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SINA-신중국

사라센제국 Saracen

한부울 2009. 1. 22. 17:21
 

사라센제국 Saracen

 

 


사라센 또는 사라센족(인)은 대체로 이슬람 제국의 사람들을 말하는 용어이다. 원래 로마 제국 말기에 시나이 반도(Sinai-peninsula)에 사는 유목민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리스어 Σαρακηνός에서 유래 했는데 이 말은 아랍어의 '동쪽에 사는 사람들'이란 뜻의 شرقيين (사라킨)이라는 단어에서 기원했다고 한다.

 

                                          시나이 반도(Sinai-peninsula)


아라비아 지역에 기독교가 자리잡은 이후에는 아라비아에 사는 민족을 통칭하는 말로 쓰이다가 7세기 이슬람교가 성립한 뒤부터는 사실상 이슬람교도와 동일한 의미로 쓰였다. 특히 시칠리아와 남부 이탈리아 반도의 이슬람교도를 지칭하는 말로 쓰인다. 중세 초기 비잔티움 제국에서 사용하는 단어였는데 십자군을 거치면서 서유럽에 전파되었다.


Saracen인(영어:Saracen)이란, 아라비아 반도나 시리아의 아랍인을 고대그리스인이 부른 그리스어의 사라 케이 노이(Sarak? noi), 고대 로마인이 부른 라틴어의 사라케니(Saraceni)에 유래하는 말로, 舊書에는 프트레마이오스가 2 세기에 이 말을 지리서에서 이용하고 있다. 7 세기에 이슬람 세력이 대두되면서 유럽인은 그들을 이 고전적인 명칭으로 부르게 되어 중세 이후에는 오로지 이슬람교도 일반적인 호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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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기에서 동쪽은 13세기 중반까지, 서쪽은 15세기 말까지 인도 서부에서 이베리아반도에 이르는 지역을 무대로 흥망한 이슬람 제 왕조(諸王朝)의 총칭.

 

 

                                           이베리아반도Iberian Peninsula


사라센이라는 국호를 가진 왕조가 존재한 것은 아니며, 이슬람제국 또는 이슬람교주국(敎主國)의 별명으로 사용되었다. 사라센이란 말은 1세기경부터 그리스인과 로마인이 사용한 아라비아인에 대한 호칭인 사라세니(Saraceni)에서 유래하였다. 처음에는 한 부족만을 가리켰으나 뒤에는 아랍족과 이슬람교도까지도 뜻하게 되었다.


예언자 무함마드(570?∼632)는 40세초에 이슬람교의(敎義)를 설교하기 시작하였는데, 메카의 부유층은 알라가 유일신(唯一神)임을 주장하는 이 교의에 반대하여 박해가 심하였으므로, 622년 9월 신도와 함께 북방의 메디나로 옮겨갔다. 이것을 헤지라라고 하며, 이슬람교단(敎團)이 확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사라센제국은 메디나의 이 자그마한 이슬람교단이 발전한 것이다. 630년 무함마드는 신도군(信徒軍)과 함께 메카를 정복한 뒤 곧 아라비아반도의 대부분을 이슬람교의 세력하에 통일하였다.


632년 그가 메디나에 서 병사하자, 예언자의 후계자(칼리프)로서 덕망있는 교단의 장로인 아부바크르를 선출하였다. 이때 무함마드의 종형제이며 사위인 알리가 선출되지 않은 것이 뒤에 교단이 분열하는 원인이 되었다. 아부바크르는 단기간의 재임 중에 아랍 제부족(諸部族)의 이반(離反)을 평정하고, 다시 비잔틴 제국령(帝國領)인 시리아와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본거지 이라크에 원정군을 파견하였으며, 대정복사업은 제2대 칼리프인 우마르의 재임 중(634∼644)에 성공을 거두었다.


7세기의 630∼640년대에는 아라비아의 제부족이 이슬람의 교의와 칼리프 밑에 힘을 합하여 동쪽으로는 이란에서, 서쪽으로는 이집트의 서단(西端)에 이르는 대제국을 이룩하였고, 이라크에서는 바스라와 쿠파, 이집트에서는 푸스타트 등의 기지도시(基地都市)를 건설하였다. 사산왕조 페르시아는 마침내 멸망하고 비잔틴제국의 세력도 토로스산맥 너머 소아시아로 후퇴하고 말았다. 메디나에서는 우마르 뒤에 오스만, 알리로 이어지는 도합 4대의 정통(正統) 칼리프시대가 계속되었는데, 그 사이에 이슬람교단 내에서 세력 다툼으로 분열의 징조가 나타났다.


661년 제4대 칼리프 알리가 이라크의 쿠파에서 이단파인 할리주교파(敎派)의 자객에게 피살되자 이번에는 우마이야가(家)의 무아위야가 칼리프가 되어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에 도읍하였다. 무아위야는 뛰어난 정치가였으며, 칼리프의 세습제를 실시하여 우마이야왕조를 창업하였고 이 왕조는 750년까지 계속되었다. 정복사업은 이 왕조 때에도 계속되었는데, 8세기 전반에는 동쪽에서 중앙아시아와 인도의 북서부, 서쪽에서 북아프리카를 침략하고, 711년에는 이베리아반도에 상륙하였으며, 732년 오늘날의 프랑스에도 침입하였다.


또 비잔틴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에도 여러 번 진격하였다. 그러나 이 왕조도 붕괴되고 무함마드의 숙부 아바스의 자손에 의하여 아바스왕조가 성립하였다. 이때 우마이야왕조의 일족이 에스파냐로 도피하여 건설한 왕조를 후(後)우마이야왕조라고 한다. 신왕조는 처음에 이라크의 쿠파에 근거지를 정했다가, 762년부터 티그리스강 중류의 바그다드에 도읍을 옮겨 1258년까지 계속되었다.


이 시대에 이란계의 문화가 이슬람문화의 중요한 요소를 이루어 찬란한 사라센문화가 개화하였다. 그러나 코르도바에 도읍한 후 우마이야왕조를 비롯하여 서쪽에는 이드리스왕조·아글라브왕조가, 동쪽에는 타히르왕조·사파르왕조·사만왕조의 지방정권이 잇달아 독립하여 아바스왕조의 직접 지배지는 나날이 축소되어 갔다. 10세기경부터는 이라크 지방에 국한되었는데 그것마저도 실권은 부이왕조에 맡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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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센 제국의 역사

 

 

아랍 역사에 있어서 하나의 민족 통일체로서의 아랍이라는 관념을 처음으로 표출한 사람은 예언자 무함마드였습니다. 이슬람을 아랍 감정위에 구축하려는 무함마드의 의도는 적중하여 아랍의 통일과 발전은 계속되었습니다.


사라센 제국은 어느 제국의 이름이 아니고 회교의 이념으로 하는 칼리프가 지배하던 시대의 아랍을 말하는 것이다. 어원은 라틴 사람들이 '사라세니(Saraceni)'라고 부른 것이 유래이다.'사라세니'는 시리아 초원의 유목민을 가르키며 이것은 '사막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초기는 시리아 유목민만 그렇게 부르다가 후에는 이슬람의 제왕 조를 전부 총칭하여 불렀으며 이는 십자군을 통하여 전 유럽의 호칭이 되었다. 제국의 동쪽은 7세기부터 13세기 중반까지, 서쪽은 15세기말까지 인도 서부에서 이베리아(스페인) 반도에 이르는 지역에 흥망(興亡) 하였다.


1) 정통 칼리프 시대 (주후 632년-661년)

 

                                                4대 칼리프 알리의 초상화


이슬람의 긴 역사는 무하마드의 예기치 않는 죽음과 함께 다시 시작 되었다. 무하마드는 후계자에 대한 언급이 없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추종자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일어나 이슬람 공동체인 움마가 분열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아랍 부족들 사이에서 행해지고 있던 족장 선임방법에 따라 지도자를 뽑게 되었다. 무하마드의 권위는 예언자와 가장 친한 신앙동료이자 예언자와 인척관계에 있던 4명의 인물에게 전해지게 되었다. 이 시대를 정통 칼리프시대라고 하며 신앙상으로는 이슬람의 황금기(Golden Age of Islam)이라 부fms다.


'칼리프'란 '알라의 사도의 후계자'라는 뜻이나 당시에는 예언자의 후계자 내지 예언자의 대리자라는 단순한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코란에는 아담을 칼리프라 하였고, 지상에 신의 대리자인 칼리파를 둔다는 구절이 있다.


선임 칼리프들은 민중과 친히 접촉하고 스스로 예배를 선도하며, 민중위에 서서 정신적, 군사적인 권위를 행사하였다. 이러한 정치제도는 시대에 따라 내용이 조금씩은 달랐지만 근세 오토만 커어키 제국에 이르기까지 사용된 이슬람 사회의 독특한 종교적인 정치 제도가 되었다.


(1) 초대 칼리프(A.D. 632-634)


초대 칼리프는 무하마드의 부인 하디자 다음으로는 무하마드의 처음 제자였다고 하는 아부 바르크였으며 632년에서 634년까지 재위하였다. 그는 칼리프로 2년 동안 지내면서 이슬람에 대항하는 세력들을 제압해 나갔고 Muhammed의 가르침들을 모아 코란(Qur'an)을 만들었다.


(2) 2대 칼리프 우마르(A.D. 634-644)


2대 칼리프는 우마르 이븐 알 카탑(재위 634-644)이었다. 그는 재위 동안 시리아. 이집트, 페르시아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우마르는 팔레스틴을 침공하여 638년에 예루살렘을 정복하였고 640년에는 가이사랴를 점령하였다.


(3) 3대 칼리프 우스만(A.D. 644-656)


3대 칼리프는 무하마드의 사위인 우스만(재위 644-656)이었다.

부족한 자원과 생산물 대문에 자연스럽게 외부로 세력을 뻗어 나갔던 이슬람 공동체는 반항적인 아랍부족들과 힘을 합쳐 비잔틴 제국의 영역을 침범해 나갔다.


당시 여러해의 전쟁으로 인해 비잔틴 제국과 페르샤의 사산제국은 군사적으로 약해져 있었으므로 이슬람의 세력이 빠르게 팽창되어져 갔다. 그는 북아프리카, 사이프러스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그는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는 다수의 문건을 코란(Qur'an)으로 단일화시켰으며 페르시아 왕국의 쇠퇴와 함께 조로아스타교가 있었던 이란을 정복하고 중앙아시아. 북서 인도에 까지 세력을 확장시켰다. (652).(이 전쟁은 Islam의 세력을 확장시키려는 의도보다는 상인들의 상권과 안전을 보호하려는 목적이었다고 함) 그러나 3대 칼리프였던 우스만은 제국을 제대로 통치하지 못하고 실정을 거듭하다가 죽임을 당하게 된다.


(4) 4대 칼리프 알리(A.D. 656-662)


무하마드의 다른 사위였던 알 리가 4대 칼리프로 추대되었다.


알리가 칼리프로 있으면서 Muhammed의 조카와 사위들 사이에 수장권의 계승에 대한 심각한 분쟁이 일어나 "Shiites(시아파)"가 생기게 됩니다. 지금까지 선거로 선출하던 수장을 Muhammed의 자손으로 제한하여 계승해 나가게 되었다.


그는 정복에 치중하지 않았으나 후반에는 북아프리카, Mosoko를 정복했다. 그러나 시리아의 총독이었던 무아위야가 계속 저항을 하였으며 알리도 661년 죽임을 당하고 권좌는 무아위야에게 돌아갔다.


2) 우마야드가에서 지배한 아랍제국시대(651년 -750년)


모하메드 이후 네 번째 칼리프이었던 알리 통치시기에 이르러 모슬렘 통치는 강력한 가문이었던 우마야의 도전에 부닥치게 되었다. 얼마동안의 내전을 거치면서 우마야 가문이 승리를 거두게 되면서 이 가문은 '우마야드 왕조'(Ummayad dynasty; 기원 661-750)를 시작하였다


우마야의 무아위야는 아라비아 반도에 자리잡은 다마스커스를 수도로 정하고 내분으로 혼란했던 이슬람의 공동체를 강력하게 이끌므로 우마이야 왕조시대를 열었다.


그는 아랍지역을 하나로 묶었을 뿐 아니라 사산 왕조 페르시아에게서 빼앗은 유프라테스 ,티스리스강 유역과 시리아 예루살렘을 포함한 팔레스타인 나일강 유역의 일부 비잔틴 제국에 속했던 트리폴리에 이르는 지중해 연안지역을 정복하였다.


우마야드 왕조는 다메섹을 중심지로 삼았으며, 많은 비잔틴문화를 채택하였다. 비잔틴의 영향은 특히 우마야드 왕조의 건축에서 발견된다.


우마야드 왕조는 나라의 경제를 유지하는데 최선을 다하였다. 우마야드 왕조의 아랍 제국은 경제적 측면에서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을 박해하지 않았다. 유대인 공동체들은 그 당시에 요단강 서편과 모압, 에돔, 미디안 그리고 에일랏 주변에서 크게 번성하였다. 티베리아는 당시 가장 큰 유대의 영적 중심지가 되었다. 그곳에서 예루살렘 탈무드가 완성되었고, 히브리어의 모음체계가 개발되었으며, 종교적 문헌들과 시들도 많이 씌어졌다.


우마이야 왕조는 670년을 기점으로 북 아프리카 지역을 정복하였다. 튀니지를 점령하고 그곳에 카이르완시를 건설했고 이어 모로코로 진격하였다. 점령지에는 독실한 신앙으로 무장한 아랍군이들을 수용하는 병영들을 세웠다.


정복전쟁을 위한 병력은 현지 유목민들 사이에서 쉽게 구할 수가 있었다. 반대로 정착민들 특히 베르베르인들은 비협조적이었으며 이들은 대부분 기독교인으로 남았고 점령군에게 저항하기도 하였다.


다행히 우마이야 왕조의 정책은 매우 너그러워서 정기적으로 세금만 납부하면 점령지 주민들의 종교생활에 자유를 주었다. 세력을 확장해가던 아랍의 세력은 스페인까지 점령하였고 정복된 뒤 몇 년간 왈리라고 불리우는 총독이 그곳을 다스렸다.


8세기 이후에는 아바스 혁명군에게 밀려 쫓겨난 우마이야 왕조가 스페인에 후 우마이야 왕조라고 불리는 독립적인 이슬람왕국을 수립한다. 제국의 확대에도 불구하고 우마이야조하의 이슬람 공동체는 평온하지 못했다. 정부의 세속적 성격이나 아랍인 우위의 정책은 비(非)아랍 무슬림인 마왈리와 원리주의적인 신도의 불만과 반발을 유발시켰다.


이것은 시아파와 하와리즈파의 운동과 결부되었고, 나아가서는 아랍 부족대립과도 연결되어 활발한 반정부운동을 일으켰다.


우마이야조의 칼리프들은 이슬람 공동체를 새로운 환경 속에서 확대.유지.발전 시키는 데에 힘썼으나 이슬람적으로 다지는 데는 실패했고, 또 무엇이 이슬람적인가 하는 것에 관한 기준도 미처 확립하지 못했다.


서기 638년 이후 예루살렘을 통치했던 모슬렘들은 모리아 산의 큰 바위 위에서 자신들의 최고의 선지자 모하메드가 승천했다는 전설에 따라 그의 발자국이 남아 있다는 바위를 종교적으로 기념하고 보존하기 위하여 서기 692년 당시 예루살렘의 통치자 (Caliph) 압둘 말리크는 예술적으로 아름답게 꾸며진 팔각형의 기단과 돔으로 이루어진 일명 "황금의 사원"이라고도 불리우는 "바위의 돔(Dome of the Rock)"을 건설하여 오늘날 까지 내려오게 되었다. 바위 사원 실내에는 폭 12야드 길이 15야드 높이 2야드의 넓직한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던 제단이라고 전해진다.


표면에는 골이 패어 있어서 제물의 피가 흘러내리도록 되어 있다.

이슬람들은 이 바위를 딛고 마호메트가 하늘로 승천하였다고 믿기 때문에 예루살렘은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와 메디나에 이어 이슬람 세계의 3대 성지가 되었다.


메카와 메디나를 중심으로 무하마드(Muhammad 570-632)가 창설한 이슬람교는 그동안 지배해 왔던 비쟌틴 제국을 차례로 정복하고 스페인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을 점령하고 우마야드 왕조의 번영을 이루었다.


이렇게 등장한 이슬람은 우마야드 왕조의 칼리프 오마르에 의해 주후 638년 예루살렘의 성전터를 정복하고 692년에 칼리프 압둘 말리크에 의해 황금 사원(Dome of the Rock)과

710년에 엘 악사(EL Aqsa Mosque) 사원을 각각 완공하면서 예루살렘은 메카와 메디나에 이어 이슬람의 3대 성지중의 하나가 되면서부터 이슬람교와 유대교와 기독교와의 갈등이 시작 되었다.

 

             다메섹 시내 전경 속의 우마야드 모스크 세개의 미나렛이 뚜렷하게 보인다.


다메섹을 설명할 때 이미 한번 설명을 했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서 간략하게 다메섹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겠다. 다메섹은 그 지배자가 시대에 따라 바뀌는 그야말로 풍운의 도시였다. 다메섹의 역사적 배경은 다음과 같다.


주전 8세기- 앗수르와 이집트와 힛타이트의 지배를 받음.

주전 6세기- 메대와 파사의 지배를 받음.

주전 333년- 헬라의 알렉산더 대제에 의해 정복당함.

주전 3세기- 셀류크스 왕조가 통치하게 됨.

주전 83년- 아르메니아 왕국의 속주가 됨

주전 64년- 로마의 속국이 됨.

주후 636년- 이슬람 아랍에 의해 점령당함

주후 661년- 다메섹이 우마야드제국의 수도가 됨

주후 1096년- 십자군에 의해 일부가 침략 당함

주후 1099년 - 이집트의 술탄 살라딘 장군에 의해 십자군을 물리침


우마야드 모스크는 시리아에서 가장 큰 이슬람교 대사원으로 아랍권을 통틀어서도 매우 크고 아름다운 사원 중 하나로 손꼽힌다. 위의 역사적 배경에서 보는 것처럼 다메섹은 우마야드 왕조의 수도였으며 자연스럽게 이러한 거대한 사원이 세워지게 되었던 것이다.


기원 후 705년 우마야드 할리파 왕조 시대의 알 왈리드 1세(Al-Walid) 에 의해 요한 교회 위에 대규모로 지어진 사원으로 수차례의 재앙과 더불어 1898년 대화재 때 대부분 손실 되었고 현재는 복구된 모습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사원의 돔(dome) 또한 목조였으나 화재 후 복원하였다.

 

             우마야드 모스크에는3개의 첨탑(미나렛)이 있는데(우측그림) 그 중에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미나렛으로 불리우는데 여기에서 우리는 마야드 시대 이슬람의 너그러움을 엿볼 수 있다.

이 거대한 모스크는 당시 비잔틴 문화의 꽃으로 알려졌던 이스탄불의 소피아 성당과 견주기 위해 지어졌다고 전해진다. 건물 정면의 벽면에 있는 인상적인 그림은 전원 풍경을 묘사하고 있는데 이슬람의 천국을 묘사하고 있다고 한다.

 

아랍 제국의 첫 번째 왕조인 우마야드 왕조때 세운 이 모스크는 규모뿐만 아니라 사원 안팎을 장식하고 있는 모자이크 작품으로도 유명한데 우마야드 모스크의 모자이크는 아랍 모자이크 예술의 백미라는 평이 있다.

모자이크는 비잔틴 문화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우마야드 왕조의 문화는 자연스럽게 비잔틴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었던 것이다.

이 사원의 내부에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게 되어 있으며 반바지나 짧은 옷을 입고 온 사람은 '차도르'라는 옷을 빌려 입어야만 내부에 들어갈 수 있다.

 

 

홀안에 멀리 보이는 초록색 유리창 돔이 요한 목 무덤교회이다.

이 대사원은 다마스쿠스의 장구한 역사 변천의 한 단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원래 이 사원이 서있는 자리는 원주민 아람인(Aram)들의 하다드 신전이 있던 곳이다.

하다드(hedad)는 비를 주관하고 땅을 풍요롭게 해준다는 고대 시리아의 최고신이었다.

로마제국시대에 들어와서 그 자리에는 로마인들의 최고신을 위한 주피터 신전이 건축되었고 그 후 기독교 시대였던 비잔틴 제국 때는 세례요한 목 무덤 교회로 전환되었다.

모스크가 들어서기 전 작은 규모의 교회가 있었는데 이 건물의 코린트식 기둥이 현재 사원의 외벽으로 남아있고 이 때 교회 지하 납골당에서 사도 요한의 머리가 발견되어 현재 사원 안에 보관 중이라고 전해진다.

 

                                                    사원 내부의 모습들


내부 기도홀은 길이 130미터로 사진 찍는 관광객으로 인해 번잡스럽지만 그들의 성스러운 분위기를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곳곳에는 개인적으로 또는 단체로 기도하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외부에서 바라보는 사원은 마치 성곽처럼 보이며 사원의 옆으로는 다메섹의 상권의 중심인 하마디아숙이 위치하고 있다. 아래의 사진들은 외부 벽에 예배 시간을 기다리는 무슬림들의 모습과 하마디아숙에서 바라본 우마야드 사원의 모습이다.

 

 

 

사원의 내부는 거대한 대리석 광장을 통해 들어갈 수 있다. 광장은 대리석으로 깔려 있으며 순례자들은 광장입구에서 부터 신을 벗어야 한다. 대리석이 뜨거운 태양 볕에 뜨겁게 달아 있어서 발을 딛기도 힘든다. 광장 중앙에는 순례자들의 발을 씻기 위한 분수대가 위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