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SINA-신중국

1차대전-중동을 움직이고 세운 여인 거트루드 벨(Gertrude Bell)

한부울 2009. 1. 14. 01:53
 

1차대전-중동을 움직이고 세운 여인 거트루드 벨(Gertrude Bell)


오스만제국이 영불에 의하여 무너지고 중동지역 중앙아시아지역 전역이 영불서구 세력화 될 때 그 중심에는 이 여인이 있었다고 보여 진다.

그리고 러일전쟁 시 일본에도 방문했었다고 한다.

대륙조선 혼돈의 역사에도 어쩌면 개입되었을 수도 있었던 인물은 아닐까?

곰곰이 생각하게 하는 철의 여인이다.

그녀의 행선지를 상세히 연구하면 역사퍼즐이 맞춰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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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트루드 벨 Gertrude Bell (14 July 1868 – 12 July 1926)


 

Photograph taken 1909

Gertrude Bell, aged 41, outside her tent, Babylon, Iraq


거트루드·마가레트·로지안·벨 CBE(Gertrude Margaret Lowthian Bell CBE, 1868년 7월 14일 - 1926년 7월 12일)는 이라크 건국의 주인공적 역할을 완수해,「이라크의 무위 여왕」이라고 하는 이명으로 알려져 있던 영국의 여성 정보원·고고학자·등산가.


그녀는 잉글랜드 북동부 다함의 유복한 가정에 태어나 불과 3세 때에 어머니를 잃었지만, 두뇌 명석이었던 그녀는 옥스포드 대학 레이디·마가레트·홀에서 현대사(당시의 메인 스트림적 교양에 속하는 라틴어나 희랍어를 전공할 수 있는 것은 남성에게 한정되어 있었다)를 배워, 약관 20세에 최우등의 성적을 거두고 졸업한다.


뷔크트리아 아침 시대의 영국에서는 여성의 대학 진학은 매우 드물고, 벨은 사교계에 데뷔는 했지만 고학력이 화가 되어 답답해해져 3년 지나도 구혼자 혼자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이윽고 사교계에 단념한 벨은 1892년, 페르시아 공사로서 테헤란에 부임하고 있던 백부를 의지해 도우지에 여행을 떠나, 공사관원의 한사람과 교제하게 되는 것도, 다음 해에는 교제 상대가 급서해 버린다. 애인의 급서로 빈 마음의 틈새를 채우기 위하여 그녀는 여행과 등산에 홀리게 된다.


1894년, 첫 엣세이집「페르시아의 정경」을 간행. 그 후 2번에 걸쳐서 세계일주 여행을 실시해, 여행 중의 1899년과 1903년에는 일본에도 들르고 있다. 후에 저서 「시리아 종단 기행」으로 벨은 시리아 방문 시 싸움 중이던 러일전쟁에 대하여 시리아의 각지에서 질문 공세를 받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첫 일본 방문의 동년, 아라비아어를 배우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장기 체재했고 안내인을 동반 시리아나 요르단을 말로 사막전체를 매료시켰다. 또 알프스 등산을 반복하여 1900년에는 당시 미답이었던 Engel 호른의 제5봉우리를 정복, 동봉우리는 「거트루드 봉」호칭이 현재까지 전하고 있다.


등산과 동시 병행으로 고고학을 배워, 1905년 시리아를 거쳐 유프라테스 강을 둘러싼 여행을 떠난다. 다음 해부터 고고학 잡지에 벨의 기행문이 게재되기 시작하게 하여 1907년에는 그녀의 연재가 「시리아 종단 기행」으로서 단행본화 되어 독서계뿐만이 아니라 중동지역의 정보원으로서 정치가나 관료도 앞 다투어 읽었다고 한다.


그 후도 그녀의 사막여행은 계속되어, 1911년에는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로 여행했다. 시리아의 여행때에 그녀의 안내인을 맡았던 것이「아라비아의 로렌스」T·E·로렌스로, 벨과 로렌스는 이 때 처음으로 만났다. 게다가 1914년에는 아라비아 반도 두메산골로 여행을 떠나지만 여정 반 정도일 해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 오스만 제국의 참전에 의하여 벨은 귀국을 피할 수 없게 되어 적십자에 근무 서부전선에 몸을 두게 된다.


그러나 제1차 대전이라고 하는 시대는 아라비아어에 통달해 현지의 사정에도 밝은 벨을 추방하는 일은 없었다. 그녀는, 카이로에 있는 영국의 첩보 기관의 정보원으로서 소집을 받는다. 그녀와 함께 소집을 받은 로렌스는 Aqaba항이나 Hejaz railway철도선등에의 게릴라 공작, 벨은 바스라에 상륙을 완수한 영국군과 함께 메소포타미아의 땅으로부터 오스만 제국을 일소하는 작전 원호에 종사한다. 현지에서 런던으로 보내진 그녀의 보고의 내용은 세밀한 분석을 다해 영국의 정책 비판까지 하고 있다.

 

                                                               Aqaba항

 

                                                            Hejaz railway철도선

영국군의 바그다드 점령 후, 점령군의 일원으로서 벨은 행정에 종사해, 아랍인의 진정을 많이 받은 후, 로렌스와 함께 Paris Peace Conference 회의에 참가, 아랍인에의 공약을 완수할 수 있도록 진력을 거듭하지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벌써 1917년 영불 간에 Sykes-Picot Agreement 협정이 체결되고 있어 열강간의 이해가 첨예한 가운데 중동의 땅은 영국과 프랑스의 위임통치령으로서 분할이 정해졌다.


벨의 이라크 통치 정책의 기본이념은 「이라크 통치에서는 시아파를 등용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 이념은 바그다드의 수니파가 있는 부족의 나시브(명가)의 장을 벨이 방문해 이라크의 통치에 대한 의향을 찾아 나시브의 의견을 따른 것이다. 그러나 이라크의 인구의 5할을 넘는 시아파의 배제는 그 후의 이라크에 큰 부담을 남기는 일이 된다.


바그다드 함락 후, 영국은 주임 세무관 파시·콕스(Percy Cox), 변무관 대리 윌슨(Arnold Talbot Wilson)을 파견했다. 이 2명이 메소포타미아의 땅을 관할하는 일이지만 부족이나 군벌간의 주도권 분쟁에 동원되어 어떤 유효한 대책을 강구하는 일은 할 수가 없었다. 벨은 변무관 담당 동방 서기라고 하는 지위에 있었다. 1920년 6월 najaf에서 수니파와 시아파가 손을 잡고 영국에 반대하는 폭동이 발발한다. 계기는 전년 영국이 페르시아와 동국에의 차관과 교환에 페르시아의 군사권을 영국이 잡는다고 하는 내용의 협정을 체결해, 이것에 najaf가 위기감을 더 느꼈던 것이다.


변무관 대리 윌슨은 가을까지 폭동을 진압했지만 영국은 민정 이관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페르시아 공사에 전임하고 있던 전세무관 콕스를 고등판무관으로서 바그다드에 귀환하게 한다. 그리고 11월, 수니파 주도의 아랍인 잠정 내각이 발족, 민정 이관의 준비에 들어갔다.


1921년 3월, 카이로에서 영국의 육군장관 Churchill의 주재에 의해 이라크의 향후의 통치에 대해 검토하는 회의가 있었다. 이 회의에서는 벨은 프랑스에 의해 Damascus 로 추방되고 있던 Faisal I세를 이라크의 국왕에 앉혀 고등판무관 이하 영국인으로 구성되는 국가 평의회를 폐지하고 아랍인의 손으로 임시 정부를 수립시키고 민정에 이관한다는 안을 꺼냈다. 제1차 대전 중, Faisal I세의 아버지로 MECCA의 Hashemites (예언자 Muhammad의 후예라고 칭하고 있었다)의 Sayyid Hussein bin Ali은 팔레스타인에 대해 영불군과 함께 싸워, 대전후에 논공행상으로 시리아·팔레스타인·Hijaz의 왕이 되는 것에 영불이 보증하고 있었다.


이른바「후세인·맥마흔 협정」McMahon-Hussein Correspondence 이지만, 전후의 아랍에 영불의 세력권을 확정한「사이크스·피코 협정」Sykes-Picot Agreement의 내용과 분명하게 모순되고 있어 이 영불의 일구이언 외교는 현재까지 여파가 있다. 사이크스·피코 협정의 내용을 모르는 채, 파이살(Faisal I세)은 용약, 시리아국왕에 즉위 했지만 프랑스는 인정하지 않았고 추방의 쓰라림을 당했다. Churchill도 벨의 안에 찬동, 본국에 벨의 안을 전보 했다.


통치 형태에 대해서는 결정되었지만, 이라크의 영토 확정의제가 옮긴 바로 그때 분규 했다. 쿠르드인(수니파)의 북부, 아랍인(수니파)의 중부, 아랍인(시아파)의 남부, 거기에 페르시아인, 유태인, 크리스트교도등의 지역이 복잡하게 뒤얽히고 있는 지역의 국경을 어떻게 확정할까 고민하게 되었다.


벨은 상기의 3개의 지역을 한나라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지론을 굽히지 않았다. 이 회의에 동석 하고 있던 로렌스는「쿠르드인 지역만 터키에의 완충지대로서 영국이 직접 통치를 계속해야 하는 것」이라고 하는 의견을 냈다. 그러나 벨은 이것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그렇게 이라크의 영토는 확정되었다. 벨은 로렌스보다 20세나 연장으로, 자신의 아랍 정세 관여의 경험은 로렌스등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자부하고 있었던 것 같다. 벨은 로렌스의 구시대적 기질을 답답해하는 측면도 연구자의 사이에서는 지적되고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로렌스의 안은 옳았다. 그리고 하심가의 차남으로 파이살의 형(오빠)에 해당하는 아브두라(Abdullah I세)는 요르단 국왕이 되어 현재의 요르단 왕실을 잇게 된다.


팔레스타인에 대해서는 영국의 익살꾼 배우의 혀「밸푸어선언」Balfour Declaration이라는 매운 맛으로 결론은 재고되어 이 문제는 영국의 두통거리가 된다. 이상과 같은 이라크 건국의 경위로부터 이라크는 열강의 이해와 벨의 지정학적 견해가 연계된 결과 건국된 국가이라고 한다.


이 해의 6월, 파이살(Faisal I세)은 이라크에 들어가, 그 불과 2개월 후에 이라크 국왕으로서 즉위 했다. 2년 후에는 이라크 남부와 아라비아 반도의 국경선 확정에 일단을 붙인 변무관 콕스가 바그다드를 떠난다. 이라크의 완전한 독립은 9년 후 1932년에 이루어진다.


벨은 민정 이관 후에도 바그다드에 남아 다시 고고학에 열중하는 날들을 보내는 중, 작은 박물관을 마련하고 출토품의 수장을 시도한다. 이 박물관이 후에 이라크 국립 박물관으로 발전하게 된다. 1926년의 여름 바그다드로 치사량의 수면제를 복용해 사망. 자살인가 사고인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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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전우츠네오역「시리아 종단 기행」전 2권 동양문고 

전우츠네오역「페르시아의 정경」법정 대졸판국 ISBN 4588238019


관련작품

아베 시게오저「이라크 건국」중앙공론 신사(중공신서) ISBN 4121017447

쟈넷트·워락크저우치다 스구루향역「사막의 여왕-이라크 건국의 어머니 가트르드·벨의 생애」소니 매거진스 ISBN 4789727793

전우츠네오저「황야에 서는 귀부인 가트르드·벨의 생애와 실적」법정 대졸판국 ISBN 4588238078

http://www.gerty.ncl.ac.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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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비아의 로렌스 (Lawrence of Arabia)

제 1차 세계대전 중인 1918년 영국은 아랍의 참전 및 지원을 요구하기 위해 정보국 소속의 로렌스를 아랍에 파견한다. 로렌스는 자국이 원하는 것 이상으로 아랍 지도자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싸워 분열된 아랍군을 통합하고 드디어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를 점령하여 아랍 민족으로부터 "아라비아의 로렌스"라는 영웅적인 칭호를 받게 된다. 그런데 아랍 민족의 독립을 논의할 시점이 서서히 다가오자 열강국들은 아랍의 분할통치(사이크스-피코 협정)음모를 기도한다. 이에 로렌스는 영국에 항의하고 아랍 민족에게도 단결을 호소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영국의 소환 명령을 받고 런던으로 돌아가지만 중동으로 다시 보내줄 것을 간절히 원한다. 그러나 중동 문제는 이미 정치적으로 타결된 이후이므로 로렌스가 설 자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 후 로렌스는 오토바이를 광적으로 몰다 교통사고로 죽는다. 


"나는 동방에서 손쉽고 빠르게 승리를 거두려면 아랍인의 도움이 필수적이고, 전쟁에 지는 쪽보다는 이기고 나서 우리의 약속을 깨는 쪽이 낫다는 내 확신에서 사기의 위험을 무릅썼다. 아랍인들의 영감이야말로 동방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는 우리의 주요 수단이었다. 그래서 나는 영국이 문서상으로나 진정한 마음으로나 약속을 지킬 것이라고 그들을 확신시켰다. 이것을 위안 삼아 그들은 자기 몫을 다했다. 그러나 당연히 나는 우리가 함께 해낸 일을 자랑스러워하기는커녕 끊임없이 심각한 수치심에 시달렸다." - 로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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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푸어 선언(Balfour Declaration)은 영국의 전 수상인 아서 제임스 밸푸어가 서명한 되어 있는 두 개의 영국 정부의 정책 천명이다. 흔히 말하는 밸푸어 선언은 1917년에 이루어진 첫 번째 선언이다.


1917년 선언


1917년 11월 2일 당시 외무장관이었던 밸푸어가 이끄는 영국 외무성, 당시 유대인을 대표하는 롯실드 경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공식적으로 보낸다.


영어 원문은 다음과 같다.


Foreign Office,

November 2nd, 1917.


Dear Lord Rothschild,


I have much pleasure in conveying to you, on behalf of His Majesty's Government, the following declaration of sympathy with Jewish Zionist aspirations which has been submitted to, and approved by, the Cabinet.


"His Majesty's Government view with favour the establishment in Palestine of a national home for the Jewish people, and will use their best endeavours to facilitate the achievement of this object, it being clearly understood that nothing shall be done which may prejudice the civil and religious rights of existing non-Jewish communities in Palestine, or the rights and political status enjoyed by Jews in any other country".


I should be grateful if you would bring this declaration to the knowledge of the Zionist Federation.


Yours sincerely,

Arthur James Balfour

밸푸어의 서명이 되어 있다.


[번역]

나는, 영국 정부에 대신해, 이하의 유태인의 유태 민족주의자 운동에 공감하는 선언이 내각에 제안되고 그리고 승인된 것을, 기쁨을 가지고 귀하에게 전합니다.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민족적 고향을 세우고, 그 일을 성취하는 데 대하여, 팔레스타인에 거하는 비 유대인의 시민적 그리고 종교적인 권한에 대해, 또는 타국에 거하는 유대인의 정치적인 상태에 대해 아무런 편견을 갖지 않을 것입니다.


영국 정부는, 유태인이 팔레스타인의 땅에 민족적 고향을 수립하고 호의를 가지고 보는 것은 물론이고 그 목적 달성을 위하여 최대한으로 노력한다. 다만 이것은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는 비 유태인의 시민권, 종교적 권리 및 다른 제국에 사는 유태인이 향유하고 있는 제 권리와 정치적 지위를 해치는 것이 아닌 명백하게 이해되는 것으로 한다.」

...정치적인 상태에 대해 아무런 편견을 갖지 않을 것입니다.[위키번역]


이는 사실상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서 민족적 고향을 건설하겠다는 것을 지지한다는 내용의 서신이다. 하지만 이미 밸푸어 선언 이전인 1915년 10월에 A.H.맥마흔이 맥마흔 선언을 통해 전후 아랍인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지지하기로 약속하였다. 이런 영국의 모순된 행동으로 결국 전 후 유대인세력과 아랍세력의 분쟁을 초래하게 되었다는 비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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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마흔 협정 McMahon-Hussein Correspondence

제1차세계대전중인 1915년 10월 24일 이집트주재 영국 고등판무관(高等辦務官) A.H. 맥마흔이 메카의 샤리프인 후세인과의 5회에 걸친 왕복서한 중에서 시리아의 서부를 제외한 아랍인 거주의 오스만제국령에 전쟁 종료 후 독립 국가를 건설하는 데 지지할 것을 약속한 선언. 이 선언은 영국·프랑스·러시아간에 터키령의 분할을 결정한 사이크스-피코협정(1916)과 팔레스타인에 유대인국가의 건설을 약속한 밸푸어선언(1917)과는 모순되는 것이며, 대영제국시대의 편의주의적·제국주의적 외교의 전형으로서 제1차세계대전 후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복잡한 중동문제의 소지를 만든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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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크스-피코 협정 Sykes-Picot Agreement

 

사이크스·피코 협정( 영 Sykes-Picot Agreement)과는 제1차 세계 대전 중의 1916년 5월 16일에 영국, 프랑스, 러시아의 사이에 연결된 오스맨 제국(터키) 령의 분할을 약속한 비밀 협정. 영국의 중동 전문가 마크·사이크스 (Mark Sykes)와 프랑스의 외교관 프랑소와·죨쥬=피코 (Francois Georges-Picot)에 의해 원안이 작성되어 이 이름이 지어졌다.


연합국측은 대전 후의 오스맨 제국에 있어서의 세력 분할에 대해 비밀리에 협의하고 있었다. 1915년 11월 무렵부터 교섭이 시작해, 영국의 마크·사이크스와 프랑스의 죨쥬=피코에 의해 안의 작성이 진행되었다. 그 후, 러시아 제국도 더해져 페트로그라드로 비밀 협정이 연결되었다. 후사인의 봉기 직전의 1916년 5월 16일의 일로이다. 내용은 이하대로.


시리아, 아나트리아 남부, 이라크의 모술 지구를 프랑스의 세력범위로 한다. 

시리아 남부와 남 메소포타미아(현재의 이라크의 대부분)를 영국의 세력범위로 한다. 

흑해 동남 연안, 보스포러스 해협, 다다네르스 해협 양안 지역을 러시아 제국의 세력범위로 한다. 


이 협정은, 영국이 중동의 아랍 국가 독립을 약속한 후사인·마크마혼 협정이나 영국이 팔레스타인에 있어서의 유태인 거주지를 명기한 바르포아 선언 (1917년 11월)과 영국이 상 모순되는 석장혀 외교를 했다고 해서 비판되었다. 그러나 사이크스·피코 협정은 바르포아 선언과는 모순은 없고, 후사인·마크마혼 협정과도 대부분 모순이 없다. 문제가 된 것은 내용의 모순보다, 악질적인 비밀 외교가 원인이었다.


1917년에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면(자), 동년 11월에 혁명정부에 의해 구러시아 제국의 사이크스·피코 협정의 비밀 외교가 밝혀져 아랍의 반발을 강하게 하게 되었다.


후사인의 아이 파이살 인솔하는 아랍군은, 1918년 9월에 시리아의 Damascus 입성을 완수했지만, 이 땅을 자국의 세력범위라고 생각하는 프랑스의 반대를 받아 1920년 7월에 Damascus로부터 추방되었다. 후사인·마크마혼 서간에서의 아랍인 국가의 범위는, 홈스, 하마, 알렛포, Damascus를 묶는 선의 동쪽(내륙측)이라는 것이 되고 있었지만, 1920년 4월에 열린 산·레모 회의에서는 이 지역의 영국·프랑스의 세력 분할(=신국가의 설립에 해당되어 어느 쪽의 나라가 지도적 역할을 완수하는가 하는 것)이 거의 확정하고 있었다.


파이살은 그 후, 영국에서 이라크왕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또, 반불 운동의 지도자인 파이살의 형(오빠) 아브두라 왕자는 영국으로부터 트랜스 요르단의 수장으로 자리잡을 수 있어 이것은 현재의 요르단 왕국이 되고 있다. 꽉 차는 곳(중), 시리아 부근을 제외해, 후사인·마크마혼 서간의 약속은 대체로 지켜질 수 있었다.


후사인이 수립한 히쟈즈 왕국은, 그 후 후사인이 칼리프를 칭한 것으로, 이슬람교 지도자층의 반발도 불러, 나쥬드의 이븐=사워드에 의해 1925년에 히쟈즈 왕국은 쓰러졌다. 이븐=사워드는 후에 사우디아라비아를 창시 해, 초대 국왕이 되었다.


제1차 대전에서 패전국이 된 오스맨 제국은 해체해, 터키 혁명을 거쳐, 현재의 터키 공화국으로 재생했다. 영국과 프랑스의 중동 분할은, 1920년 4월의 산·레모 회의에서 거의 확정하고 있었지만, 1923년에 터키 공화국이 로잔느 조약에 조인한 것으로 정식으로 분할되었다.


사이크스·피코 협정이나 이후의 분할 교섭에 의한 선긋기는, 후의 이 지역의 국경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프랑스의 세력범위가 된 시리아 지방으로부터는 후에 레바논, 시리아가 독립해, 영국의 세력범위로부터는 후에 이라크, 쿠웨이트등이 독립했다. 지역에 따라서는 인공적으로 끌린 부자연스러운 국경선이 되고 있다.


그 후, 일련의 모순 외교에 의해 생긴 팔레스타인 문제나, 현재도 부자연스러운 국경에서 분단되고 있는 쿠르드인 문제 등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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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마흔 협정과 밸푸어 선언 

[시사웹진]2005년 07월 28일

 

                                    ▲ 초록색 부분이 팔레스타인인의 영토이다.

 

개신교의 성서에 나오는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 ‘가나안’은 현재 팔레스타인 서쪽 전역을 이르던 명칭이었다. 하지만 지금 팔레스타인은 세계의 화약고라 불리며 자살폭탄 테러와 게릴라전이 빈번히 일어나는 곳이다. 유대교를 믿는 유대인들과 이슬람교를 믿는 아랍인들의 영토 분쟁이 그 원인이다.

팔레스타인은 동쪽으로는 요르단 강, 남서쪽은 시나이반도, 북쪽은 레바논, 북동쪽은 시리아에 접하는 지중해의 동해안 일대를 가리키는 지역명이다. 현재 이 지역의 80%는 이스라엘 영토다.


한 입으로 두 말하기(일구이언조약)


서기 135년경 팔레스타인에 거주하고 있던 유대인들은 로마에 의해 추방된 후 전 세계를 떠돌게 된다. 그 후 팔레스타인은 아랍인들에 의해 통치되어 왔었다. 유대인들은 몇 천 년 전 한 동안 뿌리를 내렸던 곳이라며 자신들의 영토라고 주장한다. 아랍인들에게 팔레스타인 지역은 최근까지도 살아 온 삶의 터전이다. 무엇보다 팔레스타인 지역 내의 예루살렘은 양쪽 모두에게 중요한 성지이기 때문에 팔레스타인은 유대인과 아랍인 그 누구도 양보할 수 없는 땅이 되었다.


영국은 제 1차 세계대전(1914~1918)의 승리와 오스만제국*(1299∼1922)의 약화를 위해 팔레스타인 지역을 이용했다. 그 당시 오스만제국은 인도 지역으로 가는 전략적, 상업적으로 중요한 통로였다. 영국은 오스만 제국을 약화시킴으로써 인도로 가는 안전한 통로를 얻고자 했다. 제 1차 세계대전을 치르느라 이곳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영국은 오스만 제국과 전쟁할 상대로 아랍인들을 택한다. 1915년부터 약 2년에 걸쳐 맥마흔 주 카이로 영국 고등판무관을 통해 아랍인들에게 참전의 대가로 아랍지역의 독립과 팔레스타인 지역의 아랍국가 건설을 약속했다. 그러나 영국은 아랍인과 했던 팔레스타인 땅에 대한 약속을 유대인들과도 했다.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유대인들을 이용하여 미국의 대독일 전쟁 참여를 유도하고 유대인 재벌들의 재정지원을 얻어내려 했던 것이다. 1917년, 영국 밸푸어 외상은 유대인들의 민족향토를 팔레스타인 지역에 건설하는 것을 지지하겠다고 말했다. 이것이 각각 맥마흔 협정과 밸푸어 선언이다.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후 팔레스타인 지역을 자신들의 위임통치 하에 편입시켰다. 그리고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정착을 허용했다. 유대인들의 이주가 증가됨에 따라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유대인 토지 소유가 늘어났으며, 이것은 아랍인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결국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팔레스타인 문제를 넘겨받은 UN은 팔레스타인 지역을 아랍인 구역과 유대인 구역으로 분할했다. 아랍 측은 끝까지 거부했지만 유대인들은 이를 기꺼이 받아들여 1948년 이스라엘 국가를 수립했다.


빛이 바랜 노벨평화상


1948년 이후 30여 년 간 이스라엘과 주변의 아랍 국가들은 네 차례의 중동전쟁을 치렀다. 서로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전쟁은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가 국제적 공인을 받는 계기가 되었으나 모두 이스라엘의 우세로 끝나고 말았다.


팔레스타인의 평화를 위해서 노력한 사람도 있었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의장이자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초대수반인 야세르 아라파트이다. 처음에는 각종 테러와 전쟁을 이끌며 악명을 떨쳤지만 1988년 제네바에서 열린 UN 임시총회에서 이스라엘의 생존권 인정과 테러 포기를 선언했다. 이 후 1993년 팔레스타인 자치원칙선언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평화협정을 이스라엘의 총리 Y.라빈, 외무장관 S.페레스와 함께 체결했다. 이 공로로 아라파트와 라빈, 페레스는 1994년 노벨 평화상을 공동 수상했다.


이들의 평화협정은 45년 만에 하는 화해의 악수였다. 하지만 화해의 분위기 속에서도 서로를 향한 증오는 사라지지 않았다. 평화협정이 체결된 후에도 크고 작은 테러와 게릴라전이 계속 일어났다. 이에 따라 2005년 2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인은 전격적으로 휴전협정을 맺었다. 그러나 지난 6월 29일, 이스라엘 공군이 가자지구 북부 팔레스타인 무기고를 공습했다. 또 지난 7월 13일에는 해안도시 네탄야에서 아랍인에 의한 자살폭탄 테러가 일어났다. 오랜 기간 이어진 서로를 향한 증오심은 점점 더 과격한 사건들을 일으키고 있다. 어렵게 맺은 휴전협정이 쉽게 깨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신(新) 게토 - 고립장벽

 

                                      ▲ 팔레스타인에 세워지고 있는 고립장벽.

 

현재 이스라엘은 2002년부터 전기가 흐르는 철조망과 콘크리트를 이용하여 장벽을 쌓고 있다. 이 장벽이 팔레스타인 서안지구를 둘러싸게 되면 인류 최대의 감옥이 만들어진다. 현재 팔레스타인 땅의 80%정도를 소유하고 있는 이스라엘은 장벽이 완성될 경우 90%에 육박하는 땅을 소유하게 된다. 팔레스타인인들은 병원과 학교, 시장 등 생활에 꼭 필요한 시설을 이용하기 위해 매번 고립장벽의 검문을 오가야 한다. 시간이 지나면 이스라엘은 이마저도 봉쇄할 것이란다.


팔레스타인의 평화를 위해 일했던 아라파트는 작년 11월 사망했다. 이스라엘 강경파인 샤론 총리는 해안 도시 네탄야 테러 이후 요르단강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를 봉쇄 하는 등 전례 없는 강경책을 펼치고 있다. 현재 영국과 미국등 주요 강대국들은 이스라엘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이에 팔레스타인인을 비롯한 아랍인들의 테러는 중동을 넘어 전 세계로 퍼지고 있다.


영국의 욕심으로 시작된 팔레스타인의 진혼곡은 언제쯤 멈출 것인가.


*오스만 제국 - 이스탄불, 헝가리, 흑해 연안, 북아프리카, 아라비아반도의 페르시아만 북부 지역에 이어 시리아, 이집트와 팔레스타인까지 통합해 거대한 이슬람제국을 건설한 나라.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 팔레스타인인을 대표하는 정치조직. 70년대까지는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서방국가들에 대해 무차별 테러를 자행하였다. 73년 10월 제4차 중동전쟁 이후 아라파트는 PLO가 국제테러에 개입하지 않는 대신 국제사회가 PLO를 인정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74년 10월 아랍정상회담에서 PLO는 400만 팔레스타인인의 유일한 합법기구로 인정받고, 12월 국제연합(UN)도 PLO를 UN의 정식 옵서버로 인정받았다.


*게토 - 유대교도들을 강제 격리시켰던 일정한 거주지역으로 그 주위는 벽으로 둘러쳐지고 해가 지면 문이 닫혀졌다. [신보경 수습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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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 대전 연표


1914년

06월 28일 :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왕위 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부부, 사라예보에서 암살됨.

07월 28일 : 오스트리아-헝가리, 세르비아에 선전 포고.

07월 30일 : 러시아, 총동원령 발표. 독일, 러시아에 총동원령 취소를 요청하였으나 거부당함.

08월 01일 : 독일, 대(對) 러시아 선전 포고.

08월 02일 : 룩셈부르크가 독일 제국에 점령됨. 독일 제국은 벨기에에 영토 통과를 요구하나 거부당함. 그 대신 오스만 제국 사이에 비밀 동맹 조약 조인.

08월 03일 : 독일, 프랑스에 선전 포고. 독일, 슐리펜 계획에 따라 벨기에로 진격.

08월 04일 : 독일, 중립 국가인 벨기에에 선전 포고 후, 점령(루벵 시 학살 사건). 영국이 이에 대한 대응으로 독일에 선전 포고. 미국, 중립 선언. 아프리카의 라이베리아, 독일에 선전 포고.

08월 05일 :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에 선전 포고. 독일, 벨기에의 리에주 요새를 공격. 몬테네그로,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선전 포고.

08월 06일 : 세르비아, 독일에 선전 포고.

08월 08일 : 몬테네그로, 독일에 선전 포고.


1915년

03월 18일 : 영국과 프랑스, 다르다넬스 해협 포격.

04월 22일 : 이페르(벨기에) 전투(~5월 25일)에서 독일군이 근대 이후 최초로 독가스 사용.

04월 24일 : 오스만 제국이 미국을 연합군의 협력자로 인식하고 미국인에 대한 강제 추방과 사형을 집행함.

04월 25일 : 갈리폴리 전투 시작. 영국-프랑스의 패배.

04월 26일 : 런던 밀약, 연합국 측이 이탈리아에 참전의 대가로 남 티롤 등의 제공을 약속.

05월 03일 : 이탈리아, 삼국 동맹 조약 파기.

05월 07일 : 영국 상선 루시타니아호, 독일 잠수함에 첫 번째로 격침, 128명의 미국인 승객 사망.

05월 23일 : 이탈리아,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선전 포고.

06월 03일 : 산마리노,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선전 포고.

08월 17일 : 영국 상선 아라빅호, 독일 잠수함에 두 번째로 격침되어 2명의 미국인 승객 사망.

08월 28일 : 이탈리아, 오스만 제국에 선전 포고.

09월 18일 : 독일 정부, 미국 정부의 항의로 잠수함 작전의 자제 결정(아라빅 서약).

10월 11일 : 불가리아, 동맹국 측에 가담.

10월 19일 : 러시아 제국, 불가리아에 선전 포고.

10월 14일 : 불가리아, 세르비아에 선전 포고.

10월 15일 : 영국과 몬테네그로, 불가리아에 선전 포고.

10월 19일 : 이탈리아, 불가리아에 선전 포고. 일본, 런던 선언 가입.

10월 24일 : 영국의 이집트 주재 고등 판무관 맥마흔, 아랍 왕국의 독립을 약속한 맥마흔 서한을 메카의 칼리프 후세인 빈 알리에게 전달(후세인-맥마흔 협정).


1916년

01월 05일 : 영국, 의무 징병법 제정.

03월 09일 : 독일, 포르투갈에 선전 포고. 포르투갈, 전쟁 반대 선언.

03월 15일 : 오스트리아-헝가리, 포르투갈에 선전 포고. 포르투갈, 전쟁 불참 선언(후에 포르투갈은 영국의 요청으로 연합국에 가담).

03월 24일 : 프랑스 선박 사섹스호, 영불 해협에서 세 번째로 독일 잠수함에 격침되어 미국인 승객 부상당하여 미국·독일 관계 악화.

05월 04일  : 독일, 잠수함 작전 자제 재약속으로 미국과의 관계 수복 기도.

05월 16일  : 사이크스-피코 협정 최종 체결.

05월 31일  : 유틀란트 해전 발발(~6월 1일). 영국 해군 14척 11만 톤, 독일 해군 11척 6만 톤을 유실하였으나 영국은 계속 제해권을 가짐.

06월 24일 : 솜 전투 시작(~11월 18일). 독일군은 30만 명이 전사했으며 영국-프랑스 연합군은 60만 명이 전사하였다.

07월 03일 : 제4차 러·일 협약 성립.

08월 27일 : 루마니아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선전 포고.

08월 28일 : 이탈리아, 독일에 선전 포고.

08월 30일 : 오스만 제국, 루마니아 왕국에 선전 포고(단독으로 루마니아와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09월 01일 : 불가리아 왕국, 루마니아 왕국에 선전 포고.

09월 15일 : 빌헬름 2세, 루마니아 왕국에 대한 선전 포고를 총리에게 요구.

09월 18일 : 영국군, 솜 전투에서 역사상 최초로 전차 투입.

10월 16일 : 프랑스, 불가리아에 선전 포고.

11월 21일 :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황제인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질병으로 죽음. 카롤리 1세 즉위.

12월 12일 : 독일 총리 T.T.F.A. 베트만 홀베크, 동맹국 측에 강화 제안 발표.


1917년

01월 16일 : 독일, 멕시코에 멕시코가 동맹국을 도와줄 경우, 후에 “미국에게 뺏긴 영토의 재탈환을 도와주겠다.”라는 내용의 치머만 전보 전달.

01월 22일 :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 승리 없는 평화 제안.

02월 03일 : 미국, 독일과의 국교 단절.

02월 26일 : 미국 상선 라코니아호, 네 번째로 독일 잠수함에 침몰됨.

03월 14일 : 시암과 중국, 독일과의 국교 단절.

04월 06일 : 미국, 독일에 선전 포고.

04월 07일 : 쿠바와 파나마, 독일에 선전 포고.

04월 11일 : 브라질, 독일과의 국교 단절.

04월 13일 : 볼리비아, 독일과의 국교 단절.

04월 16일 : 블라디미르 레닌, 망명지 취리히로부터 귀국.

04월 17일 : 레닌, 4월 태제 발표.

04월 23일 : 오스만 제국, 미국과의 국교 단절.

04월 26일 : 영국 총리 D. 로이드 조지, 영국 해군에게 상선 호송 실시 명령.

06월 27일 : 그리스, 모든 동맹국에 선전 포고.

07월 19일 : 독일 국회, 평화 결의안 가결함.

07월 22일 : 시암,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선전 포고.

08월 14일 : 중화민국,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선전 포고.

09월 21일 : 코스타리카, 독일과의 국교 단절.

10월 06일 : 페루, 독일과의 국교 단절.

10월 07일 :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 독일과의 국교 단절.

10월 26일 : 브라질, 독일에 선전 포고.

11월 07일 : 러시아의 러시아 혁명(10월 혁명, 11월 혁명) 발발.

11월 08일 : 러시아의 레닌, 평화에 관한 포고 발표.

11월 16일 : G. 클레망소, 프랑스 총리에 취임. 친독파에 대한 탄압 시작.

11월 26일 : 소비에트 정권, 모든 러시아군에게 정전 명령.

12월 06일 : 미국,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선전 포고.

12월 08일 : 에콰도르, 독일과의 국교 단절.

12월 10일 : 파나마,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선전 포고.

12월 22일 : 러시아와 동맹국 측,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 강화 교섭 시작.


1918년

01월 08일 : 미국의 우드로 윌슨, 평화 14개조 발표.

01월 28일 : 핀란드, 러시아로부터의 독립 요구.

02월 10일 :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의 강화 교섭 중단, 소비에트 대표 L. 트로츠키가 전쟁 종결 선언 후 철수.

02월 18일 : 독일, 러시아에 공격 재개.

02월 23일 : 소비에트 정부, 독일의 새로운 강화 조건 수락 결정.

03월 03일 : 소비에트 정부, 독일 측과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 강화 조약을 맺음(그러나 이 조약은 러시아의 보수파나 멘셰비키들에게 “러시아가 독일에게 항복하였다.”라는 비난을 받았다. 이때부터 1920년까지 러시아에 내전이 시작되었다.).

03월 21일 : 독일군, 미햐르작에 의해 영국군에 대공세 시작. 제2차 솜 전투 시작(~4월 5일).

04월 23일 : 과테말라, 독일에 선전 포고.

05월 07일 : 루마니아 왕국, 연합국 중 유일하게 동맹국에 항복(굴욕적인 부쿠레슈티 강화 조약까지 맺음).

05월 08일 : 니카라과,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선전 포고.

05월 23일 : 코스타리카, 독일에 선전 포고.

07월 12일 : 아이티, 독일에 선전 포고.

07월 19일 : 온두라스, 독일에 선전 포고.

09월 30일 : 불가리아 왕국, 연합국에 항복.

10월 30일 : 오스만 제국, 연합국에 항복.

11월 03일 : 오스트리아-헝가리, 연합국에 항복. 독일 제국, 혁명이 일어남.

11월 09일 : 독일 제국 카이저 빌헬름 2세가 퇴위함과 동시에 네덜란드로 망명함.

11월 11일 : 독일 제국 항복. 휴전 협정과 동시에 전쟁 종료.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