 시로 보거나 그의 말을 보거나 퍽 비관을 품은 사람이었다.


비록 초면이라도 피차가 다 허심탄회한 말이 서로 맞았다. 어디로 가는 길이냐고 묻기에 나는 개성에서 성장하여 장사를 업으로 삼다가 실패하여 홧김에 강산 구경을 떠나서 삼남으로 돌아다닌 지가 1년이 장근하노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마곡사(麻谷寺)가 40리밖에 아니 되니 가서 구경하자고 하였다.


마곡사라면 내가 어려서 '동국명현록(東國名賢錄)'을 읽을 때에 서화담 경덕(徐花潭 敬德)이 마곡사 팥죽 가마에 중이 빠져 죽는 것을 대궐 안에서 동지 하례를 하면서 보았다는 말에서 들은 일이 있었다. 나는 이 서방과 같이 마곡사를 향하여 계룡산을 떠났다.


길을 걸으면서 이 서방은 홀아비라는 것이며, 사숙에 훈장으로 여러 해 있었다는 것이며, 지금은 마곡사에 들어가 중이 되려 하니 나도 같이 하면 어떠냐고 하였다. 나도 중이 될 마음이 없지는 아니하나 돌연히 일어난 문제라 당장에 대답은 아니하였다.


마곡사 앞 고개에 올라선 때는 벌써 황혼이었다. 산에 가득 단풍이 누릇불긋하여 '유자비춘풍(遊子悲秋風)'의 감회를 깊게 하였다.


마곡사는 저녁 안개에 잠겨 있어서 풍진에 더럽힌 우리의 눈을 피하는 듯하였다. 뎅뎅, 인경이 울려온다. 저녁 예불을 아뢰는 소리다. 일체 번뇌를 버리라 하는 것같이 들렸다.


이 서방이 다시 다진다. "김형, 어찌하시려오? 세사를 다 잊고 나와 같이 중이 됩시다."


나는 웃으며, "여기서 말하면 무엇하오? 중이 되려는 자와 중을 만드는 자와 마주 대한 자리에서 작정합시다."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는 안개를 헤치고 고개를 내려서 산문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들어간다. 걸음마다 내 몸은 더러운 세계에서 깨끗한 세계로, 지옥에서 극락으로, 세간에서 출세간으로 옮아가는 것이었다. 매화당(梅花堂)을 지나 소리쳐 흐르는 내 위에 걸린 긴 나무다리를 건너 심검당(尋劍堂)에 들어가니 머리 벗어진 노승 한 분이 그림 폭을 펴놓고 보다가 우리를 보고 인사한다.


이 서방은 전부터 이 노승과 숙면이었고, 그는 포봉당(抱鳳堂)이라는 이였다. 이 서방이 나를 심검당에 두고 자기는 다른 데로 갔다. 이윽고 나를 위하여 밥이 나왔다. 저녁상을 물리고 앉았노라니, 어떤 하얗게 센 노승 한 분이 와서 내게 공손히 인사를 한다.


나는 거짓말로 본래 송도 태생이더니, 조실부모하고 강근지친(强近之親 : 아주 가까운 일가)도 없어서 혈혈단신이 강산 구경이나 다니노라고 말하였다. 그런즉 그 노승은 속성은 소(蘇) 씨요, 익산 사람으로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된 지가 50년이나 되노라 하고, 은근히 나더러 상좌가 되기를 청하였다.


나는 본시 재질이 둔탁하고 학식이 천박하여 노사에게 누가 될까 저어하노라고 겸사하였더니 그는 내가 상좌만 되면, 고명한 스승의 밑에서 불학을 공부하면 장차 큰 강사가 될는지 아느냐고 강권하였다.


이튿날 이 서방은 벌써 머리를 달걀같이 밀고 와서 내게 문안을 하고 하는 말이, 하은당(荷隱堂)은 이 절 안에 갑부인 보경(寶鏡) 대사의 상좌이니 내가 하은당의 상좌만 되면 내가 공부하기에 학비 걱정은 없을 것이라고 어서 삭발하기를 권하였다. 나도 하룻밤 청정한 생활에 모든 세상 잡념이 식은 재와 같이 되었으므로 출가하기로 작정하였다.


얼마 후에 나는 놋칼을 든 사제 호덕삼(扈德三)을 따라서 냇가에 나아가 쭈그리고 앉았다. 덕삼은 삭발 진언을 송알송알 부르더니 머리가 섬뜩하며 내 상투가 모래 위에 뚝 떨어진다. 이미 결심을 한 일이언마는 머리카락과 함께 눈물이 떨어짐을 금할 수 없었다.


법당에서는 종이 울렸다. 나의 득도식(得度式)을 아뢰는 것이었다. 산내 각 암자로부터 착가사 장삼한 수백 명의 승려가 모여들고 향적실에서는 공양주가 불공밥을 짓고 있었다. 나도 감은 장삼 붉은 가사를 입고 대웅보전으로 이끌려 들어갔다. 곁에서 덕삼이가 배불하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은사 하은당이 내 법명을 원종(圓宗)이라고 명하며 불전에 고하고 수계사 용담(龍潭) 화상이 경문을 낭독하고 내게 오계(五戒)를 준다. 예불의 절차가 끝난 뒤에는 보경 대사를 위시하여 산중에 나 많은 여러 대사들께 차례로 절을 드렸다. 그리고는 날마다 절하는 공부를 하고 진언집을 외고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을 읽고 중의 여러 가지 예법과 규율을 배웠다. 정신 수양에 대하여는,


'승행에는 하심이 제일이라'


하며 교만한 마음을 떼는 것을 주로 삼았다. 사람에게 대하여서만 아니라 짐승, 벌레에 대하여서까지도 공경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이었다. 어젯밤 나더러 중이 되라고 교섭할 때에는 그렇게도 공손하던 은사 하은당이 오늘 낮부터는,


"얘, 원종아!" 하고 막 해라를 하고,


"이놈 생기기를 미련하게 생겨 먹었으니 고명한 중이 될까 싶지 않다. 상판대기가 저렇게도 밉게 생겼을까. 어서 가서 나무도 해오고 물도 길어!"


하고 막 종으로 부리려 든다. 나는 깜짝 놀랐다. 중이 되면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다. 내가 망명객이 되어 사방으로 유리하는 몸이 되었지마는 영웅심도 있고 공명심도 있고 평생에 한이 되던 상놈의 껍질을 벗고 양반이 되어도 월등한 양반이 되어서 우리 집을 멸시하던 양반들을 한 번 내려다보겠다는 생각을 가슴속에 감추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중놈이 되고 보니 이러한 허영적인 야심은 불씨 문중에서는 터럭끝만치도 용납하지 못하는 악마여서 이러한 악념이 마음에 움틀 때에 호법선신(護法善神)의 힘을 빌려서 일체법공(一切法空)의 칼로 뿌리째 베어버려야 한다. 내가 어쩌다가 이런 데를 들어왔나 하고 혼자 웃고 혼자 탄식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기왕 중이 되었으니 하라는 대로 순종할 길밖에 없었다. 나는 장작도 패고 물도 긷고 하라는 것은 다 하였다.


4. 마곡사를 떠나다


하루는 물을 길어오다가 물통 하나를 깨뜨린 죄로 스님한테 눈알이 빠지도록 야단을 맞았다. 어떻게 심하게 스님이 나를 나무라셨던지 보경당 노스님께서 한탄을 하셨다. 전자에도 남들이 다 괜찮다는 상좌를 들여주었건마는 저렇게 못 견디게 굴어서 다 내어쫓더니 이제 또 저렇게 하니 원종인들 오래 붙어 있을 수가 있나, 잘 가르치면 제 앞쓸이는 할 만하건마는 하고, 하은당을 책망하셨다. 이것을 보니 나는 적이 위로가 되었다.


나는 낮에는 일을 하고 밤이면 다른 사미(沙彌)들과 같이 예불하는 법이며 '천수경' '심경' 같은 것을 외우고 또 수계사이신 용담 스님께 '보각서장(普覺書狀)'을 배웠다. 용담은 당시 마곡에서 불학만이 아니라 유가의 학문도 잘 아시기로 유명한 이였다. 학식만이 아니라, 위인이 대체를 아는 이여서 누구나 존경할 만한 높은 스승이었다.


용담께 시중하는 상좌 혜명(慧明)이라는 젊은 불자가 내게 동정이 깊었고 또 용담 스님도 하은당의 가풍이 괴상함을 가끔 걱정하시면서 나를 위로하셨다. '견월망지(見月忘指)'라, 달을 보면 그만이지 그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야 아무려면 어떠냐 하는 말씀을 하시고, 또 칼날 같은 마음을 품어 성나는 마음을 끊으라 하여 '인(忍)'자의 이치를 가르쳐 주셨다. 하은당이 심하게 나를 볶으시는 것이 모두 내 공부를 도우심으로 알라는 뜻이다.


이 모양으로 살아가는 동안에 반 년의 세월이 흘러서 무술년도 가고 기해년이 되었다. 나는 고생이 되지마는 다른 중들은 나를 부러워하였다. 보경당이나 하은당이 다 70, 80 노인이시니 그 분네만 작고하시면 그 많은 재산이 다 내 것이 된다는 것이었다. 추수기를 보면 백미로만 받는 것이 2백 석이나 되고, 돈과 물건으로 있는 것이 수십 만 냥이나 되었다. 그러나 나는 청정적멸(淸淨寂滅)의 도법에 일생을 바칠 생각이 생기지 아니하였다.


인천옥에서 떠난 후에 소식을 모르는 부모님도 그 후에 어찌 되셨는지 알고 싶고, 나를 구해 내려다가 집과 몸을 아울러 망쳐 버린 김주경의 간 곳도 찾고 싶고, 해주 비동의 고후조(高後凋) 선생 - 후조는 고 선생의 당호 -도 뵙고 싶고, 그 때에 천주학을 한다고 해서 대의의 반역으로 곡해하고 불평을 품고 떠난 청계동의 안 진사를 찾아 사과도 할 마음이 때때로 흉중에 오락가락하여 보경당의 재물에 탐을 낼 생각은 꿈에도 일어나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하루는 보경당께 뵈옵고,


"소승이 기왕 중이 된 이상에는 중으로서 배울 것을 배워야 하겠사오니 금강산으로 가서 경 공부를 하고 일생에 충실한 불자가 되겠나이다" 하고 아뢰었다.


보경당은 내 말을 들으시고,


"내 벌써 그럴 줄 알았다. 네 원이 그런데야 할 수 있느냐"하시고 즉석에 하은당을 부르셔서 한참 서로 다투시다가 마침내 나에게 세간을 내어 주신다. 나는 백미 열 말과 의발(衣鉢)을 받아 가지고 하은당을 떠나 큰 방으로 옮아왔다. 그날부터 나는 자유다. 나는 그 쌀 열 말을 팔아서 노자를 만들어 가지고 마곡을 떠나 서울로 향하였다.


수일을 걸어 서울에 도착한 것은 기해년 봄이었다. 그 때까지 서울 성 안에는 승니를 들이지 않는 국금(國禁)이 있었다. 나는 문 밖으로 이 절 저 절 돌아다니다가 서대문 밖 새 절에 가서 하루 묵는 중에 사형 혜명을 만났다. 그는 장단 화장사(華藏寺)에 은사를 찾아가는 길이라고 하고, 나는 금강산에 공부 가는 길이라고 하였다.


혜명과 작별하고 나는 풍기 혜정(慧定)이라는 중을 만났다. 그가 평양 구경을 가는 길이라 하기로 나와 동행하자고 하였다. 임진강을 건너 송도를 구경하고 나는 해주 감영을 보고 평양으로 가자 하여 혜정을 이끌고 해주로 갔다.


수양산(首陽山) 신광사(神光寺) 부근 북암(北菴)이라는 암자에 머물면서 나는 혜정에게 약간 내 사정을 통하고, 그에게 텃골 집에 가서 내 부모와 비밀히 만나 그 안부를 알아오되 내가 잘 있단 말만 사뢰고 어디 있단 것은 알리지 말라고 부탁하였다. 이렇게 부탁해 놓고 혜정의 회보만 기다리고 있더니 바로 4월 29일 석양에 혜정의 뒤를 따라 부모님 양주께서 오셨다.


혜정에게서 내 안부를 들으신 부모님은 네가 내 아들이 있는 곳을 알 터이니 너만 따라가면 내 아들을 볼 것이다 하고 혜정을 따라 나서신 것이었다.


북암에서 하루를 묵어서 양친을 모시고 나는 중의 행색으로 혜정과 같이 평양 길을 떠났다. 길을 가면서 한 마디씩 하시는 말씀을 종합하건대, 무술년 3월 초아흐렛날 부모님은 해주 본향에 돌아오셨으나 순검이 뒤따라와서 두 분을 다 잡아다가 3월 13일 인천옥에 가두었다. 어머니는 얼마 아니하여 놓으시고 아버지는 석 달 후에야 석방되셨다.


그로부터는 두 분이 고향에 계셔서 내 생사를 몰라 주야로 마음을 졸이셨고, 꿈자리만 사나와도 종일 식음을 전폐하셨다. 그러하신 지 이태만에 혜정이 찾아간 것이었다. 만나고 보니 내가 살아 있는 것은 다행하나 중이 된 것은 슬프셨다 한다.


5월 초나흗날 평양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여관에서 쉬고, 이튿날인 단오날에 모란봉 그네 뛰는 구경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내 앞길에 중대한 영향을 준 사람을 만났다.


관동(貫洞) 골목을 지나노라니 어떤 집 사랑에, 머리에 지포관을 쓰고 몸에 심수의를 입고 두 무릎을 모으고 점잖게 꿇어 앉아 있는 사람을 보았다. 나는 문득 호기심을 내어 한 번 수작을 붙여보리라 하고 계하에 이르러,


"소승 문안 아뢰오"


하고 합장하고 허리를 굽혔다. 그 학자님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더니 들어오라고 하였다. 들어가 인사를 한즉, 그는 간재(艮齋) 전 우(田愚)의 문인 최재학(崔在學)으로 호를 극암(克菴)이라 하여 상당히 이름이 높은 이였다.


나는 공주 마곡사 중이란 말과 이번 오는 길에 천안 금곡(金谷)에 전 간재 선생을 찾았으나 마침 출타하신 중이어서 못 만났다는 말과 이제 우연히 고명하신 최 선생을 뵈오니 이만 다행이 없다는 말을 하고 몇마디 도리의 문답을 하였더니 최 선생은 나를 옆에 앉은 어떤 수염이 좋고 위풍이 늠름한 노인에게 소개하였다.


그는 당시 평양 진위대에서 참령으로 있는 전효순(全孝淳)이었다. 소개가 끝난 뒤에 최 극암은 전 참령에게,


"이 대사는 학식이 놀라우니 영천암(靈泉菴) 방주를 내이시면 영감 자제와 외손들의 공부에 유익하겠소. 영감 의향이 어떠하시오?" 하고 나를 추천한다.


5. 집으로, 강화로


전 참령은,


"거 좋은 말씀이오. 지금 곁에서 듣는 바에도 대사의 고명하심을 흠모하오. 대사 의향이 어떠시오? 내가 내 자식놈 하나와 외손자놈들을 최 선생께 맡겨서 영천암에서 공부를 시키고 있는데 지금 있는 주지승이 성행이 불량하여 술만 먹고 도무지 음식 제절을 잘 돌아보지를 아니하여서 곤란막심하던 중이오"하고 내 허락을 청하였다. 나는 웃으며,


"소승의 방탕이 본래 있던 중보다 더할지 어찌 아시오?" 하고 한 번 사양했으나 속으로 다행히 여겼다. 부모님을 모시고 구걸하기도 황송하던 터이라 한 곳에 자리를 잡고 싶었던 까닭이다.


전 참령은 평양 서윤(平壤庶尹) 홍순욱(洪淳旭)을 찾아가더니 얼마 아니하여 '승 원종(僧圓宗)으로 영천사(靈泉寺) 방주(房主)를 차정(差定)함' 하는 첩지를 가지고 와서 즉일로 부임하라고 나를 재촉하였다. 이리하여서 나는 영천암 주지가 되었다.


영천암은 평양서 서쪽으로 약 40리, 대보산(大寶山)에 있는 암자로서 대동강 넓은 들과 평양을 바라보는 경치 좋은 곳에 있었다. 나는 혜정과 같이 영천암으로 가서 부모님을 조용한 방에 거처하시게 하고 나는 혜정과 같이 한 방을 차지하였다. 학생이란 것은 전효순의 아들 병헌(炳憲), 그의 사위 김윤문(金允文)의 두 아들 장손(長孫), 중손(仲孫), 차손(次孫)과 그밖에 김동원(金東元) 등 몇몇이 있었다.


전효순은 간일하여 좋은 음식을 평양에서 지워보내고 또 산밑 신흥동(新興洞)에 있는 육고에 영천사에 고기를 대기로 하여 나는 매일 내려가서 고기를 한 짐씩 져다가 끓이고 굽고 하여 중의 옷을 입은 채로 터놓고 막 먹었다. 때때로 최재학을 따라 평양에 들어가서도 사숭재(四崇齋)에서 시인 황경환(黃景煥) 등과 시화나 하고 고기로 꾸미한 국수를 막 먹었다. 그리고 염불을 아니하고 시만 외니 불가에서 이르는바 '손에 돼지 대가리를 들고 입으로 경을 읽는' 중이 되고 말았다.


이리하여 시승(詩僧) 원종이라는 칭호는 얻었으나 같이 와 있던 혜정에게 실망을 주었다. 혜정은 내 심신이 쇠하고 속심(俗心)만 증장하는 것을 보고 매우 걱정하였으나 고기 안주에 술취한 중의 귀에 그런 충고가 들어올 리가 없었다.


그는 내 불심(佛心)이 회복되기 어려운 것을 보고 영천암을 떠난다 하여 행리를 지고 나서서 산을 내려가다가는 차마 나와 작별하기가 어려워서 되돌아오기를 달포나 하다가 마침내 경상도로 간다고 떠나고 말았다. 아버지도 내가 다시 머리를 깎는 것을 원치 아니하여서 나는 머리를 기르고 중노릇을 하다가 그 해 가을도 늦어서 나는 다리를 들여서 상투를 짜고 선비의 의관을 하고 부모를 모시고 해주 본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에 돌아온 나를 환영하는 사람은 없고 창수가 돌아왔으니 또 무슨 일 저지르기를 하지나 않나 하고 친한 이는 걱정하고 남들은 비웃었다. 그 중에도 준영 계부는 아무리 하여도 나를 신임하지 아니하셨다. 그는 지금은 마음을 잡아서 그 중씨(仲氏)이신 아버지께도 공손하고 농사도 잘 하시건만은, 내게 대하여서는 할 수 없는 난봉으로 아시는 모양이어서,


"되지 못한 그 놈의 글 다 내버리고 부지런히 농사를 한다면 장가도 들여주고 살림도 시켜주지만 그렇지 아니한다면 나는 몰라요"


하고 부모님께 나를 농군이 되도록 명령하시기를 권하셨다. 그러나 부모님은 나를 농군을 만들 뜻은 없으셔서 그래도 무슨 큰 뜻이 있어 장래에 이름난 사람이 되려니 하고 내게 희망을 붙이시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내가 농군이 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문제가 아버지 형제분 사이에 논쟁이 되고 있는 동안에 기해년도 다 가고 경자년(更子年) 봄 농사일을 시작할 때가 되었다.


계부는 조카인 나를 꼭 사람을 만들려고 결심하신 모양이어서 새벽마다 우리 집에 오셔서 내 단잠을 깨워서 밥을 먹여 가지고는 가래질터로 끌고 나가셨다. 나는 며칠 동안 순순히 계부의 명령에 복종하였으나 아무리 하여도 마음이 붙지 아니하여 몰래 강화를 향하여 고향을 떠나고 말았다. 고 선생과 안 진사를 못 찾고 가는 것이 섭섭하였으나 아직 내어 놓고 다닐 계제도 아니므로 생소한 곳으로 가기로 한 것이었다.


나는 김두래(金斗來)라고 변명(變名)하고 강화에 도착하여서 남문 안 김주경의 집을 찾으니 김주경은 어디 갔는지 소식이 없다 하고 그 셋째 아우 진경(鎭卿)이라는 사람이 나와서 나를 접대하였다.


"나는 연안 사는 김두래일세. 자네 백씨와 막연한 동지일러니 수년간 소식을 몰라서 전위해 찾아온 길일세"


하고 나를 소개하였다. 진경은 나를 반갑게 맞아 그 동안 지낸 일을 말하였다. 그 말에 의하면 주경은 집을 떠난 후로 3,4년이 되어도 음신(音信)이 없어서 진경이가 형수를 모시고 족카들을 기르고 있다 한다. 집은 비록 초가나 본래는 크고 넓게 썩 잘 지었는데 여러 해 거두지를 아니하여 많이 퇴락되었다.


사랑에는 평소에 주경이 앉았던 보료가 있고, 신의를 어기는 동지를 친히 벌하기에 쓰던 것이라는 나무 몽둥이가 벽상에 걸려 있다. 나와 노는 일곱 살 먹은 아이가 주경의 아들인데 이름이 윤태(潤泰)라고 한다.


나는 진경에게 모처럼 그 형을 찾아왔다가 그저 돌아가기가 섭섭하니 얼마 동안 윤태에게 글을 가르치면서 소식을 기다리고 싶다고 하였더니, 진경은 그렇지 않아도 윤태와 그 중형(仲兄)의 두 아들이 글을 배울 나이가 되었건마는 적당한 선생이 없어서 놀리고 있었다는 말을 하고 곧 그 중형 무경에게로 가서 조카 둘을 데려왔다.


나는 이날부터 촌 학구(學究)가 된 것이었다. 윤태는 동몽선습, 무경의 큰 아들은 '사략초권(史略初卷)', 작은 놈은 천자문을 배우기로 하였다. 내가 글을 잘 가르친다는 소문이 나서 차차 학동이 늘어서 한 달이 못 되어 30명이나 되었다. 나는 심혈을 다하여 가르쳤다. 이렇게 한 지 석 달을 지낸 어떤 날 진경은 이상한 소리를 혼자 중얼거렸다.


"글세, 유인무(柳仁茂)도 우스운 사람이야. 김창수가 왜 우리 집에를 온담" 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 말에 뜨끔하였으나 모르는 체하였다. 그래도 진경은 내게 설명하였다. 그 말은 이러하였다.


유인무는 부평 양반으로서 연전상제로 읍에서 30리쯤 되는 곳에 이우(移寓)해 와서 3년쯤 살다가 간 사람인데, 그때에 김주경과 반상(班常)의 별을 초월하여 서로 친하게 지낸 일이 있었는데 김창수가 인천옥을 깨뜨리고 도망한 후에 여러 번째 해주 김창수가 오거든 급히 알려달라는 편지를 하였는데 이번에 통진 사는 이춘백(李春伯)이라는, 김주경과도 친한 친구를 보내니 의심 말고 김창수의 소식을 말하라는 것이었다.


(6) 유인무를 만나다


나는 진경이가 내 행색을 아나 떠보려고,


"김창수가 그래 한 번도 안 왔나?" 하고 물었다. 진경은 딱하다는 듯,

"형장도 생각해 보시오. 여기서 인천이 지척인데 피신해 다니는 김창수가 왜 오겠소" 한다.

"그럼 유인무가 왜놈의 염탐꾼인 게지."

나는 이렇게 진경에게 물어보았다. 진경은,


"아니오. 유인무라는 이는 그런 양반이 아니오. 친히 뵈온 적은 없으나, 형님 말씀이 유 생원은 보통 벼슬하는 양반과는 달라서 학자의 기풍이 있다고 하오"


하고 유인무의 인물을 극구 칭송한다. 나는 그 이상 더 묻는 것도 수상쩍을 것 같아서 그만 하고 입을 다물었다.


이튿날 조반 후에 어떤 키가 후리후리하고 얼굴이 숨숨 얽은 30세나 되었음직한 사람이 서슴지 않고 사랑으로 들어오더니, 내 앞에서 글을 배우고 있던 윤태를 보고,


"그 새에 퍽 컸구나. 안에 들어가사 작은 아버지 나오시래라. 내가 왔다고..." 하는 양이 이춘백이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이윽고 진경이가 윤태를 앞세우고 나와서 그 손님에게 인사를 한다.


"백씨 소식 못 들었지?"

"아직 아무 소식 없습니다."

"허어, 걱정이로군. 유인무의 편지 보았지?"

"네, 어제 받았습니다."


주객간에 이런 문답이 있고는 진경이가 장지를 닫아서 내가 앉아 있는 방을 막고 둘이서만 이야기를 한다. 나는 아이들의 글 읽는 소리는 아니 듣고 두 사람의 말에만 귀를 기울였다. 그들의 문답은 이러하였다.


"유인무란 양반이 지각이 없으시지, 김창수가 형님도 안 계신 우리 집에 왜 오리라고 자꾸 편지를 하는 거야요?"


"자네 말이 옳지마는 여기밖에 알아볼 데가 없지 아니한가. 그가 해주 본 고향에 갔을 리는 없고 설사 그 집에서 김창수 있는 데를 알기로서니 발설을 할 리가 있겠나. 유인무로 말하면 아래녘에 내려가 살다가 서울 다니러 왔던 길에 자네 백씨가 김창수를 구해 내려고 가산을 탕진하고 부지거처(不知去處)로 피신했다는 말을 듣고 자네 백씨의 의기를 장히 여겨서 아무리 하여서라도 김창수를 건져내어야 한다고 결심하였으나, 법으로 백씨가 한 것을 다하여도 안 되었으니 인제 힘으로 할 수밖에 없다고 하여서 열 세 명 결사대를 조직하였던 것일세. 나도 그 속한 사람이야.


그래 가지고 인천항 중요한 곳 7, 8 처에 석유를 한 통씩 지고 들어가서 불을 놓고 그 소란통에 옥을 깨뜨리고 김창수를 살려내기로 하고, 유인무가 날더러 두 사람을 데리고 인천에 가서 감옥 형편을 알아오라 하기로 와 본즉, 김창수는 벌써 사흘 전에 다른 죄수 네 명을 데리고 달아난 뒤란 말이야. 일이 이렇게 된 것일세. 그러니 유인무가 자네 백씨나 김창수의 소식을 알고 싶어할 것이 아닌가. 그래 정말 김창수한테서 무슨 편지라도 온 것이 없나?"

"편지도 없습니다. 편지를 보내고 회답을 기다릴 만하면 본인이 오지요."

"그도 그러이."

"이 생원께서는 인제 서울로 가시렵니까?"

"오늘은 친구나 몇 찾고, 내일 가겠네. 떠날 때에 또 옴세." 이러한 문답이 있고 이춘백은 가 버렸다.


나는 유인물를 믿고 그를 찾기로 결심하였다. 내가 그처럼 성의를 가진 사람을 모른 체할 수는 없었다. 설사 그가 성의를 가장한 염탐꾼일는지 몰느다 하여도 군자는 가기이방(可欺以方)이라 의리로 알고 속는 것이 내 허물은 아니다. 이만큼 하는데도 안 믿는다면 그것은 나의 불의다. 그래서 나는 진경에게 이튿날 이춘백이 오거든 나를 그에게 소개하기를 청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나는 진경에게 내가 김창수라는 것을 자백하고 유인무를 만나기 위하여 이춘백을 따라서 떠날 것을 말하였다. 진경은 깜짝 놀랐다. 그리고,


"형님이 과시 그러시면 제가 만류를 어찌 합니까?" 하고 인천옥의 사령반수로서 처음으로 김주경에게 내 말을 알린 최덕만은 작년에 죽었다는 말을 하고, 학동들에게는 선생님이 오늘 본댁에를 가시니 다들 집으로 올라가라 하여 돌려보냈다.


이윽고 이춘백이 왔다. 진경은 그에게 나를 소개하였다. 나도 서울을 가니 동행하자고 하였더니 이춘백은 보통 길동무로 알고 좋다고 하였다. 진경은 춘백의 소매를 끌고 뒷방을 들어가서 이야기를 하는 모양이었다.


마침내 나는 이춘백과 함께 진경의 집을 떠났다. 남문통에는 30명 학동들과 그 학부형들이 길이 메이도록 모여서 나를 전송하였다. 내가 도무지 아무 훈료(訓料)도 아니 받고 심혈을 기울여서 가르친 것이 그들의 마음에 감동을 준 모양이어서 나는 기뻤다.


우리는 당일로 공덕리 박 진사(朴進士) 태병(台秉)의 집에 도착하였다. 이춘백이 먼저 안사랑으로 들어가서 얼마 있더니 키는 중키가 못되고 얼굴은 볕에 그을려 가무스름하고 망건에 검은 갓을 쓰고 검소한 옷을 입은 생원님 한 분이 나와서 나를 방으로 맞아들였다.


"내가 유인무요. 오시기에 신고하셨소. 남아하처불상봉(男兒何處不相逢)이라더니 마침내 창수 형을 만나고야 말았소" 하고 유인무는 희색이 만면하여 춘백을 보며


"무슨 일이고 한두 번 실패한다손 낙심할 것이 아니란 말일세. 끝끝내 구하면 반드시 얻는 날이 있단 말야. 내 전일에도 안 그러던가" 하는 말에서 나는 그가 나를 찾던 심경을 엿볼 수가 있었다. 나는 유인무에게,


"강화 김주경 댁에서 선생이 나 같은 사람을 위하여 허다한 근로를 하신 것을 알았고, 오늘 존안을 뵙거니와 세상에서 침소봉대(針小棒大)로 전하는 말을 들으시고 이제 실물로 보시니 낙심되실 줄 아오. 부끄럽소이다" 하였다.


내가 용두사미란 말로 내 과거를 겸사하였더니, 유인무는,

"뱀의 꼬리를 붙들고 올라가면 용의 머리를 보겠지요" 하고 웃었다.


주인 박태병은 유인무와 동서(同 )라고 하였다. 나는 박 진사 집에서 저녁을 먹고 문안 유인무의 숙소로 가서 거기서 묵으면서 음식점에 가서 놀기도 하고 구경도 돌아다녔다. 며칠을 지나서 유인무는 편지 한 장과 노자를 주어 나를 충청도 연산 광이다리 도림리(桃林里) 이천경(李天敬)의 집으로 지시하였다.



(7) 아버지가 돌아가심


이천경은 흔연히 나를 맞아서 한 달이나 잘 먹이고 잘 이야기하다가 또 편지 한 장과 노자를 주어서 나를 전라도 무주읍에서 삼포를 하는 이시발(李時發)에게 보내었다. 이시발의 집에서 하루를 묵고, 또 이시발의 편지를 받아 가지고 지례군(知禮郡) 천곡(川谷) 성태영(成泰英)을 찾아갔다.


성태영의 조부가 원주 목사를 지냈으므로 성 원주 댁이라고 불렀다. 대문을 들어서니 수청방, 상노방에 하인이 수십 명이요, 사랑에 앉은 사람들은 다 귀족의 풍이 있었다. 주인 성태영이 내가 전하는 이시발의 편지를 보더니 나를 크게 환영하여 상좌에 앉히니 하인들의 대우가 더욱 융숭하였다.


성태영의 자는 능하(能河)요, 호는 일주(一舟)였다. 성태영은 나를 이끌고 혹은 산에 올라 나물을 캐며, 혹은 물에 나아가 고기를 보는 취미 있는 소일을 하고, 혹은 등하에 고금사를 문답하여 어언 일삭이 되었는데, 하루는 유인무가 성태영의 집에 왔다.


반가이 만나서 성태영 집에서 하룻밤을 같이 자고 이튿날 아침에 같은 무주읍내에 있는 유인무의 집으로 같이 가서 그로부터는 거기서 숙식을 하였다. 유인무는 내가 김창수라는 본명으로 행세하기가 불편하리라 하여 이름은 거북 구(龜)자 외자로 하고 자를 연상(蓮上), 호를 연하(蓮下)라고 지어 주었다. 그리고 나를 부를 때에는 연하라는 호를 썼다.


유인무는 큰 딸은 시집을 가고 집에는 아들 형제가 있는데, 맏이의 이름은 한경(漢卿)이었고, 무주 군수 이 탁(李倬)도 그와 연척인 듯하였다.


유인무는 그동안 나를 이리저리로 돌린 연유를 설명하였다. 이천경이나 이시발이나 성태영이나 다 유인무와는 동지여서 새로운 인물을 얻으면 내가 당한 모양으로 이 집에서 한 달, 저 집에서 얼마, 이 모양으로 동지들의 집으로 돌려서 그 인물을 관찰하고 그 결과를 종합하여 그 인물이 벼슬하기에 합당하면 벼슬을 시키고 장사나 농사에 합당하면 그것을 시키도록 약속이 되어 있던 것이었다.


나는 이러한 시험의 결과로 아직 학식이 천박하니 공부를 더 시키도록 하고, 또 상놈인 내 문벌을 높이기 위하여 내 부모에게 연산 이천경의 가대(家垈)를 주어 거기 사시게 하고 인근 몇 양반과 결탁하여 우리 집을 양반 축에 넣자는 것이었다.


유인무는 이런 설명을 하고,


"아직 우리나라에서 문벌이 양반이 아니고는 일을 할 수가 없어" 하고 한탄하였다.


나는 유인무의 깊은 뜻에 감사하면서 고향으로 가서 2월까지에 부모님을 모시고 여산 이천경의 가대로 이사하기로 작정하였다. 유인무는 내게 편지 한 장을 주어서 강화 버드러지(長串) 주 진사(朱進士) 윤호(潤鎬)에게로 보내었다. 나는 김주경 집 소식을 염문하였으나 그는 여전히 소식이 없다고 하였다.


주 진사는 내게 백동전으로 4천 냥을 내어 주어 노자를 삼으라고 하였다. 대체 유인무의 동지는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었고, 그들은 편지 한 장으로 만사에 서로 어김이 없었다. 주 진사 집은 바닷가여서 동짓달인데도 아직 감나무에 감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고, 생선이 흔하여서 수일간 잘 대접을 받았다. 나는 백동전 4천 냥을 전대에 넣어서 칭칭 몸에 둘러감고 서울을 향하여 강화를 떠났다.


서울에 와서 유인무의 집에 묵다가 어느 날 밤에 아버지께서 '황천(黃泉)'이라고 쓰라시는 꿈을 꾸고 유인무에게 그 이야기를 하였다. 지난 봄에 아버지께서 병환으로 계시다가 조금 나으신 것을 뵙고 떠나서 서울에 와서 탕약 보제를 지어 우편으로 보내어 드리고, 이내 마음을 놓지 못하고 있던 차에 이러한 흉몽을 꾸니 하루도 지체할 수가 없어서 그 이튿날로 해주 길을 떠났다.


나흘 만에 해주읍 비동 고 선생을 뵈오니 지나간 4,5년간에 하그리 노쇠하신 줄은 몰라도 돋보기가 아니고는 글을 못보시는 모양이셨다.


나와 약혼하였던 선생의 장손녀는 청계동 김사집이란 어떤 농가집 며느리로 시집을 보내었다 하고, 나더러 아재라고 부르던 작은 손녀가 벌써 10여 세가 된 것이 나를 알아보고 여전히 아재라고 부르는 것이 감개무량하였다. 내가 왜를 죽인 일을 고 선생께서 유 의암에게 말씀하여 유 의암이 그의 저(著)인 '소의신편(昭義新遍)'의 속편에 나를 의기남아라고 써넣었다는 말씀도 하였다.


의암이 의병에 실패하고 평산으로 왔을 때에 고 선생은 내가 서간도(西間島)에 다녀왔을 때에 보고했던 것을 말씀하여 의암이 그리로 가서 근거를 정하고 양병하기로 하였다는 말씀도 하셨다. 의암이 거기서 공자상을 모시고 무사를 모아서 훈련하니 나도 그리로 감이 어떠냐 하셨으나 존중화양이적(尊中華攘夷狄)이란 고 선생 일류의 사상은 벌써 나를 움직일 힘이 없었다.


나는 내 신사상(新思想)을 힘써 말하였으나 고 선생의 귀에는 그것이 들어가지 아니하는 모양이어서,


"자네도 개화꾼이 되었네 그려" 하실 뿐이었다.


나는 서양의 문명의 힘이 어떻게 위대한 것을 말하고 이것은 도저히 상투와 공자왈, 맹자왈만으로는 저항할 수 없으니, 우리나라에서도 그 문명을 수입하여 신교육(新敎育)을 실시하고 모든 제도를 서양식으로 개혁함이 아니고는 국맥(國脈)을 보존할 수 없는 연유를 설명하였으나 차라리 나라가 망할지언정 이적(夷狄)의 도는 좇을 수 없다 하여 내 말을 물리치시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선생은 이미 나와는 딴 시대의 사람이었다.

 

보수문명과 신문명간에 갈등


그러나 고 선생 댁에는 당성냥 하나도 외국 물건이라고는 쓰지 않는 것이 매우 고상하게 보였다. 고 선생을 모시고 하룻밤을 수고 이튿날 떠난 것이 선생과 나와의 영결이 되고 말았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고 선생은 그 후 충청도 제천의 어느 일가 집에서 객사하셨다고 한다.


슬프고 슬프다. 이 말을 기록하는 오늘까지 30여 년에 나의 용심과 처사에 하나라도 옳은 것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온전히 청계동에서 받은 선생의 심혈을 쏟아서 구전심수(口傳心授)하신 교훈의 힘이다. 다시 이 세상에서 그 자애가 깊으신 존안을 뵈올 수 없으니 아아 슬프고 아프다.


나는 고 선생을 하직하고 떠나서 당일로 텃골 본집에 다다르니 황혼이었다. 안마당에 들어서니 어머니께서 부엌에서 나오시며,


"아아, 네가 오는구나. 아버지 병세가 위중하시다. 아까 아버지가 이 애가 왔으면 돌어오지 않고 왜 뜰에 서서 있느냐 하시기로 헛소리로만 여겼더니 네가 정말 오는구나" 하셨다.


내가 급히 들어가 뵈오니 아버지께서 반가와하시기는 하나 병세는 과연 위중하였다. 나는 정성껏 시탕(侍湯)을 하였으나, 약효를 보지 못한 지 열 나흘만에 아버지는 내 무릎을 베고 돌아 가셨다. 내 손을 꼭 쥐셨던 아버지의 손에 힘이 스르르 풀리시더니 곧 운명하셨다.


돌아가시기 전날까지도 나는 나의 평생의 지기인 유인무, 성태영 등의 호의대로 부모님을 연산으로 모시고 갓 만년에나 강씨, 이씨에게 상놈 대우를 받던 뼈에 사무치는 한을 면하시게 할까 속으로 기대하였더니 이제 아주 다시 못 돌아오실 길을 떠나시니 천고의 유한이다.


(8) 거듭 깨지는 혼담


집이 원래 궁벽한 산촌인데다 빈한한 가세로는 명의나 영약(靈藥)을 쓸 처지도 못되어서 나는 예전 할머니께서 돌아가실 땡 아버님이 단지(斷指)하시던 것을 생각하고 나도 단지나 하나 하여 일각이라도 아버지의 생명을 붙들어 보리라 하였으나, 내가 단지를 하는 것을 보시면 어머님이 마음 아파하실 것이 두려워서 단지 대신에 내 젋적다리의 살을 한 점 베어서 피를 받아 아버지의 입에 흘려 넣고 살은 불에 구워서 약이라고 하여 아버지가 잡수시게 하였다.


그래도 시원한 효험이 없는 것은 피와 살의 분량이 적은 것인 듯하기로 나는 다시 칼을 들어서 먼젓 것보다 더 크게 살을 떼리라 하고 어썩 뜨기는 떴으나 떼어 내자니 몹시 아파서 베어만 놓고 떼지는 못하였다. 단지나 할고(割股)는 효자나 할 것이지 나 같은 불효로는 못할 노릇이라고 자탄하였다. 독신 상제로 조객을 대하자니 상청(喪廳)을 비울 수는 없고 다리는 아프고 설한풍은 살을 에이고 하여서 나는 다리 살을 벤 것을 후회하는 생각까지 났다.


유인무와 성태영에게 부고를 하였더니, 유인무는 서울에 없었다 하여 성태영이 혼자 나귀를 달려 5백 리 먼 길에 조상을 왔다.


나는 집상(執喪) 중에 아무 데도 출입을 아니 하고 준영 계부의 농사를 도와 드렸더니 계부는 매우 나를 기특하게 여기는 모양이어서 당신이 돈 2백 냥을 내어서 이웃 동네 어떤 상놈의 딸과 혼인을 하라고 내게 명령하셨다. 아버지도 없는 조카를 당신의 힘으로 장가들이는 것은 당연한 의무요, 또 큰 영광으로 아시는 준영 계부는 내가 돈을 쓰고 하는 혼인이면 정승의 딸이라도 나는 아니한다고 거절하는 것을 보시고 대로하여 낫을 들고 내게 달려드시는 것을 어머니께서 가로막아서 나를 피하게 하여 주셨다.


임인년(壬寅年) 정월에 장연 먼 촌 일가댁에 세배를 갔더니 내게 할머니 되는 어른이 그 친정 당질녀로 17세 되는 처녀가 있으니 장가들 마음이 없는가고 물었다. 나는 세 가지 조건에만 맞으면 혼인한다고 하였다. 세 가지라는 것은 돈 말이 없을 것과 신부 될 사람이 학식이 있을 것과, 당자와 서로 대면하여서 말을 해볼 것이다.


어떤 날 할머니는 나를 끌고 그 처자의 집으로 갔다. 그 처자의 어머니는 딸 4형제를 둔 과댁으로서 위로 3형제는 다 시집을 가고 지금 나와 말이 되는 이는 여옥(如玉)이라는 끝에 딸이었다. 여옥은 국문을 깨치고 바느질을 잘 가르쳤다고 하였다. 집은 오막살이, 더할 수 없이 작은 집이었다.


나를 방에 들여앉혀 놓고 세 사람이 부엌에서 한참이나 쑥덕거리더니, 다른 것은 다 하여도 당자 대면만은 어렵다고 하였다.


"나와 대면하기를 꺼리는 여자라면 내 아내가 될 자격이 없소" 하고 내가 강경하게 나간 결과로 처녀를 불러들였다. 나는 처녀를 향하여 인사말을 부쳤으나 그는 잠잠하였다.


나는 다시,


"당신이 나와 혼인할 마음이 있소?" 하고 물었으나 역시 대답이 없었다.


나는 또,


"내가 지금 상중이니 1년 후에 탈상을 하고야 성례를 할 터인데, 그 동안은 나를 선생이라고 부르고 내게 글을 배우겠소?" 하고 물었다. 그래도 처녀의 대답 소리가 내 귀에는 아니 들렸는데 할머니와 처녀의 어머니는 여옥이가 다 그런다고 대답하였다고 하였다. 이리하여서 그와 나와는 약혼이 되었다.


집에 돌아와서 내가 이러이러한 처자와 약혼하였다는 말을 하여도 준영 계부는 믿지 아니하고 어머니더러 가서 보고 오시라고 하시더니, 어머니께서 알아보고 오신 뒤에야 준영 계부가,


"세상에 어수룩한 사람도 있다" 고 빈정거렸다.

나는 여자 독본이라 할 만한 것을 한 권 만들어서 틈만 나면 내 아내 될 사람을 가르쳤다.


어느덧 1년도 지나서 계묘년(癸卯年) 2월에 아버님의 담제( 祭)도 끝나고 어머니께서는 어서 나를 성례시켜야 한다고 분주하실 때에 여옥의 병이 위급하다는 기별이 왔다. 내가 놀라서 달려갔을 때에는 아직도 여옥은 나를 반겨할 정신이 있었으나 워낙 중한 장감(長感)인 데다가 의약도 쓰지 못하여 내가 간 지 사흘만에 그만 죽고 말았다. 나는 손수 그를 염습하여 남산에 안장하고 장모는 김동(金洞) 김윤오(金允五) 집에 인도하여 예수를 믿고 여생을 보내도록 하였다. 내 나이 30에 이 일을 당한 것이었다.


그해 2월에 장연읍 사직동으로 반이하였다. 오 진사(吳進士) 인형(寅炯)이 나로 하여금 집 걱정이 없이 공공사업에 종사케 하기 위하여 내게 준 가대로서 20여 마지기 전답에 산과 과수까지 낀 것이었다. 해주에서 종형 태수(泰洙) 부처를 옮겨다가 집일을 보게 하고 나는 오 진사 집 사랑에 학교를 설립하고 오 진사의 딸 신애(信愛), 아들 기원(基元), 오봉형(吳鳳炯)의 아들 둘, 오면형(吳勉炯)의 아들과 딸, 오순형(吳舜炯)의 딸 형제와 그밖에 남녀 몇 아이를 모아서 생도를 삼았다.


방 중간을 병풍으로 막아 남녀의 자리를 구별하였다. 순형은 인형의 셋째 아우로서 사람이 근실하오 예수를 잘 믿고 교육에 열심하여서 나와 함께 학생을 가르치고 예수교를 전도하여 1년 이내에 교회도 흥왕하고 학교도 차차 확장되었다. 당시에 주색장으로 출입하던 백남훈(白南薰)으로 하여금 예수를 믿어 봉양학교(鳳陽學校)의 교원이 되게 하고, 나는 공립학교의 교원이 되었다.


당시 황해도에서 학교라는 이름을 가진 것은 공립으로 해주와 장연에 각각 하나씩 있었을 뿐인데, 해주에 있는 것은 이름만 학교여서 여전히 사서삼경을 가르치고 있었고, 정말 칠판을 걸고 산술·지리·역사 등 신학문(新學問)을 가르친 것은 장연 학교뿐이었다.


여름에 평양 예수교의 주최인 사범 강습소에 갔을 적에 최광옥(崔光玉)을 만났다. 그는 숭실중학교의 학생이면서 교육가로, 애국자로 이름이 높았고 나와도 뜻이 맞았다. 최광옥은 내가 혼자라는 말을 듣고 안신호(安信浩)라는 신여성과 결혼하기를 권하였다. 그는 도산 안창호(島山 安昌浩)의 영매로 나이는 스무 살, 극히 활발하고 당시 신여성 중의 명성(明星)이라고 최광옥은 말하였다.


나는 안 도산의 장인 이석관(李錫寬)의 집에서 안신호와 처음 만났다. 주인 이씨와 최광옥과 함께였다. 회견이 끝나고 사관에 돌아왔더니, 최광옥이 뒤따라 와서 안신호의 승낙을 얻었다는 말을 전하였다. 그래서 나는 안신호와 혼인이 되는 것으로 믿고 있었는데, 이튿날 이석관과 최광옥이 달려와서 혼약이 깨어졌다고 내게 알렸다. 그 까닭이라는 것은 이러하였다.


(9) 결혼을 하다

 

안 도산이 미국으로 가는 길에 상해 어느 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양주삼(梁柱三)에게 신호와의 혼인 말을 하고, 양주삼이 졸업하기를 기다려서 결정하라는 말을 신호에게도 편지로 한 일이 있었는데, 이제 나와 약혼이 된 뒤에 양주삼에게서 이제는 학교를 졸업하였으니 허혼하라는 편지가 왔다.


이 편지를 받고 밤새도록 고통한 신호는 두 손에 떡이라, 어느 것을 취하고 어느 것을 버리기도 어려워 양주삼과 김 구를 둘 다 거절하고 한 동네에 자라난 김성택(金聖澤) - 뒤에 목사가 되었다 - 와 혼인하기로 작정하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가내하거니와 퍽 마음에 섭섭하였다. 그러자 얼마 아니하여 신호가 몸소 나를 찾아와서 미안한 말을 하고 나를 오라비라 부르겠다고 말하고 나는 그의 쾌쾌한 결단성을 도리어 흠모하였다.


한 번은 군수 윤구영(尹龜榮)이 나를 불러 해주에 가서 농상공부(農商工部)에서 보내는 뽕나무 묘목을 찾아오는 일을 맡겼다. 수리(首吏) 정창극(鄭昌極)이가 나를 군수에게 추천한 것이었다. 나는 2백 냥 노자를 타 가지고 걸어서 해주로 갔다. 말이나 교군이나 타라는 것이지마는 아니 탔다.


해주에는 농상공부 주사(主事)가 특파되어 와서 묘목을 각 군에 배부하고 있었다. 정부에서 전국에 양잠을 장려하노라고 일본으로부터 뽕나무 묘목을 실어 들여온 것이다.


묘목은 다 마른 것이었다. 나는 마른 묘목을 무엇하느냐고 아니 받는다고 하였더니 농상공부 주사는 대로하여 상부의 명령을 거역하느냐고 나를 꾸짖었다. 나도 마주 대로하여 나라에서 보내시는 묘목을 마르게 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알아야 한다 하고 관찰부(觀察府)에 이 사유를 보고한다고 하였더니 주사는 겁이 나는 모양이어서 날더러 생생한 것으로 마음대로 골라가라고 간청하였다.


나는 이리하여 산 묘목 수천 본을 골라서 말에 싣고 돌아왔다. 노자는 모두 일흔 냥을 쓰고 1백 서른 냥을 정창극에게 돌렸다. 나는 짚세기 한 켤레에 얼마, 냉면 한 그릇에 얼마, 이 모양으로 돈 쓴 데를 자세히 적어서 남은 돈과 함께 주었다. 정창극은 그것을 보고 어안이 벙벙하여,


"사람들이 다 선생 같으면 나라 일이 걱정이 없겠소. 다른 사람이 갔더면 적어도 2백 냥은 더 청구했을 것이오" 하였다.


정창극은 실로 진실한 아전이었다. 당시 상하를 물론하고 관리라는 관리는 모두 나라와 백성의 것을 도적하는 탐관으로 되었건마는 정창극만은 일 푼도 받을 것 이외의 것을 받음이 없었다. 이러하기 때문에 군수도 감히 탐학을 못하였다.


얼마 후에 농상공부로부터 나를 종상위원(種桑委員)으로 임명한다는 사령서가 왔다. 이것은 큰 벼슬이어서 관속들이며 천민들은 내가 지나가는 앞에서는 담뱃대를 감추고 허리를 굽히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태 동안이나 살던 사직동 집을 떠나지 아니하면 아니 되게 되었다. 그것은 오 진사와 내 종형이 죽은 때문이었다. 오 진사는 고기잡이배를 부리기 이태에 가산을 패하고 세상을 떠나니 나는 사직동 가대를 그의 유족에게 돌리지 아니할 수 없었다.


또 종형은 본래는 낫 놓고 기역자도 몰랐으나, 나를 따라 장연에 와서 예수를 믿은 뒤로는 국문을 능통하여 종교 서적을 보고 강단에서 설교까지 하게 되었었는데, 불행히 예배 보는 중에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다.


이리하여 나는 종형수에게 개가하기를 허하여 그 친정으로 돌려보내고 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읍내로 떠났다. 내가 사직동에 있는 동안에 유인무와 주인호가 다녀갔다. 그들은 예전 북간도 관리사(北間島 管理使) 서상무(徐相茂)와 합력하여 북간도에 한 근거지를 건설할 차로 국내에서 동지를 구하러 온 것이었다. 어머니는 나를 사랑하는 지기들이라 하여 밤을 삶고 닭을 잡아서 정성으로 그들을 대접하셨다. 우리는 밤과 닭고기를 먹으면서 연일 밤이 늦도록 국사를 이야기하였다.


유, 주 두 사람에게 듣건대 김주경은 몸을 숨긴 후로 붓장사를 하여서 수만금을 모았다가 금천에서 객사하였는데, 그 유산은 주경이 묵던 주막집 주인이 먹어 버리고 주경의 유족에게는 한 푼도 아니 주었다고 한다.


우리는 김주경이가 그렇게 돈을 모은 것은 필시 무슨 경륜이 있었으리라고 말하였다. 주경의 아우 진경도 전라도에서 객사하여서 그 집이 말이 아니라고 하는 말을 듣고 나는 심히 슬퍼하였다.


여러 번 약혼이 되고는 깨어지던 나는 마침내 신천(信川) 사평동(謝平洞) 최준례(崔遵禮)와 말썽 많은 혼인을 하였다. 준례는 본래 서울 태생으로 그의 어머니 김씨 부인이 젊은 과부로서 길러낸 두 딸 중의 끝엣 딸이었다. 김씨 부인은 그 때 구리개에 임시로 내었던 제중원(濟衆院 ; 지금의 세브란스 병원)에 고용되어서 두 딸을 길러 맏딸은 의사 신창희에게 시집보내고 신창희가 신천에서 개업하매 여덟 살 된 준례를 데리고 신천에 와서 사위의 집에 우접(寓接)하여 있었다.


나는 양성칙(梁聖則) 영수(領袖)의 중매로 준례와 약혼하였는데, 이 때문에 교회에 큰 문제가 일어났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준례의 어머니가 준례를 강성모(姜聖謨)라는 사람에게 허혼을 하였는데 준례는 어머니의 말을 아니 듣고 내게 허혼한 것이었다. 당시 18세인 준례는 혼인의 자유를 주장하는 것이었다.


미국 선교사 한위렴(韓衛廉), 군예빈(君芮彬) 두 분까지 나서서 준례더러 강성모에게 시집가라고 권하였으나 준례는 단연히 거절하였다. 내게 대하여도 이 혼인을 말라고 권하는 사람이 있었으나, 나는 본인의 자유를 무시하는 부모의 허혼을 반대한다 하여 기어이 준례와 혼인하기로 작정하고 신창희로 하여금 준례를 사직동 내 집으로 데려오게 하여 굳게 약혼을 한 뒤에 서울 정신여학교(貞信女學校)로 공부를 보내어 버렸다.


나와 준례는 교회에 반항한다는 죄로 책벌을 받았으나 얼마 후에 군예빈 목사가 우리의 혼례서를 만들어 주고 두 사람의 책벌을 풀었으니 이리하여 나는 비로소 혼인한 사람이 되었다.

<방랑의 길> 끝


민족에 내놓은 몸(1) - 을사보호조약 이후


을사신조약(乙巳新條約)이 체결되어서 대한의 독립권이 깨어지고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다. 이에 사방에서 지사와 산림학자들이 일어나서 경기, 충청, 경상, 강원 제도에 의병의 혈전이 시작되었다. 허위(許蔿), 이강년(李康年), 최익현(崔益鉉), 민긍호(閔肯鎬), 유인석(柳麟錫), 이진룡(李震龍), 우동선(禹東善) 등은 다 의병 대장으로 각각 일방의 웅이었다. 그들은 오직 하늘을 찌르는 의분이 있을 뿐이요, 군사의 지식이 없기 때문에 도처에서 패전하였다.


이때에 나는 진남포 엡웯 청년회의 총무로서 대표의 임무를 띠고 경성 대회에 출석케 되었다. 대회는 상동(尙洞) 교회에서 열렸는데 표면은 교회 사업을 의논한다 하나 속살은 순전한 애국 운동의 회의였다. 의병을 일으킨 이들이 구사상의 애국 운동이라면 우리 예수교인은 신사상의 애국 운동이라 할 것이다.


그 때에 상동에 모인 인물은 전덕기(全德基), 정순만(鄭淳萬), 이 준(李儁), 이동녕(李東寧), 최재학(崔在學), 계명륙(桂明陸), 김인즙(金仁 ), 옥관빈(玉觀彬), 이승길(李承吉), 차병수(車炳修), 신상민(申尙敏), 김태연(金泰淵), 표영각(表永珏), 조성환(曺成煥), 서상팔(徐相八), 이항직(李恒稙), 이희간(李喜侃), 기산도(奇山濤), 김병헌(金炳憲 - 今名 王三德), 유두환(柳斗煥), 김기홍(金基弘), 그리고 나 김 구(金龜)였다.


우리가 회의한 결과로 작성한 것은 도끼를 메고 상소하는 것이었다. 1회, 2회로 4,5명씩 연명으로 상소하여 죽든지 잡혀 갇히든지 몇 번이고 반복하자는 것이었다.


제1회 상소하는 글을 이 준이가 짓고 최재학이가 소주가 되고, 그밖에 네 사람이 더 서명하여 신민 대표로 다섯 명이 연명하였다. 상소를 하러 가기 전에 정순만의 인도로 우리 일동은 상동 교회에 모여서 한 걸음도 뒤로 물러가지 말고 죽기까지 일심하자고 맹약하는 기도를 올리고 일제히 대한문(大漢門) 앞으로 몰려갔다. 문 밖에 이르러 상소에 서명한 다섯 사람은 형식적으로 회의를 열고 상소를 한다는 결의를 하였으나 기실 상소는 별감의 손을 통하여 벌써 대황제께 입람이 된 때였다.


홀연 왜(倭) 순사대가 달려와서 우리에게 해산을 명하였다. 우리는 내정 간섭이라 하여 잉ㄹ변 반항하며 일변 일본이 우리의 국권을 강탈하여 우리 2천만 신민으로 노예를 삼는 조약을 억지로 맺으니, 우리는 죽기로 싸우자고 격렬한 연설을 하였다. 마침내 왜 순사대는 상소에 이름을 둔 다섯 지사를 경무청으로 잡아가고 말았다.


우리는 다섯 지사가 잡혀가는 것을 보고 종로로 몰려와서 가두연설을 시작하였다. 거기도 왜 순사가 와서 발검(拔劍 : 칼을 뽑아든 것 - 편집자 주)으로 군중을 해산하려 하므로 연설하던 청년 하나가 단신으로 달려들어 왜 순사 하나를 발길로 차서 거꾸러뜨렸더니 왜 순사들은 총을 쏘았다. 우리는 어물전 도가(魚物廛都家) 불탄 자리에 쌓인 와력(瓦礫 : 원문에는 '와륵'으로 표기돼 있다. 기와와 진흙 자갈 따위 - 편집자 주*)을 던져서 왜 순사대와 접전을 하였다.


왜 순사대는 중과부적하여 중국인 점포에 들어가 숨어서 총을 쏘고 있었다. 우리는 그 점포를 향하여 빗발같이 와력을 던졌다. 이때에 왜 보병 한 중대가 달려와서 군중을 해산하고 한인을 잡히는 대로 포박하여 수십 명이나 잡아갔다.


이날 민영환(閔泳煥)이 자살하였다 하므로 나는 몇 동지와 함께 민 댁에 가서 조상하고 돌아서 큰길에 나서니 웬 40세나 되어 보이는 사람 하나가 맨 상투바람으로 피묻은 흰 무명 저고리를 입고 여러 사람에게 옹위되어서 인력거에 앉아 큰 소리를 내어 울며 끌려가고 있었다. 누구냐고 물어본즉 참찬 이상설(參贊 李相卨)이 자살하려다가 미수한 것이라고 하였다.


당초 상동 회의에서는 몇 번이고 상소를 반복하려 하였으나 으레 사형에 처할 줄 알았던 최재학 이하는 흐지부지 효유 방송(曉諭放送 : 달래서 풀어주는 것-편집자 주*)이나 할 모양이어서 큰 문제도 되지 않는 것 같았고 또 정세를 돌아보니 상소 같은 것으로 무슨 효과가 생길 것 같지도 아니하여서 우리 동지들은 방침을 고쳐서 각각 전국에 흩어져 교육 사업에 힘을 쓰기로 하였다.


지식이 멸여하고 애국심이 박약한 이 국민으로 하여금 나라가 곧 제 집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전에는 아무 것으로도 나라를 건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그래서 나도 황해도로 내려와서 문화 초리면 종산종산 서명의숙(文化 草里面 鍾山 西明義塾)에서 교원이 되었다가 이듬해 김용제(金庸濟)등 지기의 초청으로 안악(安岳)으로 이사하여 그곳 양산학교(楊山學校)의 교원이 되었다.


종산에서 안악으로 떠나온 것이 기유년(己酉年) 정월 18일이라 갓난 첫딸이 찬바람을 쏘여서 안악에 오는 길로 죽었다. 안악에는 김용제, 김용진(金庸震) 등 종형제와 그들의 자질 김홍량(金鴻亮)과 최명식(崔明植) 같은 지사들이 있어서 신교육에 열심하였다.


이때에는 안악뿐이 아니라 각처에 학교가 많이 일어났으나 신지식을 가진 교원이 부족한 때라, 당시 교육가로 이름이 높은 최광옥을 평양으로부터 연빙하여 안악 양산 학교에 하계 사범 강습회를 여니 사숙 훈장들까지 강습생으로 오고 백발이 성성한 노인도 있었다.


멀리 경기도, 충청도에서까지 와서 강습생이 4백여 명에 달하였다. 강사로서는 김홍량, 이시복(李始馥), 이상진(李相晉), 한필호(韓弼浩), 이보경[李寶鏡 : 지금 광수(光洙)], 김낙영(金洛泳), 최재원(崔在源) 등이요, 여자 강사로서는 김낙희(金樂姬), 방신영(方信泳) 등이 있었고, 강구봉(姜九峰), 박혜명(朴慧明) 같은 중도 강습생 중에 끼여 있었다.


박혜명은 전에 말한 일이 있는 마곡사 시대의 사형(寺兄)으로 연전 서울서 작별한 뒤에는 소식을 몰랐다가 이번 강습회에서 서로 만나니 반갑기 그지없었다. 그는 구월산 패엽사(九月山 貝葉寺)의 주지였다. 나는 그를 양산 학교의 사무실로 인도하여 내 형이라고 소개하고 내 친구들이 그를 내 친형으로 대우하기를 청하였다.


혜명에게 들은즉, 내 은사 보경당, 하은당은 석유 한 초롱을 사다가 그 호부(好否)를 시험하노라고 불붙은 막대기를 석유통에 넣었다가 그것이 폭발하여 포봉당까지 세 분이 일시에 죽었고, 그 남긴 재산을 맡기기 위하여 금강산에 내가 있는 곳을 두루 찾았으나 종적을 몰라서 할 수 없이 유산 전부를 사중(寺中)에 붙였다고 하였다.


2. 동포에게 충성을 다하여라

 

나는 여기서 김효영(金孝英) 선생의 일을 아니 적을 수 없다. 선생은 김용진의 부친이요. 김홍량의 조부다. 젊어서 글을 읽더니 집이 가난함을 한탄하여 황해도 소산인 면포를 사서 몸소 등에 지고 평양도 강계, 초산 등 산읍으로 행상을 하여서 밑천을 잡아 가지고 근검으로 치부한 이라는데, 내가 가서 교사가 되었을 때에는 벌써 연세가 70이 넘고 허리가 기역자로 굽었으나 기골이 장대하고 용모가 탈속하여 보매 위엄이 있었다.


선생은 일찍부터 신교육의 필요함을 깨닫고 그 장손 홍량을 일본에 유학케 하였다. 한 번은 양산 학교가 경영난에 빠졌을 때에 무명씨로 벼 백 석을 기부하였는데 나중에야 그가 자여질(子與姪 ; 아들과 조카 즉 가까운 손아래 친척들 - 편집자주*)에게도 알리지 아니하고 한 것인 줄을 알게 되었다. 나로 말하면 선생의 자질의 연배언마는 며칠에 한 번씩 정해놓고 내 집 문전에 와서,


"선생님 편안하시오?"


하고 문안을 하였다. 이것은 자손의 스승을 존경하는 성의를 보임과 동시에 사마골 오백금격이라고 나는 탄복하였다.


나는 교육에 종사한 이래로 성묘도 못하고 있다가 여러 해 만에 해주 본향(本鄕)에 가보니 많은 변화가 생겼다. 첫째로 감개무량한 것은 나를 안아주고 귀애해 주던 노인들이 많이 세상을 떠나고, 전에는 어린 아이던 것들이 이제는 커다란 어른이 된 것이었다. 그러나 기막히는 것은 그 어른된 사람들이 아무 지각(知覺)이 나지 아니하여 나라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었다.


예전에 양반이라는 사람들도 찾아보았으나 다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혼몽한 중에 있어서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라고 권하면 머리를 깎으니 못한다고 하고 있었다. 내게 대하여서는 전과 같이 또라지게 하대는 못하고 말하기 어려운 듯이 어물어물하였다. 상놈은 여전히 상놈이요, 양반은 새로운 상놈이 될 뿐이요, 한 번 민족을 위하여 몸을 바쳐서 새로운 양반이 되리라는 기개를 볼 수 없으니 한심한 일이었다.


고향에 와서 이렇게 실망되는 일이 많은 중에 가장 나를 기쁘게 한 것은 준영 계부께서 나를 사랑하심이었다. 항상 나를 집안을 망칠 난봉으로 아시다가 내가 장연에서 오 진사의 신임과 존경을 받는 것을 목도하시고부터는 비로소 나를 믿으셨다.


나는 본향 사람들을 모아 놓고 내가 가지고 온 환등(幻燈 ; 영화, 영사기 등을 말한다 - 편집자주*)을 보이면서,


"양반도 깨어라, 상놈도 깨어라. 삼천리강토와 2천만 동포(?)에게 충성을 다하여라" 하고 목이 터지도록 외쳤다.


안악에서는 하계 사범 강습소를 마친 뒤에 양산 학교를 크게 확장하여 중학부와 소학부를 두고 김홍량이 교장이 되었다.


나는 최광옥 등 교육가들과 함께 해서 교육총회(海西敎育總會)를 조직하고, 내가 그 학무총감(學務總監)이 되었다. 황해도 내에 학교를 많이 설립하고 그것을 잘 경영하도록 설도하는 것이 내 직무였다. 나는 이 사명을 띠고 도내 각 군을 순회하는 길을 떠났다.


배천 군수 전봉훈(全鳳薰)의 초청을 받았다. 읍 못 미쳐 오리정에 군내 각 면의 주민들이 나와서 등대(等待)하다가 내가 당도한즉 군수가 선창으로,


'김 구 선생 만세!'


를 부르니 일동이 화하여 부른다. 나는 경황실색하여 손으로 군수의 입을 막으며, 그것이 망발인 것을 말하였다. 만세라는 것은 오직 황제에 대하여서만 부르는 것이요, 황태자도 천세라고밖에 못 부르는 것이 옛 법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 말이 맞다면 지나 영화에서 보면 천세 천세 천천세라고 궁중에서 신하들이 합창하는 것을 종종 본 일이 있었는데 그렇다면 분명코 청(지나)은 조선이 정해준 어느지역의 봉지 관할국일 뿐 중국이라고 칭 할 수 있는 천자가 있는 곳은 바로 조선임에 틀림이 없다.


그런 것을 일개 서민인 내게 만세를 부르니 내가 경황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그러나 군수는 웃으며 내 손을 잡고 개화 시대(開化時代)에는 친구 송영에도 만세를 부르는 법이니 안심하라고 하였다. 나는 군수의 사제(私第)에 머물렀다.


전봉훈은 본시 재령 아전으로 해주에서 총순(總巡)으로 오래 있을 때에 교육에 많이 힘을 썼다. 해주 정내 학교(正內學校)를 세운 것도 그요, 각 전방(廛房) - 상점 - 에 명령하여 사환하는 아이들을 야학에 보내게 하고 만일 안 보내면 주인을 벌하는 일을 한 것도 그여서 해주 부내의 교육의 발달은 전 총순의 힘으로 됨이 컸다. 그의 외아들은 조사(早死)하고 장손 무길(武吉)이 5,6세였다.


전 군수는 대단히 경골한(硬骨漢으로 추정 ; 뼈가 단단한 사람, 즉 뜻이 굳은 사람을 이르는 것으로 보인다 - 편집자주*)이어서 다른 고을에서는 일본 수비대에게 동헌(東軒)을 내어 맡기되 그는 강경히 거절하여서 여전히 동헌은 군수가 차지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왜의 미움을 받았으나 그는 벼슬자리를 탐내어 뜻을 굽힐 사람이 아니었다.


전봉훈은 최광옥을 연빙하여 사범 강습소를 설립하고 강연회를 각지에 열어 민중에게 애국심을 고취하였다. 최광옥은 배천 읍내에서 강연을 하는 중에 강단에서 피를 토하고 죽었다. 황, 평 양서(서해의 황해도 평안도 두 도를 이르는 것 같다 - 편집자주*) 인사들이 그의 공적을 사모하고 뜻과 재주를 아껴서 사리원(沙里院)에 큰 기념비를 세우기로 하고 평양 안태국(安泰國)에게 비석 만드는 일을 맡기기까지 하였으나, 합병 조약이 되기 때문에 중지하고 말았다. 최광옥의 유골은 배천읍 남산에 묻혀 있다.

 

황. 평 양서라고 했는데 편집자가 서해에 황해도 평안도를 두도를 이른다고 주를 달았다 하지만 한반도를 놓고 보면 서해에 황해도와 평안도만 있는게 아니다 경기도도 있고 충청도도 있으며 전라도도 있기 때문에 두도라고 하면 안된다. 그러나 대륙은 서해라고 하면 청해서쪽을 보통 서해로 칭하고 있으니 황해도와 평안도 두도가 되는 것이다.


나는 배천을 떠나 재령 양원 학교(養元學校)에서 유림을 소집하여 교육의 필요와 계획을 말하고 장연 군수의 청으로 읍내와 각 면을 순회하고, 송화 군수 성낙영(成樂英)의 간청으로 수년 만에 송화읍을 찾았다. 이곳은 해서의 의병을 토벌하던 요해지(要害地)이므로 읍내에 왜의 수비대, 헌병대, 경찰서, 우편국 등의 기관이 있어서 관사는 전부 그런 것에 점령이 되고 정작 군수는 사가를 빌어서 사무를 보고 있었다. 나는 분한 마음에 머리카락이 가락가락 일어날 지경이었다.


환등회를 여니 남녀 청중이 무려 수천 명이니 군수 성낙영, 세무서장 구자록(具滋祿)을 위시하여 각 관청의 관리며 왜의 장교와 경관들도 많이 출석하였다. 나는 대황제 폐하의 어진영(御眞影 ; 임금의 사진 - 편집자주*)을 뫼셔오라 하여 강단 정면에 봉안하고 일동 기립 국궁(鞠躬 ; 몸을 굽혀 인사하는 것 - 편집자주*)을 명하여 왜의 장교들까지 다 그리하게 하였다. 이렇게 하니 벌써 무언중에 장내에는 엄숙한 기운이 돌았다.


나는 "한인이 배일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연제로 일장의 연설을 하였다. 과거 일청, 일아(日露) 두 전쟁 때에는 우리는 일본에 대하여 신뢰하는 감정이 극히 두터웠다. 그 후에 일본이 강제로 우리나라 주권을 상하는 조약을 맺음으로 우리는 악감이 격발되었다. 또 일병이 촌락으로 횡행하며 남의 집에를 막 들어가고 닭이나 달걀을 막 빼앗아서 약탈의 행동을 하므로 우리는 배일을 하게 된 것이니, 이것은 일본의 잘못이요, 한인의 책임이 아니라고 탁을 두드리며 외쳤다.


자리를 돌아보니 성낙영, 구자록은 낯빛이 흙빛이요, 일반 청중의 얼굴에는 격앙의 빛이 완연하고 왜인의 눈에는 노기가 등등하였다. 홀연 경찰이 환등회의 해산을 명하고 나는 경찰서로 불려가서 한인 감독 순사 숙직실에 구류되었다. 각 학교 학생들의 위문대가 뒤를 이어 밤이 새도록 나를 찾아왔다.


이튿날 아침1909년 10월 26일 에 하르빈 전보라 하여 이등박문(伊藤博文)이 '은치안'이라는 한인의 손에 죽었다는 신문 기사를 보았다. '은치안'이 누구일까 궁금하였더니, 이튿날 신문으로 그것이 안응칠 중근(安應七 重根)인 줄을 알고 십수년전 내가 청계동에서 보던 총 잘 쏘던 소년을 회상하였다.


3. 산발적인 저항의 불씨


나는 내가 구금된 것이 안중근 관계인 것을 알고 오래 놓이지 못할 것을 각오하였다. 한 달이나 지난 후에 나를 불러내어서 몇 마디를 묻고는 해주 지방 법원으로 압송함이 되었다. 수교(水橋)장을 지날 때에 감승무(甘承武)의 집에서 낮참을 하는데 시내 학교 교직원들이 교육 공로자인 나를 위하여 한턱의 위로연을 베풀게 하여 달라고 호송하는 왜 순사에게 청하였더니 내가 해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하는 것이 좋지 아니하냐 하면서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나는 곧 해주 감옥에 수감되었다. 이튿날 검사정에 불려 안중근과 나와의 관계에 대한 질문을 받았으나 나는 그 부친과 세의(世誼)가 있을 뿐이요, 안중근과는 직접 관계가 없다는 것을 말하였다. 검사는 지나간 수년 간의 내 행적을 적은 책을 내어 놓고 이것저것 심문하였으나 결국 불기소로 방면이 되었다.


나는 행구를 가지고 감옥에서 나와서 박창진(朴昌鎭)의 책사로 갔다가 유훈영(柳薰永)을 만나 그 아버지 유장단(柳長端)의 회갑연에 참례하고 송화서 나를 호송해 올 때에 왜 순사와 같이 왔던 한인 순사들이 내 일의 하회를 알고 가려고 아직도 해주에 묵고 있다는 말을 듣고 그들 전부를 술집에 청하여서 한턱을 먹이고 지낸 일을 말하여서 돌려보내었다. 한인 순사는 기회만 있으면 왜 순사의 눈을 피하여 내게 동정하였던 것이다.


안악 동지들은 내 일을 염려하여 한정교(韓貞敎)를 위해 해주로 보내어 왔으므로 나는 이승준(李承駿), 김영택(金泳澤), 양낙주(梁洛疇) 등 몇 친구를 방문하고는 곧 안악으로 돌아왔다.


안악에 와서 나는 양산 학교 소학부의 유년반을 담임하면서 재령군 북률면(北栗面) 무상동(武尙洞) 보강 학교(保强學校)의 교장을 겸무하였다. 이 학교는 나무리벌의 한 끝에 있어 가난한 사람들이 힘을 내어 세운 것이었다. 전임 교원으로는 전승근(田承根)이가 있고, 장덕준(張德俊)은 반 교사 반 학생으로 그 아우 덕수(德秀)를 데리고 학교 안에서 숙식하고 있었다.


내가 보강 학교 교장 된 뒤에 우스운 삽화가 있었다. 그것은 학교에 세 번이나 도깨비불이 났다는 것이다. 학교를 지을 때에 옆에 있는 고목을 찍어서 불을 때었으므로 도깨비가 불을 놓는 것이니, 이것을 막으려면 부군당에 치성을 드려야 한다고 다들 말하였다.


나는 직원을 명하여 밤에 숨어서 지키라 하였다. 이틀만에 불을 놓은 도깨비를 등시(登時) 포착하고 보니 동네 서당의 훈장이었다. 그는 학교가 서기 때문에 서당이 없어져 제가 직업을 잃은 것이 분하여서 이렇게 학교에 불을 놓는 것이라고 자백하였다. 나는 그를 경찰서에 보내지 아니하고 동네를 떠나라고 명하였다.


이 지방에 큰 부자는 없으나 나무리 크고 살진 벌이 있어서 다들 가난치는 아니하였다. 또 주민들이 다 명민하여서 시대의 변천을 잘 깨달아 운수(雲水), 진초(進礎), 보강, 기독(基督) 등 학교들을 세워 자녀들을 교육하는 한편으로는 농무회(農務會)를 조직하여 농업의 발달을 도모하는 등 공익사업에 착안함이 실로 보암직하였다.


의사 나석주(羅錫疇)도 이곳 사람이다. 아직 20 내외의 청년으로서 소년, 소녀 8,9명을 배에 싣고 왜의 철망을 벗어나 중국 방면으로 가서 마음대로 교육할 양으로 떠나가 장연 오리포(梧里浦)에서 왜경에게 붙들려서 여러 달 옥고를 받고 나와서 겉으로는 장사도 하고 농사도 한다 하면서 속으로 청년간에 독립 사상을 고취하고 직접, 간접으로 교육에 힘을 써서 나무리벌 청년의 신망을 받는 중심인물이 되어 있었다. 나도 종종 나무리에 내왕하면서 그와 만났다.

 

중국방면이라고 한 중국은 편집자 의도다.

조선왕조실록 고종조에도 청을 중국라고 하지 않았고 청국이라고 기술 했을 뿐이다.


하루는 안악에서 노백린(盧伯麟)을 만났다. 그는 그때에 육군 정령(陸軍正領)의 군직을 버리고 그의 향리인 풍천에서 교육에 종사하고 있었는데 서울로 가는 길에 안악을 지나는 것이었다. 나는 부강 학교로 갈 겸 그와 작반하여 나무리 진초동(進礎洞) 김정홍(金正洪)의 집에서 하룻밤을 잤다. 김은 그 동네의 교육가였다.


저녁에 진초 학교 직원들도 와서 주연을 벌이고 있노라니 동네가 갑자기 요란하여진다. 주인 김정홍이 놀라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설명하는 말이 이러하였다.


진초 학교에 오인성(吳仁星)이라는 여교원이 있는데 무슨 이유인지 모르나 그의 남편 이재명(李在明)이 와서 단총으로 오인성을 위협하여 인성은 학교 일을 못보고 어느 집에 피신하여 있는데 이재명은 매국적(賣國賊)을 모조리 죽인다고 부르짖으면서 미쳐 날뛰며 방포를 하므로 동네가 이렇게 소란한 것이라고 한다.


나는 노백린과 상의하여 이재명이라는 사람을 불러왔다. 그는 22, 23세의 청년으로서 미우(眉宇)에 가득하게 분기를 띠고 들어섰다.

 

 

인사를 청한즉, 그는 자기는 어려서 하와이에 건너가서 거기서 공부를 하던 중에 우리나라가 왜에게 빼앗긴다는 말을 듣고 두어 달 전에 환국하였다는 말과, 제 목적은 이완용(李完用) 이하의 매국적을 죽임에 있다 하여 단도와 권총을 내어보이고, 또 자기는 평양에서 오인성이라는 여자와 결혼하였는데 그가 남편의 충의의 뜻을 몰라본다는 말을 기탄없이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장차 서울 북달은재에서 이완용을 단도로 찌를 의사 이재명이 될 사람이라고는 생각지 못하고 한 허열에 뜬 청년으로만 보았다.


노백린도 나와 같이 생각한 모양이어서 그의 손을 잡고, 큰일을 하려는 사람이 큰 일을 할 무기를 가지고 아내를 위협하고 동네를 소란케 하는 것은 아직 수양이 부족한 것이라고 간곡히 말하고 그 단총을 자기에게 맡겨두고 마음을 더 수양하고 동지도 더 얻어 가지고 일을 단행하라고 권하였더니 이재명은 총과 칼을 노백린에게 주기는 주면서도 선선하게 주는 빛은 없었다.


노백린이 사리원 역에서 차를 타고 막 떠나려 할 때에 문득 이재명이 그곳에 나타나서 노에게 그 맡긴 물건을 도로 달라고 하였으나, 노는 "서울 와서 찾으시오"하고 떠나 버렸다.


그 후 일삭이 못하여 이 의사는 동지 몇 사람과 서울에 들어가 군밤 장수로 변장하고 천주교당에 다녀오는 이완용을 찌른 것이었다. 완용이 탔던 인력거꾼은 즉사하고 완용의 목숨은 살아나서 나라를 파는 마지막 도장을 찍을 날을 주었으니 이것은 노백린이나 내가 공연한 간섭으로 그의 단총을 빼앗은 때문이었다.


나라의 명백이 경각에 달렸으되 국민 중에는 망국이 무엇인지 모르는 이가 많았다. 이에 일변 깨달은 지사들이 한데 뭉치고 또 일변 못 깨달은 동포를 계발하여서 다 기울어진 국운을 만회하려는 큰 비밀 운동이 일어났으니 그것이 신민회(新民會)였다.


안창호(安昌浩)는 미국으로부터 돌아와서 평양에 대성 학교(大成學校)를 세우고 청년 교육을 표면의 사업으로 하면서 이면으로는 양기탁(梁起鐸), 안태국(安泰國), 이승훈(李昇薰), 전덕기(全德基), 이동녕(李東寧), 주진수(朱鎭洙), 이 갑(李甲), 이종호(李鍾浩), 최광옥(崔光玉), 김홍량(金鴻亮) 등과 기타 명 사람을 중심으로 하고 4백여 명 정수 분자로 신민회를 조직하여 훈련 지도하다가 안창호는 용산 헌병대에 잡혀 갇혔다.


합병이 된 뒤에는 소위 주의 인물을 일망 타진할 것을 미리 알았음인지, 안창호는 장연군 송천(松川)에서 비밀히 위해위(威海衛)로 가고 이종호, 이 갑, 유동열 등 동지도 뒤를 이어서 압록강을 건넜다.


4. 국맥(國脈)을 잇자


서울에서 양기탁의 이름으로 비밀 회의를 할 터이니 출석하라는 통지가 왔기에 나도 출석하였다. 그 때 양기탁의 집에 모인 사람은 주인 양기탁과 이동녕, 안태국, 주진수, 이승훈, 김도희(金道熙)와 그리고 나 김 구였다. 이 회의의 결과는 이러하였다.


왜가 서울에 총독부를 두었으니 우리도 서울에 도독부를 두고 각 도에 총감(摠監)이라는 대표를 두어서 국맥(國脈)을 이어서 나라를 다스리게 하고, 만주에 이민 계획을 세우고 또 무관 학교를 창설하여 광복 전쟁에 쓸 장교를 양성하기로 하고, 각 도 대표를 선정하니 황해도에 김 구, 평안남도에 안태국, 평안북도에 이승훈, 강원도에 주진수, 경기도에 양기탁이었다. 이 대표들은 급히 맡은 지방으로 돌아가서 황해, 평남, 평북은 각 15만 원, 강원은 10만 원, 경기는 20만 원을 15일 이내로 판비하기로 결정하였다.


나는 경술(庚戌)1910 11월 아침 차로 서울을 떠났다. 양기탁의 친 아우 인탁(寅鐸)이 재평 재판소 서기로 부임하는 길로 그 부인과 같이 동차하였으나 기탁은 내게 인탁에게도 통정은 말라고 일렀다. 부자와 형제간에도 필요 없이는 비밀을 누설하지 아니하는 것이었다.


사리원서 인탁과 작별하고 안악으로 돌아와 김홍량에게 이번 비밀 회의에거 결정된 것을 말하였더니 김홍량은 그대로 실행하기 위하여 자기의 가산을 팔기로 내어 놓았다. 그리고 신천 유문형(柳文馨) 등 이곳 고을 동지들께도 비밀히 이 뜻을 통하였다. 장연 이명서(李明瑞)는 우선 그 어머니와 아우 명선을 서간도로 보내어 추후하여 들어오는 동지들을 위하여 준비하기로 하여 일행이 안악에 도착하였기로 내가 인도하여 출발시켰다. 이렇게 우리 일은 착착 진행 중에 있었다.


어느 날 밤중에 안명근(安明根)이가 양산 학교 사무실로 나를 찾아왔다. 그는 내가 서울 가 있는 동안에도 누차 찾아왔었던 것이다. 그가 나를 찾은 목적은, 독립 운동의 자금으로 돈을 내마 하고 자기에게 허락하고도 안 내는 부자들을 경계하기 위하여 우선 안악 부자들을 육혈포로 위협하여 본을 보일 터이니 날더러 지도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지금 우리가 진행하고 있는 사업과는 상관이 없고 안명근이 독자로 하는 일이었으므로 나는 그에게 돈을 가지고 할 일이 무엇인가를 물었다. 그의 계획에 의하면 동지를 많이 모아서 황해도 내의 전신과 전화를 끊어 각지에 있는 왜적이 서로 연락하는 길을 막아 놓고 지방 지방이 일어나서 제 지방에 있는 왜적을 죽이라는 영을 내리면 반드시 성사가 될 것이니 설사 타 지방에서 왜병이 대부대로 온다 하더라도 닷새는 걸릴 것인즉 그 동안만은 우리의 자유로운 세상이고 실컷 원수를 갚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명근의 손을 잡고 이 계획은 버리라고 만류하였다. 여순에서 그 종형 종근이 당한 일을 생각하면 다른 사람과 달리 격분도 할 일이지마는 국가의 독립은 그런 일시적 설원(雪 )으로 되는 것이 아닌즉 널리 동지를 모으고 동포를 가르쳐서 실력을 기른 뒤에 크게 싸울 준비를 하여야 한다는 뜻을 말하고 서간도에 이민을 할 것과 의기 있는 청년을 많이 그리로 인도하여 인재를 양성함이 급무라는 뜻을 설명하였다. 내 말을 듣고 그도 그렇다고 수긍은 하나 자기의 생각과 같지 아니한 것이 불만한 모양으로 서로 작별하였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며칠이 아니하여서 안명근이 사리원에서 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는 것이 신문으로 전해졌다.


해가 바뀌어 신해년 1911정월 초닷새날 새벽, 내가 아직 기침도 하기 전에 왜 헌병 하나가 내 숙소인 양산 학교 사무실에 와서 헌병 소장이 잠간 만나자 한다 하고 나를 헌병 분견소로 데리고 간다. 가 보니 벌써 김홍량, 도인권(都寅權), 이상진, 양성진, 박도병, 한필호, 장명선 등 양산 학교 직원들이 하나씩 하나씩 나 모양으로 불려왔다. 경무총감부(警務總監府)의 명령이라 하고 곧 우리를 구류하였다가 2,3일 후에 재령으로 이수하였다.


재령에서 또 우리를 끌어내어 사리원으로 가더니 거기서 서울 가는 차를 태웠다. 같은 차로 잡혀가는 사람들 중에는 송회 반정(泮亭) 신석충(申錫忠) 진사도 있었으나 그는 재령강 철교를 건널 적에 차창으로 몸을 던져서 자살하고 말았다.


신 진사(進士)는 해서의 유명한 학자요, 또 자선가였고 그 아우 석제(錫悌)도 진사였다. 한 번 내가 석제 진사를 찾아갔을 때에 그 아들 낙영(洛英)과 손자 상호(相浩)가 동구까지 마중나오기로 내가 모자를 벗어서 인사하였더니 그들은 황망히 갓을 벗어서 답례한 일이 있었다.


또 차중에서 이승훈을 만났다. 그는 잡혀가는 것은 아니었으나 우리가 포박되어 가는 것을 보고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리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 보였다. 차가 용산역에 닿았을 때에 - 그 때에는 경의선도 용산을 지나서 서울로 들어왔었다 - 형사 하나가 뛰어 올라와서 이승훈을 보고,

 

편집자가  용산을 지나서 서울로 들어왔다고 하는 것은 한반도가 아니다.

동북아 철도역사(COREA-CHINA Railway history)
http://blog.daum.net/han0114/17045906 

"당신 이승훈 씨 아니오?" 하고 물었다. 그렇다 한즉 그 형사놈이,

"경무총감부에서 영감을 부르니 좀 가십시다"


하고 차에서 내리지마자 우리와 같이 결박을 지어서 끌고 간다. 후에 알고 보니 황해도를 중심으로 다수의 애국자가 잡힌 것이었다. 이것은 왜가 한국을 강제로 빼앗은 뒤에 그것을 아주 제것을 만들어볼 양으로 우리 나라의 애국자인 지식 계급과 부호를 모조리 없애 버리려는 계획의 제일회였다.

 

그러기 위하여는 감옥과 이왕 있는 유치장만으로는 부족하여서 창고 같은 건물을 벌의 집 모양으로 간을 막아서 임시 유치장을 많이 준비하여 놓고 우리들을 잡아 올린 것이었다.


이번 통에 잡혀온 사람은 황해도에서는 안명근을 비롯하여, 신천에서 이원식(李源植), 박만준(朴晩俊), 신백서(申伯瑞), 이학구(李學九), 유원봉(柳元鳳), 유문형, 이승조(李承祚), 박제윤(朴濟潤), 배경진(裵敬鎭), 최중호(崔重鎬), 재령에서 정달하(鄭達河), 민영룡(閔泳龍), 신효범(申孝範), 안악에서 김홍량, 김용제, 양성진(楊成鎭), 김 구, 박도병(朴道秉), 박형병(朴亨秉), 고봉수(高鳳洙), 한정교, 최익형(崔益亨), 고정화, 도인권, 이태주(李泰周), 장응선(張膺善), 원행섭, 김용진 등이요, 장련에서 장의택(張義澤), 장원용(莊元容), 최상륜(崔商崙), 은율에서 김용원(金容遠), 송화에서 오덕겸(吳德謙), 장홍범(張弘範), 권태선, 이종록, 감익룡(甘益龍), 장연에서 김재형, 해주에서 이승준, 이재림(李在林), 김영택(金榮澤), 봉산에서 이승길(李承吉), 이효건(李孝健), 그리고 배천에서 김병옥(金秉玉), 연안에서 편강렬(片康烈) 등이었고, 평안남도에서는 안태국, 옥관빈, 평안북도에서는 이승훈, 유동열(柳東悅), 김용규(金龍圭)의 형제가 붙들리고, 경성에서는 양기탁, 김도희, 강원도에서 주진수, 함경도에서 이동휘(李東輝)가 잡혀와서 다들 유치되어 있었다. 나는 이동휘와는 지면이 없었으나 유치장에서 명패를 보고 그가 잡혀온 줄을 알았다.

 

대륙지식인들을 본격적으로 잡아가두고 죄를 뒤집어 씌워 회유도 하면서 반일이면 제거하거나 처단하고 친일적 인사라고 판단이 되면 한반도로 이송할 계획을 세운 것이 아닌가 한다.


5. 왜놈들의 고문


나는 생각하였다. 평시에 나라를 위하여 십분 정성과 힘을 쓰지 못한 죄로 이 벌을 받는 것이라고. 이제 와서 내게 남은 일은 고 후조 선생의 훈계대로 사육신과 삼학사를 본받아 죽어도 굴치 않는 것뿐이라고 결심하였다.


심문실에 끌려 나가는 날이 왔다. 심문하는 왜놈이 나의 주소, 성명 등을 묻고 나서,


"네가 어찌하여 여기 왔는지 아느냐?" 하기로 나는, "잡아오니 끌려 왔을 뿐이요, 이유는 모른다" 하였더니, 다시는 묻지도 아니하고 내 수족을 결박하여 천장에 매달았다. 처음에 고통을 깨달았으나 차차 정신을 잃었다가 다시 정신이 들어 보니 나는 고요한 겨울 달빛을 받고 심문실 한 구석에 누워 있는데 얼굴과 몸에 냉수를 끼얹는 감각뿐이요, 그 동안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기억이 없었다.


내가 정신을 차리는 것을 보고 왜놈은 비로소 나와 안명근과의 관계를 묻기로, 나는 안명근과 서로 아는 사이나 같이 일한 것은 없다고 하였더니, 그놈은 와락 성을 내어서 다시 나를 묶어 천장에 달고 세 놈이 둘러서서 막대기로, 단장으로 수없이 내 몸을 후려갈겨서 나는 또 정신을 잃었다. 세 놈이 나를 끌어다가 유치장에 누일 때에는 벌써 훤하게 밝은 때였다. 어제 해 질 때에 시작한 내 심문이 오늘 해 뜰 때까지 계속된 것이었다.


처음에 내 성명을 묻던 놈이 밤이 새도록 쉬지 않는 것을 보고, 나는 그놈들이 어떻게 제 나라의 일에 충성된 것인가를 알았다. 저놈은 이미 먹은 나라를 삭히려기에 밤을 새거늘 나는 제 나라를 찾으려는 일로 몇 번이나 밤을 새웠던고 하고 스스로 돌아보니 부끄러움을 금할 수가 없고, 몸이 바늘방석에 누운 것과 같아서 스스로 애국자인 줄 알고 있던 나도 기실 망국민의 근성을 가진 것이 아닌가 하니 눈물이 눈에 넘쳤다.


이렇게 악형을 받은 것은 나뿐이 아니었다. 옆방에 있는 김홍량, 한필호, 안태국, 안명근 등도 심문을 받으며 끌려나갈 때에는 기운 있게 제 발로 걸어나가나 왜놈의 혹독한 단련을 받고 유치장으로 돌아올 때에는 언제나 반죽음이 다 되어 있었다. 그것을 볼 때마다 나는 치미는 분함을 누를 길이 없었다. 한 번은 안명근이 소리소리 지르면서,


"이놈들아, 죽일 때에 죽이더라도 애국 의사의 대접을 이렇게 한단 말이냐?" 하고 호령하는 사이사이에,


"나는 내 말만 하였고, 김 구, 김홍량들은 관계가 없다고 하였소" 하는 말을 끼워서 우리의 귀에 넣었다.


우리들은 감방에서 서로 통화하는 방법을 발명하여서 우리의 사건을 보안법 위반과 모살급 강도의 둘로 나누어서 아무쪼록 동지의 희생을 적게 하기로 의논하였다. 양기탁의 방에서 안태국의 방과 내가 있는 방으로, 내게서 이재림이 있는 방으로 이 모양으로 좌우 줄 20여 방, 40여 방이 비밀히 말을 전하는 것이었다.


왜놈들은 우리의 심문이 진행됨에 따라 이것을 통방이라고 칭하였다. 사건의 범위가 점점 축소되는 것을 보고 의심이 났던 모양이어서 우리 중에서 한순직(韓淳稷)을 살살 꾀어 우리가 밀어하는 내용을 밀고하게 하였다. 어느 날 양기탁이가 밥 받는 구멍에 손바닥을 대고 우리의 비밀한 통화를 한순직이가 밀고하니 금후로는 통방을 폐하자는 뜻을 손가락 필답으로 전하였다. 과연 센 바람을 겪고야 단단한 풀을 알 것이었다.


안명근이 한순직을 내게 소개할 때에 그는 용감한 청년이라고 칭양하더니 이 꼴이었다. 어찌 한순직뿐이랴, 최명식도 악형을 못 이겨서 없는 소리를 자백하였으나 나중에 후회하여 긍허(兢虛)하고 호를 지어서 평생에 자책하였다. 그 때의 형편으로 보면 내 혀끝이 한 번 움직이는 데 몇 사람의 생명이 달렸으므로 나는 단단히 결심을 하였다. 하루는 또 불려 나가서 내 평생의 지기가 누구냐 하기로 나는 서슴지 않고,


"오인형(吳麟炯)이 내 평생의 지기다" 하고 대답하였더니 종시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부는 일이 없던 내 입에서 평생의 지기의 이름을 말하는 것을 극히 반가와하는 낯빛으로 그 사람은 어디서 무엇을 하는가 하고 정신을 바짝 차리고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천연하게,


"오인형은 장련에 살더니 연전에 죽었다" 하였더니 그놈들이 대로하여 또 내가 정신을 잃도록 악형을 가하였다.


한 번은 학생 중에는 누가 가장 너를 사모하더냐 하는 질문에 나는, 창졸간에 내 집에 와서 공부하고 있던 최중호의 이름을 말하고서는 나는 내 혀를 물어 끊고 싶었다. 젊은 것이 또 잡혀와서 경을 치겠다고 아픈 가슴으로 창 밖을 바라보니 언제 잡혀왔는지 반쯤 죽은 최중호가 왜놈에게 끌려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진고개 끝 남산 기슭에 있는 소위 경무총감부에서는 밤이나 낮이나 도수장에서 소나 돼지를 때려잡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렸다. 이것은 우리 애국자들이 왜놈에게 악형을 당하는 소리였다. 하루는 한필호 의사가 심문을 당하고 돌아오는 길에 겨우 머리를 들어 밥 구멍으로 나를 들여다보면서,

 

남산이 어딘가? 혹 종남산은 아닌가?

언제인가 우연히 사진 한장을 보았는데 거대한 산 기슭에 일본포병대가 있는 사진이었다.


"모두 부인했더니 지독한 악형을 받아서 나는 죽습니다" 하고 작별하는 모양을 보이기로, 나는,


"그렇게 낙심 말고 물이나 좀 자시오" 하고 위로하였더니 한 의사는,


"인제는 물도 먹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고는 다시 소식을 몰랐는데 공판 때에야 비로소 한필호 선생이 순국한 것과 신석충 의사가 사리원으로 끌려오는 도중에 재령강에서 몸을 던져 자살한 것을 알았다.


하루는 나는 최고 신문실(最高訊問室)이라는 데로 끌려갔다. 뉘라서 뜻하였으랴. 17년 전 내가 인천 경무청에서 심문을 당할 때에 방청석에 앉았다가 내가 호령하는 바람에 '칙쇼 칙쇼'하고 뒷방으로 피신하던 도변(渡邊 : 와다나베) 순사놈이 나를 심문하려고 앉았을 줄이야. 그놈은 전과 같이 검은 수염을 길러 늘이고 낯바닥에는 약간 노쇠한 빛이 보였으나 이제는 경무총감부의 기밀과장(機密課長)으로 경시의 제복을 입고 위의가 엄숙하였다.


6.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도변이놈은 나를 보고 첫 말이, 제 가슴에는 엑스 광선이 있어서 내 평생의 역사와 가슴 속에 품은 비밀은 소상히 다 알고 있으니 일호도 숨김이 없이 다 자백을 하면이어니와 만일에 은휘하는 곳이 있으면 이 자리에서 나를 때려죽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도변이놈의 엑스 광선은 내가 17년 전 인천 감옥의 김충수인 줄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연전 해주 감사국에서 검사고 보고 있던 '김 구(金龜)'라는 책에도 내가 치하포에서 토전양량을 죽인 것이나 인천 감옥에서 사형 정지를 받고 탈옥 도주한 것은 적혀 있지 아니하였던 것과 같이 이번 사건의 내게 관한 기록에도 그것은 없었던 모양이다.


그러고 보면 내 일을 일러바치는 한인 형사와 정탐들도 그 일만은 빼고 내 보고를 하는 모양이니 그들이 비록 왜의 수족이 되어서 창귀 노릇을 한다 하더라도 역시 마음의 한 구석에는 한인 혼이 남아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도변이놈이 나의 경력을 묻는 데 대하여서 나는, 어려서는 농사를 하다가 근년에 종교와 교육 사업을 하고 있거니와 모든 일을 내어놓고 하고, 숨어서 하는 것이 없으며, 현재에는 안악 학교의 교장을 있노라고 대답하였더니 도변은 와락 성을 내며 내가 종교와 교육에 종사하는 것은 껍데기요, 속으로는 여러 가지 큰 음모를 하고 있는 것을 제가 소상히 다 알고 있노라 하면서, 내가 안명근과 공모하여 총독을 암살할 음모를 하고, 서간도에 무관 학교를 설치하여 독립 운동을 준비하려고 부자의 돈을 강탈할 사실을 은휘한들 되겠냐고 나를 엄포하였다.


이에 대하여 나는 안명근과 전연 관계가 없고 서간도에 이민하란 것은 사실이나 이것은 빈한한 농민에게 생활의 근거를 주자는 것뿐이라고 답변한 뒤에, 나는 화두를 돌려서 지방 경찰의 도량이 좁고 의심만 많아서 걸핏하면 배일(排日)로 사람을 보니 이러고는 백성이 아무 일도 할 수 없어서 모든 사업에 방해가 많으니 이후로는 지방의 경찰에 주의하여 우리 같은 사람들이 교육이나 잘하고 있도록 하여 달라, 학교 개학기도 벌써 넘었으니 속히 가서 학교 일을 보게 하여 달라 하였다. 도변이놈은 악형은 아니 하고 나를 유치장으로 돌려보내었다.


이제 보니 도변이놈은 내가 김창수인 것을 전연 모르는 것이 확실하고, 그렇다 하면 내 과거를 소상히 잘 아는 형사들이 그 말을 아니한 것도 분명하였다. 나는 기뻤다.


나라는 망하였으나 민족은 망하지 아니하였다. 왜 경찰에서 형사질을 하는 한인의 마음에도 애국심이 남아 있으니 우리 민족은 결코 망하지 아니하리라고 믿고 기뻐하는 동시에 형사들까지도 내게 이같은 동정을 주었으니 나로서는 최후의 일각까지 동지를 위하여 싸우고 원수의 요구에 응치 아니하리라 하였다.


그리고 김홍량은 나보다 활동할 능력도 많고 인물의 품격도 높으니, 나를 희생하여서라도 그를 살리리라 하고 심문시에도 내게 불리하면서도 그에게 유리하게 답변하였고 또 '龜沒泥中鴻飛海外(거북은 진흙 속에 있으며 기러기는 바다 위를 나른다)'라고 중얼거렸다.


전후 일곱 번 심문에 도변의 것을 제하고 여섯 번은 번번이 악형을 당하여서 정신을 잃었다. 그러나 악형을 받고 유치장으로 끌려 돌아올 때마다 나는,


"나의 목숨은 너희가 빼앗아도 나의 정신은 너희가 빼앗지 못하리라" 하고 소리 높이 외쳐서 동지들의 마음이 풀어지지 않도록 하였다. 내가 그렇게 떠들면 왜놈은,


"나쁜 말이 해소도 다다꾸" 라고 위협하였으나 동지들의 마음은 내 말에 격려되었으리라고 믿는다.


내게 대한 제 8 회 심문은 과장과 각 주임경시 7,8 명 열석하에 열렸다.


이놈들이 나를 향하여 하는 말이,


"네 동류가 거개 자백을 하였는데, 네놈 한 놈이 자백을 아니하니 참 어리석고 완고한 놈이다. 네가 아무리 입을 다물고 아니하기로서니 다른 놈들의 실토에서 나온 네놈의 죄가 숨겨지겠느냐. 너 생각해 보아라. 새로 토지를 매수한 지주가 밭에 거추장거리는 돌멩이를 추려내지 아니하고 그냥 둘 것이냐. 그러니 똑바로 말을 하면이어니와 일향 고집하면 이 자리에서 네놈을 때려죽일 터이니 그리 알아라" 한다. 이 말에 나는,

 

위 말에서 보듯이 대륙조선인을 가려 청소하고자 했던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오냐 이제 잘 알았다. 내가 너희가 새로 산밭의 돌이라면 그것은 맞았다. 너희가 나를 돌로 알고 파내려는 수고보다 패어내우는 내 고통이 더 심하니, 그렇다면 너희들의 손을 빌 것이 없이 내 스스로 내 목숨을 끊어버릴 터이니 보아라"


하고 머리로 옆에 있는 기둥을 받고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여러 놈들이 인공호흡을 한다, 냉수를 면상에 뿜는다 하여 내가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때에 여러 놈 중에서 한 놈이 능청스럽게,


"김 구는 조선인 중에 존경을 받는 인물이니 이같이 대우하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본직에게 맡기시기를 바라오" 하고 청을 하니 여러 놈들이 즉시 승낙한다.


승낙을 받은 그 놈이 나를 제 방으로 데리고 가더니 담배도 주고 말도 좋은 말을 쓰고 대우가 융숭하다. 그놈의 말이 자기는 황해도에 출장하여 내게 관한 조사를 하여 가지고 왔는데, 그 결과로 보면 나는 교육에 열심하여 월급을 받거나 못 받거나 여일하게 교무에 열심하고 일반 인민의 여론을 듣더라도 나는 정직한 사람인데 경무총감부에서도 내 신분을 잘 모르고 악형을 많이 한 모양이니 대단히 유감된다 하고, 또 말하기를 심문하는 데는 이렇게 할 사람과 저렇게 할 사람이 따로 있는데 나 같은 인물에 대하여서 그렇게 한 것은 크게 실례라고 아주 뻔뻔스럽게 듣기 좋은 소리를 한다.


왜놈들이 우리 애국자들의 자백을 짜내기 위하여 하는 수단은 대개 세 가지로 구별할 수 있으니, 첫째는 악형이요, 둘째는 배고프게 하는 것이요, 그리고 셋째는 우대하는 것이다. 악형에는 회초리와 막대기로 전신을 두들긴 뒤에 다 죽게 된 사람을 등상 위에 올려 세우고 붉은 오랏줄로 뒷짐결박을 지워서 천장에 있는 쇠갈고리에 달아 올리고는 발등상을 빼어버리면 사람이 대룽대룽 공중에 달리는 것이다.


이 모양으로 얼마 동안을 지나면 사람은 고통을 못 이기어 정신을 잃어버린다. 그런 뒤에 사람을 끌러 내려놓고 얼굴과 몸에 냉수를 끼얹으면, 다시 소생하여 정신이 든다. 나는 난장을 맞을 때에 내복 위로 맞으면 덜 아프다 하고 내복을 벗어버리고 맞았다.


그 다음의 악형은 화로에 쇠꼬챙이를 달구어 놓고 그것으로 벌거벗은 사람의 몸을 막 지지는 것이다. 그 다음의 악형은 세 손가락 사이에 손가락만한 모난 막대기를 끼우고 그 막대기 두 끝을 노끈으로 꼭 졸라매는 것이다.


그 다음은 사람을 거꾸로 달고 코에 물을 붓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악형을 당하면 나도 악을 내어서 참을 수도 있지마는 이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은 굶기는 벌이다. 밥을 부쩍 줄여 겨우 죽지 아니하리 만큼 먹이는 것인데 이리하여 배가 고플 대로 고픈 때에 차입 밥을 받아서 먹은 고깃국과 김치 냄새를 맡을 때에는 미칠 듯이 먹고 싶다.


아내가 나이 젊으니 몸을 팔아서라도 맛있는 음식을 늘 들여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도 난다. 박영효의 부친이 옥중에서 섬거적을 뜯어먹다가 죽었다는 말이며, 옛날 소 무(蘇武)가 전을 씹어 먹으며 19년 동안 한나라 절개를 지켰다는 글을 생각할 때에 나는 사람의 마음은 배고파서 잃고 짐승의 성품만이 남은 것이 아닌가 하고 자책하였다.


7. 제비처럼 입으로 밥을


차입 밥! 얼마나 반가운 것인가. 그러나 왜놈들이 원하는 자백을 아니하면 차입은 허하지 아니한다. 참말이나 거짓말이나 저희들의 비위에 맞는 소리로 답변을 해야만 차입을 허하는 것이다. 나는 종내 차입을 못 받았다. 조석 때면 내 아내가 내게 들리라고 큰 소리로,


"김 구 밥 가져왔어요" 하고 소리치는 것이 들리나 그 때마다 왜놈이,

"깅 가메 나쁜 말이 했소데 사시이레(차입) 일이 오브소다" 하고 물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깅 가메'라는 것은 왜놈들이 부르는 내 별명이다.


그러나 배고픈 것보다도 견디기 어려운 것이 있으니 그것은 우대였다.


내가 아내를 팔아서라도 맛있는 것을 실컷 먹고 싶다고 생각할 때에 경무총감 명석(明石元二郞)의 방으로 나를 불러 들여 극진히 우대하였다. 더할 수 없는 하지하천의 대우에 진절머리가 났던 나에게 이 우대가 기쁘지 않음이 아니었다.


명석이놈이 내게 한 말의 요령은 이러하였다. 내가 신부민으로 일본에 대한 충성만 표시하면 즉각으로 자기가 총독에게 보고하여 옥고를 면하게 할 터이요, 또 일본이 조선을 통치함에 있어서 순전히 일본인말을 쓰는 것이 아니라 덕망이 높은 조선 인사를 얻어서 정치를 하게 하려 하니 그대와 같이 충후한 장자로서 대세의 추이를 모를 바 아닌즉 순용함이 어떠냐, 그런즉 안명근 사건에 대한 것은 사실대로 자백을 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명석에게 대하여, "당신이 나의 충후함을 인정하거든 내가 자초로부터 공술한 것도 믿으시오" 하였다. 그놈은 가장 점잖은 체모를 가지나 기색은 좋지 못하였다.


이런 일이 있은 뒤에 오늘 내가 불려나와서 처음에 당장에 때려죽인다고 하다가 이놈의 방으로 끌려들어온 것이었다.


이놈은 국우(國友)라는 경시다. 그는 제가 대만에 있을 때에 어떤 대만인 피의자 하나를 담임하여 심문하였는데 그 사람이 나와 같이 고집하다가 검사국에 가서야 일체를 자백하였노라 하는 편지를 국우에게 보내었다 하며, 나도 검사국에 넘어가거든 잘 자백할 터이니 그러면 검사의 동정을 얻으리라 하고 전화로 국수장국에 고기를 넣어서 가져오라고 명하여 그것을 내 앞에 놓고 먹기를 청한다. 나는 나를 무죄로 안다면 이 음식을 먹으려니와 나를 유죄로 안다면 나는 입에 대지 않는다고 하고 술을 들지 아니하였다.


그런즉 그놈이, "김 구 씨는 한문병자(漢文病者)야. 김 구 씨는 내게 동정을 아니 하지마는 나는 자연히 김 구 씨께 동정이 간단 말요. 그래서 변변치 못하나마 드리는 대접이니 식기 전에 어서 자시오" 한다. 그래도 나는 일향 사양하였더니 국우는 웃으면서 한자로,


"君疑置毒否(그대는 음식에 독을 넣었다고 의심하는가?)"


하는 다섯 자를 써 보이고, 이제는 심문도 종결되었고, 오늘부터는 사식 차입도 허한다고 하였다. 나는 독을 넣었다고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하고, 그 장국을 받아먹고 내 방으로 돌아왔다. 그날 저녁부터 사식이 들어왔다.


나와 같은 방에 이종록(李宗錄)이라는 청년이 있는데 그를 따라온 친척이 없어서 사식을 들여줄 이가 없었다. 내가 밥을 그와 한방에서만 먹으면 그를 나누어 줄 수도 있겠지마는 사식은 딴 방에 불러내어서 먹이기 때문에 그리할 수가 없어서 나는 밥과 반찬을 한 입 잔뜩 물고 방에 돌아와서 제비가 새끼 먹이듯이 입에서 입으로 옮겨 먹였다.


그러나 그것도 한 때 뿐이요, 이튿날 나는 종로 구치감(鐘路 拘置監)으로 넘어갔다. 방은 독방이라 심심하나 모든 것이 총감부보다는 편하고 거기서 주는 감식이라는 밥도 총감부의 것보다는 훨씬 많았다.


내 사건은 사실대로만 처단한다 하면 보안법 위반으로 극형이라 하여 징역 1년밖에 안될 것이지마는 나를 억지로 안명근의 강도 사건에 끌어다 붙이려 하였다. 내가 억지로라 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내가 서울 양기탁의 집에서 서간도에 이민을 하고 무관 학교를 세울 목적으로 이동녕을 파견할 회의를 한 날짜가 바로 안악에서 안명근, 김홍량 등이 부호를 협박할 의논을 하였다 하는 그 날짜이므로 나는 도저히 안악에서 한 회의에 참예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하건마는 안악 양산 학교 교직의 아들 이원형이라 하는 14세 되는 어린아이를 협박하여 내가 그 자리에 참예하는 것을 보았노라고 거짓 증언을 시켜서 나를 안명근의 강도 사건에 옭아 넣었다. 애매하기로 말하면 김홍량이나 도인권이나 김용제나 다 애매하지마는 그래도 이들은 그날 안악에는 있었으니 회의에 참에했다고 억지로 우겨댈 수도 있겠으나 5백 리 밖에서 다른 회의에 참예하였다고 저의 기록에 써놓은 내가 같은 날에 안악의 회의에도 참예시킨다는 것은 요술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나는 내게 대한 유일한 증인이 이원형 소년이 내가 심문 받는 옆방에서 심문 받는 소리를 분명히 들었다.


"너는 안명근과 김 구가 그 자리에 있는 것을 보았지?" 하는 심문에 대하여 이 소년은,

"나는 안명근이라는 사람은 얼굴도 모르고, 김 구는 그 자리에 없었소" 하고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옆에서 어떤 조선 순사가,

"이 미련한 놈아, 안명근이도 김 구도 그 자리에 있었다고만 하면 너의 아버지를 따라 집에 가게 해줄 터이니 시키는 대로 대답을 해" 하는 말에 원형은,


"그러면 그렇게 할 터이니 때리지 마셔요" 하였다.

검사정에서도 이원형을 증인으로 불러들였으나 이 소년이,


"예"


하는 대답이 있자마자 다른 말이 더 나오는 것을 꺼리는 듯이 곧 문 밖으로 몰아내었다. 나는 5백 리를 새에 둔 두 회의에 한 날에 참예하는 김 구를 만드느라고 매우 수고롭겠다고 검사에게 말하였더니 검사는 그 말에는 대답도 아니하고,


"종결!" 하고 심문이 끝난 것을 선언하였다.


8. 감옥에서도 희망을

 

내가 경무총감부에 갇혀 있을 그 때 의병장 강기동(姜基東)도 잡혀와 있었다. 그는 애초에 의병으로 다니다가 귀순하여서 헌병 보조원이 되었다. 한 번은 사형을 당할 의병 10여 명이 갇힌 감방을 수직하게 되었을 때에 그는 감방 문을 열어 의병들을 다 내어놓고 무기고를 깨뜨리고 무기를 꺼내어 일제히 무장을 하고 그도 같이 달아나서 경기, 충청, 강원도 등지로 왜병과 싸우고 돌아다니다가 안기동이라고 변명하고 원산에 들어가 무슨 계획을 하다가 붙들려 온 것이었다. 그는 육군 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총살되었다. 김좌진(金佐鎭)도 애국 운동으로 강도로 몰려 징역을 받고 나와 같은 감방에서 고생을 하였다.


하루는 안악 군수 이 모라는 자가 감옥으로 나를 찾아와서 양산 학교 집과 기구를 보통 학교에 내어놓는다는 도장을 찍으라고 하므로 나는 집은 나랏집이니까 내어놓지마는 기구는 사삿것이니 사립학교인 양산 학교에 기부한다고 하였으나, 그것도 공립으로 가져가고 말았다. 양산 학교는 우리들 불온불자들의 학교라 하여 강제로 폐지해 버린 것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아이들은 목자를 잃은 양과 같이 다 흩어져 버렸을 것이다. 특별히 손두환(孫斗煥)과 우기범(禹基範) 두 학생이 생각났다. 재주로나 뜻으로나 특출하였고 어리면서도 망국한을 느낄 줄 아는 이들이었다.


아무리 하여서라도 이 자리를 모면하여 해외에서 활동하게 하고 싶던 김홍량도 자기가 안명근의 부탁으로 신천 이원식에게 권고하였다는 것을 자백하였으니 도저히 빠지기 어려울 것이다. 심혈을 다 바치던 교육 사업도 수포로 돌아가고 믿고 사랑하던 동지도 이제는 살아나갈 길이 망연하니 분하기 그지없다.


어머니는 안악에 있던 가산과 집물(什物)을 다 팔아 가지고 내 옥바라지를 하시려고 서울로 올라오셨다. 내 처와 딸 화경이는 평산 처형네 집에 들렀다가 공판날에 대어서 온다는 어머니의 말씀이다.


어머님이 손수 담으신 밥그릇을 열어 밥을 떠먹으며 생각하니 이 밥에 어머님의 눈물이 점점이 떨어졌을 것이었다. 18년 전 해주에서의 옥바라지와 인천 옥바라지를 하실 때에는 내외분이 고생을 나누기나 하셨건마는 이제는 어머님 홀로시다. 어머님께 도움이 되기는커녕 위로를 드릴 능력이 있는 자가 그 누군가.


이렁저렁 공판날이 되었다. 죄수를 태우는 마차를 타고 경성 지방 재판소 문전에 다다르니 어머님이 화경이를 업으시고 아내를 데리고 거기 서 계셨다.


우리는 2호 법정이라는 데로 끌려 들어갔다. 법정 피고석 걸상에 앉은 차례는 수석에 안명근, 다음에 김홍량, 셋째로 나, 그리고는 이승길, 배경진, 한순직, 도인권, 양성진, 최익형, 김용제, 최명식, 장윤근, 고봉수, 한정교, 박형병 등 모두 열 다섯 명이 늘어앉고 방청석을 돌아보니 피고인의 친척, 친지와 남녀 학생들이 와 있었다.


변호사, 신문기자석에도 다 사람이 있었다. 한필호 선생이 경무총감부에서 매맞아 별세하고 신석충 진사는 사리원으로 호송되는 도중에 재령강 철교에서 투신 자살을 하였단 말을 여기서 들었다.


소위 판결이라는 것은 안명근이 징역 종신이요, 김홍량, 김 구, 이승길, 배경진, 한순직, 원행섭, 박만준 등 일곱 명은 징역 15년(원행섭, 박만준은 궐석이었다), 도인권, 양성진이 10년, 최익형, 김용제, 장윤근, 고봉수, 한정교, 박형병은 각각 7년 또는 5년이니 이것은 강도 사건 관계요, 보안법 사건으로는 양기탁을 주범으로 하여 안태국, 김 구, 김홍량, 주진수, 옥관빈, 김도희, 김용규, 고정화, 정달하, 감익룡과 이름은 잊었으나 김용규의 족질 한 사람이 있었는데 판결되기는 양기탁, 안태국, 김 구, 김홍량, 주진수, 옥관빈은 징역 2년이요, 나머지는 1년으로부터 6개월이었다.


그리고 재판을 통하지 아니하고 소위 행정 처분으로 이동휘, 이승훈, 박도병, 최종호, 정문원, 김영옥 등 19인은 무의도(無衣島), 제주도, 고금도(古今島), 울릉도1년간 거주 제한이라는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김홍량이나 나는 강도로 15년, 보안법으로 2년, 모두 17년 징역살이를 하게 된 것이었다.


판결이 확정되어 우리는 종로 구치감을 떠나서 서대문 감옥으로 넘어갔다. 지금까지 미결수였으나 이제부터는 변통 없는 전중이었다. 동지들의 얼굴을 날마다 서로 대하게 되고 이따금 말로 통정도 할 수 있는 것이 큰 위로였다.


7년, 5년 징역까지는 세상에 나갈 희망이 있지마는 10년, 15년으로는 살아서 나갈 희망이 없었다. 그러므로 나는 몸은 왜에 포로가 되어 징역을 지면서도 정신으로는 왜놈을 짐승과 같이 여기고 쾌활한 마음으로 낙천 생활을 하리라고 작정하였다. 다른 동지들도 다 나와 뜻이 같았다.


옥중에 있는 동지들은 대개 아들이 있었으나 나는 딸이 하나가 있을 뿐이요, 아들이 없었다. 김용제 군은 아들이 4형제나 되므로 그 셋째 아들 문량(文亮)으로 하여금 내 뒤를 잇게 한다고 허락하였다. 나도 동지의 호의를 고맙게 받았다.


또 한 가지 나로 하여금 비관을 품지 않게 하는 일이 있었으니 그것은 일본이 내가 잡혀 오기 전에 생각했던 것과 같이 크고 무서운 나라가 아니라는 사실을 본 것이었다. 밑으로는 형사, 순사로부터 꼭지로는 경무총감까지 만나보는 동안에 모두 좀것들이요, 대국민다운 인물은 하나도 없었다. 가슴에 엑스 광선을 대어서 내 속과 이력을 다 뚫어본다면서도 내가 17년 전의 김창수인 줄도 몰라보고 깝죽대는 도변이야말로 일본을 대표한 자인 것 같았다.


'일본은 한국을 오래 제 것을 만들지는 못한다. 일본의 운수는 길지 못하다.' 나는 이렇게 단정하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장래에 대하여서 비관하지 아니하게 되었다.


허 위, 이강년 같은 큰 애국지사의 부하로 의병을 다니다가 들어왔다는 사람들이 인물로나 식견으로나 보잘것없음을 볼 때에는 낙심도 되지마는 이재명, 안중근 같은 의사의 동지로 잡혀 들어온 사람들의 애국심이 불같고 정신이 씩씩한 것을 보면 교육만 하면 우리 민족은 좋은 국민이 될 것을 아니 믿을 수 없었다.


저 무지한 의병들도 일본에 복종하는 백성이 되지 아니하고 10년, 15년의 벌을 받는 사람이 된 것만 해도 고맙고 존경할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나도 고 후조 선생 같은 어른의 가르침이 없었던들 어찌 대의를 아는 사람이 되었으랴.


옥에 있는 동안에 나는 내 심리가 차차 변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지난 10여 년간에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서 무엇에나 저를 책망할지언정 남을 원망하지 아니하고 남의 허물은 어디까지나 용서하는 그러한 부드러운 태도가 변하여서 일본에 대한 것이면 무엇이나 미워하고 반항하고 파괴하려는 결심이 생긴 것이었다.


나는 아침저녁으로 다른 죄수들과 같이 왜 간수에게 절을 하는 것이 무척 괴롭고 부끄러웠다. 다른 죄수들은 대의를 몰라서 그러하거니와, 너는 고 선생의 제자가 아니냐 하고 양심을 때리는 것이 있었다.


나는 내 손으로 밭 갈고 길쌈함이 없이 오늘까지 먹고 입고 살아왔다. 그 먹은 밥과 입는 옷이 뉘게서 나왔느냐, 우리 대한 나라의 것이 아니냐. 나라가 나를 오늘날까지 먹이고 입힌 것이 왜놈에게 순종하여 붉은 요에 콩밥이나 얻어먹으리라고 한 것은 아니었다.


食人之食衣人衣 所志平生莫有違

(사람의 밥을 먹고 사람의 옷을 입었으니

품은 뜻은 평생토록 어김이 없어야 한다)


내가 대한 나라의 밥을 먹고 옷을 입고 살아왔으니 이 수치를 참고 살아나서 앞으로 17년 후에 이 은혜를 갚을 공을 세울 수가 있느냐.


내가 이 모양으로 고민할 때에 안명근 군이 굶어 죽기를 결심하였노라고 내게 말하기에 나는 서슴치 않고,


"할 수 있거든 단행하시오"


하였다. 그날부터 안명근은 배가 아프다고 칭하고 제게 들어오는 밥은 다른 죄수에게 나누어 주고 4,5일을 연해 굶어서 기운이 탈진하였다. 감옥에서는 의사를 시켜 진찰케 하였으나 아무 병이 없으므로 안명근을 결박하고 강제로 입을 벌리고 계란 등속을 흘려 넣어서 죽으려는 목숨을 억지로 붙들었다. 죽을 자유조차 없는 이 자리였다. '나는 또 밥을 먹소' 하고 안명근은 내게 기별하였다.


9. 일제의 감옥 제도


우리가 서대문 감옥으로 넘어온 후에 얼마 아니하여서 또 중대 사건이 생겼으니 그것은 소위 사내(寺內 : 데라우치-편집자 주*) 총독 암살 음모라는 맹랑한 사건으로 전국에서 무려 7백여 명 애국자가 검거되어 경무총감부에서 우리가 당한 악형을 다 겪은 뒤에는 105인이 공판으로 회부된 사건이다. 105인 사건이라고도 하고 신민회 사건이라고도 한다.


2년 형의 집행중에 있던 양기탁, 안태국, 옥관빈과 제주도로 정배갔던 이승훈도 붙들려 올라왔다. 왜놈들은 새로 산밭의 뭉우리돌을 다 골라 버리고야 말려는 것이었다. 그거나 그것으로 대한이 제 것으로 될까?


내가 복역한 지 7,8삭 만에 어머님이 서대문 감옥으로 나를 면회하러 오셨다.


딸깍 하고 주먹 하나 드나들 만한 구멍이 열리기에 내다본즉 어머니가 서 계시고 그 곁에는 왜 간수 한 놈이 지키고 있다. 어머님은 태연한 안색으로,


"나는 네가 경기 감사나 한 것보담 더 기쁘게 생각한다. 면회는 한 사람밖에 못한다고 해서 네 처와 화경이는 저 밖에 와 있다. 우리 세 식구는 잘 있으니 염려 말아라. 옥중에서 네 몸이나 잘 보중하여라. 밥이 부족하거든 하루 두 번씩 사식 들여주랴?"


하시고 언성 하나도 떨리심이 없었다. 저렇게 씩씩하신 어머님께서 자식을 왜놈에게 빼앗기시고 면회를 하겠다고 왜놈에게 고개를 숙이고 청원을 하셨을 것을 생각하니 황송하고도 분하였다.


우리 어머님은 참말 거룩하시다! 17년 징역을 받은 아들을 대할 때에 어쩌면 저렇게 태연하실 수가 있으랴. 그러나 면회를 마치고 돌아가실 때에는 눈물이 앞을 가려 발뿌리가 아니 보이셨을 것이다.


어머님이 하루 두 번 들여주시는 사식을 한 번은 내가 먹고, 한 번은 다른 죄수들에게 번갈아 나누어주었다. 그들은 받아먹을 때에는 평생에 그 은혜를 아니 잊을 듯이 굽신거리지마는 다음번에 저를 아니 주고 다른 사람을 줄 때에는 '그게 네 의붓아비냐, 효자 정문 내릴라' 이러한 소리를 하면서 내게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면 내게 얻어먹는 편이 들고나서 나를 역성하므로 마침내 툭탁거리고 싸움이 벌어져서 둘이 다 간수에게 흠씬 얻어맞는 일도 있었다. 나는 선을 한다는 것이 도리어 악이 되는 것이었다.


나도 처음 서대문 감옥에 들어갔을 때에는 먼저 들어온 패들이 나를 멸시하였으나 소위 국사 강도범이란 것이 알려지면서부터는 대접이 변하였다. 더구나 이재명 의사의 동지들이 모두 학식이 있고 일어에 능통하여서 죄수와 간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을 때에는 통역을 하기 때문에 죄수들간에 세력이 있었는데, 그들이 나를 우대하는 것을 보고 다른 죄수들도 나를 어려워하게 되었다.


나는 처음에는 한 백여 일 동안 수갑을 채인 채로 있었다. 더구나 첫날 수갑을 채우는 놈이 너무 단단하게 졸라서 살이 패이고 손목이 퉁퉁 부었으므로 이튿날 문제가 되어서,


"왜 아프다고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고 하므로 나는,


"무엇이나 시키는 대로 복종하라고 하지 않았느냐?" 하였다. 그랬더니,

"이 다음에는 불편한 일이 있거든 말하라" 고 하였다.


손목은 아프고 방은 좁아서 몹시 괴로웠으나 나는 꾹 참았다. 사람의 일이란 알 수 없는 것이어서 이러한 생활에도 차차 익으면 심상하게 되었다. 수갑도 끌르게 되어서 몸이 좀 편하게 되니 불현듯 최명식 군이 보고 싶었다. 수갑 끌른 자리의 허물은 지금도 완연히 남아 있다.


최 군은 옴이 올라서 옴 방에 있다 하니 나도 옴이 생기면 최 군과 같이 있게 되리라 하여 인공적으로 옴을 만들었다. 의사의 순회가 있기 30분 전 쯤하여 철사 끝으로 손가락 사이를 꼭꼭 찔러 놓으면 그 자리가 볼록볼록 부르트고 맑은 진물이 나와서 천연 옴으로 보인다. 이것은 내가 감옥살이에서 배운 부끄러운 재주였다.


이 속임수가 성공하여 나는 옴장이 방으로 옮겨서 최명식 군과 반가이 만날 수가 있었다. 반가운 김에 밤이 늦도록 둘이 이야기를 하다가 좌등(佐藤)이라 하는 간수 놈에게 들켜서 누가 먼저 말을 하였느냐 하기로, 내가 먼저 하였노라 하였더니 나를 창살 밑으로 나오라 하여 세워놓고 곤봉으로 난타하였다.


나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아니하고 맞았으나 그 때에 맞은 것으로 내 왼편 귀 위의 연골이 상하여 봉충이가 되어서 지금도 남아 있다. 그러나 다행히 최 군은 용서한다 하고 다시 왜말로,


"하나시 햇소도 다다꾸도(이야기하면 때려 줄 테야)" 하고 좌등은 물러갔다.


감옥에서 죄수에게 이렇게 가혹한 대우를 하기 때문에 죄수들은 더욱 반항심과 자포자기심이 생긴다. 그래서 사기나 횡령으로 들어온 자는 절도나 강도질을 하게 된다. 그리고 만기(滿期)로 출옥하였던 자들도 다시 들어오는 자를 가끔 보았다.


민족적 반감이 충만한 우리를 왜놈의 그 좁은 소갈머리로는 도저히 감화할 수 없겠지마는 내 민족끼리의 나라에서 감옥을 다스린다 하면 단지 남의 나라를 모방만 하지 말고 우리의 독특한 제도를 만들 필요가 있다.


즉, 감옥의 간수로부터 대학 교수의 자격이 있는 자를 쓰고 죄인을 죄인으로 보는 것보다는 국민의 불행한 일원으로 보아서 선으로 지도하기에만 힘을 쓸 것이요, 일반 사회에서도 입감자(入監者)를 멸시하는 감정을 버리고 대학생의 자격으로 대우한다면 반드시 좋은 효과가 있으리라고 믿는다.


왜의 감옥 제도로는 사람을 작은 죄인으로부터 큰 죄인을 만들뿐더러 사람의 자존심과 도덕심을 마비시키게 한다. 예(例)하면 죄수들은 어디서 무엇을 도둑질하던 이야기, 누구를 어떻게 죽이던 이야기를 부끄러워함도 없이 도리어 자랑삼아서 하고 있다.


그도 친한 친구들에게면 몰라도 초면인 사람에게도 꺼림이 없고, 또 세상에 드러난 죄도 아니오, 저 혼자만 아는 죄를 뻔뻔스럽게 말하는 것을 보아도 그들이 감옥에 들어와서 부끄러워하는 감정을 잃어버린 표다. 사람이 부끄러움을 잃을진대 무슨 짓은 못하랴. 짐승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 감옥이란 이런 곳이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였다.


나는 최명식과 함께 소제부의 일을 하게 되었다. 이것은 죄수들이 부러워하는 '벼슬'이다. 우리는 공장에서 죄수들에게 일감을 돌려주고 뜰이나 쓸고 나면 할 일이 없어서 남들이 일하는 구경을 하거나 돌아다녔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최 군과 나와는 죄수 중에서 뛰어난 인물을 고르기로 하였다. 내가 돌아보다가 눈에 띄는 죄수의 번호를 기억하고 명식 군도 기억하여 나중에 맞추어 보아서 둘의 본 바가 일치하는 자가 있으면 그의 내력과 인물을 조사하는 것이다.


10. 불한당의 괴수


이 방법으로 우리는 한 사람을 골랐다. 그는 다른 죄수와 같이 차리고 같은 일을 하지마는 그 눈에 정기가 있고 동작에도 남다른 데가 있었다. 나이는 40 내외였다. 인사를 청한즉 그는 충청북도 괴산 사람이요, 5년 징역을 받아 이태를 치르고 3년을 남긴 강도범으로 통칭 김 진사라는 사람이었다. 나는 누구며, 무슨 죄로 왔느냐고 묻기로, 나는 황해도 안악 사람이요, 강도로 15년을 받았다고 하였더니 김 진사는,


"거, 짐이 좀 무겁소그려" 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그가 날더러 '초범이시오?' 하기로 그렇다고 대답할 때에 왜 간수가 와서 더 말을 못하고 헤어졌다.


내가 그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을 본 어떤 죄수가 날더러 그 사람을 아느냐 하기로 초면이라 하였더니 그 죄수의 말이,


"남도 도적치고 그 사람 모르는 도적이 없습니다. 그가 유명한 삼남 불한당 괴수 김 진사요, 그 패거리가 많이 잡혀 들어왔는데 더러는 병나 죽고 사형도 당하고 놓여 나간 자도 많지요" 하였다.


그랬더니 그날 저녁에 우리들이 벌거벗고 공장에서 감방으로 들어올 때에 그 역시 벌거벗고 우리 뒤를 따라서,


"오늘부터 이 방에서 괴로움을 끼치게 됩니다" 하고 내가 있는 감방으로 들어온다. 나는 퍽이나 반가와서,

"이 방으로 전방이 되셨소?" 하고 물은즉 그는,

"네. 아, 노형 계신 방이구려"

하고 그도 기쁜 빛을 보인다. 옷을 입고 점검도 끝난 뒤에 나는 죄수 두 사람에게 부탁하여 철창에 귀를 대어 간수가 오는 소리를 지켜 달라 하고 김 진사와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내가 먼저 입을 열어, 아까 공장에서는 서로 할 말을 다 못하여서 유감일러니 이제 한 방에 있게 되니 다행이란 말을 하였더니 그도 동감이라고 말하고는 계속하여서 그는 마치 목사가 신입 교인에게 세례 문답을 하듯이 내게 여러 가지를 묻는다.


그 첫 질문은,

"노형은 강도 15년이라 하셨지요?" 하는 것이었다.

"네, 그렇소이다"

"그러면 어느 계통이시오? 추설이요, 목단설이시오? 북대요 또 행락은 얼마 동안이나 하셨소?" 나는 이게 다 무슨 소린지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추설' '목단설'은 무엇이요, '북대'는 무엇이요, '행락'은 대체 무엇일까? 내가 어리둥절하고 있는 것을 보더니, 김 진사는 빙긋 웃으며,


"노형이 북대인가 싶으오" 하고 경멸하는 빛을 보였다.


내 옆에서 우리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죄수 하나가 김 진사를 대하여 나를 가리키며, 나는 국사범 강도라, 그런 말을 하여도 못 알아들을 것이라고 변명하여 주었다. 이 자는 찰강도라 계통 있는 도적이었다. 그의 설명을 듣고야 김 진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어찌 이상하다 했소. 아까 공장에서 노형이 강도 15년이라길래 위아래로 훑어보아도 강도 냄새가 안 나기로 아마 북대인가보다 하였소이다" 한다.


나는 연전에 양산 학교 사무실에서 교원들과 함께 하던 이야기를 생각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세상에 활빈당(活貧黨)이니 불한당(不汗黨)이니 하는 큰 도적 떼가 있어서 능히 장거리와 큰 고을을 쳐서 관원을 죽이고 전재(錢財)를 빼앗았으되 단결이 굳고 용기가 있으며,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동작이 민활하여 나라 군사의 힘으로도 그들을 잡지 못한단 말을 들었는데, 우리가 독립 운동을 하자면 견고한 조직과 기민한 훈련이 필요한즉, 이 도적 떼의 결사와 훈련의 방법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하여 두루 탐문해 보았으나 끝내 아무 단서도 얻지 못하고 만 일이 있었다.


사흘을 굶으면 도적질할 마음이 난다고 하지마는 마음만으로 도적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니 거지도 용기와 공부가 필요할 것이다. 담을 넘고 구멍을 뚫는 좀도둑은 몰라도 수십 명, 수백 명 떼를 지어 다니는 도적이라면 거기에는 조직도 있고, 훈련도 있고, 의리도 있으려니와 무엇보다도 두목 되는 지도자가 있을 것인즉, 수십 명, 수백 명 도적 떼의 지도자가 될 만한 인물이면 능히 한 나라를 다스려 갈 만한 지혜와 용기와 위엄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김 진사에게 도적 떼의 조직에 관한 것을 물었다. 그런즉 진사는 의외에도 은휘(隱諱 : 숨기고 꺼리는 것 - 편집자 주*)함 없이 내 요구에 응하였다.


"우리나라의 기강이 다 해이한 이때까지도 고대로 남은 것은 벌과 도적의 법뿐이외다."


하는 허두로 시작된 김 진사의 말에 의하면 고려 이전은 상고할 길이 없으나, 이조 시대도적 떼의 기원은 이성계(李成桂)의 이신벌군(以臣伐君 : 신하로서 임금을 들어 치는 것 - 편집자 주*)의 불의에 분개한 지사들이 도당을 모아 일변 이성계를 따라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소위 양반의 무리의 생명과 재물을 빼앗고 일변 그들이 세우려는 질서를 파괴하여서 불의에 대한 보복을 하려는 데서 나왔으니, 그 정신에 있어서는 두문동 72현과 같았다.

 

이것은 이조라고 하여 폄하하고 악감정을 유발시키고자 하는 친일적 설명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도적이라 하나 약한 백성의 것은 건드리지 아니하고 나라의 재물이나 관원이나 양반의 것을 약탈하여서 가난하고 불쌍한 자를 구제함으로 쾌사(快事 : 통쾌한 일 - 편집자 주*)를 삼았다. 이 모양으로 나라를 상대로 하기 때문에 자연히 법이 엄하고 단결이 굳어서 적은 무리의 힘으로 능히 5백 년간 나라의 힘과 겨루어 온 것이었다.


이 도적의 떼는 근본이 하나요, 또 노사장(老師丈)이라는 한 지도자의 밑에 있으나 그 중에서 강원도에 근거를 둔 일파를 '목단설'이라 부르고, 삼남에 있는 것을 '추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 두 설에 속한 자는 서로 만나면 곧 동지로, 서로 믿고 친밀하게 하였다. 이 두 설에 들지 아니하고 임시 임시로 도당을 모아서 도적질하는 자를 '북대'라고 하는데, 이 북대는 목단설과 추설의 공동의 적으로 알아서 닥치는 대로 죽여버리게 되었다.


노사장 밑에는 유사(有司)가 있고 각 지방의 두목도 유사라고 하여 국가의 행정 조직과 방사하게 전국의 도적을 총괄하였다. 1년에 일차 '대장'을 부르니 이것은 목단설과 추설 전체의 대회요, 또 수시로 '장'을 부르니 이것은 한 설만의 대회였다. 대회라고 전원이 출석하기는 불가능하므로 각 도와 각 군에서 몇 명씩 대표자를 파견하기로 되었는데, 그 대표자는 각기 유사가 지명하게 되며, 한 번 지명을 받으면 절대 복종이었다.


이 '장' 부르는 처소는 흔히 큰 절이나 장거리였다. 대소 공사를 혹은 의논하고 혹은 지시하여 장이 끝난 뒤에는 으레 어느 고을이나 장거리를 쳐서 시위를 하는 것이었다.


11. 도적만도 못한 단결로는


그들은 대회에 참여하러 갈 때에는 혹은 양반으로 혹은 등짐장수로, 혹은 장돌림, 혹은 중, 혹은 상제로 별별 가장을 하여서 관민의 눈을 피하였다. 어디를 습격하러 갈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에 세상을 놀라게 한 하동 장 습격은 장례를 가장하여 무기를 관에 넣어 상여에 싣고 도적들은 혹은 상제, 혹은 복인, 혹은 상두꾼, 혹은 화장객이 되어서 장날 백주에 당당히 하동 읍내로 들어간 것이었다.


김 진사는 이러한 설명을 구변좋게 한 후에 내게,

"노형 황해도라셨지? 그러면 연전에 청단(靑丹) 장을 치고 곡산 원을 죽인 사건을 아시겠구려?" 하기로, 아노라고 대답하였더니, 김 진사는 지난 일을 회상하고 유쾌한 듯이 빙그레 웃으며,


"그 때에 도당을 지휘한 것이 바로 나요. 나는 양반의 행차로 차리고 사인교를 타고 구종 별배로 앞 뒤 벽제까지 시키면서 호기 당당하게 청단 장에를 들어갔던 것이오. 장에 볼 일을 다 보고 질풍 신뢰와 같이 곡산읍으로 들이몰아서 곡산 군수를 잡아죽였으니 이것은 그놈이 학정을 하여서 인민으로 어육을 삼는다 하기로 체천행도를 한 것이었소" 하고 말을 마친다.


"그러면 이번 징역이 그 사건 때문이오?" 하고 내가 묻는 말에 그는,

"아니오. 만일 그 사건이라면 5년만으로 되겠소? 기위 면키 어려울 듯하기로 대단치 아니한 사건 하나를 실토하여서 5년 징역을 졌소이다."


나는 그들이 새 동지를 구할 때에 어떻게 신중하게 오래 두고 그 인물을 관찰하는 것이며, 이만하면 동지가 되겠다고 판단한 뒤에도 어떻게 그의 심지를 시험하는 것이며, 이 모양으로 동지를 고르기 때문에 한 번 동지가 된 뒤에는 서로 다투거나 배반하는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이며, 장물 - 도적질한 재물 - 을 나눌 때에 어떻게 공평하다는 것이며, 또 동지의 의리를 배반하는 자가 만일에 있으면 어떻게 형벌이 엄중하다는 것도 김 진사에게 들었다.


인물을 고를 때에는 먼저 눈 정기를 본다는 것이며 죄 중에 가장 큰 죄는 동지의 처첩을 범하는 것과 장물을 감추는 것이요, 상 중에 가장 큰 상은 불행히 관에 잡혀가더라도 동지를 불지 아니하는 것이니, 이러한 사람을 위하여서는 그 가족이 편안히 살도록 하여 준다는 말도 들었다.


김 진사의 말을 듣고 나는 나라의 독립을 찾는다는 우리 무리의 단결이 저 도적만도 못한 것을 무한히 부끄럽게 생각하였다.


여기서 나는 동지 도인권을 생각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는 본시 용강 사람으로 노백린, 김희선, 이 갑 등이 장령으로 있을 때에 군인이 되어서 정교의 자리에까지 올랐다가 군대가 해산되매 향리에 돌아와 있는 것을 양산 학교 체육 선생으로 연빙(延聘)하여 와서 우리와 동지가 되어 이번 사건에도 10년 징역을 받고 나와 같이 고생을 하게 된 사람이다.


이때에 옥중에서는 죄수를 모아서 불상 앞에 예불을 시키는 예가 있었는데 도인권은 자기는 예수교인이니 우상 앞에 고개를 숙일 수 없다 하여 아무리 위협하여도 고개를 빳빳이 하고 있었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서 마침내 예불은 강제로 시키지 아니하기로 작정이 되었다.


또 옥에서 상표를 주는 것을 그는 거절하였다. 자기는 죄를 지은 일도 없고 따라서 회개한 일도 없으니 개전을 이유로 하는 상표를 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또 그 후에 가출옥을 시킬 적에도 도인권은 내가 본래 무죄한 것을 지금 와서 깨달았으니 판결을 취소하고 나가라 하면 나가겠지마는 가출옥이라는 '가' 자가 불쾌하니 아니 받는다고 버티어서 옥에서도 할 수 없이 형기를 채우고 도로 내보내었다. 도인권의 이러한 행동은 강도로서는 능히 못할 일이라, 만산고목일지청(滿山枯木一枝靑 : 온산의 나무가 말라 죽었으나 오직 한 가지가 푸르다는 뜻 : 편집자 주*)의 기개가 있었다.


'홀로 높고 정갈하여 구애됨이 없으니

천하를 홀로 걸으매, 누가 나를 짝하랴

(嵬嵬落落赤裸裸 獨步乾坤誰伴我)


라 한 불가(佛家)의 구(句)를 나는 도 군을 위하여 한 번 읊었다.


하루는 나가서 일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일을 중지하고 1912 명치(明治 : 당시 일본의 왕이던 메이지를 말함 - 편집자 주*)가 죽었다는 것과 그 때문에 대사(大赦 : 사면령을 말하는 것으로 보임 - 편집자 주*)를 내린다는 말을 하였다.


이 때문에 최고 2년인 보안법 위반에 걸린 동지들은 즉일로 나가고 나는 8년을 감하여 7년이 되고, 김홍량 기타 15년은 7년을 감하여 8년이 되고 10년이라도 그 비례로 감형이 되었다. 그런 뒤 수삭을 지나서 또 명치의 처가 죽었다 하여 다시 자기의 3분의 1을 감하니 내 형은 5년 남짓한 경형이 되고 말았다.


이때 종신이던 것이 20년으로 감하여진 안명근은 형을 가하여 죽임을 받을지언정 감형은 아니 받는다고 항거하였으나 죄수에게 대하여서는 일체를 강제로 집행하는 것인즉, 감형을 아니 받을 자유도 죄수에게는 있지 아니하다 하여 필경 20년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는 안명근은 새로 지은 마포 감옥으로 이감이 되어서 다시는 그의 면목을 대할 기회도 없게 되었다.


안명근은 전후 17년 동안 감옥에 있다가 연전에 방면되어 신천 경계동에서 그 부인과 같이 여생을 보내고 있더니 아령(俄領 : 러시아 땅 - 편집자 주*)에 있는 그 부친과 친아우를 그려서 그리로 가던 길에 만주 화룡현(和龍縣)에서 만고의 한을 품고 못 돌아올 길을 떠나고 말았다.


이렇게 연거푸 감형을 당하고 보니 이미 치러 버린 3년 나머지를 떼면 나머지 형기가 2년밖에 아니된다. 이때부터는 확실히 세상에 나가서 활동할 희망이 생겼다. 나는 세상에 나가면 무슨 일을 할까. 지사들이 옥에 다녀 나가서는 왜놈에게 순종하여 구질구질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많은 것을 보니 나도 걱정이 되었다.


나는 왜놈이 지어준 뭉우리돌대로 가리라 하고 굳게 결심하고 그 표로 내 이름 김 구(金龜)를 고쳐 김 구(金九)라 하고 당호 연하(蓮下)를 버리고 백범(白凡)이라고 하여 옥중 동지들께 알렸다.


이름자를 고친 것은 왜놈의 국적에서 이탈하는 뜻이요, '백범'이라 함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천하다는 백정과 무식한 범부까지도 전부 적어도 나만한 애국심을 가진 사람이 되게 하자 하는 내 원을 표하는 것이니, 우리 동포의 애국심과 지식의 정도를 그만큼이라도 높이지 아니하고는 완전한 독립국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나는 감옥에서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을 때마다 하느님께 빌었다. 우리나라가 독립하여 정부가 생기거든 그 집의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는 일을 하여 보고 죽게 하소서 하고.

 

[계속] 12. 다시 인천 감옥으로 

백범일지(白凡逸志)로 본 대륙조선흔적(2) http://blog.daum.net/han0114/170456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