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도부

일본, 지역감정은 없는가

한부울 2008. 11. 26. 14:05

일본, 지역감정은 없는가

[서울신문]2004-09-20 23248


일본은 홋카이도, 혼슈(본토란 의미), 시고쿠, 규슈 등 크게 4개의 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멀리 남서쪽에는 1870년대 말까지만 해도 독립국 류큐왕국이었던 오키나와가 있지요. 총면적은 남한보다 대략 4배 정도 넓고, 인구도 1억2000만이 넘습니다.


이렇게 넓다보니 근세이후 크게 동쪽과 서쪽 지역간의 지역감정이란 게 있었다고 합니다. 원주민이 있는 홋카이도나 오키나와의 특수한 지역정서를 제외하면 바로 간토(관동)와 간사이(관서) 간의 지역감정이랄까, 지역색이 두드러졌지요.


지역감정이나 지역색깔은 1945년 일본의 패전 이후 지극히 엷어지긴 했지만, 특히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일은 없다고 하지만 아직도 생활과 문화 속에 뿌리 깊게 남아있다는 것이 일본인들의 증언입니다.


일본의 근·현대사에서 동-서간 지역감정은 크게 세 번의 고비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첫 번째는 1600년 일본이 통일되기 전 동군과 서군이 총력전을 펼쳤던 세키가하라전투이고, 두 번째는 1868년의 메이지 유신입니다. 그리고 1945년 일본패전이 마지막 고비입니다.


세키가하라전투는 1600년 9월 혼슈의 중간지점인 기후현의 세키가하라에서 있었던 전투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과 이시다 미쓰나리의 서군이 격돌한 전투입니다. 전 일본의 다이묘들이 갈라져 격돌했다는 점에서 근대 일본 역사에서 중요한 전투로 꼽히고 있습니다.

일부 사람들이 간토와 간사이, 혹은 동일본과 서일본의 기준점이라고 하는 일본 최고봉인 후지산, 그 후지산중에서도 단연 최고봉인 해발 3776미터인 검봉에 자리잡은 기상관측소


이 전투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은 1614년 도요토미 히데요시 추종세력들을 마지막으로 제압하고, 일본을 완전히 통일합니다. 그 때 승리한 동군진영은 메이지유신까지 일본 역사의 중심이 되고, 패한 서군 소속의 인사들은 하급무사로 전락, 대부분 서쪽지역 변방으로 밀려 비주류세력으로서 300년 가까운 세월을 보내게 됩니다.


이처럼 세키가하라전투에서 패한 사람들의 후손으로 대부분 서일본에서 한을 품고 자라온 세력들이‘에도바쿠후 타도’를 외치며 메이지유신의 주체가 됩니다. 바쿠후(막부의 일본발음) 타도와 유신운동의 주체는 사쓰마, 조슈, 도사 세 지역 출신의 하급무사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근대국가 실현 열망도 컸지만 근저에는 신분차별, 지역차별에 대한 깊은 한도 서려있었다는 증언도 많습니다.


근·현대사 동-서 지역감정 세 번의 고비


메이지유신 주역들은 이후 수도를 도쿄로 천도하고 입헌군주제를 도입, 정치의 중심을 차지합니다. 이들 세 지역 출신들은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된 초대 일본 총리 이토 히로부미를 선두로 정계의 요직을 차지합니다. 조슈번(현 야마구치현), 사쓰마번(가고시마현), 도사번(고치현) 출신들은 내각의 요직을 패전 때까지 주름잡습니다. 그 후광은 70년대까지도 작용했다고 합니다. 역대총리 56명 중 12명이 이 세 현 출신이니 대단한 것이지요. 참고로 일본의 47개나 되는 도(都)-도(道)-부-현 중 총리를 한 명도 배출하지 못한 곳이 20곳이 넘습니다.


이처럼 일본 역사, 정치세력의 큰 중심이 동-서 세력간 두 번에 걸쳐 요동친 뒤인 패전 후에는 승전국 미국의 필요 등으로 인해 동서간 인재의 불균형 현상은 크게 해소됩니다. 전후에는 간토지역의 정치경제적 성장이 두드러져 간토와 간사이는 특히 경제적으로 큰 온도차가 있습니다. 잃어버린 10년이란 거품붕괴 후 2004년 들어 간토지역은 경제가 상당한 회복세를 보이며 다소 흥청거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장기불황의 최대 피해지역이라는 간사이 지역은 썰렁합니다. 실업률도 높습니다.


그래서인지 지난해 간사이를 대표하는 프로야구 한신 타이거스가 도쿄를 중심으로 하는 간토를 대표하는, 막강한 경제력의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제치고 파죽지세로 우승했을 때 간사이 사람들이 그렇게 열광했었던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해 간토지방과 간사이지방간의 대결이라는 지역감정이 깔려 있다는 해석이 많았었지요. 주류와 비주류간의 대결이었다는 해석도 있었고, 간사이로 표현되는‘약자들의 반란’이라서 열광했다는 해석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간토, 간사이 하는데 과연 지리적인 분리 기준점은 어디일까요. 설이 무척 많습니다. 후지산이 간토와 간사이의 기준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에도 바쿠후가 설치했던 하코네의 세키(關)가 기준이란 설도 있지요. 아울러 400년 전 세키가하라전투가 벌어졌던 기후현의 세키가하라가 기준이란 설도 있습니다.


하지만 간토와 간사이를 가르는 명백한 지리적 기준점은 없다는 것이 오늘날의 정설인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간토라는 말은 1923년 간토대지진 때의 일본인들의 조선인 학살로 인해 익숙하고, 간사이는 94년 개항한 오사카 간사이공항으로 인해 낯설지 않습니다.


간토와 간사이라고 하면 관문이란 뜻을 갖는 세키(關)의 동쪽이나 서쪽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그 세키는 어디에 있었을까요. 최초의 세키는 700년대 말 나라시대나 이후 교토로 천도한 뒤 중앙정부가 세운 관문이었습니다. 그 동쪽이 간토이지요.


간사이 중심지 역할·간토는 '야만의 땅‘


그런데 그 세키라는 것이 과거에는 교토와 아이치현의 중간 지점인 시가현 오우미하치만시 지역에 자리하고 있었답니다. 그러다가 에도 바쿠후가 생기면서 하코네에 검문소격인 세키를 설치했고, 지금도 하코네에 가면 후지산 분화로 생긴 거대한‘아시노 호수’변에 세키의 유적이 복원돼 관광자원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간사이나 간토란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지 않다고 합니다. 간사이 지방 사람들의 우월의식이 스며있는 말이라나요. 즉 간사이는 정치나 경제, 문화의 중심지역 역할을 해왔지만 간토지방은 ‘야만의 땅’혹은 최근 들어선 ‘촌놈들의 땅’이란 다소 경멸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간사이란 말은 별로 사용되지 않은 채 간토라는 단어를 다소 무시하는 투로 구사했고, 간사이 지역은‘천황’정권이 있는, 문명도가 높은 지역이란 자존심을 담아‘긴키’라는 단어를 즐겨 사용했다고 합니다. 기(幾)는 도읍이란 뜻이 있습니다. 현재 긴키는 교토, 오사카부, 시가, 미에, 나라, 와카야마, 효고현 등지를 가리킵니다.


이런 긴키를 간사이로 바꾸어 부르기 시작한 데는 간사이가 문화의 중심으로부터 변방으로 전락했다는 것을 자조적으로 표현한 의미라는 해석도 나오고 있습니다. 결국 간사이나 간토라는 지리적 경계는 명확한 것이 없고, 문화적 경계구분으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처럼 간사이와 간토의 지리적 경계는 모호하지만‘서일본’과‘동일본’의 지리적 경계는 확실하다고 합니다. 즉 중부 아이치현과 미에현 사이에 있는 조그마한 ‘나베다강’이라고 합니다. 이 강은 아주 강폭이 좁지만 이를 경계로 양 쪽 강안지역의 언어 억양이 명확히 다를 정도라고 합니다. 서쪽은 오사카말, 동쪽은 나고야말이라고 합니다. 이 강을 동-서로 해서 많은 한자를 읽는 방법이나 억양 등이 크게 달라져 서일본말, 동일본말이 됩니다. 그리고 간토 사람과 간사이 사람은 음식이나 언어, 생활습관에서 여전히 큰 차이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간사이인과 간토인, 오사카와 도쿄사람의 문화적 차이점은 다음 회에 전해드리겠습니다.


이춘규 기자 : 도쿄통신

제 별명은 '촌놈'입니다. 많은 선배나 친구들이 촌놈이라고 해 굳어져버렸습니다. 그러니 촌놈이 맞겠지요. 촌놈은 호기심이 많다지요? 그 촌놈 일본하고도 도쿄에 왔습니다. 마음껏 호기심을 발휘, 일본의 힘 특히 일본경제의 힘의 원동력이 무엇인지 찾아보겠습니다. 피상적인 게 아닌 최대한 본질에 가까운 변화도 추적, 전해드리도록 애쓰겠습니다. 가끔씩은 '일본상식 뒤집기'도 해보이겠습니다.


[서울신문 이춘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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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국내의 지역감정? 

[spark] 2008/11/25 오 전 2:29


한국에서는 전라도와 경상도간의 지역 감정에 관한 얘기를 자주 듣는다.


일본에도 물론 지역감정이 있다. 한국과는 달리 전국이 47개의 도도부현(都道府県)으로 나뉘어져 있고 그나마도 일본 도쿠가와(徳川) 막부시대때는 더 작은 “번”(藩) 이라는 지역으로 나뉘어져 영주들이 다스리고 있었다. 조선시대처럼 중앙에서 관찰사를 파견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그 지역을 다스리던 유력자들이 지배하던 독립된 “나라”에 가까운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일본 각지는 상당히 특색있는 문화가 발달하고 자기 출신지에 대한 자긍심과 라이벌 의식도 강한 편이다. 그리고 일본의 교통비가 비싼 것이 아직까지도 지역간의 교류를 저해하는 요인 중 하나일 지 모르겠다.


도쿄의 주변을 보면 내가 사는 사이타마현(埼玉県)과 치바현(千葉県)은 라이벌 의식이 있다. 도쿄 주변에는 사이타마와 치바 말고도 가나가와현(神奈川県)이 있는데 가나가와현은 요코하마(横濱)라는 대도시가 있어서 사이타마, 치바보다 격이 높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도쿄 주변의 지역 중에 1위는 도쿄, 2위는 가나가와인데 3위가 어디냐는 걸로 사이타마와 치바가 다투는 셈이다.

 

 

예를 들어 치바는 디즈니랜드, 나리타 공항이 있다는 것을 자랑하고 사이타마는 K1으로 유명한 사이타마 수퍼 아리나를 자랑한다. 사이타마 현민은 치바에 있는 디즈니랜드 정식 명칭이 “도쿄 디즈니랜드”라는 것을 “치바”가 촌스러워서 “도쿄”를 칭한다고 비웃기도 한다. 치바현과 이바라키현(茨城県)을 촌스러운 시골동네라는 뜻으로 둘을 합쳐서 “치바라키”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바라키현은 “이바라기”라고 잘못 읽는 사람들이 많아서 이바라키 현 출신 사람들은 다른 지역 사람들이 “이바라기”라고 잘못 읽는 것을 불쾌해하는 것을 역으로 비꼬아서 “치바라기”라고 한다. 반대로 치바 사람들은 사이타마가 촌스러운 시골동네라는 뜻으로 “다사이타마” 라고 한다. “다사이”는 촌스럽다는 뜻이다.


치바에 있는 "도쿄" 디즈니랜드


사이타마와 치바의 라이벌 의식은 사실 농담에 가깝고 도쿄 주변 지역이라 원래 사이타마, 치바 출신 사람들 말고도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도 많으므로 도쿄에 살고 싶은데 변두리에 살고 있다는 열등감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밖에도 삿뽀로(札幌)와 후쿠오카(福岡)의 인구가 비슷하고 삿뽀로 라면, 하카타 라면처럼 명물도 비슷하다는 이유로 라이벌 의식이 있기도 하다.


이런 것은 단지 자기 동네가 잘났다는 것을 어필하면서 가볍게 주고받는 이야기에 가깝지만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 아직까지 악감정을 가지고 있는 지역 문제도 있다. 19세기 말 메이지 유신 이전에 도쿠가와 막부파와 천황파 (薩摩, 長州)의 싸움 때 패배한 후쿠시마현(福島県) 아이즈 와카마츠(会津若松)의 경우이다.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일본을 개국 시킨 후 도쿠가와 막부의 힘이 약해진 상태에서 사츠마번-薩摩藩 (현재의 가고시마현-鹿児島県)과 쵸슈번-長州藩 (현재의 야마구치현-山口県)이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의 중재로 연합하여 도쿠가와 막부와 대결한 역사와 관련되어 있다.  도쿠가와 막부는 스스로 천황의 조정에게 정권을 반납하는 타이세이호칸 (大政奉還)을 실시하여 신정부의 중심 세력으로 남아 있으려고 했으나 사츠마, 쵸슈는 이를 용납하지 않고 도쿠가와 막부를 없애고 메이지 신정부에 참여시키지 않으려고 했다. 


후쿠시마현 아이즈와카마츠는 당시 “아이즈번”으로 1600년대부터 도쿠가와 2대 쇼군 히데타다(秀忠)의 4남인 호시나 마사유키가 영주로 들어간 이래 도쿠가와의 친족으로 막부 세력의 중요한 일원이 되어 있었다.


천황을 중심으로 한 신정부의 주요 세력이 된 사츠마, 쵸슈 세력은 결국1868년 교토의 도바, 후시미의 전투에서 아이즈번과 충돌하여 패퇴시켰고 신정부군과 막부 세력간에 보신전쟁(戊辰戦争)이 발발하여 아이즈와카마츠성이 함락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이즈와카마츠는 세번 가 본적이 있는데 아이즈 와카마츠 관광 코스 중에 반드시 나오는 것이 백호대(白虎隊)의 비극이다. 아이즈번이 조직한 15세-17세의 소년들로 구성된 부대인데 와카마츠성이 함락된 것으로 착각하고 (결국 나중에 함락되었지만) 20여명의 소년 무사들이 전부 할복한 사건이다. (그밖에도 아이즈와카마츠에서 가까운 기타카타(喜多方)는 전국적으로 라면이 유명한 곳이다)

 

 

 

                                       아이즈 와카마츠의 백호대가 자진하는 모습


이 전투에서 패한 아이즈번은 영지가 몰수되고 무사들은 홋카이도 같은 타지역으로 강제이주시켰으며 신정부 체재가 확립된 이후에도 아이즈 출신 사람들을 등용하지 않는 차별이 있었다. 게다가 당시 전쟁에서 전사한 사람들을 매장하는 것도 금지시켜서 시체를 새들이 뜯어먹게 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전사자들 유해에서 금품을 훔치는 것을 막기로 한 조치였는데 오해했다는 얘기도 있다) 참고로 이토 히로부미도 바로 이 쵸슈 (야마구치현) 출신 무사로서 일본 최초의 총리대신까지 올라간 인물이다.


아무튼 이런 역사적 경위 때문에 아직도 아이즈 와카마츠 주민들은 야마구치현, 가고시마현에 대하여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진 사람이 꽤 있는 듯 하다. 일례로 1986년 보신 전쟁 120주년을 기념하여 당시 쵸슈번의 중심 지역이었던 야마구치현 하기시(萩市)가 아이즈와카마츠시에 화해의 뜻으로 자매도시 결연을 제의했지만 아이즈와카마츠시의 주민 설문 조사 결과 “아직 보신전쟁 당시의 원한을 잊지 않았다”라는 회답이 있어서 자매도시 체결을 거부했다고 한다. (그대신 고등학교간의 교류 행사는 있다고 한다)


아이즈와카마츠의 상징 와카마츠성


그리고 야마구치현 출신의 아베 전 총리는 재직 당시인 2007년 봄에 아이즈와카마츠시를 방문했을 때 “선배님들이 폐를 끼친 것에 대해 사죄해야 한다”고 발언했다. 이 사과에 대한 평판은 엇갈렸다고 한다.


아이즈 와카마츠시의 젊은 세대는 과거 역사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하지만 할아버지, 할머니로 부터 당시의 원한 서린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고 한다. 이런걸 보면 가해자는 잊어버려도 피해자는 과거를 잊지 않는다는 말이 한 일 간뿐 아니라 일본 국내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느낀다.[s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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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와 오사카는 앙숙?


일본도 지역감정이 있다. 특히 도쿄를 중심으로 한 관동지방과 오사카를 중심으로 한 관서지방은 서로 사이가 안 좋다. 두 지방 사람들은 서로 자기네 지방사람이 최고라고 하면서 상대방 사람을 폄하하는 경향이 높다.


이 두 지방은 여러면에서 서로 다른면이 많은데 우선 기질면에서 보면 오사카 사람은 한국 사람과 비슷한 기질이 있다. 좀 급하고 약간 질서도 없다. 반면에 도쿄 사람은 깔끔한 것을 좋아하고 앞뒤가 분명한 것을 좋아한다. 또 오사카는 장사기질이 뛰어나 오사카 상인하면 일본에서도 알아주는 장사꾼이다. (오사카보다 더 지독한 지역은 도요타 자동차로 유명한 나고야이다.^^;) 이런 장사꾼 기질을 도쿄 사람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너무 장사속인 사람으로 낮게 평한다. 반면에 오사카 사람은 도쿄 사람을 너무 차다고 한다. 네꺼 내꺼를 구분하고 인정이 없다고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두 번째는 음식이 많이 다르다. 일본사람이 좋아하는 우동을 보면 도쿄의 관동지방은 국물이 약간 검고 달착지근한 반면에 오사카의 관서지방은 국물이 맑고 담백하다. 관동식은 가츠오부시를 넣고 국물맛을 내어 먹지만 관서식은 우동스키라고 하는 냄비요리를 즐긴다. 또 일본인이면 사족을 못쓴다는 낫또는 오사카 지방에서는 잘 먹지 않는반면 도쿄에서는 즐겨먹는다. 도쿄는 여러가지 일본전통의 과자, 밑반찬 등 아주 맛깔나는 음식이라면 오사카는 푸짐한 음식이 많다. 그런이유로 오사카 사람은 먹다가 망한다는 소리까지 있을 정도다.


두 지방의 또 하나 라이벌이 있는데 프로야구 자이언츠와 타이거스다. 도쿄를 본거지로 한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오사카를 본거지로 한 한신 타이거스는 영원한 라이벌이다. 두 팀은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다. 응원전도 다름팀과 달리 열성적이다. 다른팀에는 져도 서로 상대방에게 져서는 안된다. 도쿄에 살지만 오사카 출신은 요미우리 중계를 안보고 한신 야구중계를 골라서 볼 정도로 골수팬들이 많다. 이렇게 두 지방은 여러면에서 라이벌로 존재한다.


두 지방이 서로 앙숙이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기질의 차이도 있지만,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노부나카가 천하를 통일한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사카를 중심으로 천수각을 짓고 오사카성을 건축하고 오사카를 수도로써 활용을 했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쓰로 권력이 넘어가면서 도쿠가와는 하루라도 빨리 도요토미의 이미지에서 벗어나고사 수도 이전을 서두른다. 도쿠가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구축한 오사카는 아무래도 권력을 잡더라도 늘 도요토미의 색깔이 강한 오사카가 마땅치 않아 오사카를 떠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수도를 에도로 옮긴것이다. 즉 지금의 도쿄가 에도인 것이다. 이러 연유에서 오사카 사람은 수도를 뺏어간 도쿄가 좋게 보일리가 없었고 두 지역간 라이벌은 이런 배경에서 생겨난게 된 것이다.


출처 : 화인재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