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SINA-신중국

한(漢)은 1910년 신해혁명 이후 만들어진 新造語일 가능성?

한부울 2008. 11. 12. 22:50

중국 한족은 허구다 http://blog.daum.net/han0114/16115846 

한(漢)도 동이(東夷)이고 조선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48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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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은 1910년 신해혁명 이후 만들어진  新造語일 가능성


韓 과 漢

 

明文堂新玉篇(1952판)

韓  한 국명 萬所封 한나라 한(금-河南省中部, 及 山西省 澤路地方)朝鮮國名 三-나라이름 한 (今 京畿, 忠淸, 慶尙, 全羅等地)朝鮮改稱 大-한국,


及  급 미칠, 및

澤  택 沼 也 늪, 택又 못 택, 潤也  윤택할 택, 恩也 은혜, 택 洗(세) 씻을 택

也  야 입기, 어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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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  한 天河雲- 은하수  한 남자 賤 칭 놈, 한(賊-惡-常) 嶓冢水名-水

賊  적 도둑 해칠 역적 불충불효 자식

常  상 항상 떳떳 관명

嶓  파 梁州山名, 冢 산 이름

冢  총 클 총, 山頂 산이마, 天官宰 벼슬이름, 무덤

宰  재 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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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液 땀, 又진, 水長貌灡, 물질펀할, 突闕村長可-地名番

貌  모 모양

明文堂新玉篇(1952판)에 위와 같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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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한)


홍자옥편에는 나라이름 한, 그리고 만소봉(萬所封)이라 적고 있다. 직역하면 韓이 만군데나 봉했다는 뜻이다. 즉, 韓은 무척 광범위하였기 때문에 만소봉(萬所封)이라 간단히 적은게 아닌가 생각이 든다.


그리고 韓은 朝鮮의 朝字와 연관 지어 생각할 수도 있다.

朝는 해와 달이 비치는 곳을 상징한다.

韓은 天地四方에 해가 비추이고 가죽(韋)옷을 입은 사람이 서있는 형상이다.


고대(古代)에 가죽옷을 입은 사람은 군인 이었거나 사냥에 종사하는 부류의 민족이었을 것으로 생각해 본다면 한(韓, 翰, 旱, 邯) 등으로 된 글자는 유목민의 후예임을 뜻하는 글자로 만들어 졌을 것이다.


'한' 은 韓이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하나를 뜻하는 일(一)이 그 대표적 이라고 할 수 있다.


일(一)은 한 일, 하나 일, 고를 일, 같을 일, 시작 일, 정성 일, 첫째 일, 날 일, 온통 일, 온 일, 만일 일, 순전할 일, 오로지 일, 한번 일, 모두 일, 합할 일, 낱낱이 일, 어조사 일, 묶을 일, 부수이름 일, 혹 일, 하늘 일, 통일 일 등으로 많은 뜻을 가지고 있으며 한 일(一)자가 만들어진 시기는 기원전 8937년경 반고환인씨(盤古桓因氏) 때 이다. 그 당시 제석환인씨(帝釋桓因氏)와 천황씨(天皇氏 . BC.8479년), 지황씨(地皇氏 . BC.8364년), 그리고 인황씨(人皇氏 . BC.8247년) 등은 모두 한 일(一)자의 성(姓)을 가지고 있었다는 역사적인 기록이 제왕운기(帝王韻紀)에 기록되어있다. 그리고 한 일(一)자가 만들어진 동기는, 도(道)에서 하나가 생겨난 것이라고 道學 서적들과 육서심원(六書尋源) 등 여러 책에서 밝히고 있다.


또한,


소도경전(蘇塗經典) 본훈(本訓)〔蘇塗經典本訓第五, 三一神誥 第五章 人物篇〕인물편에 의하면


" 故地有三韓爲辰弁馬三京之韓, 韓卽皇也, 皇卽大也, 大卽一也 "

" 옛날 삼한이 있었는데, 진한(辰韓)·변한(弁韓)·마한(馬韓), 즉 삼경(三京)의 한이다.

한(韓)은 황(皇)인데, 황은 대(大)며, 대는 일(一)이다. "


라고 적고 있는데 좀 풀어서 설명하자면,


여기서 하나(一)란 일기(一氣)를 말하며, 일기(一氣)는 공(空)인 동시에 하늘을 가리킨다. 하늘은 곧 허(虛)한 것이며, 일신(一神)인 동시에 만유(萬有)의 본체 이다. 한(韓)은 황(皇)이라고 한 것은 구황(九皇)을 말하며 개벽이후 천황시대(天皇時代)를 말 한다. 구한(九韓)의 원조격 이다. 즉, 아홉한국은 구황(九皇)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나(一)은 天을 낳고, 天은 간(干)으로 발전하였고, 간(干)은 환(桓)으로 이어진 것이다.


환(桓)은 한(韓)으로 되었고, 한(韓)은 한(漢)과 한(汗)으로 변천하고 발전했다고 봐야한다. 고산족에서 유목생활로 발전해가면서 한(韓)자가 생기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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康熙字典解释

【戌集中】【韋字部】 韓; 康熙笔画:17; 页码:页1394第20(点击查看原图)

【唐韻】【集韻】胡安切【韻會】【正韻】河干切,�音寒

【說文】井垣也。从韋,取其帀也。幹聲。又國名。

【詩·大雅·韓奕箋】韓,姬姓之國也,後爲晉所滅,故大夫韓氏以爲邑名。

【左傳·桓三年】韓萬御戎。

【韻會】曲沃桓公之子萬,食邑于韓,後分晉爲國。

又三韓,國名,辰韓,弁韓,馬韓也。見【後漢·東夷傳】。 

又【廣韻】姓也。【韻會】秦滅韓,以國爲氏。 

又叶胡千切,音焉。【孫楚·白起贊】神機電斷,氣齊卒然,南折勁楚,走魏禽韓。 

【說文】本作�。【集韻】亦作榦幹。

考證:〔又三韓,國名,辰韓,示韓,馬韓也。見【後漢·光武紀】。〕 

謹按示韓當作弁韓,見後漢書東夷傳,光武紀本文無之。謹將示改爲弁。光武紀改東夷傳。 



康熙字典解释

【巳集上】【水字部】 漢; 康熙笔画:15; 页码:页646第17(点击查看原图)

〔古文〕㵄�【唐韻】呼旰切【集韻】虛旰切【韻會】【正韻】虛汗切,�音熯。水名。

【書·禹貢】嶓冢導漾,東流爲漢。又天河也。

【爾雅·釋天】箕斗之閒,漢津也。

【史記·天官書】漢者,亦金之散氣。

【揚泉·物理論】漢,水之精也。【詩·大雅】倬彼雲漢。 

又漢中,郡名,秦惠王置。【廣輿記】今爲漢中府。 

又漢口,地名。【廣輿記】漢陽府,本春秋鄖國地,漢屬江夏,唐曰沔州,亦曰漢陽。 

又州名,屬成都府。【韻會】漢屬廣漢郡,唐置州。 

又半漢,形容之辭。【張衡·南都賦】天馬半漢。 

又【輟耕錄】今人謂賤丈夫爲漢子。 

又高麗方言謂白曰漢。見【孫穆·雞林類事】。 

又【集韻】他干切,音攤。太歲在申曰汭漢。亦作涒灘。 

又【韻補】叶詩建切,音扇。【繁欽賦】長唐虎圈,迴望曼衍。槃旋岹嶢,上刺雲漢。



康熙字典解释

【巳集上】【水字部】 汗; 康熙笔画:7; 页码:页605第11(点击查看原图)

【廣韻】【集韻】【韻會】侯旰切【正韻】侯幹切,�音翰。【說文】人液也。

【關尹子·八籌篇】心悲物淚出,心愧物汗出。

【本草】李時珍曰:汗出於心,在內爲血,在外爲汗。故曰奪汗者無血,奪血者無汗。

【易·渙卦】渙汗其大號。【史記·蘇秦傳】揮汗成雨。【前漢·劉向傳】出令如出汗。汗,出而不反者也。出而反之,是反汗也。【文心雕龍】其出如綍,不反若汗。 

又泮汗,水無涯貌。【左思·吳都賦】潰渱泮汗。 

又澔汗,符采映耀貌。【司馬相如·上林賦】采色澔汗。 

又瀾汗,長貌。【木華·海賦】洪濤瀾汗。 

又汗汗,水廣大無際貌。【郭璞·江賦】汗汗沺沺。 

又質汗,藥名。 

又【唐韻】胡安切【集韻】【韻會】【正韻】河干切,�音寒。可汗,酋長之稱。讀若克韓。 又番汗,漢縣名。音盤寒,屬遼東郡。 

又【唐韻】古寒切【集韻】居寒切,�音干。餘汗,縣名。

【前漢·地理志】屬豫章郡。【應劭註】汗音干。 

又【韻補】叶彤甸切,音莧。【蘇轍·夏夜詩】老人氣如縷,枕簟亦流汗。褰帷竟不寐,夜氣淨如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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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漢)字는 근세기에 만든 新造語 일 가능성이 많다.

朝鮮國名인 한(韓)은 분명하게 전통적인 국명이 맞다.

그러나 華夏(客家), 즉 지나(支那)인을 스스로 漢족이라 하고 그들의 전통왕조라고 하는 漢나라에 한(漢)이란 글자가 옥편에는 국명(國名)이라고 기록하지 않고 오로지 물이름(水名)으로 나와 있다.

강희자전(康熙字典)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상하지 않는가?

같은 음운으로 쓰인 글자인데 옥편에 내용은 확연하게 다르다.

여기서 느낄 수 있는 것은 한(韓, 漢)이란 음운 진실성에서 의문이 남는다.

한쪽 한은 한반도 韓으로 굳어졌으며 또 다른 漢은 대륙중국으로 굳어져 있다.

다시 말해 옥편에 국명이라고 분명하게 나오는 韓은 한반도 韓으로 고정되어 축소된 것 같은 느낌이 들고 옥편에 국명이라고 표기조차 없는 漢은 대륙의 주인으로 인식되어 마치 대륙역사 전체를 가름하는 상징적 글자로 부각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무엇인가 잘못이 있을 수 있다는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대륙역사의 상징처럼 부각된 한(漢)이 대륙역사 전통국명으로서 최소한 옥편에 그러한 뜻풀이가 있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지금 지나(화하족, 객가인)는 25사만을 정사로 고집하고 漢字 역시 母胎처럼 여긴다.

이러함도 우리가 밝혀 볼 일이 분명하게 있는 것 같다.

1910년 이전은 지금 漢族(즉 화하, 객가인, 支那:가지가 많다란 뜻)이란 개념자체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 漢족을 대변하거나 정체성을 따질 역사도 보잘 것 없어 내세울 만한 것이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중조(中朝)라고 하는 것을 현대 사가들이 이것을 곧바로 중국이라 하였고 그 중국을 중화(中華)라는 표현하는 것을 지금 대륙을 차지하고 있는 화하, 객가인의 역사라고 몰 때려 부르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전혀 역사근거가 없는 이야기다.

중화라 했다 하지만 그 중화라고 하는 의미 역시 연합, 연대, 多民族을 아우르고자 하는 말이다.

25史는 1910년 이후 여기저기에서 발견된 역사서를 모아 편집한 대륙역사 모음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모아 편집하는 과정에서 추제, 주도세력, 정치적 세력들에 의하여 화하, 개가인적 이해관계가 생성되었을 것이며 그러한 생각이 깊숙하게 개입 되었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적어도 신뢰성문제에서 진정한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그들만의 사적으로 사용될 수밖에 없는 사서(私書)인 것이다.

때문에 그들 주장처럼 정사(正史)라고 받아들이기가 곤란하다는 것이다.

그들이 내세우는 漢(한족, 한나라)이란 칭호 역시 결코 전통왕조 칭호가 아니기에 전통성이나 정체성을 따질 수 없는 것이고 더군다나 1910년 이후에 새롭게 만든 25史에 기록 된 사실 말고는 다르게 확인 할 길조차 없는 글자이다.

25史에 기록된 사실과 같은 비중정도(대륙통일왕조)라고 한다면 분명히 중국글자 옥편(玉篇)이나 최소한 강희사전에 나라 즉 국명(國名)이라고 분명하게 명기되거나 표기되어야 마땅한 것이다.

그러나 그렇듯 오랜 기간 동안 기록을 이어온 옥편(玉篇), 강희자전(康熙字典)어디에도 한(漢)字에 국명이란 풀이가 없다는 사실이 漢字의 急造性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옥편에 한(漢)자의 풀이다.


漢  한 天河雲- 은하수  한 남자 賤 칭 놈, 한(賊-惡-常) 嶓冢水名-水

賊  적 도둑 해칠 역적 불충불효 자식

常  상 항상 떳떳 관명

嶓  파 梁州山名, 冢 산 이름

冢  총 클 총, 山頂 산이마, 天官宰 벼슬이름, 무덤


우리가 보편적으로 중국글자를 한문(漢文)이라고들 한다.

그래서 漢文玉篇, 漢文辭典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냥 중국글자(中字, 中文)라고 하는 것이 옳은 부름이다.

그리고 중국글자 사전을 漢文玉篇, 漢文辭典이라고 하지 않고 옥편(玉篇), 자서(字書), 자전(字典)이라고 해야 맞다.

옥편, 자서, 자전을 국어사전에 보면 한자(?)의 글자 하나하나에 대하여 그 소리를 달고 뜻을 풀어 일정한 차례로 모아 놓은 책이라고 적고 있다.

말 그대로 글자 역사 사전인 셈이다.

한(漢)?

백보양보하고 기존의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글자 자체로만 본다면 한(漢)字는 역사성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는 글자이고 오직 물이름이나 지명으로 사용되어 왔을 뿐 뜻의 한계가 있어 협소한 뜻글자이었음을 부정할 수가 없다.

때문에 한(漢)字는 그렇게 중하게 여기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25사이든 무엇이든 정사라고 하는 모든 역사서에서 기어코 (漢)字를 빌려 쓸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옥편은 서기 543년 양(梁)나라 남조(南朝) 고야왕(顧野王)이 엮었다는 글자사전이다.

대륙역사에 상징처럼 취급되고 있는 漢나라 즉 漢字가 옥편에서 조차 국명으로 표기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실로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이처럼 옥편이 주지하고 있는 사실은 옥편이 처음 엮어 나온 서기 543년 전이나 그 이후에도 漢이란 나라가 없었으며 漢字가 나라 국명으로 사용된 적이 없었다고 하는 사실을 확인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국어사전에 옥편은 글자 하나하나에 대하여 그 소리를 달고 뜻을 풀어 일정한 차례로 모아 놓은 책이라고 설명했듯이 모든 글자의 역사성을 나타낸 음운 기록인 것이다.  그 한문(중국글자)이 쓰이던 내용이나 사실을 시대에 따라 자세하게 명기하고 기술한 글자 역사서란 말이다.

그렇다면 지나 상징이 된 漢字도 분명하게 朝鮮國名인 한(韓)字처럼 국명이라고 명기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다.

그럼 왜 그들(支那:화하, 객가)은 그러한 한(漢)을 고유 국명처럼 사용한 것인가 의문이 든다.

그것은 바로 동이족 전통국명이 삼한(韓)과 같은 음운을 교묘하게 이용한 것이라고 보아야 하겠다.

극소수이지만 지금도 양심을 가진 대륙역사학자들은 대륙역사의 근본이 동이족으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

1910년에 손문에 의하여 태동한 중국동맹회도 대륙 민족연합회 성격이 더 많았다.

그렇지만 그 조직이 주도세력에 의하여 정치성을 띄게 되면서 민족주의 성향이 발했고 마침내 지나(支那:화하, 객가)인들의 민중운동인 것처럼 온통 채색되고 변질 된 것이다.

실제 신해혁명 민중운동 구성원은 다민족이었고 모든계층에서 나온 사회운동인 것이다.

민중운동으로 고조된 분위기가 중화민국운동을 낳았기 때문에 그들의 정체성을 새롭게 하지 않으면 주도권을 상실할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도 있었다고 이해된다.

그 때 지나(支那:화하, 객가)인은 25사(대륙역사모음집)을 만든 것이다.

그들은 동이족 전통국명인 한(韓)과 같은 음운을 가진 한(漢)자를 내세워 대륙역사 진실성에서 혼란을 주고 새로운 중화역사 상징으로 부각시키면서 교묘하게 정립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과정상 이런저런 이유가 있었겠지만 중요한 것은 한(韓)과 같은 han 음운을 빌려 썼다는 사실을 중요시 하지 않을 수 없다.

마냥 순진한 생각만 하고 있을 상황은 분명히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실제 이러하였다면 그것은 지나(화하, 객가)인들이 스스로 가지고 있던 역사혼란에서 열등의식을 가졌다고 볼 수 있으며 그것을 벗어나고자 하는 사상적 메카니즘에서 발효된 헤게모니라고 할 수밖에 없다.

한반도의 50배가 넘는 넓고 넓은 대륙이다.

우리는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은 대륙이란 지역적 개념이고 관점이다.

조선의 역사가 한반도라고 하는 곳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 한반도에 귀착되는 편협한 생각만을 가진다면 이와같은 모든 상황을 이해하기란 힘든다. 그 당시 상황을 이해한다면 대륙조선이란 나라는 대륙에서 곧 없어져야 할 구시대 세력일 뿐인 것이다.

결국 결과는 그렇게 되었지만 이러한 과정은 우리가 알지 못한다는 슬픔이 있다.

그렇다면 사라진 대륙조선의 공백을 매울 수밖에 없는데 그 당시를 지배하던 세력이 불행하게도 삼한세력이 아닌 중화사상을 내세운 바로 지나인(화하, 객가)들이었던 것이다.

중화라는 단어는 첫째로 민중에게 거부감을 덜어 주는 포괄적인 말이다.

중화라는 단어속에 들어 있는 개념만 따진다면 대륙역사를 자연스럽게 그 속에 편입, 또는 귀속시켜도 무방 할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이고 설령 지나(支那:화하, 객가족)인이 역사전통성이 빈약하여 특별하게 내세울 것이 없다 하더라도 새롭게 세우는 사상적인 문제에서 별 거부감을 주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있는 포괄적인 단어로 손색이 없었다고 보인다는 점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대륙을 차지한 정치인들은 중화를 잘 내세운다.

즉 대륙조선이 서세에 의하여 침몰되고 사라지면서 대륙에서 세력판도가 지나(支那:화하, 객가족)인 들에게 어부지리가 주어지면서 대륙역사 전체를 중화로 귀속 시킬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것이다.

삼한에 비해 열등하고 불리할 수밖에 없었던 대륙의 긴 역사를 한순간에 뒤 엎을 수 있는 것이고 혼란을 중화사상으로 대역전시킬 수 있는 천하에 좋은 기회가 그들에게 고스란히 굴러들어 온 형태가 되었는데 망설일 이유가 없는 것이다.

서세동점시기인 19세기 말엽 내지 20세기 초까지 서세들은 동양 즉 오리엔탈문명을 파괴하며 마구잡이식으로 식민지화하였고 불평등조약을 맺게 하면서 무차별적으로 약탈하고 침범하던 때에 타켓이 되고 희생물이 된 대륙조선의 역사는 형체도 없이 사라지는 비운을 맞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반면에 대륙에서 피지배민족으로 살아오던 지나(화하, 객가)인들은 약 2,000년 동안 과거 신라, 고려, 조선으로 이어지는 삼한의 통치를 마감할 수 있는 철호의 찬스로 여겼고 상황을 한순간 대역전 시킬 수 있는 기회로 포착하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19세기에 서세가 천하를 뒤 흔들며 서에서 동으로 세계 질서를 재편하고 지배하려던 시기였다면 왜구들 역시 미개한 처지에서 탈피하기 위하여 새로운 나라 새로운 역사를 만들려고 발버둥치던 시기였다. 동시에 지나(支那:화하, 객가족)인들 역시 대륙에서 명실공히 중국인으로서 행세 할 수 있는 천운을 맞이하는 복된 시대인 것이다.

그 때 한(漢)字가 급조된 시기라고 보면 틀림이 없을 것 같다.

한(漢)은 옥편에 기술되지도 않았음에도 전통국명으로 둔갑하였고 동시에 漢族이란 新造語를 파생하면서 자연스럽게 지나(화하, 객가)인들은 중국인이 되고 말았다.

그것이 우리가 밝혀야 하는 문제에 역사이고 밝혀야 할 정체성의 핵심인 것이다.

한(漢)은 진(秦)나라에 이어 중국 즉 대륙을 통일한 전통왕조(BC 202∼AD 220)이다.

물론 이 내용은 그들이 근세기에 편집한 25사에 나오는 기록이다.

그러나 한(漢)이 망한 300~400년이 지난 양(梁)나라의 고야왕(顧野王:519∼581)이 신하인 학자들을 시켜 편찬한 중국글자사전의 이름이 玉篇인데 그 옥편에 漢이란 글자가 國名으로 기재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현 대륙역사 전체를 부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때문에 한(漢)은 유방(劉邦)이 건국한 漢의 音字가 아니라고 해야 하며 대륙역사의 정통적 왕조의 칭호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유방의 한(han)나라 稱字에 논란이 있겠지만 옥편에 뜻풀이만을 가지고 생각한다면 오히려 한(漢)字보다는 한(韓)字일 가능성이 더 많을 것 같은 생각이다.

역사 근본을 비껴가기 위하여 사실을 은폐하고 사고에 혼란을 주기 위하여 음운을 교묘하게 이용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대륙조선의 실체를 알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 당시 대륙에 중국글자(한자)를 읽고 쓰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되었을까?

글자 뜻풀이 보다는 소리音만으로 이해하고 通했을 가능성이 훨씬 많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같은 音字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구분하기 곤란하게 하였다는 여지는 충분하며 그러한 혼란으로 역사적 진의를 흐리게 하거나 진실을 가리면서 새롭게 구성된 華夏(客家)族, 구심세력들을 결집하는데 이용하였을 것이고 또한 나름대로 전통성을 내세우는 정신적 훈육, 교육 도구로도 삼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한(漢)이란 글字는 더 이상 역사성을 부여하기가 힘든 글자이다.

동이족이라고 불리우는 삼한(韓)의 한(韓)을 한(漢)이라고 고쳐 쓰도록 하여 근본을 다르게 하였을 것이며 결국 대륙조선의 운명과 함께 한순간 음양이 뒤 바뀌어 오늘에 이르렀음을 의심치 않고 한(漢)에 대한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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