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SINA-신중국

한간(漢奸) 호칭에 의문점?

한부울 2008. 11. 18.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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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간(漢奸)

 

                                                      [대만판 멸공현판]

 

중국에서 외국침략자와 내통하는 자를 일컫는 말. 청(淸)나라 때 지배민족이었던 만주인(滿洲人)과 내통한 한인(漢人)을 가리켰던 데에서 유래한다. 아편전쟁 이래 오랫동안 민족 존망의 갈림길에 있었던 중국은 한간을 매국노·스파이·민족의 배반자로 비난하였으며, 그 가운데 특히 만주사변 이후 망국의 위기를 몹시 의식하게 됨에 따라 일본과 협력하는 자에 대한 비난이 높아졌다. 이 시기의 한간으로는 만주국 총리대신을 지낸 정샤오쉬[鄭孝胥(정효서)], <동양의 마타하리>라는 별명이 붙은 가와시마 요시코[川島芳子(천도방자)], 기동방공자치정부(冀東防共自治政府)의 인루겅[殷汝耕(은여경)] 등이 있는데, 최대의 한간은 제2차세계대전 중 일본의 괴뢰정권인 난징정부[南京政府(남경정부)]를 수립한 왕자오밍[汪兆銘(왕조명)]이다. 오늘날 중국에서는 뜻이 다소 바뀌어, 중국인에게 국한하지 않고 일반적으로 민족에 대한 배반자나 매국노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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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개석 국민정부의 ‘한간(漢奸)’재판 

구수미(중앙조사과)2005.12.05


일본의 항복 이후 중국에서는 장개석의 국민당정부와 중국공산당의 주도하에 전국적으로 ‘한간(漢奸)’ 재판이라는 대대적인 친일파 청산작업이 진행되었다. ‘한간’이란 “중국에서 적국에 내통하는 자”인데, 특히 이 시기에는 “중국인으로서 일본에 협력했거나 국가에 반역을 범한 매국노”를 지칭한다. 이러한 한간 처벌 문제에서 중국의 국민당과 공산당은 공통의 인식을 하였으나, 이후의 실행에서는 차별성을 보였다. 중국공산당은 한간의 공개재판을 추진하였고, 국민당정부는 법률에 의거한 재판을 주장하였다. 이는 국공내전의 승패와도 연계된 문제였다.


1. 한간 이용정책


종전 후 장개석의 최대 목표는 중국에서 공산당의 확산을 저지하고 항전 승리의 과실을 자신이 독점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각지에서 한간이 차지하고 있는 기반과 물자를 최대한 이용하고자 하였다.


장개석은 사전에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듣고 일본점령지역인 남경의 왕정위정부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표명하였다. 그는 일본점령지역의 남경정부 요인과 군대에 대해 그들이 공을 세워 속죄함으로써 그 지위를 견지하도록 하고, 대소 한간에 대해서는 그들이 공산당에게 투항하지 않는다면 일률적으로 관대하게 하도록 하였다. 장개석은 공산당이 전략요충지를 점령하고 괴뢰군을 접수할 것을 염려하여, 모험이 따를 수 있음을 인식하면서도 선택의 여지없이 한간을 이용하였다. 왕정위 남경정부의 요인 및 그 군대에 대해서도 먼저 이용하고 후에 징벌하는 방침을 취한 것이다. 그리하여 장개석은 군 정보총책임자인 대립(戴笠)으로 하여금 먼저 한간, 괴뢰군을 위무하고 진정된 국면에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중공의 팔로군과 신사군이 남경, 상해, 북평, 심양 등의 대도시로 진입하는 것을 저지하도록 하였다.


8월15일 일본이 정식으로 항복을 선포한 이후 『신화일보(新華日報)』에서는 남경괴뢰조직한간명록, 상해괴뢰조직한간명록, 상해문화한간명록, 북평문화한간명록, 신문계한간명록, 금융실업계한간명록, 괴뢰군두목명록 등을 잇따라 공포하고 여러 차례 ‘賣國漢奸 嚴重懲治’ 등의 사론을 발표하여 한간의 매국적 죄행을 폭로하고, 국민정부에 법으로써 한간을 검거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각지의 한간 숙청작업은 모두 정체되어 있었다. 장개석에게 당장의 중요한 문제는 공산당이 일본점령구역을 접수하지 못하도록 저지하는 것이며, 한간을 이용하여 광대한 일본점령지를 차지할 수 있는 방법을 고려하는 것이었다. 그는 국민정부군이 화동, 화중, 화북지역으로 진입한 이후에야 한간문제를 처리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주요한 적을 공산당에 두고 있었으므로 한간 숙청에 모든 정력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종전 후 일단의 시간 속에서 장개석의 한간에 대한 이용정책과 애매한 태도는 한간들에게 숨을 돌릴 기회와 새로운 희망을 갖게 해 주었다.


일본이 투항한 후 국민당 군대가 접수하기 전까지 각지의 한간은 장개석 및 국민당정부의 비호아래 모두 중경측의 “선견대(先遣隊)” 사령(司令) 등의 명의로 활동하였다. 당시 상해, 남경, 북평 등의 대도시에서는 다음과 같은 한 수의 민요가 유행하였다.


물에서 떠다니는 것은 땅에서 구르는 것만 못하고,

땅에서 구르는 것은 하늘을 나는 것만 못하고,

하늘을 나는 것은 지하에서 나오는 것만 못하고,

지하에서 나오는 것도 꼼짝 않고 앉아있는 것만 못하다.


꼼짝 않고 앉아있는 것은 바로 각지의 한간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들은 일시에 모습을 바꾸어 모두 ‘항일유공(抗日有功)’ 인물로 둔갑하였다. 장개석의 한간 이용정책의 비호아래 많은 한간이 중경정부의 접수원들과 의기투합하여 일본군 투항 후 남겨진 물자와 재산을 ‘보호’하고 강탈하였다.


남경정부의 주석 진공박(陳公博)은 일본의 투항 선언 이후 즉각 정권해산을 선포하였다. 상해시장 주불해(周佛海)는 일본의 투항 소식을 듣고 자신의 일신을 보전하기 위해 장개석의 상해행동총대장 임명 제의를 받아들였다. 주불해는 장개석의 임명을 받은 후 즉각 그의 심복인 나군강(羅君强), 양성화(楊惺華), 마기량(馬驥良) 등을 소집하여 상해를 보위할 계획을 하였다. 이들은 상해시 구역의 일본군과도 협력하여 상해탄(上海灘)의 통치자로 되었다. 주불해처럼 장개석의 위임을 받은 한간은 적지 않았다. 강소성 성장 임원도(任援道)는 남경선견군총사령으로 임명되었고, 절강성 성장 정묵촌(丁黙邨)은 절강성 군사전문인으로 임명되었다. 이와 같이 장개석은 한간을 이용함과 동시에 군권을 장악하고 있는 군 장령들을 휘하로 받아들였다. 이에 일본점령지역의 한간은 모두 중경측의 지시를 접수하여 도시 점령의 과정에서 장개석을 위해 공적을 세웠다.


마침내 미국의 대대적인 지원 하에 국민당 중앙군 부대가 중국 각지의 전략 요충지와 대·중도시를 잇따라 점령하였다. 1945년 8월 27일 중경 국민정부군의 전진지휘부사령 중국육군참모부장 중장 냉흔(冷欣) 휘하의 부대 1백 여 명이 남경에 진주하였다. 이후 제3방면군 총사령 상장 탕은백(湯恩伯)이 상해시 구역으로 진입하였고, 중국육군총사령 하응흠(何應欽)이 남경에 도착하였다. 9월9일 일본군 항복조인식이 남경 중앙군관학교 대례당에서 거행되었다. 군사위원장 장개석의 대리 하응흠에 대하여 일본측 지나파견군 총사령관 대장 오카무라(岡村寧次)가 항복문서에 조인하였다. 이후 국민당군은 신속히 화북, 화동의 전략요충지와 교통로를 장악하여 동북으로 진입하였다. 


9월 하순까지 국민당부대가 화중, 화동, 화북의 일본점령지역으로 진입한 후에 장개석은 공산당군을 저지하고 항전승리를 독점하고자 한 목적이 기본적으로 달성되었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그는 각지의 한간을 모두 체포하고, 적산(敵産) 접수에 착수하였다.


2. 한간재판의 과정


남경에 도착한 하응흠의 명령에 따라 9월 26일부터 남경헌병사령부와 남경경찰청은 한간숙청을 개시하여 주학창(周學昌, 남경시 시장), 호육곤(胡毓坤, 군위회 총참모장), 능소(凌霄, 해군부 부장), 이성오(李聖五, 교육부 부장), 매사평(梅思平, 실업부 부장) 등 23명을 체포하였다. 공군 제1로는 한간 진창조(陳昌祖), 요석구(姚錫九) 등 24명을 체포하였다. 9월 육군총부 제3방면군이 상해에서 양규일(楊揆一, 호북성 성장), 항치장(項致庄, 절강성 성장), 온종요(溫宗堯, 입법원 원장), 장국원(張國元, 사법원 원장), 장도(張韜, 최고법원 원장), 조숙옹(趙叔雍, 선전부 부장), 부식설(傅式說, 건설부 부장), 오송고(吳頌臯, 사법행정부 부장), 왕만운(汪曼云, 청향사무국 국장), 전대괴(錢大櫆, 중앙저비은행 행장) 등 39명을 체포하였고 이후에 잇따라 한간들이 법망에 걸려들었다. 10월 1일부터 제6전구(戰區)에 무한(武漢)의 군(軍)·헌(憲)·경(警)을 집중하여 21개 행동조를 편성하고 엽봉(葉蓬, 武漢 綏靖주임 겸 호북성 성장), 석성천(石星川, 漢口市 시장) 등 한간 100여 명을 체포하였다.


국민정부의 한간사냥은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장 대립의 지휘로 진행되었다. 군통국(軍統局)이라는 명칭보다는 남의사(藍衣社)로 더 잘 알려진 이 비밀경찰의 수령 대립은 장개석 정권의 강력한 지주였다. 그는 먼저 각지의 괴뢰군, 한간을 위무하여 일본군이 남겨놓은 기반과 물자를 지키도록 하고, 이후에 많은 스파이에 의해서 전쟁 중에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었던 한간들을 한 명도 놓치지 않고 철저히 잡아들이기 시작하였다.


각지에서 군통국의 한간 숙청 행동이 전개됨에 따라 적지 않은 소(小)한간도 걸려들었다. 1945년 10월 중순까지 군통이 각지에서 잡은 한간죄 혐의자는 4000여 명에 달하였다. 각 신문에서 한간 숙청에 관한 기사를 끊임없이 게재하여 한간재판 실행을 촉구하였다.


대중의 공개적인 한간재판 요구가 거세지자, 국공 양당은 화평건국을 도모하기 위한 10월10일의 ‘쌍십협정(雙十協定)’ 속에서도 간위(奸僞)문제에 관해 협의하였다. 당시 중국 동북부의 지배권을 놓고 대립해 있던 국공 양당은 이 회담을 통해 장래 협력 가능성을 보여주는 듯한 원칙들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한간 처리문제에서 보여주듯이 양당의 입장은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중공측에서는 한간 징계와 괴뢰군 해산을 제기하였고, 국민정부측에서는 원칙적으로 문제가 없지만 한간 징치를 법률에 따라 행해야 하며 괴뢰군 해산도 신중히 처리하여 현지의 안녕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다.


마침내 10월12일 하응흠은 주요 반역자 및 대일협력자의 체포를 완료하였고 군사반역자는 군법회의에서, 민간반역자는 사법재판에 부치기로 하였다고 한간재판의 근본원칙을 밝혔다. 또 입법원에서는 11월 15일 ‘징판한간조례수정안(懲辦漢奸條例修正案)’을 가결하였다. 그 내용을 보면, “긴급치죄조례(緊急治罪條例), 전시군형법, 중국형법 또는 한간의 심리에 관한 법령을 적용하여 한간을 처벌하고, 한간에 대해서는 죄의 경중에 따라 사형, 종신형, 또는 금고에 처하며, 국가의 평화소란에 대한 공모는 사형 또는 종신형에 처한다”고 하였다. 사법재판은 2심제로, 각 성 고등법원의 판결을 불복할 경우 남경의 최고법원에 상소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한간재판은 민국35년(1946) 4월 상순부터 수도(남경), 강소, 상해, 하북, 천진, 제남, 하문 기타 각 성의 각 고등법원에서 일제히 열렸다. 통계에 따르면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정식으로 항복한 이후 국민정부는 전국 각지에 한간체포령을 내려 1945년 말까지 한간죄 혐의자 4692명을 체포하였다. 그 가운데 각지의 고등법원으로 이송된 심리자 4291명, 군법기관으로 이송된 심리자 334명, 항공위원회로 이송된 심판자 24명, 병고(病故)로 구금된 자 43명이다. 체포된 한간 가운데 조여림(曹汝霖), 장종상(章宗祥) 등과 같이 잘못 체포된 경우에는 조사한 후 석방하였다.


3. 한간재판의 상황


1946년 4월 이후 중국 각 지역의 고등법원에서 일제히 한간재판이 열렸다.


먼저 남경의 수도고등법원에서 심리한 안건은 530 여 건이고 381건을 종결하였다. 그 중에 사형 14명, 무기징역 24명, 유기징역 265명이었다. 기타 각 성에서 사형 판결을 받은 한간은 약 342명이다. 그 가운데 상해 10명, 강소 13명, 절강 48명, 호북 32명, 광동 50명, 광서 23명, 산서 23명, 수원(綏遠) 19명, 하남 12명이다. 무기징역 판결을 받은 한간은 847명으로 그 가운데 절강 118명, 광동 188명, 광서 124명, 강소 47명, 상해 24명, 남경 24명, 호북 64명, 안휘 37명, 강서 46명이다. 유기징역 판결을 받은 한간 10066명, 벌금 14명이다.


1948년 『중화연감』통계에 의하면 1945년 11월에서 1947년 10월까지 전국 각 성(省)시(市)의 한간검찰안건은 45679안, 기소자 30185명, 불기소자 20055명, 기타 13323명이다. 재판판결을 받은 안건이 25155안, 그 가운데 사형 369명, 무기징역 979명, 유기징역 13570명, 벌금 14명이다.


분야별 한간재판의 상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분야

대표적 피고인

결과

南京政府 

요인

陳公博(남경정부주석),梁鴻志(전 유신정부주석,입법원장),

周佛海(행정원부원장 겸 재정부장),梅思平(내정부장),

林柏生(선전부장),陳璧君(왕조명부인,중앙감찰위원),繆斌(고시원 부원장),溫宗堯(사법원장),汪翰章(사회복리부장),顧大椿(양식부장),陳君慧(실업부장),吳頌皐(사법행정부장),褚民誼(전 외교부장,광동성장),彭年(전 사회복리부장),陳之碩(재정부장),

章克(전 선전부차장),傅式說(절강성장),陳則民(강소성장),韋乃論(선전부특종선전사장),朱白萍(입법원위원),陳允文(외교부차장),犬乙照(교통부차장),伍澄宇(입법법제위원회위원장),兪曉晨(정치보위부회계처부처장),黃香谷(사회보험국장),周隆庠(행정원비서장),江亢虎(고시원장),夏奇峰(심계부장)

사형 11명

무기징역 6명

유기징역 11명

주일대사· 

외교관

蔡培(주일본대사),呂宜文(주독일 만주국공사), 王允卿(주일본 만주국대사),徐良(주일본대사),陳濟成(주만주국대사),李芳(주독일대사),吳凱聲(외교부 차장, 주 이탈리아대사),李聖五(교육부장 겸 외교부장)

사형 3명

무기징역 1명

유기징역 4명

 

경제한간

朱博泉(상해은행공회이사장,중앙저비은행참사),錢大櫆(중앙저비은행 부총재),李祖萊(중국은행지배인),袁履登(전국상업통제총회이사),鄭洪年(화중철도총재),林康侯(상통회이사 겸 비서

장),唐壽民(교통은행사장),孫曜東(부흥은행총경리),馬驥良(중앙저비은행총무처부처장),徐鐵珊(남양연초공사지배인),王五權(항주시상회회장),苗蘭亭(제남시일화상공협회장)

사형 1명

무기징역 2명

유기징역 8명

금고 1명

화중·화남 

지방한간

周學昌(남경특별시장),蘇理平(남경시정부비서장),周貫虹(강서성교육청장),張兆生(강소성행정독찰전원),徐維震(상해고등법원장),兪紹瀛(강소성재정청비서),蔡羹舜(상해시재정국부국장),張德欽(절강성재정청장),吳廣祺(수도경찰총감서비서),徐鳳翔(강서성보안처부처장),石星川(한구시장),李鬼賢(하문시장),崔郭景(홍콩정청경찰원),王明遷(상해일본헌병대통역),金蓮生(상해일본헌병대통역),吳泉根(통역),喬攝林(통역),張效業(일본헌병대밀정),王廣元(남경보안중대장),

사형 7명

무기징역 1명

유기징역 10명

금고 1명

화북한간

王克敏(1·4대 화북정무위원회위원장, 병사),王蔭泰(5대화북정무위원회위원장),王揖唐(2대위원장),朱深(3대위원장,병사),張棣生(북평대리원장,자살),殷汝耕(冀東정부주석),汪時璟(중국연합은행총재),齊燮元(치안군총사령),張仲直(화북정무위원회비서장),馬彛德(하북고등법원장), 季棟(하북고등법원장),戴世培(수도지방법원장),錢森(수도고등법원검찰장),唐仰杜(산동성장),劉玉書(북평시시장),姚作賓(청도시장),潘毓桂(천진특별시장),程鎔(제남시장),池宗墨(冀東정부비서장),羅錦(화북정무위원회工務總署督辦),萬兆芝(농무총서합작국장 겸 화북금연총국장)

병사 2명

자살 1명

미상 3명

사형 7명

무기징역 2명

유기징역 2명

무기금고 1명

금고 2명

군사한간

葉蓬(육군부장,호북성장),楊揆一(군사참의원원장),胡毓坤(군사위원회총참모장 겸 군령부장), 凌霄(해군부장),項致莊(참모차장),張幼雲(산동성장),瀋寶鎔(육군부차장),李慧濟(해군부차장), 李證一(수도경비사령 겸 경찰총감)

모두 총살형

유기징역 1명

문화한간

周作人(화북정무위원회교육총서독판),文元模(화북정무위원회위원),沈嗣良(상해 성요하네교장),錢稻孫(북경대학교장),羅慶山, 溥侗(안휘대학교장),黃農(주독일만주국공사관 발행‘교성보’편집인),許錫慶(중앙전신사 총편집),林谷(화남일보 사장),葉雪松(중화일보 영업주임),吳益之(상해시교육회 이사),金雄白(남경중보와 평보 사장),蕭劍靑(중화화보 주편),蕭浪萍(중화화보 편집),陳日平(국민신보 사장),陳彬龢(신보 사장),吳玥(신보 총주필),德悟(정안사 주지),密迦(정안사 사감)

병사 1명

미상 3명

유기징역 11명

무기징역 2명


여기에서 보면 남경정부의 중요 인물이나 어떤 식으로든 일본과 연계된 인물의 경우 대부분 사형이나 무기징역 등의 극형을 받았다. 군사한간의 경우에는 거의 예외 없이 총살형이었다. 상대적으로 경제계나 문화계의 인물은 가벼운 형벌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남경정부의 두 인물에 대한 공판 내용을 보자.


남경정부 주석 진공박에 대한 공판은 1946년 4월5일부터 소주(蘇州)의 강소고등법원에서 열렸다. 법원에서는 진공박의 필사적인 항변을 물리치고 10개항에 걸친 반역행위를 유죄로 인정하여 “피고 진공박을 사형에 처하고 종신토록 공권을 박탈하며 가족의 생계에 필요한 부분을 제외한 전 재산을 몰수한다”고 선고하였다. 판결이유서에 의하면 피고는 남경정부 주석 고(故) 왕조명과 협력하여 남경정부를 수립하고 중국 국민의 이익에 반하는 행위를 하였으며 남경정부 최고 수뇌부의 지위에 있으면서 汪 주석의 반역행위에 협력한 점이 유죄로 인정된다는 것이다. 또 일본군 점령지역에서 사정이 허락하는 한 중국 국민의 이익을 위해 노력했다는 피고의 주장을 각하시키고, 피고는 전면적으로 일본의 중국침략정책을 원조하였다는 죄상을 통렬히 지적하면서 극형선고의 이유를 분명히 하였다.


1946년 4월 15일부터는 광동성장 저민의(褚民誼)에 대한 재판을 강소고등법원에서 시작하였다. 그는 일찍이 汪 정부의 주일대사와 외교부장을 지낸 사람으로 일본인들에게 가장 친숙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저민의는 “중경은 무장항일, 남경정부는 화평항일로 항일공작에는 변함이 없었다. 남경정부의 정권행사지역은 일본의 손으로부터 되찾은 곳이나 그동안 남경정부는 여기서 인민을 구제하고 전력을 키워 왔으며 기회를 봐 일본에 대항하려 하고 있었으므로 결코 반역행위는 아니었다”고 단정하였다. 그러나 최고법원에서는 “피고 저민의는 외교부장 당시 영·미에 대해 선전포고를 발표한 후 일본과 중일동맹조약을 체결하였으며, 도쿄에서 개최된 대동아회의에 참가하여 영·미 격멸과 중앙정부(중경) 격파 등을 담은 주장을 폈다. 적과 내통하여 모반한 죄가 현저하고 중대하므로 징판한간조례 제2조 제1항, 제8조 제1항, 제9조 제1항, 형법 제2조 제2항, 제28조, 제37조 제1항에 따라 사형에 처하고 종신 공권박탈, 가족의 생계비를 제외한 전 재산 몰수를 골자로 하는 판결을 내린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국민정부의 재판은 형식에 있어 국가가 기소권을 독점하고 피고를 관권의 힘으로 체포·기소해 재판권을 행사, 판결을 내려 형을 집행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실제상황이 반드시 이렇게 정비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즉 종전 후 중경으로 군통국(남의사) 국장 대립이 들어와서 미리 준비해 둔 블랙 리스트에 근거해 군대의 손으로 ‘한간 사냥’을 실행했다. 그리고 직간접으로 조금이라도 일본이나 汪정부와 관계가 있었던 사람은 가차 없이 투옥했다.


일본군 점령지역의 省, 縣 이하 각급 정부, 관청, 군대, 경찰, 학교, 각종 단체 등 모든 조직에는 처음부터 중경의 특무공작원이 잠입해 있었기 때문에 중경에서는 이미 ‘한간’의 동정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알고 있었다. 체포된 피고는 충분한 조사도 받지 않고 군인은 군사법정으로, 민간인은 법원으로 보내졌다. 재판 자체도 형식적인 것으로 급속히 처형이 집행되었다.


남경정부 주석 진공박에 대해서는 공판이 한 번 밖에 열리지 않았고, 한 주 후에 사형판결이 내려졌다. 저민의도 공판은 한 번이었고 한 주 후에 사형판결을 받았으며, 임백생과 매사평도 공판 한 번으로 6일 후에 사형 판결을 받았다. 양홍지는 공판 두 번, 공판 개시 후 16일만에 사형이 확정되어 곧바로 총살되었다. 군사관련 한간은 더 간단하게 국방부 군법사 명령만으로 총살되었다. 전부터 중경과 내통하고 있던 행정원 부원장 주불해의 무리들조차 사형 또는 중형을 받았다. 왕정위 정부 인사들에 대한 깊은 증오로 인하여 각지에서는 피비린내 나는 ‘대량 도살’이 행해졌다.


한간재판 개시에 앞서 장개석이 “행위를 논하고, 직분을 묻지 않는다”고 재판의 기본원칙을 지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철저하게 지켜지지 않았다. 법정은 피고의 행위를 철저하게 조사하지도 않고 간단하게 ‘우두머리는 전부 사형’식으로 행위보다도 지위의 상하에 따라 형량의 경중이 결정되었다.


중국국민정부의 처리한간조례, 징치한간조례(處理漢奸條例, 懲治漢奸條例)에서도 “처벌대상인물은 관직원, 대학전문학교장 및 그 중요직원, 금융·산업기관의 이사급, 신문사의 편집장 및 총무주임급, 영화공사 및 방송국 및 기타 선전기관의 이사·중요직원, 괴뢰정당, 국민참정회 조직 내지 유사한 기관에 관계한 중요인물을 포함한다”고 하여 지위에 따른 처벌규정을 두고 있다. 이들은 반역죄에 의해 처단하지만, 재직 중 일찍이 抗敵운동을 위해 활동한 것이 증명되면 유리한 해석조건이 된다고 하였다. 일본의 군·정기관, 첩보기관을 위해 복무한 자도 반역자로 하였다.


 그런데 공판 과정에서 금전이 오고간 경우도 많았다. 체포에 임했던 군경과 재판관, 검찰관들 중에는 돈의 다과에 따라 죄의 경중을 결정하는 탐관오리가 많았다는 것도 간과할 수 없다. 항간에는 돈만 있으면 도리가 통하고 구제받지만, 돈이 없으면 구제받을 수 없다는 말이 유행했다. 일본군 항복 후 중경 지하공작원이 표면으로 튀어나와 일본인과 중국인의 재산을 멋대로 접수하고 혹은 강탈해 사복을 채우고, 한간에 대해서도 독단적으로 처분했다. 또 소위 대일협력자라고 해도 그들 중에는 화평건국의 신념을 가진 자도 있었고, 또 ‘위장협력’한 자, 이익만을 목적으로 한 자 등 그 내용은 천차만별이었는데, 이에 대한 정확한 조사가 없이 단시일에 판정을 내리고 처벌하였다.


4. 글을 맺으며


장개석 국민정부의 한간재판은 역사적 심판을 통해 진실을 밝히고 과거를 청산한다는 측면보다는 권력 확장을 도모하기 위한 야심이 빚어낸 결과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초기에는 공산당의 세력 확대를 저지하기 위해 각지의 한간을 이용하였고, 그 목적이 어느 정도 달성된 후에는 가차 없이 한간에 대한 징치를 실행하였다. 친일행위와 상황에 대한 정확한 조사와 고려가 없이 일본이나 왕정위정부와 관계된 지위에 있을 경우 재판을 통해 형이 집행되었다. 법 조항에 따라 판결을 내렸지만, 짧은 시간에 급조된 측면이 강하고 그 과정에서 뇌물성 거래가 오고 간 측면도 간과할 수 없는 문제이다.


이에 반해 중국 공산당 측의 재판은 실제로 직접 피해자였던 일반 인민이 한간을 고발하여 인민재판에 부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인민에 대한 교육적 의의를 갖거나 혹은 대중의 복리와 관계된 문제이기 때문에 공개심리제도를 취했다. 공개심리라는 형태를 통하여 인민은 마음껏 울분을 정화시키고, 또한 한간을 처벌할 때도 유연성을 보여 이용가치가 있는 피고는 살려서 활용하였다. 


이러한 상황이 이후 국공내전의 승패에도 크게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과거청산에 대한 장개석 국민당정부의 불완전성은 전범재판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1949년 1월까지 중국 전범재판 군사법정에서는 전국 2200여 안을 수리하여 사형 판결 145명, 유기 혹은 무기징역 400 여 명 정도, 기타 대부분은 무죄로 송환되었는데, 내전이라는 특정한 환경에서 진행되어 최후의 재판 결정이 대부분 상징적 의미로 되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일본군의 중국에서의 전쟁범죄 전모를 드러내지 못하였다.


정권의 안정을 위해 무자비한 한간 처벌을 감행했던 국민당정부는 중국인에 대한 직접 가해자인 전범의 처리문제와 전쟁범죄의 전모를 밝히는 부분에서는 오히려 관용을 베푸는 모순을 드러냈던 것이다.


친일파 청산의 문제는 역사를 바로세우기 위한 작업이다. 역사적 진실을 외면한 채 또 다른 정권의 확대를 위해 정치적으로 이용해서는 안 될 중요한 문제이다.


참고문헌


마스이 야스이치 지음, 정운현 옮김, 『중국·대만 친일파재판사』, 한울, 1995.

韓文寧·馮春龍 著, 見證 1945『日本戰犯審判』,  南京出版社, 2005.

王曉華 著, 見證 1945『漢奸大審判』, 南京出版社, 2005.

中央黨案館,『中共中央文件選集』15(1945), 中共中央黨校出版社, 1990.

黃友崗 著, 『中國人民解放戰爭史』, 黨案出版社, 1992. 당안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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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제한(以漢制漢)과 한간(漢奸), 섭정 다이곤(多爾袞)

이길상


(3) 한간(漢奸)과 이한제한(以漢制漢)


중국에서는 왕조의 고체를 혁명이라고 하고, 선양(禪讓)이라는 형식을 빌리는 것이 통례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많은 인명이 희생되고 유혈의 대가를 치루고서야 마무리 될 수 있었다. 그런데 단순한 왕조교체의 범주를 넘어서, 이민족인 그것도 오랑캐라고 멸시했던 만주족이 큰 무리 없이 이런 혁명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인들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중국에서 적에게 빌붙어 나라를 그르치게 하는 매국노(賣國奴)를 한간(漢奸)이라 한다. 성리학을 관학으로 삼았던 명나라가 망할 당시, 막상 숭정제를 따라 자결한 사람은 환관 한 사람뿐이었으나, 이자성이 자금성을 점거했을 때 궁녀200 여명을 비롯해서 40 여명의 관료들이 자결하여 고고한 지조를 지키고자 했다.


그러나 황후의 친정아버지를 비롯해서 수많은 관료들은 이자성 부하들의 흙발에 체이고 갖은 수모를 당하면서도, 얼굴에는 비굴한 웃음기를 머금고 목숨만은 보전코자 했으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만주족이 들어오자, 이들을 맞이하기 위해 향을 사르고, 충성을 맹세하고, 만세를 불렀다.


어떻게 보면 이들 모두가 한간(漢奸)들이다. 이런 형편없는 무리들을 만주족은 돈이면 만사가 해결된다고 믿고 노예처럼 부릴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 빠져든다는 것은 깊은 수렁에 빠지는 것과 같아서, 세월이 지나고 서로가 흉허물 없이 지내게 되었을 때는 사정이 달라진다. 진정한 애국의 길을 아는 사람은, 혁명 초기의 서슬 푸른 예봉(銳鋒)은 일단 피하고 본다는 음흉하고도 간사한 계산을 많은 중국인들은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연후 사회가 안정되고 정의가 바로 서게 되면, 이들은 고집을 부리기 시작한다. 아무리 달래고 얼래도 소신을 굽히지 않는다. 이런 것을 노회(老獪)라고 하는데, 그래서 청나라가 망했을 때 만주족은 소리없이 사라진 반면, 중국은 다시 중국으로 남아 있었다.


이 시기 대표적인 한간으로 매도된 사람이 오삼계와 오삼계의 옛 상관이었던 홍승주, 그리고 명나라의 병부좌시랑으로 있다가 청조에서 다시 내각 수보를 지낸 김지준(金之俊) 등을 꼽을 수 있다.


오삼계가 조국을 배반하고 청나라에 붙게 된 사실에 대해서, 진진원(陳圓圓)이라는 기생과의 사랑 때문이라고도 하고, 옛 상관이었던 홍승주의 권유 때문이라고도 하는데, 특히 기생과의 사랑 이야기는 후대에 윤색 가필되어 흥미로운 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애첩 진랑(陳娘)을 베이징에 두고 전선으로 떠났던 오삼계는 오매불망 그녀를 잊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항복을 권유하는 아버지의 편지를 받고 귀순하기로 결심한 오삼계가, 베이징 근교에 이르렀을 때, 그렇게도 보곺았던 진랑이 이미 이자성의 사람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과 충격을 받고 산해관으로 되돌아 가 청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크게는 나라의 운명이, 작게는 가족의 안위가 달려있었고, 여기에 각기 사정이 다른 많은 부하를 거느린 상황에서, 개인적인 사랑놀음 하나만으로 그렇게 되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다만 뭇 사나이들의 애간장을 녹였던 진진원이라는 기생이 오삼계의 애첩(愛妾)이었던 것은 사실이라고 한다.


홍승주라는 사람은 복건성(福建省/푸젠) 출신의 문관이다. 그러면서도 뛰어난 군략가로서, 이자성 토벌에 큰 공을 세운 것이 인정 되어, 요동지방의 총수로 임명되었던 인물이다. 그런데 당시의 요동 총수란, 전쟁에 이기면 시기를 받아 목숨을 잃고, 지면 문책을 받아 처형되는 죽음의 자리였다.


홍승주 역시 오삼계 등 부하 장졸을 이끌고 산해관 동쪽에서 청 태종과 싸우다가 포로가 되었고, 청 태종은 그를 지나칠 정도로 우대하여 마음을 돌리는데 성공하였다고 하는데, 이에 관한 일화도 수 없이 전해 오고 있지만, 그 진위를 알 수는 없다. 다만 그는 반청세력의 토벌에 앞장서고, 청조를 위해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김지준은 명나라에 출사했다가, 다시 이자성에게 벼슬하고, 그러다가 청이 베이징에 들어 왔을 때, 다이곤에게 10가지 조건을 제시하고 그 조건이 받아들여지면 기꺼이 협조하겠다는 의사를 밝혀 기용되고 내각의 수보가 된 사람이다.


이가 제시했다는 열 가지 조건이란 그야 말로 당시로서는 별 소용없는 수수께끼 같은 이런 것들이었다.


⑴ 남자는 청나라 조정에 따르지만 여자는 따르지 않는다.

⑵ 산 사람은 따르되 죽은 사람은 따르지 않는다.

⑶ 남편은 따르되 아내는 따르지 않는다.

⑷ 관료는 따르되 아전은 따르지 않는다.

⑸ 노인은 따르되 젊은이는 따르지 않는다.

⑹ 유학자는 따르되 승려나 도사는 따르지 않는다.

⑺ 기생은 따르되 광대나 배우는 따르지 않는다.

⑻ 벼슬길은 따르되 혼인은 그전대로 한다.

⑼ 나라 이름은 따르되 벼슬 이름은 그전대로 한다.

⑽ 부역이나 납세는 따르되 말이나 글은 그전대로 둔다........


얼핏 보기에 이것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고 보여질 수 있다 그래서 다이곤은 이를 기꺼이 승낙하고 그를 내각 수보로 임명했다. 내각의 수보가 된 김지준은 다시 왕공은 수도를 벗어날 수 없고, 기인(旗人)은 상업에 종사할 수 없으며, 환관들이 궁성 밖으로 나오면 참형에 처한다는 법령을 만들었다. 이런 것이 당시로서는 아무 문제될 것이 없었으나, 세월이 지나고 나서 보면 여기에는 엄청난 함정이 도사리고 있었다.


열 가지를 다시 요약해 보면, 이런 결론이 나온다. 청나라 조정에 따르는 것은 남자에 한하며, 그것도 가장이나 지식계층 및 고급관리 등 책임 있는 사람들은 한간이 되어 기꺼이 따르겠지만, 반면 여자들과 젊은이들, 아전과 승려 및 도사들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광대나 배우, 죽은 사람은 따르지 않겠다는 것은 중국인들의 오락과 풍속과 장례 및 묘지에 관한 중국적인 문화전통에 대해서는 어떤 간섭도 하지 말라는 것이다.


결국 이 열 가지 조건이 받아짐에 따라, 청나라 조정에서는 남자들에게 변발을 강요했듯이 여자들에게도 전족을 금지시켰으나 이는 소용이 없었다. 여자들은 따르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장례나 묘지를 옛 습관대로 지키게 되고, 이로써 중국인들은 조상에 대한 불효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아전이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관(官)과 이(吏)가 하늘과 땅 만큼이나 차이가 있는 중국사회지만, 말단 행정을 담당했던 아전이란 대대로 세습하면서 그 고장의 터줏대감으로 행세하고 있었던 것을 그대로 인정한다는 것으로, 황제는 이들을 파면하거나 새로 임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황제의 명령은 그가 임명한 관(官)에서 그치고, 실제 지방 행정의 담당자인 이들 아전들에게는 먹혀들 수가 없었다.


또한 젊은 사람들은 병역의 의무에서 벗어났으며, 오랑캐가 싫은 이름 있는 지사나 학자 및 문인들은 승려나 도사가 되어 현실을 도피할 수 있는 길이 열였고, 연극, 예술, 문자, 노래 등도 간섭에서 벗어나, 정신적인 자유와 전통, 그리고 향락과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여유와 공간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모든 것이 당장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70년이라는 세월을 지나 옹정·건륭연간에 이르러, 사정은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이와 별도로 김지준이 내각수보가 되어 만들었다는 "왕공은 도성을 벗어날 수 없고,....기인들은 상업에 종사할 수 없다"는 등의 당시로서는 별 의미 없었던 이런 것들이, 천하의 악법이 되어 만주인들에게 족쇄를 채우게 되자, 땅을 치고 후회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조법(祖法/조상이 만든 법)은 한자도 고칠 수 없다는 것이 또한 그들의 법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들은 앞으로 좀 더 이야기할 기회가 있기에, 그때 맞추어 하기로 하고 한간들의 이야기를 좀 더 따라가 보자.


청의 중국지배에 저항하는 세력은 세 가지였다.

첫째가 이자성의 잔당들이였고,

둘째가 이자성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던 장헌충의 무리들로서 이들은 사천성을 중심으로 아직도 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강남의 곳곳에는 명의 황족을 모시고 18년간 줄기차게 부흥운동을 일으키고 있었는데 이들 전부를 남명(南明)이라한다.


다이곤은 이자성을 토벌하기 위해 즉각 정벌군을 편성했다. 청군의 추격을 피해 섬서(陝西/산씨)로 줄 행낭을 쳤던 이자성의 60만 대군은 더 이상 달아날 곳이 없게 되자, 산속을 헤매던 끝에 이자성은 농군에게 붙들려 살해되고 그 부하들은 대부분 항복하였다. 이로써 순치 2년(1645) 이자성의 반란은 매듭을 지었다.


안휘(安徽/안후이), 호북(湖北/후베이), 사천(四川/쓰촨)을 휩쓸던 장헌충은 1644년 이자성이 베이징으로 들어가 대순황제가 되었을 때, 사천의 성도(成都/청두)에서 대서국(大西國)을 세우고 스스로 황제를 잠칭하고 있다가 청의 토벌군이 밀어 닥치자 피에 주린 흡혈귀 마냥 살육과 약탈을 거침없이 자행하는 광란(狂亂)을 펼쳤다.


그는 이곳 사람들이 아무리 깊은 산중에 숨어 들어가도 그 부하들을 시켜 찾아내게 하여 죽인 후 그 증거로 손을 잘라오게 하였는데, 많이 잘라 온 사람에게는 높은 벼슬을 주고, 아예 사람의 씨를 말리기로 작정하였다. 적군인 오랑캐에게 단 한 사람도 남겨줄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런가 하면 술을 좋아했던 그는 친구들이 찾아오면 융숭히 대접하고, 돌아갈 때는 많은 선물을 주어 보내고 나서는, 그의 부하들을 시켜 돌아가는 길목을 지켰다가 목을 잘라오게 하여, 그 잘린 목을 옆에 두고 술친구로 삼았다.


이런 참혹한 양상이 지금까지 전해진 것은, 이 보다 1세기 후 편찬된 촉벽(蜀碧)이란 책의 내용에서 볼 수 있다고 하는데, 흥미 본위의 많은 픽션이 가미되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전부를 사실이라고 할 수도 없겠고, 그렇다고 전혀 허무맹랑한 낭설이라고도 단정할 수 없기에, 정신 도착 치고는 너무나 무서운 인간 종말의 광기(狂氣)였다는 말 외에 달리 설명할 표현이 없다.


사천에 청의 토벌군이 도착한 것은 순치 3년(1646)말, 장헌충은 토벌군과 싸우다가 전사하고, 그 부하들은 운남(雲南/윈난) 방면으로 달아나 사천지방이 청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나 ,운남으로 도망친 그 잔당들은 그 후에도 끈질기게 저항하였다.


베이징에서 숭정제가 자결했다는 소식이 명의 배도(陪都/준수도) 난징에 전해지자, 신종의 손자가 되는 복왕(이자성에게 피살되었던 복왕의 아들)이 사가법(史可法) 등에게 옹립되어 연호를 홍광(弘光)으로 정하고 명을 계승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이를 둘러싼 지배계급 간에 분란이 일어나고, 수하 장졸 역시 오합지졸에 불과했다.


순치 2년(1645) 5월 15일, 난징은 함락되고 복왕은 도망치다가 난군의 손에 잡혀 죽고, 이곳의 문무백관들은 머리를 갂고 변발을 하였다. 이때 토벌군의 총수는 한간(漢奸) 홍승주였다. 최소한 강남지역이 남아 지키고자 했던 명나라 구신(舊臣)들의 소박한 꿈도, 결국은 또 다른 명나라의 옛 거물에게 짓밟히고 말았다.


그 후로도 명의 부흥운동은 한 동안 계속되어, 명나라의 후손이었던 당왕(唐王)은 복주(福州/푸저우)에서, 계왕(桂王)은 광동(廣東/광둥)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부흥을 도모했지만, 모두가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 그 중에서 정성공(鄭成功:1624∼62)·장황언(張煌言:1620∼64)등은 해상세력을 동원하여 청군(淸軍)과 해전을 벌였으며, 자주 본토의 내륙 깊숙이 쳐들어  가기도 하였지만, 역시 이곳 지리에 밝고 해전에도 익숙했던 홍승주가, 난징에 진을 치고 마치 그물 코를 잡아당기듯 속속들이 이들을 차례대로 토벌했다.


1662년 홍승주에게 밀린 계왕(桂王)은 운남(雲南/윈난)성의 곤명(昆明/쿤밍)까지 밀려났다가, 그곳에서 이자성에게 붙들려 살해되자, 18년간 계속되었던 부흥운동도 막을 내렸고 청의 중국지배는 서서히 자리를 잡았다. 이제 청으로서는 사냥이 끝났으니, 사냥개를 잡아 삶을 일만 남았다.


국역조선왕조실록(인조 22년, 1645년 5월 23일)

《 인조 045 22/05/23(경술) / 세자가 금군 홍계립을 보내어 자신의 주변 상황을 수서로 치계하다 》

세자가 금군(禁軍) 홍계립(洪繼立)을 보내어 수서(手書)로 치계 하였다.


“구왕(九王/다이곤) 이하 여러 진영은 유적을 대파시킨 후에 이미 승승장구의 기세를 얻은 데다, 또 오삼계가 미리 전로(前路)의 주현(州縣)에 문서를 돌려서 모두구왕을 맞아 항복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구왕의 군대가 무령현(撫寧縣)에 도착하자 그 성중의 백성들이 5리쯤 되는 길을 미리 마중 나와 기다렸다가 구왕을 영접하여 성문을 열고 들어가기를 청하니, 구왕이 그 백성들을 어루만져 효유하고, 또 고시문(告示文)한 장을 주어 각기 자기 생업에 편히 종사하도록 타일렀습니다. 이때 구왕은 성 안에 들어가지 않고 현의 서쪽으로 10리쯤 되는 곳에 도착하여 진을 치고 묵었습니다.


다음날에는 일찍 출발하여 영평(永平)의 큰 길을 경유하지 않고, 곧바로 현의 서쪽 아랫길을 향하여 갔으니, 이는 대개 유적이 왔다간 후로 연도에 풀 한 포기도 남아 있지 않았으므로, 아랫길이 조금 멀기는 하지만 풀이 있어 말을 먹이기에 편리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날 저녁에는 창려현(昌黎縣)에 도착하여 묵었습니다.


27일에는 영평부(永平府) 난하(灡河)의 하류인 난주(?州)의 남쪽에서 묵었고, 28일에는 개평위(開平衛)의 성 서쪽으로 10리쯤 되는 곳에 도착하였고, 29일에는 옥전현(玉田縣) 앞에 도착하였으며, 30일에는 계주(계州)의 남쪽으로 20리쯤 되는 지역에 도착하여 묵었습니다. 5월 1일에는 통주강(通州江)의 얕은 여울을 건너, 저녁에 통주의 서쪽으로 20리쯤 되는 지역에 이르러 묵었습니다. 하루 평균 행군이 1백 20∼30리 정도가 됩니다.


지난번 계주에 있을 적에 유적 1백여인이 와서 항복하며 말하기를 ‘산해관에서 패배한 후에, 그들은 청나라 군대가 쫓아올 줄 알고 황급히 재화(財貨)와 부녀자들을 수탈한 다음, 29일 저녁에 화약을 터뜨려 궁전을 불태우고 성문으로 도망쳐 나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구왕이 여러 진영의 정예한 군졸들을 뽑아 팔왕(八王)과 십왕(十王) 및 오삼계 등에게 주어 그들을 급히 추격하도록 하고 구왕도 이틀 길을 하루로 당겨서 급히 전진하였기 때문에, 일행의 짐 보따리가 미처 통주에 도착하지 못하였습니다. 신(臣)은 그런대로 잘 먹고 지냈습니다마는, 시강원 이하는 모두 이틀 동안이나 밥을 굶었습니다.


2일에는 일찍 출발하여 황성(皇城)을 둘러 나갈 적에 구왕이 황제에게서 지난번에 받은 황색 의장(儀仗)을 전도(前導)로 삼고, 가마를 타고서 북을 치고 피리를 불며 갔습니다. 그리하여 조양문(朝陽門)으로부터 들어가 대궐문 근처에 이르니, 금의위(錦衣衛)의 관원이 황제의 황옥교(黃屋轎)와 의장(儀仗)으로 구왕을 맞이하였습니다. 구왕은 황옥교를 타고 의장을 앞길에 배열하고서,장안문(長安門)으로부터 들어가, 무영전(武英殿)에 당도하여서는 황옥교에서 내려걸상에 올라 앉아, 금과(金瓜)와 옥절(玉節)을 궁전 앞에 나열시켰습니다.


신은 이때 구왕의 참모관과 함께 동서로 나누어 앉아 있었습니다. 환관을 불러 유적의 형세와 황성이 함락된 이유를 물으니, 환관이 대답하기를 ‘유적이 2월 20일경부터 황성을 포위하여 대포(大砲)와 화전(火箭)으로 성중을 공략해 들어왔다. 그런데 성을 지키던 군졸들은 여러 달 동안 군량을 공급 받지못하여 모두 싸울 마음이 없어져서 밖으로 흩어져 나가 있다가, 미처 성을 들어오지도 못했기 때문에, 한 사람이 4∼5첩(堞)씩을 지키다가 도저히 버틸 수 없어 모두 성을버리고 달아났다. 그러자 적이 마침내 성을 타고 넘어오니, 황제와 황후는 스스로 목매어 죽고, 태자와 황자(皇子)인 세 왕은 그들에게 붙잡혔다. 그후 황성의 백성들이 황제와 황후를 황성에서 1백 리쯤 떨어진 북쪽 진산(鎭山)에 장사 지냈다.’ 하였습니다.


 적이 이미 성에 들어와서는 국호를 대순(大順)이라하고, 원년의 연호를 영창(永昌)이라 하고서 황제라 자칭 한 지 42일 동안에 인심을수습하기 위해 침탈하는 행위를 금지했었는데, 산해관에서 패배하여 돌아온 이후로 성중의 재물과 보화를 모조리 수탈하여 가지고 가면서 화약으로 궁전과 여러 성문을 불태웠으나, 다만 인명은 다치지 않았습니다.


구왕이 황성에 들어가자, 황성의 백성들이 향을 피우고 두 손을 마주 잡고서 경의를 표하였으며, 심지어는 ‘만세’를 부르는 자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중의 크고 작은 관원(官員) 및 환관 7천∼8천 명이 또한 모두 명함을 내밀고 와서 배알하였습니다. 궁전이 모두 불탔는데, 오직 무영전만이 우뚝 하게 홀로 남아 있었고, 내금천(內禁川)·외금천(外禁川)의 옥석교(玉石橋)도 파손된 데 없이 완연하게 그대로 있었습니다. 불타버린 집에서 나온 제비들은 높게 혹은 낮게 하늘을 까맣게 가리어 날으니, ‘봄 제비가  숲에 둥우리를 튼다[春燕巢林]’는말이 참으로 헛 말이 아닙니다.


구왕이 무영전 앞 행랑 채에 신의 처소를 정해 주었는데, 공간이 비좁고 사람은 많으므로, 구왕에게 말하여 무영전 동쪽 방을 얻고 나니, 전보다는 조금 넓고 또 침상·탁자·병기·의장 등도 있습니다.


구왕이 황성에 들어온 후로는 장수 용골대(龍骨大)등을 시켜 성문을 관장하게 하여, 청나라 사람과 우리 나라 사람을 출입하지 못하도록 엄금하기 때문에, 청나라 사람과 신을 따르던 일행의 인마(人馬)들이 모두 성 밖에 있습니다. 그런데 마침 청나라 사람이 심양으로 돌아가는 인편을 만나, 대단히 바쁘고 황급한 가운데 대충 적어서 치계를 드리니, 황송함을 감당치 못하겠습니다.”


출처:알기 쉬운 역사 이야기  |  글쓴이 : 이길상 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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汉奸


漢奸是一個負面意義的語彙。原意指「背叛汉民族或出卖汉族国家利益的漢人」,但現代泛指出賣中國國家利益的人,相當於通敵或叛國的漢人。「漢奸」在《辭海》的解釋是「原指漢族的敗類,現泛指中華民族中投靠外國侵略者,甘心受其驅使,出賣祖國利益的人」;在《現代漢語詞典》的解釋是「原指漢族的敗類,後泛指投靠侵略者、出賣國家民族利益的中華民族的敗類」。


原有典故

在二十五史中,只有清史稿有「漢奸」一詞。「漢奸」一詞原至清朝初年,其原意與現在使用方式相差甚大。馬家輝講述根據日本神戶大學教授王柯的考証,清初有苗族人反抗改土歸流政策,竟然有漢人(已經入流而不是由土司管治)與這些苗人聯手,因此被滿清皇帝稱為「漢奸」[1]。因此,反抗(外族)政府政策的漢人就是「漢奸」。


在清史稿卷307有以下一節,『(乾隆)十二年,授雲貴總督。疏言:「苗、裸種類雖殊,皆具人心。如果撫馭得宜,自不至激成事變。臣嚴飭苗疆文武,毋許私收濫派,並禁胥役滋擾。至苗民為亂,往往由漢奸勾結。臣飭有司稽察捕治。」又疏言:「貴州思州諸府與湖南相接,今有辰、沅饑民百餘入貴州境采蕨而食。臣已飭貴州布政使、糧驛道以公使銀賑濟。如有續至,一體散給安置。」』[2]。


抗戰前後使用

語彙後來甚至成為法律體系的一部分,中華民國國民政府訂有《懲治漢奸條例》(1938年) 、《處理漢奸條例》(1945年),以此當作打擊政敵(主要是汪精衛的南京政府)的主要工具。中華人民共和國建國以後,中國共產黨也曾經發布《關於沒收戰犯、漢奸、官僚資本家及反革命份子財產的指示》(1951年),以此對特定人士進行政治鬥爭。


有人认为汉奸这个词有大汉族主义,所以提议改叫华奸,或者直呼卖国贼。


一個有關汉奸这个词的提法是:在抗日战争期间,华侨陈嘉庚向重庆国民政府提议:“敌未退出我国土即言和当以汉奸国贼论”,这个提议由国民参政会第二次大会通过,被鄒韜奮稱為“古今中外最伟大的一个提案


汉奸标准的界定

某人是否是汉奸在不同团体,不同个人的看法中很很大差别,有时漢奸一詞更多地用來作爲政治鬥爭的工具,而缺乏明確的標準。比如汪精衛普遍被認爲是漢奸,因爲他受到日本的支持,並且承認滿洲國獨立。可是在此之前,以蘇聯作後盾的中國共產黨也早已表示支持外蒙古人民共和國擺脫中華民國的統治。把中共看作漢奸集團的人卻少得多。從客觀事實上看,當時日本-滿洲帝國-汪氏政權和蘇聯-蒙古人民共和國-中共構成一對近似三角形。之所以汪氏集團成員被定性為漢奸,而中共沒有,更多的原因在於前者失敗滅亡,而中共成功奪取了中國大陸的統治權。


至於相關人士對這個概念的主要批評,除了指出這個概念所隱含的「單一漢民族國家」想像以外,也有人認為這個概念和一些中國特定习語很關係,除了「漢奸」的這個「奸」字以外,中國史書上諸如「賊」、「匪」、「佞」等字眼,也都被認為和這個傳統有關。


有人認為:近代中國的政治軍事強人都必須依靠外國勢力才能獲得權力,例如孫文依靠日本、(前)蘇聯,蔣介石在與宋美齡結婚後受美國影響、中國共產黨則依靠(前)蘇聯。這些人物都必須為此或多或少的出賣中國權益,而對他們的評價則由他們或他們的外國靠山成功與否決定,絕非由他們及他們的外國靠山是否殘酷或他們對於中國發展的貢獻決定,所以依靠日本獲得權力的汪精衛才會被稱為漢奸。


中華人民共和國人大代表喻权域在十届全国人大第五次会议[2]中提出《惩治汉奸言论法》,受到广泛批评,主要的批评是,一则违反了宪法的言论自由,二就是汉奸的界定是不明确的。


赵无眠则在《百年功罪》中有二篇文章——《查塔呼奇河畔谈汉奸》《二十世纪谁不是汉奸?》——专门讨论汉奸,认为汉奸是一个不确定不清晰的概念,文中流露对汉奸这种脸谱化定义的嘲弄。


被視為「漢奸」的主要人物

石敬瑭:後晉高祖,向遼自稱兒皇帝,割讓燕雲十六州予遼

秦檜:南宋時期主和派人物

吳三桂:明朝將軍,引清兵入關


近代

王克敏:日军所扶植的华北自治政府的首脑,中國国民政府确认的汉奸

德王:日军所扶植的蒙古自治政府的首脑,中國国民政府确认的汉奸(蒙奸)

汪精卫:在第二次世界大戰時主張與日本和談,建立傀儡政權南京國民政府

周佛海:汪精卫南京國民政府行政院副院長

陳公博:汪精卫「南京國民政府」立法院院長

川島芳子:清朝肅親王善耆之女,曾替日本做間諜(满奸)

愛新覺羅·溥儀:清朝末代皇帝,滿州國皇帝(滿奸)


参见

叛国

通敌


參考資料

^ 馬家輝:滿街都是漢奸

^ 清史稿卷307


外部連結

馬家輝《滿街都是漢奸》


參考資料


黃寬重,1996,扭曲的臉譜:從台奸、漢奸問題看歷史人物評論。北縣文化:1-2。

Lo, Jiu-jung. 2001. Trials of the Taiwanese as Hanjian or War Criminals and the Postwar Search for Taiwanese Identity. In Constructing Nationhood in Modern East Asia, edited by Kai-wing Chow, Kevin M. Doak, and Poshek Fu, 279-315. Ann Arbor: The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羅久蓉,1994,抗戰勝利後中共懲審漢奸初探。中央研究院近代史研究所集刊:267-91。

羅久蓉,1995,歷史情境與抗戰時期「漢奸」的形成:以一九四一年鄭州維持會為主要案例的探討。中央研究院近代史研究所集刊:815-41。

王柯,2004,「漢奸」:想像中的單一民族國家話語。二十一世紀:6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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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anasi, Margherita. 1998. Between Nationalism and Collaboration: The GMD Left, Japan, and National Reconstruction. Paper presented at the annual meeting of the Association for Asian Studies, 26 - 29 March, Washington, D.C.

張世瑛,2001,從幾個戰後審奸的案例來看漢奸的身分認定問題(1945-1949)。國史館學術集刊 1:161-85。

湯本,2000,你是「漢奸」!:評華人的罵人文化 [online]。np:湯本論壇。[引用於 2005年5月3日]。全球資訊網網址:[3]。

王柯,2004,「漢奸」:想像中的單一民族國家話語。二十一世紀:6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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