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SINA-신중국

페르시아제국 Persian Empire

한부울 2009. 1. 20. 17:34
 

페르시아제국 Persian Empire

 

                                      History of Greater Iran

 

페르시아 제국은 오늘날 이란의 영토에 근거한 여러개의 제국을 서양에서 일반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일반적으로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기원전 550년 - 기원전 330년)을 페르시아 제국이라고 부르지만 그후로 1935년까지 이지역에 일어났던 여러개의 제국들을 서양의 역사학자들은 모두 페르시아 제국이라 불렀다.


역사


메디아 제국 Median Empire (기원전 728년 - 기원전 550년)

 

                                        Median Empire, ca. 600 BC


철기 시대 초기에 이란 서부 지역에서는 문화적·역사적으로 현격한 변화가 보인다. 철기시대는 제1기(기원전 1300년 ~ 1000년), 제2기(기원전 1000년 ~ 750년), 제3기(기원전 750년 ~ 550년)로 나뉘며, 제3기는 메디아 왕국시대에 해당된다. 인도유럽어족의 이란인들이 이란 고원에서 중심 세력으로 자리잡은 시기는 철기 시대였다. BC 9세기 중엽이 되면 대표적인 두 이란족인 메디아인과 페르시아인이 설형문자기록에 나타난다.


메디아인들은 자그로스 산맥 동부 전체를 장악했고 점차 자그로스 산맥 서부로 진출했다. 페르시아인들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북부 우루미아 호 근처나 때로는 중서부 자그로스 지역에 정착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다가 후에 자그로스 산맥 남서부로 갔다가 마침내 파르스 지역까지 진출했다. 이것으로 보아 이 두 이란족이 동에서 서로 이동했음이 분명해진다.


메디아 제국 (기원전 600년경)회색 또는 흑회색 토기가 이란의 동북쪽에서 서부 이란으로 들어갔다는 사실도 이러한 이동을 입증해주고 있다. 이란족들이 최초로 자그로스 지역에 정착한 때를 BC 1300년경인 제1철기시대로 추정할 수 있다. 제1·2철기시대 문화의 분포는 대략 기록에 나타난 두 이란 민족의 분포와 일치한다. 제1·2철기시대 문화가 출현하지 않은 지역들은 우라르투·아시리아·엘람 등 비이란계 토착 세력들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제3철기시대 문화는 자그로스 전체에 분포되어 있고, 기원전 7세기말부터 기원전 6세기초에 메디아 왕조를 탄생시켰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기원전 8세기경 데이오세스가 메디아 왕국을 엑바타나에 세웠고 그후 아들 프라오르테스가 왕위를 계승했다. 일찍이 기원전 9세기초에 서부 이란으로 들어온 스키타이족이 7세기 무렵에는 아시리아에 상당한 위협세력이 될 정도로 성장하여 이 지역의 세력균형을 무너뜨렸다.


메디아 왕국은 한때 스키타이인들 때문에 정치의 공백기까지 생겼으나 키악사레스 왕(기원전 625~585) 때 이들의 세력을 무너뜨렸다. 그들은 바빌로니아과 제휴하고 아시리아를 재침공하여 기원전 609년에 멸망시켰다. 키악사레스가 죽을 무렵 그는 할리스 강(키질 강)에 이르는 아나톨리아 전지역, 지금의 테헤란에 이르는 서부 이란 전체와 파르스를 포함하는 남서부 이란 전체를 지배했다.


메디아는 연맹체 형태의 통치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메디아 왕조는 그후 페르시아의 키루스 2세에게 멸망당했고 이때부터 최초의 페르시아 제국인 아케메네스 왕조가 시작되었다.

Median Kings were:

Deioces (Old Iranian *Dahyu-ka) 727-675 B.C.

데이오케스 재위: 기원전 728년~675년

Phraortes (Old Iranian *Fravarti) 674-653

프라오르테스(크샤트리타) 재위: 기원전 675년~기원전 653년

Madius (Scythian Rule) 652-625

스키타이의 마디우스 재위: 기원전 653년 ~기원전 625년

Cyaxares (Old Iranian *Uvaxštra) 624-585

키악사레스(우와크샤트라) 재위: 기원전 625년 ~기원전 585년

Astyages (Old Iranian *Ršti-vêga) 589-549

아스티아게스 (이쉬투메구) 재위: 기원전 585년 ~기원전 550년


아케메네스 제국 Achaemenid Empire(기원전 550년 – 기원전 330년)

 

                              Achaemenid empire at its greatest extent.

 

                   Persepolis, ceremonial capital of Achaemenid Persian Empire.

 

            Iranian Median (left) and Persian (right) soldiers, Carvings of Persepolis.


키루스 대왕은 메디아를 정복하고 아케메네스 왕조를 창시한다. 그 당시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던 바빌로니아 제국를 물리침으로써 최고로 강한 나라에 이르게 된다. 키루스는 바빌로니아를 정복한 후에 키루스 원통이라는 인류 최초의 인권선언문을 발표했는데 이는 1879년에 발견되었다. 여기에 보면 모든 시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질 수 있으며 노예제를 금지하며 궁궐을 짓는 모든 일꾼은 급여를 지급한다고 되어 있다. 키루스의 아들 캄비세스 2세는 이집트를 병합한다. 제국의 영토는 다리우스 1세에 이르러 최고의 영토가 된다. 아케메네스의 영토는 인더스강에서부터 유럽에 이르렀다. 아케메네스 제국은 중국을 제외한 그 당시 알려진 대부분의 문명세계를 통일하였다.


다리우스 1세와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때 페르시아 제국과 그리스가 격돌하는데 이를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으로 부른다. 잘 알려진 아테네의 마라톤 전투와 스파르타 300명이 나라를 지켜냈던 테르모필라이 전투, 살라미스 해전은 아케메네스 제국과의 전쟁이야기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점령 시대(기원전 330년 – 기원전 250년)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드로스 대왕는 다리우스 3세를 무찌르고 아케메니아 제국의 영토를 그대로 이어 받는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쉽게 큰 땅을 복속할 수 있었던 것은 아케메니아를 그대로 이어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알렉산더 대제는 자신들을 페르시아의 계승자로 부르면서 다리우스 3세에게 장엄한 장례식을 해주었다. 또한 알렉산더는 다리우스의 딸 스타데이라와 결혼하였다.


파르티아 제국 Parthian Empire (250 BC–AD 226)

 

 

                                                             Parthia

 

                                    The Parthian Empire and its sub-kingdoms in 1 AD.

Metallic statue of a Parthian prince (thought to be Surena), AD 100, kept at The National Museum of Iran, Tehran.


파르티아(페르시아어: اشکانیان Ashkâniân)는 기원전 238년부터 226년까지 오늘날 이란 지역의 북동쪽에 위치해있던 나라이다.


전성기때에는 이란의 전 지역을 자신들의 세력으로 뒤덮었을 뿐 아니라, 아울러 오늘날의 아르메니아를 비롯한 이라크, 그루지야, 터키 동부, 시리아 동부, 투르크메니스탄, 아프가니스탄, 타지키스탄, 파키스탄, 쿠웨이트, 사우디아라비아의 페르시아 만 해안 지역, 바레인, 카타르, 아랍 에미리트 연방까지 세력권에 넣었다.


통치자

파르니 :스키타이, 다한, 사카족

아르사케스 1세(기원전 247년 ~ 기원전 211년) 아르사크 왕조의 창시자. 페르시아 제국 아케메네스 왕조의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의 후손이다.

티리다테스(기원전 246년 ~ 기원전 211년) 아르사케스의 형제로 공동 통치

아르사케스 2세(기원전 211년 ~ 기원전 191년) 티리다테스의 아들

프리아파티우스(기원전 191년 ~ 기원전 176년) 티리다테스의 손자

프라아테스 1세 (기원전 176년 ~ 기원전 171년) 미트리다테스 1세(기원전 171년 ~ 기원전 138년)

프라아테스 2세(기원전 138년 ~ 기원전 127년) 아르타바누스 1세(기원전 127년 ~ 기원전 124년) 미트리다테스 2세(기원전 123년 ~ 기원전 88년)

고타르제스 1세(기원전 95년 ~ 기원전 90년)

오로데스 1세 (기원전 90년 ~ 기원전 80년)

불명 (기원전 80년 ~ 기원전 77년)

사나트루케스 (기원전 77년 ~ 기원전 70년)

프라아테스 3세(기원전 70년 ~ 기원전 57년)

미트리다테스 3세(기원전 57년 ~ 기원전 54년)

오로데스 2세 (기원전 57년 ~ 기원전 38년)

파코러스 1세(기원전 39년 ~ 기원전 38년, 아버지인 오레데스 2세와 공동 통치)

프라아테스 4세(기원전 38년 ~ 기원전 2년)

티리다테스 2세(기원전 36년 ~ 기원전 26년)

프라아테스 5세(기원전 2년 ~ 기원후 4년)

태후 무사(기원전 2년 ~ 기원후 4년, 아들과 공동 통치)

오로데스 3세(기원후 6년)

보노네스 1세(8년 ~ 12년)

아르타바누스 2세(10년 ~ 38년)

티리다테스3세(35년 ~ 36년))

바르다네스 1세(40년 ~ 47년)

고타르제스 2세 (40년 ~ 51년)

사나바레스(50년 ~ 65년)

보노네스 2세(51년)

볼로가세스 1세(51년 ~ 78년)

바르다네스2세 (55년 ~ 58년)

볼로가세스 2세(77년 ~ 80년)

파코루스 2세 (78년 ~ 105년)

아르타바누스3세(80년 ~ 90년)

볼로가세스 3세(105년 ~ 147년)

오스로에스1세(109년 ~ 129년)

미트리다테스4세(129년 ~ 140년)

볼로가세스 4세(147년 ~ 191년)

오스로에스(190년, 경쟁자)

볼로가세스 5세(191년 ~ 208년)

볼로가세스 6세(208년 ~ 228년)

아르타바누스 4세(216년 ~ 224년)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 Sassanid Empire (226년–651년)


                                            The Sassanid Persian Empire

 

 

First Golden Era (309–379)

 

Asia in 400 CE, the Sassanid Empire, Roman Empire, the Kidarites, and Indo-Sassanid Kushanshahs

 

Second Golden Era (498–622)

 

The Sassanid Empire in 500 AD. Map also shows borders of Hephthalite Khanate and the Eastern Roman Empire.

 

                                                  Sassanid sea trade routes

 

                                           Persia and its neighbors in AD 600.

 

Rock-face relief at Naqsh-e Rustam of Iranian emperor Shapur I (on horseback) capturing Roman emperor Valerian (kneeing) and Philip the Arab (standing)


227년 서부 이란 지역에서 통치기반을 굳힌 파르티아의 지방영주 아르다시르 1세는 동부지역으로 진출하여 여러 부족들을 차례로 정복했다. 그는 자신을 '이란족의 왕 중 왕'이라 칭하고, 티그리스 강변의 고대도시 셀레우키아를 '아르다시르의 착한 행위'라는 이름으로 재건하여 크테시폰과 함께 그의 위세를 떨쳤다.


그의 아들 샤푸르 1세는 영역을 더욱 넓혔다. 여러번 로마군과 싸워 로마 황제 고르디아누스 3세(238년 ~ 244년)는 전사시켰고, 황제 발레리아누스(253년 ~ 260년)를 포로로 잡을 정도로 샤푸르는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그래서 그는 '이란족과 비(非)이란족의 왕 중 왕'이란 칭호를 사용했으며, 이 칭호는 사산 왕조 말기까지 지속되었다. 사산 왕조의 영역은 파르티아 때보다 훨씬 광대했는데, 이것은 그 행정력이 효율적이었고 군사력이 막강했음을 뜻한다. 중앙아시아 쪽의 동북부 국경지역에서 아르다시르 1세와 샤푸르 1세는 쿠샨 왕조의 서부지역을 정복했다. 이후 사산 왕조의 외교정책은 변방의 방어와 영토확장에 목적을 두고 추진되었다.


사산 왕조는 파르티아 왕조의 세습적인 자치왕국을 폐지하고, 대신 왕족 가운데서 총독을 임명 또는 해임했다. 따라서 왕위계승자는 보통 가장 큰 주의 총독직을 맡게 되었으며, 그 결과 중앙집권이 매우 강화되었다. 더구나 황제 개인에게보다 왕실에 대한 충성심이 강조되어서 왕실의 집단지도제와 유사하게 되었다. 사산 왕조시대 로마와의 분쟁이 가장 첨예했던 곳은 아르메니아 인페리오르였다. 바람 2세의 사후(293년) 왕위 계승 문제로 내분이 일어나 아르메니아는 296년에 로마의 수중에 떨어졌다. 아르메니아와 로마에서 크리스트교화가 진행되자 이것은 이란과 로마-비잔티움 사이의 종교적 분쟁으로 확대되었다.


샤푸르 2세의 아르메니아 실지회복(失地回復) 노력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으나 로마의 콘스탄티우스 2세 사후(361), 티그리스 강변과 아르메니아 대부분의 영토는 페르시아의 영토가 되었다. 약 20년간의 혼란기(아르다시르 2세, 샤푸르 3세, 바람 4세)가 지난 후 야즈데게르드 1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그리스도교에 관대한 정책을 폈는데 이것으로 인해 귀족들의 원성을 샀으며, 이때문에 그의 사후(420) 아들 바람 4세의 계승에 어려움이 있었다. 그는 동부에 에프탈의 침입 때문에 동로마 제국과 100년간의 평화조약을 맺고 그리스도교 신앙의 자유를 허용했다. 카바드 1세(488~531)는 정통 조로아스터교를 재정립했으며, 과세제도의 신설과 토지세의 개혁 등을 이룬 명망 있는 통치자가 되었다. 또한 군대를 강화하여 그의 세력은 흑해까지 다다랐다.


투르크족은 560년경 이란 동부지역에서 출현하여 중근동으로 진출하기 시작했으나 아직 사산 왕조의 영역에 심각한 위협은 되지 않았다. 호스로우 1세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은 호르미즈드 4세(재위: 579년 ~ 590년)는 비잔티움과 평화협상에 실패했지만, 그리스도교에 관대한 정책을 폈다. 이러한 정책은 그의 아들 호스로우 2세에까지 이어져 결국 조로아스터교도들의 반란을 야기시켰다. 호스로우 2세는 비잔티움으로 도피했으며,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마우리키우스(582년 ~ 602년)의 도움으로 591년 크테시폰에서 다시 왕위에 올라 그의 통치기간 안에 번영을 누렸다.


마우리스 황제가 암살되자(602년) 비잔티움과 다시 전쟁이 시작되었다. 호스로우 2세의 군대는 안티오크(611년)·다마스쿠스(613년)·예루살렘(614년)·이집트(619년) 등을 차례로 정복했다. 610년 왕위에 오른 비잔티움의 헤라클리우스는 보복공격을 시작하여 627년에는 티그리스 강 유역까지 진출했다. 이후 호스로우 2세는 자신의 아들 카바드 2세에게 살해되었고(628년), 카바드의 사후 그의 손자인 야즈데게르드 3세가 왕위에 올랐다(633년).


비잔티움 제국과의 장기간에 걸친 전쟁으로 인해 사산 왕조의 세력은 쇠퇴했고, 이슬람화된 신흥 아랍족의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다. 페르시아군은 유프라테스 강변에서 있었던 전투에서 크게 패하였고, 야즈데게르드 3세도 651년에 메르프 근처에서 암살되었다. 이로서 이슬람 이전의 이란 역사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제국의 몰락과 함께 조로아스터교도 점차 쇠퇴일로를 걸었으나, 그 당시 이슬람교도들은 조로아스터교에 관용을 베풀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조로아스터교는 이란에서 점차 사라졌으며, 현재 야즈드 및 봄베이 등지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사산제국은 로마제국과 팽팽한 힘의 균형을 이루면서 유지하여 서로 뺏고 뺏기는 영토 전쟁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훗날 비잔티움 제국에게 크게 패하고 새롭게 일어나는 이슬람 제국에 의하여 사산제국은 멸망의 길로 가게된다. 사산왕조의 마지막 왕이었던 야즈게르드가 이슬람 제국에게 패하여 제국은 무너지고 만다.


통치자

226–241: 아르다시르 1세의 치세:

224–226: 파르티아 제국의 전복.

229–232: 로마 제국과 전쟁

조로아스터교가 국교로 제정되다.

아베스타 젠드라고 알려진 경전이 발간되다.

241–271: 샤푸르 1세의 치세:

241–244: 로마와 제1차 전쟁

258–260: 로마와 제2차 전쟁. 에데사 전투에서 로마 황제 발레리아누스를 포로로 잡음.

215–271: 마니교창시.

271–301: 왕조의 내전 기간.

309–379: 샤푸르 2세 "대왕"의 치세:

337–350: 로마와의 1차전쟁 : 별 성과없음.

358–363: 로마와의 2차전쟁. 대승을 거두고 동방과 서방의 국경을 확장하다.

399–420: 야즈데게르드 1세의 치세:

409: 기독교도, 공개적 예배와 교회 건설 허락되다.

416–420: 야즈데게르드 초기의 명령을 뒤엎고 기독교 박해하다.

420–438: 바람 5세의 치세:

420–422: 로마와 전쟁.

424: 다드이수 종교회의, 동방정교회 콘스탄티노폴리스교회로부터 독립을 선언

438–457: 야즈데게르드 2세:

441: 비잔티움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

451: 아르메니아의 반란 진압되다

483: 기독교 관용 포고령 발표.

491: 아르메니아 교회, 칼케돈 신조를 부정하다:네스토리우스 기독교, 사산 제국의 주류 기독교가 되다

531–579: 불멸의 정신, 호스로우 1세 의 치세 :

532: 비잔티움 제국과 "영구 평화조약" 체결

540–562: 비잔티움 제국과 전쟁.

590–628: 호스로우 2세의 치세 :

603–628: 비잔티움 제국과 전쟁. 시리아, 아나톨리아, 이집트를 수복하다. 비잔티움 제국의헤라클리우스에게 패배할 때까지 사산 제국이 아케메네스 왕조의 영토 대부분을 회복하여 최대 영토를 보유하다.

610: 아랍, 사산 제국의 군대를 격파하다

626: 아바르족과 연합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했으나 실패

627: 헤라클리우스,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 침공, 니네베 전투에서 사산조 군대가 비잔티움 군에게 대패하다.

628–632: 황제의 난립으로 인한 혼란기

632–642: 야즈데게르 3세의 치세:.

636: 이슬람의 정복기간에 사산조 군대가 알카디시야 전투에서 아랍 무슬림군에게 대패하다.

642: 최종적으로 아랍군이 니네베에서 승리하다.

651: 마지막 황제 야즈데게르 3세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살해당하고 제국이 막을 내리다. 그의 아들과 다른 많은 유민들은 중국으로 망명하다.


이슬람 제국 (650–1037)

 

Conquest of Persia by Muslims

Samanid Persian Empire 819 – 999

 

         Persia in AD 900 AD, divided between the Samanids, Saffarids, and Abbasids.

 

Saffarid Persian Empire 861 – 1003

                                                    Saffarid Persian Empire.

 

Buwayhid Persian Empire 934–1055


이슬람 제국은 그때까지 있었던 가장 큰 나라를 만들게 되는데 지금의 스페인 땅인 이베리아 반도에서 인도의 인더스 강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차지하게 된다.


셀주크 제국(투르크) Turco-Persian rule (1037–1219) Great Seljuq Empire


셀주크 제국 (터키어: Selçuklular 셀주크룰라르, 페르시아어: سلجوقيان 살주키얀; 아랍어 سلجوق 살주크, 또는 السلاجقة 알-살라지카)또는 셀주크 투르크는 11세기경 부터 14세기까지 중앙 아시아와 중동 일대를 다스린 수니파 무슬림 왕조를 말한다. 셀주크 왕조라고 하기도 한다. 셀주크 투르크는 중앙아시아의 부족연합체로 발흥하여 중동에서 투르크 세력의 시조를 이루었고 제1차 십자군의 공격대상이 되었다.


오늘날 아제르바이잔, 터키, 투르크메니스탄의 투르크인들의 문화적 조상으로 여겨지며 페르시아 문화의 보호자였다.


초기역사


10세기경 셀주크라는 수장이 지휘하는 유목민의 일단이 볼가강을 넘어 흑해연안의 스텝지역으로 건너왔다. 셀주크 가문은 오구즈 투르크멘 부족이 그 기원으로 알려져있다. 이들은 곧 남하하여 이란 북부에서 이슬람 수니파로 개종하였다. 이후 페르시아의 언어와 문화를 받아들여 페르시아에 동화되었으며 처음에는 페르시아 왕조의 용병으로 있었으나 점차 세력을 확대하였다.


셀주크인들은 처음에 사만 왕조와 동맹을 맺고 카라한 왕조, 가즈나 왕조 맞서 싸웠으나 사만 왕조가 권력투쟁에서 패하자 스스로 독립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을 벌였다.


셀주크 제국의 발전


셀주크의 손자인 차그리 베그와 토그릴 베그는 가즈나 왕조의 마무드 지원을 받았으나 1037년 가즈니를 공격하여 자신들만의 왕국을 세웠다. 1055년 토그릴은 부와이 왕조에게서 승리하여 바그다드를 정복했기 때문에 셀주크는 수니파 칼리프 주도하에 이슬람의 통일을 회복시킨 존재로 여겨졌다. 1063년 차그리가 토그릴은 이란 서부와 메소포타미아를 포괄하는 제국의 수장이 되었다.


차그리 베이의 아들 알프 아르슬란 때에 이르러 셀주크의 세력을 더욱 강대해져 메소포타미아,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시리아 지역까지 세력권을 확대했으며 1064년 아르메니아와 그루지야를 복속하였고 1068년에는 비잔티움 제국의 아나톨리아를 침공하였다. 1071년 알프 아르슬란은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비잔티움 제국의 대군을 섬멸하고 비잔티움 황제 로마누스 4세 디오게네스를 포로로 붙잡았다. 이로써 셀주크인들은 소아시아로 진출하여 정착하게 되었다.


알프 아르슬란의 뒤를 이은 말리크 샤 1세에는 제국의 영토가 더욱 확장 되었다. 이슬람의 침입이전 이란의 영토이었던 지역의 대부분을 복속하였는데 동쪽으로는 중국과 서쪽으로는 비잔티움 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그는 제국의 수도를 라이에서 이스파한으로 옮기고 바그다드에 학교를 세우고 군대제도를 개선하였다. 그의 치세에 셀주크 제국은 전성기를 이루어 1087년 압바스 왕조의 칼리프로 부터 "동방과 서방의 술탄"의 칭호를 얻었다.


당시 와지르 니잠 알 물크는 제국내 행정조직을 개편하여 이슬람 문화에 크나큰 유산을 남겼다. 일종의 이슬람의 신학 대학인 마드라사 조직이 형성되어 행정관료들과 신학자들에게 통일된 교육훈련을 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니잠 알 물크는 당시 세력을 키워가던 아사신에 의해 살해당했다.


제국의 분할과 십자군


1092년 말리크 샤 1세가 죽자 제국은 그의 형제와 네명의 아들들의 권력 투쟁으로 분할되었다. 소아시아는 룸 술탄국을 창설한 킬리지 아르슬란 1세에게 계승되었고 시리아는 말리크 샤의 형제인 투투스 1세에게 게승되었다가 다시 그의 아들들에 의해 분할 되었다. 페르시아는 그의 네 아들들의 투쟁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한 셀주크의 분열을 틈타 1095년 군중 십자군과 1차 십자군이 침공해 왔다. 킬리지 아르슬란은 군중 십자군을 이겼으나 1차 십자군을 얕잡아보아 니케아에서 패배, 십자군은 니케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을 차례로 정복하고 예루살렘 왕국을 비록한 기독교 국가를 세웠다.


1118년 말리크의 셋째 아들인 아메드 산자가 제국의 계승자를 자처했으나 바그다드에서는 그의 형 마무드 2세가 스스로 술탄을 차처하였다. 1131년 아메드 산자는 형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했으나 여전히 불안정하였다. 아메드 산자는 각지에서 일어난 카라한과 반란에 대처하여야 했고 제2차 십자군의 침입에도 맞서야 했다.


1153년 오구즈 투르크가 반란을 일으켰고 산자는 축출되었다. 이후 그의 계승자들이 셀주크를 다시 통합하려고 하였으나 십자군 국가들과 비잔티움의 공세로 인해 번번히 실패했다. 3년후 산자가 죽자 제국의 분열을 더욱 가속되었고 아타베 그들은 독립했다.


제국의 몰락


1194년 이란의 마지막 셀주크가 전사하고 1200년경 셀주크 권력은 아나톨리아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끝났다. 이후 이집트의 칼리프 위대한 살라딘의 지도아래 시리아가 셀주크의 세력하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루지아도 아르메니아와 함께 셀주크의 영향력을 벗어났다. 바그다드의 압바스 칼리프도 점차 힘을 키워서 독립해 버렸고 결국 예전 셀주크 제국에서 남아있는 곳은 소아시아의 룸 술탄국과 주변뿐이었다.


13세기에 이르러 셀주크는 더욱 몰락하여 결국 몽골 제국이 아나톨리아를 침입했을때 완전히 세력을 상실하고, 몇몇 에미레이트로 분할되었다. 그중에 하나인 오스만투르크가 나중에 다시 대 제국을 세우게 된다. 북동쪽에 있던 셀주크 투르크족의 침공하여 이슬람 제국은 흔들리게 된다. 이 투르크 족은 셀주크 제국을 만들게 된다.


몽골 제국 점령 시대 Mongols and their successors(1219–1500)

 

Mosques with Persian names and designs in Afghanistan, Tajikistan, Uzbekistan and India illustrate just how far east Persian culture extended due to their conquests. The actual architectural domed design of Mosques were borrowed from the Sassanid era, which then spilled into the Muslim world.


샤파비제국 Safavid Persian Empire (1500–1722)

 

  Persian art and architecture reached an apex during the reign of the Safavid dynasty.

 

     Naghsh-i Jahan Square is one of the many monuments built during the Safavid era.


사파비 제국은 이란,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등을 포함하며 점차 성장해 가다가 오스만투르크에 막혀서 더이상 팽창하지 못한다. 사파비 제국은 시아파 이슬람교를 종교로 받아들임으로써 가장 큰 시아파의 나라가 되며 오늘날 이란의 시아파로 이어지고 있다.


Ismail I 1501–1524

Tahmasp I 1524–1576

Ismail II 1576–1578

Mohammed Khodabanda 1578–1587

Abbas I 1587–1629

Safi 1629–1642

Abbas II 1642–1666

Suleiman I 1666–1694

Sultan Hoseyn I 1694–1722

Tahmasp II 1722–1732

Abbas III 1732–1736


분열 기간

호타키 길자이 왕조 (Hotaki Ghilzai dynasty) (1722–1729)

아프사리드 왕조 (Afsharid dynasty (1736–1802)

잔드 왕조 (Zand dynasty: 1750–1794)

카자르 왕조 (Qajar dynasty:1781–1925)


Persia and Europe (1722–1914)

 

An 18th century Persian astrolabe. Throughout the Middle Ages, the natural philosophy and mathematics of ancient Greeks were furthered and preserved within the Muslim world. During this period, Persia became a centre for the manufacture of scientific instruments, retaining its reputation for quality well into the 19th century

 

World War I and the Interbellum (1914–1935)

 

   Eram Garden, built in the Qajar era is an example of Persian architecture of that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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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사드라마 대장금이 이란에서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
2. 이란여인들의 히잡이  조선의 여인들이 입던 옷과 형태가 똑같다.
3. 이란도 멧돌을 사용한다.
4. 이란의 선조국 페르시아는 우리나라 부여와 일치한다.
5. 페르시아의 다리우스왕은  부여의 대소왕이다.
6. 카스피해는 부여의 가섭원이다.
7. 동양의 의술이 이란과도 접목된다.
8. 실크로드는 조선과 로마를 잇는 선상에 조선의 국내무역로인데 이란지역을 통과한다.
9. 이란의 음식문화가 조선과 유사한 점이 있다.
10. 이란은 조선의 중앙 황제국,(= 중국,중조,중원)의 중앙아시아와 멀지 않다.

 

 
그림= 1910년대 조선 , 우드빌그림
히잡처럼생긴 검정옷을 조선여인네가 입었다.
그리고 경복궁을 지키고 있는 일본군대앞마당에 조선여인네 뒤에 이란남자처럼 생긴 자가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