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SINA-신중국

진서(眞書)는 한자(漢字)인가, 한자(韓字)인가?

한부울 2008. 11. 21. 20:43

진서(眞書)는 한자(漢字)인가? 한자(韓字)인가? 

[박문기]2007/07/09 오전8:37

 

[1]우리는 우리의 유산인 한자(漢字)의 기원과 역사적인 배경을 추적하여 우리의 문화유산(文化遺産)으로 유엔에 등재해야 할 책임과 의무를 앉고 21세기를 넘길 수 없다는 사명감으로 임해야 합니다.


한단고기 단군 세기 편에 3세 단군 가륵 재위 45년 기록 중에 등재된 내용을 다음 같으니 음미해 보시기 바랍니다.


[해설문]경자 2년 BC;2,181년, 아직 풍속이 하나같지 않았다. 지방마다 말이 서로 틀이고 형상으로 뜻을 나타내는 참글(眞書)이 있다 해도 열 집 사는 마을에도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백리 되는 땅의 나라에서도 글을 서로 이해키 어려웠다. 이에 삼랑을 보륵에게 명하여 정음 38자를 만들어 이를 가림토(加臨土)라 하니 그 글은 다음과 같았다.


[원문];庚子二年時俗尙不一方言相殊雖有象形表意之眞書十家之邑語多不通百里之國字難相解於是命三郞乙普勒譔正音三十八字是爲加臨土其文曰----(한단고기 임승국 해석.주해 참조)

[가림토문자] 38자 생략


여기서 참글 진서(眞書)를 과거의 역사적으로 한자(漢字)는 진서(眞書)인 참글로 사용하고 한글은 아니 훈민정음(訓民正音)은 언문(諺文)으로 사용 했으나 조선왕조 세종대왕께서 가림토문 38자인 옛글자, 고자(古字)에서 발취했음을 알리고 있는데 우리는 8.15 해방정국에서 한글의 사용과 “이승만정부에서는 전 국민을 문맹퇴치운동(文盲退治運動)라는 대의명분으로 주야간으로 주경야독(晝耕夜讀)하는 ”한글학교”가 전국마을마다 일어났다“는 사실입니다.


이에 밀려야 하는 수난과정에서 한자(漢字)인 참글 진서(眞書)를 아주 밀어 내다 보니 아시아에서 주인 없는 글로 만든 것이 아니라 버려버린 것을 중국(中國)과 일본(日本)은 주어다가 오히려 자기네 글로 발전시켜 우리후손들을 아시아의 고아(孤兒)와 한맹아(漢盲兒)로 만들어 버린 격이 됐으니, 하루속히 더더욱 다음세대가 오기 전에 찾아주어야 할 의무와 책임도 현존하고 있는 위정자(爲政者)들이라 것을 망각(忘却)해서 안 됩니다.


[2]다음은 “한자는 우리글이다.”책을 내신 박문기의 서문과 내용에서 간추려 요점만 다시 한 번 상기시키는 의미에서 발취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필자 박문기는 머리말에서 “필자가 이 책에서 주장하는 원칙 또한 오랫동안 원칙이 아닌 원칙에 밀려 지금까지 누구도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했던 사실이다.”


바로 “한자는 우리글”이라는 사실이다. 사실 “한자”라는 말은 근세 일본인들이 만들어낸 말이다. 우리는 그 이전에 이 문자를 참글 즉 진서(眞書)라 일컬었을 뿐 한문이니 한자니 하는 말을 쓰지 않았다.


진서(眞書)라는 말도 한글 즉 언문(諺文)이 일반 대중에게 널리 익혀지면서 쓰이게 되었다. 그러기 전에는 다들 그냥 글(契)혹은 서계(書契)라 일컬었던 것이다. “글”이라는 말은 옛 조선 가륵 임검(嘉勒壬儉)의 신하 고글(高契)이라는 현인이 음운(音韻)을 제정하여 읽는 방법을 세상에 알린 데서 유래되었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다. 그러기에 이 문자가 우리의 문화, 우리의 말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중국 문화, 중국말에서는 그 어디에도 이 글자가 만들어지게 된 연유를 찾아내기가 어려운 것이다. 즉 “한자”라 이를 만한 근거가 없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최근 구석기시대 유물까지도 조작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그들이 이 땅을 식민통치할 때 평양 토성리 유적을 “낙랑문화”라고 발표한 사실을 우리가 정녕 그대로 믿어야 되는 것인가?.


그리고 아이가 세상에 태여 나면 다 궁둥이에 검푸른 삼신의 표적이 있는 것을 가리켜 “몽고반점”이라고 했던 말을 우리가 정녕 그대로 따라서 해야 하는 것인가?.


바로“보아라”너희는 진작부터 대륙의 지배를 받아왔고 타민족의피가 섞여버렸지 않느냐?.


지금 우리 대일본제국이 너희를 식민통치(植民統治)하는 것을 별로 서운케 생각지 말라“는 뜻을 말할 것이었다. 그러기에 그들은 조선어한문폐지령(朝鮮語漢文廢止)을 내렸고 기자조선(箕子朝鮮)을 결단코 부인했으며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감행했던 것이다.


창씨개명이야말로 그들이 물러감과 동시에 환원되었지만 그들이 한번 바꾸어놓은 우리의 생각은 여태껏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 그중에 가장 심한 것이 바로 이 문자가 중국 한(漢)나라 때 만들었다는 것이다. 다들 한나라 때 만들어졌다고 여기기 때문에 한문이니 한자니 운운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한나라보다 천 수백 년 전 은(殷)나라 때에도 이미 이 문자가 있었다. 이른바 죽서(竹書) 갑골문(胛骨文) 등의 문자 말이다. 은(隱)나라가 바로 우리 동이족(東夷族)의 왕조였고 그러한 사실이 각종 사서(史書)에도 확연히 드러나 있다.


뿐만 아니라 중국학자들도 “기자가 망국의 유종을 거느리고 선왕(先王)의 고토에 돌아갔다.”는 사실을 여러 문헌을 고증해 밝혀낸바 있다.


사실 그러한데도 우리역사 교과서에는 기자조선이 빠져 있다. 더 나아가 단군조선까지도 빠져 있다. 일본의 역사와 맞추어야 하고 서양의 기원과 맞추어야 하는 원칙을 애써 따르다 보니 이렇게 된 것이다. 이제는 그 원칙이 아닌 것을 원칙으로 바로 잡고자 함에 있어 필자(박문기) 또한 별수 없이 원칙 아닌 말로써 이 책의 제목을 삼은 것이다.


필자(박문기)는 이 책을 쓰기 전에 <숟가락>이라는 책을 쓰고 누차 여러 중국인과 만나 이 문자야말로 한글(韓契)이라는 주장을 내세워 논쟁을 벌인바 있다.


그때마다 중국인들은 다 해괴하게 여기고 펄쩍 뛰었지만 몇 마디만 들려주면 다 꿈쩍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또한 오랫동안 중국문화를 전공한 국내학자들도 만나 논쟁해 보았지만 결국 다 필자의 말을 옳게 여겼다.


특히 울산대학교 이인택(李仁澤) 교수는 은(殷)나라 시조 설(契)의 난생설화가 고구려, 신라, 6가야 시조들의 탄생설화(誕生說話)와 같은 난생설(卵生說)이었다는 역사의 예를 들고 자연의 이치에 맞지 않는 중국어 발음의 예를 인정하며 필자의 말을 적극 옳다고 하였다.[이하생략]


[3]한문은 우리글이다.“

저자 박문기는 문자로 본 우리역사에서 들어가는 말로 콩과 장(醬),복희씨와 팔괘, 역법(曆法)의 내력, 조개, 역사적 기록들, 태백산. 성씨 이야기 임검, 사물, 단골(壇骨), 조(朝)자와 우리 역사 중에서 몇 가지만 예문을 간추려 보고자 합니다.


※우리의 역사는 아마도 태초에 우리 원시조상들이 “천신께 콩을 바치고 길복(吉福)을 빌었음에서부터 시작 되었으리라.”인하여 천신께서 당신의 아들 한웅(桓雄)을 세상에 내려 보내어 크게 인간을 돕게 한 데서부터 우리의 역사가 이어져왔으리라.


원래 인간은 자연의 무궁한 조화를 두려워하고 공경하였으리라, 우리 원시조상들은 그 무궁한 조화를 주재하는 큰 신을 가리켜 천신(天神) 또는 한인임(桓因任)이라 일컬었으리라. 그러기에 지금 사람들이 흔히 일컫는 “하나님”이란 바로 “한인님(桓因任)의 석음(釋音)”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옛날 하늘나라에 어른 한인이 있었는데 그 아들 한웅이 누차 하늘 아래에 뜻을 두었고 인간세상을 구하고자 하였다.


아버지(桓因)는 아들의 뜻을 알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삼위태백(三危太白) 즉 세 사람이 차례로 제단 앞에 단정히 앉아 콩(太)을 바치고 고(告)하는 데가 있어 가히 크게 인간을 도울 만하였다. 이에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한웅에게) 주어 보내어 가서 다스리게 하였다.


한웅은 무리 삼천(三千)을 거느리고 사람들이 콩을 천신께 바치고 고했던 산마루 신단수(神檀樹) 아래 내려와 그곳을 신시(神市)라 이름 했는데 이가 바로 한웅천왕이시다.


천왕은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주곡(主穀), 주명(主命), 주병(主病), 주형(主刑), 주선악(主善惡)의 장을 지휘하여 무릇 삼백육십여 가지의 일을 세상에 머물면서 이치로써 다스렸다.“


太白; “삼위태백(三危太白)”은 세 사람이 무릎을 꿇고 콩 을 천신께 바쳤다는 의미이다.

危; 홀로 무릎을 꿇고 단정히 앉아 있는 모습을 그린 글자.

樹; 나무를 형상한 목자에 땅을 상징하는 ㅡ 와 하늘을 상 징 하는 l 이 합쳐진 十 자 아래 콩을 뜻하는 豆자를 쓰고 법(法)을 뜻하는 寸자를 붙여 만든 글자.


※대저 윗글을 살펴보면 “신시(神市)”라는 고대 도시국가와 “한웅천왕(桓雄天王)이라는 최고 통치자의 칭호가 나타나 있다. 뿐만 아니라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의 직관 및 주곡(主穀), 주명(主命), 주병(主病), 주형(主刑), 주선악(主善惡)의 조직명이 나타나 있는데 다 또한 360여 가지의 인간 하위조직의 수와 함께 조직원 3,000명이라는 숫자까지 기록되어 있다.


풍백, 우사, 운사의 직관은 아마 고려시대 중서성(中書省), 상서성(尙書省), 문하성(門下省)의 조직과 비슷한 것으로서 지금의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의 기능과 동일한 것이리라. 그리고 주곡(主穀)등 오부(五部) 조직은 지금의 농림수산, 문화공보, 복지부, 범무부, 문교상공 등에 해당하는 기관이었을 것이리라.


그러나 여기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삼위태백(三危太白)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위(危)자는 홀로 무릎을 꿇고 단정히 앉아 있는 모습을 뜻하는 것이다.“ 결코 위태롭다는 뜻이 아니다. 그래서 옛날에 제자가 스승 앞에 무릎을 꿇고 배울 때의 자세를 ”위좌(危坐)“라 했던 것이다.


대략 그러한 뜻으로 미루어 보더라도 삼위(三危)란 세 사람이 차례로 무릎을 꿇고서 제사를 지냈다는 뜻이다. 즉 제사의 초헌(初獻), 아헌(亞獻), 종헌(終獻)을 말한 것이다. 그리고 태백(太白)이란 바로 콩을 제수(祭需)로 삼아 천신께 고했다는 말이다. 대개 태(太)자를 “크다.” “심하다.“ ”맨 처음이다.“는 뜻으로 훈독(訓讀)하는데, 우리는”콩“이라는 뜻으로도 훈독해 왔다.


지금까지 태(太)자를 콩이라는 뜻으로도 훈독하는 나라는 오직 우리나라뿐이다. 중국이나 일본 등에서는 역사 이래로 콩을 뜻하는 글자로 훈독한 적이 없다. 이어서 백(白)자는 존전에 “고한다.” “사뢴다.” “아뢴다.”는 뜻으로 훈독하는 글자이다. 그러므로 백(白)자를 여기서 흰색을 상징하는 글자로 훈독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태백(太白)이라는 산의 이름이나 지명은 바로 콩을 천신(薦神)한 데서 유래된 바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 콩은 최초로 하늘과 땅, 그리고 신과 사람을 연결 시켜준 곡물이었다. 그러한 의미는 한웅천왕(桓雄天王)이 태백산마루 신단(神壇)의 나무 아래 내려왔다는 수(樹)자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즉 신단수(神檀樹)라는 수(樹)자는 나무를 형상하는 목(木)자에 땅을 상징하는 부호 ㅡ 와 하늘을 상징하는 l 가 합쳐진 十 자 아래 콩을 뜻하는 두(豆)자를 쓰고 법을 상징하는 촌(寸)자를 붙여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삼위태백은 명사로 읽을 것이 아니라 형용사로 읽어야한다는 것이다.


예로부터 우리는 마을에 있는 노거수(老巨樹) 즉 큰 나무를 “당산(堂山)”이라는 신목(神木)으로 정하고 정성을 드렸다.


지금도 농촌에서는 매년정월이면 온 동네가 합심하여 당산제(堂山祭)를 지내는 곳이 있다. 거기에 마을을 수호하는 신이 머물러 있다고 믿어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사상(祭祀床)에 반드시 콩나물을 올리고 있다. 당산제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어떠한 제사에도 콩나물이 빠져서는 아니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누가 특별히 가르쳐주지 않았어도 기록으로 전하는 바도 없지만 가히 불문율(不文律)로 전해오고 있는 것이다. 이는 바로 태초부터 콩을 제수(祭需)로 삼아 제사지냈던 풍속이 이어져 왔기 때문이다.


▼콩과 장(醬)에서는 요약함

醬;장수를 뜻하는 將자와 나아간다는 뜻의 酉자를 합해 만들어진 글자.

豉;콩을 뜻하는 豆자와 지탱함을 뜻하는 支자가 합쳐진 된장 “시”자 임.


▼복희씨와 팔괘

지금 일부학자들이 한웅천왕(桓雄天王)의 시대를 대략 6,000여 년 전 혹은 6,300여 년 전쯤으로 추산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콩 농사의 역사는 그보다 훨씬 더 오래 되었지 않겠는가?


이식위천(以食爲天) 즉 “먹을 것으로써 하늘을 삼는다.”는 말이 있다. 태초 우리 원시조상들에게 콩은 가히 하늘과 같은 것이었다. 이로써 생명을 이어갔고 이로써 야생의 동물을 붙잡아다 기르고 길들여 부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짐승들에게도 콩은 가히 하늘과 같은 것이었다.


본래 우리 동이족에는 아홉 부족이 있었다. 때문에 역사에서는 이를 구이(九夷), 혹은 구환(九桓) 또는 구여(九黎)라 기록해 놓고 있다. 이 구이(九夷) 족은 각각 종족을 상징하는 위령(慰靈)이 있었다. 그 가운데 봉황을 위령으로 숭상한 풍이족(風夷族)이 있었다. 그 가운데, 우리 동방의 역사에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태호복희씨(太昊伏羲氏)는 바로 이 봉씨족(鳳氏族)의 수령이었다고 한다.“ 한데 그 이름에 ”콩, 하늘“이라는 뜻의 태호(太昊)라는 말을 먼저 내세워 전해오고 있다. 이로 미루어보더라도 복희씨 또한 콩으로써 짐승들을 복종시켜 길들이고 부리는 법을 세상에 전한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 원시조상들이 원래부터 하늘을 숭배할 줄 알았기 때문에 그 옛날 하느님께서 이 땅에 당신의 아드님을 내려 보내 주신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산수가 수려하고 복된 이 땅에 말이다. 한데 저 황량한 모래벌판의“유태(猶太)” 즉 “콩 같은” 땅에도 태초에 하느님이 당신의 아들을 내려 보내 주었다는 말이 전하고 있다.


정녕 하느님이라면 결코 그리했을 리 없을 터인데 말이다.


옛날에 한웅천왕(桓雄天王)이 최초로 도시국가를 세운 곳이 신시(神市)였다면 그 후 풍이족이 부족국가를 세운 곳은 아마도 안시(安市)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안시(安市)란 바로 봉황의 옛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시성(安市城)을 일명 봉황성(鳳凰城)이라 일컬어 오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복희씨의 유적이 전하고 있는 곳은 지금의 산동성과 회양(淮陽) 지방이다. 왜냐하면 당시 풍이족은 모계사회였고 여자라야만 종족을 거느리는 군주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복희씨는 자신을 따르는 무리를 거느리고 남으로 내려가 진(陳;지금의 淮陽)에 도읍을 정하고 천하를 다스렸던 것이다.


神市; 한웅천왕이 최초로 도시국가를 세운 곳.

安市; 안시(安市)는 봉황의 옛말로, 안시성을 봉황성이라 부르기도 한다.


대저 복희씨의 업적 가운데 특기할 만한 것들을 말하자면 팔괘(八卦)를 그이 결승문자(結繩文字)를 대신 했고 구구법(九九法)을 만들어 수리(數理)를 밝혔으며, 곡척(曲尺;직각자)과 규도(規度;그림쇠)를 만들어 건축기술을 가르쳤고, 사람의 은혜를 알 만한 야생의 짐승을 길들여 부리고 잡아먹게 했으며, 그물을 만들어 고기를 잡고 사냥하는 법을 가르쳤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이 가운데서도 팔괘의 오묘한 이치는 가히 동양철학의 비조(鼻祖)라 이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 팔괘로 인하여 복희씨의 이름이 영원히 진실하게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복희씨는 지극히 높은 성인의 자질이 있었기 때문에 그토록 경천위지(經天緯地)할만한 사업을 오직 문화에 힘썼고 무력을 쓰지 않았던 것이다. 바로 그러한 점이 성인(聖人)이 영웅(英雄)과 다르다는 것이다.


옛말에 “귀신은 그 동류가 아니면 흠향하지 않고 사람은 그 동족이 아니면 제사 지내지 않는다(神不享非類 人不祀非族)”는 말이 있다. 그런데 지금 대다수의 우리나라 사람들은 옛 복희씨를 우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중국의 성인으로만 알고 있다.


옛 복희씨의 유법(遺法)은 이 나라 국기가 되어 쓰여 오고 있고, 휘장은 물론 청와대의 상징으로까지 쓰이고 있는데도 말이다. 옛 봉씨족의 위령인 봉황이 각종 우리나라 사람은 물론 다른 나라의 인사들도 우리 봉황무늬의 휘장에 경의를 표하고 우리국기 앞에 숙연한 자세로 경례를 드리고 있는데 말이다.


<예기(禮記)>에 공자께서 말씀하기를 “천제(天帝)는 동방의 해 뜨는 곳 진방(震方)에서 태어났고 그 천제는 바로 복희씨다.”고 하였다. 공자께서는 또<주역(周易)>의 <계사전(繫辭傳)>에 말씀하기를 “천제가 진방(震方)에서 나오시어 그 도를 간방(艮方)에서 이루었다.”고 하였다.


대저 공자께서 말씀하신 진방(震方)이란 바로 지금의 압록강에서 난하(欒河) 유역에 이르는 대평원을 가리킨 바요, 간방(艮方)이란 바로 지금의 한반도와 연해주 일대를 두고 이르신 바다. 때문에 지금까지도 우리나라는 팔괘의 방위에 맞추어 보면 간방(艮方)에 속하여 있는 것이다.


옛날에 천제 즉 복희씨의 도가 이루어진 곳은 바로 이 한반도라는 것이다. 때문에 공자는 “구이(九夷)의 땅에 살고 싶다.”고 했고 “뗏목이라도 타고 그 땅에 가고 싶다.”고 말씀했던 것이다.


이로 미루어 공자 때까지만 해도 이 땅에는 지금 우리가 가히 상상할 수 없는 문화가 전해져 오고 있었으리라. 예를 들어 천문학의 발달, 역법(曆法)의 제정 등 수리(數理)에 관한 일이라든가, 다섯 가지 덕이 있는 닭으로써 밤에도 능히 시간을 잴 수 있고 충성스런 삽살개의 털로써 모직물의 발달 등 가축에 관한 일들이다.


닭의 다섯 가지 덕이란 즉 머리에 벼슬이 있어 문(文)이 있고, 용감히 싸울 줄 아는 무(武)가 있으며, 먹이가 있으면 서로 고하는 인(仁)이 있고, 밤을 지킬 줄 아는 의(義)가 있으며, 때를 어기지 않는 신(信)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데 이 닭의 원산지가 바로 “조선의 평택(平澤)”이라는 <본초강목(本草綱目)>의 기록도 전해오고 있다.


중국의 옛말에 “개털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으면 개가 짖고, 양털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으면 양이 운다.(犬皮服則犬吠=견피복칙견폐;羊皮服則羊鳴=양피복칙양명)”는 말이 있다.


하지만 우리 옛 단군조선에서는 삽살이의 털로써 실을 뽑아 베를 짜 입었고 이를 중국 여러 나라에 수출했다는 <관자(管子)>의 기록이 있다. 즉 개를 잡아 가죽을 벗기지 않고도 털갈이 하는 초여름을 기다려 털을 취하거나 잘라서 질 좋은 모직물을 생산했다는 것이다.


이렇듯이 진방(震方), 간방(艮方)에서는 짐승을 복종시킴에 이르기까지도 도리가 있었다는 말이다. 그로부터 누천년이 지난 조선시대까지도 선비들이 다 복희씨의 유법을 존상했다는 사실이 전하고 있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머리에 쓰는 갓을 가장 소중하게 여겼고 그 소중한 갓을 넣어두는 갓집에 반듯이 복희씨의 유법을 그렸다. 즉 갓집 맨 아래에 팔괘를 그렸고 그 중앙에는 태극형상을 그려두는 불문율의 풍속이 있었다는 것이다.


지금의 태극기는 바로 그러한 유속에서 연유된 것이다. 그러기에 천.지.수,화(天地水火)를 상징하는 건.곤.감.리(乾坤坎離)가 그려져 있는 것이다. 한데도 우리는 지금 대다수가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다. 그저 막연히 “우리 태극기에 묘한 이치가 있다.”는 것쯤으로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일백년이 지나도록 국기를 거꾸로 쓰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거의 모르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이러한 말은 잠시 뒤편으로 미루고, 우리 원래조상들이 과연 어떠한 연유로 해서 문자를 만들어 쓰게 되었고 그 문자로 인하여 어떠한 용어들이 전해져 오게 되었는지 한번 유추해보기로 한다.


▼역법의 내력은 생략하고 조개(鳥蚧)에 관한 글자만 등재합니다.

“조개라는 것은 해묵은 꿩이나, 제비, 참새 등의 조류가 바다에 들어가 변화하여 된다는 것이다,” 즉 두 날개가 변하여 단단한 갑질(甲質)이 되고 몸뚱이가 변하여 그 알맹이가 된다는 것이다. 하늘을 임의로 날아다닐 수 있는 양기(陽氣)의 동물이 말이다.

그래서 조개(鳥蚧)라는 이름으로 일컬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鰒.螺; 전복(全鰒)과 소라(素螺)는 맛과 성질이 조개와 비슷하나“조개”라 불러줄 수 없는 것들이다.


蜃.蛤,蚧,貝,蚌,;무명조개 신; 대합조개 합; 조개이름 개;조개 패; 방합 방,<각각 큰 조개, 상합대합, 가리 맛, 굴, 개, 패, 방 등 조개의 종류를 뜻 한다.>


牡蠣;굴은 수컷만으로 번식하기 때문에 수컷을 상징하는 무(牡=모=무)자를 써서 무려(牡蠣)라 별칭하기도 한다.


※牡;수컷 모,(本)무 원래는 “牛+士“.士는 남성을 뜻함.


鳥蚧;조개의 개(蚧)자는 “제비나 참새가 변하여 된 것”을 뜻한다.

蜃; 큰 조개를 뜻하는 신(蜃)은 사람의 눈을 미혹한다 하여 신기루(蜃氣樓)의 어원이 되었다.


貝;조개는 모습이 아름답고 영험이 있어서 예로부터 물화교역의 수단으로 사용되어 왔고, 그래서 寶, 貴, 償, 買, 賣 등의 글자에 패(貝)자가 들어가게 되었다.


耨.薅.辱.農;단단한 조개껍질은 예로부터 농구로 사용 되어 왔기 때문에 농사와 관계된 글자들에 조개를 뜻하는 신(辰)자가 들어가게 되었다,< 김맬 누(녹);김맬 호; 욕 될 욕; 농사 농>


▼역사적 기록들은 생략하고 태백산(太白山)에 대한 내용을 올려봅니다.

대저 태백산(太白山)이란 천신께 콩을 바치고 나라의 안녕을 고했던 산을 일컬음이다.

그러므로 산의 이름이 콩을 뜻하는 태(太)자와 고한다는 뜻의 백(白)자로 되어 있는 것이다.

뒷날에는 콩 대신 흰 소의 머리를 신께 바치고 제사지냈다 하여 백두산(白頭山)이라 일컬어져 지금까지도 우리가 산 이름을 백두산(白頭山)이라 이르고 있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태(太)자가 크다, 심하다, 또는 마누라를 뜻하는 글자로 쓰일 뿐 우리처럼 콩을 뜻하는 글자로는 쓰이지 않는다. 때문에 우리처럼 백태(白太), 청태(靑太), 황태(黃太), 서모태(鼠眸太), 유월태(六月太) 등의 말이 전혀 없다.


대개 태(太)자에 속하는 콩은 간장, 된장, 두부, 콩나물 등을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콩만을 이르는 것이요, 두(豆)자는 콩, 팥, 녹두 등 모든 콩과 류를 총칭하는 말이다. 중국에서도 두(豆)자는 콩을 뜻하는 글자로 쓰이기는 하지만 대개 그릇을 상징하는 글자로 많이 쓰여 왔다. 그 그릇도 나무로 만든 그릇에 한해서 이 두(豆)자를 써왔던 것이다.


우리는 아내를 상징하는 글자를 쓰려면 처(妻)자 하나만을 써 왔고 발음도 단음(單音)으로 그저 “처(妻)”하면 되는데 중국에서는 태(太)자를 연거푸 쓰고 발음도 “타이타이(太太)”하고 복음(複音)으로 하고 있다. 이는 바로 이 글자가 저희네 문자가 아니기 때문에 한 글자로서는 완연한 뜻을 나타내지 못하고 같은 글자를 연거푸 쓰고 있는 것이며, 글자 두 자에 네 소리를 내야 하는 복음(複音)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예로는 누이동생을 “매이매이(妹妹)‘라 이르고 윗누이를 ”지에지에(姉姉)“라 이르는 것만으로도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비록 단음으로 발음하는 마마(媽媽;어머니),파파(爸爸;아버지),꺼꺼(哥哥;형)등의 말도 다 한 글자로는 완연한 뜻을 나타내지 못하고 상대가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에 같은 글자를 연거푸 쓰고 있는 것이다.


우리원시조상이 맨 처음 콩 농사를 지어 자손들의 생명을 길렀고 이로써 사람의 은혜를 알 만한 짐승을 붙들어다 길러 부리고 잡아먹는 법을 마련했으므로 콩은 가히 인류 문화의 시작이요 역사의 시작인 것이다. 그래서 처음 뜻하는 말에 다 태(太)자가 들어 있는 것이다.


즉 태시(太始), 태초(太初), 태고(太古), 등의 개벽시대를 이르는 말과 태조(太祖), 태종(太宗)등의 나라를 창업하고 기틀을 다진 임금을 이르는 말이 다 태(太)자를 먼저 내세웠다는 것이다.


중국 한(漢)나라 때 백성들에게 조[粟;속], 수수 등의 양곡을 세금으로 받아 저장하는 창고를 가리켜 태창(太倉)이라 했고 그 창고를 관장하는 관리를 가리켜 태창령(太倉令)이라 했는데, 이는 아마도 우리가 먼 옛날부터 유구한 태평시대를 누렸던 태창(太倉) 즉 콩 창고에서 비롯된 말이 아닌가 여겨진다.


“크다”는 뜻을 나타내는 글자에는 태(太)자 뿐만 아니라 태(泰), 대(大), 거(巨), 석(碩), 굉(宏) 등등 여러 글자가 있는데 하필이면 우리 동이족이 처음을 뜻하고 콩을 뜻하는 태(太)자로써 창고의 이름을 만들어 썼겠느냐 말이다. 그것이 분명 콩을 저장하는 창고가 아니었고 콩 창고를 관장하는 관리가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이는 정녕 우리말을 그대로 가져다 쓴 것이 아니겠는가. 그저 단순히 “크다”는 뜻을 나타내고 아내를 상징한다는 태(太)자로서는 그렇게 간단하면서도 심오한 뜻을 함축한 말들이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태초에 한웅천왕이 태백산에 내리었고 그 아드님이신 환검신인을 나라사람들이 그 태백산에서 받들어 임검으로 추대했으니 아, 태백(太白)이라 일컬음에는 정녕 신과 교감하는 심원한 뜻이 있음이로다, 그러기에 우리가 지금까지도 제사에 반드시 콩나물을 올리고 있음이 아니겠는가.


▼성씨 이야기


원시시회에서는 사람들이 어떠한 자연물을 부호(符號)로 삼아 그 종족을 표시하는 방법을 나타내거나 혹은 그 자연물을 신성시하여 숭배하기도 하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느 성씨는 자라고기를 먹지 않고 어느 성씨는 잉어를 먹지 않는 등 금기하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이러한 것을 가리켜 옛날에는“위령(威靈)”이라 일컬었던 것이다. 지금도 북아메리카의 인디언이나 오스트레일리아에 사는 토인들에게 그러한 풍속이 전해오고 있는데, 외국의 학자들은 이를 토템[圖騰;도등]“이라 이르고 있다.


상고시대 우리 동이족의 5부족에선 하늘을 숭배했던 환족(桓族), 봉황을 숭배했던 봉씨족(鳳氏族), 소나 양을 종족의 부호로 했던 군제족(群蹄族), 소나무를 부호로 삼았던 송족(松族), 잣나무를 부호로 했던 백족(栢族) 등이 있었다.


환족(桓族)은 천제 환인님(桓因任)의 후예로서 환웅, 환검 등의 하늘부족을 일컬음이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천(天)을 칭함에 “하느님”이라 하는데, 이는 바로 “환인님”에서 전음(傳音)된 말이다. 또한 하늘부족은 밝음을 숭상했음으로 군장을 “박달 임검”혹은 “박왕(亳王)”이라 했는데, 이는 바로 “밝다”에서 전음 된 말이다. 단군의 후예가 가장 전성했던 은(殷)나라는 여러 차례 도읍을 옮겼지만 도읍지마다 “박(亳)”이라는 지명으로 일컬었다. 즉 도읍을 옮길 때마다 “박”이라는 지명으로 따라다녔던 것이다.


그리고 중원을 통일한 탕(湯)임금으로부터 7대 태무(太戊)임금까지 임금의 호칭을 다 박왕(亳王)이라 일컬었다는 사실이 전하고 있다.


북부여의 제실(帝室)의 딸 파사소(婆娑蘇;東神聖母)가 지아비 없이 아이를 배어 진한(辰韓) 땅에 내려와 혁거세(赫居世)를 낳았는데 그 성씨를 “박(朴)”이라 했음도 다 밝음을 숭상한 하늘부족의 후예라는 사실을 전함이었다.


봉씨족과 봉황


봉씨족(鳳氏族)은 성을 풍씨(風氏)라 하였다. 즉 구이(九夷)의 한 종족인 풍이(風氏)의 부족이었다. 풍씨족은 봉황을 하늘의 사자(使者)인 신조(神鳥)로써 받들어 숭상하였다. 때문에 <설문(說文)>에도 “봉은 신조인데 동방 군자의 나라에만 나온다.” 했고 “그 새가 나타나면 천하가 안녕하여 모든 새들이 따른다.” 했으며, “봉의 암컷을 황(凰)이라 했다.” 하였다.


봉씨족은 태초 모계사회 때 종족의 수령을 여자로 뽑았다 때문에 수령의 호칭을 봉의 암컷을 상징하는 황(凰)자에서 궤(几)자를 벗겨내 버리고 황(皇)으로 일컬었다. 뒷날 황(皇)이라 군장의 호칭은 바로 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이들은 같은 종족끼리 서로 “붕(朋)”이라 일컬었고 종족의 수령을 뜻하는 붕(朋)자와 죽음을 나타내는 붕(崩)자는 다 봉을 숭상했던 봉씨족에서 기인된 말이라 한다.


먼 옛날 봉씨족에서도 남자가 종족의 수령이 된 예가 몇 번 있었는데 태호복희씨(太昊伏羲氏),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가 바로 그러한 남자 수령이었다고 한다. 봉씨족은 오로지 여자의 성을 따랐기 때문에 그 후예가 번창하지 못하였는데 이 한반도의 남쪽으로 내려온 금천씨의 후예만이비로서 남자의 성을 따르기 되었다.


지금 이 땅에서 가장 번창한 김씨가 바로 소호금천씨의 후예라는 사실이 신라 문무왕 비(碑)와 <만성통보(萬姓通譜)> 등에 전하고 있다.


鳳;봉씨족은 수령의 호칭을 봉의 암컷을 상징하는 황(凰)자에서 궤(几)자를 벗겨내 버리고 황(皇)으로 일컬었다.

朋.崩;친구를 뜻하는 붕(朋)자와 죽음을 나타내는 붕(崩)자는 봉을 숭상하는 봉씨족의 유산이다.


가장 오래된 성, 강씨


군제족(群蹄族)은 성을 강씨(姜氏)라 했는데, 지금까지 세상의 모든 성씨 중에서 가장 오래된 성씨라고 한다. 더 오래전에 비록 풍씨가 있었지만 여자의 성씨를 따르다보니 세상에서 다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풍씨의 뒤를 이어 일어난 강씨를 가장 오래된 성씨라고 말하는 것이다.


군제족(群蹄族)이라는 호칭은 양떼와 소 발굽에서 그 의미를 취한 이름이다. 즉 양(羊)은 무리지어 다니기를 좋아하고 무리 중에는 반드시 우두머리가 있으며, 소는 발굽이 합쳐지면 길하고 벌어지면 흉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옛날에 군제족에서는 종족의 수령이나 제사장을 군(君) 또는 제(帝)라 했는데, 군(君)은 바로 무리를 뜻하는 군(群)에서 양(羊)자를 떼어낸 글자이고, 제(帝)는 바로 발급을 뜻하는 제(蹄)자에서 족(足)자를 떼어낸 글자이다.


대개 양이나 염소는 그 우두머리가 수놈이다. 그리고 그 수놈 우두머리가 이끄는 대로 무리가 흩어지지 않고 따라다니는 것이다. 군(君)이란 그와 같이 무리(群)를 거느린다는 뜻이다.

대개 옛날에는 나라의 큰일에 반드시 소를 잡아 천신께 바치고 그 길흉을 물었는데, 소의 발굽(蹄)이 합쳐지면 길하고 벌어지면 흉하다고 판단하였다.


제(帝)란 그와 같이 무리에게 천신을 대신하여 명을 전한다는 뜻이다. 옛날 부여에서도 그렇게 소를 잡아 천신께 길흉을 물었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다.


군제족이 살았던 곳에는 쇠머리를 뜻하는 지명이 지금까지도 간혹 전하고 있다. 예를 들자면 강원도 춘천의 우두산(牛頭山), 연해주의 우수리강(牛首里江) 등이 있고, 우수촌(牛首村), 우수하(牛首河),우수산(牛首山), 속말(粟靺;쇠머리 변칭) 등의 지명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군제족은 쇠머리로써 직위를 나타내기도 했는데, 신라시대의 서불한(舒弗邯), 각간(角干), 몽고의 칸(可汗)등이 바로 그러한 유속에서 전해진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지위가 높은 사람을 가리켜“우두머리”라 이르고 있는 것이다.


대개 염소는 클수록 윤기가 있고 아름다운 법이다.


그래서 군제족은 양(羊)자와 대(大)자를 합하여 미(美)라는 글자로써 아름다운 것을 표현하였다. 그리고 군(君). 제(帝)의 칭호가 나오기 전 어머니의 성씨를 따르던 모계사회 때 이미 아름다운 여인이 낳았다 하여 성을 강씨(姜氏)라 했고, 부계사회로 바뀐 후에도 강씨 성을 그대로 이어갔다. 이들은 윗사람을 공경하여 봉양했고 길한 것을 좋아했으며 착한 것과 의로운 일을 좋아했기 때문에 양(養), 상(祥), 선(善),의(義)등의 글자가 다 이 군제 족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한다.


群.蹄;양과 소를 중시한 군제 족은 무리 “군(群)”자에서 양(羊)자를 떼어낸 군(君)자와, 발굽 “제(蹄)”자에서 족(足)자를 떼어낸 제(帝)자로 수령. 제사장의 호칭을 삼았다.


牛頭山.牛首村.牛首河. 牛首里江.

粟靺.舒弗邯. 角干. 可汗

“우두산.” “우수촌.“”우수하.“ ”우수리강“ ”속말“. ”서불한”. “각간.”“가한(可汗)”의 명칭은 모두 소를 중시한 군제족의 유산이다.


美;군제족은 큰(大)염소(羊)가 아름답다고 여겼다.


養.祥.善.義; 군제족은 윗사람을 공경하여 봉양(養)했고 길한 것(祥)과 착한 것(善)과 의로운 것(義)을 좋아했기에 이 글자들에 모두 양(羊)자가 들어있다.


송씨와 소나무


소나무를 종족의 부호로 삼았던 송족(松族)은 그 종족을 거느리는 수령을 가리켜 공(公)이라 하였다. 이는 바로 소나무를 상징하는 송(松자에서 목(木)자를 떼어내고 공(公)자 만을 쓴 것인데, 환웅천제 때 뇌공(雷公) 숙신씨(肅慎氏)가 이에 해당한다.


뒷날 단군은 숙신씨에게 정벌의 직책을 맡겼고 태백산 북쪽 땅을 봉지로 삼아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땅이 넓은데다 기후가 춥고 사람의 수효가 적어 목축이 가장 적당하였다. 그러므로 숙신씨는 백성들로 하여금 활쏘기를 익히고 칼 쓰기를 익혀 목축을 해치는 짐승들을 사냥토록 하였다.


후세에 그 백성들이 점점 흑수(黑水) 땅에 옮겨져 마침내 고기잡이와 사냥으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들은 농사나 목축 따위는 가장천한 사람들이 하는 일로 여기게 되었고 오직 사냥을 하는 것만이 용감한 장부의 일이라 여기게 된 것이다.


그래서 몹시 검소하고 굳세고 건장하고 사나운 까닭에 멀리 여러 나라에 나아갔지만, 점점 글공부를 익히지 아니하게 되었다. 글공부가 사냥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 이었다.

이들은 사냥감을 만나면 끝까지 추적 하여 잡았고, 잡으면 반드시 공정하고 공평하게 분배하였다. 두령이라 해서 결코 더 많이 더 좋은 것을 챙기지 않았다. 아마도 공정(公正)이니 공평(公平)이니 하는 말들은 옛 송족(松族)의 그러한 의리에서 비롯되었음이 아니겠는가.


松;소나무를 종족의 부호로 삼은 송족은 소나무“송(松)”자에서 목(木)자를 떼어낸 공(公)자로 수령의 호칭을 삼았다.


백족과 잣나무


잣나무를 종족의 부호로 삼았던 백족(栢族)은 그 종족을 거느리는 수령을 가리켜 백(伯)이라 하였다. 이는 바로 잣나무를 뜻하는 백(栢)자에서 목(木)자를 떼어내 버리고 백(白)자에 사람인(人)자를 합하여 백(伯)자로써 으뜸 되는 사람의 호칭을 삼는 것이다.

환웅천제 때 풍백(風伯) 지제씨(持提氏)와, 은나라 초기에 은(殷)왕실의 위기를 구원해준 하백(河伯), 박우(朴牛)등이 다 이에 해당 된다.


公正,公平;“공정:과 ”공평“은 사냥감을 공정히 분배했던 송씨족의 아름다운 관습에서 유래했다.


栢.伯.;잣나무를 종족의 상장물로 삼은 백족은 잣나무 백(栢)자에서 목(木)자 대신 인(人)자를 붙인 백(伯)자로 수령의 호칭을 삼았다.


잣나무는 그 성질이 곧고 절개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소나무와 함께 능히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항상 푸르름을 나타내는 군자의 기상이 있는 것이다. 또한 이 나무가 사람들이 우러러볼 정도로 자라면 해마다 향기롭고 기름진 먹을 것을 생산해 주고 있는 것이다


위정자란 바로 이런 나무들이 잘 자라도록 가시덩쿨이나 잡초를 제거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되레 이런 나무들을 짓밟고 가시덩쿨이나 잡초에 거름을 주면 오래지 않아 나라가 망하고 백성이 도탄(塗炭)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즉 군자의 싹을 기르고 소인의 싹을 미리미리 잘라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한번 군자의 숲을 이루면 소인이 발붙일 틈이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명(明)나라 시인 당고(唐皐)가 단군에 대해 읊은 다음의 시는 시사되는 바가 크다.


“나라를 세운지 얼마나 오래인가----- 開國何茫然

조선에 이분이 시조로세-------------朝鮮此鼻祖

가시 덩쿨 잘라내지 않았다면---------荊棘非翦除

그 누가 동쪽 땅을 즐겁게 했을까.?----伊誰樂東土


고구려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돌을 쌓아 봉분한 후에 소나무와 잣나무를 줄지어 심었다는 기록도 전해오고 있다.<삼국지>위지 동이전 영락(永樂)호태왕(好太王;광개토대왕) 비문의 첫머리에 이르기를“옛 시조 추모왕(鄒牟王;주몽)께서 나라를 창업 하실 때 북부여 천제의 아드님과 어머니 하백(河伯)”의 따님으로부터 태어나셨다.(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扶餘天帝之子母河伯女郞)“고 하였다. 대략 그러한 사실로만 미루어 보더라도 옛 고구려는 잣나무를 종족의 부호로 했던 백족(栢族)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음을 지금의 우리가 가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또한 맨 처음 단군께서 군자의 나라를 열어 가심에 송백(松栢)의 숲을 만들기 위해 인의(仁義)를 중히 하고 사리(私利)를 멀리했다는 사실을 지금의 우리가 가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능히 그러했기에 옛 우리왕조의 역년이 다 그토록 장구했던 것이다.


▼기타 임검, 사물, 단골 등에서 생겨난 글자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으니 참고바랍니다.


任儉.王儉;“임검(임금)”은 왕검신인을 높여 “임검(任儉)으로 일컬은 데에서 유래한 말이다.

任;우리민족 특유의 존칭인 “님”은 “임검”에서 유래한 표현이다.


聖;성인은 귀(耳)로 천지의 소리를 듣고 입(口)으로 하늘의 뜻을 인간에게 전해주는 사람이며, 우리민족은 이런 이를 높여 “님[壬]”이라 불렀다.


廷;군장이 정사를 논하는 곳을 뜻하는 “정(廷)”자에 임(壬)자가 들어 있는 것은 조선의 임검이 정사를 논하던 데가 조정(朝廷)이었기 때문이다.


姙;아이를 밴다는 뜻의 “임(姙)”자에 임금을 뜻하는 임(壬)자가 들어 있는 것은 여자가 아이를 배면 인금님과 같이 되기 때문이다.


※외국의 군대를 불러들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한 신라에서는 골품제도(骨品制度)를 강화하여 스승의 직분을 가장 미천한 계급으로 전락시켰다. 즉 김씨 왕족끼리 혼인하여 낳은 자식을 성골(聖骨)이라 했고, 왕족과 귀족이 혼인하여 낳은 자식을 진골(眞骨)이라 했으며, 신라 사람들을 우대하여 범골(凡骨)이라 했고, 단군의 풍속을 행하는 백제, 고구려의 유민을 단골(壇骨)이라 비칭(卑稱)한 것이다.


지금 우리 국악계에 무슨 무슨 문화재라 일컫는 사람들이 거의가 다 단골의 후예라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는 사실이다. 또한 이들이 대부분 전라도 사람이라는 사실도 가히 숨길 수 없는 일이다. 경상도에는 광대라는 말은 있어도 단골이라는 말이 없다.(이하생략)


예전에 단골들이 별스러워도 상피(相避) 난 집안에는 가서 빌어주지 않았다는 말이 있다.

상피(相避)란 같은 집안의 남여가 서로 눈이 맞아 배꼽을 맞춘 것을 말함인데, 단골들은 옛 신라 왕실의 성골들을 심히 옳지 않게 여겼으므로 그런 금기사항이 불문율로 전해져 왔던 것이다.


혹 지금 문화재라 일컫는 단골후예의 성씨가 경상도 쪽 관향임을 들어 이러한 말들을 가히 믿기 어렵다 할 수도 있겠지만, 단골의 맥은 친가보다는 외가 쪽으로도 잘 이어지는 것이다.(이하생략)


[4]조(朝)자와 우리역사


단군의 도읍을 평양(平壤)으로 옮기고 나라이름을 고쳐 조선(朝鮮)이라 하였다는 사실을 앞에 언급한 바 있다. 당시 평양은 지금 북한에 있는 평양이 아니라 지금 요녕성(遼寧城)에 있는 요양(遼陽)을 두고 이르는 말이었다.


이는 중국의 사서인<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진왕(秦王) 정(政) 3년 조에 보면 요양이 옛 조선의 수도였다는 사실이 확연히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같은 책 원봉(元封) 2년 조에 보면 요동(遼東)에 왕험성(王險城;壬儉城)이 있고 거기가 바로 조선의 구도(舊都)였다는 사실도 기록되어 있다.


본시 “조선(朝鮮)”이라 함은 세상에서 가장 밝게 다스려지는 곳, 즉 천자(天子)가 있는 나라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천자가 정사를 살피는 곳을 조정(朝廷)이라 하고 관리를 조정에 나아갈 때 입는 옷을 조복(朝服)이라 했던 것도 실은 다 조선이라는 조(朝)자에서 연유된 말인 것이다.


그러므로 제후가 조선의 천자를 뵙는 일을 조근(朝覲)이라 하였고, 제후의 신하가 조선의 천자를 뵙는 일을 조빙(朝聘)이라 했던 것이다. 중국의 사서인<구당서(舊唐書)>헌종기(憲宗紀)에도, “조(朝)는 천자가 다스리는 곳이다.”하였다. 그래서 천자가 있는 궁실을 조궁(朝宮)이라했고, 천자의 명령을 조명(朝命)이라 했으며, 천자의 위엄을 조위(朝威)라 하였던 것이다.


조공(朝貢)이란 원래 조선에 공물을 바치는 것을 말함이었다.


그런데 우리 옛 조선의 강역이 중국의 세력에 밀리고 밀리어 이 좁은 반도 안으로 들어오고 역사가 민멸되어 바뀌게 되자 우리가 되레 중국에 공물을 바치게 되었다. 고구려가 망하고 발해가 망한 후로 말이다. 이 때문에 우리가 조공(朝貢)이라는 말뜻을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고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나라가 망하고 역사가 민멸되었지만 말은 남아 있어 그 말을 중국에서 그대로 가져다 저희 발음으로 지껄여 우리를 핍박한 역사인데도 말이다.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높고 귀한 데에는 반드시 우리 옛 조선이라는 조(朝)자를 먼저 내세웠던 말이 지금까지도 변치 않고 전해지고 있으니, 이제라도 이 조(朝)자로 된 단어를 만나면 한 번 더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앞에서 말 했듯이 황(皇), 제(帝), 군(君), 공(公), 백(伯) 등 부족장의 호칭이 우리로부터 비롯되었고, 우리만이 임검(壬儉)이라는 칭호를 썼으며, 활을 쏘아 제후를 뽑았다.


제후를 뽑아 작위(爵位)를 주고 봉지(封地)를 내린 사람은 바로 천자(天子)였다. 때문에 천자(天子)라는 호칭 또한 우리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후한시대 채옹(蔡邕)이 말하였다.


“천자(天子)라는 이름이 동이(東夷)로부터 비롯되었다. 그 풍속이 아비를 하늘이라 하고 어미를 땅이라 한다. 그러므로 천자(天子)라 하였다.”


우리가 천자의 호칭을 쓰던 옛 조선시대에는 지금의 중국 동북부와 태행산(太行山)을 경계로 한 동남부 전역이 다 동이민족(東夷民族)의 영토였다. 그리고 누천년동안 그 영토를 지키며 태평을 구가하였다. 반면, 당시 중국민족은 지금의 산서 , 섬서, 사천, 지역에 산재하여 살았던 약하고 미개한 나라에 불과했다. 그래서 중국의 군주는 경계인 태행산 마루에 크게 사당을 짓고 구려국(句麗國)이나 숙신국처럼 해마다 조선의 천자가 계시는 동쪽을 향해 예를 행하였다.


사당이라는 뜻을 나타내는 “묘(廟)”자는 바로 그렇게 제후국의 군주가 집(广;엄)을 짓고 조선(朝)을 향해 제사를 지냈다는 데서 유래된 것이다. 이렇듯 우리가 문자가 만들어진 유래를 추적하다 보면 새삼 옛 일을 다시 읽어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대개 이 글자를 한문(漢文)이라 하여 중국의 글자로만 알고서 애써 익히려 하지 않고 있다.


이는 바로 이 글자가 우리의 원시 조상들이 만든 글자를 근본으로 하고 있음을 알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 무지의 소치이다. 때문에 다들 우리의 역사는 제대로 살피지 않으면서 외국의 역사, 외국의 문물에만 심취해 있는 것이다.


朝廷.朝服.朝覲.朝聘;조선(朝鮮)에서 유래한 말들임.

朝貢;“조선에 바치는 공물”을 뜻하는 “조공”

廟;제후국의 군주가 집(广;엄)을 짓고 조선[朝]을 향해 제사를 지낸 데서 유래한 사당 “묘”자 임.


▼콩에는 우리 역사가 들어 있다.;설명은 생략하고 글자만 옮깁니다.

豐;豊;풍년을 뜻하는 이 글자는 콩이 깍지마다 터질 듯이 여문 모습을 그린 것이다.

登;“제단에 올린다.”는 뜻의 이 글자에 콩을 뜻하는 두(豆)자가 들어 있는 것은 옛적 우리 조상들이 콩을 천신께 바쳤었기 때문이다.

禮;귀한 콩을 가까운 이에게 주어 곡진한 뜻을 표시하였기에 예(禮)자에 보일 시(示)자와 콩 두(豆)자가 들어 있는 것이다.

體.頭;사람이 콩을 먹음으로써 뼈가 강건해지고 머리가 깨어나기 시작했기에 이 두 글자에 두(豆)자가 들어가게 되었다.


▼콩의 원산지는 우리 땅이다.

옛적 진(晉)나라 혜제(惠帝) 영년(永寧) 2년에 황문시랑(黃門侍郞) 유경선(劉景先)이 표장(表狀)을 올려 아뢰기를 “신이 태백산(太白山;지금의 백두산)에 숨어사는 백성을 만나 곡식을 먹지 않고도 굶주리지 않는 신선의 방도를 배웠는데 신의 70여식구가 다시는 다른 것을 먹지 않게 되었습니다. 만일 이 말이 사실이 아니라면 신의 일가족이 다 죽음을 달게 받겠습니다.”<본초(本草)>에 기록되기도 하였다.


仙;신선은 사람이 산과 함께 있음을 뜻하기에 우리 조상들은 인(人)자와 산(山)자를 합해 선(仙)자를 만들었다.


豆滿江;발해의 대일본 최대 수출품이 콩이었고, “두만강(豆滿江)”은 콩을 실은 배가 가득하다는 뜻에서 생겨난 이름이다.


▼콩에는 우리 문화가 들어 있다.

广+豆=부엌 두; 부엌을 뜻하는 두(广+豆)자에 콩 두(豆)자가 들어 있는 이유는 태초에 콩이 맨 처음 부엌으로 들어가 사람의 생명을 길러냈기 때문이다.

廚;돌집을 형상한 广(엄)자에 十자, 豆자, 그리고 법을 상징하는 寸자가 합쳐진 부엌 주(廚)

鼓;콩을 계량하는 큰 그릇인 “휘”를 만들어 쓴 데서 비롯된 북 고(鼓)

豆+斗;말 두(斗)자의 원자(原字). 콩을 계량한 데서 비롯된 글자이다..

斛;훗날 북 고(鼓)자 대신 쓰게 된 섬 곡(斛).

迎鼓; 영고(迎鼓)는 북을 두드리며 풍년 마지 굿을 한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콩과 건강

痘;마마(역질)을 뜻하는 “두”자는 병들어 기댈 녁. 상(疒)에 豆자가 들어가 것은, 이 병에 걸리면 피부에 콩알 같은 물집이 생기기 때문이다.


▼콩과 나라의 운명

太平;“태평”은 온 나라 사람들이 콩을 고루 다 먹고 살아갈 수 있다는 의미이다.

廟;사당을 뜻하는 “묘”자에 朝자가 들어간 것은 상고시대에 제후국들이 조선의 천자가 있는 곳을 향해 예를 드렸기 때문이다.

太祖.太子;“태묘”의 제사를 받을 임금의 아들을 “태자”라 한 것은 그가 훗날 콩을 천신(薦神)할 인물이기 때문이다.


▼콩은 코에서 나왔다.

살피건대 “콩”이라는 말은 사람의 코를 일컫는 “코”자의 발음과 잉태(孕胎)한다는 잉(孕)자의 종음(終音)을 합하여 만들어졌으리라. 왜 그러야 하면, 남녀가 교합하여 여인의 뱃속에 사람의 형체가 생길 때 맨 처음 코가 생김으로부터 잉태한다는 데서 콩이라는 말이 시작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각 성씨의 시조(始祖). 즉 맨 처음 할아버지를 다 비조(코 비;鼻祖)라 이르고 있는 것이다.


※현대 과학이 밝혀낸 바에 의하면 코끝에 철분, 아니 자철광 성분이 많이 축적 되어 있어 방향감각을 조절한다고 합니다.


▼팥과 녹두; 콩과 태극; 콩 노래; 콩 이야기 한 토막; 음악의 시원 콩; 콩(太)과 개(犬);등은 생략합니다.

▼신(神)의 이야기 생략.

獻;신에게 바친다는 뜻의 “헌”자에 개 견(犬)자가 들어 있는 것은 우리 조상들이 일 곱 별을 보좌하는 천보성(天輔星)과 천강성(天罡星)에 제사드릴 때 개를 잡아 올렸기 때문이다.


▼서양인과 개의 유사성;토종의 변신; 수입 콩, 과연 안전한 가.?;콩과 솟대; 소금은 왜 素金인가; 외제귀신, 유태귀신; 콩과 전통혼례; 자운영 꽃길; 등등 이야기는 생략합니다.

▼벼농사와 문자 그리고 쌀 이야기생략.

風;벌레[虫]가 바람[안 석 궤;几]를 타고 건너옴을 뜻하는 바람 “풍”자.

秋;벼[禾]와 익음[火]을 합쳐 만든 가을 “추”자.

利;벼(禾)를 낫으로 베는[刂] 것이 가장 이로운 것이라는 뜻의 이로울 “이”자.

種;벼[禾]가 잘 여물어 무거움[重]을 뜻하는 씨앗 “종”자.

沓;중국에는 우리처럼 논을 뜻하는 “답”자가 없다. (畓;답)

自.至;“자”하고 말을 시작하고 “지”로 끝내는 우리말의 습관에서 “자”와 “지”의 소리가 유래했다.

禾;벼를 형상한 “화”자는 초목에서 이삭이 나오면 더 이상 자라지 않는 이치를 나타낸 것이다.

米;쌀“미”자는 곡식이 다 여물어 알알이 벌어진 모습을 형상한 것이다.

氣;精;기운“기”자와 정신을 뜻하는 “정”자에 쌀 미(米)자가 들어 있는 것은 사람의 기운과 정신이 쌀을 먹음에 따라 변화하여 나오기 때문이다.

氏.斡.昢;씨(氏)자는 남자가 자신의 남근을 잡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고, 알(斡)자는 “둥글다.”“돌아오다”.의 뜻이며, 불(昢)자는 해가 돋는 형상과 양기가 방출되는 의미를 나타낸 것이다.


▼숟가락의 유래와 우리 문자에서 설명은 생략하고 글자만 소개합니다.

※태초 모계사회(母系社會) 때 우리의 원시 할머니가 한 분 있었는데, 이 할머니는 자손들을 잘 기르기 위해 편리한 기구를 만들어냈다. 이 할머니가 멀리는 하늘에 있는 북두칠성의 문양을 살피고 가까이는 당신의 몸 아래의 은밀한 곳을 살피시어 맨 처음으로 숟가락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숟가락의 모양이 북두칠성처럼 긴 손잡이가 있고 여자의 아랫동네 그것처럼 오목하게 생겼다는 것이다.


우리의 숟가락문화는 원대한 자취가 있다. 1949년 함경북도 나진시 초도 유적지에서 발굴된 신석기시대 유물 중에 뼈 숟가락이 있는 것만 보아도 가히 그 원대한 자취를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우리와 가장 가까운 이웃나라인 일본이나 중국도 젓가락문화이지 숟가락문화가 아니다. 서구에서는 17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숟가락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하생략]


匕;숟가락의 모양을 그린 갑골문자는 생략하고 숟가락 비(匕)자임.

妣;할머니를 뜻하는 “비”자는 여러 개의 숟가락을 지니고 있는 여자의 형상을 그린 것이다.

化;변화를 뜻하는 “화”자는 사람[人]이 숟가락으로 밥을 먹고 자란다는 형상을 그린 것이다.

食;사람인(人)자와 좋을 량(良)자가 합쳐진 밥“식”자는 밥을 숟가락으로 먹어야 한다는 의미를 적은 것이다.

匕下十;글자입력불가, 匕자의 아래에 十자가 붙는 자임.

여자의 아랫동네를 뜻하는 벌릴 “보”자는 거기에 씨(氏)가 들어가려면 벌어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牝.雌.辰;짐승의 암컷을 뜻하는 빈(牝)자, 새의 암컷을 상징하는 자(雌)자에도 숟가락 비(匕)자가 들어 있고, 조개가 여자의 음부와 흡사하기에 조개 신(辰)자에도 비(匕)자가 들어 있다.

長;어른“장”자는 늙은 터럭을 뜻하는 표(髟)자에서 사사로울 사(厶)자와 터럭삼(彡)자를 빼고 여자의 음부를 뜻하는 비(匕)자와 오른쪽을 뜻하는 불(乀)자를 덧붙인 것이다.

男;사내 “남”자는 남자가 밭(田)에서 힘(力)을 쓴다는 뜻이다.

宀;태초에 사람이 쑥대나 띠 풀로 이엉을 만들어 비바람을 막는 데서 비롯된 집 “면”자.

室.家.宇.宮;집을 뜻하는 글자에는 모두 면(宀)자가 들어 있다.

安;여자가 집안에 있어야 편안하다는 뜻의 “안”자.


▼모(母)자가 가장 먼저 만들어졌다.

먼 옛날 인간의 문명이 열리지 않았을 때엔 아마도 다들 그 어미만을 알고 그 아비는 누구인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기에 당시에는 다들 어머니의 성씨를 따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姓;혈통을 뜻하는 “성”자는 여자[女]가 낳았다는 뜻이다.

母;어머니의 가슴에 있는 두 젖을 그린 어미 “모”자.

史覽;“사람”은 “역사를 본다.”는 뜻이다.


▼문자는 생활의 반영이다.

家;집 아래 칸에 돼지(豕)를 기른다는 것을 형상한 집“가”자. 이러한 문화는 동이족 고유의 것이다.

父;양손에 도끼를 들고 집안을 지키는 모습을 형상한 아비 “부”자.


▼씨(氏)자의 유래.

전술한바와 같이 씨(氏)자의 형태는 남자가 그 손으로 자신의 남근(男根)을 잡고 있는 형상을 그린 것인데, 바로 그것은 온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가장 요긴한 것이다.

그러므로 씨(氏)라고 이르는 말이 남자의 미칭(美稱)으로 전해지기도 한 것이다. 그러한 예를 대략 증거 한다면 태고 성인들의 이름을 대정씨(大庭氏).치우씨(蚩尤氏).환인씨(桓因氏).유우씨(有虞氏) 등 다 씨(氏)로써 호칭했던 것이다.


儉;사람[亻]의 두 입[口]이 일치되어[人人] 천.지.인 삼합을 이루었음을 뜻하는 “검”자.

月;부우씨가 딸들의 이름을 태어난 달(月)에 따라 지었다 하여 계집아이를 “딸[月]”이라 부르게 되었다.


※단군의 둘째아들 부우씨(夫虞氏)는 희화국(羲和國)의 여자와 혼인하여 열 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다 하늘의 해를 뜻하는 글자로 지어 주었다. 즉 갑(甲), 을(乙), 병(丙), 정(丁), 무(戊), 기(己), 경(庚), 신(辛), 임(壬),계(癸)의 순으로 지어 준 것이다.


중국의 고대 3국이라는 하은주(夏殷周)중에 은(殷)나라의 설(卨=契)은 바로 이 십일(十日)의 아들이라고<산해경(山海經)>의 기록에는 전하고 있다. 하지만 설의 아비가 갑인지 을인지 병인지 그 이름은 밝혀져 있지 않다.


부우씨는 또 상희국(常羲國)의 여자를 취하여 열두 명의 딸을 낳았다는데 각각 그 낳은 달이 달랐으므로 이름은 다 달을 뜻하는 글자로서 지어 주었다. 즉 자(子), 축(丑), 인(寅), 묘(卯), 진(辰), 사(巳), 오(午), 미(未), 신(申), 유(酉), 술(戌), 해(亥)의 순으로 지어 준 것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민족.

우리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의 원시조상은 다 하늘에서 내려 온 것으로 되어 있다. “태초에 환웅천왕이 천제(天帝) 환인의 명을 받아 3,000의 무리를 거느리고 삼위태백(三危太白)데서부터 말이다. 환웅이라는 웅(雄)자는 바로 새의 수컷을 형상한 글자로서, 사람의 팔꿈치를 형상한 굉(宏)자와 새의 날개를 형상한 추(隹)자가 합쳐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새가 하늘로부터 날아와 당당히 어깨를 펴고 있는 모습을 그려놓은 글자이다.” 에 내리셨다.


※굉(宏)자에서 宀을 치워버린 자 임.팔뚝 굉자 입력불가.


雄;환웅의 웅(雄)자는 새[隹]가 어깨[팔꿈치;宏]를 펴고 있는 모습을 나타낸 글자이다.

昔.鳥;신라의 석(昔)탈해가 나온 궤 곁에 까치가 모였다가 날아갔다 하여 까치 작(鵲)자에서 새 조(鳥)자를 뺀 글자로 성씨를 삼게 되었다.

鵝;내[我]와 새(鳥)가 합쳐진 거위 “아”자.

滋; 불어날 “자”자.


▼혼인과 관련된 글자들.

昏;혼인할 혼(昏)자의 옛 글자. “씨(氏) 받는 날(日)”을 뜻한다.

婚;“계집[女]이 씨(氏) 받는 날(日)”을 뜻하는 “혼”자.

胥;“짝[疋;필]과 딸[月]이 합쳐진 사위 서(壻)자의 옛 글자.

㫆[小下乳]孋(며누리);“젖이 아직 다 크지 않은 소녀”를 뜻하는 며느리

査;사돈을 뜻하는“사”자는 木자와 且(또 차)자가 합쳐져 “나무(남의) 조지”를 가리키며, 木자를 十과 八로 파자하여 읽으면 “씹할 좆”이 된다.


▼소리와 문자

재론하거니와, 원래 자국의 글자라면 어느 글자이든지 다 단음(單音)으로 발음을 할 수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중국이나 일본 등이 글자를 쓰는 여러 나라 중에 단음(單音)으로 발음하는 나라는 하나도 없다. 오직 우리만이 어떠한 글자든지 다 단음으로 발음을 할 수가 있다.


예를 들면 “海”자를 중국에서는 “하이”라 발음하고 일본에서는 “우미”라 발음하는데 우리는 그저 한 소리로 “해”하는 것이다. 우린 이처럼 어떤 글자든 전부 한 소리로 발음되는 것이다.[이하생략]


일본이나 중국은 한자를 쓰고 있는 한 우리 글자를 빌려다 쓰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海;우리가 단음 “해”로 발음하는 이 글자를 중국인들은 복음 “하이”로, 일본인들 역시 복음“우미”로 발음한다.

合;우리는 “합”하면 입이 닫혀 하나가 되지만 중국인들은 “허”하고 입이 열려 버린다.

入;우리는 “입”하고 들어오는 소리로 발음하지만 중국인들은 나가는 소리인 “루”로 발음한다.

出入;우리가 “출입”이라고 읽으면 소리의 나가고 들어옴이 분명하지만 중국인들은 “츄루”하고 소리가 다 나가버린다.

臼;구멍을 형상한 절구“구”자, 양쪽으로 대음순, 소음순, 내음순이 다그려져 있다.

興;구멍[臼] 안에 남근(同=且)이 들어가면 “흥”하는 소리가 난다.

與;힘줄이 불끈 솟은 남자의 도끼(与)가 구멍[臼] 안에 들어가면 여자의 입이 “여”하고 벌어진다.

叟;남자 늙은이를 뜻하는 “수”자. 구멍[臼] 안에 단단하지 못한 남근이 들어가면 “수”하고 그냥 빠져나온다.

兒;사람은 여자의 구멍(臼)에서 막 나온 아이 때가 가장 순수하고 어질다. 그래서 구(臼)자에 어진 사람을 뜻하는 인(儿)자를 붙여서 아이 “아”자가 만들어졌다.


기타 이외도 많은 것을 새롭게 하는 문자 이야기가 있지만 이만 생략합니다.

그리고 진서(眞書)는 잘 사용하지 않으면 암기하기가 어려워 많이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으니 글자의 생성 원리를 알면 암기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5]박문기의 저서 “한자는 우리글이다” 전문을 소개 할 수는 없고 앞부분과 뒷부분만 간추려 소개 하오니 연구에 필요하신 분은 책을 구입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한자(漢字)가 아니라 진서(眞書)다.”


요즘 사람들이 다들 진서(眞書)를 한자(漢字)라 이르고 중국 한(漢)나라 때 만들어진 글자로만 알고 있는 것은 실로 무식하기 이를 데 없는 생각이다. 단적인 예로, 한나라 이전에 육국(六國)을 통일하고 만리장성을 쌓았던 진(秦)나라가 분서갱유(焚書坑儒)했다는 사실이 전해지고 있지 않는가? 즉 한나라 이전에도 문자가 있었다는 말이다.


뿐만 아니라 진나라 이전 주(周)나라 때도 문자가 있었다. 때문에 공자가 시(詩), 서(書), 예(禮), 악(樂)을 정리하고 <춘추(春秋)>를 기술 했던 것이다. 그러한 서적들이 누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고 앞으로도 유구히 전해질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주(周)나라 이전 은(殷)나라 때도 이미 문자가 있었다. 이른바 갑골문자(甲骨文字), 금정문(金鼎文), 죽서(竹書), 목간(木簡) 등이 있다.

그런데 이 은(殷)나라는 바로 단군의 증손 설(卨=契)이 세운 왕조였다. 지금 중국의 학자들도 그러한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사실이 그러하기 때문에 그 문자를 한(漢)나라 때 만들어진 글자라는 뜻으로 한자(漢字)니 한문(漢文)이니 하는 것은 도저히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이다.


굳이 나라 이름을 앞세워 이 문자의 이름을 일컫고자 한다면 마땅히 은문(殷文)이라 해야 옳지 않겠는가 말이다.


은(殷)나라는 630여 년 동안 중원을 통치했고 그 망할 무렵도 한나라보다 1,000년이나 먼저였으니 말이다.


대저 “한문(漢文)”이라는 말은 일본 사람들이 이 땅을 무단통치하면서 만들어낸 말이다. 그들은 또한 이 진서를 조선어한문이라 규정하고 1936년(소화12년) 9월 1일부터 전 학교에 조선어한문 폐지령을 내렸다. 당시 학무국장 고원(盬原)의 담화 내용 중에는 아래와 같은 말이 있다.


“이것은 현행규정에 국어한문(國語漢文)에 의하여 한문(漢文)을 교수하고 또 다시 조선어(朝鮮語)에 의하여 한문(漢文)을 교수해야 되기 때문에 한문(漢文)에 대하여는 같은 내용의 것을 두 가지로 교수하는 셈이 되어, 수업하는 점으로 보면 쓸데없는 시간을 쓰게 되고 생도 측으로 보면 이중의 부담을 면치 못하게 되므로 고등보통학교(高等普通學校)의 한문(漢文)은 이것을 국어한문(國語漢文)에 통일(統一)하기로 된 것이다. 이번에 조선어(朝鮮語)로 읽는 한문(漢文)을 폐지(廢止)함에 따라서 종래 이로써 쓰이던 시간은 이것을 다른 필요한 학과목으로 돌려서 생도의 학력을 일취월장(日就月將)케 하여 현하 실정에 적합하도록 향상시키고자 하는 바이다.”


이와 같이 조선어한문(朝鮮語漢文)을 폐지하는 이유를 밝히고서 학생들에게 소위 국어한문이라 하여 일본어식 한문만을 익히도록 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한국인의 성명도 창씨개명(創氏改名)이라 하여 일본식으로 고치도록 하였다.


당시 그러한 교육을 받았던 자들이 해방 후에 우리의 문교행정에 관여하고 이 땅의 학생들을 가르쳐 왔으니 우리 교육정책이 제대로 되었을 리 만무한 일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우리의 참글인 이 진서(眞書)를 한문 또는 한자라 이르고 있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이를 참글이라는 뜻에서 진서(眞書)라 일컬었지 한문이라 이르지 않았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한문이라 일컬었던 말이 간혹 있는 것은 한나라 선비들이 지은 문장을 일컬었음이지 결코 이 문자 자체를 한문이라 일컬었음이 아니었던 것이다.


요즘 젊은이들에게 일부 뜻있는 학자가 나서서 “이 진서는 실로 우리의 글이다.”한다면 다들 해괴하게 여기거나 미친 소리로 여길 것이 뻔 한 일이다. 이미 옛 중국에 또 일부 영리하다는 젊은이들은 문장의 어순이 우리 한글과는 영 다르다는 이유를 내세워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반박도 하겠지만, 이는 실로 음서(陰書)와 양서(陽書)의 성질을 전혀 구분할 줄 모르는 소치이다.


◆음서(陰書)와 양서(陽書)


무릇 양은 그 성질이 앞으로 곧게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요

음은 그 성질이 안으로 오므려 끌어들이고자하는 것이다. 때문에 양서의 문장은 거침이 없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요, 음서의 문장은 간혹 진퇴가 있어야만 그 뜻이 분명해지는 것이다. 또한 음서는 뜻을 나타내는 글자이기 때문에 진퇴가 있어야만 완곡한 뜻을 다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흔히들 “영어는 양서인데도 왜 어순에 진퇴가 있느냐”고 묻기도 하겠지만, 중국어나 영어의 그 말 자체가 음어(陰語)이기 때문에 비록 소리글자인 양서를 쓸지라도 그리 되어야만 하는 법이다. 때문에 우리의 이 참글 즉 음서가 중국의 문자가 되기도 한 것이다.


중국은 말과 문자가 엄연히 다르다. 중국말을 문자로 써 놓은 것을 백화문(白話文)이라 하는데, 이는 중국 사람들만이 통하는 것일 뿐 우리나라나 일본, 대만의 원주민들은 전혀 알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물건(物件). 걸인(乞人) 등의 말을 문자로 쓰면 글이 곧 말이고 말이 곧 글인데 중국인들은 물건을 뚱시(東西), 걸인을 휘쯔(花子) 등으로 표기하기 때문에 그 말을 배우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해 할 수가 없다.


대만의 원주민들은 본시 유구인(琉球人)으로서 우리와 어순이 똑같고 풍속이 비슷하여 노랫가락, 타령 등의 박자가 우리와 똑 같고, 근세에 이르기까지 어른이 상투를 틀고 아이들이 머리를 땋는 방식이 우리와 똑같았으며, 이 문자를 해독하는 방법까지도 우리와 똑같았으며, 이 문자를 해독하는 방법까지도 우리와 똑같아 중국민족과는 영 다른 민족이다. 그러나 중국에서 밀려난 국민당 정부가 그 땅을 강탈한지 50년이 지난 지금에는 그 원주민의 2세들이 거의 다 중국 사람으로 변해 가고 있는 실정이다. 즉 이들 역시 말과 글이 다른 문화에 동화되어 버린 것이다. 음어(陰語)의 민족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들에게는 우리와 같은 양서(陽書)도 없다. 때문에 앞으로 설사 독립을 한다고 해도 예전에 썼던 그 유규(琉球)의 말을 되찾고 유구식 음서를 되찾아 쓰기는 아마도 거의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이제 그들이 우리와 똑같이 썼던 음서의 예를 들고 그 말을 만일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양서의 순서대로 바꾸어 쓰게 된다면 과연 어떻게 풀이가 되는지 한번 써보기로 한다.


음서(陰書)=수심불능도(水深不能渡)

풀이= 물이 깊어 능히 건너지 못하겠다.

양서(陽書)=수심능도불(水深能渡不)

풀이=물이 깊어 능히 건넸다고 못했다.


이렇듯 부정사가 들어가는 음서의 문장법으로 써야 만이 말이 매끄럽고 뜻이 명확한 것이다. 양서의 문장법으로 바꾸어 놓으면 말도 되지 않고 뜻도 잘 통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기에 양서의 문장은 곧게 나아가고자 하는 성질이 있고 음서의 문장은 간혹 오므려 끌어들이고자 하는 성질이 있다는 것이다.


만일 부정사가 들어가지 않는 문장엔 양서의 문장법, 즉 우리의 어순대로 써도 말이 매끄럽고 뜻이 명확한 것이다. 앞에서 태초에 복희씨가 “하늘의 문양을 보시고 땅의 이치를 살피시어 가까이는 사람의 몸에서 취하고 멀리는 만물에서 취하여 처음으로 팔괘를 만들었다”는 말을 한바 있다.


그 팔괘의 처음이 음과 양인데, 음은 벌어지고 오므리는 이치가 있기 때문에 그 형상을 --와 같이 했고, 양은 전일(專一)하고 곧은 이치가 있기 때문에 그 형상을 −와 같이 한 것이다.


이러한 음양의 이치는 세상만물 어디에다 비추어도 맞지 않는 데가 없다. 그리고 이 음양의 이치는 항상 음이 먼저이고 양이 다음이다. 그러기 때문에 문자도 처음에 음서가 먼저 나오게 된 것이다.


공자는 이러한 음양의 이치를 <주역(周易)><계사(繫辭)>에 기록하면서 양서의 방식, 즉 우리말의 순서대로 아래와 같이 하였다.


“무릇 건(乾;−陽)은 정지(靜止)하면 제멋대로 있다가 동(動)하면 곧아진다. 그럼으로써 크게 만물을 낳는다. 무릇 곤(坤;--陰)은 정지하면 오므려져 있다가 동(動)하면 벌어진다. 그럼으로써 만물을 널리 생육한다.“


또 공자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나의 음(陰;--)과 하나의 양(陽;−)을 말하여 도(道)라 하는데, 그 도를 이어감이 착한 것이며 이루어 놓음이 성품이다.”


이는 곧 일음(一陰) 일양(一陽)의 도가 나아가가고 물러나며 열리고 닫히는 진퇴합벽(進退合闢)의 조화를 이어가야 선(善) 즉 좋은 것이요, 그 결정체를 이루어 놓음이 바로 성품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성(性)이란 바로 음양의 교합 할 때 나오는 물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남여의 아랫동네를 성기(性器)라 이르고 거기에 병이 있으면 성병(性病)이라 이르며 암수가 교접하는 짓을 성교(性交)라 이르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공자의 문장이 다 우리말의 순서로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공자의 문장을 만일 중국 사람들이 읽는다면 이해하기가 얼마나 어렵겠는가.?


지금 우리는 반만년의 역사와 문화를 자랑하고 있다. 말로는 그러하면서 반만년 동안 유구히 써 왔던 우리의 참글을 버리고자 한다. 그리고 다들 한글만이 오직 우리의 문화유산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훈민정음이 반포되기 이전의 역사와 문화는 과연 어느 나라의 것이란 말인가. 설사 이 문자가 중국의 문자라 할지라도 반만년을 써 왔기 때문에 감히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하물며 우리의 역사와 문화 속에서 비롯된 글자이고 우리의 발음만이 천지자연의 이치에 맞으며 우리만이 지금까지도 글자마다 다 단음으로 발음할 수 있는 문자임에랴.


이 음서(陰書) 자체가 진퇴의 묘리가 있는 문자임을 모르고서 문장의 어순만을 내세워 우리글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마치 바지 입은 여자를 남자로 여기고 치마 입은 남자를 여자로 여기는 것과 같은 일이다.


[6]이치에 맞지 않는 중국의 말과 글


근대 중국에서는 북경어를 표준어로 쓰고 있지만 외국으로부터 발달된 문명의 이기가 들어옴에 따라 무수한 만들이 새로이 만들어 지고 있다. 예를 들면 컴퓨터를 전자뇌(電子腦)라는 뜻으로 전뇌(電腦)라하고 엘리베이터를 전기 사다리라는 뜻으로 전제(電梯)라 하는 등등, 이는 다 그 기구의 성능에 딱 맞는 이름을 지어 부르는 것이다. 이는 실로 이 문자를 쓰는 어느 나라 사람이 보아도 다 감탄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이름들도 허다하다. 예를 들면 기차를 화차(火車)라 이르고 버스나 자동차를 기차(汽車)라 이르고 있는 따위이다. 본시 기차란 끓는 물의 기운으로 기관을 움직여 간다는 증기기관차라는 말을 줄여서 이름 지어진 것인데도 말이다.


중국에서는 그처럼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말도 만들어 쓰고 있는데, 정작 우리는 우리의 옛말이 찾아 들어왔음에도 무조건 오래어라 하여 소외시키는 경우가 간혹 있다.


예를 들면 왜정시대에 수레를 일컫는 “구루마”라는 말이 일본에서 들어왔는데, 요즘 사람들은 그 말의 의미를 한 번쯤 생각해 보지도 않고 그저 일본말이니까 입에 올려서는 안 된다고 한다. 그리고 그 말 대신에 순수 우리말인 달구지, 손수레 등으로 일컬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구루마”라는 말은 굴러간다, 구르다. 등의 우리의 옛말인데도 말이다.


지금 중국 산동지방의 방언에도 바퀴를 “구루(咕嚕)”라고 하는데, 중국의 언어학자들은 그 어원을 도저히 찾지 못하고 있다. 문자로나 성음으로나 전혀 해석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말로는 그것이 둥글기에 구른다는 뜻으로 당장 알아들을 수 있는데도 말이다.


이는 아마도 옛날 백제의 말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이리라.

옛날 백제가 전성했을 때에는 유구, 일본, 산동, 요서에 다 백제가 있었다고 하니 말이다. 지금 일본인의 대다수가 백제인의 후예라는 사실은 누구도 감히 부인하지 못하고 있다. 때문에 그들도 우리와 같은 쌀농사의 역사가 있는 것이다.


옛날 우리 동이족과 서쪽 한족(漢族)의 사는 방식에 서로 다른 점이 있었다면, 우리 동이족은 반드시 큰물이 있는 곳에 터를 잡아 살았고, 서쪽 한족(漢族)은 반드시 큰물을 피해 구릉지대에 터를 잡고 살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우리 동이족은 콩 농사와 벼농사를 지었고, 한족은 밀, 기장, 옥수수 등의 밭농사를 지었다는 점이다.


원래부터 한족들은 물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벼농사를 짓지 못했다. 그들은 물속에 들어가면 무슨 큰 병균이라도 달라붙는 줄로만 알았다. 대략 그러한 사실은 왜정시대에 중국을 돌아 다녔던 노인들이 지금도 심심찮게 말하고 있다.


지금 쌀이 많이 생산되는 중국의 남부는 본시 동이의 분포지역이었다고 현 중국의 역사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옛적에 공자는 산을 좋아했고 물을 좋아했다. 그래서 요산요수(樂山樂水)라는 말도 하였다. 그리고 바다를 본 사람에게 물을 말하기 어렵다.(觀於海者 難謂水)고 하였다. 즉 큰 바다를 본 사람에게 어디의 냇물이 많고 어디의 강물이 어떻고 하는 따위의 말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족들은 바다를 두려워했고 멀리했다. 뿐만 아니라 산동이나 절강 등지의 해변에 사는 동이인(東夷人)들은 사해(四海)라 이르고 멸시했다는 기록도 정하고 있다.

송대(宋代) 초기에 만들어진 <태평어람(太平御覽)>에 이러한 기록이 있다.


“사해(四海)란 캄캄하고 무식하여 가히 깨우쳐 가르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사해라고 말하는 것이다.“


또 손광(孫光)은 이렇게 주해(註解)하였다.


“바다를 뜻하는 해(海)라는 말은 어두운 그믐밤을 뜻하는 회(晦)와 같으니 예의에 어둡기 때문이다.“


대략 그러한 사실들로 미루어 보더라도 원시부터 우리 동이와 한족(漢族)은 말이 서로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자동차나 버스를 기차라 하듯이 말이다. 옛적에 주(周)나라가 은(殷)나라를 멸하고 누백년 동안 중원을 통치했지만 동쪽해변으로는 접근을 하지 못했다. 때문에 춘추전국시대까지지만 해도 동쪽 해변에 동이의 나라가 50여 국이 있었다.


공자도 동이의 군장 담자(郯子)를 찾아가서 관리를 다스리는 예법을 배우고 돌아와 사람들에게 이르셨다.


“내 들으니 천자가 관리 부리는 법을 잃었을 때 그 법이 변방의 이인(夷人)들에게 있다고 하더니 과연 그러하다.”


전국시대에 이르러 해변에 있던 동이의 나라들이 연(燕), 제(齊), 초(楚) 등의 강국에 다 잠식 되었는데, 이 중에서 초나라는 원래 동이족의 나라였다. 그렀기 때문에 당시 초나라의 말은 한족의 말이 아니었고 우리와 같은 입성(入聲) 발음이 있었다고 한다.


입성(入聲)발음이란 혀가 안으로 꼬부라지거나 위로 붙으면서 된소리가 나오는 것을 말하는데, 예를 들어 “약, 백, 직, 각, 질, 갈, 학, 급,”등의 발음을 말 하는 것이다. 지금도 이러한 발음이 표준어인 북경어에는 없지만 옛 초나라 땅이었던 동남지역의 민남어(閩南語)에는 그대로 남아 있다.


한 예로 말하자면 학생(學生)이라는 말을 표준어인 북경발음으로는 “쉐이싱”하는데 민남어는 우리와 똑같이 “학생”하고 발음하는 것이다. 평성(平聲) 발음의 예를 들어도 문(門)자를 북경의 표준 발음으로는 “뭔”하고 발음하는 것이다. 지금의 중국에서 쌀이 많이 생산되고 있는 동남부지방이 바로 옛 초나라 땅인 것이다.


본시 물을 싫어했던 한족들이 맨 처음에 조개껍질을 농기구로 쓰고 물건을 교역하는 화폐로 썼을 리는 만무한 일이다.


한족들이 해변에 진출한 역사는 대략 2천 수백 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비록 진출에는 성공했지만 그 해변의 동이인(東夷人)들이 쉽게 동화될 리는 없는 일이다. 또한 이치에 맞지도 않는 말을 쉽게 썼을리도 없는 일이다.


한족들의 단점을 훤히 알게 된 동이인(東夷人)들은 가끔 말썽을 부리고 바다로 도망치기도 했으리라. 그랬기에 송대에 이르기까지 사해(四海)란 캄캄하고 무식하여 가히 가르칠 수가 없다느니 어두운 그믐밤과 같이 예의에 어둡다느니 하는 말이 전해져 온 것이다. 하지만 이는 실로 먼 옛날 공자께서 하신 말씀과는 정반대의 말인 것이다.


공자는 당시 강성한 초나라가 미약한 주(周)왕실을 위협하고 모국인노(魯)나라를 핍박하자 제자 자공(子貢)으로 하여금 존주대의(尊周大義)를 내세워 그 위기를 해결토록 한 일이 있었다. 그리고 공자는 스스로 열국(列國)의 사실을 기록하는 <춘추>에 초나라의 왕호(王號)를 인정하지 않았다. 존화양이(尊華攘夷)라는 말은 바로 이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본시 동이의 후예인 대성(大聖)께서는 중국의 문란함을 한탄하시고 구이(九夷)의 땅에 가서 살고 싶다고 하시었다.


당시의 구이의 땅이란 동이의 수방(首邦)인 조선을 이르는 말이었다. 대성께서는 “뗏목이라도 타고 조선에 가고 싶다.(乘桴于海)”고 하시었고,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에는 스스로 당신이 은(殷)나라의 후예임을 말씀하기도 하였다.


공자의 제자 유약(有若)은 말하기를 “세상에 백성이 난 이래로 공자와 같은 이는 없었다.(自生民以來 末有孔子)” 고 하였다. 이는 지금까지도 정치(政治), 교육(敎育), 예술(藝術) 등에 누구도 감히 공자를 따르지 못했던 사실만으로도 정녕 지나친 말이 아닌 것이다.


공자는 특출한 예술가인 만큼 성운학(聲韻學)에 밝았다.

멀리서 소리만 듣고도 그 내력과 정황을 다 알았다는 사실이 전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했기에 능히 300여 편의 시(詩)를 음악에 맞추어 연주할 수 있도록 정리한 것이다. 그 시(詩)란 바로 각 나라에 수백 년 동안 전해 온 노래였던 것이다. 그러나 대성(大聖)께서 동이의 군장을 찾아가 예법을 배웠고 “동이의 수방(首邦)에 가서 살고 싶다. 뗏목이라도 타고 가고 싶다.” 했으며 세상을 마칠 때까지도 자신은 한족이 아니라 동이족인 은(殷)의 후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대저 중국의 음악이란 지금까지도 상음(商音)을 그 원류(原流)로 삼고 있는데, 상음은 다름이 아니라 아득한 먼 옛날 은(殷)나라 선공(先公)들이 정리한 음악을 두고서 이르는 것이다.

때문에 중국인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공자(孔子)와 같은 음악가가 될 수 없고, 아무리 애써도 우리의 명창처럼 소리를 낼 수 없는 법이다.


중국의 악기나 중국 사람들은 우리처럼 농음(弄音)을 낼 수 없다. 농음이란 소리 한마디에서도 고(高). 저(低). 완(完). 급(及)의 기교를 써서 멋들어지게 넘어가는 음율(音律)을 말함인데, 중국뿐만 아니라 아직까지 세계 어느 나라도 우리처럼 농음을 내는 악기나 민족이 없다.


공자는 스스로 말씀한 바와 같이 은(殷)나라의 후예인데다 상음(商音)에 정통했기 때문에 그렇게 음악을 집대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지금도 대성께서 정리한 아악(雅樂)을 연주할 수 있지만 중국 사람들은 어림도 없는 소리다.


아마도 그들은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이 많은데다 아직은 천지자연(天地自然)의 소리를 나타낼 만한 문자마저 없는 탓이 아니겠는가. 그러기에 최근 중국 정부에서 공묘(孔廟)의 제례행사(祭禮行祀)를 재현할 때 우리나라 학자들이 다 고증해 주었고 우리나라 악사들이 가서 연주해 주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그들의 옛적 궁중음악(宮中音樂)이라는 것이 우리의 민간음악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도 전하고 있다.


<삼국지><마한(馬韓)>편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언제나 모내기가 끝나는 5 월이면 신께 제사를 지내는데 이날은 여럿이 모여 노래하고 춤을 추며 날이 새도록 쉬지도 않고 술을 마신다. 그 춤은 수십 사람이 모두 일어나 같이 따라서 발을 구르고 머리를 숙였다가 올리는데 손과 발의 동작이 척척 들어맞아서 그 곡조와 박자가 마치 탁무(鐸舞)와도 같다. 10월에 농사를 끝내면 역시 그와 같이 즐겁게 논다.”


여기서 마한의 농민들이 추었다는 탁무란 바로 옛 성인이 지은 악곡의 하나이다. 그 의미인즉 목탁(木鐸)으로 법도를 제정하여 천하를 호령한다는 뜻에서 취해진 이름이다. 중국에서는 역대로 궁중에서만 이 탁무를 사용했던 것이다.


지금 저들이 자랑하는 경극(京劇)이라는 것은 대개 남자가 여자의 목소리를 흉내 내어 가창(歌唱)을 하고 문무희(文武戱)를 하는 것인데, 가히 볼만한 것이다. 하지만 천지자연(天地自然)의 소리를 묘사하는 데에는 우리의 판소리에 어림도 없고 소리의 공력도 영 형편없어 그저 혀끝에서 짜내는 소리일 뿐이다. 다만 그 동작이 볼만하다는 것이다.


중국인들의 발음이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것은 앞에서도 누차 말했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몇 자 더 말해 보기로 하겠다.


저들은 활이나 총 등을 쏜다는 사(射)자를 “써”로 발음하는데, 우리가 발음하는 “사”처럼 앞으로 나가는 소리가 아니라 오히려 들어오는 소리에 가깝다. 또한 우리는 사(射)자를 “석”으로도 발음하는데, 역시 앞으로 나가는 소리다. 그러나 저들은 아에 “석”이라는 발음조차 없다.


저들은 또 무엇을 들여놓는다는 뜻의 납(納)자를 “나”로 발음하는데, 이는 오히려 밖으로 나가는 소리이지 들어오는 소리가 아니다. 또한 저들은 도망가다, 망한다. 등으로 쓰이는 망(亡)자를 “왕”으로 발음하는데, 우리가 “망”하고 발음하는 것처럼 밖으로 나가는 소리가 아니라 오히려 들어오는 소리에 가깝다.


또 “내외(內外)” 할 때 내(內)자를 “네”로 발음하는데, 우리처럼 혀가 안으로 꼬부라들어가는 소리가 아니라 오히려 밖으로 나가는 소리에 가까운 발음이다. 그 글자가 안을 상징하고 속을 뜻하는 글자인데 말이다. 또 밖을 뜻하는 외(外)자는 “우아이”하고 복음으로 발음하는데, 우리의 단음절인 “외”라는 발음처럼 자연스럽지가 않다. 뿐만 아니라 밖을 뜻하는 발음이 되지도 않는 것이다.


[7]앞에서 공자께서 역사서인 춘추(春秋)에서 우리와 같은 동이족인 초나라의 왕호(王號)를 인정하지 안했다고 하나 존화양이(尊華攘夷)는 “화족(華族)인 한족을 존경하고 동이족은 밀어 낸다“는 말과 ”뗏목이라도 타고 조선에 가고 싶다.(乘桴于海)“ 또한 구이(九夷)의 땅의 수방(首邦)인 조선에 살고 싶다는 말과 비교되는 내용이나 춘추전국시대에 남아있는 초나라지역 사람은 있으나 왕실과 귀족은 우리 조선의 땅 한반도에 이미 이주하여 우리나라 전역에 중국대륙에 있던 지명을 정한 때가 아닌가 합니다.


예로 태백산(太白山),전주(全州),광주(廣州),계림(鷄林),등등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공자님께서는 이러한 음양의 이치를 <주역(周易)><계사전(繫辭傳)>에 기록하면서 양서의 방식, 즉 우리말의 순서대로 아래와 같이 하였다.


“무릇 건(乾;−陽)은 정지(靜止)하면 제멋대로 있다가 동(動)하면 곧아진다. 그럼으로써 크게 만물을 낳는다. 무릇 곤(坤;������陰)은 정지하면 오므려져 있다가 동(動)하면 벌어진다. 그럼으로써 만물을 널리 생육한다.“


또 공자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나의 음(陰;������)과 하나의 양(陽;−)을 말하여 도(道)라 하는데, 그 도를 이어감이 착한 것이며 이루어 놓음이 성품이다.”


이는 곧 일음(一陰) 일양(一陽)의 도가 나아가가고 물러나며 열리고 닫히는 진퇴합벽(進退合闢)의 조화를 이어가야 선(善) 즉 좋은 것이요, 그 결정체를 이루어 놓음이 바로 성품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성(性)이란 바로 음양의 교합 할 때 나오는 물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남여의 아랫동네를 성기(性器)라 이르고 거기에 병이 있으면 성병(性病)이라 이르며 암수가 교접하는 짓을 성교(性交)라 이르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공자의 문장이 다 우리말의 순서로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공자의 문장을 만일 중국 사람들이 읽는다면 이해하기가 얼마나 어렵겠는가.?


여기서 역경(易經)은 선천(先天) 복희(伏羲) 팔괘인 9의 수리배치(數理配置)를 말하고, 주역(周易)이라고 개명을 한 분이 공자님인지 주(周)나라 문왕(文王) 후천 팔괘를 주역이라 하는지 구분해야 합니다. 공자님께서 나이 50세 역경을 시작하여 고희 72세에 완전 터득하는데, 책 표지를 수십 번 바꾸었다는 말과 주역의 십익(十翼)을 썼다고 합니다.


※;翼(날개 익);①날개,㉮새의 날개, 깃.㉯곤충의 날개.②돕다.③이루다.④천거(薦擧)하다.⑤받들다.⑥받다.⑦삼가다.⑧법(法).⑨아름답다. 성(盛)함.⑩가슴지느러미.⑪솥귀.⑫처마.⑬배(舟).⑭좌우의 부대.⑮다음날.⑮-①빼앗다.-②몰다.-③방종한 모양.-④바른 모양.-⑤빠른 모양.-⑥사물의 형용.-⑦춘추시대 진(晋)의 옛 서울. 지금의 산서성(山西省) 익성(翼城)의 동남.


▼한웅천왕의 개천년도;BC;3,898년(BC;2333년 +1565년)

▼5세태우의(太虞儀)한웅;BC;3,512년- (+93년)=BC;3,419년

▼子 태호복희(太昊伏羲);BC;3,528년~BC;3,413년[115세]

▼염제신농;BC;3,218년~BC;3,078년[姜氏]

▼황제헌원;BC;2,692년~BC;2592년[姬氏][100세]

▼14세 자오지(慈烏支)한웅;BC;2706년~BC;2597년[109]-151세(세칭;치우[蚩尤]천황이라

함)

▼소호금천;BC;2,598년~BC;2,514년

▼전욱고양;BC;2,513년~BC;2,436년

▼제고고신;BC;2,435년~BC;2,365년

▼단군왕검;BC;2,333년~BC;2,241년[93년]-130세

▼요(堯);BC;2359년~BC;;2259년[100세]

▼순(舜);BC;2254년~BC;2207년[47세];異BC;2,233~BC;2,183년

▼(商;夏) 우(禹)-걸(桀);BC;~·~BC;1767년

▼은(殷) 탕(湯)-주(紂);BC;1767년~BC;1,111?

▼주(周) 문왕(文王)무왕(武王);BC;1,260?~BC;1,180?

▼공자;BC;551~BC;479년[73세]

▼석가모니.BC;624년~BC;544년[81세] 불기;2551년

▼전한(前漢).BC;221년~BC;207년(14년)

▼서한(西漢).BC;202년~AD;8년(300년)

▼후한(後漢).AD;8년~AD;23년(15년)

▼동한(東漢).AD;25년~AD;220년(195년)→漢나라 총 441년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태호복희씨는 BC;3,528 년에서 BC;3,413년으로 115년을 살다 가시고, 주나라 문왕(文王)은 BC;1,260년경에 태여 나서 BC;1,180 년경에 서거하셨다고 한다면 태호복희씨 보다 약 2,200년 후에 태여 났는데 그동안 2천년을 복희 팔괘는 낮잠만 자고 있었다는 것인지! 역경의 괘사(卦辭)와 효사(爻辭)도 없이 무엇으로 점을 쳤다는 것인지 되묻고 싶으며, 공자님께서 십익(十翼)은 단전(彖傳)의 상.하 상전(象傳)의 상,하 계사전(繫辭傳)의 상.하 문언전(文言傳). 설괘전(說卦傳).서괘전(序卦傳),잡괘전(雜卦傳)에 대한 십익(十翼)은 조금 도와서 첨가 했다고 봐야지 전면적으로 만들었다는 말은 아니라는 것은 모두 전(傳)자가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나라 문왕(文王)과 공자는 BC;551년 ~BC;479년으로 문왕(文王)은

BC;1260~BC;1180년이면 약 700년의 차이인데 시대의 흐름과 역사적인 사항을 그 시대에 맞는 차이점을 수정을 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공자님의 십익(十翼)은 주나라 문왕(文王)인 화족(華族)의 문장을 동이족(東夷족)의 문장으로 수정 했다고 볼 수도 없으니 우리의 한웅천왕과 고조선 역사의 흐름을 볼 때 수천 년을 내려오는 문자 중에 한웅천왕은 녹도문자(鹿圖文字) 또는 쐐기문자가 있었고 태호 복희씨의 8괘 문이 있었고, 치우천왕의 투전문자(鬪戰文字)가 있었고, 단군왕검의 전자(篆字)가 있었고, BC;1767년에서 약 650년이라는 은(殷)나라 왕조에서 갑골문자(甲骨文字)의 죽간본(竹竿本)이 있었으니 역경의 점괘를 풀이 할 수 있는 문자는 지속 돼 왔으며, 난데없이 2,200년 후에 문왕(文王)의 주역을 만들었다는 말이 되는지 생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역경(易經)은 전자(篆字)로 전수 되었는데 전수방법은 죽간본(竹竿本)인데 문왕(文王)의 주역(周易)은 죽간본(竹竿本)이 아닌 단전(彖傳)이라는 것은 전(篆)자의 죽(竹)을 제거한 단전(彖傳)이라는 것이 아닌가? 고려되는 사항이며, 우리는 역경(易經)을 주역(周易)이라 개명한다면 2,200여년 이라는 역사와 태호복희씨의 선천(先天) 8괘의 역경(易經)를 화족(華族)에게 팔아먹었다는 결과를 낳습니다.


주역(周易)은 문왕이 만든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후천(後天)8괘인데,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의 정승인 동이족 강태공(姜太公)은 낚시 바늘을 다시 뀌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한자(漢字)는 중국의 한나라 4개 왕조는 BC;221년~AD;220년까지 441년은 은(殷)나라의 650여 년의 역사와 갑골문자(甲骨文字)의 죽간본(竹竿本)과는 비교도 안 되는 역사인데, 개다리를 떼어다가 소다리에 붙지는 대대적인 외과수술과 같습니다.


그래서 일본의 그 당시 위정자들은 이미 들통 날 것을 알면서도 코끼리 전기 훈련시키는 북소리와 같은 행동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추종하는 우리 친일학자들의 정신교육은 코끼리 전기훈련보다 더욱 강하고 긴 세월이 필요하며, 모자라면 그의 후배와 후손에게까지 미치게 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중국의 사가(史家) 사마천의 부자(父子)익 이야기가 필요 할 것입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