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白頭山)정계비(定界碑)가 있어야 할 곳은 ?
[우리역사의 비밀]문상욱 (2008-11-04 11:38:54)
오늘은 요동지방과 심양, 백두산정계비가 있어야 할 곳 등에 대해 조선 유학자들의 문집 속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서 대륙사와 비교할 수 있는 대목은 비교해가며, 이야기를 전개하고자 합니다.
-----------------
1】圃 隱(포은. 정몽주) 文集중에서 “女眞地圖”-------<曾聞砮矢貢明堂.
肅愼遺民此一方.雪立白山南走遠.天連黑水北流長.完顏偉量呑遼宋.大定豐功逼漢唐.坐對地圖還嘆息.古來豪傑起窮荒>
여진(女眞)에 관한 “포은 정몽주”의 설명이다. 이 분에 대해서는 여러분들도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정몽주”는 <고려 충숙왕 6년에 태어나 공양왕 4년>에 돌아가신 분이다.
肅愼遺民此一方.雪立白山南走遠.天連黑水北流長.完顏偉量呑遼宋】➡ <숙신의 유민들이 이곳 한곳에 있다. 눈발이 서있는 백산에서 남쪽으로 먼 곳으로 향해 갔는데, 하늘이 연해 있는 흑수(黑水)이며, 이 흑수는 북쪽으로 길게 흐른다. 완 안(完顔)씨는 역량이 크게 좋아져 요(遼)와 송(宋)을 삼켰다.>
위의 설명을 보면 숙신의 땅은 결국 여진(女眞)의 땅이었는데, 당초 이들은 눈이 쌓여 서(立) 있는 듯한 “백산(白山 : 天山)”에서 먼 남쪽 땅으로 이주하여 살았는데 이들이 있던 곳의 북쪽에 흑수(黑水)가 있었으며 이 흑수는 여진(女眞)들이 살고 있는 곳의 북쪽으로 길게 흘러간다고 하였다. 만약 현 역사해설대로 “黑룡 강”이 “흑수(黑水)”라고 한다면 “여진(女眞)”들은 현 黑룡강성의 黑룡강 남쪽지방에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백산이 어떻게 백두산이 될 수 있으며, 백산이 백두산이라면 백산에서 남쪽 멀리로 이주했다고 했을 때 그 지역이 어디일까를 생각하면 바로 함경도 남쪽이나 강원도와 평안도 또는 경기도지방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해설은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는 황당한 얘기다. 이러한 말은 백산(白山)이 백두산(白頭山)이 아니며, 흑수(黑水)가 흑룡강(黑龍江)도 될 수 없다는 증거(證據)인 것이다. 이러한 설명을 바탕으로 아래의 기록을 보자.
--------------------
2】荷 谷(허봉(許 篈) 先 生詩 鈔중에서 “吉 城 秋 懷(길 성의 가을 생각)”
≪離家雙鬢日蕭蕭.紫塞寒霜蕙葉凋.丹鳳城遙愁夢斷.黑龍江闊旅魂銷.微軀自覺添衰疾.宿願空慙負聖朝.歸計未成時又晩.玉關憔悴老班超。/魚水深期未易逢.至今人說孔明龍.岐豐舊壤初恢拓.朔漠威聲獨折衡.千帳羌酋迎漢節.九城春草入堯封.英雄一去終遺恨.不見殊勳上景鍾。/千金暗結廟堂謀.
坐割重關入建州.古塞北連摧右臂.大江西下失中流.窮邊虜騎深秋健.廢柵人烟落日愁.楣殘民猶戀闕.年年哭上隴山頭。/雪嶺金河賊路危.久因王事得歸遲.霜鴻曙度雲間戍.錦葉晴翻隴上旗.斬虜壯心題柱後.望鄕愁眼倚樓時.胡山寂寂殘陽斂.靑海城頭皷角悲。/金門蹤跡轉依依.落盡黃楡尙未歸.塞角暗吹仙仗夢.嶺雲低濕侍臣衣.功名誤許麒麟畫.歲月空驚熠燿飛.憶得去年三署直.錦城銀燭夜鍾微。≫
하곡 “허 봉” 선생의 생년과 몰년은 <(1551년(명종 6)1588년(선조 21)> 이다. 위 글에서 위치를 찾을 수 있는 글은 <坐 割 重 關 入 建 州. 古 塞 北 連 摧 右 臂> 이라는 내용이다.
<坐 割 重 關 入 建 州. 古 塞 北 連 摧 右 臂> ; 가만히 앉아 빼앗고 중관(중요한 관문)인 “건주”에 들어왔다. 옛 새북(塞北)은 우비(오른쪽 팔. 서쪽의 흉노)와 연이어져 있어 통하는 곳이다.
우선 흉노(匈奴) 우비(西方 즉 서쪽의 흉노를 칭)지역은 역사서에 기록된 곳을 찾아보면 ; 돈 황(燉 煌)의 서쪽지방을 말하며 돈 황의 서쪽 흉노 즉 “서 흉노”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위에서 말하는 옛 “塞北”에 연이어져 있는 右 臂(우비)와 통하는 곳은 “돈 황”의 북쪽지방이다. 이는 高麗 말기의 조정의 대신이며, 유학자였던 포은 정몽주가 말하기를 ;【肅愼遺民此一方.雪立白山南走遠.天連黑水北流長.完顏偉量呑遼宋】라 하였는데 여진족들은 백산에서 남쪽으로 이주하여 흑수의 남쪽에서 거주하게 되었다는 것이며, 이는 수백 년 후대에 여진족인 후금(後金)의 누루하치가 건주(建 州)를 차지하고 들어왔는데 이곳은 우비(右 臂)와 통하는 곳이란 설명이다.
❶ 이곳의 남쪽지방에는 물론 “朝鮮(조선)”이 있었다. “조선”의 북쪽지방 건주(建 州)에 들어온 “누루하치”는 이곳을 기반으로 발흥하기 시작한다. 이곳은 甘숙성 돈 황(燉 煌)의 북쪽지방으로 현재의 외몽고 서쪽의 신강성과 접경지역이다. 이러한 곳에 “건주”가 있었으며, “심양”이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朝鮮(조선)”에서 北京(燕 京 연경)을 가려고 “삭막이니 대막이니 하는 사막지대”를 통과하게 되는 것이다. 수많은 연행기록이나 朝天록은 바로 이곳을 통과하는 여행기(여정기)였던 것이다.
❷ 만약 “백산”이 현재 반도 북방의 “백두산”이라고 가정한다면 숙신의 백성들이 후에 이주한 곳이 백두산의 남쪽이라면 바로 반도의 함경도지방이 되며, 함경도지방이 읍루와 말갈, 여진족의 본거지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반도 백두산 남쪽지방에 흑수(黑水)가 있어야만 하고, 여진은 그 흑수(黑水)의 남쪽에 거주했다니 말이다. 압록강이나 두만강이 “흑수(黑水)”라 했다는 기록은 여지 것 존재하지 않는다. 또 여진족이 반도의 백두산 남쪽지방이 본거지라면 반도는 여진족의 활동무대였다는 말이 되며, 또 이곳의 서쪽이나 서북쪽지방이 흉노의 우비(右 臂)지방이 될 만한 조건을 전혀 충족시키지 못한다.
❸ 만약 백두산이 백산이 되어 여진족들이 백두산=백산의 남쪽으로 이주하여 본거지를 형성하였는데 이곳이 흉노의 우비(右 臂)지역과 통할 수 있는 것이라면 “반도를 포함한 지역과 반도와 열도사이의 동해(東海)는 바다가 아니라 육지(陸地)이어야 하며, 이곳이 중국(中國=중원)지방이 된다.” 이러한 추측은 추측이나 가정으로 끌날 수밖에 없다. 현실은 현실이니 말이다. 바다가 육지가 되고, 육지가 바다가 되려면 천지개벽(天地開闢)현상이 일어나지 않는 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건주와 심양과 후금의 누루하치와 조선의 땅”과 明(명)에서 원군을 요청하여 “강홍립”이하 장병들이 출정하여 명(明)군과 연합하여 후금(後金)의 군대와 치열한 전투를 벌인 곳이나 좌 영장“김응하”장군이 마지막까지 화살을 날리며 싸우다가 처참하게 전사한 곳 역시 “사막지대”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명사 열전 “삼위(三衛)”편을 보면(전에 소개했다) ; 삼위의 땅에 건주와 심양이 있게 되는데 이곳은 토 곡 혼(吐谷渾)의 땅이며, 계(薊 : 어 양)와 흑룡강(흑수)의 북쪽 땅에 “명 태조 주원장”이 설치했다고 하였다. 이곳은 “청 해성과 감 숙성 주천, 돈 황의 북쪽의 땅”이다.
❹ 이러한 조선(朝鮮)의 역사구도를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고 “반도 조선(동북삼성 포함)만”을 주장할 때 주위의 국가들인 일본과 현 중국, 서구열강들의 합작품으로 이루어진 “조선 해체”의 과정은 영원한 미스-테리로 남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
3】知 退 堂(지 퇴 당)集 중에서 “朝 天 錄의 廣 寧 紀 事” 를 보면-------
≪皇朝廣寧鎭. 漢代渡遼營.父去兒承父.兄亡弟繼兄.凄凉憐部曲.燀赫振家聲.老李重來蒞.猶傳矍鑠名.嘉靖間.李成樑鎭廣寧後.其子如松繼鎭死戰.又以其弟如梅代之.今又成樑重來故云云。≫
이정형(李 廷 馨) 1549년(명종 4) - 1607년(선조 40)
皇 朝 廣 寧 鎭. 漢 代 渡 遼 營 ; 황조의 광 녕(廣 寧)진은 옛 한나라의 도요(度 遼)영이다.】이러한 기록은 조선의 옛 영토를 찾는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대목이다.
위의 글 제목이 말해주듯 연경을 가는 여정기로 “광 녕”에 대한 저자의 설명이다. 위 기록대로 현 河북성에 있는 “광 녕(廣 寧)”이 정말 전한(前漢)때 또는 후한(後漢) 때 “도요장군(度 遼 將軍)”이 주둔했던 “도요 영(度 遼 營)”인가 하는 문제를 알아보자는 것이다. 이 문제가 왜 조선(朝鮮)의 강역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것인가는 바로 “遼 水(요수. 遼 河 요하)” 때문이다. “요수 또는 요하”의 동쪽지방 즉 “요동(遼 東)”이 “조선의 근간지지”였다는 역사서의 기록 때문이며, 이는 고려 말 어지러운 정치상황에서 “이성계”라는 신진 군벌세력(몽고 여진계)과 구 군벌세력이었던 “최영”과의 세력싸움에 신진세력이었으며, 몽고(원) 다루하치 출신군벌이었던 “이성계”의 승리로 인해 오백년 이어온 “왕”씨 고려가 망하게 되는 가장 큰 원인이었으며, 이때 “이성계”가 명분을 내세워 지상명령이었던 고려 군주(왕)의 명령을 어기면서까지 항명하고 군사를 되돌려 고려조정에 칼을 들이댄 사건에 등장하는 것이 “요동(遼 東)”이라는 지명이며, 고려가 망하고 “새로운 조선”이 탄생된 후에도 이 “요동”은 뜨거운 감자와 같은 존재였다. 한(漢)이라면 전한(前漢)과 후한(後漢) 모두를 합쳐 약 400 년간(왕망기간을 포함)이다. 이때 조선사에서는 삼한(三韓)으로부터 삼국이 건설되는 시기였다고 해설하고 있다.
위의 기록에서 보다시피 한(漢)시대의 도요 영(度 遼 營)이란 <군대가 요수(요하)를 도하(渡河 : 강을 건너))하여 서안 북방의 내몽고 황하 북안 “오원”지방에 영(營 : 주둔지. 진지)을 설치하고 이곳에 군대를 상시 주둔시킨 주준지의 진지를 말한다.> 이는 당시의 요수(요하)가 어디에 있던 하천이었는가를 알 수 있으며, 이곳 주위에 있던 여러 주요지명(역사서에 기록된 지명)의 원래(본시) 위치를 알 수 있기 때문에 조선사를 공부하거나 연구하는데 필수조건일 수 있다. 이는 본인이 대륙 조선사를 주장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의 하나로 처음으로 대륙 사를 증거로, 고증으로 이러한 주장을 하였다.
(이미 여러 번 설명을 하였고, 몇 해 전부터 주장하였던 것이나 근대조선의 유학자가 기록한 문집 속에서 발견하여 이것에 대한 설명을 하고자 한다)
---------------------------
❶ 前漢(전한)시대 ;
1) 전한서 ; 夏 四 月 , 少 府 徐 仁 、 廷 尉 王 平 、 左 馮 翊 賈 勝 胡 皆 坐 縱 反 者 , 仁 自 殺 , 平 、 勝 胡 皆 要 斬 。冬 ,遼 東 烏 桓 反 ,以 中 郎 將 范 明 友 為 度 遼 將 軍 ,〔一〕 將 北 邊 七 郡 (郡) 二 千 騎 擊 之 。
[ 一〕 應 劭 曰 : 當 度 遼 水 往 擊 之, 故 以 度 遼 為 官 號 . (요수를 건너 가 쳤으며(공격), “도요”는 옛 관호(벼슬의 이름)이다)
2) 夏 四 月 , 詔 曰 : 度 遼 將 軍 明 友 前 以 羌 騎 校 尉 將 羌 王 侯 君 長 以 下 擊 益 州 反 虜 , 後 復 率 擊 武 都 反 氐 , 今 破 烏 桓 , 斬 虜 獲 生 , 有 功 。〔一〕 其 封 明 友 為 平 陵 侯 。 平 樂 監 傅 介 子 持 節 使 ,〔二〕 誅 斬 樓 蘭 王 安 , 歸 首 縣 北 闕, 封 義 陽 侯 。
3) 夏 , 大 旱 。 六 月 , 發 三 輔 及 郡 國 惡 少 年 吏 有 告 劾 亡 者 , 屯 遼 東 。 [一] 如 淳 曰 : 告 者 , 為 人 所 告 也 。 劾 者 , 為 人 所 劾 也 。 師 古 曰 : 惡 少 年 謂 無 賴 子 弟 也 。 告 劾 亡 者 , 謂 被 告 劾 而 逃 亡 。
4) 資 治 通 鑑 / 漢 紀 十 五 / 孝 昭 皇 帝 上/元 鳳 三 年 ;
【光 更 問 中 郎 將 范 明 友 ,明 友 言 可 擊 ,於 是 拜 明 友 為 度 遼 將 軍, 度 遼 將 軍 ,蓋 使 之 度 遼 水 以 伐 烏 桓。至 後 漢 ,遂 以 為 將 軍 之 號 以 護 匈 奴。將 二 萬 騎 出 遼 東。匈 奴 聞 漢 兵 至 ,引 去。初 ,光 誡 明 友:「兵 不 空 出; 即 後 匈 奴 ,遂 擊 烏 桓。」師 古 曰: 後 匈 奴 者, 言 兵 遲 後, 邀 匈 奴 不 及。後 ,戶 遘 翻。烏 桓 時 新 中 匈 奴 兵 ,師 古 曰: 為 匈 奴 所 中 傷。中 ,竹 仲 翻。明 友 既 後 匈 奴, 因 乘 烏 桓 敝, 擊 之, 斬 首 六 千 餘 級, 獲 三 王 首。匈 奴 由 是 恐, 不 能 復 出 兵。】
度遼將軍(도요장군) : 東胡(동호) 또는 오환을 토벌 할 때는 遼 水(요수)를 건너가기 때문에 생긴 토벌군 장군의 職責 名(직책 명)이다.
❷ 後漢(후한)시대 ;
1) 효 안제 영초 3년 (109년) ; 남 선우가 美 稷(미 직 :陝서 북방)에서 중랑장 耿 种(경충)을 포위하고, 11월에 대사농인 何 熙(하 희)에게 거기장군의 업무를 대리하도록 하고(행거기 장군事), 중랑장 龐 雄(방 웅)을 부관으로 임명하여 오영(五營)과 변경에 있는 군의 군대 2 만여 명을 거느리도록 하고, 遼 東(요동)태수 耿 夔(경기)에게 조서를 내려 鮮卑(선비)족과 여러 군의 군대를 거느리고 함께 이들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梁 槿(양 근)에게는 度 遼 將 軍(도요장군)의 업무를 대리하도록 하였다. (행도요장군사이다).
2) 同 원초 3 년 (116년) ; 계유일(25일)에 度 遼 將 軍(도요장군) “鄧 遵(등준)”이 남 선우를 인솔 하 여 靈 州(령 주)에서 零 昌(영창 ;서강족의 2대 황제)을 공격하였는데, 참수한 것이 800 여급이었다.......度 遼 將 軍(도요장군).......將軍(장군) 呼稱(호칭)으로 北部 邊方 司令官(북부변방사령관)이다. “度 遼(도요)”는 “遼 水(요수)를 건넌다.”는 뜻이며, 前漢(전한) 昭 帝(소제)때 이 제도를 처음 실시했다. 范 朋友 (范 明 友 :범 명우))가 度 遼 將 軍(도요장군)에 임명되어 遼 東(요동)의 烏 桓(오환)을 攻擊(공격)했고, 後漢(후한) 역시 이 제도를 답습하여 五 原(오원 ;섬서 서북방 내몽고 황하 북안에 있음)에 주둔하고, 흉노를 방어하였다.
위에 예를 든 것은 “전한서와 자치통감 후한” 편 일부이다. 예로 들 예문은 많으나 주요한 부분만을 간단하게 발췌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도요 영(度 遼 營)”은 분명 존재하였고, “도요(度 遼)”란 “요수(遼 水)”를 건넌다, 라는 것이며 이곳은 대륙의 중원 서북방 내몽고 황하 북쪽에 있는 “오원(五 原)”북쪽에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으며, 군대가 주둔하고 있던 진지의 이름이 “도요 영(度 遼 營)”이라는 설명이다.
대륙사서 기록을 보면 결국 당시의 “요수나 요하”는 중원 서북방에 있었던 “황하(黃河)”를 요수=요하라 했다는 결론일 수밖에 없다. 내몽고 “오원(五原)”은 본시 구원(九原)이었으나 “오원”으로 이름이 바뀐 곳이다.
요수=요하(遼 水 = 遼 河)는 청 해성으로부터 흘러오는 “황하(황하)”라고 칭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위에서 설명하는 내용인 것이다. 이곳에 주둔하고 있던 주둔군인 병사들은 이곳의 서쪽과 서북방 또는 북쪽에서 내려오는 흉노들을 방어하였다.
따라서 위에서 설명하는 “광 녕 진”은 황하 건너 “오원”의 서쪽지방에 있었다는 말이 되며, 이곳의 동쪽지방과 남쪽지방에는 “조선(통칭)"이 있었다는 말과 같다. 이는 그동안 우리가 배워온 역사와는 전혀 다른 원전의 내용이기 때문에 과연 그럴까 의문을 나타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실제 대륙 사서의 원문(원전)에는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기록을 이해하면서 아래의 기록을 또 보십시다.
여기서 문제 되는 것은 “전한과 후한”의 정체인데 이들은 서역지방이나 그 남쪽지방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며, 전한과 후한은 고구려로 표현될 수 있는 나라들이다. 이는 앞으로 대륙조선사에서 연구해야 할 과제이다.
아래 기록을 보면서 과연 조선사에서 영토 즉 강역문제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아보자.
4】蒼 雪 齋(창 설 재)先生文集 ; <권두경(權斗經) A. D 1654 - 1726> /<送 金 士 達 赴 北 關 幕>
<憐君鐵關北.馹騎去飄飄.嶺外庭闈隔.天邊幕府遙.胡兒笳最怨.越女笑偏嬌.莫遣剛腸斷.容華暗裏凋。/ 才子咸營去.風流是席珍.出關占紫氣.入幕正靑春.沮漆先王地.河湟外國隣.安邊禦戎策.歸爲聖明陳>【時淸遣使至關北.以定地界爲名.巡視長白,土門之間.國人憂之】
위의 글 내용을 중에서 마지막 설명문을 보면 ;【時淸遣使至關北.以定地界爲名.巡視長白,土門之間.國人憂之 ; 당시에 청나라 파견사가 관북지방에 와 경계(청과 조선의 국경)를 정하고 장백산과 토문강 사이를 순시하니 나라(조선) 백성들이 근심하였다】는 설명이 있다. 이는 “백두산정계비”를 말하는 것으로
(다음 백과사전 인용)
백두산정계비 [白頭山定界碑] ;1712년(숙종 38) 백두산에 세운 조선과 청(淸)나라 사이의 경계비.
≪백두산이 청조(淸朝) 발상의 영산(靈山)이라 하여 그 귀속을 주장하던 청은, 1712년 오라총관(烏 喇 摠 管) 목 극 등(穆 克 登)을 보내어 국경문제를 해결하자는 연락을 해왔다. 조선에서는 참판(參判) 권상유(權尙游)를 접반사(接 伴 使)로 보내었으나, 청의 사절이 함경도로 입국함에 따라 다시 참판 박 권(朴 權)을 접반사로 맞이하게 하였다. 이때 조선 측의 접반사는 산정에 오르지도 못하고 목 극 등 자신이 조선 측의 접반사 군관(軍官) 이 의복(李 義 復), 감사군관(監 司 軍官) 조 태상(趙 台 相), 통관(通官) 김 응 헌(金 應 瀗) 등만을 거느리고 산정에 올라가 일방적으로 정계비를 세웠다.
그 지점은 백두산 정상이 아니라 남동 방 4km, 해발 2,200m 지점이었으며, 비면(碑面)에는 위에 대청(大 淸)이라 횡서하고 그 밑에 【'烏喇摠管,穆克登,奉旨査邊,至此審視,西爲鴨綠,東爲土門,故於分水嶺,勒石爲記,康熙.五十一年.五月十五日'】이라 각서(刻 書)하고 양쪽의 수행원 명단을 열기하였다. 그 뒤 1881년(고종 18) 청나라에서 길림장군(吉 林 將軍) 명안(銘 安), 흠차대신(欽差大臣) 오대징(吳 大 澂) 을 보내어 간도 개척에 착수하자, 1883년 조선 측은 어윤중(魚允中)·김 우식(金 禹 軾)을 보내어 정계비를 조사하게 하고, 그 뒤 9월에 안변부사(安邊府使) 이 중하(李 重 夏), 종사관 조 창식(趙 昌 植)을 보내어 조선의 영토임을 주장하였으나, 청은 토문(土門)이 두만강이라고 주장하여 아무런 해결을 보지 못하였다. 그 뒤 1909년 일제는 남만철도의 안 봉선(安 奉 線) 개축 문제로 청나라와 흥정하여, 남만주에 철도부설권을 얻는 대가로 간도지방을 넘겨주고 말았다. 이 비는 만주사변(滿洲事變) 때 일제가 철거하였다.≫
라고 하였음을 깊이 새기고 위의 시 내용을 보면 “조선”의 강역은 현재의 백두산이나 토문강은 강제로(인위적으로=어떤 목적을 가지고) 심어진 것이며, 본시의 백두산과 토문강은 전혀 다른 엉뚱한 지역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➊ 시 제목이 <送 金 士 達 赴 北 關 幕> 로 “김 사달이 관북의 막으로 달려가는 것을 전송하다”는 내용이다.
➋ ≪才子咸營去.風流是席珍.出關占紫氣.入幕正靑春.沮漆先王地.河湟外國隣.安邊禦戎策.歸爲聖明陳≫ ; 재능 있고 유능한 아들(김 사달을 칭)이 함영(함경도 북방의 진지)으로 가는데, -----【沮 漆 先 王 地. 河 湟 外 國 隣】라고 말하고 있다.
이 글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내용이다. 즉 <沮 漆 先 王 地. 河 湟 外 國 隣“沮 漆(저칠) 은 선왕의 땅이었으며, 하황(河 湟)은 외국과 이웃하고 있다>고 말하는 부분이다. 도대체 반도 조선 땅에서 【저 수(沮 水)나 칠 수(漆 水)가 어디에 있으며, 황하(黃 河)와 황수(湟 水)라는 하천이 반도 땅 어디에 있었느냐】 하는 점이다.
1) 저 칠(沮 漆)
저 수(沮 水)와 칠 수(漆 水)를 말하는 것으로 이 두 강물은 발원지 모두 틀리나 이 강물이 섬서 빈(豳)땅에서 합류(合流)한다. 이곳은 주(周)나라가 서쪽에서 동진, 안착하여 이곳에서 기틀을 잡은 곳이다. 문제는 이러한 주(周)나라가 일어난 지역에 대해 근대조선의 유학자가 기록한 곳에 이곳이 “선왕(先王)의 땅”이라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근대조선의 유학자가 기록한 이 “선왕(先王)”이란 표현은 근대조선 당시 숙종의 바로 윗대 왕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 전대의 왕을 말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2) 하 황(河 湟)
하수(河水 ;黃 河)와 황수(湟 水)를 말하는 것으로 하황(河 湟)지대는 전회(고려. 조선 토론방 NO. 1730)에 설명한 것처럼 황 수 현(湟 水 縣) 및 황주(湟 州)지역은 : 연 백 현(碾 伯 縣)지역이다. 대륙 사에서는 황수 주위를 <황 중(湟 中)>이라 하는데 청 해성 동경(東 境 ;동쪽지경)이며, 호 삼성 통감 주(胡 三 省 通 鑑 注)를 보면 ; 황하 서안(西岸)을 끼고 있는 땅이라 했으며, 또 “황 중성(湟 中 城)”이 있고, “서평(西 平)과 장액지간(張 掖 之 間)”을 칭한다고 했다. 소월 씨(小 月 氏)의 땅이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위해서 말하는 ;
❶ 저칠(沮 漆) 즉 “저수와 칠수지간”은 섬서 빈 현(주나라 도읍지)인데 이곳이 근대조선 의 땅이라는 설명이며,
❷ 하황(河 湟)지방은 청해 동쪽의 서평과 장액지간의 땅을 말하는데, 이곳의 조선(朝鮮)땅과 이웃 나라 땅이 경계하고 있었다는 설명이다. (이는 “河 湟 外” 즉 하황 밖의 나라와 이웃하고 있다, 라고 번역해도 상황은 똑같다) 이곳 지방에 조선과 또 다른 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전회에 설명한 내용과 비교를 한번 해보자.
4】의 <送 金 士 達 赴 北 關 幕>의 저자는 <권두경(權 斗 經) A. D 1654 - 1726>
5】 의 “심 양 성”의 저자는 서 종 태(徐 宗 泰) A. D 1652년 - 1719년이다.
5】♨ 晩 靜 堂 集 第 四 / 詩 ;서 종 태(徐 宗 泰) A. D 1652년(효종 3) - 1719년(숙종 45) 자 노망(魯 望), 군 망(君 望), 호 만정 당(晚 靜 堂), 서곡(瑞 谷), 송 애(松 厓) 본관 달성(대구)(達 城(大邱))
[瀋 陽 城】曾 識 遼 東 是 我 疆, 高 句 北 界 近(接)龍 荒, 隋 唐 遙 統 提 封 蹙. 丹 鞨 交 爭 壁 壘 長, 昭 代 百 年 同 漢 輔 , ❈本 朝 何 日 復 河 湟 , 中 宵 勑 勒 奚 歌 發, 俛 仰 山 川 淚 數 行. 近. 一 作 接.
[일찍이 “요동”은 본사 아(조선을 말함)의 지경이 명확하였다. 고구려의 북쪽 지경에 가까이(붙어) 거친 왕(?)이 있었다. 수, 당이 아득하여 통제하기 어려워 “축”에게 봉지로 하였다. 글란, 말갈의 상호 다툼에도 오래도록 성채와 울타리가 되었다. 漢의 소제 때에 백 년 동안 한(漢)을 보좌하였다(漢의 땅이 되었다는 것). ❈ 본조(조선을 말함?)는 어느 때 하(河)황(湟)을 회복할건가(하겠는가)]
본시 “요동지방”은 “하(河)와 황(湟)”즉 <하수 및 황수> 지대에 있었다는 것이 되고 이곳은 근대조선의 강역이었다는 말이 되는데........? 그렇다면 “심양” 역시 이곳 지방의 북쪽이나 서북쪽 변방지대에 있었다는 결론이 된다. 참으로 놀라운 기록인데, 이 분이 A. D 1,652-1,719년도 생존하셨던 분이라 생각할 때 이 분 자신이 글을 쓸 때 “본조(本朝)”라 했다는 말은 당시의 “조선(朝鮮)”을 말하는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는 점이다. (이 부분은 전회 설명분 참조)
♨ 이쯤해서 정리를 해보자.
(1) 위【4】의 시는 조선(朝鮮)의 하 황 지대(청해 동쪽)와 이웃나라가 경계를 이웃하고 있었다는 시의 내용이고,
(2) 아래 【5】는 본조(조선을 칭)에서 언제 하 황 지대(청해 동쪽)를 회복할 수 있을까하는 안타가운 심정을 말하고 있다.
(3) 결국 A. D 1,652 - A. D 1,726 년 사이에 조선에 큰 사건이 있었다는 말이 된다. 이는 아마도 1712년(숙종 38)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세워진 정계비사건이 아닐까 한다. 이는 당시 에 조선(朝鮮)과 청(淸)나라만이 존재했다고 하였으니 청(淸)과 조선(朝鮮)의 국경선이 바로 이곳 청해(靑 海) 동쪽의 하황(河 湟)지대일 것이라는 추리가 가능하다.
따라서 조선(朝鮮)과 청(淸)의 접경지대는 “하 수(河水=黃 河)와 황수(湟 水)”지역이 되며, 이 황하와 황수는 모두 동쪽으로 흐른다(東流). 본시 조선의 강역은 신 강성 “소 륵”서쪽지방까지였으나 이곳의 동북방 지대에서 일어난 후금(後金) 즉 청(淸)나라로 인해 조선의 영토는 동쪽으로 밀려나는 수모를 당한 것이 아닐까하는 것이다. 이는 맨 위에서 말하는 요동지방이 청해(靑 海)를 흐르는 황하주위라는 주장과 함께 전체적인 맥이 잡힌다. 물론 이러한 가설을 고증하고 증거 하는 일은 고된 작업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백두선 정계비는 어디에 있었을까. 또 하나 숙제가....도대체 조선사의 숙제는 언제쯤 끌날 수 있을까? 이곳 고려. 조선 토론방을 사랑하고 애정을 갖고 찾으시는 여러분들의 많은 고견이 본래의 백두산정계비가 있었던 곳을 찾을 수 있으리라 의심치 않습니다.
2008. 11. 04. 필명 : 문무씀
*********************************
한임 (2008-11-05 00:04:28)
선생님의 남다른 노고에 존경의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좀 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진심으로 감사에 말씀을 올립니다.
백두산경계비 말씀 뜻 깊게 읽었습니다.
첨부하여 감히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정말 어렵게 여겨지는 역사사실도 따지고 보면 보통사람들이 생각하는 이치에서 크게 벗어 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실타래처럼 얼켜져 오묘하고 혼란스러운 역사일지라도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상식에서 벗어나는 일은 결코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추리하고 이치를 따져 보면 바로 답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저는 소위 천리라고 이해하고 싶습니다.
당시 뿐만아니라 지금까지도 일본인들이 구만주라고 하는 것을 보면 신만주와 구만주가 존재했음을 말해주는 것이고 구만주와 신만주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만주가 있어 조선과 청의 경계로 삼았다면 그곳이 바로 백두산이 있는 곳이고 또한 경계비가 있을 곳입니다.
그러나 갑자기 신만주가 생겨나 구만주가 역사 뒤안길로 사라지고 신만주가 만주로 둔갑하면서 백두산이 생겨나고 경계비가 옮겨집니다.
그 곳이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만주가 되어버립니다.
대륙조선(=고려 COREA)을 말살하고자 하는 음모세력(일제, 국민당, 서이 통합세력)들이 한반도로 COREA를 구겨 넣기 위하여 대륙북부가 정통적 만주임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동북3성에 만주를 새로 만들었습니다.
때문에 사람들은 옛 만주를 구만주라 했을 것이고 새로 만든 곳을 신만주라고 했을 것입니다.
내몽고전체가 만주라고 할 때 만주 남쪽은 바로 북경이고 본거지가 대륙입니다.
동북3성이 만주라고 할 때 북경이 지금의 평양이 되고 본거지가 한반도가 됩니다.
앞서 공개된 자료 淸朝一統之圖가 조작된 것이라고 할지라도 淸朝一統之圖를 보면 한반도 평양부근에 북경이라고 표시해놓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동서간 충돌에 표본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들 서이를 필두로 한 통합세력의 시대적 아젠다이고 세기적음모라는 것을 나타내는 자료이기도 합니다.
생각해보면 그 당시 구만주에 조선인들이 다수 몰려있을 수 있는 가능성이 많습니다.
대이동기에 일부는 북쪽 북쪽으로(몽골, 일제 시베리아 한인촌 습격 사건)
일부는 서쪽, 남쪽으로 그리고 동쪽으로 이동했을 것입니다.
구만주에 있던 조선인들이 인위적으로, 강제적으로 신만주로 이동했을 가능성이 많고 그후 적잖게 한반도로 이동했을 것입니다.
한반도 내 원주민도 있었을 것이고 물론 대륙에서 자발적으로 그 이전에 한반도로 이동한 세력도 있었을 것입니다.
"내가 옛날 만주 개장사 할 때...." 라고 하면서 좀 과시하듯 추억을 떠 올리던 옛 어른들의 모습이 생각납니다.
그런 식에 옛 어른들이 하는 말씀을 들을라치면 언제나 공허하게 들리던 말인 것 같은데...오늘 새삼스럽게 여겨집니다.
기억입니다.
그 분들의 기억이 이젠 없습니다.
대이동기, 이런 혼란기에 대륙조선인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대륙에서 살 수 없어 쫓겨나고 도망 나오고 때론 학살당하고 투옥당하고 또는 두들겨 맞아 불구가 되고 세상이 싫어 벙어리가 되면서 하나 둘 또는 무더기로 사라졌을 것이고 동화, 이민족화 되면서 또한 사라졌을 것입니다.
한반도로 이동한 분들, 또는 쫓겨나신 분들도 그동안 역사의 굴곡에서 대륙이란 기억의 굴레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사라졌을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실로 민족의 고통이고 아픔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차마 말하기가 싫어서 기억을 떠 올리기가 두려워 그 동안 아예 잊어버렸다."
옛 어른들의 심정이 아닐까요.
그 기억을 찾아야 합니다.
선생님 같은 분들이 기록과 자료를 명경 알처럼 딱아 밝게 만들고 있음이고 숨겨진 사실을 하나둘씩 밝혀나가고 있음에 희망이 있습니다.
한반도를 뒤덮고 있는 혼란의 역사, 굴욕과 망실의 역사, 암흑의 역사는 머지않아 말끔하게 걷혀질 것이고 대낮같이 밝은 통일한국 뿌리의 역사, 대륙조선의 역사가 비로소 우리 눈앞에 전개 될 수 있는 희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기대가 있습니다.
그것이 천명이기도 합니다.
그날을 기다리며 선생님 무운을 기원합니다.
*************************
참역사 (2008-11-05 23:20:33)
문무님의 글은 항상 읽고 있습니다. 감사하다는 말도 전하지 못하면서, 헌데 꼬리 글에 한인님 글이 있어서 몇 자 보태려 합니다. 저와 비슷한 생각이신데 현재 북경은 사서에서 연나라 수도라 했어요. 한반도의 무관하고, 이 평양은 제가 알기엔 여러 지명이라 봅니다. 서경으로 했던 평양 그건 고려, 조선 때였고, 한나라가 조선을 멸망시키고 한사군을 설치한 낙랑군의 중심지도 됩니다. 아니 배우지도 않았고 고려의 수도가 옮겨졌다? 이런 어거지가 있으니 할말이 없네요. 경주 신라가 일어난 수도 금성? 이제는 2천년 입니다. 고려 때도 지방 세력이 있었고, 지금까지 이어 왔는데 그곳에서 뭐가 나왔나요?
참역사 (2008-11-06 19:07:00)
카오스님의 글에는 고려의 도읍지라 했군요. 도읍지라면 나라가 처음 세워진 곳이고 그곳이 수도라고 생각합니다. 해서 이걸 옮긴 수도는 도읍지가 아니라고 보는데? 아닌가요? 차이를 따지는 건 아니고 신라 처음 금성에서 출발하여 고려에 흡수전까지 옮기지 않았고 백제는 한성에서 출발해서 웅진, 부여로 옮겼으며 고구려또한 환도성, 국내성으로 수도를 옮겼다고 알고 있습니다. 고려는 송악에 수도를 정한 뒤 옮겼다는 역사기록 모릅니다. 고려가 세로운 나라를 세운 것도 아니고 태봉(나라 이름도 바뀌고 수도도 옮겨진) 궁예의 신하였던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나라를 세웠고 도읍지는 송악이었습니다. 이성계가 고려신하로서 구데타에 성공하여 자기가 왕이 된 후 수도가 바뀐 건 한양으로 천도한 후 멸망 때까지라는 건 현재 가르치는 역사이고 이것마저 왜곡이라면 말도 안 되는 얘기죠. 수도를 옮기는 일은 기록에 없을 수가 없습니다. 고려 때 묘청의 난이라 하는 게 무었입니까? 송악에서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자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조선 때 홍경래란도 평양(서경)과 관련 있습니다. 지역차별도 포함되어 있고요. 우리역사만이 아니라 나라의 수도가 옮기지는 것은 다른 나라 역사에도 있어야 하는 겁니다. 중국25사? 그 어느 곳에 고려의 수도가 바뀌었다는 기록이 있는 지? 무슨 근거가 있는 지 말도 안 되는 얘기를 꺼집어내네요.
[우리역사의 비밀]
'세계삼한역사 > SINA-신중국' 카테고리의 다른 글
1차대전-중동을 움직이고 세운 여인 거트루드 벨(Gertrude Bell) (0) | 2009.01.14 |
---|---|
해저에서 도시 성곽과 비슷한 현무암 지대 발견돼 (0) | 2009.01.06 |
500년간 월세가 1500원, 독일 마을 화제 (0) | 2009.01.03 |
600년 전 정화 함대처럼 중국해군도 해적 소탕을 (0) | 2009.01.02 |
아르헨 아파트 건설현장서 17세기 범선 발굴 (0) | 2009.01.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