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SINA-신중국

화교 (華僑)

한부울 2008. 11. 21. 23:49

화교 (華僑)


해외 거주 중국인.


대륙인이면서 1911년 이후 생긴 중국국적을 지닌 채 해외 여러 곳에 정착하여 경제활동을 하면서 본국과 문화적·사회적·법률적·정치적 등의 유기적 연관을 유지하는 중국인 또는 그 자손을 말한다. 여기에서의 중국인이란 중국적 문화나 경제활동 등에서 연관 있는 타이완[臺灣(대만)]과 중국 국적의 한민족계(漢民族系)를 가리킨다. 이들은 주이주지인 동남아시아 및 남아메리카대륙의 각국 국적법이 속지주의(屬地主義)를 채택하고 있는데도 혈통주의에 의해 취득한 중국국적을 포기하지 않아 이중국적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화예(華裔)·룩친(Lukchins)같이 중국인을 조상으로 하더라도 현지 국적을 취득하고 혼혈 동화하여 지연·혈연 의식이 약해지고, 혼혈은 하지 않았어도 바바차이니스 같이 현지인화된 사람이 많아 해외로 이주한 중국인이라는 상식적 해석만으로는 현재의 화교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다.


화교사회 역사


화교발생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9∼13세기 당(唐)나라 말기에서 송(宋)나라에 걸친 북방민족 침입으로 화난[華南(화남)] 방면으로 이동해 간 한민족의 해외유출이 그 초기적 존재이다. 이들은 송·원(元)시대 해외무역 발전과 원나라에서 명(明)나라 중기에 걸친 아시아원정으로 남방으로의 이주가 촉진되었으며, 16세기 명나라 말기 이후 제한적이었던 관허무역이 민간에게 개방되어 남양과의 교역이 활발해지자 동남아 일대로 이주가 확산되었다. 그 뒤 17세기에는 청(淸)나라의 압박으로 인한 명나라 관계자의 남천(南遷) 및 해외도항금지정책으로 인한 생활난과 무역 이윤을 위한 집단적 피난이 일어나 근대 이전 화교사회 형성의 절정기를 이루었다. 19세기에는 식민지개발에 필요한 노동력으로서 쿨리[苦力(고력)]무역에 의한 해외이주가 이루어졌다. 이는 청나라의 정치적 부패와 그에 따른 경제적 피폐, 영국을 비롯한 유럽 강국의 동양진출, 아편전쟁을 전후한 열강의 중국침략 등이 계기가 되었다. 당시의 서유럽 자본주의는 산업자본주의로 발전하기 위하여 식민지 분할과 독점 및 개발을 전개하였는데, 그때까지 식민지 밖에서 도입되는 노동자는 주로 아프리카대륙의 흑인노예였다. 그러나 아프리카대륙 식민지화와 노예해방령 실시로 값싼 노동력이 없어지기 시작하여 흑인노예의 대체노동력 수요가 발생하여, 영국의 식민지지배로 생겨난 남인도 유랑농민과 아편전쟁 등으로 형성된 중국의 유랑농민으로 충당되었다. 이들은 남아프리카·서인도제도(특히 쿠바)·미국·캐나다·페루·영국령 기아나(현재의 가이아나)·파나마·오스트레일리아·하와이·동남아시아 등에서 사탕수수밭 등의 농원(農園), 정글 개발, 금·주석 광산 채굴, 철도 부설 노동자로 사용되었다. 그 뒤 쿨리의 일부가 소상인(小商人)이 되어 식민자와 피식민자의 중간적 존재로 식민지 지배체제 속으로 흡수되면서 오늘날의 화교사회가 형성되었다.


화교사회의 고민과 모순


1909년 이후 중국은 혈통주의에 입각한 국적법을 제정하여 화교를 국적을 잃지 않은 사람으로 규정하고 그 보호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제2차세계대전 후 화교 거주국들이 식민지에서 독립하기 시작하고, 중국은 국공내전(國共內戰)을 거쳐 사회주의 중국이 되어 거주국과 중국과의 정치·경제체제와 양자를 둘러싼 국제관계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 당시 이중국적으로 생활하던 화교는 내외로부터 중간자적 생활방식에서 벗어날 것을 강력하게 강요받게 되었다. 또 변해버린 중국은 그 이데올로기나 정치체제로 보아 화교의 후예들이 정치적·법률적 귀속감을 지닐 수 없는 나라가 되어 미·소 냉전체제, 격화하는 동서대립, 미국의 중국봉쇄정책으로 이어지는 1970년대 초까지 그들은 스스로의 처신을 결정하지 못하는 딜레마에 빠졌다. 거주지 대부분이 독립국이 되었을 무렵 자신들의 실존과 관계되는 정치적·법률적 귀속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화교들은 거주국의 시민권·국적을 선택하여 스스로 화교에서 화인(華人)이 되었다. 즉 자기들은 임시로 살고 있는 떠돌이적 존재는 아니며, 중국국적을 가진 채 남의 나라에 벌이를 나온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화인이 거주하는 대부분의 나라들은 타이를 제외하면 구미열강의 식민지지배에서 독립한 지 얼마 안되는 신흥국가여서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정치면에서는 민주주의가 미숙하고, 나라에 따라 군사정권·독재정권이 계속되고 있었고 경제면에서는 식민지적 경제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국민경제 성숙도가 낮았다. 사회면에서는 통일언어 미확립과 문맹의 보편적 존재, 다원적인 인종·민족의 병존, 여러 가지 종교와 문화에 의한 다양한 가치가 저마다 방치되어 있었다. 더욱이 피식민자 대중은 식민주의 아래에서 굳어진 백인이 모든 면에서 우수하다는 유럽과 미국에 대한 열등감을 계속 지니고 있었다. 그 반동으로서 정치지도자와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특권계급에서는 계층간의 모순보다 인종·민족·종교상의 대립을 문제시하였다. 그 결과 사람들은 기본적 모순을 파악하지 못한 채 인종주의에 사로잡혀 광신적인 국수민족주의에 빠져 배타적 폭력행위까지도 영웅적 행동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러한 화교로부터 화인으로의 자기탈피 과정은 인도네시아의 9·30사건, 말레이시아의 5·13사건, 베트남의 보트피플사건 등 엄청난 유혈을 대가로 치렀으나 아직도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화교사회의 문제와 전망


오늘날 화인사회나 화교라 불리는 사람들이 놓인 상황은 각 거주국에 따라 다르며, 주체적 의식도 각각 달리하고 있다. 거주력(居住曆)이 여러 세대에 이르는 화예나, 거주지에서 태어나 화어(중국어)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대부분 중국인 의식이 희박하거나 없는 경우가 많고, 화교로서 거주국 국적을 취득한 화인은 정치적·법률적 귀속을 중국이 아닌 거주국에서 찾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스스로의 문화적·사회적 귀속을 뿌리와 관련지어 중화문명에서 찾으려는 객가(客家) 같은 사람들이 있다. 객가는 중국 방언의 하나인 객가어(客家語)를 쓰는 한민족의 한 갈래로 조상은 황허[黃河(황하)]유역의 중위안[中原(중원)]에 살고 있었다. 거듭되는 전란으로 자손들이 광둥[廣東(광동)]·쓰촨[四川(사천)]·푸젠[福建(복건)]·하서(河西)·타이완 등으로 이주하였고, 동남아시아·아메리카대륙·하와이 등지로 벌이를 나갔다가 화교화하였다. 쑨원[孫文(손문)]·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 싱가포르 전 총리 리콴유[李光耀(이광요)] 등이 객가 출신 대표적 인물이다. 그러나 타이·필리핀·인도네시아·베트남에서는 특이한 양상을 띠고 있다. 타이의 경우 과거 여러 세기에 걸친 혼혈과 화인의 정치적 참여에 관용을 보여 화인을 구별하기 어려워졌으며 필리핀의 경우도 혼혈이 꽤 진전되었다. 인도네시아와 베트남은 옛 식민지시대부터 이중국적문제가 일어나고 있었으며 그들의 구별을 정확하게 할 수 없다. 이러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오늘날의 동남아시아 정치지도자들은 화교를 국민통합의 이분자(異分子), 유통경제를 좌우하는 악덕상인으로서 민족경제·국민경제 형성의 주요한 저해자, 중화사상 체현자(體現者)로서 끝없이 중국에 충성을 다하려는 이중인격자 집단 등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사회적 소수파 시민으로서의 기본적 인권확립을 추구하는 소극적 행동조차 받아들여지지 않아 현지인과 화교의 심리적 거리를 더한층 멀어지게 하여 정치가·변호사·의사·교사·언론 분야에 많은 인재를 배출하고 있는 화인사회 내부에 화인의 진정한 자립을 위한 자조노력이 요구되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화교정책


중국 공산당이 본토의 정권을 잡은 뒤 1949∼1965년 제1단계에서는 화교들의 자본과 상공업 기술을 중화인민공화국내로 투자하여 사회주의 경제건설에 이바지하기를 희망하였다. 그러나 화교 대부분이 미국을 비롯한 자본주의 국가에 거주하여 이질적 체제인 사회주의 중화인민공화국을 기피해 이에 동조하는 화교가 적었고 오히려 대만으로 옮긴 국민당정권을 지지하였다. 그 뒤 1977년까지의 제2단계에서는 문화대혁명으로 귀국화교는 사회주의 건설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비판을 받게 되어 화교의 유입이 거의 중단되었다. 현재까지의 제3단계에서는 문화대혁명 기간의 화교차별정책을 시정하며 제1단계 정책으로 되돌아갔다. 이는 중국 공산당내에 큰 변혁이 일어난 데 그 원인이 있다. 즉 1977년 제3차 당중앙위원회총회에서 실권파인 덩샤오핑이 복권되고 1981년 덩샤오핑체제가 확립되어 4개의 현대화정책에 따라 화교자본과의 합작사업을 장려하며 광둥·푸젠 등지에 경제특구를 설치하는 등 화교자본 유치에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화교정책의 핵심은 화교들을 반제국·반식민지운동이나 소련·베트남에 대한 반패권통일전선의 주요 역량으로 삼는 것이므로, 이를 위하여 국무원에 교무판공실(僑務辨公室) 및 국교화교연합회·화교투자공사 등을 설치하였다. 교육면에서는 화교를 위하여 화교대학·샤먼[廈門(하문)]대학·화교보습(華僑補習)학교 등을 마련하여 화교의 순화에 힘쓰고 있다.


타이완의 화교정책


공산당정권이 해외화교들에 대한 제1차정책을 확립하고 그들의 재력을 끌어들여 통일전선을 구축하기 시작하자, 이를 저지하고 화교들과의 경제협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여러 정책이 추진되었다. 즉 화교증조복무실(華僑證照服務室)을 설치하여 화교들의 귀국·관광·시찰·방문 등의 출입국 절차를 간소화하였고, <화교투자장려조례>를 수정하여 화교자본의 본국 유치와 함께 화교기업인 초청, 화교종업원에 대한 직업교육 등을 강화하고 있다. 한편 해외화교에 대한 교육사업 지원을 위하여 해외화교학교에 대한 지원과 중국어 교육에 대한 지도, 교재 편찬·보급에 힘쓰며, 현지에서의 어문(語文)·요리·서예·회화·민속무용 등의 학습반 개설과 본국유학을 권장하여 고유문화 보급에 힘쓰고 있다.


오늘날의 화교


오늘날 전세계에 흩어져 사는 화교는 약 6000만 명에 이르며, 중국본토 12억 인구와 같은 언어·문화·정서를 공유하는 차이니스커넥션으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경제집단으로 조직화되었다. 타이베이[臺北(대북)]·홍콩·방콕·콸라룸푸르·싱가포르·시드니·밴쿠버·샌프란시스코·상파울루 등 각 도시거점들을 연결하는 그들의 도시권 비즈니스망은 일본 상사(商社)나 미국 다국적기업의 영업능력을 압도한다. 또한 자금동원능력도 막대하여 타이에서는 인구의 10%인 화교가 80% 넘는 자본을 보유하고, 인도네시아에서는 인구의 3%를 차지하는 중국계가 경제력의 75%를 장악하고 있으며, 필리핀은 14%인 중국계가 경제의 60%를 쥐고 있다. 경제뿐 아니라 한국과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국가의 정치권력도 대부분 중국계 화교에 넘어갔다. 아시아의 정치·경제권을 주도하는 이들의 목표는 미국과 일본, 유럽연합(EU)과 대등한 경제권을 만드는 것이다. 이는 개혁과 개방정책에 따라 가장 먼저 발전한 중국 광둥성과 홍콩이 주축이 되어, 홍콩 기업가들이 광둥성에 투자를 집중하면서 사무실은 홍콩에 두고 공장은 중국에서 가동시키는 형태로 상호보완협력체제가 이루어졌다. 여기에 홍콩과 타이베이를 기본점으로 하는 광둥성과 푸젠성을 연결하는 화남경제권이 형성되었다. 그 뒤 싱가포르·말레이시아·태국에 이어 필리핀·인도네시아까지 가세하여 동남아 상권이 중국과 연결되면서 동남아시아 화교 경제권으로 발전하였다. 이로써 정치적으로는 불가능한 환태평양 경제권이 같은 민족·언어의 화교들에 의해 하나로 연결되어 21세기는 중국인의 세기라는 관측이 일고 있다.


한국 화교사회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壬午軍亂) 때 한국에 파견된 광둥성 수사제독(水師提督) 우창칭[吳長慶(오장경)]의 군대를 따라 상인 40여 명이 입국하였는데 이들이 한국 화교의 시초이다. 청(淸)나라는 그 해 통상조약 상민수륙무역장정(商民水陸貿易章程)을 강요하여 화교유입의 길을 터놓았다. 그 뒤 1884년 인천(仁川), 1887년 부산(釜山), 1889년 원산(元山)에 화상조계지(華商祖界地)가 설치되고 화교수가 급증하였는데, 이들의 90% 정도가 산둥성 출신인 점이 한국 화교의 특징이다. 이는 1898년 의화단(義和團)의 북청사변(北淸事變)으로 산둥성 일대가 전란에 휘말리자 피란지로서 가까운 한국을 택하였기 때문이다.


1961년 외국인토지소유금지법으로 화교들의 부동산 소유를 제한했고 1963년 화폐개혁 등으로 화교들이 모은 돈을 강제로 끌어냈다. 1973년에는 양곡 절약을 구실로 중국음식점에서 쌀밥판매를 금지하면서 중국음식점에서는 자장면을 주메뉴로 할 수밖에 없었다. 현재는 이런 정책이 많이 완화되었지만, 이런 영향으로 인해 대한민국의 화교 사회는 유일하게 화교들이 정착하지 못한 나라가 한국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침체되어 왔으며, 오늘날에는 화교가 아닌 사람들이 중국음식점을 운영하는 경우가 많다.


1985년 법무부와 중국대사관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총 2만 4742명인데, 1973년 이후 대만의 경제성장에 따라 그곳으로 이주하는 화교수가 늘어나 감소 추세를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