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제국 Roman Empire 27 BC – AD 476 /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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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투스 Augustus (27 BC–AD 14)
The Battle of Actium, by Lorenzo A. Castro, 1672.
기원전 31년 안토니우스를 제거한 옥타비아누스는 원로원으로부터 종신 집정관의 직위를 받았다. 옥타비아누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폈던 공화정 체제를 유지하며, 내전 당시 제거된 귀족들의 직위를 지방 출신 관리들로 충당하였다. 또한 이들이 원로원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길도 열어주었다. 기원전 27년에 옥타비아누스는 내전이 종결되었으므로 자신에게 위임된 비정규적 특권을 원로원과 로마 시민에게 반납한다고 선언하였다. 이로써 로마는 다시 명목상으로는 이전의 공화정 시절의 정치 체제로 회귀한 것처럼 보였다. 로마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존엄한 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수여한다.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27년에 내전을 종식시키기 위해 위임받았던 여러 특권을 원로원에 되돌려주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여전히 집정관이었고,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가 갖고 있는 금화, 은화 발행권을 되찾아올 만한 힘이 없었다. 또한 직접적으로 속주와 군대를 다스리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로마 제국의 병사들에게 강한 지지를 얻고 있었다. 또한 아우구스투스의 후원에 힘입어 출세한 많은 지지자, 피보호자, 어마어마한 부는 로마의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원로원은 전과 다름없는 위엄과 권한을 지닌 듯했으나 실권은 없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실질적으로 군사와 재정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특히 원로원 의원직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원로원을 전통과 여론을 대변하는 기관으로서 높이 평가했고, 원로원에 정책 자문을 구했다. 마찬가지로 그는 행정관을 임명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원로원을 존중해 원로원 의원과 에퀴테스로 이루어진 특별위원회가 프라이토르와 콘술을 뽑게 했고, 코미티아 켄투리아타[兵增]는 자동적으로 그것을 승인하도록 했다.
속주들은 공공(公共) 속주라 하여 원로원이 통제했으나, 편입한 지 얼마 안 되는 그밖의 속주들은 황제가 통제했다. 황제는 그가 통제하는 속주에 군대를 주둔시켰고 속주 총독직에는 원로원 의원뿐만 아니라 에퀴테스도 임명했다. 속주는 직접세와 간접세를 로마에 바쳤으나 기본적으로는 각각 자체의 민회와 참사회, 관리를 거느린 키비타스(Civitats)를 단위로 자치가 이루어졌다. 속주의 상황은 제정 때 속주에 파견된 관리의 수준이 높아졌고 감독이 강화되었으며 평화가 정착되어 더 나아졌고 로마 시민권을 받으면서 무니키피움으로 승격되었다.
이러한 평화에 대해 많은 사람이 아우구스투스와 그의 가문을 숭배함으로써 감사를 표시했다. 그러나 그의 실질적인 권력기반은 바로 그에게 개인적인 충성을 서약한 군대였다. 군대는 레기온·변경 주둔군·황실 근위대·제국 함대로 이루어졌다. 아우구스투스 치하에서 황실 근위대의 병사는 대개 이탈리아인이었으나, 많은 레기온과 거의 모든 변경주둔군의 병사는 주로 황제가 다스리는 서부 속주 출신이었는데 이러한 추세는 점점 더 증가했다. 그러나 레기온은 입대하는 날로, 변경 주둔군은 제대하는 날로 시민권을 얻었고, 더구나 변경 주둔군에서 제대한 병사들은 종종 그들이 주둔했던 속주에 정착했으므로 이는 제국 전역을 로마화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그는 많은 지역을 정복했으나 로마화가 비교적 쉬운 지역만을 속주로 병합해 도로를 건설하고 역참(驛站)제도를 시행한 반면, 로마화가 어려운 지역은 위성국가로 만들어서 방어에 따르는 비용을 줄였다. 그러나 영토를 확장하는 더 쉬운 방법으로 전쟁보다는 위성국가를 만든 뒤 속주로 병합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로마에서는 제위계승의 원칙이 없었기 때문에 아우구스투스는 일찍부터 후계 문제에 관심을 두었다. 군대는 부자상속에 정통성을 두었으므로 그는 왕조를 세우려 했으나 그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가까운 친척들도 그보다 먼저 죽었다. 결국 그는 어쩔 수 없이 티베리우스를 양자로 삼아 후계자로 지명하고 호민관의 권한을 주었다. 서기 14년 아우구스투스가 죽은 뒤 티베리우스가 자동적으로 제위에 올랐다.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황조
아우구스투스 (Gaius Iulius Caesar Octavianus Augustus) (기원전 27년 - 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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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리우스에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까지의 역사
Tiberius to Alexander Severus (14–235)
Vespasian commissioned the Colosseum in Rome.
티베리우스(재위 14년~37년)는 변방을 보호하고, 국가의 행정 조직을 강화하였으며, 원로원의 귀족들과 밀착되어 있던 민회를 폐지하여 하층민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후계자인 게르마니쿠스가 암살당하자 티베리우스가 이 사건에 연루 되었고, 이는 로마 시민들로 부터 배척을 받게되었다. 그가 죽자 친척인 가이우스 카이사르, 즉 칼리굴라(재위 37년 ~ 41년)가 그 뒤를 이었다. 그러나 칼리굴라는 전제 원로원을 모욕하며 낭비를 일삼는 등 과대망상적인 폭군이 되어 결국은 암살당했다. 칼리굴라의 숙부로 그다음 황제가 된 클라우디우스 1세(재위 41년 ~ 54년)는 정부의 중앙집권화를 크게 진척시켰고 대외팽창에 많은 관심을 보여 브리타니아를 합병했으며 서부 속주들의 로마화를 촉진시켰다. 그는 전제정치를 해 인기를 얻지는 못했지만 재무관리를 강화하고 재판제도를 개혁했다. 그의 뒤를 이은 사람은 16세밖에 안된 의붓아들 네로(재위 54년 ~ 68년)였다. 네로는 가족을 비롯해 여러 사람들을 살해하였고, 로마 대화재를 일으켰으며, 그 죄를 그리스도교 신도들에게 돌려 그들을 박해했지만 반란이 일어나자 자살했다.
네로가 죽은 뒤 내란이 벌어졌고, 이 내란의 마지막 승리자인 베스파시아누스(재위 69년 ~ 79년)와 두 아들이 플라비우스 왕조(69년 ~ 96년)를 이루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내란으로 약해진 변경수비를 강화하고 재정을 튼튼하게 했으며 원로원에 대해 정중하지만 단호한 태도를 보이면서 원로원을 행정관 배출 기구로만 취급했다. 그의 아들 티투스(재위 79년 ~ 81년)는 많은 인기를 누렸으나 얼마 안 가 죽었고, 뒤이어 그의 동생 도미티아누스(재위 81년 ~ 96년)가 제위에 올랐다. 그는 유능하지만 고압적(高壓的)인 인물로서 군대의 충성을 확보하고 제국의 복지를 증진시켰다. 그러나 그의 전제로 말미암은 불만 때문에 96년 암살당함으로써 플라비우스 왕조는 막을 내렸다. 플라비우스 왕조는 변경 주둔군을 그들의 출신 속주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 배치했고, 레기온을 일정한 장소에 주둔시켜 변경 주둔군과 비슷한 성격을 부여했다. 이 군대로 그들은 브리타니아에서 지배 영역을 넓히고 라인 강 유역을 되찾았으며, 실패로 끝났으나 도나우 강 지역도 회복하려 시도했고 동쪽 변방도 강화했다.
도미티아누스를 암살한 자들은 군대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재위 96년 ~ 98년, Marcus Cocceius Nerva)를 황제로 추대했다. 네르바의 가장 중요한 시책의 하나는 "구빈 계획"(救貧計劃, alimenta)으로서 이는 이탈리아 지역의 소농민을 돕고, 가난으로부터 구제해 출생률을 높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후계자로 지목할 아들이 없었고, 군대의 인망을 얻을 만한 군사적 경험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군인인 마르쿠스 울피우스 트라야누스(재위 98년 ~ 117년, Marcus Ulpius Nerva Traianus)를 양자로 삼아 후계자로 세웠다. 속주 출신의 첫 황제인 트라야누스는 법규를 준수하고 겸손해 인민과 군대 모두에게서 인기를 얻었으며, 제국 전체의 복지를 향상시키기 위해 필요하다면 원로원까지도 거리낌없이 무시하면서 독단적인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지방 자치 쇠퇴와 비대한 관료 체제를 낳게 되었다. 그는 대외적으로는 도나우 강 지역과 동쪽 변경을 평정하였고, 북으로는 라인 강 유역과 브리타니아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그는 중동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다가 죽었다.
그의 뒤를 이은 사람은 그의 가장 가까운 친척인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하드리아누스(재위 117년 ~ 138년, Publius Aelius Traianus Hadrianus)였다. 그는 영토 팽창에 반대하고 평화를 추구해 변경수비 강화에 치중했다. 그는 속주를 지킬 주둔군을 그 속주 자체에서 충원했고 레기온과 주둔군의 차이를 없앴으며, 군대를 감독하기 위해 자주 몸소 시찰을 다녔다. 한편 레기온이 이처럼 주둔군과 다름없어지자 기동작전을 위해 새로운 부대가 필요하게 되었는데, 이 부대는 많은 경우 제국 주변의 이민족으로 충원되었다. 하드리아누스는 민사에서도 업적을 남겼다. 그의 치세 때 관료제가 정착되었는데, 그의 법률적 업적 특히 "영구 고시록"(永久告示錄, edictum perpetuum:법무관의 고시에 따라 해석되는 법)의 법전화는 현저한 것이었다. 또 새로운 형식의 라틴 시민권을 창설해 이 권리를 얻은 도시의 모든 지방 원로원 의원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어 로마 원로원의 많은 성원이 속주의 귀족으로 보충되었다. 아들이 없었던 그는 136년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피우스를 새로이 양자로 삼았다. 안토니누스 또한 처의 조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베루스의 아들 루키우스 베루스를 양자로 삼았다.
하드리아누스가 죽은 뒤 제위에 오른 안토니누스 피우스(재위 138년 ~ 161년,
Titus Aurelius Fulvius Boionius Arrius Antoninus Pius) 때 로마 제국은 세계 주의의 성격을 뚜렷하게 띠면서 조용한 번영을 누렸으나 동시에 변경지역이 이민족에 의해 잦은 침략을 당하고, 내부에서도 반란이 일어나 위험스러운 징조를 보였다. 그의 뒤를 이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재위: 161년~180년, Marcus Aurelius Antoninus)는 루키우스 베루스(Lucius Verus)를 공동 황제로 지명해 하드리아누스의 뜻에 충실히 따랐으나 이는 제국의 동서 분리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그의 치세에는 이민족이 강력하게 침략해왔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제국 동쪽 변경에 밀어닥친 위험은 무마시켰다. 그러나 게르만 족의 도나우 강 지역 침입은 동부에서 벌어진 반란과 함께 오랫동안 아우렐리우스를 괴롭혔다. 그는 게르만 족을 진압하는 도중에 죽었고, 뒤를 이어 황제가 된 그의 아들 콤모두스(재위 180년 ~ 192년, Marcus Aurelius Commodus Antoninus)는 무능하고 변덕스러우며 쾌락만 추구하다가 암살당했다.
192년 12월 31일, 콤모두스가 암살당한 뒤 벌어진 내란에서 도나우 주둔군이 193년에 추대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마지막 승리를 거두었다(197년). 트리폴리 출신인 그는 동부인과 자신의 세력기반인 군대를 우대한 반면 이탈리아인과 원로원을 무시했다. 그는 군대를 증강하고 병사의 봉급을 인상하며 상여금을 많이 주어 군대를 특권계급으로 만들었다. 또 그는 관료제를 강화해 중앙권력을 강화함으로써 관료층인 에퀴테스를 우대하는 동시에 지방자치를 더욱 압박했다. 이러한 조치로 지출이 크게 늘어나자 그는 이탈리아에도 세금을 물렸다. 그의 황제권은 사실상 군대에 의존해 있었으며, 세습에서 황제의 정통성을 찾으려 한 그는 두 아들을 후계자로 지명했다.
211년, 그가 죽자 큰 아들 카라칼라(재위 211년 ~ 217년)는 아버지의 정책을 그대로 따랐으나 재정이 계속 궁핍해져 악성 인플레를 낳았다. 그는 또한 제국의 거의 모든 주민에게 시민권을 확대해 제국의 통합을 강화했으나, 동시에 시민권의 가치를 줄이고 군대 충원을 훨씬 더 어렵게 만들었다. 그는 동방정복을 꿈꾸고 원정을 나갔다가 부하인 마르쿠스 오펠리우스 마크리누스의 지령을 받은 자객에게 암살당했다.
이어 마크리누스가 황제에 올랐으나 군대의 지지를 얻지 못했고 곧 세베루스 가문의 반란으로 218년 살해당했다. 그뒤 황제가 된 세베루스 가문의 바시아누스는 그가 모시던 신(神)의 이름을 딴 엘라가발루스로 더 잘 알려져 있다. 14세였던 그는 로마인에게 낯선 신을 광적으로 숭배하고 지나친 낭비를 했기 때문에 결국 미움을 사 222년에 살해당했고, 이로써 세베루스 왕조는 끊어졌다.
Roman Empire in 117 AD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황조
티베리우스 (Tiberius Claudius Nero Caesar) (14년 - 37년)
칼리굴라 (Gaius Caesar Germanicus, Caligula) (37년 - 41년)
클라우디우스 (Tiberius Claudius Nero Caesar Drusus) (41년 - 54년)
네로 (Tiberius Claudius Nero Domitianus Caesar) (54년 - 68년)
군인 황제
갈바 (Servius Sulpicius Galba) (68년 - 69년)
오토 (Marcus Salvius Otho) (69년)
비텔리우스 (Aulus Vitellius Germanicus) (69년)
플라비우스 황조
베스파시아누스 (Titus Flavius Vespasianus) (69년 - 79년)
티투스 (Titus Flavius Vespasianus) (79년 - 81년)
도미티아누스 (Titus Flavius Domitianus) (81년 - 96년)
네르바-안토니누스 황조
네르바 (Marcus Cocceius Nerva) (96년 - 98년)
트라이아누스 (Marcus Ulpius Nerva Traianus) (98년 - 117년)
하드리아누스 (Publius Aelius Traianus Hadrianus) (117년 - 138년)
안토니누스 피우스 (Titus Aurelius Fulvius Boionius Arrius Antoninus Pius) (138년 - 161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Marcus Aurelius Antoninus) (161년 - 180년)
(공동황제 루키우스 베루스 (Lucius Verus) 161년 - 169년)
콤모두스 (Marcus Aurelius Commodus Antoninus) (180년 - 193년)
난립기
페르티낙스 (Publicus Helvius Pertinax) (193년)
디디우스 율리아누스 (Didius Iulianus) (193년)
세베루스 황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Lucius Septimius Severus) (193년 - 211년)
카라칼라 (Marcus Aurelius Antoninus, Caracalla) (211년 - 217년)
마크리누스 (Marcus Opellius Macrinus) (217년 - 218년)
엘라가발루스 (Marcus Aurelius Antoninus, Heliogabalus) (218년 - 222년)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Marcus Aurelius Severus Alexander) (222년 - 23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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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분열 Crisis of the Third Century and the later emperors (235–395)
로마황제 테오도시우스1세는 약해진 황제의 통치력으로는 더이상 로마제국을 혼자서 통치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제국을 동서로 나누어 자신의 아들들에게 통치를 맡겼습니다. 이중 서쪽의 로마제국을 가리켜 서로마 제국이라 하고, 동쪽의 로마제국은 동로마제국, 후의 비잔틴제국이 됩니다. 서로마 제국의 판도는 서쪽으로는 에스파냐와 아프리카 북부, 북쪽의 갈리아와 브리타니아, 게르마니아, 그리고 본국 로마를 포함한 영역이었으나, 이민족의 침입으로 인해 방위선은 무너져, 변경은 그들의 땅이 되어갔습니다. 476년,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는 이민족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해 황제의 위에서 퇴위, 서로마 제국은 멸망하였습니다. 이런 동서 로마제국의 분열과 서로마제국의 멸망 등은 후에 교회를 동서로 분열하는 서곡이 되었습니다.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는 나폴리 만의 루쿨라눔(Lucullanum)에 유배되었으며, 그의 최후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511년까지는 살아남았습니다. 로물루스를 떨어트린 뒤 오도아케르는 비잔틴제국의 섭정이 되어 서로마를 직접 통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오도아케르는 동고트족의 왕 테오도릭의 손에 살해되었습니다. 고트족은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기원한 게르만족의 일파입니다. 스칸디나비아에 남은 일파는기트족으로 불렸고, 남하한 고트족은 로마 제국의 일부를 점령하였습니다. 그리고 3세기 경에 동고트족과 서고트족으로 나뉘었습니다.)
The Tetrarchs, a porphyry sculpture sacked from a Byzantine palace in 1204, Treasury of St Mark's, Venice
제3세기의 위기 중의 황제들
막시미누스 트락스 (Gaius Iulius Verus Maximinus Thrax) (235년 - 238년)
고르디아누스 1세 (Marcus Antonius Gordianus Sempronianus Romanus Africanus)(238년)
고르디아누스 2세 (Marcus Antonius Gordianus) (238년)
푸피에누스 (Marcus Clodius Pupienus Maximus) (238년)
발비누스 (Decius Caelius Calvinus Balbinus) (238년)
고르디아누스 3세 (Marcus Antonius Gordianus Pius) (238년-244년)
필리푸스 아라부스 (Marcus Iulius Philippus) (244년-249년)
데키우스 (Gaius Messius Quintus Traianus Decius) (249년-251년)
공동황제 헤렌니우스 에트루스쿠스 (Quintus Herennius Etruscus Messius Decius) (251년)
트레보니우스 갈루스 (Gaius Vibius Trebonianus Gallus) (251년-253년)
공동황제 호스틸리아누스 (Gaius Valens Hostilianus Messius Quintus) (251년)
아이밀리아누스 (Marcus Aemilius Aemilianus) (253년)*
발레리아누스 (Publius Aurelius Licinius Valerianus) (253년-260년)
갈리에누스 (Publius Licinius Egnatius Gallienus) (260년-268년)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Marcus Aurelius Claudius Gothicus) (268년-270년)
퀸틸루스 (Marcus Aurelius Claudius Quintillus) (270년)
아우렐리아누스 (Lucius Domitius Aurelianus) (270년-275년)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타키투스 (Marcus Claudius Tacitus) (275년-276년)
플로리아누스 (Marcus Annius Florianus) (276년)
프로부스 (Marcus Aurelius Probus) (276년-282년)
카루스 (Marcus Aurelius Carus) (282년-283년)
카리누스 (Marcus Aurelius Carinus) (283년-284년)
공동황제 누메리아누스, (283년)
테트라키아
디오클레티아누스 (Valerius Diocletianus) (284년 - 305년)
공동황제 막시미아누스 (Marcus Aurelius Valerius Maximianus 286년 - 305년
공동황제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 (Flavius Valerius Constantius Chlorus) 293년-306년
공동황제갈레리우스 Galerius Maximianus 293년 - 311년))
콘스탄티누스 1세 (Flavius Valerius Constantinus) (306년 - 337년)
공동황제 갈레리우스, (Galerius Maximianus)
공동황제 리키니우스 (Flavius Galerius Valerius Licinianus Licinius 308년 - 324년)
공동황제 막시미누스 (Gaius Valerius Maximinus Daia 308년 -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조
콘스탄티우스 2세 (Flavius Iulius Constantius) (337년 - 361년) (공동황제 콘스탄티누스 2세 (Flavius Claudius Constantinus (337년 - 340년), 콘스탄스 (Flavius Iulius Constans) 337년 - 350년)
율리아누스 (Flavius Claudius Iulianus) (361년 - 363년)
요비아누스 (Flavius Claudius Iovianus) (363년 - 364년)
발렌티니아누스 황조
발렌티니아누스 1세 (Flavius Valentinianus) (364년 - 375년) (공동황제 발렌스 (Flavius Valens, 364년 - 378년)
그라티아누스 (Flavius Gratianus) (375년 - 383년) (공동황제 발렌티니아누스 2세 (Flavius Valentinianus), 375-392)
마그누스 막시무스(383년 - 388년) :제위 찬탈자, 테오도시우스 1세에게 서방황제로 인정받았으나 곧 페위됨
테오도시우스 황조
테오도시우스 1세 (Flavius Theodosius) (379년 - 39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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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마제국 Decline of the Western Roman Empire (395–476)
Barbarian invasions of the Roman Empire, showing the Battle of Adrianople.
395년∼476년까지의 로마제국 서반부를 가리키는 호칭. 395년 로마제국의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 사후 제국 동부는 장남 아르카디우스가, 서부는 차남 호노리우스가 물려받았다.
국법상으로 제국이 동서로 <분열>한 것은 아니나, 현실적으로는 동부와 서부로 나뉘어 각기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서로마제국은 게르만족의 침입을 받았는데, 401년 알라리크 휘하의 서고트족이 북이탈리아를 침입하였고, 406∼407년에는 반달·알라만·수에비족이 갈리아를 차지하고 에스파냐를 침입했다.
발렌티니아누스 3세 때인 429년 아프리카로 건너간 반달은 439년 카르타고를 점령하였다. 451년 아틸라 휘하의 훈족이 갈리아에 쳐들어왔으나 장군 아이티우스는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이를 물리쳤다. 그러나 455년 테오도시우스왕조가 단절되자 서로마의 제위(帝位)는 게르만 무장(武將)이 차지하거나 동로마황제가 보낸 황제가 뒤를 이었다.
476년 오도아케르가 어린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시키고 황제의 자리를 동로마황제에게 반환함으로써 서로마제국은 멸망하였다. 동로마제국이 1453년까지 존속한 데 반하여 서로마제국이 일찍 소멸하게 된 배경에는 우선 경제력의 문제를 꼽을 수 있다. 동로마는 인구와 경제력면에서 서로마를 능가하여 제국 세입의 약 2/3를 동로마에서 거두었다.
4세기에 서로마는 얼마간 번영을 회복하였으나, 그 부(富)는 명문귀족에 집중되었으며, 대토지소유귀족들은 고관직을 대부분 독점하고 중소농민을 예속화하여 그들의 영지에서 자립성을 강화하여 갔다. 이러한 상황에 서로마의 직할영토가 게르만족에 의하여 잠식당하자, 수입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군사력에서도 425년 무렵의 경우, 서로마군의 병력이 약 25만 명인 데 비하여 같은 시기의 동로마군 병력은 35만여 명에 이르러 수적으로도 열세였다. 더욱이 동로마는 국민군의 유지와 그 향상에 힘썼으나, 서로마군은 재정상태의 악화와 함께 군사력도 급속히 약화되어 게르만동맹부족에 대한 의존도는 높아갔다.
동서의 분화는 문화면에서도 나타나, 4세기에는 서로마 지식인 가운데 그리스어를 알지 못하는 자가 늘었고 그리스도교회 내에서도 서로마의 주교들은 황제의 권력과 교회와의 관계에 대하여 동로마보다 엄격한 태도를 견지하였다. 서로마제국이라는 정치적 통일체가 소멸된 뒤에는 가톨릭교회, 일부 로마귀족층과 예속농민, 게르만 여러 왕국이 잔존하여 이후 동로마와는 다른 서유럽 세계를 형성하였다.
서로마 황조계표
플라비우스 아우구스투스 호노리우스 (Flavius Augustus Honorius) (395년 - 423년) (공동황제 콘스탄티우스 3세 Flavius Constantius, 421년)
발렌티니아누스 3세 (Placidus Valentinianus) (425년 - 455년)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 (Petronius Maximus) (455년)
아비투스 (Eparchius Avitus) (456년 - 457년)
마요리아누스 (Iulius Valerius Maiorianus) (457년 - 461년)
리비우스 세베루스 (Libius Severus) (461년) - 465년)
안테미우스 (Anthemius) (467년 - 472년)
올리브리우스 (Anicius Olybrius) (472년)
글리케리우스 (Glycerius) (473년 - 474년)
율리우스 네포스 (Iulius Nepos) - (474년 - 475년/480년)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 (Romulus Augustus, 혹은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Romulus
Augustulus)), 서로마 제국 최후의 황제 (475년 - 47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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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stern Roman Empire (476–1453)
동로마제국-비잔티움Byzantine Empire (330 – 1453)
Palaiologos-Dynasty-Eagle
Eastern Roman Empire and Barbarian Kingdoms in 480
Europe in 476, from Muir's Historical Atlas (1911).
비잔티움 제국(그리스어: Βασιλεία των Ρωμαίων 바실리아 톤 로메온[*]) 또는 동로마 제국(라틴어: Imperium Romanum Orientale 임페리움 로마눔 오리엔탈레)은 콘스탄티노폴리스(현재의 이스탄불)에 수도(首都)를 둔 로마 제국의 동쪽 절반이었으나, 5세기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에도 천년 가까이 유지되었다. 비잔티움 시대는 보통 395년부터 1453년까지로 본다.
비잔티움 제국은 중세 유럽에서 가장 막강한 전제 군주제 국가였으며, 한때 활발한 정복 사업을 통해 옛 로마 제국의 고토를 거의 되찾아 광활한 지중해 세계를 통일하여 그 중심지 역할을 하였고 심지어는 중동 지역으로 진출하기도 하였다. 특히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아시아와 유럽, 흑해, 그리고 에게 해의 무역로에 자리잡고 있어 제국의 경제는 수 세기 동안 유럽에서 가장 부유했다.
더불어 비잔티움 제국은 사산조 페르시아와 아랍 및 오스만 제국의 침략으로부터 유럽과 기독교 문명 세계를 보호하는 방파제 역할까지 하였다.
비잔티움 제국(비잔틴 제국)이라는 말은 콘스탄티노폴리스(콘스탄티노플)의 원래 이름이었던‘비잔티움’(그리스어로는 비잔티온)에서 유래하였다. 동-서 로마의 궁극적인 분리 이후 서방인들이 동로마 제국을 로마 제국으로 인정하기 싫어하여 이 나라를 ‘비잔티움적인’ 제국이라고 칭하게 되었다. 이것을 영어식으로는 ‘the Byzantine Empire’라고 표기하고 있고, 대한민국에서는 이 영어식 표기를 그대로 따와 ‘비잔틴 제국’이라고 불렀으나 최근에는 원어를 살려 비잔티움 제국 또는 동로마 제국이라 부르고 있다.
정작 비잔티움 제국은 언제나 ‘비잔티움’이 아니라 ‘로마’를 자처했다. 비잔티움 제국 정부는 자국을 그냥 ‘로마 제국(그리스어: Βασιλεία των Ρωμαίων|Basileia tōn Rōmaiōn)’이라고 불렀으며 비잔티움 제국이라 불렀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제국의 황제는 자신을 로마의 통치자, 즉 옛 로마 황제의 후계자이자 상속자로 여겼다. 그 주민들은 인종적으로는 그리스인이 압도적으로 많았으나, 스스로 그리스인(그리스어: Ἕλληνες|헬레네스)이라고 하지 않고 로마인(라틴어: Ρωμαίοι|로마이오이)이라고 불렀다. 또한 자국을 ‘로마인의 영토’라는 뜻의 ‘로마니아(그리스어: Ρωμανία|Rōmania)’라고 불렀다.
그러나 실제로 비잔티움 제국은 헤라클리우스 황제 이후에는 거의 완전히 그리스화하였다. 황제의 명칭도 '바실레우스'(그리스어로 '대왕'의 뜻)로 바뀌었으며, 정부의 구성이나 복식, 군 편제 등도 모두 그리스식으로 변모하였다. 제국의 영토도 대부분 그리스 문화권에 한정되었으며 그에 따라 제국 인구와 문화의 대부분도 그리스인의 것이었다.
동로마연대표
330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수도를 천도하다.
431년 에페소스 공의회가 개최되다.
451년 칼케돈 공의회가 개최되다.
532년-537년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하기아 소피아 성당(Hagia Sophia, Αγία Σοφία/성스
런 지혜)을 짓다.
541년-543년 페스트가 유행하여 막대한 인구 손실을 입다.
552년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이탈리아, 북아프리카, 에스파냐 남부를 탈환하다.
730년-753년 우상숭배 금지를 이유로 성상파괴칙령이 내려져 성상파괴운동이 전개되다.
843년 성상논쟁이 종결되어 성상파괴칙령이 파기되고 성상공경이 재수립되다.
1014년 바실리우스 2세가 불가리아를 정복하다.
1054년 교회의 대분열이 일어나다.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셀주크 투르크군에게 패배하고 로마누스 4세 황제가 포로가 되다.
1204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제4차 십자군에 점령되다.
1261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미카일 8세 팔라이올로고스에 의해 수복되다.
1453년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침공, 전장에서 콘스탄티누스 11세가 전사하고 제국이 멸망
동로마 황조계표
콘스탄티누스 황조 (306-363)
콘스탄티누스 1세 (Gaius Flavius Valerius Aurelius Constantinus; 272 - 337, 재위: 306 - 337)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의 아들, 제국을 분할하여 후계자들에게 넘기다.
콘스탄티우스 2세 (Flavius Iulius Constantius; 317 - 361, 재위: 337 - 361) 콘스탄티누스 1세의 아들
율리아누스 (Flavius Claudius Iulianus; 331 - 363, 재위: 361 - 363) 콘스탄티누스 1세의 조카, 콘스탄티우스 1세의 손자뻘
특정 황조 없음(363-364)
요비아누스 (Iovianus; 332 - 364, 재위 : 363 - 364) 군인
발렌티니아누스 황조 (364-383)
발렌티니아누스 1세 (Flavius Valentinianus; 321 - 375, 재위: 364-375 서방 통치) 군인 출신; 동방 제국을 동생에게 넘김
발렌스 (Flavius Iulius Valens; 328 - 378, 재 : 364 - 378) 발렌티니아누스 1세의 동생
그라티아누스 (Flavius Gratianus; 359 - 383, 재위: 375 - 383 서방통치) 발렌티니아누스 1세의 아들; 동방 제국을 테오도시우스에게 넘김
테오도시우스 황조(379~457)
테오도시우스 1세 (Flavius Theodosius) (379년 - 395년)
아르카디우스(Flavius Arcadius, 395년 ~408년)
테오도시우스 2세(Flavius Theodosius, 408년 ~ 450년)
마르키아누스(Flavius Marcianus, 450년 - 457년)
레오 황조(457~518)
레오 1세 트라키아인 (Flavius Valerius Leo; 401-474, 재위: 457 - 474) 군인
레오 2세 (Flavius Leo; 467 - 474, 재위: 474) 레오 1세의 손자, 제논의 아들
제논 (Flavius Zeno; 425 - 491, 재위: 474 - 475) 레오 1세의 사위; 원래 이사우리아 출신
바실리스쿠스 (Flavius Basiliscus; ? - c. 477, 재위: 475 - 476) 제위 찬탈자 ; 레오 1세의 매형
제논 (Flavius Zeno; 재위: 476 - 491) – 복위됨
아나스타시우스 1세 (Flavius Anastasius;430 - 518, 재위: 491 - 518) 황실 시종장 출신; 레오 1세의 사위, 제논의 미망인인 아리아드네 황후에 의해 황제로 승격함
유스티니아누스 황조 (518-602)
유스티누스 1세 (Flavius Iustinius; 450 - 527, 재위 : 518 - 527) 황실 경비대장
유스티니아누스 1세 (Flavius Petrus Sabbatius Iustinianus; 482 - 565, 재위: 527 - 565) 유스티누스 1세의 조카이자 양자; 하기아 소피아를 건설하다; 로마법을 집대성함; 수많은 서방 영토를 회복하다; 동방정교회의 발전에 힘쓰다.
유스티누스 2세 (Flavius Iustinius Iunior; 520 - 578, 재위: 565 - 578) 유스티니아누스의 조카
티베리우스 2세 콘스탄티누스 (Flavius Tiberius Constantinus; 540 - 582, 재위: 574, 578 - 582) 콤메스 에스큐비트리스(Comes Excubitris); 유스티누스 2세의 양자
마우리키우스 (Flavius Mauricius Tiberius; 539 - 602, 재위: 582 - 602) 티베리우스 2세의 사위
특정 황조 없음(602-610)
포카스 (Flavius Phocas; ? - 610, 재위: 602 - 610) 발칸 군대의 지휘관으로 마우리키우스에 반기를 들어 제위를 찬탈함
헤라클리우스 황조 (610-711)
헤라클리우스 (Ηράκλειος) (575 - 641, 재위 : 610 - 641) 제위 찬탈; 아르메니아 혈통인 카르타고 총독의 아들.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했으나 이슬람의 팽창으로 팔레스타인과 이집트를 잃음; 그리스어를 공용어로 결정함.
콘스탄티누스 3세 (헤라클리우스 콘스탄티누스) (Κωνσταντίνος Γ') (612 - 641, 재위: 641) – 헤라클리우스의 아들; 헤라클로나스와 공동통치
헤라클로나스 (콘스탄티누스 헤라클리우스) (Ηρακλωνάς) (626 - 641?, 재위: 641) 헤라클리우스의 아들; 신체 절단 후 폐위됨
콘스탄스 2세 포고나투스 (Πωγωνάτος, 털복숭이) (Κώνστας Β') (630 - 668, 재위: 641 - 668) 콘스탄티누스 3세의 아들; 궁정에서 암살됨
콘스탄티누스 4세 (Κωνσταντίνος Δ') (649 - 685, 재위: 668 - 685) 콘스탄스 2세의 아들
유스티니아누스 2세 리노트메투스 (Ιουστινιανός Β' ο Ρινότμητος) (668 - 711, 재위: 685 - 695) 콘스탄티누스 4세의 아들; 코와 혀가 잘리고 폐위당해 추방됨
레온티우스 (Λεόντιος) (재위: 695 - 698) – 제위 찬탈; 스트라테고스; 코가 잘린 후 폐위, 투옥되었다가 나중에 처형됨
티베리우스 3세 (Τιβέριος Γ' ο Αψίμαρος) (재위: 698 - 705) 제위찬탈; 아프시마르(Apsimar)라는 이름의 게르만족; 폐위, 처형됨
유스티니아누스 2세 리노트메투스 (Ιουστινιανός Β' ο Ρινότμητος) (재위: 705 - 711) 복위되었다가 폐위, 처형됨
특정 황조 없음(711-717)
필리피쿠스 바르다네스 (Φιλιππικός Βαρδάνης) (재위: 711-713) 아르메니아 출신; 눈이 뽑힌 후, 폐위
아나스타시우스 2세 (Αναστάσιος Β') ( ? -721, 재위: 713-715) 필리피쿠스의 궁정비서 출신; 폐위되어 수도원이 들어감; 나중에 반란을 일으켰으나 처형당함
테오도시우스 3세 (Θεοδόσιος Γ') (재위: 715 - 717) 징세관; 제위에서 물러나 수도원에 들어감
이사우리아 황조 (717-802)
레오 3세 이사우리아인 (Λέων Γ' ο Ίσαυρος) (675-741,재위:717-741) 스트라테고스
Strategos
콘스탄티누스 5세 코프로니무스 (Κωνσταντίνος Ε' ο Κοπρώνυμος ή Καβαλίνος) (718 - 775, 재위 : 741) – 레오 3세의 아들;폐위됨
아르타바스두스 (Αρτάβασδος ο Εικονόφιλος) (재위:741-743) 레오 3세의 사위
콘스탄티누스 5세 코프로니무스 (Κωνσταντίνος Ε' ο Κοπρώνυμος ή Καβαλίνος) (재위 : 743 - 775) 복위됨
레오 4세 (Λέων Δ' o Χαζάρος) (750-780, 재위:775-780) 콘스탄티누스 5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6세 (Κωνσταντίνος ΣΤ') (77-797 or 805, 재위:780-797) 레오 4세의 아들; 어머니 이레네에게 눈이 뽑힘
이레네 아테네인 (Ειρήνη η Αθηναία) (755-803, 재위:797-802) 레오 4세 아내이자 콘스탄티누스 6세의 어머니; 폐위되어 레스보스 섬에 유배됨
니케포루스 황조 (802-813)
니케포루스 1세 (Νικηφόρος Α') ( ? -811, 재위: 802-811) 궁정 재무 대신;불가르족과의 전투에서 전사함, 해골은 불가르족 칸 크룸의 술잔으로 사용되다
스타우라키우스 (Σταυράκιος Φωκάς) ( ? - 812, 재위: 811) – 니케포루스 1세의 아들; 불가르족 크룸과의 전투에서 부상으로 결국 죽다.
미카일 1세 랑가베 (Μιχαήλ Α' Ραγκαβής) (재위: 811-813) – 니케포루스 1세의 사위, 궁정의 장관; 스스로 제위에서 내려와 수도원에 들어감
특정 황조 없음(813-820)
레오 5세 아르메니아인 (Λέων Ε' ο Αρμένιος) (775-820, 재위: 813-820) 스트라
테고스(Strategos)출신; 암살됨
아모리움 황조 (820-867
미카일 2세 (Μιχαήλ Β' ο Τραυλός ή Ψελλός) (770-829, 재위: 820-829) 스트라테고스 출신, 콘스탄티누스 6세의 사위
테오필루스 (Θεόφιλος) (813-842, 재위:829-842) 미카일 2세의 아들
테오도라 (Θεοδώρα) (재위 :842-855) 테오필루스의 황후; 여제이자 미카일 3세의 섭정; 폐위되어 수도원에 들어감
미카일 3세 (Μιχαήλ Γ' ο Μέθυσος) (840-867, 재위:842-867) 테오필루스의 아들; 암살당함
마케도니아 황조 (867-1056)
바실리우스 1세 마케도니아인 (Βασίλειος Α') (811-886, 재위:867-886) 미카일 3세의 궁정신하 출신; 사냥에서 사고로 죽다
레오 6세 현제 (Λέων ΣΤ' ο Σοφός) (866-912, 재위:886-912) 바실리우스 1세 또는 미카일 3세의 아들일 수도 있음
알렉산데르 (Αλέξανδρος Γ' του Βυζαντίου) (870-913, 재위: 912-913) 바실리우스 1세의 아들; 조카의 섭정
콘스탄티누스 7세 포르피로게니투스 (Κωνσταντίνος Ζ' ο Πορφυρογέννητος) (905-959, 재위:913-959) 레오 6세의 아들
로마누스 1세 레카페누스 (Ρωμανός Α' ο Λεκαπηνός) (870-948,재위:919-944) 콘스탄티누스 7세의 장인이자 사위와 공동황제; 아들에 의해 폐위되어 수도원에 들어감
로마누스 2세 포르피로게니투스 (Ρωμανός Β' ο Πορφυρογέννητος) (939-963,재위:959 -963) 콘스탄티누스 7세의 아들
니케포로스 2세 포카스 (Νικηφόρος Β' Φωκάς) (912-969, 재위:963-969) 스트라테고스 (Strategos),; 로마누스 2세의 황후와 결혼; 바실리우스 2세의 섭정; 암살당함
요한네스 1세 치미스케스 (Ιωάννης Α' Κουρκούας ο Τσιμισκής) (925-976, 재위:969- 976)로마누스 2세의 매제; 니케포루스 황후의 연인이었으나 결혼이 금지당함; 바실리우스의 섭정
바실리우스 2세 불가록토누스 (Βασίλειος Β' ο Βουλγαροκτόνος) (958-1025,재위:976 -1025) 불가르족의 학살자’; 로마누스 2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8세 (Κωνσταντίνος Η')(960-1028, 재위:1025-1028) 로마노스 2세의 아들; 형 바실리우스 2세와 공동황제
로마누스 3세 아르기루스 (Ρωμανός Γ' ο Αργυρός) (968-1034, 재위:1028-1034)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독; 조에의 첫 남편으로 콘스탄티누스 8세에 의해 발탁됨; 살해됨
미카일 4세 파플라고니아인 (Μιχαήλ Δ' ο Παφλαγών) (1010-1041,재위:1034-1041)조에의 두 번째 남편
미카일 5세 칼라파테스(Μιχαήλ Ε' ο Καλαφάτης) (1015-1042, 재위:1041-1042) 미카일 4세의 조카, 조에의 양자
조에 (Ζωή) (978-1050, 재위:1042) 콘스탄티누스 8세의 둘째딸, 1028년부터 황후의 지위, 동생 테오도라와 공동여제
테오도라 (Θεοδώρα) (980-1056, 재위:1042) 콘스탄티누스 8세의 셋째딸; 언니 조에와 공동여제
콘스탄티누스 9세 모노마쿠스 (Κωνσταντίνος Θ' ο Μονομάχος) (1000 - 1055, 재위: 1042 - 1055) – 조에의 세 번째 남편
테오도라 (Θεοδώρα) (재위: 1055 - 1056) – 복위됨
특정 황조 없음(1056-1059)
미카일 6세 (Μιχαήλ ΣΤ' ο Στρατιωτικός) (? - ?, 재위기간:1056-1057) 테오도라가 후계자로 낙점; 폐위됨
이사키우스 1세 콤네누스 (Ισαάκιος Α' ο Κομνηνός) (1007경 -1060, 재위:1057-1059)
장군출신, 반란으로 즉위; 병으로 제위를 사양하고 수도원에 들어감
두카스 황조 (1059-1081)
콘스탄티누스 10세 (Κωνσταντίνος Ι' ο Δούκας) (1006-1067, 재위:1059-1067) 미카일 프셀루스의 영향으로 황제로 선택됨
로마누스 4세 (Ρωμανός Δ' Διογένης) (1032-1072, 재위:1068-1071) 콘스탄티누스 10세의 미망인과 결혼; 공동황제, 폐위되어 맹인이 되어 죽음
미카일 7세 (Μιχαήλ Ζ' Δούκας Παραπινάκης) (1050-1090, 재위:1071-1078)콘스탄티누스 10세의 아들, 원래 두 형제와 로마누스와 공동 황제였음; 폐위되어 수도원에 들어감
니케포루스 3세 (Νικηφόρος Γ' Βοτανειάτης) (1001-1081, 재위:1078-1081) 스트라테고스(Strategos), 미카일 7세의 아내와 중혼; 폐위되어 강제로 수도원에 들어감
콤네누스 황조 (1081-1185)
알렉시우스 1세 콤네누스 (Αλέξιος Α' Κομνηνός) (1057-1118, 재위:1081-1118)이사아키우스 1세의 조카; 콘스탄티누스 10세의 손조카와 결혼
요한네스 2세 콤네누스 (Ιωάννης Β' Κομνηνός o Καλός) (1087-1143, 재위:1118-1143) 알렉시우스 1세의 아들; 사냥에서 사고로 죽음
마누엘 1세 콤네누스 (Μανουήλ Α' Κομνηνός ο Μέγας) (1118-1180, 재위: 1143-1180) 요한네스 2세의 아들
알렉시우스 2세 콤네누스 (Αλέξιος B' Κομνηνός) (1169-1183, 재위: 1180-1183) 마누엘 1세의 아들
안드로니쿠스 1세 콤네누스 (Ανδρόνικος Α' Κομνηνός) (1118-1185, 재위: 1183-1185) 요한네스 2세의 조카; 알렉시우스 2세의 미망인과 결혼; 폐위되고 고문당한 후 처형됨; 트레비존드 제국의 콤네누스 가계의 원조
앙겔루스 황조 (1185-1204)
이사키우스 2세 앙겔루스 (Ισαάκιος Β' Άγγελος) (1156-1204, 재위 : 1185-1195) 알렉시우스 1세의 증손자; 폐위되고 실명당함
알렉시우스 3세 앙겔루스 (Αλέξιος Γ' Άγγελος) (1153-1211, 재위 : 1195-1203) 이사키우스 2세의 형; 제4차 십자군으로 폐위되어 강제로 수도원에 감
이사키우스 2세 앙겔루스 (Ισαάκιος Β' Άγγελος) (두번째 재위: 1203-1204) 제4차 십자군으로 복위; 알렉시우스 5세에 의해 폐위
알렉시우스 4세 앙겔루스 (Αλέξιος Δ' Άγγελος) (1182-1204, 재위 : 1203-1204) 이사키우스 2세의 아들로 아버지와 공동황제; 알렉시우스 5세에 의해 폐위되어 살해당함
알렉시우스 5세 무르주플루스 (Αλέξιος Ε' Δούκας ο Μούρτζουφλος) (1140-1204, 재위 :1204) 제위 찬탈; 알렉시우스 3세의 사위
라스카리스 황조 (니케아 제국, 1204-1261)
콘스탄티누스 라스카리스 (1204년 통치) 공식적인 즉위는 없었음
테오도루스 1세 라스카리스 (Θεόδωρος Α' Λάσκαρης) (1174-1222, 재위: 1204-1222) 알렉시우스 3세의 사위
요한네스 3세 두카스 바타체 (Ιωάννης Γ' Δούκας Βατάτζης) (1192-1254, 재위: 1222-1254) 테오도루스 1세의 사위; 간질환자
테오도루스 2세 두카스 라스카리스 (Θεόδωρος Β' Δούκας Λάσκαρης) (1221-1258, 재위 : 1254-1258) 요한네스 3세의 아들
요한네스 4세 두카스 라스카리스 (Ιωάννης Δ' Δούκας Λάσκαρης) (1250-1305, 재위: 1258-1261) 테오도루스 2세의 아들, 미카일 8세에 의해 폐위되어 실명당하고 감옥에 갇힘
팔라이올로구스 황조 (콘스탄티노폴리스 회복, 1259-1453)
미카일 8세 팔라이올로고스 (Μιχαήλ Η' Παλαιολόγος) (1224 - 1282, 재위 : 1259- 1282) 스트라테고스(Strategos); 요한네스 4세의 섭정; 알렉시우스 3세의 증손자
안드로니쿠스 2세 팔라이올로고스 (Ανδρόνικος Β' ο Γέρος) (1258 - 1332, 재위 : 1282 -1328) 미카일 8세의 아들; 제위에서 물러남
미카일 9세 팔라이올로고스(재위 ? - ?)안드로니쿠스 2세의 아들.공동황제.
안드로니쿠스 3세 팔라이올로고스 (Ανδρόνικος Γ' Παλαιολόγος ο Νέος) (1297-1341, 재위 : 1328-1341) 안드로니쿠스 2세의 손자
요한네스 5세 팔라이올로고스 (Ιωάννης Ε' Παλαιολόγος) (1332-1391, 재위 :
1341-1347) 안드로니쿠스 3세의 아들, 요한네스 4세에게 폐위 당함
요한네스 6세 칸타쿠제누스 (Ιωάννης Στ' Καντακουζηνός) (1295-1383, 재위 : 1347-1354) 요한네스 5세의 장인; 폐위되어 수도원에 들어감
요한네스 5세 팔라이올로고스 (Ιωάννης Ε' Παλαιολόγος) 재위 : 1354-1376) 복위됨; 안드로니쿠스 4세에 의해 폐위
안드로니쿠스 4세 팔라이올로고스 (Ανδρόνικος Δ' Παλαιολόγος) (1348-1385, 재위: 1376-1379) 요한네스 5세의 아들; 반란 끝에 한쪽 눈을 실명당함; 나중에 반란에 성공했다가 다시 폐위; 세번째 반란을 일으킴
요한네스 7세 팔라이올로고스 (Ιωάννης Ζ' Παλαιολόγος) (1370-1408,
공동황제 1376-1379), deposed
요한네스 5세 팔라이올로고스 (Ιωάννης Ε' Παλαιολόγος) (Ιωάννης Ε' Παλαιολόγος) (재위 : 1379 -1390) 복위되었다가 다시 폐위
요한네스 7세 팔라이올로고스 (Ιωάννης Ζ' Παλαιολόγος) (재위 :1390)
요한네스 5세 팔라이올로고스 (Ιωάννης Ε' Παλαιολόγος) (ruled 1390 -1391) 복위됨
마누엘 2세 팔라이올로고스 (Μανουήλ Β' Παλαιολόγος) (1350-1425, 재위 :
1391-1425) 요한네스 5세의 아들
요한네스 7세 팔라이올로고스 (Ιωάννης Ζ' Παλαιολόγος) (섭정 1399 -1402)
요한네스 8세 팔라이올로고스 (Ιωάννης Η' Παλαιολόγος) (1392 - 1448, 재위 :
1425-1448) –마누엘 2세의 아들. 공동황제(재위 ? - 1425년)
콘스탄티누스 11세 팔라이올로고스 드라가세스 (Κωνσταντίνος ΙΑ' Παλαιολόγος Δραγάσης) (1405 - 1453, 재위 : 1449 - 1453) 마누엘 2세의 아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제위에 오르지 않았음;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 때 전사함.
오스만 제국
1453년, 메메드 2세는 비잔티움 제국을 무너뜨리고 스스로 로마인의 황제의 자리에 오름; 그의 후손들은 계속해서 이 지위를 요구하다.
팔라이올로고스 황조 (망명중)
토마스 팔라이올로고스 (Θωμάς Παλαιολόγος) (1409 or 10 -1465) 콘스탄티누스 11세의 동생; 로마에 망명 중 죽음
안드레아스 팔라이올로고스 (Ανδρέας Παλαιολόγος) (1453 -1502) 토마스의 아들; 교황 비오 2세에 의해 단독 왕국을 부여받음, 1494년 프랑스의 샤를 8세에게 황제의 지위를 팔았고 또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에게 유언으로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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