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 같은 짓은 남해에 거북선을 찾겠다고 야단법석을 떠는 짓이나 안중근의사 묘소를 지금에 요동반도 旅大市[1981년 2월 대련(大連)개칭] 여순(旅順)에 찾으려고 하는 짓과 다를 바가 없다.
허탕 친 것이라고 아쉬워 할 것이 아니라 원래 초장지가 없었고 존재하지도 않은 곳을 지정하고 초장지라 알고 있었던 것이 문제이고 그곳에서 반도사학자들이 반도역사를 좀 더 확실하게 못을 박기 위해 증거물로 삼겠다고 고집하는 개념자체가 어리석은 짓이었음을 반성하는 개기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본다.
대륙이다.
있어야 할 곳도 대륙이고 존재하여야 할 곳도 대륙이기에 하는 말이다.
만약 그들 바람대로 초장지 형태로 나왔다면 그것이야 말로 해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대륙역사가 반도가 아님을 언제쯤 받아들일 것인지 답답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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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첫 무덤 찾기 허탕쳤다
[연합뉴스] 2008년 03월 16일(일) 오전 07:05
국정원 초장지 왕릉 아닌 다른 무덤 판명
잘 하면 조선 최초의 왕릉 발굴이 되리라 한껏 기대를 모았던 세종대왕 초장지(初葬地) 발굴은 허탕을 쳤다.
매장문화재 전문 조사기관인 중앙문화재연구원은 문화재청 의뢰로 국가정보원 부지 안에 위치한 '세종대왕 초장지'를 지난 1월10일부터 발굴 조사한 결과 지하식 회곽(灰槨)을 안치한 조선시대 무덤 1기를 확인했으나 이곳을 세종과 그 왕비인 소헌왕후를 처음에 합장한 초장지로 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16일 밝혔다.
조사 결과 회곽은 길이와 너비, 그리고 높이가 각각 340 × 230 × 230cm였으며, 천장 덮개돌은 두께 85cm였다. 벽면 두께는 36cm였으며 묘실은 크기가 305×162×145cm였다.
회곽은 전ㆍ후ㆍ좌ㆍ우, 그리고 상ㆍ하의 여섯 방향 중 오직 남쪽 벽만큼은 회반죽이 아니라 돌무지로 막음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나아가 이번 조사 결과 1973-74년 문화재관리국 의뢰로 세종대왕기념사업회가 이곳을 발굴하면서 남쪽 석축 벽을 허물어 낸 다음 그 내부까지 이미 다 발굴조사를 벌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따라서 여러 정황으로 보아 이미 그 당시에 세종을 장사지낸 첫 무덤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했을 것임에도, 왜 이곳을 초장지로 지목했는지 의문이 증폭되고 있다.
세종대왕기념사업회는 당시 발굴조사를 끝낸 다음 이곳에서 수습한 각종 석조물 중 27점을 기념사업회 부지로 이전해 지금까지 전시하고 있으며, 그 외 석호(石虎.돌호랑이) 2점은 세종을 이장한 여주 영릉에, 그리고 다른 석호 2점은 단국대박물관으로 옮겼다.
이번 조사에서는 무덤의 주인공이 상당한 신분의 소유자인 것이 틀림없지만 세종은 결코 아님이 확연히 밝혀졌다. 세종대왕 초장지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치장(治葬) 제도에 따라 조성된 마지막 능이자 조선 초기 왕릉을 대표하는 합장릉이다.
세종실록을 비롯해 이에 관련되는 각종 기록에 의하면, 초장지 영릉은 석실 2개로 조성했으며, 그 내부에는 사신도(四神圖)와 일월성신도(日月星辰圖)를 그려 넣는 한편, 봉분에는 십이지신상을 조각한 병풍석을 둘렀고, 그 외곽에는 외박석과 난간석을 시설했다. 이에 더해 문관 석인상과 무관 석인상을 각각 1쌍씩, 그리고 석양(石羊)ㆍ석호(石虎)ㆍ석마(石馬)를 각각 2쌍씩 제작해 배치했다. 하지만 이번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무덤은 이런 조건을 충족시켜 주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 무덤이 비록 규모가 작긴 하지만 왕릉 격식을 닮아 있어 왕족 또는 꽤 높은 신분의 소유자가 묻혔던 곳임을 추측할 수 있다고 조사단은 말했다.
세종과 소헌왕후는 지금의 국정원 경내 주변으로 추정되는 '영릉'이라는 곳에 묻혔다가 그 터가 좋지 않다 해서 예종 원년(1469) 3월에 현재의 경기 여주군 능서면 영릉으로 천장(遷葬.무덤을 옮기는 일)됐다.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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