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공산당은 어떻게 일어섰는가
[9평 공산당] 2004-12-15 오후 8:27:17
들어가는 말
『설문해자(說文解字)』에 따르면 ‘당(黨)’이란 말의 뜻은 곧 ‘상흑(尙黑)’이다. ‘당(黨)’과 ‘당인(黨人)’이란 말은 중국어에서 폄하(貶下)하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공자는, “군자는 몸가짐을 씩씩하게 하되 다투지 아니하며 무리와 화목하게 지내되 편당하지 않는다(君子矜而不爭, 群而不黨).” 라고 했다. 이에 대해 『논어(論語)』주석에서는 “서로 돕되 비리를 감추는 것을 당이라 한다(相助匿非曰黨).”고 해설을 달았다. 중국 역사상 정치적 소집단을 가리켜 흔히 사용해온 단어가 바로 ‘붕당(朋黨)’이다. 이는 중국 전통문화 중에서 좋지 않은 개념으로, 이른바 ‘호붕구당(狐朋狗黨)’과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으며, ‘당을 결성하는 것(結黨)’과 ‘사리사욕을 도모하는 것(營私)’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왜 근대 중국에서 공산당이 나타날 수 있었으며 또한 세력을 얻어 정권까지 탈취하게 되었는가? 중국 공산당은 끊임없이 중국 인민들에게 다음과 같은 이미지를 주입시켰다. 즉, 역사는 중국 공산당을 선택했으며 인민이 공산당을 선택한 것이므로, “공산당이 없으면 새로운 중국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중국 인민이 능동적으로 공산당을 선택한 것인가, 아니면 공산당이 결당영사(結黨營私)하고 중국인민들을 핍박하여 이를 받아들이도록 한 것인가? 이에 대해 우리는 다만 역사로부터 그 답을 찾을 수밖에 없다.
청(淸)나라 후기부터 민국(民國) 초기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거대한 외래 충격과 내재적인 변혁을 거치면서, 사회는 혼란과 고통에 처하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많은 지식인과 인인지사(仁人志士)들은 나라를 구하고 세상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국난(國難)과 사회의 혼란 속에서 그들의 우환(憂患)의식은 실망으로부터 완전히 절망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비유하자면 병이 들어 아무 데서나 의사를 찾아 치료를 하려는 것과 같았다. 그들은 중국 밖에서 이른바 영단묘약(靈丹妙藥)을 찾기 시작했다. 영국식이 안 되면 프랑스식으로 바꿨고, 프랑스식이 안 되면 다시 러시아식으로 바꿔보기도 하였다. 게다가 조급함 때문에 극약처방까지도 주저 없이 사용하면서 하루아침에 중국을 부흥시키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였다.
5.4운동은 바로 이런 절망감을 충분히 표현하였다. 어떤 사람은 무정부주의를 주장했고, 어떤 사람은 공자(孔子)를 타도하자고 했으며, 어떤 사람은 서양문화를 끌어들일 것을 주장하였다. 전체적으로 중국 전통문화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였으며, 중용(中庸)의 도리를 반대했고, 지름길을 찾기에 급급하여 일체를 타파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들 중 급진주의자들은 한편으로는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치자니 그런 길이 열려 있지 않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자신의 이상추구와 확고한 의지에 대하여 전혀 의심이 없었다. 그들은 현실세계는 구할 방도가 없었으므로 오로지 자신들이 나서서 역사적인 발전 계책을 찾아야 한다고 여겼다. 때문에 그들은 혁명과 폭력에 대하여 거대한 열정을 품게 되었다.
같지 않은 기회는 같지 않은 사람들에게 다양한 이론, 학설, 노선을 찾도록 하기 마련이다. 마침내 그런 한 부류의 사람들이 소련에서 온 공산당 연락인을 만나게 되었다. ‘폭력혁명으로 정권을 탈취한다.’는 마르크스-레닌주의가 그들의 초조한 정서에 맞아떨어졌으며 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구하고자 하는 그들의 소원에 부합되었기에, 공산당과의 만남은 그야말로 찰떡궁합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완전히 생소한 이국(異國)의 사상을 중국에 끌어들이게 되었다. 중국 공산당 제1차 당 대표대회에 참석했던 사람은 모두 13명인데, 나중에 일부는 죽고 일부는 도망쳤으며 또 어떤 사람은 일본에 투항하여 매국노『漢奸』가 되었고, 어떤 사람은 공산당을 탈당하여 국민당에 투항한 반역자 또는 기회주의자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1949년 중공이 정권을 장악했을 때에는, 원래의 공산당 창립멤버 중에서 오직 마오쩌둥(毛澤東)과 둥비우(董必武), 두 사람만이 여전히 중국 공산당에 남아 있었다. 중국 공산당을 창당한 사람들은 그들이 당시 러시아로부터 청해온 이 ‘신령(神靈)’이 오히려 하나의 사악한 영(靈)이며, 자신들이 찾아 낸 부국강병(富國强兵)의 약이 도리어 아주 강력한 독약(毒藥)이었음을 생각이나 했는지 모르겠다.
당시 혁명에 성공을 거둔지 얼마 되지 않은 소련 공산당 볼셰비키 정권은 이미 중국에 대해 야심을 품고 있었다. 1920년 소련은 시베리아에 코민테른(Communist International) 극동(極東) 서기처를 세워 중국 등 다른 나라의 공산당 창건을 책임지게 하였다. 이 서기처의 책임자가 수밀츠키(Sumiltsky)였으며 부책임자는 바로 그리고리 보이틴스키(Grigori Voitinsky)였다. 그들은 천두슈(陳獨秀) 등과 함께 중국 공산당의 창건을 추진하였다.
1921년 6월, 그들은 코민테른에 ‘코민테른 극동 서기처 중국지부’를 설립하는 계획서를 제출하였으며, 이로써 중국 공산당은 코민테른의 지도를 받는 지부(支部)가 되었다. 이후 1921년 7월 23일 극동서기처의 니콜스키(Nikolsky)와 마링(Maring)의 조직 하에 중국 공산당이 정식으로 창립되었다.
이때부터 공산주의 운동은 실험적으로 중국에 들어오게 되었으며, 이후 공산당은 일체를 압도했고 일체를 정복했으며 그리하여 중국에 끊임없는 큰 재난을 가져오기 시작했다.
공산당 발전사는 국내외 사악(邪惡)을 집대성한 과정
5천년 문명 역사를 가진 중국에, 중국의 전통과 도무지 맞지 않는 공산당을 이식해오고, 외래의 사악한 영(靈)을 끌어들이는 것은 사실 그리 간단하고 쉬운 일이 아니었다. 중국 공산당은 공산주의의 유토피아사상으로 민중들과 애국 지식인들을 기만하였으며, 이미 레닌에 의해 철저하게 왜곡된 공산주의 이론을 진일보로 왜곡함으로써 공산당 통치에 불리한 일체 전통과 가치를 훼멸시키고, 공산당 통치에 불리한 일체 사회계층과 사회 인사들을 소멸시키는 근거로 삼았다. 중국 공산당은 산업혁명을 끌어 들여와 모든 신앙을 훼멸시켰으며 더 나아가 공산주의를 더욱 철저한 무신론으로 만들었다. 중국 공산당은 공산주의를 도입하여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했으며 또 레닌의 폭력혁명 이론을 끌어들였다. 이와 동시에 중국 공산당은 중국 역대 제왕(帝王)제도의 가장 나쁜 부분을 계승 발전시켰다.
중국 공산당의 발전사는 점차적으로 중국 국내외의 사악을 집대성한 과정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중국 공산당은 이른바 ‘중국 특유’의 9개 기본 인자를 완성하였다. <9대 기본 인자>란 바로, ‘사악(邪), 기만(騙), 선동(煽), 투쟁(鬪), 강탈(搶), 불량(痞), 이간(間), 소멸(滅), 통제(控)’를 말한다. 이런 기본 인자들은 끊임없이 전승(傳承)되었으며, 게다가 그 수단과 악랄한 정도는 위기 속에서 진일보로 강화, 발전되었다.
(1) 첫 번째 기본 인자: 사악(邪)-마르크스레닌주의의 사악한 허울
마르크스주의가 애당초 중국 공산주의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바로 “폭력혁명으로 낡은 국가기구를 때려 부수고, 프롤레타리아 정권을 수립한다.”는 주장 때문이었다.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근본적인 사악이다.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론은 사실상 적은 생산력과 생산관계라는 잉여가치 경제학으로서, 자본주의 발달 초기에 단편적이고 근시안적인 시각으로 자본주의의 멸망과 프롤레타리아의 승리를 단언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이미 역사와 현실 속에서 부정되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프롤레타리아 폭력혁명과 프롤레타리아 독재이론은 무력에 의한 통치와 프롤레타리아의 지배를 주장하였다. 『공산당 선언』은 계급대립과 계급투쟁의 관점에서 공산당의 역사관과 철학관을 서술하고 있다. 프롤레타리아는 기존의 전통 도덕과 사회관계를 타파하고, 정권을 탈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리하여 첫 시작부터 공산주의는 일체의 전통과 대립되는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인류의 천성(天性)은 보편적으로 폭력을 배척하며, 폭력을 행사하는 가운데서 사람은 포학(暴虐)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공산당의 폭력학설은 본질상 인류의 본성을 부정하고 있다. 이는 이전의 어떠한 사상, 철학, 전통과도 모두 실제적인 연원(淵源)관계를 찾아 볼 수 없으며 마치 하늘과 땅 사이, 공중에서 하나의 이름 모를 공포 체계가 떨어져 내려온 것과 같다.
이런 사악한 관념의 전제 조건 중 하나가 바로 이른바 “사람은 반드시 하늘을 이긴다(人定勝天)”는 것으로, 인위적인 세계 개조(改造)이다. 공산당은 “전 인류를 해방 시킨다”는 구호와 “세계 대동단결”이란 이상으로 적지 않은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일부 나라를 위해 걱정하는 의식을 가지고 일생에 무엇인가를 한 번 해보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공산당의 위와 같은 슬로건에 가장 쉽게 기만당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늘이 위에 있음을 망각하고 ‘인간 천국’을 세운다는 그럴싸한 거짓말에 속아 공로와 업적을 세우는 전쟁터에서, 전통을 멸시하고 타인의 생명을 가볍게 보며 또한 자신의 생명마저도 새털보다 가볍게 변질시켜 버렸다.
인위적으로 만든 이른바 ‘공산주의 세계’를 진리로 받들고, 그래서 “뜨거운 피 이미 들끓거니, 진리를 위해 투쟁하리라.”며 떨쳐나섰다. 공산당은 이런 절대적이고 황당한 이념으로 인간과 하늘의 연결고리를 끊어 버렸고, 자신들과 조상 및 민족의 전통적 혈맥을 잘라 버렸으며, 그들에게 공산주의를 위해 헌신하며 공산당의 학살 에너지를 강화하도록 호소하였다.
(2) 두 번째 기본 인자 : 기만(騙)-사악은 바른 신『正神』으로 가장하여 기만하기 마련이다.
공산당이 노동자계급을 이용할 때는 그들을 ‘가장 선진적인 계급’, ‘지극히 공평하고 무사한(大公無私)’, ‘영도(領導) 계급’,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선봉대’ 등으로 칭했다.
공산당이 농민을 이용할 때에는 ‘빈농(貧農)이 없으면 혁명이 없고, 그들을 공격하는 것은 곧 혁명을 공격하는 것이다.’라고 찬양하면서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을 승낙하였다.
공산당이 자본가를 이용할 때에는 그들을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동반자’라고 하면서 ‘민주공화’를 승낙하였다.
공산당이 국민당에 철저히 포위되어 섬멸될 위기에 처하자 “중국 사람은 중국 사람을 공격하지 않는다.”고 큰 소리로 외치면서 국민당의 지도에 복종할 것을 승낙하였다.
하지만 항일(抗日)전쟁이 끝나자마자 약속을 어기고 일방적으로 공격하여 국민당 정권을 뒤엎었고, 건국 후에는 다그쳐 자본가계급을 소멸시켰으며, 최후에는 노동자와 농민을 철저한 빈털터리 프롤레타리아로 만들었다.
통일전선(統戰)은 공산당의 가장 전형적인 기만술책이다. 예컨대 국민당과의 내전(內戰)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공산당은 지주, 부농의 온 가족을 몰살시키던 이전의 방법을 수정하여, 지주와 부농 같은 계급의 적들에게 이른바 ‘임시 통일전선 정책’을 취하였다. 1947년 7월 20일 마오쩌둥은 “소수 반동분자를 제외하고 마땅히 전체 지주계급에 대하여 온화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 이로써 적대분자를 감소시켜야 한다.”라고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공산당이 정권을 탈취한 다음, 지주와 부농은 여전히 집단학살 당하는 운명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처럼 공산당은 말과 행동이 달랐다. 공산당이 민주당파를 이용할 때는 ‘장기적으로 공존하고, 상호 감독하며, 서로 마음을 열고 영욕(榮辱)을 함께 한다.’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그러나 공산당이 정권을 잡은 후, 민주인사들이 당에 의견을 제기하자 모두 반당(反黨) 우파란 누명을 씌워 사회적으로 숙청해 버렸다. 진정으로 그것의 사상, 언행과 조직에 조금이라도 동의하지 않거나 부합되지 않는 것은 일체를 불문하고 모조리 소멸시켜 버렸다. 마르크스, 레닌과 중공 지도자들은 모두 말한 적이 있다. 공산당의 정권은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눌 수 없으며, 공산주의란 첫 시작부터 단도직입적으로 독재적인 선천적 유전자를 갖고 있었다. 그것의 독재성과 배타성은, 정권을 탈취하거나 정권을 장악한 시기이든지를 막론하고, 공산당은 여태껏 다른 정당 및 단체와 진심으로 대한 적이 없다. 이른바 긴장이 완화된 시기라고해도 상대정당을 대하는 태도는 다분히 위선적이었다.
역사의 교훈이 있다면, 공산당의 어떤 약속도 다 믿을 수 없으며, 공산당은 어떠한 보증도 다 이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어떤 문제에서 공산당을 믿었다면 그는 바로 그 문제로 인해 목숨을 잃을 것이다.
(3) 세 번째 기본 인자 : 선동(煽)-교묘하게 증오를 만들고 대중 투쟁을 유발
기만은 선동하기 위한 것이다. 투쟁하자면 반드시 증오가 있어야 하므로 증오가 없으면 증오를 조작해 낸다. 중국 농촌에는 일련의 아주 뿌리 깊은 토지 종족제도가 있는데 이는 공산당이 정권을 수립하는 데 근본적인 장애가 되었다. 농촌 사회는 본래 조화로운 것으로 토지 소유와 임대 관계는 절대적인 대립 관계가 아니었다. 지주는 토지를 농민에게 임대해주고 관리하였으며, 농민은 토지를 임대하여 생계를 유지하고 임대료를 지불했다. 이리하여 지주가 농민을 살리고 농민이 지주를 살렸다.
이런 일정 정도 상호의존 관계를 공산당은 계급 대립, 계급 착취의 관계로 변화시켰으며, 조화를 적대적이며 원한을 가진 투쟁적인 것으로 변화시켰다. 또 합리적인 것을 불합리한 것으로 변화시켰고, 질서 있는 것을 혼란하게 변화시켰으며, 공화를 독재로 변화시켰다. 그리하여 약탈하고 재물을 위해 사람을 죽이고, 지주와 부농(富農) 본인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까지 죽일 것을 주장했다. 적지 않은 농민들은 이처럼 강제로 빼앗는 것을 수긍할 수 없어서 낮에 가져갔다가 밤이 되면 다시 지주 집에 되돌려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런 일이 공산당 공작대에게 발각되면 계급적 각성이 높지 못하다며 욕을 먹어야 했다.
백모녀(白毛女)는 원래 선녀(仙女)로 압박이나 피착취에 관련된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공산당 문예창작팀에서 이를 연극, 오페라, 발레로 편집하여 계급적인 증오심을 선동하는데 이용하였다. 일본이 중국을 침략했을 때, 공산당은 항일하지 않으면서도 국민당 정부가 매국하고 항일하지 않는다고 공격했으며, 심지어 나라가 난리를 겪는 중에도 사람들을 선동해 국민당정부를 반대하였다.
한 부류 사람들의 증오심을 선동하여 다른 부류의 사람들을 죽이는 것은 공산당의 고전적인 수법이다. ‘95% : 5%’라는 계급 분별 공식은 이로부터 온 것이다. 공산당은 후에 일련의 정치운동에서 이 수법을 충분히 운용하고 끊임없이 발전시켜 왔다. 만약 95% 내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되면 안전하고 무사하지만 5%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되면 투쟁대상인 적(敵)으로 간주된다. 그러므로 95% 에 들어가기 위하여 대다수 사람들은 공포 속에서 자신을 보호할 방법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으며, 본심을 어기고 우물에 빠진 사람에게 돌을 던지는 것이 사회적인 기풍으로 되어버렸다.
(4) 네 번째 기본 인자:불량(틵)-불한당들이 무리를 조성
불량(틵)은 사악의 기초이고 사악하려면 불량(틵)해야 한다. 공산혁명에서는 항상 불량배들이 봉기를 일으킨다. 예를 들어 공산당의 경전(經典)과도 같은 ‘파리 코뮌’에서는 순전히 사회의 불량배와 난봉꾼들이 살인 방화하고, 때리고, 짓부수고, 약탈하였다. 마르크스 마저도 룸펜프롤레타리아 계급을 깔보았다. 그는 『공산당선언』에서 이렇게 말했다. “룸펜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낡은 사회 최하층의 소극적이며 부패한 부분이다. 그들은 일부 지역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의해 운동 속에 휘말려 들어간다. 그러나 그들의 전반 생활양상은 사람들에게 매수되어, 반동 행위를 더 원한다.” 마르크스 엥겔스는 농민의 천성적인 분산(分散)성과 우매(愚昧)성은 심지어 계급으로 불릴 자격도 없다고 여겼다.
중국 공산당은 사악한 방면에서 마르크스의 것을 발전시켰는데, 마오쩌둥은 “깡패 불량배(Hoodlums and Social Scum)들은 항상 사회적으로 기피하는 무리들이지만 사실 농촌 혁명에서는 가장 용감하고 가장 철저하며 가장 단호한 자들이다.[마오쩌둥의 “후난농민운동시찰보고" (1927년 3월) 에서]”라고 하였다. 룸펜 프롤레타리아들은 중국 공산당의 폭력을 강화하였고 초기 농촌 소비에트 정권을 건립하였다. 공산당의 언어 계통에 의해 정면적인 의미를 부여받은 ‘혁명(革命)’이라는 이 단어는 실은 모든 선량한 사람들에게는 공포와 재난인 바, 바로 ‘생명(命)’을 빼앗기 위해 온 것이다. 문화대혁명 당시에 룸펜 프롤레타리아를 토론할 때 공산당은 자신이 ‘룸펜’으로 불리는 것이 싫어서 그냥 ‘프롤레타리아’로 줄여 썼다.
불량의 다른 한 가지 표현은, 무뢰한 것으로 독재시기에 악질 토호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친애하는 선생님들, 당신들 말이 맞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렇습니다. 중국 인민들이 몇 십 년 동안 쌓아온 일체 경험은 모두 우리에게 인민민주주의 독재를 실행하거나 혹은 인민민주독재를 실행하도록 한 것입니다.”
(5) 다섯 번째 기본 인자:이간『間』-침투, 이간, 와해, 대체
기만하고 선동하며 불량을 동원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공산당은 이간질 시키는 것도 사용한다. 중국 공산당은 침투 기술이 뛰어나다. 지하 공작의 ‘전(前) 3걸(傑)’인 첸좡페이(錢壯飛), 리커눙(李克農), 후베이펑(胡北風), 그들의 실제 지도자는 중공 중앙 특무 2과 과장인 천겅(陳쨨)이다. 첸좡페이는 국민당 중앙조사과 주임 쉬언쩡(徐於曾)의 기밀담당 비서이자 분신과도 같은 존재였다. 중화민국 정부군이 1차, 2차로 장시(江西)를 포위한 방법과 정보는 첸좡페이가 국민당 중앙조직부의 편지를 이용하여 리커눙을 통해 직접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손에 넘겨주었다. 1930년 4월, 겉으로는 첸좡페이가 지도했지만 사실상 천겅이 배후에서 지도하였고, 국민당 중앙조사과의 서류와 비용으로, 겉으로는 국민당에 속하지만 실제로는 공산당에 속하는 이중스파이 조직을 동북(東北)지역에 건립하였다.
리커눙은 또한 일찍이 중화민국 육해공군 총사령부에 들어가 전보(電報)번역을 맡아, 중국 공산당 보밀국(保密局)의 책임자 구순장(顧順章)이 체포되어 배신했다는 급전을 첸좡페이를 통하여 저우언라이에게 보냄으로써 공산당 스파이 조직이 일망타진될 위기를 모면하도록 하였다.
친공(親共) 인물인 양덩잉(楊登촁)은 국민당 중앙조사과 상하이 특파원을 역임하였다. 중국 공산당은 자신들이 믿을 수 없다고 여기는 당원에 대하여 양덩잉을 시켜 체포, 처단하게 하였다. 허난(河南)의 한 노간부는 공산당 어느 간부에게 실수했다는 이유로 공산당 측 사람이 고자질하여 국민당 감옥에 보내져 몇 년 동안 투옥된 적도 있었다.
해방전쟁 기간에 중국 공산당 정보 전선은 직접 장제스(蔣介石)의 신변과 국방부 작전 차장에게 연결되어 있었는데, 국민당 군대를 움직일 수 있는 대권을 장악한 류페이중(劉裴中)이 바로 중공 지하당원이었다. 정부군의 움직임을 국민당 군대마저도 아직 모를 때 공산당 본거지인 옌안에서는 이미 정보를 얻을 수 있었고 아울러 그에 대한 작전계획을 세웠다. 후쭝난(胡宗南)의 기밀담당 비서이자 분신과도 같은 숑샹후이(熊向輝)는 후쭝난의 대군이 옌안을 진공한다는 계획을 저우언라이에게 통보하였다. 때문에 후쭝난이 옌안을 칠 때 얻은 것은 빈 성뿐이었다. 저우언라이는 전에 이렇게 말했다. “장제스의 작전명령이 군단장에게 하달되기도 전에 마오 주석은 이미 알아차렸다.”라고
(6) 여섯 번째 기본 인자:강탈(搶)-교묘하고 난폭한 강탈이 새로운 질서로
중국 공산당이 홍군(紅軍)을 모아 무장 할거하고 무기를 마련하며, 군인들의 의식주를 해결하는 데는 모두 돈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돈을 마련하는’ 것이 홍군의 큰 임무가 되었다. 그러나 ‘돈을 마련’하는 형식은 토호를 공격하고 돈을 빼앗는 것으로 토비(土匪)와 다를 바가 없었다. 예를 들어 리센녠(李先念)의 홍군은 어시(鄂西)일대에서 성안의 부잣집 가족을 납치하였다. 한 사람만 납치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 중의 부유한 가정마다 한 사람씩 납치하는 데 ‘산 채로 납치’하도록 했다. 즉, ‘산 채로 납치하고’ ‘인질을 죽이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인질을 죽이지 않고 살려두어야 인질 가족들에게 끊임없이 홍군을 먹여 살릴 돈을 바치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홍군을 배부르게 먹이거나 혹은 집이 망하거나 혹은 가족이 죽어 더 이상 짜낼 기름이 없을 때에야 비로소 인질을 석방시켰다. 어떤 사람들은 인질로 잡혀 있던 도중에 놀라거나 괴롭힘을 당해 사망하기도 하였다.
‘토호를 공격하여 전답을 나누는 것’과 교묘하게 강탈하는 것이 사회로 확장되어 급기야 전통을 대체하는 새로운 질서로 되었다. 공산당은 크고 작은 온갖 죄악은 다 저지르면서도 선행은 조금도 베풀지 않았다. 물론 어떤 사람들에게 작은 은혜를 베푼 경우도 있으나 그 목적은 그들을 끌어내어 다른 사람들과 싸우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선을 쌓고 덕을 중히 여기는 것(積善重德)은 무너지고 오로지 살인만 할 줄 알면 되었다. ‘공산주의 유토피아(共産大同)’란 사실상 폭력적인 강탈로 간주되었다.
(7) 일곱 번째 기본 인자:투쟁(鬪)-전통 종법질서와 국가제도를 파괴
기만하고, 선동하며, 불량배를 동원하고, 이간질하는 것은 모두 약탈하고 투쟁하기 위한 것이다. 공산당의 철학은 투쟁철학이다. 공산혁명은 결코 비조직적으로 때리고 부수고 빼앗는 것이 아니다. 당은 “농민의 주요 공격 목표는 토호와 악덕 지주, 불법 지주 및 각종 종법(宗法) 사상과 제도, 성안의 탐관오리와 농촌의 악랄한 습관들이다.[마오쩌둥의 “후난농민운동시찰보고" (1927년 3월) 에서]”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농촌의 전통제도와 습관을 타파해야 한다고 명백히 지목한 것이다.
공산당의 투쟁은 또 무력과 무장투쟁을 포함한다. “혁명은 손님을 청하여 밥을 먹는 것이 아니고 문장을 짓는 것이 아니며 그림을 그리고 꽃을 수놓는 것이 아니기에 그렇게 품위가 있을 수 없고, 그렇게 차분하고 예의 있으며, 그렇게 온화하고 공손하게 양보할 수 없다. 혁명은 폭동이고 한 계급이 다른 한 계급을 뒤엎는 폭력행동이다.[마오쩌둥의 “후난농민운동시찰보고" (1927년 3월) 에서]” 이와 같이 공산당은 정권을 빼앗기 위해 투쟁해야 했고 몇 년 후 문화대혁명 중에 똑같은 투쟁유전자(인자)가 다음 세대를 교육하는데 또 사용되었다.
(8) 여덟 번째 기본 인자 : 소멸(滅)-완전한 집단학살이론 체계 창조
공산당이 한 수많은 일들은 모두 아주 잔혹했다. 지식인들에게 유토피아를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하고 나서 그들을 ‘우파(右派)’로 공격했으며 ‘아홉 번째 냄새나는 놈’ 으로 만들어버렸다. 지주와 자본가의 재산에 대한 박탈, 지주와 부농계급에 대한 소멸, 농촌 질서에 대한 훼멸, 지방정권에 대한 약탈, 부자들에 대한 납치와 갈취, 전쟁포로의 사상과 영혼에 대한 세뇌, 상공업에 종사하는 자본가계급에 대한 개조, 국민당에 대한 침투와 와해, 코민테른에 대한 분열과 배신, 건국 후 역대 정치운동에 대한 청산, 당내의 고압적인 정치에 대해 한 일들이 하나같이 아주 잔혹했다.
이 일체는 모두 공산당 집단학살이론의 기초 위에 건립되었고 역대 운동은 모두 테러리즘의 집단학살운동이었다. 공산당은 초기부터 완벽한 집단학살이론 체계를 창조하고 끊임없이 완성해 나갔다. 이것은 공산당의 계급론, 혁명론, 투쟁론, 폭력론, 독재론, 운동론, 정당(政黨)론 등등으로 이루어졌는데, 모두 다 각종 각양의 집단학살 경험과 실천을 집대성한 것이었다.
중국 공산당의 최대 특징인 집단학살은 사상과 인성(人性), 양심의 말살로서, 이는 그 집단의 근본이익에 부합하는 공포적인 통치방법이다. 당신이 공산당을 반대하면 그것은 당신을 소멸시키고 당신이 공산당을 옹호해도 그것은 역시 당신을 소멸시킬 수 있다. 공산당이 소멸시킬 필요가 있다고 여기면 곧 소멸시키는데 매 사람마다 모두 위기감을 느끼게 하고 모두 공산당을 두려워하도록 하였다.
(9) 아홉 번째 기본 인자:통제─당성(黨性)으로 전 당을 통제하고 다시 전체 인민과 사회를 교화
지금까지 언급한 모든 기본 인자는 모두 동일한 하나의 목적을 위한 것인데 바로 테러형의 고압적인 통제이다. 공산당의 사악함은 그것이 모든 사회 세력의 적(敵)이 되게 하였다. 창립한 그 날부터, 공산당은 잇달아 발생한 위기 속에서 몸부림쳤는데 그것의 최대 위기는 바로 생존위기였다. 존재하는 것 자체가 바로 공포였고 영원한 위기감이었다. 위기 속의 공포는 공산당의 최고 이익, 바로 당의 집단 존재와 권력을 간고(艱苦)하게 유지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공산당은 어쩔 수 없이 늘 표면적인 갱신으로 자신의 부족한 힘을 보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당의 이익은 개별 당원의 이익이 아니고 또한 모든 개체 이익의 총합이 아니었다. 그것은 공산당 집단의 이익으로 개인의 일체보다 높다.
‘당성(黨性)’은 공산당이라는 이 사악한 영(靈)의 가장 두려운 본질 중 하나로, 무한히 확장하여 인성을 집어삼켜 버리며 사람을 비인간적으로 변화시키는 강제능력을 구비하고 있다.
저우언라이와 쑨빙원(孫丙文)은 동지였다. 쑨빙원이 죽은 후 그의 딸 쑨웨이스(孫維世)는 저우언라이의 수양딸이 되었다. 문화대혁명 중에 쑨웨이스는 비판을 받게 되었고 쑨웨이스의 가족은 그녀가 죽은 후 그녀의 머리에 긴 못이 박혀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런데 그녀에 대한 체포장에 서명하고 동의한 사람은 바로 저우언라이였다.
중국 공산당의 초기 지도자 중 한 사람인 런비스(任弼時)는 항일전쟁 시기에 아편전문가였다. 아편은 열강이 중국을 침략한 상징이었다. 그러므로 반(反)민족주의라는 거대한 비난을 무릅쓰고 넓은 면적에 아편을 심기 위해서는 확실히 당성을 필요로 하였다. 이 문제가 극히 민감했기 때문에 중국 공산당은 ‘비누’를 ‘아편’이란 말의 대용으로 사용하고 국경 밖으로 송출하여 비용을 충당했다. 중국 공산당의 새로운 지도자는 런비스 탄생 백주년을 맞아 한 연설에서 “그는 고상한 품격을 지닌 모범적인 공산당원이었다. 그는 신념을 단호히 하고 당에 대한 사업에 무한히 충성하였다.”라고 말하면서 그의 당성을 높이 평가하였다.
또 다른 당성 모범인 장쓰더(張思德)를 보자. 중국 공산당은 그가 벽돌 굽는 가마가 무너지면서 희생되었다고 하지만 민간에서는 그가 아편을 굽다가 죽었다고 한다. 그가 묵묵히 중앙 경위단(警衛團) 사병으로 있으면서 승진을 구하지 않자 중공은 그의 죽음이 “태산보다 무겁다”며 포상을 하였다. 그와, 후에 또 다른 전형적인 당성모범이자 ‘혁명기계의 영원히 녹슬지 않는 나사못’으로 이름 높은 레이펑(雷峰)은 오랫동안 전 중국인들을 교육시키는데 사용되었고 그들처럼 당에 충성할 것을 요구하였다. 마오쩌둥은 “모범의 힘은 무궁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공산당의 무수한 영웅모범인물은 모두 이렇게 당의 강철같은 의지와 당성 원칙을 강화시키는 모델이 되었다.
정권을 탈취한 후에 공산당은 사상통제 유전인자를 더욱 광대하게 발양시켰다. 공산당은 성공적으로 몇 세대에 달하는 당의 ‘도구’와 ‘나사못’을 만들어 냈다. 당성(黨性)은 일관적인 사유방식과 똑같은 행위방식으로 강화되었으며 전 중국과 전체 인민들에게까지 확대되었다. 당성 행동방식은 국가라는 명분을 이용했고, 당성 사유방식은 전 인민들의 자아를 세뇌시켜 사악의 매커니즘에 복종하고 협조하도록 만들었다.
중국 공산당의 부끄러운 과거사
중국 공산당은 자신의 역사를 “승리(勝利)로부터 끊임없이 다른 승리로 걸어 간” 휘황한 역사라고 한다. 중국 공산당이 이렇게 자신을 미화(美化)시키는 이유는 공산당 정권에 합법성을 부여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사실 공산당의 과거사는 조금도 명예롭지 못했다. 그들은 사악, 기만, 선동, 투쟁, 강탈, 불량, 이간, 소멸, 통제라는 이 9대 기본 인자에 의거해서만 비로소 최종적인 정권을 탈취할 수 있었다.
(1) 중공의 성립-소련 공산당의 젖을 먹고 성장
중국 공산당은 대중에게 “시월 혁명의 대포 소리가 우리들에게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져다주었다.”라고 교육한다. 사실 중국 공산당은 성립 초기에 소련 공산당 아시아 중국 지부(支部)였으며 시작부터 매국(賣國)적인 정당이었다. 성립 초기 중국 공산당은 돈이 없었으며 이론과 실천도 없었고 핵심도 없었다. 코민테른에 가입한 것은 폭력 혁명에 참여하고 의존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중국의 폭력혁명은 마르크스, 레닌의 단계적 폭력 혁명과 일맥상통한다. 코민테른은 전 세계적인 범위에서 각국 정권을 뒤엎는 총 지휘부였고 중국 공산당은 코민테른 동방 지부였으며 동방에 대한 소련의 붉은 제국주의 노선을 집행하였다. 중국 공산당은 폭력으로 정권을 탈취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 정치를 한 소련 공산당의 성숙된 경험에 의존하여 정치, 사상 및 조직 노선 상에서 모두 소련 공산당의 명령을 받았으며, 외부의 불법 조직이 지하에서 비밀리에 생존하는 방식을 그대로 배워 엄밀한 감시와 통제를 하였다. 즉 소련 공산당은 중공의 핵심이자 후원자였다.
중국 공산당 제1차 당대표대회에서 통과된 중국 공산당 헌장은 코민테른이 제정한 것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 계급투쟁, 프롤레타리아 독재정치와 당을 건립하는 학설에 근거한 것인데, 소련 공산당의 강령을 중요한 근거로 했다. 다시 말하자면, 중국 공산당의 영혼은 소련 공산당 식으로 외부에서 이식된 것이다. 중국 공산당 지도자 천두슈(陳獨秀)와 코민테른의 대표 마링(馬林)은 일찍이 서로 다른 의견이 있은 적이 많았다. 마링은 천두슈에게 보낸 편지에서 “만약 당신이 진정한 공산당원이라면 반드시 코민테른의 명령을 들어야 한다.”라고 썼다. 비록 천두슈가 중국 공산당의 초대 ‘교부(敎父)’이긴 했으나 로마 교황청과 같은 코민테른의 명령을 들을 수밖에 없었으며 사실상 중국 공산당은 소련 공산당에 예속된 것으로 복종해야 했다.
천두슈는 1923년 제3차 당대표대회에서 당의 경비는 거의 모두 코민테른에서 얻는다고 공개적으로 인정하였다. 일년 동안 코민테른은 중국에 20여만 위안의 돈을 썼지만 중국 공산당의 성적은 그다지 좋지 못하여 코민테른의 비평을 받았다.
비밀이 해제된 공산당 문건의 불완전한 통계에 따르면, 중국 공산당의 수입은 1921년 10월부터 1922년 6월까지 16,655 위안이었고 1924년에는 1500 달러와 32,927.17 위안이었으며 1927년에는 187,674 위안이었다. 이를 통해 본다면 코민테른이 중국 공산당에 제공한 비용은 월 평균 약 2만 위안인 셈이다. 중국 공산당이 현재 사용하고 있는 관계(關係)를 이용하고, 뒷거래를 하며, 아부하고 매수하고 심지어 협박하는 등 이 모든 방법들은 그들이 초기부터 사용했던 것들이다. 코민테른의 책임자는 중국 공산당의 끊임없는 비용 요구에 대해 엄하게 비판한 적이 있다.
“그들은 경비 수입원이 다양한(국제 연락국,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대표, 군사조직) 점을 이용하여 많은 돈을 얻었다. 왜냐하면 각 부서에서는 서로 이미 경비를 주었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경비를 타러 오는 동지는 언제나 러시아 동지들의 분위기를 잘 파악하고 있었으며 심지어 이런 혹은 저런 항목의 경비를 대주는 동지들을 어떻게 구별해 대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일단 많은 동지들이 정상적인 방법으로 경비를 얻을 수 없다고 인식하면 사무적인 회견을 피하기 시작하고 가장 난폭한 사기수단을 쓴다. 예를 들면, 소련이 돈을 군벌들에게 주고 중앙에 바치지 않는다고 기층 당원들이 질책하고 있다는 등 유언비어를 퍼뜨렸다.“(주석)”
(2) 제1차 국공(國共)합작-부체가 심장을 파고 들어 북벌`을 파탄 시킴
중국 공산당은 줄곧 장제스(蔣介石)가 국민혁명을 배반하여 공산당은 할 수 없이 무장봉기를 일으켰다고 가르쳐왔다.
그러나 실제상 제1차 국공합작은 중국 공산당이 국민혁명의 부체(附體)가 되어 공산당의 발전을 도모한 것이었다. 중국 공산당은 정권을 탈취하기 위하여 소비에트 지원하에 혁명을 발동하기에 급급했으며, 실질적으로는 국민혁명을 배반한 것이다.
1922년 7월, 중국 공산당 제2차 당대표대회에서는 정권을 탈취하는 것이 급하다는 이유로 국민당과의 연합을 반대하는 의견이 다수를 차지했다. 그러나 태상황(太上皇)에 해당하는 코민테른은 회의에서 통과된 결의를 부정하고 중국 공산당에게 국민당에 가입하도록 지시했다.
제1차 국공합작 기간인 1925년 1월, 중국 공산당은 상하이(上海)에서 제4차 전국대표대회를 소집하여, 손중산(孫中山)이 사망하기 전에 이미 지도자 문제를 제기하였다. 만약 손중산이 살아 있었다면 그도 장제스처럼 중국 공산당이 겨냥하는 표적이 되었을지 모른다.
소련이라는 배후가 있었기에 국공합작 기간에 공산당은 국민당 내에서 대거 권력을 장악했다. 탄핑산(譚平山)이 국민당 중앙조직부 부장, 펑쥐포(馮菊坡)가 노동부 부장과 사무처리를 전담하는 비서, 린쭈한(林祖涵)이 농민부 부장, 펑파이(彭湃)가 농민부 비서, 마오쩌둥(毛澤東)이 국민당 선전부 대표부장을 각각 맡았다. 군관학교, 군지도권 역시 공산당이 항상 노리던 초점이었다. 저우언라이(周恩來)는 황포군관학교 정치부 주임, 장선푸(張申府)는 부주임을 맡았다. 저우언라이는 또 군법처(軍法處) 처장 직을 겸하고 있으면서 사방에 소련 군사고문들을 배치했다. 뿐만 아니라 적지 않은 공산당원이 국민당 군관학교 정치교관과 강사를 맡았으며 국민혁명군의 각급 당 대표 자리에 있었는데, 그들은 당 대표들의 서명이 없다면 일체 명령은 무효라고 규정해 놓았다. 이렇듯 국민혁명의 부체(附體)로 된 결과 중공은 1925년 천 명도 되지 않던 당원이 1928년에는 3만 명으로 폭증하였다.
북벌혁명은 1926년 2월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1926년 10월부터 1927년 3월까지 중국 공산당은 상하이에서 3차례 무장폭동을 일으켰고 나중에는 북벌군사(軍師)부까지 쳐들어 갔다가 북벌군에 의해 무장해제되었다. 오호(伍毫)라는 가명을 사용했던 저우언라이도 체포되어 회개 성명을 발표한 후에야 풀려났다. 광둥(廣東) 총파업 규찰대가 매일 경찰과 폭력 충돌을 일으켰기에 국민당은 지원부대를 파견하여 경찰과 협조하게 했으며 비밀 요원을 파견하여 전문적으로 폭동을 부추기는 사람들을 감시하게 했다. 이러한 소요야말로 국민당이 중국 공산당에 대해 ‘4.12 대숙청’을 진행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1927년 8월, 국민혁명군 내부에 있던 공산당은 기회를 보아 난창(南昌)폭동을 일으켰지만 곧 진압되었다. 또 9월에는 창사(長沙)를 공격하는 추수봉기를 일으켰으나 역시 진압되었다. 이리하여 공산당은 ‘당 지부를 건립하고 다시 잇는’ 네트워크 식의 통제방식을 취하기로 하고 정강산(井岡山) 일대로 도망가서 농촌에 지역 정권을 건립하였다.
(3) 후난(湖南) 농민폭동-불량배들의 반란을 발동
북벌혁명군, 국민혁명군은 군벌들과 싸우고 있었지만 공산당은 농촌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정권을 탈취하는 데에만 신경을 썼다.
1927년의 후난 농민운동 역시최하층 불량배들의 봉기로서, 유명한 공산주의 첫 혁명인 파리 코뮌의 룸펜봉기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파리 민중과 당시 파리에 거주하던 외국인들은 파리 코뮌 멤버들이 모두 꿈도 없고 파괴를 일삼는 무리들이며 고층 빌딩에 살면서 산해진미를 먹고 눈앞의 쾌락만 추구하면서 죽음의 존재도 모르는 사람들임을 똑똑히 목격하였다. 파리 코뮌 폭동 기간에 그들은 신문발행을 금지시켰고 국왕이 임명한 Georges Darboy 대주교를 인질로 잡고 있다가 총살했으며 그밖에도 교인(敎人) 64명을 사살했다. 그들은 또 궁전을 불사르고 관청이든 서민들의 자택이든 공로를 기념하는 비석이든 공훈을 새겨 넣은 기둥이든 가릴 것 없이 모두 망치로 파괴하는 것을 낙(樂)으로 삼았다. 프랑스의 수도 파리는 세계적으로도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알려져 있으며, 유럽에서도 비교할만한 도시가 없지만, 그때 건물들은 모두 잿더미로 변했고 민중들은 시달려 뼈만 남았다. 그 난폭하고 잔인한 정도는 동서고금을 통틀어 그 예를 찾아보기가 힘들다.
마오쩌둥도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농민은 농촌에서는 꽤 ‘제멋대로’ 할 수 있었다. 농민회의 권력은 비할 바 없이 커서 지주는 할 말도 못했으며 기세가 다 꺾였다. 이는 지주를 바닥에 쓰러뜨리고 또 한발을 그 위에 얹은 것과 같다. ‘토호와 악덕 지주『土豪劣紳』들을 다른 한 수첩에 적어 넣고’ 벌금을 매기고 헌금하게 하며 가마를 들게 했다. 농민회를 반대하는 토호와 악덕 지주의 집에는 한 무리 사람들이 몰려가 가축과 곡식을 약탈했으며, 토호와 지주의 젊은 처자들의 침대를 딛고 올라가 거기서 뒹굴어 볼 수도 있었다. 걸핏하면 사람을 붙잡아 고깔모자를 씌워 놓고 온 마을을 다 돌아다니면서 ‘악덕 지주들이여, 이제 우리를 알아보겠는가!’라고 한다. 정말 하고 싶은 대로 다 하여 모든 것이 정상이 아니었으며 농촌에 공포를 조성했다…… 솔직히 말한다면 농촌마다 모두 이러한 단기간의 공포 현상을 조성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농촌 반혁명파의 활동을 진압할 수 없으며 절대 토호와 지주들을 넘어뜨릴 수 없다. 틀린 것을 바로 잡으려면 일부 과격한 조치를 취함을 피할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잘못을 바로잡을 수 없다……혁명 기간에 취한 과격한 행동은 진정 혁명이 필요로 하는 것이다.[마오쩌둥의 “후난농민운동시찰보고" (1927년 3월) 에서]” 이렇듯 중공의 혁명은 공포적인 질서를 건립했다.
(4) 북상(北上) 항일-실패하고 도주
중국 공산당은 ‘장정(長征)’을 북상(北上) 항일이라고 하면서 중국 혁명의 신화인양 선전해왔다. 그들의 말을 인용한다면 장정은 ‘선언서(宣言書)’, ‘선전대(宣傳隊)’, ‘파종기계’이며 자신들의 승리이자 적들의 실패로 끝날 것임을 알린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북상 항일은 사실, 실패를 덮어 감추기 위한 중국 공산당의 파렴치한 거짓말일 뿐이다. 사실 중국 공산당은 1933년 10월부터 1934년 1월까지 제5차 반(反)포위토벌전에서 실패했으며 농촌정권도 잇달아 잃어버려 근거지가 갈수록 축소되었다. 이에 중앙 홍군(紅軍)은 할 수 없이 도주해야 했으며, 이것이야말로 ‘장정’의 진정한 원인이다.
서쪽으로 포위망을 뚫고 우회하여 외몽고와 소련에 접근하는 것이야말로 장정 노선에 숨겨진 의도였다. 당시 중국 공산당은 무거운 발걸음을 힘들게 내디디면서 서쪽으로 외몽고에 접근함으로써 주요 역량이 적들에 의해 소멸되지 않도록 했으며, 실패할 경우 소련으로 도주하려고 했다. 산시(山西)와 쑤이위안(綏遠)의 노정에서는 항일의 기치를 내 걸고 민심을 얻을 수 있었고 또한 그 일대에는 일본군이 없어서 안전했다. 당시 일본군이 점령한 곳은 장성을 따라 하나의 선(線)을 이루고 있었다. 일년 후 장정을 거친 공산당이 산베이(陝北)에 도착했을 때 중앙 홍군(紅軍) 주력은 8만여 명에서 6천 명으로 줄어들었다.
(5) 시안(西安)사변-성공적인 이간질과 두 번째 부체
시안사변(事變)이란 1936년 12월 장쉬에량(張學亮), 양후청(楊虎城)이 시안에서 장제스를 억류한 병변(兵變)을 말한다.
중국 공산당의 교과서에 따른다면, 시안사변은 장과 양이 상사인 장제스에게 항일(抗日)을 간한 일종의 무력시위라고 한다. 그들은 동시에 중국 공산당 대표인 저우언라이를 시안에 청하여 사변 후 처리방법을 토론했으며, 전국 각계의 조정으로 사변이 평화적으로 해결되어 10년 내전이 종결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항일 민족통일전선이 형성되었으며, 이는 중국의 위기를 만회하는 관건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중국 공산당은 이 사건을 통해 자신들이야말로 대국(大局)적이며 애국, 항일하는 관대한 당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갈수록 많은 자료들은 시안사변 전야(前夜)에 양후청과 장쉬에량의 신변에 이미 많은 공산당 특무들이 집결해 있었음을 제시해 주고 있다. 예를 들면, 지하당원 류딩(劉鼎)은 쑹칭링(宋慶齡)의 소개로 장쉬에량에 접근하여 시안사변을 일으키는데 큰 공을 세웠다. 시안사변이 발생한 후, 마오쩌둥은 “시안 사변에서 류딩의 공이 크다”며 류를 표창하였다. 또 양후청 쪽을 말한다면, 그의 부인 셰바오전(謝먀眞)이 공산당원으로 양의 군정치부에서 일했다. 그녀는 1928년 1월, 공산당 조직의 허락을 받고 양후청과 결혼했다. 후에 외교부 부부장(副部長)으로 임명된 공산당원 왕빙난(王炳南)도 양후청 사택의 식객이었다. 바로 양과 장 주위의 많은 공산당원들이 직접 시안사변을 획책했던 것이다.
사변이 일어난 초기에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은 장제스를 살해함으로써 포위토벌을 받은 원수를 갚으려 했다. 당시 산베이(陝北)에 있는 공산당의 역량은 너무나 미약하여 단 한 번의 전투로도 철저히 소멸될 수 있을 만큼 곤경에 처해 있었다. 이런 이유로 중국 공산당은 자신의 능숙한 선동, 기만의 술수를 펼쳐 장과 양의 병변을 책동했던 것이다.
그러나 스탈린은 일본이 소련에 진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직접 중국 공산당 중앙에 편지를 써서 장제스를 죽이지 못하게 했고 제2차 국공합작을 요구했다.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도 당시 중국 공산당의 힘으로는 국민당을 삼켜버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장제스를 죽인다 해도 뒤쫓아 오는 국민당 군대를 이길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중국 공산당은 즉각 말을 바꿔 연합항일을 명목으로 장제스에게 제2차 국공합작을 받아들이도록 협박했다.
공산당은 자신들이 획책하여 병변을 일으키고 장제스의 목에 칼을 들이댔음에도 불구하고 나중에는 관대한 척 하면서 장제스에게 다시 국공합작을 받아들이게 했다. 그리하여 중국 공산당은 소멸될 위기를 넘겼을 뿐만 아니라 다시금 국민정부의 부체가 될 수 있었다. 이때부터 홍군(紅軍)을 팔로군(八路軍)이라고 이름을 고치고 다시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이렇듯 교활한 기만 수단에 있어서 중국 공산당은 가히 고수(高手)라 칭하지 않을 수 없다.
(6) 항일전쟁―남의 힘을 이용하여 자신을 확대
중국 공산당 교과서는 공산당이 항일전쟁의 승리를 지도했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상 항일전쟁이 발발할 당시 국민당은 170여만 군대, 11만톤 규모의 군함, 각종 비행기 600대가 있었다. 그러나 공산당은 1937년 11월에 개편한 신사군(新四軍)을 합해도 총 병력이 여전히 7만에도 못 미쳤다. 또 공산당 내부는 여전히 권력을 다투고 분리되어, 한 차례 전투만 치르면 제거될 정도로 허약해져 있었다. 중국 공산당은 만약 대오를 이끌고 일본과 싸운다면 중국 공산당의 세력이 곧 허약해질 것임을 알고 있었다. 중국 공산당의 눈에는 당의 영도권이 문제였지 민족의 존망은 문제가 아니었으며 그 다음에야 비로소 민족통일전선의 중심이 문제였다. 그리하여 “장제스와 연합하는 과정 중에 반드시 영도권을 쟁취하여 투쟁하되 이는 단지 당내에서만 말하고 실제 사업 중에서 실현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9.18사변 이후 중국 공산당은 거의 일본 침략자들과 서로 협조하여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작전을 하였다. 만주사변 선언에서 중공은 전 중국 인민에게 “국민당 통치지역에서 노동자는 파업하고 농민은 소란을 일으키며 학생은 수업을 거부하고 빈민은 파업하고 사병은 쿠테타를 일으켜” 중국정부를 뒤엎자고 호소하였다.
공산당은 비록 항일(抗日)이란 큰 깃발을 높이 들었지만, 전방에서 전투에 참가하지는 않으면서 후방에서는 도리어 지방군과 유격대를 흡수하였다. 평형관(平型關) 전투를 비롯한 손가락에 꼽을 정도의 몇 차례 항일전투를 제외하고 공산당의 항일전투성적은 말할 것이 없다. 다만 공산당의 세력을 확대하고 일본이 투항할 때 항복한 일본군을 빼앗아 자신을 확대하여 90여만 명의 정규군과 200만 민병(民兵)을 지닌 강대한 역량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항일의 정규전투는 전부 국민당 군대에게 남겨두어, 국민당은 전사한 장군만 200여 명에 달했으나 공산당 지휘관은 거의 손실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공산당의 교과서는 줄곧 국민들에게 국민당은 항일하지 않았으며 공산당이 항일전쟁의 위대한 승리를 지도했다고 말해왔다.
(7) 옌안정풍(延安整風)-가장 무서운 방식으로 박해
공산당은 항일이라는 명분으로 무수한 애국청년들이 옌안에 오게 하고 또 ‘혁명성지’에서 정풍(整風)으로 수 천 수 만의 혁명청년들을 박해하였다. 중국 공산당은 건국 이후 계속 옌안을 ‘혁명성지(聖地)’로 묘사했지만 옌안정풍의 죄악은 말하지 않았다.
옌안정풍 운동은 가장 공포스럽고 가장 어두우며 가장 잔혹한 권력게임이었다. 쁘띠부르주아 계급의 독소(毒素)를 숙청한다는 명분으로 공산당은 사람의 문명(文明), 독립, 자유, 용인(容忍), 존엄 등의 가치를 깨끗이 제거하였다. 정풍의 첫 걸음은 모든 동지(同志)의 인사서류를 만드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항목을 포함한다.
(1) 자기소개
(2) 정치문화 경력
(3) 가족성분과 사회관계
(4) 개인 이력과 사상변화
(5) 당성검토
서류 속에는 매 사람마다 자신이 출생한 이후 알고 있는 모든 사람, 발생한 일, 발생한 시간, 지점을 반복적으로 쓰게 하였다. 누락이 있으면 문제인물로 정하였다. 그리고 참가했던 모든 사회활동을 자백하도록 했는데 특히 입당(入黨) 경과를 말해야 했다. 활동에 참가하는 과정 중에서 모든 사상을 자백하게 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가장 관건적인 것이 당성(黨性)검토인데 주로 사상의식, 언론, 공작태도, 일상생활, 사람을 대하고 사물을 접하는 면에서 반당성(反黨性)의 행위가 있는지 여부를 알아낸다. 사상의식을 예로 들면, 입당을 검사하고 홍군에 입대(入隊)한 후 개인이익을 따지는지, 당의 일을 빌어 개인의 목적에 도달하려고 하는지를 검사한다. 혁명의 전도(前途)에 대해 동요한 적이 있는지 혹은 전투에서 죽음을 두려워하는지 집 생각을 하거나 배우자를 생각하는지를 검사한다. 객관적인 표준이 없기 때문에 매 사람마다 모두 문제가 발견되었다.
심사하는 간부는 자백서를 강요하여 내부간첩(內奸)을 제거했는데,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억울하게 조작된 사건이 무수히 발생하였다. 정풍시대의 옌안은 인성(人性) 지옥으로 불려졌고 무수한 간부들이 해를 입었다. 항일 군정(軍政)대학의 경우 간부 심사팀이 들어와서, 2개월 간 적색공포 속에서 즉석에서 자백하게 하고, 자백을 시범 보이며, 단체로 설득하고, 5분간 설득하고 개별적으로 담화하고, 대회에서 보고하여 겉과 속이 다른 사람(겉으로만 공산주의자인 사람)을 잡아냈다. 사진을 찍고 사람들을 한 무리 한 무리 무대에 올려 보내 모든 사람들이 보게 한다. 얼굴색이 변하지 않는 사람은 문제가 없고 그렇지 않으면 혐의분자가 되고 심사대상이 되었다.
심지어 코민테른 대표조차도 감당하지 못하고 옌안의 형세가 사람들을 풀 죽게 한다고 하였다. 사람들은 감히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없었고 서로가 흉계를 꾸미고 있었는데 사람마다 긴장과 공포를 드러냈다. 매 사람마다 모두 감히 진리를 말하지 못했는데 비방당하거나 중상을 당하는 친구를 위해 변호하지 못했으며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에 급급했다. 불량배들은 아첨하여 진급했으며 동지를 모욕하고 자신을 수치스럽게 하는 것이 옌안생활의 특징이 되었다. 사람마다 거의 미칠 지경에 이르러, 모두들 생명과 밥그릇이 보존되기를 빌었으며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동지간의 사랑은 깡그리 저버렸다.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지 않았으며 당 지도자의 문장을 외웠다. 이 일련의 작법(作法)은 거의 아무런 변동 없이, 공산당이 중국에서 성립한 후, 크고 작은 운동에서 참조가 되었다.
(8) 3년 내전-매국(賣國)으로 권력 탈취
러시아의 2월 혁명은 온화한 자산계급혁명이었고 차르(제정 러시아의 황제)도 국가와 민족을 중히 여겨 퇴위(退位)하고 끝까지 저항하지 않았다. 레닌은 급히 독일에서 러시아로 돌아와 또 한차례 정변을 일으켰는데, 차르를 뒤엎은 자산계급 혁명자들을 죽여 공산혁명을 일으키고 러시아의 자산계급혁명을 없애버렸다. 중공과 레닌은 똑같이 국민혁명의 승리열매를 차지한 셈이다. 중국 공산당은 항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국민당 정부를 뒤엎는 해방전쟁을 일으켜 중국을 또 다시 전쟁의 재난 속으로 밀어 넣었다.
중국 공산당은 인해(人海)전술로 유명하다. 랴오선(遼沈), 핑진(平津), 화이하이(淮海) 전투에서 사용한 것은 사람을 총알받이로 한 가장 원시적이며 가장 야만적이고 가장 비인도적인 전술이었다. 창춘(長春)을 포위했을 때 창춘 성내의 양식공급을 소진시키기 위하여 해방군은 백성들을 도망가지 못하게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 결과 창춘 병사들은 2달 동안 진지 앞에서, 산채로 굶어 죽고 얼어 죽고 성문 밖으로 도망가려는 거의 20만 명에 달하는 국민들에 대하여 포위를 풀지 않았다. 사후에 오히려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이 “창춘을 해방할 때 무력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자랑하였다.
1947년부터 1948년까지 중국 공산당은 소련과 『하얼빈협정』과 『모스크바협정』을 잇달아 체결하여 조국의 권익과 동북(東北)지역의 자원을 판 대가로, 외교와 군사면에서 전폭적으로 중국 공산당을 지지해 줄 것을 소련에 요청하였다. 쌍방은 소련이 50대의 비행기를 중국 공산당에 항상 보충해주고, 수거한 일본무기를 두 번에 나눠 중국 공산당에 주기로 하였다. 또한 소련 측이 통제하는 동북의 탄약과 군용물자는 평균가격으로 중공에 판매하도록 하였다. 국민당이 동북에 대하여 공세를 펼치기만 하면 소련이 비밀리에 중국 공산당 군대를 협조하여 전투하도록 하였다. 소련은 중국 공산당을 도와 신장(新彊) 통제권을 빼앗도록 하고 중소(中蘇)연합 공군역량을 건립하였으며 중공의 11개 사단(師)을 무장하였다. 소련은 미국이 원조한 130억 달러에 달하는 무기의 3분의 1을 동북으로 운반하도록 하였다.
중국 공산당은 소련의 지지를 얻기 위하여 동북의 육로(陸路)와 공중(空中) 교통의 특권을 소련에게 약속하였다. 소련에 국민당 정부와 미군의 행동정보를 제공하였고 동북의 생산물인 목화, 콩을 전략물자로 소련에 제공하여 좋은 무기와 바꾸었다. 소련은 중국광산을 우선 개발할 권리를 획득했고 동북과 신장에 군대를 주둔시킬 권리가 있었으며 소련은 극동 정보국을 중국에 설립할 수 있었다. 만약 유럽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중국 공산당은 당연히 원정군 10만을 파견해야 했고 노동자 200만명을 소련에 지원해야 했다. 이외에 중공은 또 랴오닝, 안둥성(安東省)의 특별구역을 적당한 시기에 조선에 영입시킨다고 약속하였다.
공산당 사악한 기본 인자의 표현
(1) 당사(黨史)의 특징 : 영원한 공포
영원한 공포는 중국 공산당 당사(黨史)의 최대특징이고, 생존에 대한 공포는 공산당이 탄생할 때부터 그것이 누려온 최대의 이익이었다. 공산당의 생존을 연장시킨 이런 이익은, 천변만화하는 표면속에 숨겨진 공포본질에 의해 강력하게 지탱되어왔다. 그것은 마치 암세포처럼 확산하여 신체 매 부위에 침투되어 다른 정상적인 세포를 집어 삼키고 암으로 변이(變異)시킨다. 이런 역사순환 속에서 사회는 공산당이란, 이 변이(變異)된 물질을 해결하지 못하여 그것이 확산되도록 했으며 모든 계층과 영역에서 모두 이런 강력한 변이요소를 소화시키지 못했다. 결국 많은 사회가 오염되었고 더 큰 면적으로 공산주의 혹은 공산주의적인 요소를 번식시켰다. 이런 것들은 또 끊임없이 공산당에 의해 강화되고 이용되는데, 근본적으로 사람의 도덕과 사회를 변이시켰다.
공산당은 사람들이 공인하는 도의(道義)원칙을 말하지 않는다. 공산당의 일체 원칙은 모두 절대적으로 그것의 집단이익을 위하여 복무해야 하고 절대적인 이기주의『自私』를 최고원칙으로 한다. 그러므로 공산당의 집단욕망을 억제할 어떠한 도의적 원칙도 없는 것이다. 공산당의 자아원칙을 근본으로 하면서 그것은 끊임없이 서로 다른 외피(外皮)를 걸쳐야 했다. 지속적인 위기가 잇달은 창립 초기에, 중국 공산당은 소련 공산당에 달라붙었고 국민당에 빌붙었고 국민정부 실체에 붙어 기생했으며 국민혁명에 달라붙기도 했다. 정권을 탈취한 후 중국 공산당은 각종 기회주의에 편승하였고 민의(民意)와 민정(民情)을 비롯하여 각종 사회제도와 수단을 이용하는 등 일체에 달라붙었다. 매 차례 위기를 모두 당을 발전시키는 기회로 여기고 그것의 강제수단을 강화시켰다.
(2) 일관적인 사악은 공산당을 일으킨 ‘법보(法寶)’
공산당은 혁명의 승리는 3대 ‘법보(法寶)’에 의지했다고 말하는데 바로 통일전선, 무장투쟁, 당의 건설이다. 국민당은 자신의 교훈에 근거하여 공산당에게 선전과 간첩의 이용이라는 두 가지를 더 보태주었다. 당의 각각의 큰 ‘법보’는 모두 공산당의 불한당 같은 기본 인자에 모조리 관통되는데, 바로 ‘사악(邪), 기만(騙), 선동(煽), 투쟁(鬪), 강탈(搶), 불량(痞), 이간(間), 소멸(滅), 통제(控)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본질적으로 곧 사악한 것이다. 우스운 것은 중국 공산당원들은 모두 마르크스-레닌을 제대로 모른다는 것이다. 린뱌오(林彪)는 전에 진정으로 마르크스-레닌을 읽어본 중공당원이 몇 명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취추바이(瞿秋白)는 공인받는 사상가임에도 마르크스-레닌의 일부 겉 부분만을 읽었을 뿐이라고 실토하였다. 마오쩌둥 사상은 농민이 쿠데타를 일으킨 산골의 마르크스-레닌주의이다. 덩샤오핑의 사회주의 초급단계 이론은 사실 자본주의가 핵심이다. 장쩌민의 3개 대표이론은 더욱이 아무것도 아닌 것을 뜯어 맞춘 것에 불과하다. 중국 공산당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잘 모르며 단지 마르크스-레닌주의 속에서 사악한 것을 계승하였고 또한 그것의 사악한 기초 위에 자신들의 더욱 사악한 것을 밀어 넣었을 뿐이다.
여기서, 특히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중국 공산당의 통일전선(統戰) 공작인데, 기만과 단기간 내에 매수하는 것을 병용하는 것이다. 통일(統)은 전선(戰)을 위한 것으로 공산당으로 하여금 고립된 처지에서 다수로 변하게 함으로써 쌍방 간에 힘의 균형을 변화시킨다. 통일(統)이 있으면 분리(分)가 있는데 어느 것이 적군이고 아군인지, 또 어느 것이 좌익(左), 중도(中), 우익(右)인가를 가려내고, 어느 것을 마땅히 끌어들이고 어느 것을 마땅히 공격하고 어느 시기에 가서 끌어들이고 어느 시기에 가서 공격할 것인가를 가려낸다. 처음에는 적을 친구로 만들고 그 다음에는 친구를 적으로 만들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민주혁명시기에는 부르조아 계급과 단결하고 사회주의 혁명시기에는 부르조아계급을 소멸하였다. 또 예를 들면 중국 공산당은 정권을 탈취하는 시기에 민주당파 지도자인 장보쥔(章伯鈞), 뤄룽지(羅隆基) 등의 도움이 필요했지만 정권을 얻은 후 더 이상 필요없게 되자 곧 이들을 우파로 공격하였다.
(3) 공산당은 성숙한 깡패
공산당은 부드럽고 강경한 두 가지 재주가 있다. 부드러운 재주(軟功)로는 선전, 통일전선, 이간질, 간첩, 모반 획책, 양다리 걸치고 표리부동하기,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들기, 세뇌, 유언비어를 날조하여 사기치기, 진상 은폐, 심리전, 공포분위기 만들기, 공포증, 건망증 등인데 이런 부드러운 재주는 인간성을 말살시킬 수 있고 악한 일면을 이끌어낸다.
강경한 재주(硬功)로는 폭력, 무장투쟁, 탄압, 정치적인 캠페인, 살인하여 입을 봉하기, 납치, 자신과 다른 목소리를 내는 사람 제거, 무장공격, 정기적인 살벌한 공격 등이다. 이런 강경한 재주는 공산당으로 하여금 공포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도록 보장한다.
공산당은 항상 부드러움과 강경함을 동시에 구사하여 수시로 느슨히 하거나 조이기도 하고, 겉으로는 느슨히 하고 안으로는 조이며, 한 편에서는 풀어놓고 다른 한 편에서는 압박하여 뱀이 굴 안에서 나오도록 한다. 중공은 끊임없이 민주(民主)라는 명분으로 국민당 군대를 공격했지만 그러나 공산당이 통치하는 구역 내의 지식인 왕스웨이(王實味)가 공산당과 사소한 이견(異見)이 있다는 이유로 고문을 가했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야생 백합화(野百合花)사건’이다.
옌안정풍에 참가하여 박해 당한 경험이 있는 노간부의 회억에 의하면, 그 당시 끌려나와 자백을 강요받을 때 극도의 압력하에서 자신의 양심을 팔고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 사건을 처음 겪을 때 연루된 동지에게 미안하여 스스로 죽어버리고 싶었다. 마침 책상 위에 총 한 자루가 놓여있어 자신의 머리를 겨냥하고 방아쇠를 당겼지만 탄알이 없었다.
이때 그의 심사를 책임진 간부가 들어오면서 “잘못을 했으면 승인하면 된다. 당의 정책은 관대하다.”고 말했다. 이렇게 당은 그가 극한에 달했음을 알고 또한 그가 당에 ‘충성’함을 알게 되어 고비를 넘겼다. 그 뒤 몇 년이 지난 후 이 노간부는 홍콩에서 파룬궁을 알게 되었고 아주 좋다고 여겼다. 그러나 탄압이 시작되자 예전의 모든 기억들이 되돌아와 더 이상 파룬궁이 좋다고 말할 수 없었다.
이와 유사한 예는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에게도 있었다. 그는 감옥에 갇힌 채 다른 사람들이 끊임없이 살해당하는 것을 보면서 자신도 처형될 것이라고 여겼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그는 능동적으로 공산당에 협조하였고 스스로를 세뇌시켰다. 나중에 그는 『나의 전반생』이란 책을 써냈는데, 중국 공산당이 성공적으로 ‘사상개조’를 진행한 모범이 되었다.
현대 의학의 연구보고에 따르면 공포스런 고도의 압력과 격리된 환경에서, 수많은 피해자들은 가해자들에게 일종의 기형적인 의존심이 생긴다고 한다. 가해자의 감정을 자신의 정서로 전이(轉移)시키며 일단 가해자가 작은 혜택이라도 주면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심지어 ‘사랑’하는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사실 중공은 일찍이 이런 심리적인 현상을 적이나 인민에 대한 정신통제와 사상개조에 이용하였다.
(4) 공산당은 가장 사악한 것
중국 공산당 절대 다수의 총서기는 예외 없이 반당(反黨)분자였다. 이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분명 공산당은 생명이 있고 살아있는 독립적인 유기체이다. 당의 지도자가 당의 방향과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당이 그 지도자의 운명을 결정한다. 장시(江西) 지역 공산당 점령지가 국민당 정부군에 포위되어 생존마저 문제가 되었을 때, 당을 조금도 방해하지 않았음에도 AB단을 공격한다는 명분으로 자기 사람을 밤에 끌어내 총살시키거나 혹은 탄약을 절약하기 위해 돌로 쳐 죽였다. 산베이(陝北)에서 일본과 국민당 틈새에서 생존할 때 옌안정풍이란 이름으로 내부에서 대숙청을 하여 무수한 사람들을 죽였다.
중국 공산당은 이렇게 큰 규모로, 내부에서 반복적으로 대학살을 하였지만 세력 확장에는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았으며, 결국 중국대륙을 통치하게 된다. 이런 상호 학살 방식은 그 당시 작디작은 소비에트에서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마치 한 개의 악성종양처럼 미친 듯이 자라는 과정 중에서 그 핵심은 죽어버리고 외벽은 여전히 끊임없이 원래의 신체를 삼켜 자신을 확대하는 것이다. 삼켜진 원래의 신체, 그 한 부분은 이후 종양을 구성하는 성분이 된다. 어떤 사람이 좋고 나쁨에 관계없이 일단 중국 공산당에 들어가기만 하면 그것의 파괴역량의 일부분이 된다. 정직하고 진지할수록 파괴력은 더욱 크다. 이 신체가 철저히 훼멸되는 시기가 바로 암세포 자신도 사망할 시기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암은 기어이 이렇게 하려고 한다.
중국 공산당이 공인하는 공산당 창시인 천두슈(陳獨秀)는 5.4운동을 지도한 지식인으로서 폭력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공산당원들에게 경고하기를 ‘만약 국민당 내에서 공산당의 정당의식을 강화하고 권력에 큰 관심을 보이게 되면 필연적으로 혁명내부의 긴장을 초래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5.4 세대에서 가장 격렬했던 인물의 마음에도 아직까지는 관용의 도리가 남아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첫번째로 ‘우파 기회주의’라는 누명을 뒤집어써야 했다.
또 다른 한 명의 공산당 지도자 취추바이(瞿秋白)는 공산당이 마땅히 직접 가서 전투하고, 사살하며, 폭동을 조직하고, 훼멸시킬 수 있는 어떠한 정권이든 훼멸시키며, 극도의 무질서한 방법을 사용하여 중국사회에 질서를 회복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뜻밖에도 취추바이는 죽기 전에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나는 절대로 열사(烈士)로 가장하여 죽고 싶지는 않다. 나는 사실 당신들의 대오에서 떠난 지 오래되었다. 아! 역사의 아이러니는 나 같은 ‘문인(文人)’을 혁명의 정치무대로 보내어 강제로 여러 해 동안 섞여 지내도록 했다. 나는 시종 나의 신사(紳士)의식을 극복할 수 없었으며 결국 프롤레타리아의 전사가 될 수도 없었다.[취추바이(瞿秋白) 가 1935년 6월 18일에 사망하기 전인 1935년 5월 23일에 쓴 글에서]
공산당 지도자 왕밍(王明)은 코민테른의 명령을 받들어 국민당과 연합하여 일본에 대항하고 공산당 근거지를 확대하는 것에 반대했다. 당 회의에서 마오쩌둥과 장원톈(張聞天)은 자신들의 동지를 설득할 수 없었다. 그 당시 홍군(紅軍)의 실력으로는 일본군 한 개 사단도 상대할 수 없었다. 일시적인 충동으로 대오를 끌어내 사생결단을 했다면 중국의 역사는 분명 지금의 모습이 아닐 것이다. ‘목숨을 버리고 정의를 지키는’ 전통문화가 주도하는 현장에서 마오쩌둥은 할 수 없이 침묵을 지켰다. 이후 왕밍은 먼저 좌로 기울었다가 나중에 우로 기운 기회주의자로 비판받았다.
후야오방(胡耀邦)은 역대 정치운동의 억울하고 거짓되며 잘못된 사건들을 명예회복시켜, 민심을 만회하려 하다가 숙청되었다. 자오쯔양(趙紫陽)은 공산당을 구원하기 위하여 개혁하다가 결국 좋은 결말을 보지 못하였다. 매 번 공산당의 신정부가 또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진정으로 공산당을 개혁한다면 공산당은 멸망할 것이고 공산당이 그들에게 준 권력은 곧바로 합법성을 잃게 된다. 한 대의 기계에 의지하여 자신이 생산해낸 힘으로 그 자신을 개변하려는 것은 일정 정도에 이르면 분명히 안 되는 것이다. 때문에 공산당의 개혁은 성공할 수 없었다.
이렇듯 공산당 지도자는 한결같이 사악한데 어떻게 혁명이 진행될 수 있고 또 확대될 수 있었는가? 가장 사악했던 많은 시기에 공산당 최고 지도자들이 패배했을 때는, 그들의 사악한 힘이 모두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오로지 가장 사악한 것이야 말로 당의 필요에 부합되었기 때문이다. 공산당 지도자는 모두 비극으로 끝을 맺었지만 공산당 자신은 완강하게 살아남았다. 생존한 지도자는 당을 조종할 수 있어서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당을 훤히 꿰뚫고 있어 당의 사악한 힘에 따라 걸을 수 있었고 공산당에게 에너지를 강화해 줄 수 있었기 때문에 살아남은 것이며, 당이 위기를 넘어갈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었기 때문에 살아남은 것이다. 공산당원이 하늘과 투쟁하고 땅과 투쟁하고 사람과 투쟁할 수는 있어도 공산당과 투쟁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들은 모두 당에 순응하는 도구이며 최고 경지 역시 서로 이용하는 것이다.
뻔뻔함은 오늘날 이미 공산당의 기이한 광경이 되었다. 당의 이번 착오는 장궈다오(張國燾)의 잘못이고 그 착오는 사인방의 잘못이다. 마오쩌둥은 3:7(일생동안 한 일을 10으로 볼 때 잘못한 일이 3이고 잘한 일은 7)이고 덩샤오핑은 4:6이라고 한다. 하지만 공산당은 종래로 잘못이 없고 당이 잘못하면 당 스스로 바로 잡으니 ‘앞을 향하고’ ‘역사의 낡은 장부를 붙잡지 말라’고 한다. 공산주의의 유토피아마저 사회주의 생활을 풍족하게 하는 것으로 변질시켰고, 마르크스-레닌주의마저 ‘3개대표 이론’으로 단속하여 공산당원 스스로도 욕할 수 있게 되었다. 만약, 공산당이 통치를 유지하기 위하여 민주를 하고, 종교자유를 개방하며, 하룻밤 사이에 장쩌민을 포기하고 파룬궁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것을 보게 된다하더라도 사람들은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유일하게 한 가지만은 바꿀 수 없는데 바로 공산당의 단체목표, 단체생존, 단체권력이라는 종지(宗旨)는 변할 수 없고 공산당을 수호하는 권력과 통치는 변할 수 없다.
공산당은 폭력, 공포와 고압(高壓)을 당의 이론강령에 주입시켜 당성(黨性) 및 당의 최고원칙으로 만들었으며, 지도자의 영혼으로 만들었고, 전체 당의 운행 매커니즘과 모든 당원의 행동원칙으로 만들어 버렸다. 당은 무쇠와 같아서, 강철과 같은 규율이 있고 통일된 의지가 있으며 전체 당원의 행동은 반드시 일치해야 한다.
결론
도대체 역사의 어떤 힘이 공산당을 선택했는가? 왜 다른 것을 선택하지 않고 중국 공산당을 선택했는가? 우리는 세계에는 두 가지 세력, 두 가지 선택이 존재함을 모두 알고 있다. 하나는 낡은 것, 사악한 세력이고 그것은 악하고 부정적인 것을 선택한다. 다른 하나는 바르고 좋은 세력으로, 좋은 것, 선한 것을 선택한다. 공산당은 바로 낡은 세력의 선택이다. 공산당을 선택한 이유는 바로 그것이 동서고금의 모든 사악을 집대성한 것으로서 사악의 집중(集中)이자 대표(代表)이기 때문이다. 그 당시 그것은 사람들의 선량함을 이용하여 한 걸음 한 걸음 오늘날의 세력을 만들어 왔다.
공산당은 “공산당이 없으면 신(新) 중국도 없다.”라고 선전하는데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1921년 중국 공산당이 당을 창립하고 1949년 정권을 획득하기까지, 모두 공산당의 피비린내 나는 음모와 교활함이 없었다면 그것의 천하가 없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중국 공산당은 역사상의 다른 어떤 단체와도 다르다. 왜냐하면 중국 공산당은 마르크스와 레닌의 이론에 따라, 중국 공산당이 임의로 하고 싶은 것에 근거하여, 일체 임의적인 행동을 모두 그럴듯한 허울 속에 집어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어느 부분의 군중과 교묘하게 연결시켜 자신들의 이론을 정당화 시킨다. 또 매일 매 시각 각종 선전을 통하여 중국 공산당의 정책과 책략에 이론의 외투를 걸치게 하여 그것이 영원히 정확하다고 증명한다.
중국 공산당의 발전사는 사악의 모든 것을 집대성한 과정으로 전혀 영광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중국 공산당의 발전사는 바로 중국 공산당 정권이 합법성이 없음을 증명한다. 사실은 중국 인민이 공산당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공산당이 간교한 계략을 사용하고 그것의 비할 바 없이 사악한 유전인자인 ‘사악(邪), 기만(騙), 선동(煽), 투쟁(鬪), 강탈(搶), 불량(痞), 이간(間), 소멸(滅), 통제(控)’에 의지하여 외래의 사악한 영체를 중국 인민들에게 강제로 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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